분류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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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기간 |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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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건(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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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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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책(陽翟), 신정(新鄭)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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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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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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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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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서 (대전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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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 |
화하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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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
포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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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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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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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가 |
1. 개요2. 역사3. 기타4. 한반도 관련설5. 역대군주
5.1. 삼진 분립 전 (진나라 신하)5.2. 삼진 분립 이후5.3. 부록: 초한쟁패기
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존재했던 전국칠웅 국가. 수도는 평양(平陽) · 의양(宜陽) · 양책(陽翟) · 신정(新鄭)이다.
2. 역사
본디 진나라(晉)의 일부였으나 진영공 때 사마인 한궐의 후손인 한씨가 조씨(趙氏), 위씨(魏氏) 등과 더불어 주(周) 왕실로부터 공인받으면서 진(晉)의 영토를 분할하여 세운다. 한씨 왕실은 일반적으로 진무공(晉武公)의 동생으로 알려진 한만(韓萬)을 시조로 하며, 한궐은 한만의 증손이다. 사실 진나라 공실이 만들어 낸 수많은 분가들 중에서 한씨 집안은 원래 가세가 막강한 집안은 아니었으나, 호씨(狐氏), 극씨(郤氏), 난씨(欒氏) 등 원래는 한씨보다 강한 집안이나 양설씨(羊舌氏), 기씨(祁氏) 등 한씨보다는 약한 집안이나 죄다 거의 다 귀족간의 권력 투쟁에서 몰락하는 와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마침내 본가를 몰아내기까지 이른 것이다.
기원전 375년, 정나라(鄭)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정나라의 서울인 신정(新鄭)으로 옮긴다. 기원전 355년 신불해를 기용하여 부국강병책을 취하는 등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나, 진(秦), 초(楚)의 압박으로 급격히 세력이 미약해진다. 가장 큰 분기점은 이궐의 대전투에서 위나라, 한나라 연합군 24만이 진나라 장수 백기에게 증발당한 일로, 위혜왕 이래로 악화일로를 걷던 위나라와 한나라의 국력을 일시에 소모시켜버린 대사건이었다. 이 이래로 위, 한이 의미 있을 만한 군사 행동을 벌인 기록은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멸망할 때까지 수세로 일관하게 된다.
이후로 한나라는 사실상 진나라의 속국 처지가 되었다. 이를 보여주는 예시로 소양왕이 사망했을 때 그 장례식에 초, 제, 조, 연, 위 5국은 모두 장군이나 승상 등의 대신을 조문을 위해 보냈지만 한나라만큼은 왕이 상복을 입고 직접 진나라로 와 조문하였다. 명목상으로는 동급이었던 왕의 체면이고 뭐고 없었던 것. 하지만 이런 노력도 헛수고가 되어 진시황의 즉위 이후 천하통일의 첫 제물이 되고야 말았다.
먼저 진나라의 국력 소모를 유도하기 위해 대규모 수거(水渠)공사를 진행하도록 꼬드기는 피진계(疲秦計, 진나라를 피로하게 하는 계책)를 구사했지만, 도중에 들통이 났는데 정작 간첩으로 진나라에 들어가서 공사를 책임졌던 정국(鄭國)은 "니들 엿먹일라고 시작한 건 맞지만 이게 제대로 되면 니들도 득 볼 거임"이라고 해서 목숨을 건졌고 공사도 중지되지 않았다. 결국 이 일로 어그로를 잔뜩 끌었음은 물론이요, 정국거(鄭國渠)라는 이름이 붙은 이 수로로 인해 진나라가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정국의 말대로 국력이 크게 늘어나는 결과만 났다. [5] 다시 진을 막기 위해 한비자를 사신으로 보내어 진나라를 설득하려 하나 이사의 계략으로 한비자는 진나라에서 죽었다. 결국 기원전 230년, 수도 신정이 진나라에게 함락되어 한나라는 전국칠웅 중에 첫 번째로 진나라에게 멸망당한다.
진말 초한쟁패기 때 다시 자립하였으나 한왕 성이 항우에게 거슬려 살해당하고 항우의 부하 정창이 대신하였으나 한왕 신이 한고조 유방에게 투신하여 정창을 내치고 전한의 제후국이 되었지만 삭번책에 거슬려 모반을 꾸미다가 흉노로 망명함에 따라 폐국되어 한나라는 멸망한다. 그래도 한왕 신의 자손 한퇴당과 한영 등이 다시 귀순하고 공을 세워 한(韓)왕가는 한(漢)시대에 명문 귀족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전국칠웅 직계 후손 중에서는 함양성 방화와 더불어 씨도 남지 않은 진나라 영씨 등 다들 배드엔딩으로 끝났는데 이쪽만 유일하게 압도적으로 결말이 좋은 편이었다.강한 자가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다.
3. 기타
위의 내용만 읽어보면 그저그런 약소국 같아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국칠웅과 비교했기 때문이다. 실제 한나라도 30만 규모의 대군과 최고 수준의 무기를 보유했고, 말 9천 필과 전차 5백 대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전국책(戰國策)》에서는 "천하의 강력한 궁과 노, 보검은 모두 한나라에서 나왔다"는 언급도 있다.[6]
하지만 인간의 체력과 전략전술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냉병기 전쟁의 특성상[7] 무기와 장비만으로는 국력의 부족,[8] 유능한 장수의 부재 등 치명적인 약점을 커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전국칠웅 중에 힘이 가장 약한 나라로서 별 활약도 없이 멸망했던 것이다.
초한지에 나오는 유방의 모사 장량과 한왕 한신(韓王 信)이 한나라 사람이다. 한왕 한신과 제왕 한신(韓信)을 혼동한 나머지 제왕 한신이 한나라 출신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제왕(회음후)한신은 이쪽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제왕(회음후)한신이 통일 직후 처음 받은 작위가 초왕(楚王)이었음을 떠올리면 간단히 알 수 있다.
4. 한반도 관련설
사이비 역사학에 낚인 사람들은 韓나라의 한자가 과거 삼한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에 이르는 한의 표기 한자로 쓰인다고 사실 삼한은 대륙에 있었던 것이다!!!라는 헛소리를 일삼곤 하지만 당연히 그런거 없다. 원래 고대 삼한 시대에 한과 비슷한 발음의 지명 또는 종족명이 있었고, 이를 글로 표기할 때 유사한 발음을 가진 중국의 韓이라는 한자를 가져다 쓴 것이다. 애초에 전국시대의 한나라는 한반도와도 많이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내륙국이었기 때문에 관계가 제대로 형성될 이유가 없었고, 이때에는 오히려 연나라(燕)[9], 제나라(齊)[10], 오나라(吳), 월나라(越)[11],초나라[12]가 당시 한반도와 관련이 좀 더 있었다.
환빠 소설가 김진명이 《시경(詩經)》에 기록된 한후(韓侯)가 한국의 한(韓)이라 주장하지만, 시경에 나온 한후는 주나라 선왕 때 분봉된 희성 제후로, 약 50여 년 정도 존속했다가 춘추시대 초기에 멸망한 국가로 대한민국과 큰 관련이 없지만, 시경 한혁편에 내용 중에 한후가 맥족(貊族)을 거느렸다는 언급되어서 이에 관련된 떡밥이 나오기도 한다.[13] 하지만 바로 이때 멸망한 한후의 영지를 차지한 것이 바로 이 항목의 한(韓)의 시조인 한만. 즉, 시경의 한후는 오히려 전국시대 한나라의 어원이다.
이 때문에 한국기원설을 위장한 낚시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순자(荀子)는 한국인이다. 순자는 한나라 사람이지만 중국어에서는 나라, 국을 모두 國로 표시하기 때문에 한나라도 한국으로 쓰인다.
다른 전국칠웅의 이름이 전국시대 후에도 계속 국명이나 지역명으로 남은 것과 달리, 이 한(韓)은 초한쟁패기에 부활했다 멸망한 이후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안습. 사실 이 한이란 글자를 우리나라를 뜻하는 한자로 차용한 한국 입장에서는 다행인 게 혼동이 없기 때문이다. 한이란 이름이 같아서 한국이랑 한나라로 따로 구별하고 있고 한문이 다른 한(漢)조차 한족과 한민족으로 서로 구분해야 하는 판인데 한자까지 같은 한나라 명칭이 쭉 이어졌다간 그야말로 한중의 역사가 혼돈의 카오스가 되었을 것이다.[14][15][16]
5. 역대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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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삼진 분립 전 (진나라 신하)
대수 |
시호 |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1 |
무자(武子) |
만(萬) |
? |
|
2 |
구백(賕伯) |
? |
? |
무자의 아들 |
3 |
정백(定伯) |
간(簡) |
? |
구백의 아들[17] |
4 |
- |
자여(子輿) |
? |
정백의 아들 |
5 |
헌자(獻子) |
궐(厥) |
? |
자여의 아들 |
6 |
선자(宣子) |
기(起) |
? |
헌자의 아들 |
7 |
정자(貞子) |
수(須) |
? |
선자의 아들 |
8 |
간자(簡子) |
불신(不信) |
? |
정자의 아들 |
9 |
장자(莊子) |
경(庚) |
? |
간자의 아들 |
10 |
강자(康子) |
호(虎) |
? ~ 기원전 425년 |
장자의 아들 |
11 |
무자(武子) |
계장(啓章) |
기원전 424년 ~ 기원전 409년 |
강자의 아들 |
5.2. 삼진 분립 이후
대수 |
시호 |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1 |
건(虔) |
기원전 408년 ~ 기원전 40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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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열후(烈侯) |
취(取) |
기원전 399년 ~ 기원전 387년 |
|
3 |
문후(文侯) |
유(猷) |
기원전 386년 ~ 기원전 377년 |
|
4 |
애후(哀侯) |
둔몽(屯蒙) |
기원전 376년 ~ 기원전 374년 |
|
5 |
약산(若山)[24] |
기원전 374년 ~ 기원전 36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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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무(武)[26] |
기원전 362년 ~ 기원전 33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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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강(康) |
기원전 332년 ~ 기원전 312년 |
기원전 323년, 왕호를 쓰기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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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창(倉) |
기원전 311년 ~ 기원전 29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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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희왕(釐王) |
구(咎) |
기원전 295년 ~ 기원전 27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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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연(然) |
기원전 272년 ~ 기원전 23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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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 |
안(安) |
기원전 238년 ~ 기원전 230년 |
진(秦)나라에 의해 멸국 |
5.3. 부록: 초한쟁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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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왕 성(成) 기원전 206년 - 한나라 왕족의 후예로 서초패왕 항우에게 살해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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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鄭昌) 기원전 206년 ~ 기원전 204년 - 항우의 부하. 항우에게 성 대신 왕으로 선택됨.
-
신(信) 기원전 204년 ~ 기원전 201년 - 양왕의 서손. 흉노에게 투항하면서 멸국.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gar. 현대 발음은 hán.[2] 춘추전국시대에는 성과 씨를 구별했는데 한나라 희성은 한씨(韓氏)다.[3] 기원전 323년부터.[4] 단,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은 세속적인 편이었다.[5] 이에 대한 해석으로 한나라는 관개가 중요하지 않은 조가 주요 작물이라서 수거가 건설되어도 진나라에 도움이 별로 없을 것이라 판단했으나, 진나라의 주요 작물인 밀은 관개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예상 못했던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6] 이 때문에 전국칠웅 최약체이면서도 약해질대로 약해진 주나라보다는 당연히 강했기에 주나라 앞에선 갑질하기도 했다.[7] 고대에서 장비 업그레이드는 고작 칼이 더 날카로워지거나 활의 사정거리가 더 멀어지는 수준이기에 한계가 있다.[8] 전쟁 지속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이다. 군대를 유지할 모든 것들이 다 돈이니 국력이 약하면 전쟁 그자체가 나라를 휘청이게 한다.[9] 고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고조선과의 충돌이 잦았으며 기원전 3세기 초엽 고조선으로부터 요동지역을 빼앗았다.[10] 고조선과 가까워서 교역이 잦았다.[11] 당시 한반도와 교류가 있었으며 오나라와 월나라가 멸망했을 때 상당수 유민이 한반도나 일본 열도로 넘어간 것으로 추측된다.[12] 전국시대에 초위왕이 월나라를 멸망시킨 이후부터.[13] 소설가 김진명이 이 주장을 하는 계기로 추정하기로는 이전에 사학자 이병도가 시경과 잠부론을 인용하여 기자조선 대신에 한씨조선(韓氏朝鮮)이 있었다는 한씨조선설을 주장하였는데, 이에 영향을 받아서 환빠사관과 결합하여 이 주장을 하는 것 같다.[14] 비슷한 사례로 베트남(월남)도 월나라(越)와 차용한 한자가 같은데, 이 경우도 전국시대 월나라와 현재 베트남 지역과는 거리가 멀다. 언어적으로 볼때 현 베트남처럼 고대 월나라도 동남아에서 쓰는 계통의 언어를 썼다는것이 통설이기는 하고 또한 인종적으로도 동남아에 가까웠다고 보는 편이니 아주 관련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해도 어느정도는 관련이 있다 수준에 그친다. 애초에 역사적으로 볼때 베트남과 저장성-푸젠성 일대는 한 무제 이전 시기에는 같은 나라로 엮인적 자체가 없다. 또한 월나라도 전국시대 이후로는 크게 흥한 왕조는 없어서 혼동의 여지는 없는 편이다.[15] 다만 이 경우는 2개 월(越)의 어원이 백월로 동일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2개의 한(韓)과 달리 서로 관련이 없지는 않다.[16] 다만 이렇게 중국에서 한(韓)이 자주 쓰였을 경우에는 한국 쪽에서 한(韓)이라는 국명을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한(韓)이라는 국명은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잊혀져 오다 대한제국 와서야 부활한거기 때문.[17] 진혜공이 진목공과 격돌할 때 형세가 불리하고 명분이 부족하여 싸우지 않을 것을 간하였으나 진혜공이 듣지 않고 격돌하여 마침내 패하여 사로잡힌 기록이 있다.[18] 사기 조세가의 기록된 이름.[19] 죽서기년과 세본(世本)에 기록된 시호.[20] 죽서기년과 세본(世本)에 기록된 이름.[21] 중국의 학자 곽말약(郭沫若)이 표강종(驫羌鐘)이라는 유물에서 한종철(韓宗徹)이라는 이름이 새겨졌는데, 한열후의 이름이라고 주장.[22] 죽서기년의 기록된 시호.[23] 사기 연표의 기록된 시호.[24] 죽서기년에 기록된 이름.[25] 여씨춘추와 한비자의 기록된 시호.[26] 죽서기년에 기록된 이름.[27] 죽서기년에는 정위후(鄭威侯), 정선왕(鄭宣王), 선왕(宣王)으로도 기록됨.[28] 사기에 기록된 시호.[29] 사기에 기록된 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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