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弓裔)
고대사인물
남북국시대 태봉국의 제1대(재위:901∼918) 왕.
궁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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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 궁예
이칭선종(善宗)분야고대사유형인물성격왕성별남출생일?사망일918년 6월본관경주저작불교 경전 20여권경력장군, 국왕관련사건후고구려 건국시대고대-남북국-태봉성격왕성별남출생일?사망일918년 6월본관경주저작불교 경전 20여권경력장군, 국왕관련사건후고구려 건국
정의
남북국시대 태봉국의 제1대(재위:901∼918) 왕.
키워드
개설
901년 후삼국 중의 한 나라였던 후고구려(후에 마진(摩震), 태봉(泰封)으로 개명)를 건국하였다. 광평성(廣評省)을 비롯한 여러 관부를 두어 국가체제를 정비하였고, 한때 전국의 2/3 가량을 차지하는 등 세력을 떨쳤다. 말년에는 미륵신앙에 기반을 둔 신정적(神政的) 전제주의 정치를 추구하였는데, 918년 6월 이에 반발한 정변이 일어나 왕위에서 쫓겨나 죽음을 당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신라 제47대 헌안왕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후궁 사이의 소생이라는 설과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 제45대 신무왕의 숨겨진 아들이자 장보고의 외손이라는 설 등이 있다.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 왕이 그를 죽이도록 명하였는데, 유비(乳婢)주 01)가 그를 구해(이 때 떨어지는 궁예를 받다가 손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고 함) 몰래 길렀다고 한다. 이에 대해 궁예가 왕위 다툼에 희생되었던 왕자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고려시대에도 궁예의 부왕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점, 구사일생한 경위가 극적이라는 점 등을 들어 왕자설을 의심하면서 정쟁(政爭)에서 패배하여 몰락하였던 유력한 진골귀족 가문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10여세에 세달사(世達寺)에서 출가하였고, 스스로 법호를 선종(善宗)이라고 하였다. 훗날 미륵불을 자칭하고, 경전을 짓고 강설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행동은 승려로서의 경험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지방의 민중들을 중심으로 참회의 실천을 중시하였던 진표(眞表) 이래의 미륵신앙을 계승하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궁예가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던 초기에 미륵불이 하생한 이상세계의 도래를 내세워 민중들을 포섭하였으리라고 한다. 장성해서는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등 일반 승려들과 다른 면모를 보였다고 하는데, 불교보다는 현실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됨에 따른 변화였을 것이다.
891년 세달사를 떠나 죽주(竹州)의 반신라적인 호족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다. 892년에는 북원(北原)의 호족 양길(梁吉)의 부하로 활약하였다. 894년 10월명주(溟州)에 입성하여 3,500명의 병력을 확보하였다. 이들을 14대(隊)로 편성하고, 금대(金大)·검모(黔毛)·흔장(昕長)·귀평(貴平)·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 부장(部長)을 말함)으로 삼았다. 궁예는 사졸들의 신망을 얻어 곧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대규모의 병력을 확보하고 부대 편제를 정비하였으며, 지휘권을 확립하는 등 명주에서 자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895년 8월 태백산맥을 넘어 한산주(漢山州) 관내 10군현을 차지하는 등 군세를 떨쳤다. 이에 패서(浿西) 지역의 호족들 중 귀부하는 자들도 많았다. 896년에는 송악(松嶽)의 유력한 호족 왕건 가문이 귀부하였다. 이렇게 패서 지역 호족들의 세력을 모으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패강진 호족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896년 철원에 도읍하였던 궁예는 898년 7월에는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다. 이때 패서도(浿西道) 및 한산주 관내 30여성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천도를 통해 왕건 가문과 연결된 패서 호족을 비롯한 호족들과의 결합을 굳게 하였을 것이다. 11월에는 팔관회(八關會)를 시작하였는데, 팔관회 개최는 구복(求福)과 전쟁에서 죽은 장병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생한 미륵불을 만나기 위한 공덕 가운데 팔관회의 계율 준수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를 그의 미륵신앙과 관련짓는 견해도 있다.
899년 7월에 북원을 중심으로 남한강 일대에 큰 세력을 이루었던 양길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이를 계기로 900년 10월 남한강 유역까지 진출하였고, 통일신라의 9주 중 고구려의 옛 땅에 설치되었던 명주·삭주·한주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901년에는 고려(高麗)를 건국하였다. 이때의 고려는 삼국시대의 고구려와 왕건의 고려와 구별하여 흔히 후고구려라고 부른다. 궁예가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던 것이나 당(唐)에 군대를 요청해 고구려를 멸망케 한 신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였던 것은 고구려 유민들의 호응을 기대한 것이었다. 또한 900년 견훤(甄萱)이 백제의 복수를 내세우면서 후백제를 건국하였음을 의식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로써 후삼국시대가 개막되었다. 『고려사(高麗史)』세가 태조 즉위전기(卽位前記)에 의하면, 903년 3월 왕건에게 수군을 지휘하게 하여 후백제의 금성(錦城)을 공취하고 금성을 나주(羅州)로 고쳤다.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광평성을 설치하고, 병부(兵部)를 비롯하여 여러 관부들을 두었는데 신라의 제도를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정광(正匡)을 비롯한 관등도 마련하였다. 이로써 중앙정치조직이 정비되었다. 광평성은 서열 제1위의 행정관부이면서 한편으로는 화백(和白)의 전통을 이은 기구로서 국가의 중대사에 대한 호족들의 의견을 수렴하던 관부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당시 궁예정권이 호족연합정권의 성격을 갖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905년 7월 궁예는 철원으로 다시 천도하였다. 이미 903년 철원 일대의 산수를 살폈고, 904년 7월청주(淸州) 인호(人戶) 1천인을 철원으로 옮기는 등 사전 준비가 있었다. 왕건 가문의 본거지였던 송악을 떠나 자신이 처음 도읍하였던 철원으로 되돌아갔던 것은 패강진 호족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정치적 기반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청주인들을 옮긴 것도 그러하다. 이 해에 연호를 성책(聖冊)으로 바꾸었다.
904년 공주의 장군 홍기(弘奇)가 투항했다. 공주는 이후 후백제와 후삼국 쟁패의 요지가 되었다. 905년 8월에 죽령의 동북 지역에까지 세력을 확장하였고, 906년 상주 사화진(沙火鎭)주 02)을 차지함으로써 신라를 직접 위협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였다. 905년에는 패서 13진을 분정(分定)하였다. 이때 패서 호족들의 지배 구역에 대한 모종의 조정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패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이 확립되자 그 외곽의 대동강 유역의 호족들도 귀부하였다. 909년 왕건을 후백제 방면으로 다시 보내 수군으로 진도, 고이도 등을 점령하였으며, 912년 나주를 공격한 후 백제군을 격파하였다. 나주 일대를 둘러싼 후백제와의 공방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지만,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후백제를 배후에서 위협하는 효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2/3를 차지하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한편 대외적으로 오월(吳越)이나 후량(後粱)과 국교를 맺는 데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또한 동아시아의 신흥세력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거란과의 관계를 중시하였던 반면 발해와는 소원하였다.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이라고 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궁예는 미륵불을 자칭하고, 큰 아들을 신광(神光)보살, 막내 아들을 청광(靑光)보살이라고 하여 자신은 물론 두 아들까지 신격화하였다. 복장이나 행차에 있어 나름대로 미륵불의 장엄을 꾸미기도 하였다. 불교 경전 20여권을 지었고, 강설하기도 하였는데, 경전에는 자신이 하생한 미륵불이며 자신의 치세가 미륵불이 하생한 이상세계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불교 경전 20여권의 존재를 통해 기존의 불교 교단과는 상관없는 새로운 종파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궁예는 국왕이자 미륵불로서 성속(聖俗)의 권능을 오로지 하게 되었다. 지배자가 신(神) 혹은 그 후손이나 대리인으로 통치하는 형태를 신정(神政)이라고 하고, 개인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하는 것을 전제주의라고 한다. 이 점에서 궁예는 신정적 전제주의를 추구하였다고 규정할 수 있다.
미륵불로서의 전지(全知)함을 드러내기 위해 고안된 것이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이었다. 관심(觀心)은 본래 마음의 본바탕을 바르게 살펴본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부인들의 비밀을 알 수 있다고 내세웠다. 그리고 반란의 음모를 적발하는 데에도 이용하였다. 왕건도 이로 말미암아 모반의 혐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 점에서 미륵관심법은 관리들을 감찰하기 위하여 인사를 담당하는 내봉성(內奉省)에 사정 기능을 더하고, 내군(內軍)을 설치하여 신변 경호와 함께 군의 동향을 감시하도록 한 정치조직의 변화와 짝하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914년 연호를 정개(政開)로 바꾸었다. 915년에는 부인 강씨(康氏)가 비법(非法)을 많이 행한다고 간쟁하였다. 이에 대해 부인은 물론 보살로 삼았던 두 아들마저 죽였던 사실을 보면, 당시 조정에서 그에 대한 비판을 넘어 도전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정적 전제주의는 그 속성상 그에게 충성하는 소수의 인물들에 의하여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허월(許越) 등 명주 출신, 종간(宗侃) 등 승려들, 은부와 이흔암(伊昕巖)과 같은 전문적인 군인 출신, 청주 출신 등이 그 지지세력으로 지목되고 있다.
반면 동궁기실(東宮記室)을 지냈던 박유(朴儒) 등 유학자들, 궁예의 강설을 사설(邪說)·괴담(怪談)이라고 비난하였다가 철퇴에 맞아 죽었다는 석총(釋聰) 등 기존 교단의 승려들, 패서 호족을 비롯하여 정치적 권력을 나누고자 기대하였을 호족들이 그에게 반대하였다. 청주 출신이나 전문적인 군인 출신들 중에서도 이에 속하였던 예가 찾아진다. 또 전쟁을 수행하고 신정적 전제주의를 유지하기 위하여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그들로부터도 반발을 샀다.
태봉정권 말엽에는 궁예의 멸망과 왕건의 등장을 예언하는 도참도 나타났다.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백발노인에게서 산 옛 거울에 그러한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드디어 918년 6월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謙) 등 4인의 마군 장군이 왕건을 추대하고 궁예를 왕위에서 축출하였다. 그는 미복으로 도망쳐 산곡 간에 숨어 있다가 부양(斧壤)에서 백성들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역사적 평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궁예의 출신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설이 있지만 어느 경우이든 그는 일찍부터 반신라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궁예의 성향이 진골귀족 중심의 골품제사회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몰락하지 않았다면 누릴 수 있었을 특권과 권위를 회복하려는 남다른 집념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권력을 잡게 되자 점차 농민들의 고통을 어루만진다거나 권력을 남과 나눈다거나 하는 일에 인색하게 되었다고 본다.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변동이 갖는 중요한 역사적 의의는 왕경의 골품귀족에 대해 지방의 호족들이 승리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거니와, 궁예는 이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드러내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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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의 나라 태봉』(김용선,일조각,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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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 궁예정권연구』(이재범,혜안,2007)
-
『태봉의 궁예정권』(조인성,푸른역사,2007)
-
『슬픈 궁예』(이재범,푸른역사,2000)
-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이도학,김영사,2000)
주석
주01젖먹이 비녀주02지금의 상주
집필자
집필 (1996년)김두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궁예(弓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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