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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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 Park 2020. 12. 4. 08:51

후백제

최근 수정 시각: 2020-11-14 22:41:10

 

분류

백제
百濟


▲ 후삼국시대의 지도, 진노랑이 후백제이다.

892년/900년 ~ 936년 9월 (36년 혹은 44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통일신라

고려

위치

한반도 서남부

수도

(무진주)[1]완산주[2]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 원수

국성

(甄)[3]

역대 국왕

초대 견훤
2대 견신검

언어

고대 한국어

종교

불교

문자

한자

종족

백제인(신라인)

주요 사건

889년 견훤 순천 봉기[4]
900년 완산주 도읍, 후백제 선포
909년 ~ 914년 나주 공방전
920년 대야성 점령
927년 서라벌 점령, 공산 전투
930년 고창 전투
935년 신검쿠데타
936년 일리천 전투, 후백제 멸망

현재 국가

대한민국

 

1. 개요2. 역사

2.1. 건국과 초기2.2. 중기: 태봉 / 고려와의 대립2.3. 후기: 신라와의 대립2.4. 말기와 멸망

3. 사회

3.1. 건축3.2. 정치 체계3.3. 군사3.4. 대외 관계와 외교

3.4.1. 한반도 외교3.4.2. 해외 외교

3.5. 문화3.6. 인물

4. 왕사5. 같이보기

1. 개요[편집]

백제(百濟)는 후삼국시대한반도 남서쪽 지역에 위치한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후삼국시대의 시대 범위가 학자에 따라 조금씩은 다르지만[6] 대체로 견훤의 칭왕(892년)부터 후백제의 멸망(936년)까지로 비정되므로 후삼국시대는 후백제 건국으로 시작되며, 후백제 멸망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국가이다.

신라장군이었던 견훤이 군사를 일으켜 세운 나라로, 국호는 옛 삼국시대의 '백제'에서 따 왔고 부흥운동과 유민의식을 통해 건국되었기에 그 전에 있었던 백제와는 당연히 관계가 있다.[7] 공식 건국한 900년에서 936년까지 2대 37년간 존속했다. 태봉고려, 신라와 함께 후삼국시대의 세 나라 중 하나다.

견훤이 '왕'을 자칭하고 독자 세력화한 시기는 이미 892년부터였고 '백제'로 국호를 정한 것은 900년이다. 견훤이 스스로 왕을 칭한 시점부터 계산하면 44년, 완산주에 입성하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로 정한 때부터 계산하면 건국 36년 만에 멸망한 단명한 국가였다. 도읍은 완산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당시에는 당연히 스스로를 백제라 일컬었다.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했지, 후백제라고 지은게 아니다. 후백제란 어디까지나 훗날의 역사 사가들이 이전의 백제와 구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며, 이는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흔한 일로, 비슷한 사례로 후한, 촉한, 후금, 고조선, 후고구려 등이 있다. 모두 당시에는 후, 고 자 등이 붙지 않은 이름으로 불렸지만 후대인들이 구분의 편의를 위해 임의로 붙인 이름이다. 망한 나라가 훗날 새로이 건국될 때 같은 이름을 칭하는 건 세계사적으로 역시 흔한 일.[8] 옛 백제의 이름을 다시 가져다 사용한 것은 견훤이 자리잡은 지역 백성과 호족들이 옛 백제 땅 사람들로 유민의식이 있었기에 이를 자극하고 새로운 왕국의 정통성을 찾기 위해 빌려쓴 것이다.[9]

그런데 정작 후백제의 창업군주이자 그 자체나 다름없는 견훤은 옛 백제와 별 관련 없는 원신라 영역 경상도 문경(가은) 출신이다.[10]삼국사기》에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상주는 신라 9주 5소경의 하나로서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보다 훨씬 광범위한 지역이었고 상주 관할 군현 중에 가은현은 현재의 문경시 가은읍에 해당된다. 상주시에 견훤이 축성했다고 전해지는 '견훤 산성'이 있는데, 이것도 현재 행정 구역 소속상 상주라는 것이지 문경에서 더 가까운 위치의 산자락에 있다. 상주 견씨 족보에 따르면 백제 왕족의 후손이 상주로 이주해서 일가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당대 기록이 아니라 훨씬 이후 조선시대에 작성된 족보상 기록이라서 신뢰하기 어렵다. 사실 궁예도 옛 고구려 지역 출신 유민이 아닌 원신라 지역 출신임에도 고구려 부흥을 내세웠듯, 옛 왕조의 이름을 다시 쓰는 건 지역 호족과 민심을 얻기 위한 한 방편이었지 국왕 개인의 출신지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

신라 및 궁예의 태봉국과 경쟁을 벌였으며, 궁예가 왕건에게 축출된 후에는 왕건의 고려와 경쟁을 벌였다. 고려가 무력해진 신라 조정에 대해 우호적 포용 정책으로 일관한 것과 반대로 후백제는 후삼국 시대 내내 동해안 일대를 제외한 그나마 남은 신라의 전체 영역을 공격하며 헤집고 다니며 적대했다. 때문에 후백제의 강역은, 흔한 편견과는 달리 전라도보다는 경상도에 차지한 면적이 실은 더 컸다.

2. 역사[편집]

후삼국통일전쟁 주요전투

 

2.1. 건국과 초기[편집]

상주 호족 아자개의 아들로 본래 신라의 무관이었던 견훤은 서남해(전라남도 지역)에 배치되어 해적[11]을 소탕하고 있다가, 신라가 점차 쇠망의 길을 걷고 있음을 느끼고 서기 892년에 무진주(지금의 광주광역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5,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여 견훤에게 가담했다고 한다. 견훤과 그의 군대는 진군하여 무진주와 완산주(전주)를 점령하였다. 이후로 해당 지역을 통치하며 내부적으로 을 칭했다. 다만 외부에는 감히 왕을 칭하지 못하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서명했다. 일단은 신라의 신하라고 간판을 내건 것이다. 비슷한 시기 북쪽에서 양길의 세력이 강해지자 비장(裨將) 벼슬을 이 쪽에서 하사하는 식으로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8년 동안 이런 식으로 군림하다가 900년부터는 의자왕의 숙원을 풀고 옛 백제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후백제를 칭했다. 곧 해당 지역에 살던 백제계 신라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에 그랬던 것이며, 이것이 무엇보다 신라에 대한 반란을 합리화할수 있는 좋은 명분으로 작용했던 것. 그래서 이때부터 국호를 백제라고 했고, 무진주 대신 옛 백제의 중심에서 가까운 지역인 완산주(현재의 전주)를 도읍으로 삼았고 나라 각지에 관서를 설치했다.

실제로 이 지역 민심은 신라에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삼국사기』권40, 「잡지」9 직관 하에 의하면 백제인과 고구려인에게 멸망당한 본국의 벼슬에 견주하여 벼슬을 줬다지만 그건 문무왕 때에 국한된 일이었으며, 그나마도 백제는 최고위 귀족이 6두품도 아닌 5두품이었다. 옛 의자왕의 숙원을 푼다는 게 개국 명분으로 통하는 것 자체가, 유민 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얘기다. 백제의 유민 의식은 여몽전쟁 이후에나 소멸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12]

이후에 바다 건너 중국 강남의 오월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 관계를 맺는 한편, 본격적으로 영토 확장 정책에 나서서 여러 성주들을 굴복시키고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 그러던 와중에 북부의 궁예가 세운 태봉(고려)과 웅주(충청남도) 지역으로 국경을 마주하게 되면서 대립이 시작되었다. 이미 신라는 김헌창의 난 때와는 달리 견훤과 궁예의 세력을 스스로 제압하기에는 너무도 쇠약해졌기 때문에 사실상 한반도의 세력은 남서쪽의 후백제와 북쪽의 태봉으로 양분되다시피 하였다. 다만 신라 역시 후삼국시대 초기까지는 공세적으로 나설 군사적 힘을 잃었을 뿐, 여전히 많은 호족과 백성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신라는 수세적으로 어느 정도까진 두 나라를 막아낼 여력은 남아 있었으며, 삼한 백성과 호족들이 인정하는 수백 년 동안 종주국이었던 확고한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무시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2.2. 중기: 태봉 / 고려와의 대립[편집]

궁예의 재위 당시인 903년에 왕건의 공격으로 금성 (나주시, 지리적으로는 목포시무안군이라고 보기도 함) 일대를 잃어 해상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비록 나주 일대를 빼앗기며 형세는 불리해졌지만 후백제는 한반도에서 가장 기름진 땅 중 하나인 지금의 전라도 일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태봉에 밀리지 않는 국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907년에는 지금의 충북과 경북 일대의 추풍령 지역을 판도에 추가하는데 실은 바로 이것이 그나마 후삼국 시대가 반세기는 가며 장기화된 계기가 된다. 이때도 역시 왕건이 직접 출동해서 후백제의 해당 지역 장악을 막으려 했고 나주 장악 때와 마찬가지로 고려의 영역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두 나라 육군이 직접 맞붙은 결과는 후백제의 판정승이었다. 이 전투 결과 삼년산성을 비롯한 충북-경북 상당 지역이 후백제의 영역이 되는데, 이 일대는 신라가 5세기 중반에 장악한 이래로 약 450년 동안 백제, 고구려, 당 이 세 강국 모두에게 한번도 내줘본 적 없는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충지였다. 즉 후백제는 과거의 백제와 비교해보면 과거 삼한 시대부터 융성했던 영산강 일대를 잃으면서 생산력과 인구에서 큰 손해를 봤지만, 군사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한 요지들을 한꺼번에 장악하게 된 것이다. 영역만 따져보면 영산강 일대와 그닥 차이도 나지 않고, 뭣보다 그 일대에 여전히 주둔해 있던 신라 정규군 부대들과 신라군 요새 및 군사 시설들을 역시 무진주에서 건국할 때부터 신라 정규군 부대들을 갖고 시작한 견훤이 모조리 장악했을 개연성이 크다. 물론 인구도 어느 정도 얻으면서 전남에서 얻은 손실을 벌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마진-태봉과 지속적인 대립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중에 918년에 태봉의 명목상 2인자 위치였던 왕건이 폭정을 일삼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친궁예 호족들이 반발해 견훤으로서는 고려를 공격할 절호의 기회라고 볼 수도 있었는데, 견훤은 축하 사절을 보내는 등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때가 후백제에게 가장 좋은 삼한 통일의 기회였다. 왕조 자체가 뒤바뀌는 상황 속에서 친 궁예 세력의 이탈이 끝없이 줄을 이었다. 굵직굵직한 것들만 나열하자면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건의 목에 칼을 겨눈 환선길이나 왕건에게 반기를 들었던 웅주의 이흔암, 서원경세력 임춘길 그리고 명주의 김순식 등등 모두 왕건에게 반기를 들었던 인물들이다. 한마디로 왕건의 쿠데타 직후 고려는 공중 분해 되고 있었다.

그러나 견훤이 왕건의 쿠데타를 명분으로 침공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7월의 역성 혁명 이후 수도에서의 쿠데타 모의는 대부분 8월까지 정리된 상태라 견훤이 이들과 연계해 침공을 시도하기에는 시간이 워낙 부족했다. 명주의 김순식은 후백제가 연계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고, 왕건에게는 패서와 고려 불교계라는 든든한 빽이 있었으며, 몇 년 후 공산 전투에서 보이듯 정권 내부의 결속력이 탄탄해 반란모의 몇번에 무너질 레벨이 전혀 아니었던 것도 고려할 만한 사실. 게다가 2차 대야성 전투에서 패전한지 2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2년 후의 3차 대야성 전투를 위해 이를 박박 갈고 있던 후백제 입장에서 과연 고려를 멸망시킬 수준의 공세여력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훗날 후백제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폐하는 패륜이 터졌을때도 고려는 곧바로 후백제를 침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를 관망하는 쪽을 택했고, 그 결과 다른 사람도 아닌 견훤을 귀부시키고 신라의 항복을 받아내 삼한일통의 결정적 한방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만약 이 때 고려가 성급하게 후백제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 행동을 감행했다면 신검에게는 오히려 가뭄 속 단비와도 같았을 것이다.[13]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몇 장면에 걸쳐서 사절단을 보내는 것에 대해 나왔지만, 내부 안정이니 뭐니보다 사나이다운 면모니 호방함이니 하는 두루뭉술한 단어로 포장해버렸다.[14] 대신 이흔암이 지키던 웅주와 임춘길의 고향인 서원경이 이때 후백제로 귀부함으로서 후백제는 반사이익을 톡톡히 챙겼다. 어차피 고려를 멸망시킬 수준의 공세가 불가능했다면 싸움 한 번 없이 웅주와 서원경을 손에 넣은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엄청난 성과다.

나주 공방전을 토대로 왕건이 후백제에게 저승 사자와도 같은 존재였다는 건 잘못된 해석이다. 해전에서나 그랬지 육전에서 왕건은 그전에 추풍령 일대를 놓고 겨룬 일전에서 입증되었듯이 그렇게 두려운 상대가 아니었으며, 실전에서 왕건의 최정예 친병대는 같은 장소에서 벌인 세 번의 결전에서 견훤에게 모조리 패배하였다. 그보다는 신라 군대의 군인이었고 신라 치하를 산 견훤이 신라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못한채 오늘 내일 하는 신라 공략을 우선한 게 더 이유가 크다고 하겠다.

하지만 견훤이 모든 호기를 놓친 것은 아니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낸 사실에 반발하는 일부 세력들은 견훤에게 붙으면서[15] 견훤은 점차 세력을 넓혀나갔고, 점차 양국 사이에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실제로 후백제는 고려에 대해 코 한 번 안 푼 채로 충청 지역에서는 이흔암이 죽은 후 웅주(충남과 충북일부)가, 임춘길이 죽은 후 매곡(충청남도 보은군 회인면)이 귀부하는 등 상당한 이득을 챙겼다.

924년에는 조물성에서 후백제군과 고려군이 충돌하였는데, 서로 화친을 맺고 인질을 교환했다. 삼국사기에는 왕건이 견훤에게 밀려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먼저 화친을 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사에서는 견훤이 먼저 화친을 청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고려에 볼모로 갔던 견훤의 조카 진호가 갑작스럽게 죽자 견훤은 왕건을 의심하여 고려 측에서 볼모로 왔던 왕건의 사촌 동생 왕신을 살해하였고 곧 다시금 양국간에 긴장 관계가 조성되었다.

2.3. 후기: 신라와의 대립[편집]

왕건이 이미 무력해진 신라에 우호적인 포용 정책을 펼친 것에 비해 견훤은 의자왕의 원한을 갚는다는 공약 그대로 신라에 공세를 펼쳤다. 삼국시대 시절부터 영남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던 대야성을 901년, 916년, 920년에 세 차례 공격했고, 대야성 문서를 참조하면 알 수 있듯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기 때문에 견훤의 친정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나 막아냈지만 결국 920년에 함락당한다.

이후 신라 경애왕은 고려와 협력하고 후백제와 적대하는 정책을 폈다. 영남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얼마 안 되는 정도나마 신라군을 보내서 고려에 군사 지원을 하기도 했고, 후백제와 고려군이 전투 끝에 소강 상태를 보이자 왕건에게 좀 더 후백제와 적극적으로 싸우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이렇게 대놓고 친 고려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애왕을 견훤은 고깝게 여겨 927년에 견훤이 친히 이끄는 후백제군이 신라 서라벌을 침공해 경애왕을 죽이고 서라벌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다만 아직 신라 천년 사직을 완전히 무너뜨리기엔 명분이 부족하다 여겼는지 박씨 대신 김씨인 경순왕을 신라 왕으로 다시 세웠다. 이때 후백제군은 철군하던 도중 신라를 구원하려 온 고려군에게 공격을 받았으나, 오히려 이를 공산 전투에서 격파하고 후삼국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고려사 유금필전을 보면 후백제는 궁예 시절부터 뒤통수의 골칫덩이였던 나주까지 되찾았다. 그리고 이후로도 수차례 고려군을 격파하며 승승장구하였다.

2.4. 말기와 멸망[편집]

그러나, 930년고창 전투에서의 패배로 세력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고창은 지금의 안동인데 흥미로운 점은 고창의 이름이 안동이 된 계기가 이 전투와 연관있다는 것. 해당 내용은 고창 전투 문서 참조. 이 때 견훤에게 불만을 품었던 일부 호족들이 고려로 투항하면서 영토 손실도 커졌다. 특히 932년공직이 고려에 투항하면서 매곡성의 청원 일대를 상실하였고, 934년에는 견훤이 지휘하였던 최후의 전투인 운주성 전투에서 유금필의 급습으로 패하면서 또 다시 세력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후 후계자 문제까지 불거졌다. 견훤은 장남이었던 신검 대신 금강 왕자를 후계자 감으로 내심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이에 위기감을 느낀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켜 창업군주인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해버리는 사태에 이르었다. 견훤은 금산사에 3개월 정도 갇혀 있다가 탈출한 뒤에 아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평생의 적이었던 고려로 망명했다. 신검은 나름대로 혼란한 후백제 내부를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정책을 펼치고 중국에도 사절단을 파견했지만, 1년 뒤 견훤은 고려 왕 왕건과 함께 선산 일리천(현 경북 구미시 선산읍) 전투에 참전하여 후백제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왕위에서 쫓겨났다고는 하나 후백제 그 자체나 다름 없었던 자신들의 건국 군주 견훤이 적진에 있는 것을 본 후백제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싸움도 해보기 전에 투항하는 장수와 병사들이 속출하면서 결국 백제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며 이 결정적인 전투에서 패배했다. 일리천 전투 문서 참조. 그리고, 936년에 후백제 왕 신검이 항복하면서 후백제는 멸망했다. 결국 견훤은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자기 손으로 멸망시키는 기구한 운명을 맞고 만 것이다. 후백제가 멸망한 바로 그 해에 견훤도 병사하였다.

후백제가 멸망한 이후, 2대 왕인 신검의 처우에 대해서는 기록상 엇갈리는 편이다.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죽였다고 기술했지만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사강목은 살려주고 관직도 줬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외에도 932년 투항한 후백제 호족인 공직은 939년에 사망했고, 견훤의 사위로서 고려와 협력했던 박영규는 고려 왕실과 사돈 관계를 맺고 큰 권세를 누렸다.

3. 사회[편집]

3.1. 건축[편집]

고려의 궁궐

 

 

 자세한 내용은 전주 후백제 본궐 문서참고하십시오.

3.2. 정치 체계[편집]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백제를 계승했다고 주장했지만 본인 혈통부터가 신라계였고 신라의 장수로 활동했던 경험 때문인지 후백제를 세우고 나라의 기틀을 잡은 후에도 신라의 관등명과 관직 체계를 그대로 활용하였다. 능환이 신라 관등 체계의 2등위인 이찬(伊飡) 벼슬을 지냈던 것, 후백제의 장수였던 상귀가 신라 제 7등위에 속하는 일길찬(一吉飡) 벼슬을 지냈던 것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훗날에 견훤이 신라의 도읍인 경주시까지 쳐들어가서 경애왕을 자진케하고 경순왕을 옹립함으로써 신라를 반속국화하고, 정치적으로 후백제에 귀속시켜 사실상 망하게 만들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왠지 아이러니. 하지만 어떤 국가가 멸망하고 복국 운동이 일어날 때 지배 국가의 관제를 실용적 이유에서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는 꽤 흔하다. 고구려 계승 의식이 있었던 발해나 고려도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차용해 관제를 운영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인용한 이제가기 기록엔 후백제도 도독(都督), 태사(太師) 등 당나라 관직명을 썼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당장 현대 역사만 봐도 대한민국일제강점기 시절 법령과 제도의 일부를 답습하였다. 즉 후백제가 통일신라의 체제를 그대로 답습했다고, 후백제가 백제와 아무 상관 없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란 뜻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통일신라의 정치체계를 일단 도입하되 광평성을 비롯해 명칭을 새로 고친[16] 궁예나 그 궁예의 광평성을 답습한[17] 왕건과 달리 견훤이 신라의 체계를 명칭까지 그대로 도입한 것은 그가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거나 옛 신라 체제에 대해 어느 정도 향수나 익숙함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견훤이 왕건이나 궁예와는 달리, 역시 어디까지나 기원은 신라 정규군 장수였다는 이점과 한계라고 볼 수 있겠다. 즉 신라와는 통일신라 시기를 거치면서 인적, 문화적, 제도적으로는 훨씬 일체성이 강화되었지만, 서로에 대한 반감 역시 정확히 그만큼 더욱 강렬해졌던, 후백제와 신라 사이의 특수한 관계의 일면이라 하겠다.

후백제는 외적으로는 신라의 왕을 섬기는 부용국으로 행세했으나, 내부적으로 독자적인 천하관을 표명하고 천자라고 자칭했다. 후백제가 신라를 종주국으로 섬기는 나라였음을 표방한 면은 처음에 견훤이 세력을 일으켰을 때 함부로 왕이라 칭하지 않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라 자칭했던 점과, 삼국사기고려사 등의 기록에 나오는 왕건에게 보낸 서찰에서 스스로 '존왕(尊王)'의 의(義)를 두터히 하고 사대(事大)의 정(情)을 깊이 하였다.' 운운하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18] 이런 점은 한반도 내부의 친 신라계 호족들의 반감을 덜기 위한 방책이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신라를 적대했기 때문에 왕건 고려의 포용 정책에 비해서 효과는 적었던 편이다. 후백제가 일본에 사신을 여러 번 보냈을 때도 후백제가 말이 후백제지 실상은 신라의 신하라는 점을 문제삼아 대마도에서 문전 박대 당했다. 이는, 실제로는 일본이 후백제를 도울 꼴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핑계를 댄 것에 가깝다.

그러나 한편으로 후백제에 독자적인 천하관과 연호가 있었음은 편운화상(片雲和尙) 부도의 명문에 후백제의 연호 정개(正開)가 있으므로 알 수 있다. 승려 편운이 죽은 후에 (당시 견훤의 세력권인) 남원에 부도를 세웠는데, 명문에는 부도를 세운 시기를 정개 10년 경오년이라고 기록했다. '정개 10년 경오년'을 역사적 정황에 맞춰 짚어보면 910년이 된다. 따라서 정개 원년은 901년이고, 견훤이 후백제를 개국한 다음 해이다. 즉 견훤은 900년에 정식으로 후백제를 개국한 뒤 정개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후백제가 곧 신라를 의식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국이라 자처하였음을 내외에 표방한 것이다. 후백제의 '정개'는 궁예가 마지막으로 사용한 연호 정개(政開)와는 한자가 다르니 주의.

궁예의 태봉, 왕건의 고려가 그랬듯이, 후백제 역시 기본적으로는 중앙 집권 국가라기보다는 일종의 호족 연합체성격이 짙었다. 견훤 역시 왕건 비슷하게 아내 여러 명을 두어 자식을 최소한 열 명을 넘게 두었다고 전하는데, 아마도 왕건이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그들의 딸이나 친족들과 혼인하여 혈연 관계를 맺었던 것과 같은 사례였을 것이다. 이는 신라 골품제의 폐쇄적인 혼인 풍조와는 대조적인데, 과거 김유신무열왕과의 혼인 동맹을 위해서 상당히 무리한 계책을 썼으며, 바다를 주름잡은 대호족 장보고조차도 자신의 딸을 왕비로 만드는 것은 약속까지 받아냈음에도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신라 중앙과 거리가 있는 각 지방의 호족들은 왕족과의 결혼을 통해 중앙 권력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고려, 후백제의 체계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3.3. 군사[편집]

후백제의 군사력은 이미 다 쓰러져 가던 신라는 논외로 치고 동시대의 라이벌이었던 태봉이나 고려의 군사력에 비해 매우 강대한 편이었다. 이는 우선 후백제의 왕인 견훤의 출신 성분이 군인이었기 때문에 본래 군사적 능력이 탁월했던 점도 있었지만 후백제가 자리한 호남 지방에 비옥한 곡창 지대가 펼쳐져 있었던 것도 한몫하였다. 특히 공산 전투에서 견훤이 왕건을 크게 이긴 후에 조서를 보내어 "평양성 문루에 을 걸어두고 말에게 패강(대동강)의 물을 먹이고 싶다."라며 반 협박 수준의 말을 한 것도 이렇게 튼튼한 군사적 기반을 갖추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역으로 삼국유사에는 견훤이 "왜 우리는 고려보다 군사가 갑절이나 많은데 이기지 못하는가"하는 식으로 한탄하는 기록도 나온다. 또한 밑에서도 후술하겠지만, 통일신라 정규군을 가장 충실하게 계승한 건 바로 후백제군이었다.

기록에 보면 후백제군의 군대의 구성은 크게 보병대와 기병대, 수군으로 나뉘었으며, 특히 철갑으로 중무장한 기병대는 정예병으로 쳤다. 실제로 견훤은 한반도에서 마지막으로 철기병을 대규모로 운영한 군주였다고 한다. 다만 중무장 기병을 정예병으로 치는 것은 고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 고려는 후삼국 통일 이후로도 중기병을 애용하였다. 오히려 중기병이든 경기병이든 편제상으로는 고려가 후백제에 앞서 있었는데, 이는 후백제의 영토인 전라도 일대가 비옥한 곡창 지대이긴 하지만 넓은 평원 농지의 형태를 하고 있어서 대규모 기병 양성은 힘들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때문에 후백제군의 전력은 보병 중심이었다.

후백제 수군의 경우에는 초기에는 그리 강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해전에 능하였던 왕건의 공격을 받아 후방을 늘상 털리기만 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후백제 후방의 금성 (전라남도 나주시)을 빼앗겼던 일은 뼈아픈 손실이었다. 나주 해안가를 고려군이 점령하면서 후백제는 늘 후방의 공격에 대비하면서 한쪽 다리를 묶은 상태로 고려군과 대적해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외국과 교역을 할 수있는 해상로가 줄어들었고 경제력도 크게 상실하였다. 다만 후에 나주를 회복하고 후백제의 장수였던 상귀나 상애 등이 수군을 이끌고 고려의 도읍인 개경 근처의 해안까지 진출해 깽판을 쳤던 기록을 보면 갖은 굴욕을 당한 이후로 나름대로 수군력을 향상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왕건이나 궁예가 그랬듯이 후백제의 왕인 견훤 역시 직접 전장에 나서서 군대를 통솔하는 친정 지휘 체계를 다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견훤 자신이 군인 출신이라 군을 지휘하는 데에 자신이 있었던 점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왕이 직접 전장에서 공을 세워 호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기록에 따라서 굳이 왕이 전장에 나서지 않고 왕자들과 장수들이 군사를 지휘했던 사례도 없지는 않다. 견훤의 아들인 수미강(금강)이 군대를 지휘했던 기록도 간간히 보이고, 특히 수군 대장인 상귀나 상애는 직접 수군 함대를 이끌었다. 이러한 경우에는 대개 왕이 친솔하는 중앙군이 아닌 지방에 파견된 장수나 도독들이 지휘하는 지방군인 경우일 것이다. 또한 중앙군 중에서도 왕이 언제나 친솔하지 않는 부대와 언제나 왕의 친솔을 받는 친위군이 따로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견훤의 측근이었던 김총은 견훤의 인가별감이 되었는데, 이 인가별감이라는 직위가 곧 견훤의 친위군의 장으로 추정된다.

또한 한 가지 특기할만한 점은 전북 남원에 배치되었던 신라 정규지방 기병군단 10정 중 하나인 거사물정의 존재인데, 이 부대는 다름아닌 의자왕대야성을 함락했을 때 경남 전체를 장악한 백제에게 맞서서 사투를 벌이고 신라를 수호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부대였다. 훗날 김유신의 지휘 아래 대야성과 옛 가야 지역 전체를 백제에게서 탈환했던 부대였는데, 이 유서 깊은 부대가 견훤이 전북 일대를 장악할 때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 것이다. 견훤은 본인이 직접 지휘하는 걸 즐겼는데, 옛 백제 지역에 신라의 옛 정규군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걸로 추정된다. 거사물정의 행방은 알 수 없으나, 역시 신라 정규군 장수였던 견훤에 의해 전면 후백제 중앙군으로 편제가 개편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서라벌을 함락하고 공산 전투에서 고려군에게 고려 역사상 최대의 패배를 안겨주었던 후백제군 대부분은 견훤이 친정했던 부대였던 걸 감안하면 거사물정 혹은 거사물정의 후신인 부대가 창설된 후 백제부흥운동 진압 과정에서 전북 남원으로 전진 배치된 지 거의 250년 만에, 그 원래 창설된 지역으로 돌아와서 맹활약한 게 된다. 다만 신라군이 아닌, 백제군으로서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성왕을 죽게 해서 백제에게 최악의 대패를 안겨주는 데 크게 공헌한 삼년산성도 꽤 빠른 시기에 후백제 손에 들어가 있었다. 물론 때문에 신라와 고려는 경북과 충북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후백제군에게 크게 고생해야 했다.

후백제 같은 경우 백제와 비교하면, 상당한 알짜배기 지역인 영산강 유역 일대를 잃었기에 적어도 경제력과 인구 면에선 절름발이긴 했지만, 반면 신라를 백제로부터 지켜주던 충북, 경북에 위치한 추풍령 일대의 주요 요새들은 거의 디폴트로 깔고 시작하고 있었다. 5세기 중반부터 거의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지증왕 이 세 명군이 온갖 노력을 기울어 완성했던 신라의 대고구려 및 대백제 방어망이었고, 그후로 거의 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기능했었는데 그것을 901년에 갓 건국한 후백제에게 겨우 6년만인 907년도에 허망하게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 직전에 이렇게 되는 걸 막기 위해 왕건이 이끄는 마진의 군대와 그 근방에서 접전하긴 했지만 당시 견훤의 후백제군이 일종의 판정승을 거두긴 했어도 그렇게 눈에 띄는 완벽한 대승이라곤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후 이렇다할 신라군과의 전투 기록도 없이 그 중요한 지역이 송두리째 전부 견훤에게 넘어가고 만 것이다. 견훤이 물론 한국사에서 손에 꼽는 우수한 장군이긴 했지만 이를 보면, 순전히 무력으로 함락하기보다는 견훤 자신의 신라 중앙군 복무 경력을 통해 포섭했을 가능성이 있다.

때문에 적어도 대신라 공세에 있어서는 온전한 몸이었던 과거의 백제보다 이 후백제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판도를 보면 후백제가 백제에 비해서는 다소 동쪽으로 치우친 모양새였던 건 이것이 이유였다. 물론 견훤 자체가 아이러니하게도 신라에 대한 향수랄까 미련을 못버려서 신라만 평정하면 게임은 끝난다는 생각이 있었을 가능성 또한 높았지만, 침입하기 쉽고 성과도 올리기 쉬우니 자연 그쪽으로 군사적 역량이 쏠리게 될 수밖엔 없었다. 경애왕 때 서라벌 함락의 비극은 이미 907년에 반쯤은 결과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는 얘기. 이렇게 취약해진 신라를 그나마 지켜주었던 건 대야성과, 아이러니하게도 친고구려 성향 탓에 자비 마립간 ~ 지증왕 때 여러모로 신라 왕실을 상당히 귀찮게 했었던 이른바 '고구려 고지'(봉화, 영주 일대)의 호족 세력이었다.

3.4. 대외 관계와 외교[편집]

3.4.1. 한반도 외교[편집]

후백제는 견훤이 신라에 반기를 일으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신라와의 관계는 좋지 못했다. 신라 입장에서 후백제는 그 수장부터 시작해서 말단병사까지 반란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고, 견훤도 경상도 지역으로 줄어든 신라에 자주 쳐들어가는 등 그리 우호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고려와의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고려를 건국한 주축 세력은 패서 계열의 호족이었고, 신라는 이 지역에 대해 그렇게 큰 욕심을 내지 않았으며 간접 지배로 만족했다. 오히려 옛 백제 지역이 신라가 중앙행정력을 전력투구해서 직접지배하며 유지하던 지역으로, 적어도 신라 왕실 입장에선 후백제 지역의 반란이 더 뼈아프게 다가왔을 개연성이 높다. 하필이면 백제왕이라는 견훤 또한 신라 정규군 장수 출신에다 그 부하들도 대부분은 옛 신라 정규군 군인이었으니. 하지만 편 옛 백제 유민 입장에선 그렇게 긴밀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여러모로 고구려 유민보다도 더한 차별을 겪어야 했기에, 신라에 대한 감정은 오히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결코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 왕조의 정통성은 다름 아닌 신라에 있었다. 아무리 후백제가 군사적으로 신라를 압도한다고 해도 어쨌든 일단 삼한일통을 해본 바 있던 신라의 역사와 정통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견훤은 일단 형식적으로는 신라의 왕과 군신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견훤이 경주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여놓고서도 신라를 함부로 병합하지 못하고 경순왕을 옹립한 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는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며 극렬히 적대하였고,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호족의 지지를 잃고 폐위당한 궁예의 태도와 대비되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후백제도 신라에 대해서 적대적이거나 가혹하게 대하는건 마찬가지였고[19] 그래서 신라인들은 후백제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이는 후백제가 고려에게 밀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역시 신라에서 벼슬을 하는 아자개, 소격달 등 영남 지역 호족들은 대부분 후백제보다는 고려에 협력하는 쪽을 택했다. 고려에 비해 지나치게 강경한 태도가 그렇게 영 좋게 비쳐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견훤의 군사적 능력이 워낙 우수했던데다가 후백제는 가깝고 고려는 상대적으로 멀었기에 후백제가 한참 고려를 밀어붙이고 있을 때는 다름아닌 영남 지역 일대에서도 후백제 쪽으로 이탈하는 자가 자주 나오곤 했다. 영남 지역에서 가장 불리한 상황에서도 후백제에게 한 번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 지역은 정작 신라 중고기 때는 친고구려 성향으로 여러모로 의심과 견제를 받던 고구려 고지 일대(경북 봉화, 영주 등 경북 서북부)[20]였고, 위 항목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선산 지역을 위시한 경북 서남부 지역[21]은 후백제가 굳건히 장악하고 있었다. 경남 같은 경우 상대적으로 여론은 친신라-고려 & 반백제였던 것 같지만, 후백제의 또 다른 주된 침공 경로였던지라 자주 초토화된 탓에 실질적으로는 거의 후백제의 판도 아래 있던 기간이 더 길다.

한편 신라는 적어도 꽤 이른 시기부터 고려는 정식 국가로 인정해 주었으며 나중에는 아예 왕건을 신라왕보다 상위에 있는 대왕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물론 이건 신라 왕실에서 대단히 크게 굴욕 수준으로 양보한 것이다. 반면 후백제에 대해선 왕이 살해당하는 그 난리통 안에서도 후백제를 국가로 인정한 정황은 한 번도 드러나지 않는다. 즉 후백제 같은 경우는 서라벌 함락 이전도 이후에도 적어도 신라한테선 한 번도 정식국가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이다. 물론 제후국 왕으로라도 신라가 인정한 바는 한 번도 없었다. 그냥 후백제는 신라와는 정상적인 외교 관계 자체를 맺지 못했다고 보면 된다. 신라는 철저하게 후백제를 미승인국 취급했고 후백제는 신라와 관계 개선을 시도할 때마다 신라가 보이콧으로 일관하니 더욱 신라와 관계가 나빠졌다.

한편 태봉과는 대립했다. 특히 왕건보다도 더 호전적인 성격의 궁예 시절에는 늘 싸우기만 했다. 하지만 의외로 고려와는 서로를 대등한 국가로 정상적으로 인정하는 상황이 자주 보인다. 왕건이 처음 고려를 세웠을 때에는 선물을 보내주는 등 나름대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도 보여주었을 정도. 그러나 고려와는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다투지 않을 수 없었던 사이였기에 결국은 과거에 태봉과 싸웠던 것처럼 언제나 군사적으로 대립 관계를 유지하였다. 물론 조물성에서의 사례처럼 일시적으로 화친하는 경우는 있었다.

3.4.2. 해외 외교[편집]

후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은 젊은 시절을 신라 서남 해안가에서 해적을 소탕하며 보내었던 경험 덕분인지 바다 너머에 있는 해외의 나라들과 국교를 맺는 것을 꽤 중요시했다. 때문에 원교근공책을 택해 가까운 고려와 신라와는 대립을 유지했던 것과는 달리 바다 건너 외국들과 지속적인 소통을 시도했다.

당시 중국은 오대십국시대의 혼란기라서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었고, 이에 견훤은 십국 중 하나인 오월이나 오대 중 하나인 후당에게 사신을 보내 책봉을 받기도 했다. 삼국사기의 견훤 열전에는 925년에 후당으로 사신을 보내 책봉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 측의 사서인 '오대사'에도 936년 1월에 후백제가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오대사에는 사신을 보낸 주체가 누구인지 나와 있지 않지만 시기적으로 볼 때 이 시기는 신검이 즉위했을 때이므로 이것은 신검이 자신의 정변을 중국 측에 알리고 국제적으로 자신의 정권을 승인받기를 노렸던 것이다.

일본 측의 기록을 보면 중국 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사신을 파견해 접촉하고자 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일본 역사서 부상략기(扶桑略記)와 본조문수(本朝文粹)에 따르면 장언징(張彦澄), 휘암(輝巖) 등의 인물을 대마도에 여러 차례 파견하여 일본과 통교를 요구하는 한편, 옛 백제와 일본이 우호 관계였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견훤을 '신라의 신하'라고 규정하여 통교를 거부하고[22] 대마도에서 약간의 식량만 받고 돌아와야 했다. 후삼국시대의 발단배경과 겹치는 9세기 후반 기간은 신라 해적 신라구에게 일본 서부가 탈탈탈 털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는 일본에서 반한감정이 극심한 상황이었다. 신라구란 당연히 원신라영역(경상도) 출신 해적만 말하는 게 아니라 통일신라의 영역 전체에서 온 해적을 통틀어 말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는 백제 유민이라고 해적질과 상관이 없다고 볼 수가 없었다. 애초에 신라 군인 견훤이 옛 백제 땅으로 부임한 이유도 '서남해' 해적 소탕 임무였다. 일본을 털었던 신라구를 포함해 당시의 해적 중 원신라계나 고구려계, 당나라계도 있었겠지만 그 외 많은 수는 옛 백제 영역 출신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리고 일본이 처음부터 후백제를 진심으로 신라의 신하로 규정해서 거부한 것이 아니라, 백제가 옛날 삼국시대 때 왜와 우호 관계였음을 내세우는 후백제의 메시지에 상당 부분 호의를 보였으며 사실 통교하려고 했으나[23] 그러나 이렇게 하면 일본 측은 예전에 백제에게 그랬듯[24] 후백제도 지원해야 하는데, 당대의 일본은 왕권이 바닥에 떨어지는 등 국내 사정이 너무 좋지 않아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견훤은 건국 초에는 형식적으로 신라 왕과 군신 관계를 맺었다고 자칭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예전에 백제가 일본과 통교하고 신라와 대립한 게 분명한 데 그걸 반복하겠다는 건 신라의 신하로서 할 일이라 할 수 없다. (요시노 마코토 저의 한일 2천년사 참조)

그 외에도 삼국사기에 거란의 사신 35명이 후백제에 내빙하였으며, 견훤이 이들의 귀환길에 장군 최견을 시켜 호송케 하였으나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나 후당의 등주(산동성)에 난파하여 모두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거란과도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외교에 관해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면, 후백제가 외교에서 상당히 적극적이었던 걸 볼 수 있다. 당시의 어떤 국가도 외교 부분에서 이렇게 많은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다. 후백제의 주적인 왕건의 고려만 해도 거란이나 일본과 잘 지내고자 하는 의지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25] 그러나 당시 중국과 일본이 나라 내부 사정이 과거 삼국통일전쟁 시절과 다르게 별로 좋지 않아서 바다 건너 후백제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고려와 후백제는 935년 신검의 난 이전까지는 슬슬 후백제가 밀리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그럭저럭 용호상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백제가 거란이나 일본과 함께 고려를 양쪽에서 공략하여 양면전쟁을 강요했다면 최후의 승자는 후백제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후백제의 의지와 별개로 운이 없었던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3.5. 문화[편집]

견훤은 신라삼최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당대의 명사 최승우와 같은 유능한 문인들을 등용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나름대로 문화의 발전에도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최승우는 후백제 측에서 남긴 거의 유일무이한 역사 기록인 <대견훤기고려왕서>를 집필했다. 견훤이 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무찌른 후에 보낸 편지로, 고려사와 삼국사기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 최승우가 지은 <호본서>라는 책도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사관을 두어 사서를 편찬했다고 하지만 이 역시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고려사 등의 역사서에서 그 흔적을 희미하게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백제와 마찬가지로 후백제가 스스로 남긴 역사 기록 또한 대부분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못하여 알기 힘든 부분이 많다는 점은 왠지 비슷하다.

그 외에도 불교의 진흥에도 상당히 노력한 면모도 보이는데, 아마도 당시에 유행하던 미륵 신앙을 사상적 토대로 이용해 보려던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말기에 이르어 난세가 이어져 백성들의 삶이 고달파지자 미륵이 나타나 세상을 구제한다는 미륵 신앙이 유행하였다. 태봉 왕 궁예 역시 이를 이용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견훤 역시 궁예만큼 본격적으로 신정 국가를 추구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미륵 신앙을 이용하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백제 때에 지어졌던 금산사를 견훤이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혜거국사 비문>에 따르면 922년에 미륵사에 개탑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3.6. 인물[편집]

4. 왕사[편집]

대수

재위기간

1

견훤(甄萱)

892 ~ 900(칭왕, 건국 이전)
900 ~ 935(후백제 건국)

2

견신검(甄神劍)

935 ~ 936

진흥왕

구륜

선품

작진

아자개

1.

능애

용개

보개

소개

대주도금

2. 신검

양검

용검

금강

능예

애복

 

진호

5. 같이보기[편집]

[1] 현대의 광주광역시. 892년 스스로 왕을 칭할 때는 무진주가 기반이었다. 다만 이 때는 정식으로 백제 왕을 칭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괄호 표기.[2]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3] 단명한 왕조라 존재감이 낮지만 엄연히 지금까지 존속하는 성씨로 유명인으로 견미리가 있다.[4] 삼국유사에서는 칭왕한 시기에 대해 892년 혹은 889년이라고 두 가지 전승을 모두 쓰고 있는데, 삼국사기 열전에서 庚寅(930년)이 후백제 42년이라고 하고 있으므로 역산해보면 889년 칭왕이 맞다는 설도 존재한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826쪽). 다만 이 때는 외부에 공공연히 왕을 칭하지는 못하는 외왕내제 비스무리한 애매한 선포였고[5] 900년에 공식적으로 '백제왕'으로 즉위한다.[5] 참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 지절 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6] 889년 원종·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7] 이 대목에서 엉뚱하게 시차 이백 몇 년 운운하는데, 고려도 고구려가 망한 뒤 이백여 년 지나서 건국된 나라다. 세계사에서 보면 오백 년 만에 부활하는 나라들도 있는 판국에 이백 년은 우스운 세월이다.[8]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불가리아, 이집트 등.[9] 참고로 멸망 당시 옛 백제의 국호는 성왕이 정한 남부여라고 보기도 하고, 남부여라는 이름은 딱 성왕 시절에만 쓰였다고 보기도 한다.[10] 일연의 삼국유사에선 먼저 앞서 말한 영남 출신설을 인용한 후 다른 옛기록에 있던 호남 광주 북촌 출신설을 같이 기록하였다.[11] 당시는 한국인 해적 신라구일본 본토 서부 지역까지 탈탈 털고 있었을 정도로 해적이 기승을 부렸다.[12] 충청남도 문화 연구원에서 발간한 백제사 시리즈 중 백제 유민 권 참조. 다만 비매품이기에 도서관에서만 볼 수 있다.[13] 승리하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대호재고, 패배한다 해도 일단 고려가 쳐들어온다는데 금산사의 견훤이나 박영규 등 친견훤파들이 언제까지고 신검 정권을 백안시할 수는 없을테니까. 견훤과 신라의 귀부 없이는 고려도 대놓고 후백제를 밀어버리는 캐삭빵급 대원정은 힘들었다. [14] 소설판에서는 최승우가 함부로 침공하면 상대방의 결속만 돕는 꼴이라며 정확하게 지적한다.[15] 특히 웅주 지역의 호족들이 대부분 후백제에 붙어서 두 나라의 최전방 전선이 북상하게 된다. 나중에 930년대가 되어서야 고려가 이 지역의 주도권을 되찾게 된다.[16] 가령 시중은 광치나(匡治奈)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17] 다만 고려 초기는 각 관직의 명칭은 일부 되돌렸다.[18] 그렇다면 외공내왕이 된다. 다만 이건 900년 전주에서 개국하기 전만 해당하고 그 이후에는 해당사항이 없으나 황제니 왕이니 하는 개념은 사실 완벽하지 않아 왕을 칭한 후에도 신라왕에게 신하의 예를 표했다. 신라는 신라왕 아래에 갈문왕이 있었던 나라이다. 군주에 대한 칭호 등이 엄밀하지 않아서 조선은 왕의 나라였지만 묘호를 사용하였고 일본 지방정권이나 류큐 왕국에서는 조선왕을 황제라고 불렀다.[19] 앞서 말했듯 경애왕을 자살하도록 협박했으며 그 과정에서 경애왕의 왕비를 겁탈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20] 해당 지역은 이후 신라부흥운동 기간에 근왕군을 일으켜 신라부흥군을 요격하기까지 한다![21]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역은 신라 왕실이 5~6세기 동안 가장 집중적으로 국력을 기울여 군사 지역으로 키웠던 곳이었다.[22] 19세기 서구 열강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할 때도 조선 정부는 조선이 청나라의 신하국이기 때문에 청나라 정부가 판단할 일이지 외국과 개별적으로 통상을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댔다.[23] 이 때 후백제는 일본에게 꽤 저자세로 나갔다. 발해의 경우처럼 사방이 적이라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동맹을 만들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24] 관산성 전투, 백강 전투 등 6세기 ~ 7세기 일본은 백제를 도와 신라와 싸우기 위해 원군을 여러 번 보냈다.[25] 알다시피 거란과는 초기부터 적대 관계를 표명했으며 일본과도 데면데면 했다. 오히려 5대의 나라들인 후당, 후진 그리고 십국 시기의 나라인 오월 등 중원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중시했다. 933년에 건국 초부터 사용하던 연호 천수를 폐지하고 후당의 연호를 사용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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