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후연 (384-407)-나무위키

2020. 12. 30. 04:08오호십육국(304-439)

후연

최근 수정 시각: 2020-12-22 00:40:56

 

분류

 

 

 

 

서연은 16국에 해당하지 않음
※ 둘러보기 틀 : 오호십육국 - 오호 / 오호십육국 - 십육국 및 기타 국가

16국(國)

전량(凉)

전조(趙)

성한(漢)

후조(趙)

전연(燕)

전진(秦)

후연(燕)

후진(秦)

서진(秦)

후량(凉)

남량(凉)

북량(凉)

남연(燕)

서량(凉)

북하(夏)

북연(燕)

기타 국가

단부 · · 등지 · 서연(燕) · 선우조 · 염위(魏) · 우문부 · 적위 · 전구지 · 후구지 · 탕창 · 초촉 · 환초

 


384년 ~ 407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전진

북연

전연

남연

별칭

후연(後燕), 모용연(慕容燕)

위치

중국 화북 동부

수도

중산(中山) → 용성(龍城)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모용(慕容)

국가원수

천왕

주요 황제

성무제 모용수
소문제 모용희

언어

중세 중국어, 선비어

문자

한자

종교

불교, 도교, 유교

종족

선비족, 한족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2. 역사

2.1. 전연의 멸망과 모용수의 건국2.2. 혼란과 수습2.3. 모용희의 막장극과 멸망

3. 기타4. 역대 군주

 

1. 개요

後燕

오호십육국시대의 한 축을 이룬 국가로 모용수가 건국해, 전연을 그대로 계승했다.

국내에는 그저 북위에 처발린 국가로 알고, 멸망할 때 모용 선비 끝장의 정점을 찍어서 이미지가 나쁘지만 실제로는 하북과 산동, 요서, 요동일부 지방을 모두 움켜쥔 강대국이었다. 그저 북위에게 하북을 잃어 그 사이에 모용덕이 남연을 건국해 산동이 떨어져 나가고, 황제도 암살당하고 요동을 뺏기며 급격하게 무너졌을 뿐 화북 통일 유력 후보 중 하나였다.

2. 역사

2.1. 전연의 멸망과 모용수의 건국

전연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인 모용수가 건국했다. 모용수가 모용평의 암살 음모를 피해 전진으로 망명했는데, 이후 전진의 부견비수대전에서 발리자 그 틈을 타 자립하여 후연을 건국했다. 모용수는 비록 자신을 사랑(?)으로 대해준 부견의 뒤통수는 쳤지만, 이후 의리를 갚아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긴 했다.

그는 하북을 평정하고 386년 중산에 정도하여 황제를 선포했다. 이후 같은 모용씨 국가인 서연을 멸망시키고 산동까지 정복하는 등 당대의 최강자에 오르나, 북위와의 참합피 전투에서 거하게 발리며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1]

어쨌든 요하를 중심으로 요서와 요동일부를 차지했으며, 비록 하북성을 차지했던 과거와는 비교도 못하지만 전국시대 강국 의 영역과 비슷함을 생각하면 결코 작은 영역은 아니었다.

2.2. 혼란과 수습

모용수가 북위에게 대패한 충격과 그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의 해골을 보고 절망감으로 화병을 앓다가 사망하여 그의 4남 모용보가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쇠락상을 극복할 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그의 치세에는 온갖 내분이 횡행했고 중산과 화북을 잃으며 이후 그야말로 멸망에 가깝게 무너져갔다. 그의 아우 모용덕이 남연을 세우며 남쪽 지방이 한꺼번에 떨어져나간 것도 치명타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북연이라고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끝내 모용보는 먼 친척이자 사돈인 난한에게 죽임당하고, 난한이 황위를 찬탈하여 후연 왕조는 일시적으로 붕괴했으나, 난한은 곧 모용보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위인 모용성에게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고 끝내 모용성이 황위를 회복하여 후연을 되살리게 된다.

모용성은 공포 정치로 여러 인사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여 반란이 끊이질 않았으나 모두 진압하는 위용을 과시했다. 그 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조공을 받았으나[2] 역으로 사신의 무례함을 명분삼아 광개토대왕이 신라 구원을 위해 가야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 있는 동안 고구려를 침공,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하고 700여 리를 개척하여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까지 위협하였다. 하지만 몰락해가는 후연의 국력을 재건하고 고구려를 위기로 몰아넣은 모용성은 얼마 가지 않아 용성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다가 패잔병의 습격으로 허무하게 사망한다.

2.3. 모용희의 막장극과 멸망

그 뒤 수양제의 전생이자 모용수의 아들인 모용희가 군주가 되었다. 모용성의 두 아들을 제치고 그가 즉위한 것엔 모용보의 부인이자 모용성의 어머니인 태후 정씨의 공이 컸다. 정씨는 모용희와 간통했는데 그 대가로 황제에 올려주었다. 모용희는 재위 이전에 표기대장군으로 고구려 토벌을 지휘하여 위에 기술한 바와 같은 큰 공을 세웠고, 그 전에 북위와의 전투에서도 여럿 공을 세운 바 있다. 이런 배경으로 후연의 군권을 휘어잡았고 더군다나 모용수에 버금간다고 할 만큼 뛰어난 평을 받는 인재였다.

하지만 재위 이후에는 정반대의 막장일로를 걷는다. 가야 원정에서 돌아온 광개토대왕의 대반격으로 요동 전역을 잃고, 요서의 숙군성까지 털리는 치욕의 역관광을 당한다. 나중에는 대릉하[3][4] 부근의 연군까지 털리면서 이제는 반대로 후연이 고구려에게 수도 용성을 위협받는 역전이 일어났다.

모용희는 부씨 자매를 총애해서 황후와 귀비로 삼고 말 그대로 뭐든지 들어주었다. 한편 태후 정씨는 총애를 잃고 절망하다가 병부상서 정신과 모용희를 폐위하려고 모의했다가 발각되어 자살했다. 부씨 자매는 민간에 놀러다니며 초호화판 파티를 했고 또 모용희에게 각종 사치스런 토목공사를 장려했다. 모용희는 그것을 모두 들어줬고 갑자기 귀비 부씨가 앓다가 죽자 치료하던 태의 왕온이 성의가 없었다면서 잔인하게 쳐 죽였다. 그는 내친 김에 고구려에 반격하여 요동성을 공격해서 요동성 함락 직전까지 몰았다. 그런데 갑자기 전투를 중단시키고 자신이 황후 부씨와 함께 가장 먼저 요동성에 입성하겠다며 요동성을 무너뜨리고 평지로 만들어 가도를 뚫도록 명한다. 이 때문에 요동성 함락은 실패했다.(...) 이후 거란을 원정했다가 무리가 많음을 보고 지레 겁을 먹고(...) 못 공격했다. 모용희는 퇴각하려고 했으나, 황후 부씨가 왠지 거절하자 이번에는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했다. 동호[5] 대신 동이를 공격한다. 이동의 신속함을 위해 치중과 무거운 것을 모두 버리고 경무장으로 무려 3천 리를 행군하여 목저성을 공격했으나 역시 패퇴했다.

이후 황후 부씨가 죽자 모용희는 슬픔에 잠겨 성대한 장례식을 치뤘는데 크고 아름다운 무덤을 축조도록 했다. 또 전국에 명을 내려 눈물을 흘리지 않거나 곡을 하지 않은 자는 처벌하도록 했고 대신들을 그 무덤에 순장시키려고 해서 나쁘던 민심을 더욱 잃는다. 모용희는 이미 염습이 끝난 부씨의 관을 열고 검열삭제(...)를 한 뒤[6] 상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로 그 상여를 직접 메고 용성을 나섰다. 그런데 상여가 너무 커서 북문을 무너뜨리고(...) 나갈 정도였으며 이 틈을 타 호한 혼혈로 한족이던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모용보의 양자인 고구려계 모용운(慕容雲)을 왕으로 추대한다.

모용희는 용성을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군대마저 흩어져 자신이 세웠던 용등원으로 달아났다가 끝내 사로잡혀 처형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래도 모용운은 예의를 갖춰 부씨와 합장해 주었다. 이렇게 후연은 외우내환으로 멸망하였고, 모용운이 북연을 건국하며 명맥을 이어나간다.

3. 기타

2011년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고구려의 메인 적국으로 등장하는데 후연과 고구려 인물들이 연이 아니라 후연이라고 호칭을 작중에서 대부분 그렇게 언급한다.

후연은 후대에 역사가들이 먼저 있던 춘추 전국시대의 연, 전연과 나누려고 본래 국호인 연나라에 뒤 후(後)자를 붙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국호가 같으면 후(後)나 고(古)를 붙여 나누는 일이 있는데도(예를 들면 고조선조선, 고구려후고구려, 백제후백제) 드라마에서 나라 이름을 다 후연으로 언급하고 넘어가 버리니.

어쩌면 제작진이 알면서도 시청자들이 헷갈릴까 봐 그냥 후연으로 불렀을 수도 있으나 그럴 개연성은 희박하다. 시청자들은 그런 거 의외로 관심이 없고 후연이 전연의 연장이니 전연이나 후연이나 거기서 거기다. 거기다가 북연까지 쭉 (대)연이라는 국호를 잇고, 이로 말미암아 북연의 시작이 모용보고운이냐 풍발이냐라는 논쟁까지 나는 마당인데 그런 배려가 얼마나 도움일까? 게다가 후고구려(태봉)와 후백제태조 왕건에서는 극중에서 고증에 맞게 고려, 백제로 국호를 언급하며 칭했다.

아무래도 단순히 "연"이라고만 하면, 드라마의 특성상 발음이 뭉개질까 봐(...)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후연놈을 연놈이라고 하면 뭐하니까

4. 역대 군주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능호

-

-

연왕(燕王)

모용수

연원(燕元) 384년 ~ 386년

384년 ~ 386년

선평릉(宣平陵)

1대

세조(世祖)

성무황제(成武皇帝)

모용수

건흥(建興) 386년 ~ 396년

386년 ~ 396년

선평릉(宣平陵)

2대

열종(烈宗)

혜민황제(惠愍皇帝)

모용보

영강(永康) 396년 ~ 398년

396년 ~ 398년

-

임시

-

창려왕(昌黎王)

난한

청룡(靑龍) 398년

398년

-

3대

중종(中宗)

소무황제(昭武皇帝)

모용성

건평(建平) 398년
장락(長樂) 399년 ~ 401년

398년 ~ 401년

흥평릉(興平陵)

4대

-

소문황제(昭文皇帝)

모용희

광시(光始) 401년 ~ 406년
건시(建始) 407년

401년 ~ 407년

-

[1] 모용수는 이 참합피 전투의 참상을 본 후 죽은 병사들을 위해 제를 지내다가 부끄러운 나머지 피를 토하면서 죽었다고 한다.[2] 최근 고구려가 후연의 요동을 빼앗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후연을 달래놓기 위한 계책이었던 걸로 추측된다[3] 원래는 베이징 부근이지만, 앞서 연군 태수가 이미 북위에게 항복한 사건이 있었으니 옮겨진 곳으로 보는 것이 대세다. 뭐, 광개토대왕을 띄워주자면 북경으로 보겠지만.[4] 사실 전근대에는 자기 영토가 아닌 곳으로 군대를 보내 휘젓고 다니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근현대처럼 사회 인프라나 시스템이 잘 구축된 것도 아니고, 국경조차 확실하지 않은 시기였으니까. 즉, 광개토대왕이 정말로 북경까지 공세를 가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때문에 학계에서도 소수설이지만 북경이라는 설이 여전히 잔존하고 있긴 하다.[5] 사실 후연의 선비족도 거란족과 같은 동호 계통이다.[6] 대렴이 이미 끝나, 그 관을 열어서 겹쳐 더불어 교접하였다. 大斂既訖,複啟其棺而與交接。 ─ 진서 12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