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
최근 수정 시각: 2020-11-21 03:55:08
분류
(후)백제 초대 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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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진?)(甄)[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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훤(萱)[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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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출생과 계보2.2. 출생 설화2.3. 성장기2.4. 무진주 봉기2.5. 후백제 건국2.6. 궁예와의 대립기와 영토 확장(901년 ~ 918년)2.7. 고려와의 쟁패(918년 ~ 935년)
2.7.1. 고려와 화친하다2.7.2. 조물성 전투2.7.3. 서라벌 습격과 공산 전투, 승세를 잡다2.7.4. 고창 전투, 내리막의 시작2.7.5. 예성강 전투, 바다로의 반격2.7.6. 운주성 전투, 몰락의 종지부
2.8. 몰락과 말년(935년 음력 3월 ~ 936년 9월)
2.8.1. 폐위2.8.2. 고려로의 망명2.8.3. 일리천 전투와 후백제 멸망
2.9. 최후와 의혹
6. 성에 대한 논란: 견훤인가 진훤인가7. 여담8. 대중 문화 속의 견훤9. 같이 보기10.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신라 말기의 군인이자 후백제의 초대 국왕이다.
후삼국시대의 문을 열고 스스로 닫은 인물. 후삼국시대는 그가 후백제를 세우면서 공식적으로 시작했으며 그가 후백제를 멸망시키면서 비로소 끝났다. 창업군주로서 자신이 건국한 나라를 스스로 무너뜨렸으니 한국사, 아니 전세계사적으로 보아도 이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 간 군웅을 찾기 힘들다.
황간 견씨(黃澗甄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견훤의 성씨는 '완산 견(진)'씨이다. 이씨가 아니다. 아버지는 이씨였지만 견훤은 이씨가 아닌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들인 신검, 양검, 용검, 금강 또한 성씨가 이씨가 아닌 견(진)씨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버지인 아자개 문서를 참조.
892년부터 935년 음력 3월까지 후백제(後百濟)의 군주로 재위한 그는 본래 남북국시대 신라의 장군으로 신라 서남 해안(전라남도)에서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배치되어 있었으나 8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거병하여 892년에 무진주(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하고 왕을 칭했는데 이때 공식적인 건국은 아니고 일단은 왕이면서도 신라왕의 신하를 자칭하는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다 900년에 비로소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시)에 도읍하여 3백여년 전에 멸망한 백제의 부활을 선포한다. 이 때 견훤이 재건한 백제는 먼저 있었던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후백제로 부른다.
신라, 궁예, 왕건 등과 후삼국의 패권을 놓고 수십 년간 다투었으나 935년 음력 3월에 적장자인 신검이 일으킨 정변으로 왕위에서 축출되었고 대리 집정을 하던 신검이 왕위에 오른다. 같은 해 음력 10월 17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권력을 잃어버린 견훤은 과거에 적이었던 고려 태조에게 귀순하였고 십만이 넘는 고려군의 선봉으로 후백제를 총공격하였다. 그렇게 이듬해 음력 9월 8일에 후백제가 멸망하였고 견훤은 등창을 앓다가 후백제가 무너진 다음날인 936년 음력 9월 9일에 사망하였다.
2. 생애[편집]
2.1. 출생과 계보[편집]
견훤은 867년에 상주의 농부였던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11] 출생지는 현재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12]인 상주의 가은현[13]이었다. 아버지인 아자개는 본래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광계 연간[14]에 가문을 일으켜 지방의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했다. 견훤의 본래 성씨는 아버지의 성씨를 따라 이(李)씨였으나 훗날 견(甄)씨로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
현재는 전하지 않는 사서인 《이제가기》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에게는 백융부인 사도라는 왕비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녀의 아들인 구륜공이 선품공을 낳았고 그 아들인 작진이 왕교파리라는 여인과 혼인하여 아이를 낳았으니 아자개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견훤은 신라 왕실 외척[15]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신빙성이 있는 기록은 아니다. 견씨 족보에 따르면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의 9대손이라고 하고 아버지 아자개가 8대손이라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에 따르면 견훤에게는 여러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남동생들로는 능애, 용개, 보개, 소개 등이 있으며 여동생으로 대주도금이 있다.[16] 당시 이름을 떨쳤다는 사람인데 이름을 떨칠만한 행적이 남아있지 않으며 견훤 자신과 형제들이 모두 유명했던 듯하다.
2.2. 출생 설화[편집]
한편 견훤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삼국사기》에서는 견훤의 비범함을 나타내는 설화를 하나 전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들에서 일하고 있는 아버지 아자개에게 식사를 날라 주기 위해 포대기에 싸인 어린 견훤을 나무 밑에 놓아두었는데 지나가던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나 견훤에게 젖을 먹였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설화에 따르면 견훤의 어머니가 매일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와 그렇고 그랬는데 남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남자가 밤에 떠나기 전 옷에 바늘을 꽂아 실을 엮어서 날이 밝은 뒤에 실을 따라갔더니 연못으로 이어져 있어서 파보니 큰 지렁이가 바늘에 꽂혀 상처가 덧나 죽어 있었다더라[17]는 이야기가 있어 토룡(지렁이)[18]의 아들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고 한다. 실제 전승은 지렁이가 아닌 용이었지만 패배자를 폄하하기 위해서 지렁이로 격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지렁이가 "토룡(土龍)"으로도 불리고 지렁이의 어원이 뜻이 같은 지룡(地龍)에 접사 '이'가 붙은 말임을 참고.
지렁이에 대한 또 다른 설은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견훤의 '견'은 진으로도 읽을 수 있는데 '진훤이'라고 말하면 발음상 '지렁이'와 유사하기 때문에 견훤을 폄하하려는 쪽에서 '지렁이' 혹은 '지렁이 자식'이라고 부른데서 나왔다는 얘기가 있다. 이게 유래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견훤이 살아 있을 때도 지렁이라는 별명이 있었던지 견훤을 공격하러 가기 전에 왕건 쪽에서 소금을 뿌리는 의식을 치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렁이에게 소금을 뿌리면 삼투압으로 인해 수분이 빠져나가 죽기 때문이다.[19] 다만 지렁이가 당대에도 甄萱과 비슷한 발음이었을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문제. 甄의 음 중 하나인 진은 원래부터 초성이 ㅈ 계열이었지만 지렁이의 어원인 地龍의 地는 원래 '디'였다가 조선 후기에 '지'가 되었기 때문에 발음상 차이가 있다. 그래서 진훤이라는 이름에서 지렁이라는 별명이 나왔다는 추측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이름과 무관한 다른 연유로 지렁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수는 있다.
견훤의 출신에 대한 이설로는 신라 토박이가 아니라 백제 멸망 이후에 문경으로 이주한 백제인이라는 설도 있다.[20] 위의 지렁이 설화는 무진주(광주) 북촌이 배경인데 오기라는 설도 있지만 이를 근거로 모종의 일로 무진주에서 도망쳐 나온 집안의 자식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무진주가 견훤의 근거지 안에 들어간다는 걸 생각하면 왜곡될 수도 있는 일이다. 실제 견훤의 배임지라든가 사서에 비추면 이 설의 신빙성은 떠도는 야담 수준으로 낮은 편이다.
견훤 탄생 설화인 지렁이 설화의 원형인 지네 설화는 동북아시아의 보편적인 설화였다. 일본에만 지네가 아버지인 설화와 민담이 약 1000여 개이며 중국에도 많이 발견된다. 후삼국시대에는 이미 신화에 의한 지배 이념이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는 증거.
2.3. 성장기[편집]
견훤은 성장하면서 체격이 남달리 커졌으며 용모도 비범했다고 전해진다. 장성한 견훤은 갑작스레 고향을 떠나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로 올라가 무장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는데 상주에서 부와 권력으로 제법 세력을 자랑하던 아자개가 가문의 격을 높이고자 아들을 경주로 보냈다는 말도 있다.[21]
계모와 이복동생들의 등쌀에 떠밀려 아버지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남으로써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는 추측도 있다. 실제로 그의 동생들 중에 능애를 제외한 용개, 보개, 소개 등이 모두 같은 돌림자를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능애만 친동생이고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이복동생들이라 이래저래 눈치밥을 먹고 살아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22]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이 가설을 취하고 있다.
이처럼 견훤이 고향을 떠나 상경해서 군인이 된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어찌 되었든 간에 견훤은 남다른 용맹함과 비범함으로 빠르게 출세하였다. 서남 해변에서 군복무를 하게 된 견훤은 창을 베개삼아 적을 대비하였다(寢戈待敵)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기상이 남달랐다. 덕분에 당시 진성여왕의 실정(失政)으로 막장 분위기가 짙었던 신라 말기의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견훤은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2.4. 무진주 봉기[편집]
칭왕 이전 자칭한 관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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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한남군 개국공(漢南郡 開國公) / 전주왕(全州王)(?)[23] |
훈위 |
상주국(上柱國) |
직위 |
서면도통(西面都統)[24] - |
고향을 떠나와 상경하여 군인이 된 견훤은 곧 착실히 경력을 쌓았다. 이후 견훤은 왕명을 받들어 군사를 이끌고 서남해 일대의 호족과 해적의 무리(해상 무역을 기반으로 삼고 있던 호족, 군진 세력)들을 공격하러 나섰다. 견훤은 상당한 공을 세워 비장(裨將) 벼슬을 받기도 했다.
892년(진성여왕 6년), 견훤은 자신이 부임한 서남해를 평정하고 나서 보니 신라 조정의 기강은 이미 해이해졌고 먼 지방을 통제할 여력이 없어보였다. 이에 견훤은 마침내 숨겨왔던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 신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려는 뜻을 품었다. 무리를 불러 모아 주변 주, 현을 가서 치니, 한창 명성을 떨치던 견훤이 군사를 일으키자 그가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호응하여 열흘에서 보름 사이에 그를 따르는 무리는 무려 5천여 명이나 되었다. 무진주(오늘날의 전남 광주)를 습격한 뒤에는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면서 본격적으로 세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외부에 공공연히 왕을 칭하지는 못하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라고 자칭했다. 이자연(고려), 이자겸, 척준경, 김부식, 신돈, 최충헌의 관직명과 함께 한국사에서 등장하는 긴 관작명.
그 많은 관작을 따지면 한남군 공작(혹 전주의 왕)으로써 도통, 지절도독주군사, 제치사, 자사, 어사대 어사중승 직위를 가진 '신하이자 제후'임으로 일단 왕이라고 했음에도 명목상으론 신라왕의 신하를 자칭했으므로 왕이면서도 신하라는 애매한 스탠스를 취했고 완전한 의미의 칭왕과 건국은 아니었다.[26]
삼국유사에서는 889년에 거병했다는 설도 실려있다. 정확히는 889년[27] 거병과 칭왕 기사에 이설로 892년을 실었으며 930년 고려와의 고창전투에서 42년 경인(四十二年庚寅) 기사를 근거로 둔다.[28] 해당설에 따르면 892년보다 3년 앞서서 거병한 셈이다.
한편 또다른 추측도 있다. 견훤이 비장 벼슬을 얻고 조정의 명을 받아 서남해의 해적과 호족을 소탕한 것은 사실이나, 그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사불성을 근거지로 하여 군사를 일으켜 독립 세력을 이루자, 견훤 역시 목숨을 건지기 위해 반역의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다만 《삼국유사》에 아자개가 세력을 일으킨 일은 광계 연간, 즉 885년 ~ 887년 사이의 일이기에 조금은 시기가 맞지 않는다.
군사를 일으켜 무진주를 점령함으로써 이처럼 큰 세력을 떨치던 견훤은, 당시 북원에서 세력을 떨치던 호족 양길에게 비장 벼슬을 내리는 등 자신이 한반도의 실질적 지배자임을 자처하였다.[29] 재미있는 것은, 당시 양길이 훗날 견훤의 라이벌이 될 궁예의 주군이었다는 점이다.
2.5. 후백제 건국[편집]
900년, 서쪽을 순행하던 견훤이 완산주(오늘날의 전북 전주)에 이르자 완산주의 백성들이 몰려나와 견훤을 크게 환영했다. 마침내 자신이 인근 지역의 민심을 장악했음을 알게 된 견훤은 사람들을 불러모아 놓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진한과 변한은 그를 뒤따라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30]에서 개국하여 6백여 년이 되었는데,[31]총장(摠章) 연간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배에 군사 13만을 싣고 바다를 건너게 하였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흙먼지를 날리며 황산(黃山)을 거쳐 사비(泗沘)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
이 말은 곧 견훤이 멸망한 백제의 뒤를 이어 신라를 무찌르고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포부를 세상에 알린 것이었다. 당시 완산주 일대는 과거 백제의 중심지였던 부여, 익산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써 백제 유민의식이 강하게 배어있는 영토였고, 이곳을 기반으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옛 백제의 역사가 있었던 지역의 백성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백제의 부흥을 명분으로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처음 견훤이 서남해부터 북상하여 무진주(광주)는 전쟁으로 점령하였고 그 후 다시 북상하여 완산주에 도착했을 땐 완산주의 관리와 백성들은 신라가 세력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알고 견훤 세력에 큰 대응없이 따른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자신의 세력하에 있는 자들에게 자신이 신라에 대응하는 것에는 명분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백제를 다시 건국한다는 것을 널리 드러냈다.
그러나 이 선택은 후에 전남 지역 호족들이 왕건에게 협력하면서 후백제가 고려에게 남북으로 둘러싸이는 결과를 낳게 된다. 옛 백제의 중심지에서 거리가 멀었던 전남 지역은 백제 유민의식도 옅거나 없지 않았나 추측하기도 하는데,[32] 결국 이 지역은 고려의 편을 들어버려 후백제는 멸망 직전까지도 고려나 신라 보다 농업 생산력이나 인구가 더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지정학적 위기로 고려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견훤은 완산주를 수도로 삼아 마침내 후백제를 건국했다. 이후 견훤은 관부와 정치 체제를 갖추고 군사력을 정비하는 등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특히 정식으로 왕(王)을 칭하고 국호를 정하는 한편, 편운화상의 부도에서 알 수 있듯이 901년부터 독자적인 연호 정개(正開)를 사용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고 독자적인 천하관을 구축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처음 무진주에서 세력을 일으켰을 때 스스로를 신라의 부용 세력이라 칭했던 태도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견훤은 한편 외교에도 힘을 써서, 나라를 세운 바로 그 해에 중국의 오월과 왜에 사신을 파견하며, 후삼국 중에서도 국제 외교에 가장 신경을 기울였다. 견훤은 오월에 사신을 보내고 책봉을 받았는데, 망해가던 당에게 책봉받았던 신라[33] 중국과의 조공-책봉 관계는 아오안이던 태봉[34], 발해에 비해서 중국 내에서 정통성은 후백제 쪽이 더 높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게다가 오월국이 연호를 제정하고 독립국화했으면서도 오대 제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음을 생각하면, 견훤이 "내 등뒤에 중국 황제 있다"라고 해도 100% 거짓은 아니다.[35]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자 백제유민들이 호응한 이유로 견훤의 혈통을 꼽는데, 전주견씨 기록에 따르면 견훤은 의자왕의 맏아들 부여융의 9대손, 즉 의자왕의 10대손이라 한다.이쯤에서는 세력있던 백제 왕족의 후손 중에 세력있던 사람은 견훤밖에 없어 왕위에 추대됐다는 기록이 있다.[36] 다만 견훤이 실제로 백제 왕실의 후손일 가능성은 희박한 게, 당시는 신라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각 지역 호족 위주로 조상의 급을 뻥튀기하는 숭조사업이 아주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기였다. 동시대 왕건은 당숙종 후손이라고 약을 팔았고[37]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신라 진흥왕의 후손이라는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이제가기의 상반된 전승도 있듯이, 결국 의자왕의 후손이라는 일설도 보잘것없었던 신라 변방 호족에 불과했던 실제 견훤의 조상 대신, 옛 백제 땅을 순조롭게 지배하기 위해서 숭조사업 차원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2.6. 궁예와의 대립기와 영토 확장(901년 ~ 918년)[편집]
이듬해인 901년 8월, 견훤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러 나섰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견훤은 군사들 돌려 금성(나주) 남쪽으로 옮겨 연해변의 부락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돌아왔다.[38] 이 시기에 북원의 호족인 양길의 수하에 있던 궁예가 마침내 독립하여 후고구려(마진)를 세웠는데, 이후부터 후백제와 후고구려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특히 이 싸움은 나주 일대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나주 공방전이 중심이 되었는데, 여기서 견훤은 수전에 능통했던 궁예 휘하의 명장 왕건에게 번번히 패하는 수모를 당했다.[39]
903년, 궁예는 당시에 자신의 장수였던 왕건으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배후를 치도록 명했다. 왕건은 수군을 거느리고 남해로 내려와 후백제의 해변가를 기습 공격하여 나주 일대의 10여 군현을 빼앗았다.[40]
이 싸움이 견훤에게 안겨준 타격은 엄청났다. 나주를 비롯한 영산강 유역은 서해와 남해의 수운을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수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실제로 909년에 견훤이 중국 오월에 보냈던 사신단이 해상에서 왕건의 군사들에게 잡히는 일까지 있었다. 또한 나주 지역 자체의 농업 생산력도 결코 적은 수준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주는 후백제의 도읍인 완산주의 근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로써 후고구려는 나주를 발판으로 삼아 언제든지 후백제의 내륙 지방에 침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두고두고 후백제의 아킬레스건이 되어 늘상 뒤치기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견훤은 905년 궁예가 진출한 상주 지역으로도 영토를 넓히려고 했다. 906년, 고려사 태조 총서에 의하면 상주 사화진에서 견훤은 궁예가 파견한 왕건, 정기장군 금식 등과 교전을 벌였는데 패배했다. 허나 이듬해인 907년, 견훤은 일선군 이남의 10여 성을 빼앗으면서 상주 지역 일부를 차지하게 된다.(삼국사기 신라본기)
909년에 견훤은 수군을 이끌고 다시 나타난 왕건과 나주에서 싸웠다. 왕건은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도를 함락시킨 후에 고이도로 나아갔다가 덕진포에서 견훤과 싸우게 되었다. 왕건군이 워낙 기세등등한 탓에 후백제군이 퇴각하기 시작하자 왕건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을 질러 화공을 감행하였다. 결국 이 싸움에서 후백제군은 또다시 패배하여 500명이 전사하였으며, 견훤은 작은 선박을 타고 달아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또한 고려사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즈음에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견훤이 처음 세력을 일으켰던 요충지인 무진주(광주)를 공격해오기도 했다. 당시에 무진주의 성주였던 견훤의 사위 지훤이 필사적으로 싸워 이를 막아내기는 했으나, 이 역시 견훤에게 있어서는 실로 위기의 순간이었다.
910년, 견훤은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 나주를 10일 동안이나 포위 공격했으나 궁예가 수군을 내어 이를 방어하는 바람에 끝내 나주를 되찾지 못했다. 이후 912년에는 덕진포에서 궁예와 맞붙었다. 이 싸움의 결과를 전하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궁예가 이겼을 것이라는 추측이 우세하다. 선각대사비에 따르면 궁예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견훤을 격퇴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916년, 901년 이후 15년만에 대야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났다.
2.7. 고려와의 쟁패(918년 ~ 935년)[편집]
918년, 궁예가 폭정을 일삼아 민심을 잃자, 그의 수하였던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축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왕건은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고려로 되돌렸다. 견훤은 호전적인 궁예에 비해 꽤나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왕건과 화친하고 그 틈을 타서 세력 확장을 시도했다.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 해에 견훤은 일길찬 민합을 사신으로 보내 이를 축하하였으며, 또한 공작 깃털로 만든 부채인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선물했다.
한편 견훤은 같은 해에 중국의 오월에 사신을 보내 좋은 말을 조공했는데, 이에 오월은 사신을 보내 답례했으며 견훤에게 중대부(中大夫)의 관직을 더하여 주었다. 이러한 와중에 상주의 세력가였던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왕건에게 투항했다. 아자개가 자신의 아들을 두고 고려에 투항한 이유는 정확하지 않으나, 아자개와 견훤 사이에 불화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아자개가 왕건에게 투항했다는 기록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유사》에 보이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와는 이름의 표기가 달라서 다른 인물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다만 한가지 주의해야할 사항은, 고대의 인명 표기는 대충 음이나 뜻만 통하면 그만이라 봐서 왔다갔다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특히 신라의 경우가 심했는데, 중고기의 금석문만 봐도 동일인물의 이름을 비석마다 다르게 새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앞서 파견한 일길찬 민합과 선물들은 페이크이고 사실은 백제의 중심지역이였던 웅천주에 금강 일대로 진출했다는 기록도 있다. 왕건 쿠데타 직후 웅천주를 지키던 이흔암이 갑자기 자신의 부대를 데리고 철원으로 상경하면서 방위에 큰 구멍이 생겼고, 연이어서 매곡성<보은지역>의 공직과 서원경<청주>일대의 반왕건파 호족들이 견훤에게 투항, 그러나 서원경일대의 반란은 조기에 왕건이 보낸 군대에게 진압되었고, 금강 이북의 충남지역은 왕건과 비교적 가까운 호족인 이치와 홍기의 세력권이였기에 대체로 금강을 경계로 하게 되는데, 이를 두고 《삼국사기》에서는 견훤이 겉으로는 왕건과 화친하였으나 속뜻은 완전히 달랐다고 비판했다.
920년 10월, 견훤은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마침내 오랜 숙원이었던 대야성 공략에 성공한다. 과거 대야성을 2차례(901년, 916년) 공격했다가 쓰라린 패배를 경험했지만 기어이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대야성은 중요한 요충지로, 후백제군은 대야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신라의 본토를 습격할 수 있는 지름길을 열게 된것이다. 견훤은 승세를 타고 진례성까지 공격하려 하였으나, 신라 왕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이 군사를 움직이자 다시 물러났다. 그러나 견훤은 왕건의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는 고려의 혼란을 이용하여 웅진(오늘날의 공주시)까지 진출했다.
924년 7월, 견훤은 아들인 수미강[41]으로 하여금 대야성과 문소성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고려의 조물성(오늘날의 경북 김천시)을 치도록 하였다. 후백제군은 야전에서는 고려 구원군의 지휘관 애선을 전사시킬 정도로 선전했으나 조물성 군민의 저항이 워낙 완강하여 성을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해 8월에는 고려 조정에 사신을 보내 절영도[42]의 준마를 선물로 바쳤다.[43] 이처럼 견훤은 한동한 고려를 상대로 싸움과 화친을 반복했다.[44]
925년 10월, 마침내 견훤은 직접 3천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조물성 공략에 나섰다. 이에 왕건 역시 직접 정예병을 거느리고 나서 맞서 싸웠으나, 견훤의 군세가 워낙 강하여 싸움은 결판이 나지 않았다. 결국 왕건이 화의를 청해 서로 볼모를 교환했다.[45] 견훤은 자신의 조카(혹은 사위)인 진호를 인질로 보냈으며, 왕건은 사촌 동생인 왕신을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그로부터 겨우 몇 달이 지난 이듬해 926년 4월, 고려에 인질로 파견되었던 진호가 병으로 급사하였다. 왕건은 진호의 시신을 정중히 수습하여 후백제로 보내주었으나, 견훤은 진호가 고려 측에 살해당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고, 크게 노하여 볼모로 와있던 왕신을 옥에 가둬 죽이고 만다.[46] 이로 인하여 후백제와 고려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었고, 양국의 군사적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927년 정월, 왕신의 죽음에 크게 노한 왕건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용주(경북 영주시 지역)를 빼앗았다. 이에 상황이 악화될 것을 우려한 견훤은 고려에 사신을 보냈으나, 왕건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견훤이 간신히 함락시켰던 대야성마저 함락당하고 말았다.
2.7.3. 서라벌 습격과 공산 전투, 승세를 잡다[편집]
927년 9월, 왕건의 거센 공격을 받은 견훤은 반격을 위해 환갑에 이른 나이에도 불구하고 몸소 친정하여 전장에 나타났다. 견훤은 신라의 근품성(문경시 인근)을 빼앗았다. 고려군과 신라군은 후백제군의 측면을 공격하려 했지만, 이때 엉뚱하게도 견훤은 북쪽으로 진격하던 군사를 돌려 고울부(高鬱府)(경북 영천시)를 습격하고, 신라의 왕도인 서라벌(경주시)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격했다.
사실 이 때 견훤의 기동은 당시 상황에선 엄청난 도박에 가까웠다. 당시 후백제군이 정석대로 퇴로 및 보급로를 확보하며 진격한다는 전제 하에, 경주를 공격하면 문경 일대와 대야성이 있는 합천을 점령한 고려군의 협공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견훤은 이런 협공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일단 문경 방어선을 뚫은 뒤, 멧돼지마냥 서라벌을 향해 돌진해버렸다. 마치 훗날의 병자호란과도 양상이 유사한 기동전이었다. 이러니 고려군과 신라군은 도저히 대응할 시간을 벌지 못하였다.
이에 신라의 경애왕은 다급히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후백제군은 무서운 속도로 진격하여 마침내 서라벌에 이르렀다. 서라벌에 나타난 후백제군은 궁성을 점령하고, 결국 서라벌 남쪽 포석정에서 술놀음을 하고 있다가[47] 뒤늦게 도망친 경애왕과 그 왕비를 사로잡았고, 견훤은 경애왕에게 항복의 예를 받은 뒤 그를 자진케 했다. 고려 측의 기록에는 견훤이 왕에게 자살하도록 강요하고, 그의 왕비를 능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견훤이 고려에 보낸 서신에는 경애왕이 스스로 자살한 것으로 적혀 있다. 경애왕을 주살한 견훤은, 박씨에게 왕위를 잃은 김씨 일족이자 경애왕의 사촌 동생인 김부를 왕으로 옹립시키니 그가 바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었다. 견훤은 신라 왕실을 완전히 없애 신라를 멸망시키지 않고 박씨 대신 김씨에게 왕위를 돌려주는 형식으로 사태를 마무리 지었는데, 이후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위협 편지[48]에 이 사건에 대해 '위태로운 나라를 바로잡았다'고 기술했다. 후백제 입장에서는 고려의 원군이 달려오는 시점에서 무리하게 신라를 집어 삼킬 여력이 없었다.
왕건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시중 공훤으로 하여금 1만 대군을 이끌고 서라벌로 진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고려군이 한발 늦어서, 이미 견훤은 서라벌을 뒤집어 엎어버리고는 막대한 전리품을 챙겨서 떠난 후였다. 왕건은 철수하고 있는 백제군의 후미를 쳐서 급습하기로 계획하였으며, 신숭겸과 김락 등의 장수들과 함께 정예 기병 5천명을 이끌고 공산(오늘날의 대구광역시 팔공산)에서 견훤의 퇴각로에 매복,기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왕건의 작전을 간파한 견훤은 이를 역으로 이용하였다. 후백제군은 오늘날의 대구광역시 공산 동수 일대인 팔공산에서, 매복을 위해 진격해오던 고려군을 기습하였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일대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고려군은 견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예기치 못한 역습을 당한 고려군은 큰 혼란에 빠졌으며, 선봉을 이끌던 김락이 전사하였다. 결국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참패를 면치 못하였으며, 견훤은 왕건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갔다. 이때 고려의 개국 공신인 신숭겸은 왕건에게는 병졸의 복장을 입힌 뒤 스스로 왕의 복장을 갖추고는 목숨을 내던져 백제군을 유인했다. 왕건은 덕분에 간신히 달아날 수 있었으나, 신숭겸은 끝까지 싸우다가 죽음을 맞았다. 이 것이 공산 전투이다.[49]
왕건을 크게 무찌른 견훤은 곧이어 승세를 타고 나아가 대목군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왕건에게 위협투의 편지를 보내었다. 여기서 견훤은 자신이 신라의 국정이 어지러워 군사를 일으켰는데, 그 과정에서 본의아니게 신라의 왕이 죽는 바람에 새로운 왕을 세웠을 뿐이라며 서라벌 습격을 정당화하였다. 또한 왕건이 그런 자신의 대의를 알지 못한채 공격했다가 참패하였다는 점을 상기시켜, "활을 평양성 문루에 걸어놓고, 말에게 패강의 물을 먹이고 싶다."라며 위협하였다. 왕건 또한 이에 거칠게 응수하는 내용의 답서를 써서 견훤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여기서 왕건은 견훤이 이전에 자신에게 패한 점을 수차례 상기시키는 한편, 자신이 의롭고 정당한 군사를 일으켰다는 견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이 싸움을 후대에는 공산 전투라 부른다. 이 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군사를 궤멸시키고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성공한 견훤은 이후로 승승장구하며 위세를 떨쳤는데, 그 영역이 오늘날의 충북 및 경북 일대에까지 이르었다.
견훤은 928년 5월에 강주를 공격하여 300명을 죽였으며, 장군 유문의 항복을 받았다. 그해 8월에는 장군 관흔으로 하여금 빼앗긴 대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또한 11월에는 부곡성을 공격하여 1천여 명의 고려군을 죽이고 장군 양지와 명식 등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929년 7월에는 견훤이 직접 5천 군사를 이끌고 의성부를 공격하여 왕건의 심복인 홍술이 전사했다. 홍술이 전사했을 당시에 왕건은 "나의 좌우 팔을 잃었다."라고 말하며 통곡할 정도로 고려의 상황은 심각한 지경에 빠졌다.
또한 비록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929년 즈음에 견훤은 승세를 타고 과거에 빼앗겼던 나주를 탈환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왕건이 수군을 몰고와서 나주 일대의 군현을 빼앗아간지 무려 20여년이 흐른 후였다. 비록 해전에 능한 왕건이었으나, 이미 참패를 당한 상태에서 나주를 구원할 엄두를 내지 못햇던 것으로 보인다. 직접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고려사》 유금필 열전에 왕건이 '6년전에 나주를 견훤에게 빼앗겼다'[50]는 언급에서 이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이로써 견훤은 고창전투에서 패배를 겪기까지 일생 최대의 세력을 거느리고 한반도 최강의 세력가로 떠오른다. 그때 견훤의 나이는 무려 62세였다.
고려와의 싸움에서 연승하며 기세를 휘어잡았다고 생각한 견훤은, 마침내 고창(오늘날의 안동시)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그동안 견훤은 경상도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고려군을 패퇴시켜 왔으며, 고창 지역은 경상도에 남아있는 고려군 최후의 보루였다. 929년 12월, 견훤은 3천명의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던 고창을 포위했다.
후백제군의 군세가 워낙 기세등등하였기에 한창 수세에 몰려있던 왕건은 차라리 고창을 포기할 마음까지 먹게 된다. 그러나 이때 고려군의 명장 유금필이 나서서 왕건에게 고창을 구원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때마침 견훤이 서라벌에서 경애왕에게 저질렀던 만행에 분개해있던 고창의 호족들인 삼태사가 적극적으로 왕건에게 협력해왔다.[51] 이들은 대대로 고창에 살아왔었기 때문에 고창의 지리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던지라 고려군에게 있어 막강한 지원 전력이 되어주었다.
견훤은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고창의 병산에 진을 친 왕건과 맞붙었다. 그러나 고창 토착 세력의 지원과, 희대의 명장 유금필의 활약에 힘입은 고려군을 감히 당해내지 못했다. 이 싸움에서 백제군은 참패를 당했으며, 8천명이나 되는 병력을 통째로 잃고 물러나야 했다.[52] 이를 후대에는 고창 전투라 부른다.
이 싸움의 여파는 실로 대단해서, 신라의 왕도인 경주를 비롯한 경상도를 거의 다 집어삼키고자 했던 견훤의 뜻은 완전히 좌절되었으며, 신라에 대한 영향력도 싸그리 잃고 말았다. 싸움의 주도권 또한 고려 측으로 넘어가, 공산 전투 이후로 구원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나주도 다시 고려군이 공격을 시도했다.[53] 이에 따라 후백제에 속했던 호족들의 이탈도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견훤은 고창 전투를 치른 다음날에 패하여 물러나는 와중에도 순주성을 습격하여 빼앗아버리는 저력을 발휘하였다. 성주인 원봉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성의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서 전주로 끌려갔다. 때문에 기록과는 달리 견훤이 고창에서 그리 크게 패하지 않았으며, 피해도 크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어느쪽이건 일단 견훤의 상승기세가 여기서 꺾인 건 맞다.
932년 6월, 견훤의 심복으로써 지략과 용맹이 남달랐던 장군 공직이 고려에 투항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견훤은 공직의 투항에 격분하여 공직의 두 아들 직달, 금서, 공직의 딸을 잡아 뒷발꿈치의 힘줄(아킬레스건)을 불로 지져서 끊어 버렸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고창 전투 이후로 견훤의 세력이 다시 꺾이면서 후백제의 여러 호족 세력이 고려에 투항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같은 해의 9월, 견훤은 다시 고려에 반격을 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는 이전의 싸움과는 달리 배를 이용한 수전이었다. 견훤은 수군장군인 일길찬 상귀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고려의 바다를 공격하도록 했다. 왕건은 본래 수전에 능했고, 그동안 견훤과 수전에서 맞붙어서는 패한 일이 없었는데, 견훤은 오히려 이 점을 노려 빈틈을 치고 들어간 것이다.
상귀가 거느린 후백제의 함대는 서해를 통해 예성강으로 들어와 무방비 상태의 고려 수군을 급습하였다. 상귀는 예성강 일대에서 3일을 머무르면서 염주, 백주, 정주 등에 정박해있던 고려의 선박 1천여척을 불지르고 300필의 군마를 약탈해 돌아왔다. 참고로 예성강 하류에는 바로 고려의 수도인 개경이 있다. 즉 후백제 수군은 적국의 수도 코앞까지 쳐들어가서 수군을 궤멸시키는 대모험에 성공한 것.
견훤은 예상 밖의 성공에 고무되었는지, 곧 이어서 장군 상애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대우도를 약탈하도록 하였다. 왕건은 이에 맞서 대광(大匡) 만세를 보냈으나, 그 역시 백제 수군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침 근방의 백령도에 귀양가 있던 고려의 명장 유금필이 인근 어부들과 병사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노략질을 일삼는 상애와 맞서 싸워 간신히 몰아낼 수 있었다. 이처럼 견훤은 수세에 몰려 있던 중에도 허를 찌르는 계략으로 왕건의 뒷통수를 치고, 고려 수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데에 성공하였다.
933년, 견훤은 맏아들인 신검에게 군사를 주어서 신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아마도 지난번 싸움에서 고려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했으니, 그 여세를 몰아 다시 서라벌을 점령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에도 고려의 명장 유금필이 후백제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80기에 불과한 병력을 급히 모아서는 신검이 지휘하는 후백제군을 뚫고 지나가 서라벌을 구원해냈을 뿐 아니라, 돌아가는 길에 다시 신검의 군사를 만나 이를 물리치는 등 후백제군을 철저히 농락하며 큰 굴욕을 안겨다주었다.
이듬해인 934년에 들어 왕건이 반격을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운주(오늘날의 홍성)를 공격해오면서 견훤 역시 친정을 감행, 다시 고려군과 맞붙었다. 견훤은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군과 대치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고려군에 사신을 보내 싸움을 멈추고 화친을 권했다. 이에 왕건도 마음이 흔들렸으나, 고창 전투에서 맹활약했던 명장 유금필이 이를 반대하면서 후백제군과 결전을 벌일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결국 이 싸움에서 백제군이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 유금필이 수천명의 기병을 이끌고 기습을 가했고, 고려군의 압승으로 끝이 났다. 유금필의 기세에 밀린 견훤은 또다시 참패하여 3천명의 군사를 잃는 피해를 입었다. 뿐만 아니라 술사 종훈, 의사 훈겸, 백제의 용장인 상당과 최필 등이 고려군에 사로잡혔는데, 왕의 최측근에서 보좌해야 할 왕의 심복과 주요 장수들이 사로잡혔다는 사실은 당시 견훤이 유금필의 기습 공격에 사령부까지 붕괴되어 일방적으로 달아나기 급급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사령부가 붕괴되었다는 것은 견훤의 가장 핵심 주력군이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견훤으로서는 치명적인 패배였을 것이다.
이 운주성 전투로 인하여 고려는 결정적으로 승기를 잡은 반면, 후백제는 점점 나락행 테크를 밟기 시작했다. 공주 일대의 30군현, 동해 연안의 110여개의 성이 고려에 투항하는 등 호족들의 이탈도 심해져만 갔다.
2.8. 몰락과 말년(935년 음력 3월 ~ 936년 9월)[편집]
운주 전투에서 참패하고 돌아온 노년의 견훤은 뒤를 이을 후사를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견훤은 평소에 자신이 총애하던 총명한 넷째 아들 금강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는데, 견훤의 장남이었던 신검은 이를 알고는 번민하다가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찬 벼슬을 지내던 능환은 신검과 결탁하여 신검의 두 아우인 강주도독 양검과 무주도독 용검 등과 은밀히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 마침내 935년 3월, 파진찬인 신덕과 영순 등이 신검에게 권하여 난을 일으켰다. 신검은 아버지인 견훤을 폐위하여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로써 견훤은 왕위를 잃고 말았는데, 892년에 왕을 칭하며 세력을 일으킨지 43년 만이었다.[54] 견훤을 몰아낸 신검은 반발 세력을 억누르고 대왕을 자처했다.
《삼국유사》에서는 이 상황을 보다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른 새벽에 견훤이 잠들어있다가 대궐 뜰에서 고함소리가 들려 웬 소란이냐고 묻자 신검이 나타나 말하기를 "왕께서는 늙으시어 군국(軍國)의 정사에 어두우시므로 장자(長子) 신검이 부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해서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는 소리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견훤이 잠자리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멀리 궁궐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고 묻자 신검이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연로하시어 나라와 군대의 업무에 어두우시므로, 맏아들인 신검이 아버지의 왕위를 대신한다고 하자,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며 축하하는 소리입니다. 그리고는 곧이어 금산사 불당으로 아버지를 옮기고, 파달(巴達) 등 장사 30명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또한 《삼국유사》는 견훤이 금산사에 감금당한 후에 한 노래가 널리 퍼졌다며 소개하고 있는데 그 가사는 이와 같다.
고려 항복 이후의 관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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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고려(高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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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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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저 |
남궁(南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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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토 |
양주(楊州)[58] |
졸지에 장남에게 배반당해 권좌와 자식을 잃고 금산사에 유폐당한 견훤은 실로 엄청난 울분을 터뜨렸고, 반드시 빠져나가 복수할 것을 다짐했다. 결국 유폐된지 3개월만인 935년 6월, 견훤은 막내아들인 능예와 딸 애복, 애첩인 고비 등과 더불어 금산사를 탈출하는데 성공한다.[59]
금산사에서 탈출한 견훤은, 고려군의 영향권에 있던 나주로 향해 고려 조정에 입조하여 귀순할 수 있도록 허락해줄 것을 청했다. 이에 왕건은 크게 기뻐하며 유금필과 대광 만세 등을 보내 40여척의 배를 거느리고 가서 견훤을 해로를 통해 데려오도록 했다.[60]
견훤이 마침내 고려 왕궁에 이르자 왕건은 견훤을 깍듯이 예우하며 모셨는데, 그 대접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목을 노리고 으르렁대던 숙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왕건은 견훤이 자신보다 나이가 거의 10살 정도 많다고 하여 상보(尙父) 어르신이라 높여 불렀으며, 남쪽 궁궐에 거처를 정해주고, 그 지위는 고려 백관의 위에 두도록 하였다. 또한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으며, 금과 비단, 병풍과 금침, 노비 40명, 말 10필을 주었다. 또 후백제에서 투항해 온 자를 가신으로 붙여주어 불편함이 없게 하는 등 무진 애를 썼다. 공식적으로는 군주가 신하를 대하듯 상보란 호칭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상 대접은 상왕급으로 해준 것.
이처럼 왕건이 견훤을 환대한 것은, 물론 단순히는 손윗어른이요, 그동안 미운 정이 들어서라고도 할수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견훤이 후백제 침공을 위해 써먹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명분이 될 수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후백제가 연이어 패배해왔지만, 아직 비옥한 곡창 지대와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결코 고려보다 약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견훤에게 아무리 억만금을 주며 대접을 하더라도, 후백제 군의 사기 뿐만 아니라, 후백제 민중들의 민심, 통일 후의 정통성 등, 물질적으로는 가늠이 안되는 이익이 고려에게 돌아 온다. 견훤의 고려 귀순은 후백제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또한 견훤이 고려에 귀순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신라의 경순왕 역시 그해 11월에 고려 조정에 귀순했다.
견훤이 쫓겨난 후 그렇지 않아도 연이은 패배로 국운이 기울던 후백제의 앞날은 더욱 어려워졌다. 후백제를 건국한 주역인 견훤을 몰아내고 왕이 된 신검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이 대단했기 때문이다.[61] 게다가 견훤이 적국인 고려에 귀순하자 후백제에 속한 호족들은 심한 동요에 휩싸였다. 이 와중에 936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였던 장군 박영규가 그 아내와 더불어 왕건에게 내통하여 항복할 의사를 전해오기까지 하였다.
936년 6월, 견훤은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주청하였다. 왕건은 이에 호응하여 태자인 왕무(武)와 박술희 등으로 하여금 출정 준비를 서두르도록 명하니, 마침내 후백제와 고려 사이의 마지막 일전이 벌어지게 된다.[62] 그 해 9월에 왕건은 앞서 군사를 이끌고 천안에 가있던 왕무와 박술희 등과 군사를 합쳐 나아갔고, 신검 역시 이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였다. 이때 견훤 또한 왕건과 함께 출정했다.
그해 9월, 고려군은 일리천[63]을 사이에 두고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대치했다. 이미 70이 다 된 나이로 다시 전장에 나선 견훤은 왕건과 함께 고려군을 열병했다. 곧 십만여 명[64]이 넘는 고려군이 행진을 시작하니, 마침내 일리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한때 자신들이 모시던 왕이 적진의 선봉에 서있는 모습을 본 후백제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후백제군의 좌장군인 효봉과 덕술, 애술, 명길 등은, 고려군과 견훤의 위세에 겁을 먹어 무기를 버리고 견훤이 탄 말 앞으로 와서 항복하였다. 이들은 한술 더 떠서 신검이 백제군의 중군에 있다는 기밀도 알려주었다.
왕건은 곧 군사를 몰아쳐 신검이 지휘하는 중군을 공격하였으니, 이미 기세가 꺾여있었던 후백제군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이 싸움에서 후백제군 3천 2백여명이 사로잡혔으며, 5천 7백여명이 죽었다. 크게 패한 신검은 황산[65]까지 달아났다가 그 곳에서 두 동생인 양검과 용검, 장군인 부달과 소달, 그리고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는데 공헌했던 이찬 능환 등과 더불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후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왕건은 능환이 신검을 꼬드겨 아버지인 견훤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는 등 반역죄를 저지르게 만든 책임이 있다고 하여 참수형에 처하였고, 양검과 용검 등도 죄를 물어서 진주로 유배보냈다가 몇년 후 처형시켰다. 그러나 신검만큼은 남의 강요에 의해 원치 않게 왕이 되었으니 근본적으로는 죄가 가볍다하여 벌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목숨을 보전하게 해주었으며, 한술 더 떠서 관직까지 내렸다.[66][67]
2.9. 최후와 의혹[편집]
자신이 일으켰던 나라 후백제의 멸망에 기여한 견훤은 번민에 휩싸였다. 아무래도 자식들과 벌였던 권력 투쟁으로 인해 받은 마음의 상처와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의 손으로 망하게 한데에서 온 정신적인 고통이 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68] 결국 견훤은 936년, 황산[69] 근처의 사찰[70]에서 등창으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치게 된다. 자신이 세운 후백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겨우 며칠 만이었다. 이때가 향년 70세.
하지만 독살 또는 살해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죽기 직전까지 전투에 참전할 정도로 나름 혈기왕성했던 인물이 갑자기 등창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석연치 않다는 점.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다지 신빙성은 없는 추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견훤이 일리천 전투에서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창칼 들고 전투를 벌이는 역할을 직접 하지는 않았다. 고령의 나이인 탓도 있었지만, 얼굴만 보였는데도 백제군의 사기가 바닥을 쳤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었기도 했다. 또한 자기가 세운 나라를 자기가 나서서 멸망시키고 자신이 낳은 아들들을 처단하는 심적 고통이 병세를 악화시켰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게다가 등창(종기) 자체도 예상 외로 만만히 볼 것이 아닌데, 조선 시대까지도 왕들의 주요 사망 원인 중 하나가 등창이었을 정도로 당시에는 꽤나 심각한 병이었다.[71] 또한 왕건이 굳이 견훤을 제거할 필연적 이유도 없는 것이, 당시 후계자도 없는 견훤이 고려 왕의 상보로서 최대한 오래 살수록 후백제 부흥운동을 더 오랫동안 억제할 수 있기도 했다.[72] 그리고 그의 나이는 사망당시 70이었다.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도 고령의 나이이고, 건강관리를 잘 하는 사람이라도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 경우가 왕왕 있다. 특히나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의 손으로 갈아엎는데 크게 일조한것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을듯.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훤 독살설이 계속 제기되는 이유는, 박영규가 정종에게 두 딸을 시집보낸 것과는 별개로 견훤이라는 인물 자체가 왕건에게 꽤 껄끄러울 수 있었기 때문. 상보라는, 실권은 전혀 없더라도 왕 위에 있는 존재를 두는 것부터가 왕건에게는 정치적 부담이기도 했고, 아이러니하게도 후백제를 부흥시킨다고 하면 가장 큰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인물은 견훤 이외에는 없었다. 견훤을 보자마자 후백제군 상당수가 창자루를 거꾸로 쥐었다는 공식적인 기록까지 남아있는 형국이다. 견훤이 후백제였던 지역에 가지는 영향력은 매우 컸으며, 왕건에게는 그 영향력이 부담스러웠을 공산이 큰 것이다.[73] 물론 그와는 별개로 왕건이 견훤을 독살했거나 그의 죽음을 사주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사료대로만 생각하자면, 현대에도 정정하던 노인이 갑작스레 큰 스트레스나 충격을 받아 명을 재촉하는 경우는 흔하니 견훤도 말년에 겪은 사건들 탓에 건강을 해쳐 칩거하다 세상을 떴고, 견훤을 굳이 제거할 이유도 없었지만 살려둬도 나름의 부담이 있는 왕건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마지막 숙적이 없어진 정도였으리라 생각해도 아귀가 대충 들어맞는다.
3. 사후[편집]
견훤이 죽은 후에 그 시신이 어디에 매장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견훤이 사망한 황산, 즉 오늘날의 충남 논산에는, 견훤의 무덤이라 전하는 일명 견훤릉이 남아있다. 오늘날에는 견훤왕릉이라 하여 충청남도 기념물 제 26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본래에는 비석에 '견훤릉'이라는 글귀가 있었으나 사극 태조 왕건이 대히트를 치자 지역 사회의 관심이 늘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새로 비석을 세우고 글귀도 '견훤왕릉'으로 바뀌었다.
한편 견훤의 고향으로 알려진 경상북도 상주시에서는 견훤을 산신으로 추앙하였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조선 후기에 지역 주민들이 견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견훤의 사당은 아직도 남아있는데, 내부에는 '후백제 대왕 신위'를 모시고 있다. 다만 일국을 창건한 왕의 사당 치고는 너무도 작고 협소하여 망국의 한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견훤이 사망한 후에도 그의 후손들은 살아남아 고려 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계를 이어갔다. 아직까지도 견훤을 시조로 섬기는 전주 견씨[74]가 남아있으며, 무엇보다 견훤의 후손이 가문의 가계에 대해 남긴 기록으로 짐작되는 《이제가기(李帝家記)》의 일부가 고려 시대에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어 당시까지도 견훤의 가계에 대한 전승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능히 짐작케한다. 아쉽게도 이 기록은 현존하지 않고 《삼국유사》에 인용된 일부 내용만이 전해질 뿐이다.
일선에서는 견훤이 자신의 죽음을 알고 지금의 전주를 바라볼 수 있도록 묻어달라고 유언했다는 설이 있어 논산에 묻혀 멀리 전주를 보고있다고 한다. 태조 왕건도 이 설을 반영하여 견훤이 죽기 전 '완산주(전주)가 그립구나'를 유언으로 남긴다.
4. 가족 관계[편집]
견훤의 가족들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의 견훤 열전과 《삼국유사》의 견훤 열전 등에 남아있으나 저마다 차이가 있어 그 전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다.
《삼국사기》중 견훤이 조물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에서 견금강의 다른 표기인 수미강(須彌强)이 등장하며, 또한 사위로는 지훤(909~914년경 활동)과 박영규(935년 이후 등장)가 있었는데, 딸이 한 명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동일인이거나 선후해서 존재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는 지훤이 견훤의 사위가 되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이르기에 대주도금의 남편 정도 되지 않았을까 추측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
《삼국유사 - 이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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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처 |
미상 |
상원부인(上院夫人) |
첩 |
고비(故比) |
언급 없음 |
장남 |
견신검(神劍) |
성(成) |
차남 |
견양검(良劍) |
태사 겸뇌(謙腦) |
3남 |
견용검(龍劍) |
좌승 용술(龍述) |
4남 |
견금강(金剛) |
태사 총지(聰智) |
5남 |
언급 없음 |
대아찬 종우(宗祐) |
6남 |
미상 |
|
7남 |
좌승 위흥(位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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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남 |
견능예(能乂) |
태사 청구(靑丘) |
장녀 |
견애복(哀福) |
국대부인(國大夫人) |
이외에 월광(月光)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활동지역을 봤을때 견양검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불확실.
5. 평가[편집]
5.1. 긍정[편집]
견훤은 한때 고려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 세웠던 전적도 있었고, 1000년을 이어온 신라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던 임금이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훌륭한 야전 사령관에 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뛰어난 전술가적 면모도 갖추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별다른 빽도 없이 경주로 들어가서 본인의 무력적 소양 만으로 비장에 오른 것만 봐도 그 실력만큼은 확실하다. 그것도 부정부패가 하늘을 찔렀던 신라 말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대단한 것이다.
특히 순수하게 육상에서의 군사적 능력만으로 따지면 왕건보다 위로 유금필과 함께 후삼국시대 최고의 명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소수의 군사로 남해안을 휩쓸고 전라도 지역을 장악한 것도 탁월한 군사적 업적이라 볼 수 있지만, 2차례의 조물성 전투에서도 왕건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특히 걸작이라 할만한 것은 공산 전투다. 신라와 고려의 합작에 의해 전략적으로 상주 지방으로 진출이 봉쇄당하고, 북쪽의 고려와 동쪽의 신라, 남쪽의 대야성에 주둔한 김락의 군세에 협공당할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도, 고려군의 약점을 꿰뚫어보고는 고려군 전선의 간극을 치고들어가 금성을 유린하고, 급히 달려오는 왕건을 요격해 그야말로 박살을 내버렸다. 고창 전투에서도 호족 세력들이 왕건의 편을 들기 전까지는 후백제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물론 해전에서는 왕건을 제압하기가 어려워 나주를 빼앗겼지만, 이것도 나중에 제대로 반격을 개시하여 나주를 탈환하고, 예성강을 기습해 수도를 위협하는 등 고려에 큰 한 방을 먹이기까지 한다.
사실 견훤은 아주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라고 볼 수 있었다. 비록 아버지 아자개가 호족 출신이라고는 하나 그의 도움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말단 군인으로 시작해 불과 몇 년만에 중앙 조정으로부터 인정받아 장군의 자리에 올랐으며,[75] 사실 지방에서 세력을 일으키게 된 계기도 서남해로 발령받아 그 곳에서 스스로 병사를 모으고 힘을 길러 해적과 해상 호족들을 진압하면서부터였으니 그야말로 맨손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자수성가형 인물들이 대개 그렇듯이 성격이 독선적인 면이 강하다고도 한다. 그 결과, 호족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자인 신검 대신에 후처의 아들인 금강을 태자로 삼으려했다가 뒷통수를 맞았다는 평도 있다.
재능도 상당했지만 그 끈질긴 근성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무려 60대가 넘은 나이에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친정해 왕건과 맞붙어 수차례 승리한 바 있을 정도였으며, 그 오기와 끈기 또한 대단하여 신라로 통하는 요충지인 대야성의 경우에는 20여년간이나 끈질기게 공을 들인 끝에 점령하였고, 왕건이 궁예의 신하를 지낼 적에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빼앗아버렸던 나주를 다시 십수년의 공을 들여가며 키운 해군으로 도로 빼앗고, 그 여세를 몰아 개경 부근에까지 진출하여 군수 물품을 약탈해 왔다는 기록도 있으니, 그야말로 근성의 화신이라 불릴 만하다. 육전과 해전 양면에서 고려군을 잘근 잘근 씹어드셨다(...).
또한 《삼국사기》에 남아있는 견훤의 과격한 행보와 드라마 태조 왕건의 영향으로 대체로 호방한 성격 탓에 정치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의외로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유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호족들을 휘어잡는 솜씨는 호족들의 지역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천도와 개호를 반복하고 미륵 신앙을 이용해 공포 정치를 통한 왕권 강화를 시도하다 실패하여 자멸한 궁예를 능가했으며, 나주 지역의 지지는 얻는데 실패했다는 점을 고려해도, 사성 정책과 결혼 동맹으로 철저한 왕권 강화보다 호족간 군신의 동맹을 맺는 차원에 머문 왕건과 견줄만 하다. 비슷한 시기에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던 궁예가 결국 중앙 집권화에 실패하여 호족의 대표격인 왕건의 손에 죽었고, 광종 이전의 초창기 고려가 호족 연합 국가 성격을 띄게 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당장 일개 군졸들이 견훤이 고려에 투항해 자신들앞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 사기를 잃고 고려에 믾은 수가 항복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에 대한 백성들에게 신뢰감이 대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예와 달리 이렇다할 공포정치는 펼치지 않았으나, 정작 후계 문제를 원활하게 처리하지 못했고, 최승우를 비롯한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아서 고창 전투의 패배로 비극을 당하게된다. 그래서 《삼국사기》와 달리 《삼국유사》에서는 나름 재평가를 받았다.
5.2. 비판[편집]
탁월한 군사적 역량과 결단력과는 달리 장기적인 비전면에서는 왕건에 못 미쳤다. 완산주를 수도로 삼았음에도 나주의 호족들과 화합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양면 전선을 초래해버린 것은 물론, 전광석화 같이 신라를 급습하고 공산에서 대승을 거두는 전과를 올렸음에도 신라에 친 백제 세력을 구축하는데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물론 견훤은 직접 경순왕을 옹립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이후 경순왕이 금세 친 왕건쪽으로 기운 것으로 볼 때 견훤이 신라에 대해 지속적인 영향력을 구축하는데는 끝내 실패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게다가 신라의 왕은 물론 귀족들까지 학살하고도 별다른 대책 없이 홀연히 도성을 뜬 결과 신라 및 신라를 기반삼아 살던 호족들은 자연히 신라에 유화적이었던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고창 전투에서의 참패라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결국 견훤이 연전연승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후백제의 세력은 좋았던 결과에 비해 크게 불어나지 못했고, 호족 세력을 포섭하는데도 실패했다.
사실 서라벌 습격 자체가 견훤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는 평가도 왕왕 제기되는 편이긴 하다. 견훤은 고려와 신라의 연합 전선을 어떻게 해서든 무마시키기 위해 그 포위망을 절묘하게 뚫고 서라벌을 습격해 들어간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서라벌 습격은 신라를 완전히 고려 쪽으로 기울게 만든 악수로 작용해 버렸다. 당시의 군대는 약탈이 없을 수 없다지만, 견훤은 고립된 상황에서 직진 돌파를 밀어붙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약탈은 정도가 더 심했고 인근 호족들의 지지를 완전히 잃어버려 대세가 완벽히 고려로 넘어가게 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더군다나 서라벌을 함락시킴으로써 신라에 충성하던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마저 신라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잘 구슬려서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라도 시도해야 했지만 서라벌에서 이미 깽판을 친 데다 비록 개박살나긴 했어도 구원군을 보내준 왕건과 대비되어 신라에 충성하던 호족들의 지지는 고려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문제는 또 있었는데 바로 경순왕이었다. 경애왕까지 신라의 왕은 일시적으로 다시 박씨에게 넘어간 상황이었는데, 경순왕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왕권에 가깝고 오랫동안 집권했던 정통성이 있는 김씨였기 때문에, 신라 왕실을 와해시키기는 커녕 도리어 가장 정통성이 있는 인물을 임금으로 만들어 왕권의 정통성을 끌어 올려준 셈이 되었다. 물론 서라벌 강습 자체는 고려와 신라의 연합 전선을 끊기 위한 전술로서는 최적의 판단이었을지 모른다. 서라벌에서 처신을 나름 잘 했더라면[76] 전략적으로도 좋은 판단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이 없었던 견훤은 서라벌에서 최악의 판단만 거듭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견훤에게도 삼한통일을 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바로 왕건의 쿠데타로 궁예가 몰락했던 즈음인데, 왕조 자체가 뒤바뀌는 상황 속에서 친 궁예 세력의 이탈이 끝없이 벌어졋다. 굵직굵직한 것들만 나열하자면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건의 목에 칼을 겨눈 환선길, 왕건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흔암, 서원경(청주)세력의 임춘길 그리고 명주(강릉)의 김순식 등이 모두 이 즈음 왕건에게 반기를 들었던 세력들이었다.[77] 철원에서는 끝없이 왕건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지방에서는 성주들이 후백제에게 투항해 버리는 등 왕건의 쿠데타 직후 고려는 공중분해되고 있었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절호의 호기였던 셈이다.[78] 이런 상황에서 만약 견훤이 '(궁예의) 왕위를 찬탈한 역적(왕건)을 토벌한다'를 구실로 토벌군을 일으켜 고려를 공격했다면 승산이 얼마나 되었을까? 하지만 견훤은 이런 엄청난 호기를 그냥 흘려보내면서 도리어 왕건에게 즉위 축하 사절단을 보내버렸고[79], 외부에서의 지원이 없어 왕건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왕건의 통치 기반을 안정화하는데 이바지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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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과연 이 때가 견훤이 왕건을 공격할만한 찬스였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다. 우선 환선길은 혁명 3일만에 어설프게 쿠데타를 일으켜 후백제가 연계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고, 마찬가지로 6월에 죽은 이흔암은 정사의 기록에서조차 쿠데타 시도가 있었는지도 애매해 그냥 환선길에게 엮여서 예방 숙청된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며, 임춘길은 9월에서야 변경인 서원에서 반란을 시도했다가 세력 전체가 일거에 제거되었다. 명주의 김순식은 후백제로서는 너무나 먼 거리라 답도 없었다. 후백제가 고려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918년 8월로 이미 이흔암이 숙청된 이후이며, 임춘길의 반란모의가 있기 1달 전이었으니 일단 환선길-이흔암이 숙청된 시점에서 더 이상 손을 쓸 도리가 없다고 판단했을 공산이 크다. 그리고 고려는 이런 문제들을 대강 덮자마자 그 해 9월, 즉 혁명 3개월만에 아자개의 귀부라는 초특급 이벤트를 일으켜 왕건의 지배체제가 공고함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무엇보다 궁예는 미륵부처를 자칭하며 대놓고 마진 불교계에 피비린내나는 숙청을 벌였고, 그로 인해 궁예를 몰아냈으며 도선대사가 엮여있는 왕건의 고려 정권은 당대 한반도 불교계의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당시 고려의 수도는 내륙의 철원이었고, 후백제는 다 망해가는 신라의 대야성조차 뚫지 못한 채 털레털레 돌아온 게 2년 전이었다. 즉 후백제도 나름대로 내부 정비와 준비의 시간이 필요해 일단 왕건에게 유화책을 썼던 것이지, 단순히 반란 모의가 몇 건 있었다고 해서 후백제의 공세가 필승이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후에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에도 고려는 견훤의 귀부를 준비했지 즉각 후백제를 침공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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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가지 견훤의 1차 목표는 바로 신라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우주방어하던 대야성이었다.[80] 때문에 대야성에서 5차례나 전투가 벌어진 것인데, 왕건이 고려의 주인이 된 918년에서 2년 뒤인 920년 3차 대야성 전투에서 마침내 후백제가 대야성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진례성(오늘날 창원시)까지 진격했는데 신라가 고려에 구원요청을 하여 왕건이 군사를 움직이자 더는 진격하지 않고 물러났지만, 그래도 후백제의 오랜 숙원이던 대야성을 점령한 것이다. 후백제는 신라와 전쟁할 때도 대 고려 전선에 상당수 수비 병력을 배치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삼국사기 견훤 열전에 1만의 대군을 투입했다고 특별히 기록된 걸로 보아서 고려와 화친을 맺고, 대 고려 전선의 병력 일부도 대야성에 보내 총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왕건이 병력을 보내자 무리하지 않고 물러난 것이다. 이를 볼때 견훤은 고려의 내란 당시 이 혼란을 이용해 고려에 침공하는 것과 신라에 침공하는 것을 저울질 하다가 일단 왕건과는 화친하는 척 하고, 숙원이던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기로 결심한 듯 하다. 아직 국내가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던 왕건으로서는 견훤과의 화친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으니, 후백제에 선공을 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견훤은 고려와의 화친을 이용해 대야성을 점령함으로서 충분히 이득을 보았다. 이 부분을 기록한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견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상극이었다.'고 말하듯이, 애초에 견훤의 화친은 진짜로 고려와 화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철저히 이용해 신라를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위에 언급되었다시피 비교적 빠르게 안정된 고려를 치는 도박에 걸기보다 대야성이라는 확실한 이득을 취했으니, 이걸 실책이라 해야할지는 의문이다. 잊지 말아야 하는건 대야성은 그저그런 신라의 성들 중 하나가 아니라 이걸 뚫으면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거기다 기왕에 고려와 신라 양쪽 중 하나를 고르자면 당장 오늘내일하는 신라가 만만찮아보이는 고려보다 더 좋은 선택지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후에 견훤은 서라벌에 쳐들어옴으로서 신라가 자기 나라 하나 건사하기도 어렵다는걸 증명했으니 이런 판국이니 대야성을 먹어서 신라를 먹을 발판을 마련하는게 고려와 싸우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을만 하다. 여기에 고려는 나주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진짜 정면으로 붙으면 최악의 경우엔 북에서 남에서 고려가 공격해올 수도 있는 양면전선이라는 불리한 지경에 있었다.
또한 후계자 문제에서도 신료 및 호족들의 반대에도 기어이 장남 신검이 아닌 금강에게 물려주려 했던 것이 치명타로 작용해버렸다. 차라리 제2대 왕은 신검이, 제3대 왕은 금강이 왕위를 승계받는 형제 세습 방식의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아예 주변에서 반항을 못하게 찍어눌러놨다면 또 모를까.[81] 본인의 선택이 결국 마지막 지지 세력까지 홀라당 날려먹은 꼴이 되었다. 결국 본인은 아들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채 처참히 유폐당하는 신세로 전락했고, 이후 후삼국 통일의 대업은 왕건이 이루고 말았다. 이는 부견과 같은 결말을 맞이한 것과 비슷하다.[82]
《삼국사기》 열전은 바로 견훤 열전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고려의 통일을 진정한 통일로 보는 김부식의 시각 때문이라고. 김부식은 사론에서 궁예와 견훤을 함께 평하고 있는데, "옛적 중국의 항우나 이밀은 뛰어난 재주를 가져도 결국 한나라와 당나라의 흥기를 막지 못했는데, 궁예나 견훤 같은 흉한들이 어찌 우리 태조께 대항할 수 있었겠는가? 이들은 모두 우리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모아준 이들일 뿐이다"라는 평가를 남기고 있다.
6. 성에 대한 논란: 견훤인가 진훤인가[편집]
이름을 진훤으로 읽어야 한다는 설이 있다. 甄은 성으로 읽을 때 보통 진으로 읽기 때문이다(견희로 알려진 문소황후 진(견)씨처럼). 거기다 안정복이 '동사강목'에 甄의 음을 진(眞)이라고 쓰고 있는 것도 근거 중 하나다. 때문에 이 인물을 다룬 이도학 교수의 책 제목은 대놓고 진훤이라 불러다오이며, 이이화 등 다른 몇 사학자도 저서에서 진훤으로 표현하고 있다. 과연 옳을까?[83][84]
이는 피휘로 발생한 것이다. 중국 삼국 시대에 손견의 견(堅)자와 더불어 발음이 같은 견(甄)자를 사용할때도 같은 발음을 피하기 위해 진이라고 읽게 되었고, 이것이 신라에도 들어와 발음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손견은 오나라에서 시조 무열황제라는 시호를 받고 황제로 추숭된 인물이며, 이 때문에 피휘가 이루어진 것이다. 삼국지에서 피휘의 대상이 되는 인물로는 손견, 조조, 관우, 사마의 등이 있다.
이에 대한 반박도 있다. 중국에서 甄을 뭐라고 읽든(甄의 중국어 발음은 Zhēn이다), 한국에는 한국 고유의 독자적인 음이 있고,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예로 김씨가 있다. 金은 중국에서는 금이라는 뜻으로 부르든 성씨로 부르든 발음은 동일하게 jīn 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성으로 부를 때나 지명에서 사용할 때는 김해, 김천, 김제의 예에서 보듯이 항상 김이라고 한다.(다만 금천(金川)이라든가 최근에 金자를 넣어 만든 지명은 예외적으로 금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견씨 족보에 비록 고려 시대에 진씨를 견씨라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다른 역사적 사료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족보는 원래 조작이 심하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는 거의 인정받지 못한다. 게다가 한국의 족보 자체가 거의 조선 시대 중후기에 만들어진 것[85]이기 때문에 족보가 만들어질 당시에 잘못된 사실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김씨도 예전에는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며 나무(木)을 이기는 쇠(金)라고 하여 김씨로 바꾸게 했다는 드립이 있었지만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한국의 견씨가 항상 견씨라 불려온 이상, 견훤은 당연히 견훤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뭐라고 부르든 한국에서 견씨(甄氏)를 견이라고 부르는 이상, 문소황후도 진희가 아닌 견희라고 불러야 한다는 설 또한 상당히 강력하다. 비슷한 예인 김용, 김일제, 김성탄의 경우, 중국 발음에 상관없이 한국에서 金을 김으로 읽기 때문에 다 김이라고 표기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도 있어서, 금용, 금일제, 금성탄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소수 존재하고 있다.
더구나 견훤의 甄자가 성씨로 쓴 것인지부터 알 수 없다. 기록된 그의 가족의 이름을 보면, 견훤만 甄자를 쓰고 있다. 아버지는 아자개, 동생은 대주도금, 아들은 신검, 금강 등, 모두 견자를 쓰지 않고 있다. 또한 몇몇 고위 귀족가문을 제외하면 성씨 사용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신라 말기의 상황에, 지방 호족 출신의 군인에 불과했던 견훤의 출신을 생각하면, 甄자를 성으로 보고 진훤이라고 부르는 것은 성급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86] 물론 이 시대는 성을 직접 만들던 시기이므로 일말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해도 아들들이 모두 甄자를 쓰지 않는 것을 보면[87] 견훤에게 따로 성이 없었거나, 있었어도 기록이 되지 않았다고[88] 보는 것이 맞을 수도 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견훤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아보인다.
이쪽 견해를 참조해 보는 것도 좋겠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관용적으로 굳어진 견훤을 사용하는 게 가장 무난하다는 것. #
7. 여담[편집]
이덕무가 쓴 청장관전서에 의하면 견훤은 후백제 도성에 전국에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서적을 모두 수집했다고 한다. 하지만 후백제가 멸망하면서 전부 불태워졌다고... 물론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8. 대중 문화 속의 견훤[편집]
자세한 내용은 견훤/대중매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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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망국의 군주라 묘호 및 시호가 없고 다만 재위시 미칭밖에 없다.[2] 태봉의 궁예도 정개(政開) 연호를 썼는데 한자가 다르다. 한국어나 일본어 위키 등에서 정개 원년을 후백제가 건국된 900년으로 잘못 서술한 내용이 있다. 하지만 편운화상부도비의 명문으로 보아 정개 원년은 901년이 맞다.[3] 당시에는 "후"백제가 아닌 "백제"였다. 현재 국사에서 사용되는 '후'는 역사가들이 분류를 위해 갖다붙인 것이다. 비슷한 예로 본래 이름이 조선인 고조선이 있다.[4] 성씨로 쓸 때는 "진"이라고 읽는다는 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 참조.[5] '훤'자의 특성상 견휜으로 잘못 읽는 사람도 가끔 보인다.[6] 이씨(李氏)로 아들과 성씨가 다르다.[7] 현 대한민국 경북 문경시 가은읍.[8] 현 충청남도 논산시.[9] 칭왕한 해. 《삼국유사》에서는 칭왕한 시기에 대해 892년 혹은 889년이라고 두 가지 전승을 모두 쓰고 있는데, 삼국사기 열전에서 경인(庚寅; 930년)이 후백제 42년이라고 하고 있으므로 역산해보면 889년 칭왕이 맞다는 설도 존재한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826쪽).[10] 공식적으로 후백제 왕조를 건국한 해.[11] 견훤의 출생년도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12] 이 지역에서는 아직도 구비 문학 답사를 가면 견훤 설화가 나온다.[13] 당시에는 상주시가 지금보다 규모가 컸다. 애초에 경상도가 경주시의 "경"과 상주시의 "상"을 합친 것이다.[14] 885년~887년 사이의 시기이다.[15] 선품공이 문무왕의 장인이라는 기록이 정사에 있다.[16] 사극인 태조 왕건에서의 박술희와의 로맨스는 사실이 아니지만 이 이름들은 모두 역사에 있는 이름들이다.[17] 또는 새벽에 남자가 거대한 지렁이의 등에 그 실이 꿰인 바늘을 뽑아 꽂아놓고 어딘가로 가버린 후 다시는 여자에게 나타나지 않았다고도 한다.[18] 견훤을 상징하는 동물이 지렁이다. 견훤의 아버지가 인간으로 둔갑한 지렁이라는 설화도 존재. 지렁이는 토룡(土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9]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왕건과 견훤 세력 둘 다 전염병으로 고초를 겪고 있을 때 견훤은 지렁이를 달여먹어 병을 고쳤다는 묘사도 나온다. 여기서는 견훤의 친부가 살아 등장하기 때문에 태몽이 지렁이였다는 식으로 변형했다.[20] 족보 기록상의 내용이기에 신뢰하기는 어렵다.[21] 비록 아자개가 농민이라고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후에 호족 세력으로 성장한 것을 보면 적어도 어느 정도의 부를 갖춘 부농 정도의 신분이었거나 고향에서 위세를 떨치던 토호 세력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추측되기도 한다.[22] 견훤은 아버지 아자개의 성씨인 이씨 성을 버리고 견씨 성을 취했다. 때문에 견훤이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는 설이 있다.[23] 일본 측 기록으로 서술이 애매해서 견훤이 자칭한 것인지, 일본이 견훤이 전주 지역의 통치자라 부른 것인지는 알 수 없다.[24] 견훤이 일본에 외교사신을 보냈을 때 일본은 견훤을 도통(都統) 견공(甄公)이라 칭했다. 고려사 전라도 지리지에선 서면도통(西面都統) 견훤이라고 기록했다.[25] 이상 직위 및 훈작의 뜻은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 참조.[26] 사실 후백제 건국 이후에도 마치 신라왕이 고려왕이나 백제왕보다 명분상 상위에 있다는 듯한 언급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 기록에서까지 계속 종종 등장한다. 예를 들어 견훤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틀 것을 요청하자, 일본 조정에서는 견훤이 왕이 아니라 신라의 도통(위에서 나오는 서면도통)에 불과하다는 핑계로 이를 거절하였다. 때문에 이 시기의 신라 왕실이 비록 실권은 잃었어도 마치 전국시대의 주나라 천자나 삼국지의 한실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견훤이 경애왕을 시해하자 왕건은 견훤을 동탁에 비유하며 비난하기도 했다.[27] 원종 애노의 난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28] 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6.[29] 물론 양길은 거부했다.[30] 지금의 익산이다.[31] 백제는 금마산에서 개국하지 않았지만 견훤의 연고지가 완산이라 그렇게 말했을 가능성도 있다.[32] 삼국시대에도 마한이 존속하다 백제에 가장 마지막에 편입된 지역이다. 즉 백제였던 기간이 비교적 짧았던 곳이다.[33] (이후 생긴 후당은 좀 멀쩡하긴 했다.[34] 사실 궁예는 거란과 몇 차례 사신을 주고 받으며 외교 관계를 이어간 적이 있지만 중원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후의 왕건은 초기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다가 중국의 후당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정통성 강화와 거란 견제를 위해 중원과의 외교 관계를 맺어 자체 연호를 폐지하고 933년부터 후당과 후진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35] 하지만 吳越國의 책봉은 정통성이 아주 높다고 할 수는 없다. 唐은 번진들에게 자신들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위치에 있었고, 五代의 국가들이 唐을 계승하면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또한 강남지역의 十國들 중에서 吳越은 최강국에 있지도 않는 해안가 국가였다.[36] 족보대로라면 굳이 백제의 귀족 성씨 중에 하나인 진씨와 같은 발음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다.(일단 부여융의 후손이라고 하는 자처하는 부여 서씨의 경우를 보면, 원래 성씨였던 扶餘씨가 夫餘로 바뀌고 이후 徐로 글자를 변형시켰을 것이라는 비교적 합리적인 논거를 말하지만, 견훤의 경우에는 아주 오랫동안 신라의 영토였던 상주 출신에, 본래 성씨도 이씨였다고 하니, 부여융의 후손이라고 볼만한 근거가 영 부족하다.) 그리고 족보의 특성상 과장이나 미화가 있을 수 있다.[37] 훗날 중국 사신한테 이게 진짜냐고 거의 망신을 당했다.[38] 아무래도 이후로 나주 일대가 후백제의 세력권에 들어간 듯 하다.[39] 나주 공방전에 대한 기록은 특히 고려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40] 본래 나주는 금성이라 불렸으나, 이후로 이름이 바뀌어 나주로 불리게 되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게, 신라 중대까지 무진주(광주)가 전남을 대표하던 지역이였으나, 이후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나주가 전남을 대표하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全羅道는 全州의 全과 羅州의 羅에서 나온 명칭이다.>[41] 견훤의 맏아들인 신검 혹은 넷째아들인 금강과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연개소문의 사례를 보면 금강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42] 지금의 부산광역시 영도구. 섬의 이름의 유래는 삼국지 미디어에서 조황비전과 함께 명마로 나오는 절영과 같다.[43] 《고려사》에서는 준마로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갈기와 꼬리가 푸른 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는 이런 말을 섬에 따로 마련한 목장에서 기르는 경우가 많았다.[44] 여담으로 일설에 따르면, 후에 견훤이 한 점술사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술사가 이르기를 "왕의 무용과 위세가 훌륭하니 후에 큰 대업을 이루실 것이로되, 혹 한 준마가 고려에 간다면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라 하니, 견훤이 놀라 급히 왕건에게 말을 돌려줄 것을 요청했고, 왕건은 웃으면서 말을 보내주었다고 한다.[45] 《삼국사기》에서는 왕건이 전세가 불리해져 화친을 청했다고 기록했지만, 《고려사》는 견훤이 먼저 화의를 청하였다고 기록했다.[46] 이에 대해서는 진호가 정말로 암살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왕식렴 암살 배후설을 썼다.[47] 놀던 게 아니라 천지신명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던 거라는 설도 있다.[48] 이 편지에서 '내 소원은 평양성의 문루에 활을 걸어 두고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다.'라는 문구가 나왔다. 즉 고려를 멸망시키고 싶다는 뜻.[49] 후에 왕건은 수급이 효수된 신숭겸의 시신을 찾아내, 황금으로 수급을 주조하여 후히 장례를 치러줬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50] 935년에 해당하는 해에 말했다.[51] 이들 삼태사들은 김선평, 권행, 장정필 등이었는데, 훗날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의 시조들이다.[52] 고창 일대의 30개 군현이 고려에 투항하여, 신라는 수도 경주와 인근 동해안 일부 지역만 남았고, 그 일대를 제외한 경상도를 집어삼킨 고려에 포위되면서 일방면해국으로 전락한다.[53] 다만 기사에 따르면 함락했는지 여부는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유금필을 필두로 한 공세작전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54] 후백제를 건국했던 900년을 기준으로 한다면 왕위에 35년간 있었다.[55] 이 노래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한데, 평생의 가업을 망친 견훤의 탄식이라는 견해, 강력한 군주였던 견훤을 잃은 후백제 백성들의 한탄이라는 견해, 부왕을 쫓아낼 수밖에 없었던 신검의 고뇌라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마지막 해석의 경우 신검이 자의로 반란을 일으켰다기보다는 견훤에게 불만을 품은 파벌들에 의해 옹립되었다는 견해와 맞물리는 듯.[56] 고려에 항복 후 태조에게 받은 존칭.[57] '父'의 독음이 '부'가 아니라 '보'인 이유는 링크 참고.[58] 현 대한민국 경기도 일대.[59] 《삼국유사》에서도 《고려사》나 《삼국사기》와 비슷하게 진행되지만, 감금당한 지 1달만인 935년 4월에, 견훤이 금산사를 지키던 파달 등 30명의 장사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 달아났다고 전하고 있다.[60] 현재 시판 중인 몆몆 간단하게 만든 어린이용 위인전이나 한국사 서적에서는 견훤이 페위 후 후백제를 탈출할 때 당시 고려의 월경지였던 나주에서 배를 타고 해로로 고려에 가지 않고 후백제-고려 본토 국경을 넘어 육로를 거쳐 고려 본토를 통과해서 왕건을 만나 고려에 귀순했다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61] 신검은 935년 3월에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본격적으로 국정을 장악하여 사면령을 내린 것은 수개월이 지난 10월의 일이었는데, 신검에 반대하는 세력이 그만큼 많았음을 뜻한다.[62] 사실 왕건이 견훤이 청할 때까지 진작 출병하지 않았던 것은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망명은 망명이고 타국의 왕은 타국의 왕이니 '견훤이 고려로 망명했다'가 신검을 칠 근거가 되진 못했을 것이고, 만약 그 시점에서 무리하게 출정했다면 설령 신검을 이겼다 하더라도 명분이 없는 '침략자'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왕건은 '견훤이 범죄한 아들을 치기를 요청한다'는 명분이 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63] 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64]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진 것이고 《고려사》에는 8만여 명이라고 적혀있다.[65] 오늘날의 충남 논산 연산면, 공교롭게도 백제의 운명을 결정지은 바로 그 황산벌이다.[66] 다만 《삼국사기》에서는 신검 역시 아우인 양검, 용검 등과 함께 처벌을 받아 죽었다는 설이 있다며 주석을 달고 있다.[67] 실제로 학계에서도 후백제 멸망 몇년 뒤에 비밀리에 처형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유력하게 보고 있다. 사실 양검과 용검 형제도 진주로 유배를 떠났다가 얼마간이 지나고 처형이 집행되었는데 신검은 후백제의 전 임금이기도 했으니 당연히 당장 처리하는데 있어서도 여러모로 부담이 갔을 것이다. 그리고 관직까지 하사받았음에도 이후 더 이상 기록에 등장하지 않은 것도 꽤 수상한 부분. 총체적으로 보면 제거된 것이 유력해보인다.[68] 《고려사》에서는 자신을 배신한 신검이 멀쩡히 살아나가자 이에 울화가 치민 탓에 병이 들었고 곧 승하했다고 전한다.[69] 훗날 태조 왕건이 '천호산'으로 개칭한다.[70] 개태사로 추정된다.[71] 고려나 조선의 여러 임금들도 등창이나 종기가 직간접적으로 작용하여 승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고려 예종이나 조선 효종이 대표적인 케이스.[72] 사실 후백제의 왕족과 지배층들 다수가 신검의 쿠데타와 일리천 전투에서의 패망으로 싹 다 갈려나갔고 왕실의 중심 인물이자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도 신검에 반기를 들며 고려와 내통한 데다 고려 왕실과 혈연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부흥운동의 주체가 될 인물부터 없었다. 견훤 본인이야 그럴 기력도 없었고.[73] 실제로 현재 후백제의 도성이 있던 전주에는 그 흔적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데, 이것은 후백제가 추후에 해당 지역에 미칠 파급력을 경계한 왕건의 주도로 수몰되었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있다.[74] 2000년 기준으로 전주 견씨는 219가구 총 748명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후에도 딱히 크게 벼슬을 했던 인물이 없어 족보 위조의 영향도 적었을테니 아마 실질적인 견훤의 후손들이라고 해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참고로 탤런트 견미리가 바로 전주 견씨이다. 참고로 견훤의 조카들은 할아버지성인 이씨에서 견씨로 성을 바꿨는데 견훤의 조카들은 고려에 귀부했어도 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을 나름 자랑스러워했던 걸로 여겨진다.[75] 사실 엄청나게 대단한 것이 견훤 이전에 지방 출신으로 중앙 조정에서 직접 벼슬을 제수받은 사례는 역사상 장보고밖엔 없었다. 더구나 당시 골품제라는 신분적 질서가 신라 전체를 강하게 옭아매던 시기였다.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공을 세워 돌아온 뒤 세력을 키워 동아시아 해상 무역을 장악한 뒤에도 중앙 귀족들에게 지방 출신이라고 천한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견훤이 비장 벼슬을 얻은 것 역시 대단하고 볼 수 있다.[76] 굳이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는 극단적 선택을 저지를 필요도 없었고, 항복만 시켜서 고려와의 관계를 끊게 한 다음, 살려둔 채 물러나는 것도 장기적으로는 꽤 좋은 방안이었다. 굳이 경애왕을 제거하고 후백제의 말을 잘 듣는 새로운 괴뢰 임금으로 바꾸고자 했다면, 정통성이 매우 떨어지는 인물을, 그러니까 김씨 방계나 박씨 방계 내지 석씨 같이, 원래 왕이 될 수 없는 계통의 인물을 옹립했어야 하는건데, 하필이면 견훤이 경애왕 제거 후 신라 새 군주로 세운 경순왕은 정통성이 가장 높은 김씨 직계 출신이었다. 그리고 후백제군이 서라벌 습격 이후 신라에서 철수하자, 경순왕은 보란듯이 후백제와의 외교를 끊어버리고는 고려와의 친교 노선을 강화하여 멸망하는 그날까지 후백제와 으르렁대었다.[77] 나중에 김순식은 왕순식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왕건 편에 서게 되지만, 나머지는 왕건에게 토벌되어 패사했다.[78] 애당초 고려는 초기에는 건국 4일만에 반역자가 나올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갔다. 반면에 당시 견훤은 즉위한지 벌써 20년 가까이 되었기에 왕건보다 기반은 꽤 굳건한 편이었다.[79] 오히려 정통성을 인정해준 꼴이다.[80] 이 3차 대야성 전투를 마지막으로 신라는 후삼국시대의 주요 전투에서 더 이상 주역으로 등장하지 않으며, 이후는 오직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전투만 이어질 뿐이다. 3차 대야성 전투에서 신라의 마지막 주요 전력이 사실상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81] 전자는 중국의 위촉오 삼국시대때 오나라의 손책과 손권의 사례가 있고, 후자는 태종이 행해서 세종이 물려받기 쉽게 만들었다.[82] 흔히 남북조시대로 따지면 궁예는 양무제였고, 견훤은 부견이고, 왕건은 수문제라고 보면 된다. 태조 왕건도 수문제처럼 자식농사에 문제가 있었다 보니 혜종, 정종 두 왕이 오래 가지 못했지만, 이후 망한 형들의 뒤를 이은 광종이 당나라의 당태종이나 조선 태종 이방원 급의 수성을 보여주며 허약했던 고려의 왕권 체제를 확고하게 했기 때문이다.[83] 만일 견씨를 진씨로 바꿔 읽는다면 견미리씨와 같은 현대 한국의 견씨 성을 지닌 사람들이 전부 진씨로 바꿔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견씨들의 개인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듯 하지만, 그동안 역사책 등으로 알려진 조상 이름도 고쳐쓰게 만든 근성의 문화 류씨가 있다.[84] 견씨 집안에서는 고려 왕조의 탄압을 피해 성의 음을 바꿨다고 전해지므로 조상님만 음이 변해도 상관없을 듯 하다.[85] 한국 역사상 만들어진 시기가 확인된 것 중 가장 오래된 족보는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문화 류씨 영락보이지만 이건 서문만 남아있고, 성종대 편찬된 안동권씨 성화보가 본문이 남아 있는 최초의 족보이다. 즉, 고려 시대 이전을 다루는 족보 기록들은 신뢰도가 제로다. 사료가 정말 없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족보를 참고하는 경우도 있지만, 발해사 연구하는데 협계 태씨 족보를 활용했다가 망했던 북한의 예처럼 사료비판이 정말로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결론만 무수히 나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86] 동시대에 북방의 호족 출신인 왕건 역시 2~3대 올라가면 원래는 성씨가 없었다가 비로소 왕씨를 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정황이 있다. 왕륭 문서 참조.[87] 다만, 맏아들 신검이 '견성(甄成)'이라는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긴 있다.[88] 그러니까 甄자가 성이 아니라 이름의 일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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