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연 |
||
존속기간 |
서기전 11세기 ~ 서기전 222년 |
|
별칭 |
언(匽) |
|
위치 |
||
계(薊) |
||
희(姬) |
||
국가원수 |
||
주요 군주 |
||
전서 (대전체) |
||
종족 |
화하족 |
|
통화 |
||
성립 전 |
||
멸망 후 |
||
현재 국가 |
3. 조선과의 관계4. 연(희연)의 역대 군주5. 초한쟁패기의 연의 역대 군주
1. 개요
춘추전국시대의 국가 중 하나. 시조는 주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주)의 아우 소공 석(召公 奭)으로 무왕을 도와 은을 멸망시키고 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워 오늘날의 베이징과 허베이성, 랴오닝성 일대를 분봉받은 것이 연나라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언(匽)으로 불렸고, 연(燕)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진한시대 이후라고 한다. 황하 근처의 허난성 신향시 연진현(延津縣) 북동쪽이 세력의 출발 기반이었다. 수도는 현재의 북경 인근인 계(薊)였으며 분봉 당시의 작위는 후작이었다.[4]
그러나 소공 석 본인은 주공 단처럼 주나라 원로 관직이었던 소공이라 수도 호경(현재 장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멀리 있던 연나라를 직접 통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장자 극(克)을 계(지금의 북경 지역보다 서남쪽에 있던 방산 구.)에 보내 다스리게 했다고 전한다. 영토는 동쪽으로 조선, 서로는 조나라, 남으로는 제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연나라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얻은 영토라 한족들이 많이 이주했다. 그래서 그런지 고조선 관련 유물[5]들도 많이 출토된다.
2. 역사
2.1. 춘추시대
서주 시대에나 춘추시대에는 별 두각을 드러내진 않았다. 다른 나라처럼 뚜렷하게 침략받은 흔적이 장공(壯公) 때 말고는 거의 없고,[6] 정변도 거의 없었다. 《사기》, 《춘추》, 《전국책》에 공히 딱 한 번 임금이 쫓겨나서 제나라로 망명한 일이 기록된 것 말고는 없을 정도. 일설에는 오랑캐(동이, 대개 동호로 추측)가 있는 지역[7]과 가까워 잦은 침략으로 기록이 불에 탔거나 길이 막혀 중원으로 전해지지 못했다고도 한다. 혹은 진 시황에 의해서 육국(六國)의 역사서를 불에 태워 남겨지지 않았다고 한다. 연나라 역사는 역사서에 한두 줄 기록만 남았거나 아예 이름만 남은 듣보잡 소국도 아니고, 전국칠웅의 반열에 든 강대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연나라 초기를 다룬 기록이 지극히 무미건조하다. 소공 때부터 연왕 쾌(噲)[8] 때까지의 기록은 군주가 즉위하고 사망한 기록 외에는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을 정도다. 《사기》 <연소공세가>에는 소공 석이 분봉한 후에는 소공 석의 9대 손인 혜후(惠侯)의 기록으로 바로 넘어와 아예 중간에 실전된 군주들이 있을 정도다. 그나마 《연국사고》, 《죽서기년》, 발견된 금문 등을 통해 실전된 군주들의 이름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장공 때에는 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고 공작을 칭할 정도로 강성해졌다.
2.2. 전국시대
그 후에도 별 일 없이 지냈고 전국시대 초에는 다른 나라들을 따라 역왕(易王)이 왕을 칭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연왕 쾌 때에는 대혼란이 일어나 나라가 망할 뻔했다. 연왕 쾌가 신하인 자지(子之)에게 선양하면서 시작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자지의 패거리였던 대부 녹모수(鹿毛壽)가 늙은 연왕 쾌에게 신하에게 선양하는 것은 아름다운 덕을 보이는 것이라면서 자신에게 선양한다고 하면 자신은 사양하여 받지 않을 테니 두 명 모두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길이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를 그럴 듯하게 여긴 연왕 쾌가 자지에게 선양하자 그대로 나라를 냉큼 먹어치웠다는 것이다.
어쨌든 선양이 이루어진 후에 태자 평(平)과 장군 시피(市被)가 반란을 일으켜서 몇 달간 싸우며 나라가 막장으로 흘러갔고 결국 시피는 패하고 죽었다. 이 와중에 강대국인 제나라(濟) 민왕(閔王)의 군대가 쳐들어오면서 자지는 살해당했고 연왕 쾌는 자살했으며 연나라는 제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한나라(韓)로 도망가 있던 공자 직(職)[9]이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이 수습되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연나라의 명군 소양왕(昭襄王)이다. 연나라는 소양왕 때에 단숨에 전성기로 뛰어오르게 되었는데 소양왕은 국가를 부강하게 해줄 인재를 찾기 위해 대부 곽외(郭隗)에게 방법을 물었다.
곽외: "옛날에 어떤 왕이 천리마가 갖고 싶어서 신하에게 천금을 주며 천리마를 구해오라 하였습니다. 허나 그 신하는 뜬금없이 죽은 천리마의 뼈를 천금을 주고 사왔고, 화가 난 왕이 이유를 묻자 그 신하가 '천리마 뼈도 천금을 주고 살 정도면 진짜 천리마를 크게 쳐줄 것이라는 소문이 돌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신하의 말대로 1년도 되지 않아 진짜 천리마가 세 마리나 들어왔다 합니다."
소양왕: "갑자기 천리마는 왜 이야기 하는 것이오?"
곽외: "마찬가지로 별볼일 없는 인물을 후하게 대한다면 천리마 같은 인재가 모여들 거 아니겠습니까?"
소양왕: (아직도 감을 못 잡고) "그럼 그 말뼈다귀 같은 인간은 어디 있는 것이오?"
곽외: "바로 신이옵니다."
소양왕이 곽외를 중용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자신의 재능을 뽐내고 싶었던 인재들이 연으로 마구마구 몰려들었고,[10] 특히 악의(樂毅)를 기용해 제나라를 성 두 개[11]를 남겨 놓고 모두 함락시켜 사실상 5년여 동안 제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소왕의 어리석은 아들 혜왕이 제나라 전단의 계책에 걸려 눈 앞에서 멸망시킬 기회를 놓쳤다. 진개(秦開)[12]에게 명하여 고조선을 침범해 이천여 리의 영토를 획득했으며 동호 또한 굴복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소양왕의 아들인 혜왕(惠王)이 제나라 전단의 이간계로 악의를 내침으로 인해 국력이 점점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이때 성안군(成安君) 공손조(公孫操)가 쿠데타를 일으켜 혜왕을 살해했고, 연나라 왕족인 무성왕(武成王)을 옹립하였다.
그 외에도 혜왕은 괜히 옆나라 조나라(趙)와 티격태격하면서 국력을 많이 소모했다. 사소한 오해로 인해 벌어진 싸움에서 60만 대군을 소모해버렸고 수년 후 그 원수를 갚겠다고 극신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복수전을 펼쳤지만 방난에게 전멸당했다. 이게 전성기의 조나라라면 모를까 장평대전으로 40만의 장정을 잃고 골골거리던 시절의 조나라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후 군사적 방위력이 전무해지다시피 한 전국시대 말기에는 연왕 희(喜)의 태자 단(丹)이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형가(荊軻)를 보냈지만 결국 암살에 실패했고, 진나라에 태자 단의 머리를 보내줬지만 진나라의 침략으로 서기전 222년에 연왕 희를 마지막으로 나라의 문을 닫게 된다.
2.3. 초한쟁패기
진말 초한쟁패기에서 진승·오광의 난 때 진승의 부하 무신(武信)의 부하인 한광이 자립하여 연왕이 되어 희씨들에 갈음하여 연나라를 재건하였으나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에서 장도에게 밀려나고, 이후 장도는 한태조 유방의 제후국이 되었으나 반역을 일으켜 제거당했으며 유방의 친구빨로 노관이 임명되었다가 역시나 노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달아나는 바람에 연나라는 완전히 멸망한다.
이후 연이라는 이름은 북경 일대 하북성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는데 삼국지의 장비가 자신을 연인(燕人) 이라고 하는 것도 장비의 출신 지역이 연나라 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북경에 연경(燕京)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13]
3. 조선과의 관계
춘추전국시대 때 연은 발조선과 국경을 마주하며 충돌했다. 서기전 4세기~3세기 초 연 장수 진개가 이천 리 정도의 영토를 조선으로부터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고조선 중심지가 랴오닝 일대에서 청천강 - 대동강으로 이동했다는 주장이 있다.
연왕 희가 요동을 넘어 압록강까지 도주하려다 실패하고 이신에게 붙잡혔다는 기록이 있다. 후기 조선 수도가 평양이었기 때문에 연이 멸망하자 조선으로 도망치려던 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이외에도 노관이 달아날 때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해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는 일도 있었다. 연은 나라가 멸망하면서 많은 연나라 피난민들이 조선으로 이주했고, 이후 초한쟁패 시절을 거치면서 더더욱 많은 연나라 인구가 조선에 유입되었다.
4. 연(희연)의 역대 군주
|
|
-
초.강공(康公) 석(奭) - 서기전 1046년 ~ 서기전 996년
-
1.극(克) - 소 강공의 장남. 극, 지, 무, 헌, 화, 성 여섯 군주는 사기 연소공세가에는 기록이 안 되어 있는 군주로 팽화(彭華)의 연국사고(燕國史稿)와 금문에만 나오며 시호는 전해지지 않는다.
-
3.무(舞) - 지의 아들.
-
4.헌(憲) - 무의 아들.
-
5.화(和) - 헌의 아들.
-
6.(군주 불명)
-
7.성(聖) - 헌의 손자로 추정.
-
8.(군주 불명)
-
9.혜후(惠侯) - 서기전 864년 ~ 서기전 827년. 강공의 9세손. 성의 손자로 추정.
-
10.희후(僖侯) 장(莊) - 서기전 826년 ~ 서기전 791년. 혜후의 아들.
-
11.경후(頃侯) - 서기전 790년 ~ 서기전 767년. 이후의 아들.
-
12.애후(哀侯) - 서기전 766년 ~ 서기전 765년. 경후의 아들.
-
13.정후(鄭侯) 정(鄭) - 서기전 764년 ~ 서기전 729년. 애후의 아들.
-
14.목후(穆侯) - 서기전 728년 ~ 서기전 711년. 정후의 아들.
-
15.선후(宣侯) - 서기전 710년 ~ 서기전 698년. 목후의 아들.
-
16.환후(桓侯) - 서기전 697년 ~ 서기전 691년. 선후의 아들.
-
17.장공(莊公) - 서기전 690년 ~ 서기전 658년. 환후의 아들.
-
18.양공(襄公) - 서기전 657년 ~ 서기전 616년. 장공의 아들.
-
19.환공(桓公) - 서기전 617년 ~ 서기전 602년. 양공의 아들.
-
20.선공(宣公) - 서기전 601년 ~ 서기전 587년. 환공의 아들.
-
21.소공(昭公) - 서기전 586년 ~ 서기전 574년. 선공의 아들.
-
22.무공(武公) - 서기전 573년 ~ 서기전 555년. 소공의 동생.
-
23.문공(文公) - 서기전 554년 ~ 서기전 549년. 무공의 아들.
-
24.의공(懿公) - 서기전 548년 ~ 서기전 545년. 문공의 동생.
-
25.혜공(惠公)/간공(簡公) 관(款) - 서기전 544년 ~ 서기전 536년. 의공의 아들.
-
26.도공(悼公) - 서기전 535년 ~ 서기전 529년. 혜공의 동생.
-
27.공공(共公) - 서기전 528년 ~ 서기전 524년. 도공의 아들.
-
28.평공(平公) - 서기전 523년 ~ 서기전 505년. 공공의 동생.
-
29.간공(簡公) - 서기전 504년 ~ 서기전 493년. 공공의 아들.
-
30.헌공(獻公) - 서기전 492년 ~ 서기전 465년. 평공의 아들.
-
33.민공(閔公/湣公) - 서기전 438년 ~ 서기전 415년. 성공의 아들.
-
34.간공(簡公)/희공(僖公) 재(載) 혹은 관(款)- 서기전 414년 ~ 서기전 373년. 민공의 아들.
-
35.환공(桓公) - 서기전 372년 ~ 서기전 362년. 후간공의 아들.
-
36.문공(文公) - 서기전 361년 ~ 서기전 333년. 후환공의 아들.
-
37.역왕(易王) 퇴(脮) - 서기전 332년 ~ 서기전 321년. 후문공의 아들. 서기전 323년 칭왕.
-
38.쾌(噲) - 서기전 320년 ~ 서기전 318년. 역왕의 아들로 자지에게 선양함.
-
39.자지(子之) - 서기전 317년 ~ 서기전 314년. 연왕 쾌의 신하.
-
40.소왕(昭王)/소양왕(昭襄王) 직(職) - 서기전 313년 ~ 서기전 279년. 연왕 쾌의 아들.[16]
-
41.혜왕(惠王) 융인(戎人)[17] - 서기전 278년 ~ 서기전 271년. 소왕의 아들. 자연사 또는 성안군(成安君) 공손조(公孫操)에게 시해당함.[18]
-
42.무성왕(武成王) - 서기전 270년 ~ 서기전 258년. 사기에서는 혜왕과의 관계가 불분명한 군주지만[19] 혜왕의 아들[20]로 추정.
-
43.효왕(孝王) - 서기전 257년 ~ 서기전 255년. 무성왕의 아들.
-
44.희(喜) - 서기전 254년 ~ 서기전 222년. 효왕의 아들. 태자 단(丹)의 아버지. 진나라(秦)에 의해 멸국됨.
5. 초한쟁패기의 연의 역대 군주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ʔˁen-s/. 燕는 현대의 한자이며 진나라 시대의 전서 소전체 표기는 이렇다. 참조[2] 서기전 323년부터.[3] 단,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은 세속적인 편이었다.[4] 그런데 잠시 중간에 백작으로 강등되기도 했다.[5] 나중에 고조선을 형성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유물들이 나온다. [6] 연나라 장공 때 북쪽의 융적이 쳐들어와서 크게 박살나서 나라가 망할 뻔했다. 다행히 그 때 춘추 시대의 첫 번째 패자인 제환공의 도움으로 융적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았다. 인접한 데다 제나라가 워낙에 강성하다 보니 연나라는 좋은 쪽으로건 나쁜 쪽으로건 종종 제나라의 간섭을 받곤 했다.[7] 초기에는 연나라의 계 근처를 제외하면 하북성 전역이 이민족 세상이었고 바로 근처에 고죽국, 산융, 중산국 같은 이민족 국가나 집단도 많았다. [8] 왕이었으나 시호를 받지 못했다.[9] 태자 평의 이복 동생으로 연왕 쾌의 서자이다. 《사기》 <연소공세가>에는 태자 평으로 나오는데 《사기》 <조세가>에 '공자 직이 연왕이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죽서기년》에 '자지가 공자 평을 죽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결정적으로 옛 연나라 유물에 연왕의 이름을 직으로 새겨놓은 유물이 발굴되었다.[10] 여기서 유래된 사자성어가 매사마골, 선시어외.[11] 남아 있는 성이 즉묵과 거 땅밖에 없었다. 즉묵성은 나중에 제나라의 전단이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곳이고, 거성은 제민왕이 피난 중이던 곳이다.[12] 형가와 진시황을 암살하려던 진무양(秦舞陽)은 그의 손자다.[13] 조선 시대에는 청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사절단을 연행사(燕行使)라고 불렀는데, 연경으로 가는 사신이라는 뜻이다. 명나라 때는 천자를 뵈러 간다고 조천사(朝天使)라고 불렀는데, 오랑캐 취급하던 만주족인 청나라 황제를 천자로 인정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그렇다고 생까고 살자니 청나라가 무서워서 이름이라도 깎아내려 부른 것이다.[14] 한서에 기록된 이름.[15] 죽서기년에 기록된 이름.[16] 이복형으로는 자지에게 피살당한 태자 평이 있었다.[17] 연나라 유물에 명문(銘文)에는 융인(戎人)으로 기록.[18] 사기 연소공세가에서는 혜왕이 죽었다라고 자연사한 걸로 나오지만 조세가(趙世家)에서는 연나라 재상 성안군 공손조(방계 왕족으로 추정)가 그들의 왕을 시해했다고 나온다. 조세가가 맞다면 시기상 그 때 시해당한 왕이 혜왕인데 이들이 왜 혜왕을 죽였는지는 알 수 없다.[19] 사기에서는 아예 혜왕과 무성왕의 관계가 전혀 언급되지 않고 혜왕이 사망하자 무성왕이 뒤를 이었다고만 나온다.[20] 동진(東晉) 역사학가 서광(徐廣)의 설이다.
'춘추 전국 771-221BC'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펌> 초(楚) (BC 9c - BC 223) - 나무위키 (0) | 2020.10.23 |
---|---|
<펌>제 (齊)(BC 11c - BC 221) - 나무위키 (0) | 2020.10.23 |
<펌> 전국시대-나무위키 (0) | 2020.10.23 |
<펌>조(趙)(전국시대) (BC 403-BC 228)-나무위키 (0) | 2020.10.23 |
<펌>한(韓)(전국시대)(BC 403-BC 230)-나무위키 (0) | 2020.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