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泰封)
고대사개념용어
901년 궁예가 건국한 후삼국시대의 왕조국가. 후고구려.
태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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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후고구려분야고대사유형개념용어시대고대-남북국
정의
901년 궁예가 건국한 후삼국시대의 왕조국가.후고구려.
내용
901년 궁예(弓裔)에 의해 건국되어 918년 왕건(王建)에게 멸망할 때까지 18년간 존속한 나라이다. 신라·후백제와 더불어 후삼국을 정립(鼎立)했으며, 후고(구)려 또는 마진(摩震)이라고도 하였다.
신라는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 국력이 급속히 쇠약해지고, 국가의 통치력이 약화되었다. 재정이 결핍하게 되자 백성에게 조세를 독촉했는데, 그것은 백성들의 유리현상을 더욱 촉진했고, 결국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때 궁예가 고구려의 부흥을 내세우고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웠으며 뒤에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었다.
태봉은 후백제(後百濟)와 대립하면서 신라를 포함한 후삼국시대를 열게 하였다. 태봉은 뒤에 왕건에 의해 몰락하게 되고 뒤이어 고려가 성립된다.
태봉을 세운 궁예는 정권다툼에 밀려났던 신라의 왕족으로 추정된다. 그는 세달사(世達寺)의 중이 되었으나 세상이 소란스러워지자 웅지를 품고 891년(진성여왕 5)에 죽주(竹州)의 반란군 두목 기훤(箕萱)에게 투신하였다.
그러나 기훤이 거만해 함부로 대하므로 기훤의 부하들과 함께 북원(北原)의 반란군 두목 양길(梁吉)에게 투항하였다.
양길은 그를 우대해 군사를 주고 북원 동쪽의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궁예는 군사 1백여 기를 거느리고 여러 군현(郡縣)을 점령했으며, 894년 명주(溟州)에 들어갔을 때의 세력은 이미 군사의 수가 3,500명이나 되었다.
그 뒤 강릉으로부터 북상해 10여 개의 군현을 점령하고, 철원(鐵圓, 鐵原)에 도읍을 정하였다. 895년에는 내외의 관직을 설치, 국가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896년에는 송악군(松嶽郡)의 대호족인 왕건 부자가 귀순하였다. 898년에는 서울을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겼으며, 이듬해 양길과 싸워 이겨 결국 지금의 강원·경기·황해·충청북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큰 세력이 되었다. 이에 901년 고구려의 부흥과 신라의 타도를 표방하며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고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였다.
그가 후고구려라 칭하게 된 사회적인 배경은 당시 경기·강원 이북지방에서는 고구려 부흥의 기운이 팽배했고, 이들 지방의 백성들은 고구려유민들로서 신라정부의 차별대우와 실정(失政)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겠다.
이로 인해 국가의 기초가 확립되고 점차 국력이 강화되자, 904년(효공왕 8)에는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고, 연호를 무태(武泰)로 정했으며, 정부의 관제도 아울러 정비하였다.
이리해 당당한 국가의 면모를 갖춘 뒤에 905년에는 도읍을 다시 철원으로 옮기고, 연호를 성책(聖冊)으로 고쳤다. 911년에는 국호를 다시 태봉이라 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으며, 3년 뒤인 914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政開)로 하였다.
태봉은 904년에 중앙관제를 정했는데 최고관부로서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거기에 광치나(匡治奈)주 01)·서사(徐事)주 02)·외서(外書)주 03)의 벼슬을 두었다.
그리고 그 밑에 병부(兵部)·대룡부(大龍部)주 04)·수춘부(壽春部)주 05)·봉빈부(奉賓部)주 06)·의형대(義刑臺)주 07)·납화부(納貨府)주 08)·조위부(調位部)주 09)·내봉성(內奉省)주 10)·금서성(禁書省)주 11)·남상단(南廂壇)주 12)·수단(水壇)주 13)·원봉성(元鳳省)주 14)·비룡성(飛龍省)주 15)·물장성(物藏省)주 16)을 설치해 국사를 각각 분장하게 하였다.
그밖에 역어(譯語)를 장악하는 사대(史臺), 과수(菓樹)를 심고 기르는 일을 관장하는 식화부(植貨府), 성황(城隍)의 수리를 맡는 장선부(障繕府), 기물(器物)을 만드는 주도성(珠淘省)을 설치했으며, 정광(正匡)·원보(元輔)·대상(大相)·원윤(元尹)·좌윤(佐尹)·정조(正朝)·보윤(甫尹)·군윤(軍尹)·중윤(中尹) 등 9관등을 설치하였다.
또한 지방관원으로 태수(太守)직이 있었으며, 군제(軍制)로는 장군(將軍)·정기대감(精騎大監)·성주장군(城主將軍)·백선장군(百船將軍) 등의 고위관직이 있었다.
이러한 관직체계는 뒷날 고려 태조의 제도 정비 때 큰 영향을 미쳤다. 문화로는 불교문화가 융성해 유물로서 석등롱(石燈籠)이 남아 있고,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한 사실도 있다.
태봉과 후백제의 쟁패는 대외적인 면과 대내적인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대외적인 관계에서 양국은 모두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일종의 외교전의 양상을 띠었다.
견훤(甄萱)이 남중국·일본 등지와 교류를 한 반면, 궁예는 주로 산동반도(山東半島)를 거쳐 북중국과 교류하면서 후백제에 대항하였다. 이들의 대중국외교는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이는 중국이 정통왕실로서 신라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국내문제에 있어서 궁예와 견훤은 처음에는 군사적인 충돌은 하지 않았으나 점차 국가의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신라를 놓고 충돌하게 되었다.
궁예는 먼저 왕건에게 해상권을 장악하게 하고, 이어서 후백제가 일본과 교통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지금의 전라남도 해안지방을 점령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왕건이 전라남도 서남해안의 10여 군현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안으로 후백제의 공격을 견제하고, 한편으로는 후백제의 중국·일본 등에 대한 활발한 외교활동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909년에 견훤이 오월국(吳越國)으로 보내는 사신의 배를 왕건이 잡아오자 궁예가 크게 기뻐해 왕건에게 후하게 포상한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한편, 신라에 대한 정책을 보면 양국은 모두 신라를 공격하고 영토를 빼앗았다. 견훤과 궁예는 국가를 건설할 때, 각각 백제 및 고구려의 부흥과 신라의 타도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양국의 신라에 대한 정책은 동일하였다.
그러나 태봉이 멸망하고 고려가 성립된 후에는 대신라정책이 전환되어 신라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내고,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공할 때에 왕건은 신라를 원조해 신라로부터 호감을 얻게 되었다.
궁예는 신라의 왕족이면서도 망명해 지방에서 숨어 살았다. 그리고 피난 중에 한쪽 눈이 멀고, 그 생활은 유모에 의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의 성격이 반사회적이고 파괴적인 경향을 띠었다. 중이 되어서도 승려로서의 근검한 생활과 교리의 연구 같은 데에는 관심이 없었고, 계율을 무시하면서 삐뚤어진 생활을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부흥을 명목으로 나라를 세운 뒤 정교(政敎)일치적인 전제주의와 영웅주의에 빠져 자신을 과시하는 데 급급하였다. 즉, 905년 서울을 송악에서 철원으로 다시 옮기고 궁궐과 전각을 수리하는 데 사치를 다한 것은 그것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영웅주의는 자신을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고, 큰 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작은 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고 했으며, 머리에는 금책(金幘)을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를 입었다.
외출할 때에는 백마를 타고 채단으로써 그 갈기와 꼬리를 장식했으며, 동남(童男)·동녀(童女)로 하여금 번개(幡蓋)와 향화(香花)를 받들어 앞장서게 하고 승려 2백명으로 하여금 범패(梵唄)를 부르며 뒤따르게 하였다.
한편, 말년에 이르러 의심증이 심하게 나타나 부인과 두 아들을 죽이고, 문무관료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반역죄를 씌워 무고하게 죽였다. 또 사치와 낭비로 말미암아 세금과 부역이 과중하게 부과됨으로써 백성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궁예는 신하들의 추대를 받은 왕건에 의해 축출되고, 아울러 태봉도 멸망하게 되었다.
궁예는 몸을 일으킨 지 28년, 왕을 칭한 지 18년만에 몰락했으며, 태봉에 대신해 왕건에 의한 고려왕조가 개창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후삼국은 후백제·신라·고려로 재편되었으며, 결국은 고려의 왕건에 의해 민족이 재통일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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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태조의 왕위 부자계승 의식」(김창겸,『교남사학』 6,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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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의 세력형성과정과 도읍」(정선용,『한국사연구』 97,1997)
주석
주01고려 때에 시중주02侍郎주03員外郎주04倉部주05禮部주06禮賓省주07刑部주08大府寺주09三司주10都省주11秘書省주12將作監주13水部주14翰林院주15大僕寺주16少府監
집필자
집필 (1995년)박한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태봉(泰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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