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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 11세기 ~ 서기전 2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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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문화3. 한국사와의 관련4. 춘추시대의 제나라(강제)
4.1. 유력 세경가
5. 전국시대의 제나라(전제)6. 초한쟁패기 시기의 제나라(후제)7. 역대 군주
7.1. 강제7.2. 전씨 종주(강씨 신하)7.3. 전제의 역대 군주7.4. 초한쟁패기 때 전제의 군주
1. 소개
중국의 서주 시대부터 존재하던 제후국으로, 지금의 산둥 반도 일대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춘추오패 국가 중 하나다. 크게 춘추 시대의 강제(姜齊)와 전국 시대의 전제(田齊)로 나뉜다. 작위는 후작이었다. 수도는 임치로, 현재의 산동성 쯔보 시이다.
2. 문화
부침이 있기는 했지만,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서 꾸준히 강국이었고 물산이 풍부했던 만큼 제나라는 문화와 사상 면에서 매우 발전했던 나라였다.
춘추 전국 시대가 숱한 인재들이 넘쳐났던 시대이지만 특히 유명한 병법가들을 많이 배출한 나라다. 일단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와 손빈이 제나라 출신이고, 사마법으로 알려진 사마양저도 제나라 사람이다. 전국 시대로 가면 충신의 대명사인 왕촉과 화우지계의 주인공인 전단이 있다.
이 나라에서 배출된 명 재상들이 두 명 있는데 바로 관중과 안영. 이런 의미에서 보면 과연 강태공의 정기가 서려 있는 나라답다고 볼 수 있겠다.
전국 시대에는 수도 임치에 직하 학당을 세워서 많은 사상가들을 모아 자유롭게 사상을 펼치도록 후원하였다. 그 가운데 맹자가 유명하며, 맹자와 논쟁을 나눴던 사상가들도 제나라에 근거를 두었다.
전반기인 강제 시대는 묘하게 저질스러운 변태 왕이 많았던 것이 특징으로 특히 근친상간과 불륜으로 얼룩진 막장 드라마 같은 에피소드가 많다. 관중과 제환공 시기에는 기강이 잡혔지만 관중 역시 900명의 기생을 모아 공창제를 실시했다. 이 때문에 태공망의 제나라는 주나라와 주나라의 전통을 이어 도덕과 예교주의가 발달한 노나라와는 달리 태공망의 기풍을 이어 실리주의적 성향이 강한 실질강건한 국가였으나, 도덕적으로는 부족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3. 한국사와의 관련
연나라와 함께 고조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나라인데 육지로 맞닿아 있지는 않지만 고조선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무역이 활발히 이루워졌고 덕택에 유물도 출토되곤 한다. 요동 반도와 산동 반도 간의 거리는 100km 밖에 안 되며, 그 100km 중에 60km 정도는 꽤 큰 섬, 작은 섬들이 20여 개 주욱 늘어져 있어서 더욱 가깝다. 참고로 부산 ~ 대마도 거리가 55km.
제나라가 발(發)[5]과 조선(朝鮮)에서 물품을 수입하는 기록이 있으나[6]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며, 무역이 이루어진 만큼 정치적인 관계도 가졌을 수도 있지만 분서갱유로 인한 제나라 사서의 소실로 인해서 어떻게 이루워져있는지에 대해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역시 의문점이 많다. 그래도 여러 사서들을 보면 진나라와 초한쟁패기 시절에 제나라 출신 주민들이 고조선으로 많이 이주하기는 한 듯하다.[7]
4. 춘추시대의 제나라(강제)
[8]
강제(姜齊)라고도 한다. 초기에는 태공망이 영구 땅에 봉해졌으며 나중에 이 영구는 임치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임치는 춘추전국시대 굴지의 대도시로[9] 중간에 단 두 번, 그것도 잠시를 제외하고 강제, 전제 시대까지 계속 수도로 사용된다. 그 두 번이란 다음과 같은데 처음에는 영구였다가 강제 호공 때 박고로 옮겼는데 호공을 죽인 헌공이 다시 영구로 옮겨 임치라는 이름으로 변경한다. 또 전국 시대 전제 민왕 때 민왕이 연나라와 그 연합군의 침입을 받자 임치를 버리고 거(莒)[10]로 잠시 수도를 옮긴 것을 제외한다. 지리적 위치도 무척이나 좋아 비옥한 황하의 하류 지역, 낭야 - 즉묵 등의 농업 지대, 태산이라는 천혜의 방어선 등 강국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초기에 잠시 혼란기가 있었는데 기(紀)나라[11] 제후가 주나라 이왕에게 제나라 애공이 반란을 꾸민다는 거짓 보고를 하자 이왕은 확인도 하지 않고 애공을 주나라로 끌고 갔다. 애공은 여러 제후들이 보는 앞에서 산 채로 끓는 가마솥에 넣어 죽음을 당하는 팽형을 선고받고 끔살당했다. 이왕은 애공의 이복 동생 호공을 세웠지만 호공은 애공의 동생 헌공에게 살해당하고 호공의 일족은 모두 국외로 추방된다. 헌공이 죽자 그의 아들 무공이 이었다가 무공이 죽자 그의 아들 여공이 뒤를 잇는다. 하지만 여공은 포악해서 민심을 잃었고 이 틈을 타 추방당했던 호공의 아들이 일족, 백성들과 함께 여공을 쳐서 그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본인도 전사하는 바람에 군주가 되지 못하고 백성들은 여공의 아들 문공을 세움으로써 혼란을 잠재운다.
그리고 성공, 장공을 지나 희공이 즉위하자 나라는 강대해졌지만 희공이 죽고 나서 나라는 다시 내분에 휩싸인다. 희공의 아들 양공은 그의 사촌 무지에게 죽고 다시 무지가 죽자 양공의 두 아우 규와 소백은 서로 싸우다가 소백의 승리로 끝나니 그가 유명한 환공이다. 그래서 환공 시대 때 재상 관중의 정치로 국력이 급상승해 주요 강국이 되며 명실상부 최초의 패자국이 된다.
하지만 관중, 포숙아 등의 명신들이 죽고 환공이 사망하자 그의 다섯 공자는 군위 쟁탈전이 벌어졌고 수초[12], 역아[13], 개방[14] 등의 간신들의 발호[15]로 정치가 불안정해져서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다. 일단 환공의 아들 무궤가 뒤를 이었다가 송(춘추전국시대)의 지원으로 효공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효공이 죽자 효공의 아들을 죽이고 효공의 아우 소공이 뒤를 이었다가 소공이 죽자 그의 아들 사를 죽이고 소공의 아우 의공[16]이 즉위했다. 의공은 포악한 정치를 하다가 병원과 염직에게 살해된다. 의공은 환공이 살아있을 때 땅 문제로 싸운 병촉과 다투었는데 당시 관중은 병촉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처럼 원한을 가지고 있던 의공은 병촉의 무덤을 파헤쳐 그의 발을 잘라버렸고 염직의 아내가 아름답다는 소문에 그의 아내를 뺏어버렸다. 병촉의 아들 병원과 염직은 의공의 측근이었는데 둘은 신지라는 연못에서 목욕을 하다가 아버지 다리 짤린 놈, 마누라 뺏긴 놈이라고 서로 떠들어대다가 뜻을 맞추고 자고 있던 의공을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대나무 숲에 감췄다. 이에 의공의 형 혜공[17]이 뒤를 이었는데 비록 환공 사후 내분으로 패자 자리는 잃었으나, 경제력과 국력이 상당한 나라였다.
그런데 혜공의 아들 경공(頃公)은 정치를 잘해서 나라가 안정되었으나, 경공의 아들 영공을 이어 영공의 아들 장공은 최저와 경봉에게 시해된다. 원래 장공을 세운 공로가 있던 최저는 경봉과 짜고 장공을 시해했는데 장공이 최저의 첩과 간통했기 때문이다. 최저는 그의 아우 저구를 군주로 세우니 그가 경공(景公)이다. 하지만 권력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경봉의 계략에 의해 최저와 그 아들들은 분란이 생겼고 결국 아들들은 모두 죽고 최저와 그의 첩은 자살한다. 하지만 경봉도 곧 그의 부하들에게 배신 당해 망명 다니다가 오나라로 망명갔는데 결국 거기서 초나라의 공격을 받아 사로잡히고 일족과 죽음을 당한다. 경봉의 살아남은 일족들은 여기저기 흩어졌고 나중에 시황제를 암살하려던 형가가 이 경봉의 후손이라고 한다.
경공(景公) 때가 환공 이후 가장 강성한 시기였다. 안영을 재상으로 중용해 제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런데 젊어서 즉위해 늙을 때까지 약 50여 년을 즉위한 경공은 노망 때문인지 장성한 아들 대신 어린 아들인 안유자 도를 세우는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전(田)씨가 세력이 강해져 실권을 쥐게 되는데 전씨의 시조는 진(陳)나라 여공의 아들 완이다. 완은 태어날 때 그의 후손이 다른 나라의 군주가 될 것이라고 예언을 받았다. 완은 여공이 죽고 내란을 피해 제나라 환공 때 망명했는데 대부 벼슬을 거절하고 대신 공정이 되어 전씨가 되었다. 수공품이 뛰어나고 자원이 많았던 제나라의 특성상 직위는 낮았지만 경제력을 쥐고 있던 공정은 굉장한 실용직이었다. 완의 후손들은 대대로 세습하며 도자기, 물고기, 나무, 쌀 등의 이권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점점 강성해졌다.
이후 완의 후손이자 전씨의 가주였던 전상(田常)[18]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며 신뢰를 얻었다. 백성들에게 쌀을 빌려줄 때는 제나라 공실보다 많이 빌려줬으나, 받을 때는 제나라 공실보다 적게 받았으며 물고기, 나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상은 이를 통해 민심을 얻었는데 경공의 어린 아들 안유자 도가 즉위하자 위기를 느껴 망명한 도의 형 양생을 꼬셨다. 전상은 도를 죽이고 양생을 옹립하니 그가 도공이다. 도공을 세운 전상은 권력이 막강해지는데 도공이 사이가 나쁜 포목(포숙아의 현손)에게 시해되자 그의 아들 임을 세우니 그가 간공이다. 간공은 감지, 전상을 좌상, 우상으로 삼았는데 사이가 나빴던 전상은 감지와 대립하다가 그를 죽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간공은 도망치다가 서주에서 생포되었고 피살되었다. 전상은 그의 아우 오를 세우니 그가 평공이다. 전상은 단독 재상이 되었는데 '덕을 베푸는 것은 군주(평공)께서 하시고 벌을 내리는 것은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실권을 완전히 손에 쥔 전상은 자신의 일족들을 제나라 주요 지역 봉읍에 봉했으며 제나라의 유력 씨족이었던 감씨, 고씨, 국씨, 안씨, 포씨 등을 모두 주살하거나 몰아내어 세력을 굳혔다. 평공이 죽자 그의 아들 적을 세우니 그가 선공인데 선공의 긴 51년 재위 기간 동안 전상 - 전반 - 전백 - 전화가 대를 이어 선공의 재상직을 세습했다. 선공이 죽자 전상의 고손자 전화는 선공의 아들 대를 옹립하니 그가 강공이다. 강공은 아예 자포자기했는지 술과 여자에만 빠져 살았다. 전화는 강공을 몰아내고 해상에 있던 섬을 식읍으로 주어 제사만 지내게 하고 주나라 위열왕에게 정식으로 제후로 인정받으니 그가 태공 전화이다. 7년 후 강공이 죽고 전씨로 나라가 넘어가게 된다.
4.1. 유력 세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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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崔)씨: 2대 임금 제 정공의 아들 계자의 자손. 최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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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高)씨: 10대 임금 제 문공의 아들 공자 고의 자손. 고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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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國)씨: 공족이나 조상은 불명이다. 국의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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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隰)씨: 12대 임금 제 장공의 아들 공자 요의 자손. 습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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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곽(東郭)씨: 16대 임금 제 환공의 아들 동곽대부의 자손. 동곽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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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慶)씨: 17대 임금 공자 무궤의 아들 경극의 자손. 경봉 등이 있다. 훗날 진 시황을 암살하려 한 형가도 이 집안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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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高)씨: 위의 고씨와는 다른 집안으로 22대 임금 제 혜공의 아들 공자 고의 자손. 고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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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欒)씨: 역시 22대 임금 제 혜공의 아들 공자 난의 자손. 난조 등이 있다. 고씨와 난씨는 모두 제 혜공의 자손이라 혜(惠)씨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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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管)씨: 삼감의 난의 주역 관숙이 시조라 하나 불확실하다. 관중의 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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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鮑)씨: 기(杞)나라 공족 출신으로, 포숙아의 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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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晏)씨: 안약의 집안. 안약의 아들 안영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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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田)·진(陳)씨: 진(陳)나라 공자 완의 자손. 강제를 뒤엎고 전제를 세운다.
5. 전국시대의 제나라(전제)
전제(田齊)라고도 한다. 왕성은 규(媯).
전국시대로 넘어오면서 태공 전화의 손자 위왕 때는 왕을 칭했다. 그의 아들 선왕 때는 손빈 등을 등용하여 점점 강성해졌고 민왕 때는 진(秦)나라에 다음가는 강대국이 되었다. 민왕은 한때 왕보다 높은 칭호인 제(帝)를 칭하는 등 위세를 부렸으나, 자주 괴롭히던 연나라를 포함한 각국의 연합군에게 털린 후에는 안습이 되었다. 이때 제나라의 위세가 막강했다. 연나라를 필두로 해서, 진나라,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가 연합한 합종군이다. 결국 제나라도 버티지 못해서, 수도 임치가 떨어지고 70여개 성이 6개월 만에 모두 넘어가 결국 남은 성이 거, 즉묵 두 개 -사료에 따라서는 세 개-밖에 남지 않았다. 민왕은 임치에서 탈출한 후 추(鄒), 위(衛) 등 여러 약소국들을 전전했는데, 그 꼴에도 자기가 왕이라면서 거드름을 피우다가 모두 거절당하거나 쫒겨났다.
결국 민왕은 남아 있던 성 두 개 중 하나였던 거성으로 달아났는데 초나라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초나라 고열왕은 장수 요치(淖齒)에게 군대를 주어 구원을 하게 했는데 상황에 따라 잘 대처하라고 했다. 요치의 초나라 군대 덕분에 간신히 거성의 함락은 막았지만 제나라 민왕은 초대형 악수를 두는데 요치를 재상으로 봉하고 모든 권력을 넘겼다. 그리고 실권을 장악한 요치는 곧바로 민왕을 죽여버린다.(출처: 사마천, 《사기》 <전경중완세가>) 이 일을 두고 범수 열전에서 범수는 요치가 민왕의 힘줄을 뽑은 후 그 힘줄로 대들보에 목메달아 죽여버렸다고 말했는데, 다만 제나라 세가나 당시 인물 기록에는 그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저 소문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최악의 상황이었던 제나라였지만 민왕의 비참한 죽음과 멸망 직전의 나라를 보고 분노한 백성들의 저항으로 요치는 죽음을 당하고 초나라 군대를 쫒아낸 뒤(출처: 《자치통감》 <주기> 4권)[19] 거성의 백성들은 태사(太史) 교(嬓)의 집에 정원사로 위장한 채 숨어 있던 민왕의 세자 법장을 찾아 내 즉위시키니 그가 양왕이다. 한편 또 다른 성이었던 즉묵에서는 왕족 전단이 나서서 이간책을 써서 악의를 몰아내고 소 꼬리에 불을 붙여 돌진시키는 화우지계를 써서 악의 대신 연나라 대장으로 있던 기겁을 죽이고 연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이에 연나라에 점령당한 제나라 백성들은 들고 일어났고 연나라 군대는 전단과 제나라 군대에 추격당해 국경 밖으로 쫒겨나고 제나라는 70여 성을 모두 수복했다. 하지만 제나라는 국력을 너무 소모해 예전의 영광은 다시 찾지 못하였고 양왕의 아들대였던 제왕 건 시대에 결국 진(秦)에 의해 기원전 221년 멸망한다.
제나라의 멸망은 연나라 침공 때보다 더 안습했다. 관동 육국 중 나머지 국가들은 모두 멸망한 상태였는데, 그나마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제나라는 싸움 한 번 안 하고 나라를 들어 바친다. 이는 이사 등이 제나라 왕 건과 그의 처남 후승에게 이간질 + 현질한 결과였다. 물론 후승은 제나라 멸망 후 곧 바로 처형된다. 좋은 토사구팽의 예.
이 어리석고 마지막이었던 제왕 건은 항복하면 500리의 땅을 주고 조상 제사라도 시켜준다고 혹해서 항복했으나, 결국 속임수였고 진시황에 의해 북쪽 국경 부근의 산골 마을 공현에 있던 조그마한 집으로 유배당했는데 문제는 공현은 땅이 척박하여 식량이 부족하였고 같이 끌려온 수백 명의 제나라 왕족들은 굶어죽었다. 왕족 아이들은 밥을 달라며 울고 아들은 행방불명되자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병을 얻고 비참하게 굶어죽었다.
고우영 십팔사략에는 "강태공의 후손이 굶어죽다니"라는 묘사를 했는데, 설명했다시피 제는 도중에 역성혁명이 일어났으므로 제의 마지막 왕은 강태공의 후손은 아니다.
6. 초한쟁패기 시기의 제나라(후제)
초한쟁패기 시대에 잠시 적현(狄縣) 출신인 옛 제나라 왕족의 후예 전담(田儋)을 대표로 전(田)씨 일족이 부활했다. 역사에서 후제(後齊)라 불린다. 전담은 제나라 동쪽 땅을 평정했으나, 진나라 장군 장한에게 대패하고 임제에서 전사했다. 전담의 사촌동생 전영(田榮)은 잔병을 수습해 동아로 도주했고 제나라 사람들은 제나라 마지막 왕 전건(田建)의 동생 전가(田假)를 제나라 왕, 전각(田角)을 재상, 전각의 동생 전간(田間)을 장군으로 삼았다. 한편 전영은 제나라 사람들이 전가를 제나라 왕으로 삼았다는 것에 분노하여 전가를 공격해 전가는 초나라, 전각과 전간은 조나라로 도주했다. 전영은 전담의 아들 전불(田市)을 제나라 왕으로 삼고 그를 보좌했으며 전영의 동생 전횡(田橫)은 장군이 되었다.
전영과 서로 묵힌 감정이 상당했던 항우는[20] 진나라(秦)를 멸망시킨 후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과정에서 당시 실권자였던 전영을 무시하고 제나라를 세개로 쪼갰다. 전불(田市)을 동쪽으로 옮겨 교동왕(膠東王)으로 삼아 수도를 즉묵(卽墨)에 두게 하고 전영에게 반기를 든 제나라 장군 전도(田都)는 제(齊)왕에 봉해져 수도는 제나라 옛 수도 임치(臨淄)에 두게 했으며 전영 일족과는 별도의 세력을 보유한 전안을 제북왕(濟北王)으로 삼아 수도를 박양(博陽)에 두었다. 항우와 다른 제후왕들이 임지로 돌아가자 전영은 먼저 전도를 공격해 초나라로 몰아내고 전불의 부임을 막았다. 이에 전불은 봉지로 도망쳤는데 전영은 추격하여 즉묵에서 전불을 죽이고 돌아오는 길에 전안도 죽여서 항우가 제북, 교동, 제로 나누었던 삼제(三齊)를 통합하여 자신이 제나라 왕위에 올랐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항우는 제나라를 공격해서 평원에서 전영을 죽이고 무수히 많은 제나라의 인명을 학살했다. 전횡은 제나라 저항 세력을 수습하여 항우의 군대에 저항했고 항복한 민간인까지 모조리 학살하는 항우의 잔혹한 전술에 제나라 사람들은 전횡 밑에서 일치단결하여 항우와 싸웠다. 결국 항우가 제나라에서 사람을 마구 죽이며 허우적대고 있는 틈을 타서 유방의 한군은 삼진(三秦)을 무너뜨리고 관중을 장악하며 반 항우 세력을 결집하게 된다.
이에 놀란 항우가 군대를 3만 정도 떼어 번개처럼 돌아가 유방 군을 짓밟았으나, 전횡은 항우가 빠져나간 틈을 노려 잃어버린 영토를 거의 전부 되찾아버렸다. 이 틈을 타서 전횡은 제나라 땅을 다시 손에 넣고 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왕으로 삼았다. 전횡은 재상으로써 실권을 손에 넣었다. 결국 천하가 초한으로 갈라졌으나, 제나라는 초나라와 한나라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사실상 중립의 위치에 있었다. 초나라와 적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나라와도 여전히 대립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아예 수도까지 한번 항우에게 점거당해 대학살이 일어났던 관중 지방보다는 제나라 쪽의 처지가 그나마 나았던 것 같지만[21] 항우에게 타격을 입은건 분명한데다가, 한나라를 막을 방패로 받아들였던 진여가 대패하면서 제나라는 조연 등 여러 나라를 병합하고 순식간에 거대해진 한신 군단과 마주하게 된다. 다만 한신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작전을 중지한 덕에[22] 바로 싸우지 않고 대략 반년 동안 애매하게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왕 유방은 한신과는 별도로 역이기를 보내서 제나라 잔존 세력에게 유세를 하여 한나라에 가담시키고 동맹을 맺는 데 성공했다. 이때까지 딱히 한나라와 적대한 적도 없었고, 제나라로서는 이미 단독으로 초나라에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 그런데 한신이 공을 역이기에게 빼앗길 거라는 괴철의 충동질에 넘어가 동맹을 무시하고 제나라를 공격해버렸다. 사실상의 '배신' 행위에 화가 난 전광과 전횡은 역이기가 자신을 속였다며 기름솥에 튀겨죽였다. 그러나 화풀이를 한다 해도, 한신의 군대가 몰려오자 이미 항우와의 전쟁으로 극도로 피폐해진 제나라는 버틸 힘이 없었다. 결국 전횡과 전광은 가신들을 데리고 흩어져서 도주했다.
전광은 마지막 수단으로 지금까지 싸워오던 항우에게 구원 요청을 하고, 항우는 용저를 보내 제나라를 구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용저는 유수 전투에서 참패하여 초나라 군대도 궤멸당해버렸고, 제나라 잔존 세력은 조참, 관영 등에게 완전히 진압당한다. 그리고 유방에게 한신이 제나라 왕으로 봉해졌다. 전횡은 죽은 전광 대신 제나라 왕위에 올라 한번 더 기회를 노려봤지만 역부족이어서 결국 도망치고 팽월에게 의탁했다.
항우가 유방에게 죽고 천하가 평정된 뒤, 팽월을 떠나 섬에 숨어있던 전횡은 유방의 회유를 받아 항복을 하러 가게 된다. 유방은 전횡을 우대할 생각이었지만, 전횡은 유방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숨을 끊었다. 차마 자기가 튀겨죽인 역이기의 동생인 역상과 마주보며 유방을 섬기기는 부끄러웠다는 듯. 전횡의 부하들도 전횡이 죽었다는 것을 알자 모두 자살, 전씨 제나라 세력은 완전히 소멸한다.
해하 전투가 끝나고 노현 땅이 항복했을 때 유방이 한신을 기습해 초왕으로 옮기면서 제왕 자리는 한동안 공석이 되었는데, 한신이 한번 더 강등당해 회음후로 내려갔을 때 전긍이란 사람이 아주 잘하셨다고 칭찬하면서(...) 제나라는 동서의 진나라와 같은 곳이라서 유방의 친가족이 아니면 절대로 왕을 맡기지 말라고 간언했다. 전긍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유방은 자신의 서장자인 유비를 제왕에 봉했다.
한편, 제나라 사람들은 제북왕 전안의 집안을 왕가(王家)라 불렀고 전안의 후손들은 이 때문에 성을 아예 왕씨(王氏)로 갈았다. 전안의 후손 중에 대표적인 인물로는 왕망(王莽)이 있다. 또한 제나라 양왕의 후손이 삼국지에 나오는 법정이라고 한다. 법정의 조상 중 한 명이 양왕의 이름 법장(法章)에서 법 자를 따와 법씨(法氏)로 바꾼 것이다.
7.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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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강제
앞에는 시호, 뒤에는 이름이다.(예 : 정공 급, 정이라는 시호를 받은 공작 강급·여급) 또 시호가 없는 군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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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공(太公) 상(尙): 기원전 1000년경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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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공(丁公) 급(伋, 級): 태공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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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공(乙公) 득(得): 정공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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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공(癸公) 자모(慈母): 을공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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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공(哀公) 불신(不辰): ? ~ 기원전 863년. 계공의 아들, 기나라 제후의 참소로 주나라로 잡혀가 팽형에 처해져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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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공(胡公) 정(靜): 기원전 862년 ~ 기원전 860년. 애공의 동생, 수도를 영구에서 박고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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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공(獻公) 산(山): 기원전 859년 ~ 기원전 851년. 호공의 동생, 호공에게 원망을 품고 옛 수도였던 영구 사람들과 함께 호공을 습격하여 죽이고 찬탈했다. 호공의 아들들을 쫓아내고 수도를 박고에서 영구로 다시 옮겨 이름을 임치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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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武公) 수(壽): 기원전 850년 ~ 기원전 825년. 헌공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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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공(厲公) 무기(無忌): 기원전 824년 ~ 기원전 816년. 무공의 아들, 포악하였으므로 제나라 사람들은 여공의 할아버지 헌공이 쫓아낸 제 호공의 아들을 모셔와 제후로 옹립하려고 여공을 공격하여 죽였다. 그러나 이때 호공의 아들도 전사했으므로 여공의 아들 적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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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공(文公) 적(赤): 기원전 815년 ~ 기원전 804년. 여공의 아들, 아버지 여공을 죽인 70여 명을 처형함으로써 애공의 사망 이 후 생긴 내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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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成公) 탈(脫): 기원전 803년 ~ 기원전 795년. 문공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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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莊公) 속(贖): 기원전 794년 ~ 기원전 731년. 성공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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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공(僖公)[23] 녹(祿): 기원전 730년 ~ 기원전 698년. 장공의 아들, 아우 이중년의 아들이자 조카 무지를 총애하여 태자 제아와 동등한 대우를 했다. 원수 기나라를 멸하기 위해 송, 위, 연 연합군과 싸웠으나, 노, 정이 기나라를 도와주면서 대패하고 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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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공(襄公) 제아(諸兒):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86년. 희공의 아들, 원수 기나라를 멸했으나, 황음무도하여 노 환공의 아내이자 자신의 이복 여동생 문강과 사통하고 불만을 품고 있던 사촌 동생 무지의 특권을 빼앗았다. 문강과의 사통이 드러나자 공자 팽생을 시켜 노 환공을 때려 죽였으나, 연칭, 관지보의 난으로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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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 무지(無知): 기원전 686년. 희공의 조카이자 희공의 동생 이중년의 아들, 양공의 사촌 동생, 연칭, 관지보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대부 옹음에게 연칭, 관지보와 함께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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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공(桓公) 소백(小白): 기원전 685년 ~ 기원전 643년. 양공의 동생, 형 규를 죽이고 관중과 포숙아의 도움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패자가 되어 전국 오패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말년에 관중과 포숙아가 죽자 간신 수초, 역아, 개방을 중용하여 나라를 망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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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무궤(無詭) 또는 무휴(無虧): 기원전 643년 ~ 기원전 642년. 환공의 아들, 송 양공이 공자 소를 세우러 오자 제나라 사람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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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공(孝公) 소(昭): 기원전 642년 ~ 기원전 633년. 무궤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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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昭公) 반(潘): 기원전 632년 ~ 기원전 613년. 효공의 동생, 효공의 아들을 죽인 개방의 지지를 받아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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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사(舍): 기원전 612년. 소공의 아들, 숙부 상인에게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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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공(懿公) 상인(商人): 기원전 612년 ~ 기원전 609년. 소공의 아우, 황음무도하게 날뛰다가 대나무 숲에서 자는 사이 병촉과 염직에게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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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공(惠公) 원(元): 기원전 608년 ~ 기원전 599년. 의공의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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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공(頃公) 무야(無野): 기원전 598년 ~ 기원전 582년. 혜공의 아들, 부세를 경감하고 고아를 구제하고 병자를 위로하고 창고에 쌓아둔 것을 헐어 민간을 구제하니 민중들이 기뻐했다. 또 제후들을 우대하니 경공이 죽을 때까지 백성들은 경공에게 귀부했고 제후들은 제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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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공(靈公) 환(環): 기원전 581년 ~ 기원전 554년. 경공의 아들, 영공 14년 내(萊))나라를 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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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莊公) 광(光): 기원전 553년 ~ 기원전 548년. 영공의 아들, 최저의 후처 당강과 사통하다가 최저와 경봉에게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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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공(景公) 저구(杵臼): 기원전 547년 ~ 기원전 490년. 장공의 동생, 최저와 경봉에게 옹립되었는데 경봉은 최저를 죽이고 경봉은 쫒겨났다가 초나라 영왕에게 잡혀 죽었다. 안영을 중용하여 환공 이후 가장 부강한 시대를 만들었으나, 경공 자신은 사치를 즐기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암군이었다. 그래도 재상 안영의 간언에는 귀를 기울이고 대개 그의 의견을 잘 받아들이는 군주였으며 무엇보다 말년에 후계자를 잘못 세워 강제 멸망의 단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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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유자(安孺子) 도(荼): 재위 기원전 489년. 경공(景公)의 아들, 양생이 보낸 주모에게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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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공(悼公) 양생(陽生): 기원전 489년 ~ 기원전 485년. 안유자의 형, 사이가 나쁜 포목에게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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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공(簡公) 임(壬): 기원전 484년 ~ 기원전 481년. 도공의 아들, 전상이 감지를 죽이자 불안한 나머지 도망치다가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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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공(平公) 오(驁): 기원전 480년 ~ 기원전 456년. 간공의 동생, 전상을 단독 재상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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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宣公) 적(積): 또는 취잡(就匝) 기원전 455년 ~ 기원전 405년. 평공의 아들, 전상과 그의 후손 대대로 재상을 세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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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공(康公) 대(貸): 기원전 404년 ~ 기원전 379년. 선공의 아들, 전상의 고손자 전화에 의해 폐위되어 섬으로 추방되었다가 죽었다.
7.2. 전씨 종주(강씨 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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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중(敬仲) 완(完) - 진(陳) 여공(厲公)의 아들로 내란 때문에 고국을 떠나 제나라로 망명해 공정 벼슬에 올랐다. 진나라 공족이었으므로 원래는 진(陳)씨였지만 전(田)씨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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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이(孟夷) 치(稚) - 경중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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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장(孟莊) 민(湣) - 맹이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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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文子) 수무(須無) - 맹장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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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桓子) 무우(無宇) - 문자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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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武子) 개(開) - 환자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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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자(僖子) 걸(乞) - 환자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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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成子) 항(恒) - 희자의 아들. <<사기>>에서는 한문제의 피를 위해 이름이 상(常)라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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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襄子) 반(盤) - 성자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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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 백(白) - 양자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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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悼子) - 장자의 아들
7.3. 전제의 역대 군주
군주명 |
사기 |
죽서기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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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년 |
사망 |
재위 |
원년 |
사망 |
재위 |
|
태공(太公) 화(和) |
서기전 386년 |
서기전 385년 |
2년 |
서기전 386년 |
서기전 385년 |
2년 |
섬(剡) |
기록누락 |
서기전 384년 |
서기전 375년 |
10년 |
||
환공(桓公) 오(午) |
서기전 384년 |
서기전 379년 |
6년 |
서기전 374년 |
서기전 357년 |
18년 |
위왕(威王) 인제(因齊) |
서기전 378년 |
서기전 343년 |
36년 |
서기전 356년 |
서기전 320년 |
37년 |
선왕(宣王) 벽강(辟彊) |
서기전 342년 |
서기전 324년 |
19년 |
기원전 319년 |
서기전 301년 |
19년 |
민왕(湣王) 지(地) |
서기전 323년 |
서기전 284년 |
40년 |
서기전 300년 |
서기전 284년 |
17년 |
참고로 사기와 죽서기년에 표시된 군주의 재위 연도가 많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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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공(太公) 화(和): 서기전 386년 ~ 서기전 385년. 도자의 아들로 강공을 폐위하고 섬으로 추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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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剡)[24]: 서기전 384년 ~ 서기전 375년. 태공의 아들, 동생 오에게 아들 유자(孺子) 희(喜)와 함께 살해되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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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공(桓公) 오(午): 서기전 374년 ~ 서기전 357년. 섬의 동생, 형 섬과 그의 아들이자 조카 희를 죽이고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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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왕(威王) 인제(因齊): 서기전 356년 ~ 서기전 320년. 환공의 아들, 왕을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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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宣王) 벽강(辟彊): 서기전 319년 ~ 서기전 301년. 위왕의 아들, 그의 치세에 손빈 등을 등용하면서 강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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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왕(湣王) 지(地): 서기전 300년 ~ 서기전 284년. 선왕의 아들, 그의 치세에 절정이라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서제(西帝)를 칭한 진나라와 더불어 동제(東帝)를 잠시나마 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교만해졌고 이것이 화를 불러 연나라와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수도 임치를 포함한 70여 성을 잃었다. 거, 즉묵만 남은 상태에서 거로 달아났다가 구원을 하러 온 초나라 대장 요치에게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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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왕(襄王) 법장(法章): 서기전 283년 ~ 서기전 265년. 민왕의 아들, 거에서 즉위한 후 전단의 도움을 받아 잃은 영토를 모두 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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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建): 서기전 264년 ~ 서기전 221년. 양왕의 아들, 진나라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대항을 전혀 하지 않고 항복했으나, 유폐되어 아사했다.
7.4. 초한쟁패기 때 전제의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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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담(儋): 서기전 209년 ~ 서기전 2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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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가(假): 서기전 2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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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불(市): 서기전 208년 ~ 서기전 2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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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都): 서기전 2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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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榮): 서기전 206년 ~ 서기전 2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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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廣): 서기전 205년 ~ 서기전 2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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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횡(橫): 서기전 205년 ~ 서기전 202년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dzəj. 현대 발음은 qí. 齊는 현대의 한자이며 진나라 시대의 전서 소전체 표기는 이렇다. 참조. 금문으로는 글자가 더 간단하다.[2] 춘추전국시대에는 성과 씨를 구별했는데 첫 공족은 강성의 여씨(呂氏), 찬탈 이후는 규성의 전씨(田氏)이다.[3] 서기전 323년부터.[4] 단,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은 세속적인 편이었다.[5] 맥(貊), 번(番), 불여, 부여, 부리, 벌 등 맥족과 연관짓는 설이 있다.[6] 다만 이때는 직접적인 교역보다는 래이(萊夷)족을 통해서 중계교역을 거친 다음에 비싼 값에 수입했을 가능성이 크다.[7] 기원전 170년대 여씨 반란과 제후왕들의 난리를 피해서 바다 건너 조선으로 와서 자리 잡은 왕씨 일가 (이주한 시조 : 왕중王仲)도 있다.[8] 춘추시대 전반기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산동반도 일대를 전부 지배하지 못했고 이 지역은 래이라고 볼리는 종족들이 성읍국가를 이루웠지만 산동성 서부일대의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하여 기원전 6세기를 기점으로 래이족들을 흡수시킴으로해서 산동반도 일대를 석권했다.[9] 사기의 소진열전에는 임치의 가호수는 7만 호로, 대략 한 호에 3명의 남자를 징발할 수 있으니 임치 한 도시만으로도 20만의 병사를 동원할 수 있다고 언급된다. 서기전 4세기 기준 한 도시의 인구가 수십만이었다는 것.[10] 초나라에게 멸망한 거나라 영토였다.[11] '기우(杞憂)'로 유명한 그 기(杞)나라가 아니다.[12] 환공이 총애하던 미소년으로 그를 모시기 위해 스스로 거세함[13] 환공의 요리사로 인육을 먹고 싶다던 그에게 아들을 죽여 바침(!)[14] 위(衛)나라 의공의 큰 아들.[15] 일전에 관중은 이들이 간신임을 알고 제 환공에게 벼슬을 줘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가 있었지만 묵살되었다.[16] 제 환공의 다른 아들이다[17] 이분 또한 제 환공의 다른 아들이다. 효공 - 소공 - 의공 - 혜공 모두 제 환공의 아들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왕위 다툼으로 제나라 내부가 시끄러웠던 것을 알 수 있다.[18] 시호는 전성자(田成子), 본명은 전항(田恒)이다. 본명은 전항이지만 전상으로 유명한 이유는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한문제의 이름인 유항(劉恒)을 피휘하고자 바꿨기 때문이다.[19] 사기 세가에서는 그냥 요치가 물러갔다고만 서술하고 있다.[20] 항량은 전영의 정적인 전가를 보호했는데, 이러자 전영은 항량을 지원하지 않는 것은 물론 항량이 죽은 후엔 송의를 이용해 항우를 한 번 실각시키기도 했다.[21] 혜제기를 기준으로 제나라 수도인 임치의 인구가 65만명, 장안이 50만명 가량이었다고 한다.[22] 이좌거의 전략안으로는 내실이 부실한 군사로 무리하게 싸우느니 드높아진 한신의 위세로 연과 제를 겁주어서 항복시키자는 것이었으나 한신은 딱 연나라를 항복시키는데까지만 따르고 제나라는 내버려두었다.[23] 사기에서는 저자 사마천의 할아버지 사마희를 피휘하여 희공(釐公)으로 기록했다.[24] 죽서기년에 태공과 환공 사이에 기록된 군주로 사기에서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래서 섬의 재위 기간은 사기에서는 환공의 재위 기간으로 포함되어 있다.[25] 《사기색은》(史記索隱)의 저자 사마정(司馬貞)은《장자》 거협편과 《귀곡자》에서 '전성자(전항)가 제나라 임금(간공)을 죽인 후부터 제나라에는 12대가 있었다'라고 한 것을 인용하여 전도자와 전후 섬의 존재를 긍정했다. 곧 《사기》에 따르자면 전성자부터 왕 건까지 10대에 불과하고 전도자와 전후 섬을 합해야 12대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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