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최근 수정 시각: 2020-12-26 01:31:22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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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년 ~ 376년)[1] 386년 ~ 53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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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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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북위(北魏), 후위(後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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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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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락(盛樂, 386~39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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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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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성 |
탁발(拓跋) → 원(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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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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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섭정 |
문성문명황후 풍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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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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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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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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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가 |
2.1. 건국2.2. 태무제의 화북 통일2.3. 효문제의 한화 정책2.4. 육진의 난(북진의 난)2.5. 북위의 동서 분열
5.1. 비정통
6. 둘러보기
1. 개요
중국 중세사의 한 흐름을 만들며 오호십육국시대 호한체제[3] 또는 침투 왕조[4]의 표본을 보여준 국가. 오호십육국 시대 말기에 등장하여 화북을 통일, 남북조시대를 형성했고, 뒤의 수, 당 제국의 바탕을 이루었다. 수도는 지금의 다퉁이었다가 효문제 때 낙양으로 바뀌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대의 국호는 그냥 '위(魏)' 혹은 '대위(大魏)'였고, 북위라는 표현은 이전 시기 전국시대의 위나 삼국시대의 위와 같은 여타 '위나라'들과 구분하기 위해 역사가들이 붙인 표기 방식이다. 즉 당대를 바탕으로 한 소설, 사극에서 '북위'로 자칭하는 표현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오류라는 이야기다.
또는 황실의 씨성을 국호 앞에 붙여 '탁발위(拓跋魏)' 또는 '원위(元魏)'라 부르거나[5] 북방 이민족의 위나라라서 호위(胡魏), 시기적으로 나중에 등장한 점을 감안하여 '후위(後魏)'라 부르기도 하는데, 막판에 동위와 서위로 갈라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북위 표기가 통용되고 있다. 애당초 중국 25사 정사에 위사가 북위사로 들어가 버렸으니 게임셋.
2. 역사
2.1. 건국
선비족의 한 갈래인 탁발선비(拓跋鮮卑)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나라로,[6] 315년 서진 정권에게 하사받았던 기존의 국호인 '대(代)'[7]를 386년 탁발규가 '위(魏)'로 바꾸고 칭제건원했다.[8] 후연(後燕)의 황제 모용수는 탁발선비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쳐들어왔지만 도리어 395년 참합피 전투에서 대패하며 제대로 자존심을 구겼다. 북위는 이를 계기로 힘의 균형이 역전되기 시작한 틈을 타 397년 후연의 수도 중산을 무너뜨리면서 본격적으로 화북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9]
2.2. 태무제의 화북 통일
제3대 황제 태무제 시기에 북하, 북연과 북량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했다. 이때 한족 관료로서 북위 조정에 몸담고 있던 최호의 '국사 필화(筆禍) 사건'이 터져 최씨 일가 및 그와 관련된 귀족 세력들이 대거 처형 및 숙청되었다. 그 후 북위는 남조와는 달리 황제권이 귀족과 대등하거나 좀 더 우위에 있는 경향이 자리잡았다.[10]
2.3. 효문제의 한화 정책
5세기 말 효문제[11] 시기에 적극적인 한(漢)화 정책을 추진했는데, 그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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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洛陽)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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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한(胡漢) 간 결혼 장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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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성(胡姓)을 한성(漢姓)으로 개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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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속(胡俗), 호어(胡語) 금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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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족분정(姓族分定)[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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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교 제천[16]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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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제 개혁
효문제가 한화 정책으로 인해 권력에서 소외된 비(非) 한화 선비족의 불만이 누적되어 523년에 북위 멸망의 원인인 6진의 난이 발생하게 된다.
2.4. 육진의 난(북진의 난)
6진(六鎭)이란 북방의 유연(柔然)을 방어하기 위해 낙양 천도 이전의 원래 수도인 평성(平成, 지금의 다퉁 시) 부근에 설치된 군사 도시를 말한다.
본디 낙양 천도 이전의 6진은 수도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만큼 귀족 중에서도 최상급의 엘리트들이 대거 복무했으며, 주둔군도 후한 보수를 받았다.
그러나 낙양 천도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귀족 집단에서는 소수 선비족이 다수 한족에게 동화된 반면, 군에서는 소수 한족이 다수 선비족에게 동화되는 현상이 벌어지면서 양자가 문화 레벨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게다가 새로운 수도인 낙양으로 이주한 귀족들에게는 중앙 권력과 문벌귀족 최상층으로의 진입 등 온갖 혜택이 돌아간 반면 군, 특히 이전까지 후한 대접을 받던 6진의 주둔군은 날이 갈수록 처우가 열악해지는 것을 느끼며 불만이 커졌다. 이와 같은 군인 계층의 분노가 마침내 대형 반란으로 번지게 되었다.
육진의 난은 선비족 출신의 무장 이주영(爾朱榮)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그는 권력을 잡은 이후 궁중 암투로 인해 암살당했고, 그의 휘하 장수들이 이합집산을 벌이며 북위의 운명을 놓고 싸우게 된다.
2.5. 북위의 동서 분열
육진의 난 진압 결과 선비족의 이주영(爾朱榮) 집단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주영 집단에는 휘하에 고환(高歡), 우문태(宇文泰), 후경(侯景)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주영은 530년 궁중 암투로 인해 효장제에게 암살당하였고, 조카 이주조(爾朱兆)가 복수하기 위해 군을 일으켜 효장제를 살해하고, 장광왕 원엽(元曄)을 옹립했다. 그러나 방계로 정통성이 낮았던 원엽은 531년 이주세륭(爾朱世隆)에 의해 폐위되었고, 절민제(節閔帝) 원공(元恭)이 옹립되었다.
이에 반발한 하북 각지의 명족들이 이주씨에 대한 반항 운동을 시작했고, 과거 휘하 장수였던 고환과 연계하여 원랑(元朗)을 추대하며 연합 정권을 수립하였다. 532년 연합군은 업을 점령하였고, 이주조는 토벌군을 보냈으나 한릉산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낙양마저 연합군에게 함락당하였고 이주씨는 소멸되었다. 낙양에 입성한 고환은 이주씨가 세웠던 절민제(전폐제)와 과거 옹립하였던 원랑을 함께 폐위시키고, 새로 효무제를 옹립하였다.
고환은 진양에서 마음대로 북위 조정을 주물렀다. 효무제는 고환의 모욕을 참지 못하고 낙양에서 탈출하여 장안으로 도망가서 우문태(宇文泰)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이에 고환이 황족 원선견(元善見)을 추대하면서 화북 지역에는 효무제를 받아들인 우문태 세력과 효정재 원선견을 옹립한 고환 세력이 동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그 결과 북위는 고환의 동위(東魏)와 우문태의 서위(西魏)로 분열했다. 고환은 수도를 동쪽의 업(鄴)으로 옮겼고, 옛 북위의 수도였던 낙양은 동서 양국의 최전선 지대로 바뀌며 잿더미가 되었다. 이는 북위의 몰락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동위와 서위는 여전히 원씨들이 황제였으나, 둘 다 고환과 우문태의 꼭두각시 내지 허수아비 황제들이었다. 뭐가 다른데? 결국 고환의 아들 고양이 효정제를 폐위하여 동위는 북제가 되고 우문호에 의해 공제가 폐위되고 우문태의 아들 효민제 우문각이 즉위하면서 서위는 북주가 되었다.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한다. 북주와 남조의 진나라(陳)는 대립하다가 북주의 정제를 폐위한 양견이 수나라를 세우고 진나라를 병합하면서 서진 멸망 이래로 분열된 남북을 통일한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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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그루세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는 북위가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에 비견되는 '중국의 보호자'로 묘사되었다. 게르만족의 이동과 오호의 중원 침입을 유사한 선상에 놓고, 그러한 분열 양상을 통합하여 안정시킨 국가였던 프랑크 왕국과 북위로부터 일정한 알레고리를 포착해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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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는 고구려의 동방 지역 패자의 위치를 인정해 고구려 태왕에게 정동장군(征東將軍)이란 고위 관직을 하사했다. 또한 고구려 사신을 남조 사신 다음으로 대하였으며 489년(장수왕 77년, 북위 효문제 19년)엔 남조 사신과 고구려 사신을 동급으로 대해 남조 사신이 크게 항의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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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로 책봉된 왕자의 생모를 처형시키는 자귀모사(子貴母死)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훗날 외척의 세도를 막기 위한 처사였다고 한다. 아무튼 북위 효문제의 유언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음 황제인 8대 선무제 때 자귀모사 제도는 시대에 뒤쳐지는 제도라면서 철폐되었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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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를 무려 세 차례나 침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최 왜 침공했는지, 육로로 침공했다면 왜 고구려가 길을 열어줬는지 의문이고, 주로 기마 부대로 편성된 유목민 군대가 해상으로도 가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와 침공의 진위 여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관련 내용은 동성왕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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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에서 진나라와 더불어 가장 오래 존속된 왕조이기도 하다. 자그마치 148년. 1위는 진나라로 156년 동안 존속했다.[18] 허나 이는 오직 북위만을 따진 것이기에 대나라, 서위까지 합쳐서 계산한다면 북위는 200년이 넘기에 북위가 앞선다.
4. 추존 황제
역대 탁발부 지도자들과 대나라 군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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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모: 성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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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대: 절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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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관: 장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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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루: 명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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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월: 안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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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추인: 선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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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리: 경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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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사(俟): 원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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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사(肆): 화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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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기: 정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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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개: 희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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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쾌: 위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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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린: 헌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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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힐분: 무성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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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역미: 시조 신원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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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사막한: 문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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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실록: 장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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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작: 평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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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불: 사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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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녹관: 소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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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의타: 환황제
대나라 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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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
묘호 |
시호 |
휘 |
연호 |
재위기간 |
1 |
- |
목황제(穆皇帝) |
탁발의로(拓跋猗盧) |
- |
315 ~ 316 |
2 |
- |
문평황제(文平皇帝) |
탁발보근(拓跋普根) |
- |
316 |
3 |
- |
? |
- |
316년 |
|
4 |
태조(太祖) |
평문황제(平文皇帝) |
탁발울률(拓跋鬱律) |
- |
316 ~ 321 |
5 |
- |
혜황제(惠皇帝) |
탁발하녹(拓跋賀傉) |
- |
321 ~ 325 |
6 |
- |
양황제(煬皇帝) |
- |
325 ~ 329 |
|
7 |
- |
열황제(烈皇帝) |
- |
329 ~ 335 |
|
복위 |
- |
" |
탁발흘나[22] |
- |
335 ~ 337 |
복위 |
- |
" |
탁발예궤 |
- |
337 ~ 338 |
8 |
고조(高祖) |
소성황제(昭成皇帝) |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 |
건국(建國, 338 ~ 376) |
338 ~ 376 |
추존 |
- |
헌명황제(獻明皇帝) |
탁발식(拓跋寔)[23] |
- |
- |
- |
- |
대왕(代王) |
탁발규(拓跋珪) |
등국(登國, 386 ~ 396) |
386 ~ 398 |
5. 역대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1대 |
태조(太祖) |
대왕(代王) |
탁발규(拓跋珪) |
등국(登國) 386년 ~ 396년 |
386년 ~ 409년 |
성락금릉 |
2대 |
태종(太宗) |
명원황제(明元皇帝) |
탁발사(拓跋嗣) |
영흥(永興) 409년 ~ 413년 |
409년 ~ 423년 |
운중금릉 |
3대 |
세조(世祖) |
태무황제(太武皇帝) |
탁발도(拓跋燾) |
시광(始光) 424년 ~ 428년 |
423년 ~ 452년 |
운중금릉 |
4대 |
- |
남안은왕(南安隱王) |
탁발여(拓跋余) |
승평(承平) 452년 |
452년 |
- |
추존 |
공종(恭宗)[24] |
경목황제(景穆皇帝) |
탁발황(拓跋晃) |
- |
- |
- |
5대 |
고종(高宗) |
문성황제(文成皇帝) |
탁발준(拓跋浚) |
흥안(興安) 452년 ~ 454년 |
452년 ~ 465년 |
운중금릉 |
6대 |
현조(顯祖) |
헌문황제(獻文皇帝) |
탁발홍(拓跋弘) |
천안(天安) 466년 ~ 467년 |
465년 ~ 471년 |
운중금릉 |
7대 |
고조(高祖) |
효문황제(孝文皇帝) |
원굉(元宏) |
연흥(延興) 471년 ~ 476년 |
471년 ~ 499년 |
장릉(長陵) |
8대 |
세종(世宗) |
선무황제(宣武皇帝) |
원각(元恪) |
경명(景明) 500년 ~ 504년 |
499년 ~ 515년 |
경릉(景陵) |
9대 |
숙종(肅宗) |
효명황제(孝明皇帝) |
원후(元詡) |
희평(熙平) 516년 ~ 518년 |
515년 ~ 528년 |
정릉(定陵) |
임시 |
- |
- |
- |
528년 |
- |
|
임시 |
- |
- |
원조(元釗) |
- |
528년 |
- |
추존 |
|
|
원협(元勰) |
- |
- |
- |
추존 |
- |
효선황제(孝宣皇帝)[26] |
원소(元劭) |
- |
- |
- |
10대 |
경종(敬宗) |
효장황제(孝莊皇帝) |
원자유(元子攸) |
건의(建義) 528년 |
528년 ~ 530년 |
정릉(靜陵) |
11대 |
- |
장광왕(長廣王) |
원엽(元曄) |
건명(建明) 530년 ~ 531년 |
530년 ~ 531년 |
- |
12대 |
- |
절민황제(節閔皇帝) |
원공(元恭) |
보태(普泰) 531년 ~ 532년 |
531년 ~ 532년 |
- |
13대 |
- |
폐황제(廢皇帝) |
원랑(元朗) |
중흥(中興) 531년 ~ 532년 |
531년 ~ 532년 |
- |
추존 |
- |
무목황제(武穆皇帝)[27] |
원회(元懷) |
- |
- |
- |
14대 |
- |
효무황제(孝武皇帝) |
원수(元脩) |
태창(太昌) 532년 |
531년 ~ 534년 |
운릉(雲陵) |
어째서인지 북위는 역대 황제들이 40대를 넘긴 황제가 없다. 즉 50줄에 든 사람이 없다.
5.1. 비정통
대수 |
묘호 |
시호 |
휘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자립 |
- |
문경황제(文景皇帝) |
원유(元愉) |
건평(建平) 508년 |
508년 |
- |
자립 |
- |
양려왕(襄厲王) |
원법승(元法僧) |
천계(天啓) 525년 |
525년 |
- |
자립 |
- |
- |
원호(元颢) |
건무(建武) 529년 |
529년 |
- |
괴뢰 |
- |
여남문선왕(汝南文宣王)[28] |
원열(元悅) |
경흥(更興) 532년 |
532년 |
- |
6. 둘러보기
위도의 하나인 북위에 대한 내용은 위도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2·3권 「무제기(武帝紀)」 |
4권 「소제기(少帝紀)」 |
5권 「문제기(文帝紀)」 |
|
6권 「효무제기(孝武帝紀)」 |
7권 전폐제기(前廢帝紀)」 |
8권 「명제기(明帝紀)」 |
|
9권 「후폐제기(後廢帝紀)」 |
10권 「순제기(順帝紀)」 |
||
41권 「후비전(后妃傳)」 |
|||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
※ 11권 ~ 40권은 志에 해당. 송서 문서 참고
|
1·2권 「고제기(高帝紀)」 |
3권 「무제기(武帝紀)」 |
4권 「전폐제기(前廢帝紀)」 |
|
5권 「중폐제기(中廢帝紀)」 |
6권 명제기(明帝紀)」 |
||
7권 「후폐제기(後廢帝紀)」 |
8권 「화제기(和帝紀)」 |
||
20권 「황후기(皇后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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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권 ~ 19권은 志에 해당. 남제서 문서 참고
[1] 대(代)나라 시절까지 포함할 경우.[2] 몽골어족이나 튀르크 어족에 속했다고 여겨지는 언어이나 사용자가 없는 사어이기에 둘다 정설에 이르지는 못한 상황이다.[3] 한국 사학계에서 탄생시킨 이론 중에 거의 몇 안 되게 세계사적으로 인정받는 이론이 바로 호한체제(胡漢體制, Sino-Barbarian Synthesis)이다. 이는 서울대 동양사학과 명예 교수인 박한제가 1988년 발간한 중국 중세 호한체제 연구에서 구체화한 것이며, 중국 중세사의 바이블로 여겨진다. 국내에서는 호한 체제에 관해서 10여 명의 박사, 교수급 학자들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4] 카를 비트포겔의 이론. 사회학을 기반으로 하여 유목 왕조와 중원 왕조를 설명한 서구 학계 이론이다. 오호 십육국 시대의 여러 이민족 왕조들은 그보다 후대의 이민족 왕조들인 거란의 요, 여진/만주의 금과 청, 몽골의 원와 같은 '정복 왕조' 국가들이 여러 제도적 노력(고유 문자의 제정이나 이원적 통치 조직의 형성 등)을 통해 지배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과는 달리 중원 문화에 대항하여 적극적인 자문화 보존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침투 왕조'라는 표현은 후대의 '정복 왕조'와는 구별되는 오호 십육국 시대의 전체적인 양상을 반영하는 용어인 셈이다. 하지만 호한체제론 등장 후 1990년대에 북아시아사 및 유목문명사 연구가 심화되면서 유목 문명을을 서구 정주 문명식으로 바라봤다고 비판받기도 한다.[5] 이 경우 삼국시대의 위나라는 조위(曹魏)가 된다.[6] 탁발 선비는 종종 '타브가치(tabgachi)'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이 둘은 물론 동일한 집단의 다른 표기로 여겨지나 엄밀한 의미에서 타브가치와 탁발 선비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즉 타브가치의 원 발상지는 대흥안령 산맥 북쪽의 알선동(嘎仙洞)이었는데, 이후 북중국과 인접한 내몽골 지역으로 집단이 이동하면서 서요하와 동몽골 지역에 본래 거주하던 선비족 집단과 통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 박한제 교수의 『중국역사기행 3권 - 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의 알선동 파트 참조.[7] 대는 본래 춘추 전국 시대 산서성 북쪽 지역에 위치해 있던 국가였다.[8] 조위에게 조공을 바쳐서 위나라라고 하였다 한다. [9] 중산이 함락당한 후 후연은 상당한 내분을 겪는다, 게다가 하필이면 탁발규에게 얻어맞고 난 시기에 광개토대왕의 침공을 받아 완전히 분열되고 만다. 그 여파로 인해 요서의 북연과 산동의 남연으로 분열되고 말았다.[10] 이것이 남북조 간 국력이 차이나게 되는 원인 중 하나인데 남조의 경우 귀족들의 집안 싸움 + 황실의 개판 정치로 나라가 도통 하루도 조용하질 못했다. 게다가 땅만 보면 남조가 북조보다 더 강할 거 같지만 실상 미개척지도 많았고 앞서 말한 대로 귀족들이 사분오열되어서 강역에 비해 실제 지배 범위는 좁았다.[11] 효문제는 엄청난 대인배였다. 어린 시절의 자신을 핍박, 학대하고 심지어 마구 때리기까지 했던 태후를 용서했을 정도였다.[12] 범양(范陽)의 노민(盧敏), 청하(淸河)의 최종백(崔宗伯), 형양(滎陽)의 정희(鄭羲), 태원(太原)의 왕경(王琼) 4대 성씨 딸들을 받아들여 후궁으로 삼으며 자신의 동생들에게도 한족 대성(大姓)의 딸들과 새로이 혼인할 것을 명령한다[13] 북위 황실도 성을 탁발(拓跋)에서 원(元)으로 고쳤다.[14] 조정에서 30세 이하의 관료가 호어를 쓰다 적발될 경우 불이익을 줬다.[15] 선비족 귀족들 간의 등급을 정하고 같은 급끼리의 귀족들만 결혼 가능케 하여 선비족들끼리 뭉치지 못하게 함.[16] 제천 의식의 일종.[17] 일화가 있는데 1대 황제였던 도무제가 자귀모사라는 명분하에 태자였던 탁발사의 어머니를 처형한 것이다. 탁발사가 밤새 대성통곡을 하자 도무제는 태자가 나약하다며 오히려 죽이려 들었다. 그러자 태자 탁발사가 밤에 몰래 황궁을 빠져나가 잠적해버렸다... 이후 도무제가 없어진 태자를 대신하여 아들들 중 하란부 출신의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탁발소를 왕위에 앉히려 했다. 자기 어머니도 죽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탁발소는 급히 외갓집인 하란부로 달려가 이를 알려 하란부의 군사를 모았고 새벽에 몰래 황궁으로 쳐들어가 도무제를 죽인다. 북위 창업 군주가 자귀모사 제도로 인해 외척도 아닌 자기 자식에게 죽은 것이다... 탁발소가 어머니도 살리고 제위에 오르려는 순간, 잠적했던 폐태자 탁발사가 외척의 군대를 이끌고 대역죄인 소탕을 명분으로 갑자기 나타나 하란부와 탁발소 일당을 쓸어버리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2대 황제 명원제이다. 명원제는 하란부의 쿠데타 사건을 통해 외척의 위험성을 깨달아 자기 어머니를 죽인 자귀모사 제도를 오히려 더 강화시키고 공고히 다져갔다. 이후 8대 황제인 선무제가 없앨 때까지 자귀모사 제도는 중단 없이 실행되었다.[18] 서진과 동진은 영토나 주변 정세가 달라졌을 뿐 근본적으로 황실의 성씨, 정치체제 모두 동일한 왕조이다. 당장 정사인 진서(晉書)도 서진과 동진을 별도의 왕조로 보지 않고 모두 아우른다.[19] 탁발보근의 아들. 이름은 실전되었으며 탁발보근이 죽은 뒤 뒤를 이어 즉위했으나 그해 12월에 사망함.[20] 환제의 아들. 329년 하란부의 애두(藹頭)에게 패하고 우문부로 도망감.[21] 329년 탁발흘나가 도망가자 추대받아 재위.[22] 335년 돌아온 후 반란을 일으켜 복위. 그러나 337년 탁발예궤가 후조 군대의 호위를 받고 돌아오자 전연으로 도망간다.[23] 탁발십익건의 태자이자 아들. 탁발규의 부친이다.[24] 북위 문성제에 의해 추존됨.[25] 북위 효장제에 의해 추존됨. 추후 절민제 때 폐지.[26] 북위 효장제에 의해 추존됨.[27] 북위 효무제에 의해 추존됨.[28] 양무제에 의해 괴뢰 황제로 책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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