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광개토대왕릉비 (2) - 나무위키

2021. 1. 9. 10:39고구려 중 (391-559)/광개토태왕(391-412)

광개토대왕릉비

최근 수정 시각: 2021-01-05 08:52:57

 

분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명칭

한국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2]

간체

国冈上广开土境平安好太王碑

번체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분류

고묘장 (古墓葬)[3]

시대

고구려

일련번호

1-168-6-7

소재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등재

1961년

차수

제 1차 전국문물보호단위

 

1. 개요2. 명칭3. 발견과 연구

3.1. 비문 조작・변조설

4. 내용

4.1. 비문 해석4.2. 광개토대왕릉비 기년 문제4.3. 신묘년 기사(신묘년조) 논쟁

4.3.1. 왜군이 파백제할 정도로 강했는가?4.3.2. 과장 또는 윤색이다

4.4. 20세기 일본의 접근

5. 여담6. 같이보기

 

1. 개요



고구려 19대 왕 광개토대왕에 대해 새긴 비석.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서기 414년(장수왕 2년)에 아버지의 업적을 찬양하고 추모하기 위해 왕릉 곁에 세운 비석이다. 중국 지린성 퉁거우에 있다. 내용은 고구려 왕실의 연원에 대한 수사,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과 왕릉의 수묘인 규정이다.

 

2. 명칭

 

당연하지만, 당시 고구려인들이 이 비석을 어떻게 불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당대 (391년에) 제조된 호태왕 방울을 보면 광개토왕의 치기인 당대에도 광개토왕을 고구려인들은 호태왕이라고 부른 것이 확실시 되고 있으므로, 호태왕비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국립문화재연구소 같은 국가 공식 학술기관에서는 광개토왕릉비라고 칭한다. #1#2#3 #4. 위키백과에서도 이를 따라 항목명을 광개토왕릉비로 정했다.

보통 '대왕'이라는 단어를 넣어 광개토대왕릉비, 혹은 광개토태왕릉비라고 하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면 광개토대왕의 공식 시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을 붙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라고 하기도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광개토대왕비라고 부른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끝 3글자만 따서 호태왕비라고 부른다.

 

3. 발견과 연구

 


고구려 멸망 후 그 존재가 잊혔다. 이것이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신라를 도와 왜를 격퇴한 사실이 누락된 유력한 원인으로 추정된다. 김부식 사대주의자설에 따라, 신라에 불리한 사실이라 김부식이 알면서도 고의로 누락시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광개토왕릉비가 고려 영토 한참 바깥쪽에 있고, 김부식도 고구려 멸망 후 수백 년 뒤 사람이라 김부식 시대에는 이미 광개토왕릉비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봄이 훨씬 설득력 있다.

고구려 멸망 이후인 남북국시대에 이 비석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려시대조선시대에는 국경 바깥이 되어 정체가 잊혔다. 압록강가, 현대의 지안시 근처에 큰 석비가 있음을 알긴 했지만, 내용은 모르고 그저 옛 금나라 황제의 비 정도로 여겼다. 청 말기에 점차 봉금제도(封禁制度)가 해제되고 이 비문이 발견되어 고구려 왕의 비문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 고려 공민왕 19년(1370), 당시 고려의 장군 이성계가 원나라 잔존세력 북원의 동령부를 정벌하러 갈 때 집안(集安)을 통과했다. 고려사에서는 이곳을 '황성'(皇城)이라 하였고 조선왕조실록에는 '황성'을 '여진 황제의 성'이라고 설명했다.

  • 조선 세종 27년(1445) 용비어천가에서는 '성의 북쪽 7리 떨어진 곳에 비가 있고, 또 그 북쪽에 돌로 만든 고분 2기가 있다.'[4]고 했지만 금나라의 유적으로 오인했다.

  • 성종 18년(1487) 평양감사 성현이 지안[集安]에 가서 지은 망황성교(望皇城郊, 황성 들판을 바라보며)에서 지안을 황성(皇城), 태왕릉을 황제릉(帝陵), 비는 천척비(千尺碑)라고 하고 주변에 강이 흘러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기에 비문을 읽을 수 없다고 하였다.

  • 중종 25년(1530)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지안을 황성평(금나라 수도), 왕릉을 금나라 황제의 묘로 설명하고 높이가 10장이나 되는 농석이 있다고 하였다.

  • 중종 31년(1536) 심언광(沈彦光)이 집안 주변에 몰래 거주하는 여진족에게 압록강가에서 퇴거하라고 타이르란 임무를 받고 파견되었던 때에 지은 시가 지봉유설에 전하는데, 그 시에서 집안을 황성(荒城)이라 하고 황제 유적의 큰 비(皇帝遺蹟巨碣)가 있다고 하였다.

 


비석이 크기 때문에 발견한 사례는 몇 번 있지만, 다들 여진족 관련 비석으로 오인했다. 조선 후기에는 추사 김정희금석문을 연구한 사람도 있었지만[5] 이 비는 조선 국경 바깥 여진족의 땅에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된 계기는 일본이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소재한 만주 지역은 청나라 건국 이후 시조의 성지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봉금되었으나, 청나라가 열강에 휘둘리던 1876년 봉금히 풀리면서 비석이 중국 금석학계에 알려졌다. 당시 만주로의 한족들이 많이 이주했기 때문에 농지 개간 등 과정에서 다소 훼손되었다.

본격적인 연구는 만주를 침략해 들어온 일본이 시작했다.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밀정 사코 가게아키(酒匂 景信)가 탁본을 확보하였고 2년 만에 참모부에서 도본을 내놓았다. 이 자료가 이후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의 학자들의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3.1. 비문 조작・변조설

 

1970년대 이후 재일 사학자 이진희가 '사코가 신묘년조 기사를 변조한 탁본을 제작하였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비석 표면에 석회를 도포하였다.'는 조작설(석회도말론)을 주장하여 반향을 일으켰다. 석회를 바른 이유가 글자가 훼손됐기 때문이라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글자를 알아볼 수 없다고 해서 아예 글자를 가려버리는 행위 자체가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 육군참모본부 주도로 광개토왕릉비를 훼손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주장은 이후 일본이 직접 개입했다는 물증이 없고, 해당 지역에 거주하던 중국인 민초들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설(하술 참조)이 나오며 상세한 진위를 알 수 없게 되었으나,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내용은 사람의 손이 닿았고 몇몇 글자가 변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진희의 석회도말론은 변조 주체를 증명하지는 못했지만 석회를 바르기 이전에 뜬 원석탁본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는 의의를 지닌다. 실제로 이후 원석탁본들을 바탕으로 수많은 비교연구가 진행되었고, 현재 학계의 통설은 이런 추가 연구로 다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많은 사람의 오해와 다르게 뜨거운 감자인 신묘년조와 관련해서는 한중일 3국의 탁본 비교 연구에서도 별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즉, 하술할 신묘년조 논쟁과 비문 조작 논쟁은 별개의 것이다.

 

쌍구가묵본에서 변조된 문자(좌)와 80년대 주운태가 제작한 탁본의 문자(우)
쌍구가묵본의 경우 한눈에 봐도 인위적으로 윤곽을 뚜렷하게 만들었음이 드러난다. 우측은 있는 그대로 탁본했기 때문에 쌍구가묵본에 비해서 윤곽이 흐리다.


가장 유력한 변조 사례는 영락 10년 기사의 왜만왜궤(倭滿倭潰) 부분이다. '왜만왜궤'는 일본 도쿄대학에서 소장하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의 글자로, 변조되기 전의 원형은 '왜구대궤(倭寇大潰)'가 유력하다. 원래 문구로 추정되는 '왜구대궤'는 '왜구가 크게 궤멸됐다'로 해석되고, 변조 문구로 추정되는 '왜만왜궤'는 '(성에) 왜가 가득하였고 그 왜가 (성을) 무너뜨렸다'로 해석된다. #

쌍구가묵본은 비문에 종이를 대고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종이 너머로 윤곽을 가늠한 뒤 먹을 칠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모사자의 가치가 개입될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므로 쌍구가묵본은 탁본이 아니다. 반면에 탁본은 의미불명한 문자나 흠집이 있어도 그대로 두고 본뜨는 것[6]이다.

여기에는 일본육군참모부에서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제작법 특성상 연구자 또는 작업자 개인이 자의적으로 수정했을 수도 있으며, 오독으로 의도치 않게 고쳐졌을 수도 있다. 1980년대에 랴오닝 성 박물관장이었던 주운태는 일본이 개입한 행위가 아니라 일반인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왕젠췬(王健群; 왕건군)은 '비석에 발린 석회는 해당 지역 주변에서 탁본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중국인 초천부(初天富)・초균덕(初均德) 부자(父子)가 탁본을 더 쉽게 뜨기 위해 울퉁불퉁하거나 갈라진 곳에 채워넣은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 점은 초천부 초균덕 부자가 일개 소시민일뿐 한학이나 금석학 고문자와 아무 일가견 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간과한 주장이다. 아무리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인이어도, 역사적 배경 지식이 없이는 이런식으로 글자를 자의적으로 고칠수 없다는 주장도 있으며, 무엇보다 쌍구가묵본 자체가 탁본으로 인정 되지 없으며, 파손된 문자를 자의적으로 해석할수 밖에 없는 방식으로 제작된 문서다. 또 이는 신묘년조 기사만큼 민감한 부분은 아니지만, 그 내용과 맥락상 왜군의 세력규모와 신라를 어느정도 규모의 군사로 잠식 시켰는지 짐작할수 있는 구절이므로, 조작된 네글자의 가치가 가볍다고 여길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각에선 초천부 부자에 의해 개찬 되거나 변조 되었을 가능성을 낮게 보며, 남은 가능성을 일본 관동군 소행으로 본다.

본론으로 들어와서 주운태의 탁본은 왕건군에 의해 석문 되었고 그는 倭寇大潰로 판독했다. 결국, 쌍구가묵이든 혹은 광개토왕릉비의 금석문이든 자료가 어떤식으로든 날조,개찬 되었다는게 한중일 삼국 학자들의 결론이다. 다만 신묘년의 기사는 현재까지 아무런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개찬되지 않았다는게 중론이다.

 

 

주운태가 제작한 탁본을 기반으로 한 왕건군의 석문.
동그라미 쳐진 부분은 기존의 해석과 다른, 새롭게 판독된 문자들이다.

여러 학자들의 판독을 정리한 표.주운태의 탁본과 왕건군의 석문 이후로는 ‘왜구대궤’로 판독하는게 일반적이다. 출처: 제1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 김태식 18쪽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2k.pdf


괄호는 다른 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된 판독이다. 이로써 쌍구가묵본을 토대로 석문[7]하여 '왜만왜궤'라고 해석한 일본 학계의 주장은 힘을 잃게 되었다. 왜구대궤라고 풀이할 경우 해당 문장은 다음과 같이 달라진다.

(從)新羅城(宮)城倭滿倭潰城(內)□□(盡)□□□安羅人戍兵

(쌍구가묵본)

(從)新羅城(宮)城倭寇大潰城(內)□□(盡)□□□安羅人戍兵

(비교연구본)

일본 학계에서는 최근에도[8] 이러한 왕건군의 주장을 무시한채 아직도 왜만왜궤로 해석하는 트렌드가 강하다. 이 문구는 신묘년만큼 민감한 부분은 아니지만 신라를 약탈한 왜구의 규모를 짐작케 할수 있는 문장이므로, 이 날조된 (혹은 변조된) 문장이 지닌 가치는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다. # 209p.

이 사건으로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에서 객관적인 실체를 탐구하려는 태도가 재고되었다.

4. 내용

높이 6.39 m인 응회암에 정방형 예서로 각자하였는데 암석에 특별히 가공을 가하지 않았다. 각면 외곽에 윤곽선을 긋고 다시 세로선을 그어 행을 구분하였는데, 글자의 크기는 11 - 16 cm로 대개는 14 ~ 15 cm 정도다. 44행 1775자 중 150여 자는 훼멸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

비석이 물리적으로는 4면이지만 내용상 3부로 나눈다. 제1부는 시조 추모왕의 건국 설화로 시작하여 유류왕, 대주류왕 3대 까지의 고구려 왕실의 연원과 광개토대왕 업적에 대한 칭송 등, 제2부는 연대순으로 기록한 광개토대왕의 훈적, 제3부는 그 수나 출신 등 수묘인에 관한 사항과 수묘인 제도와 법의 공표 등으로 구성된다.

비문의 내용상 분명히 광개토대왕의 능 근처에 본 비석을 세웠을 테지만, 인근 왕릉은 전부 도굴된 지 오래라 정작 아직까지 어느 능을 가리키는지를 모른다. 인근에 위치한 태왕릉이나 장군총 중 한 곳이라고 추측하지만, 양쪽 모두 도굴과 훼손으로 피장자의 신원을 알 수 없다.

2부 훈적 부분은 모조리 굴복하지 않거나 쳐들어온 적을 쳐부순 무훈의 열거로 이뤄진 점에 특색이 있다. 연대순으로 나열하여 ①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친정한 경우와 ② 군사를 파견하여 벌한 경우로 나누어 확실하게 명시했다. 그리고 각 기사는 모두 토벌 대상 세력이 어떠어떠한 잘못을 저질러 구실을 제공하였으니 이에 벌하였다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성은 3부의 수묘인 부분과 결부하여 전체를 하나의 맥락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광개토왕 이래 수묘인을 정벌한 세력에서 끌어온 속민으로 두도록 했으므로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은 곧 수묘역 제도를 지탱하는 토대였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금석문과 마찬가지로 역사서마냥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하기 위한 글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미화, 찬양하기 위해 지었으므로 그 서술전개가 지극히 고구려 중심적이고 백제, 신라, 등을 비하하는 부분도 많으므로, 원문과 해석문을 읽을 때는 내용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런 부분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아래 단락에서도 나오듯 정인보 등은 이런 비문의 성격에 주목해서 해석하기도 했다.

4.1. 비문 해석

옛적에 시조(始祖)이신 추모왕(鄒牟王)께서 나라를 세우셨는데 (왕께서는) 북부여에서 나오신[9][10] 천제(天帝)의 아드님이었고 어머니하백(河伯: 水神)의 따님이셨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덕(德)이 있었다 ▨▨▨▨▨ 말을 타고 순행하시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께서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를 물에 띄우라."라고 하셨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상(山上)에 성(城)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하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가면서[11] 몸을 돌려서 세자(世子)였던 유류(儒留)를 왕(王)으로 명하고서 "도(道)로써 흥치(興治)하라." 하시니라. 유명(遺命)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왕은 도(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이라 하였다. 태왕의 은택이 하늘(皇天)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山陵)으로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여주고자 한다. 그 말씀은 아래와 같다.

패려(稗麗)[12]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13]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洛) 600 ~ 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백잔(百殘)과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가 신묘년(辛卯年)[14]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와 신라를 파(破)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영락(永樂) 6년[15] 병신에 왕께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셨다. 고구려군이 (3字 不明)[16] 하여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를 … 하였다.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殘主)[17]가 곤핍(困逼)해져, 남녀(男女)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18] 무술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백신(帛愼: 息愼, 肅愼) 토곡(土谷)을 관찰(觀察), 순시하였다. 이때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모▨라성(莫▨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백신은 고구려 조정에) 조공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했다.

영락 9년[19] 기해에 백잔(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와 화통[20]하였다 [21].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그 국경(國境)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었습니다. 노객(奴客)[22]은 (대왕의) 민(民 백성된자로써)[23][24]으로써 대왕께 귀의하여 분부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알리게 하였다.

10년[25]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에서부터 신라성(新羅城: 國都)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왜군이 가득하였지만, 관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그래서 라인(羅人)을 戍兵으로 두셨다.[26] …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자 중 거의 대부분이 불명.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 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聽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27]

14년[28] 갑진에 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帶方) 지역에 침입하였다. … 석성(石城) (을 공격하고 … ), 연선(連船)[29] …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거쳐 (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17년[30]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과 마군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루성(婁城) ▨주성(▨住城) ▨城▨▨▨▨▨▨城을 파하였다.

20년[31] 경술,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 : 동부여의 왕성)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凱旋軍)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 타사루압로(椯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파(攻破)한 성(城)이 64개, 촌(村)이 1,400이었다.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烟戶)[그 출신지出身地와 호수戶數는 다음과 같이 한다.] 매구여(賣句余) 민은 국연(國烟)이 2가(家), 간연(看烟)이 3가(家). 동해고(東海賈)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돈성(敦城)의 民은 4가(家)가 다 간연. 우성(于城)의 1가는 간연으로, 비리성(碑利城)의 2가는 국연. 평양성민(平穰城民)은 국연 1가, 간연 10가(家). 자련(訾連)의 2가(家)는 간연. 배루인(俳婁人)은 국연 1가, 간연 43가. 양곡(梁谷) 2가는 간연. 양성(梁城) 2가는 간연. 안부련(安夫連)의 22가는 간연. 개곡(改谷)의 3가는 간연. 신성(新城)의 3가는 간연. 남소성(南蘇城)의 1가는 국연. 새로 약취(略取)해온 한(韓)과 예(穢)(의 연호烟戶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沙水城)은 국연 1가, 간연 1가. 모루성(牟婁城)의 2가는 간연. 두비압잠(豆比鴨岑) 한(韓)의 5가는 간연. 구모객두(勾牟客頭)의 2가는 간연. 구저한(求底韓)의 1가는 간연. 사조성(舍蔦城)의 한예(韓穢)는 국연 3가, 간연 21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의 1가는 간연. 경고성(炅古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객현한(客賢韓)의 1가는 간연.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은 합하여 10가가 간연. 파노성(巴奴城) 한(韓)은 9가가 간연. 구모로성(臼模盧城)의 4가는 간연. 각모로성(各模盧城)의 2가는 간연. 모수성(牟水城)의 3가는 간연. 간저리성(幹氐利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미추성(彌鄒城)은 국연 1가, 간연이 7가. 야리성(也利城)은 3가가 간연. 두노성(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가. 오리성(奧利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수추성(須鄒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5가.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은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 태산한성(太山韓城)의 6가는 간연. 풍매성(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 윤노성(閏奴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22가. 고무루성(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 전성(瑑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미성(味城)은 6가가 간연. 취자성(就咨城)은 5가가 간연. 삼양성(彡穰城)은 24가가 간연. 산나성(散那城)은 1가가 국연. 나단성(那旦城)은 1가가 간연(看烟). 구모성(勾牟城)은 1가가 간연. 어리성(於利城)의 8가는 간연. 비리성(比利城)의 3가는 간연. 세성(細城)의 3가는 간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살아 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 왕들이 다만 원근(遠近)에 사는 구민(舊民)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韓)과 (穢)의 220가(家)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예인들이 수묘의 예법(禮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 110가를 더 데려왔다. 신(新)·구(舊) 수묘호를 합쳐, 국연(國烟)이 30가이고 간연(看烟)이 300가로서, 도합 330가이다.

선조(先祖)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떄문에 수묘인 연호(烟戶)들이 섞갈리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선조(先祖) 왕들을 위해 묘상(墓上)에 비(碑)를 세우고 그 연호(烟戶)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守墓)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4.2. 광개토대왕릉비 기년 문제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392년 5월에 고국양왕이 죽고, 같은 해 광개토대왕이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광개토대왕은 삼국사기대로라면 392년에 즉위했다. 그러나 능비에는 대왕이 몇 살에 즉위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기년과 육십갑자를 토대로 역산하면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은 신묘년(391)이다. 또 대왕이 사망한 연도를 두고도 두 사료는 서로 말이 다르다.[32] 물론 고구려인들이 산수를 잘못하거나 세는 나이/만 나이의 착오로 오기를 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이를 두고 어느 쪽 기록이 맞는지 학계에서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또 삼국사기와 백제삼서를 인용한 일본서기의 기록은 4세기 초반의 기록에 한해서는 교차검증이 되기 때문에 더욱 의문스럽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삼국사기와 백제의 실전된 사서인 백제삼서를 인용한 일본서기는 교차검증이 가능하고 연도도 이주갑인상을 하면 서로 부합하지만 이 두 사서는 광개토대왕릉비와 기년에서 1년 차이가 나는데, 칭원법에서 기인한 오차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당대에는 두가지 원년 기산법이 있었다. 어느 해에 선왕이 죽고 같은 해에 새로운 왕이 즉위했다고 해보자. 새 임금이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삼아야 할까? 아니면 그 해는 선왕의 마지막 통치기간으로 보고 그 이듬해를 새 임금의 원년으로 삼아야 할까? 새 임금이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삼는 것이 즉위년칭원법, 즉위한 이듬해(유년踰年)를 원년으로 삼는 것이 유년칭원법이다. 유교예법에서는 특별한 경우[33]가 아닌 한 유년칭원법을 올바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고려말부터 조선시대까지 한정된 예법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유년칭원법이 없었던것도 아니고, 실제로 삼국사기에 유년칭원법을 소개하는 김부식의 사론[34]을 싣기도 하였다. 하지만 삼국사기 자체만 놓고 봤을때 유월칭원법으로 기사가 작성되었으며, 또 삼국시대애는 유월칭원법으로 기록하는 것이 대세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기년과 릉비의 기년의 차이는 이에 기반한 오차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고로, 이 기년 차이는 단지 삼국사기의 오기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35], 또 최근에는 고국양왕이 광개토왕에게 선위를 했다는 학설도 주목 받고 있다. [36] 이 경우, 고국양왕이 391년이 광개토왕에게 양위를 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선 391년은 고국양왕의 마지막 치세 년도로 보고, 392년(유년칭원법)을 광개토왕의 원년이라고 봤으며, 릉비에서는 부왕의 공덕을 높이려고, 이를 소급 적용해서 391년(유월칭원법)을 원년이라고 칭했으며, 부왕인 고국양왕은 선위한 이듬해인 392년에 사망 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실질적인 원년은 391년이지만 명목상 392년으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또, 삼국사기와 릉비의 기년 차이 문제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의 기년를 단독표기로 기록한 반면, 광개토왕릉비에서는 육십갑자와 광개토왕의 기년을 병기하으므로[37] 광개토왕릉비에서 당대 고구려인들이 계산에 착오가 있었다고 이해하기 어렵다. 고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1년씩 당겨야 한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연도부터 사망한 연도까지 계속 1년씩 어긋나기 때문에, 적어도 광개토왕의 치세기에 한해서는 삼국사기가 1년씩 오류를 내었다. 그렇지만 광개토대왕릉비의 연도가 맞는다고 보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1년 당기면, 백제본기 395년의 기사가 광개토대왕릉비 병신년의 기사와 2년씩 격절이 나오기 때문에 의문점이 생긴다. 그러나 이는 같은 사건을 두고 기록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추정의 영역이지 확실하지는 않다.




혹자들은 일본서기와 삼국사기가 연대가 일치하니깐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년을 1년 뒤로 당겨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신묘년 호태왕이라는 문구가 기록된 청동 방울이 발굴되면서 광개토왕의 원년은 391년임이 중론이 되었다.[38]그렇다면 삼국사기의 기록이 1년 오차가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https://news.joins.com/article/283056 조법종 교수는 신묘년에 (예를 들자면 신라를 신민으로 만들었다거나 하는) 특별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신묘년의 주어를 고구려라고 해석했던 듯하다. 하지만 신라와 관련된 증언이나 유물이나 이에 대한 단서가 나오지 않는 이상 지금으로서는 지나친 억측이라고 해야 한다. 광개토왕의 즉위 원년을 기념해서 만든 방울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조법종 교수의 주장이 맞을 수 있고 또 신묘년의 주어가 고구려일 수도 있지만, 청동방울에 기록된 '신묘년' 문구 하나 가지고는 억측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다만 신묘년(391)이 이미 광개토대왕의 치세기였으므로 삼국사기의 기록이 부정확하니, 1년 당겨와야 하는 것에는 의의를 둘 수 있다.


 



또 능비는 광개토대왕이 승하한 지 3년이 되는 해에 이장되었다고 기록했다. 능비의 기록대로라면 광개토왕은 412년에 사망했고 414년에 능을 이전했다. 이를 토대로 본다면, 장수왕이 광개토왕을 3년 동안[39] 상을 치렀다고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의 사서에는 고구려인들은 부모가 죽었을 때 삼년상을 치렀다고 기록되었다. 삼국사기의 광개토왕의 승하 기록을 1년 당긴다면 능비에서 능묘를 이장 했다고 명기한 시기와 딱 24개월 차이가 난다. 이를 본다면 능비의 기록이 삼국사기보다 더 정확하고 디테일하므로, 광개토대왕이 승하한 연도를 오산해서 향년을 오기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40][41] 삼국사기에는 10월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었는데, 능묘를 이전한 날짜는 3년 후(만 24개월) 9월 29일이다. [42] 이에 대해 신라사 연구자인 주보돈 교수도 부왕인 광개토왕을 위해 장수왕이 삼년상을 치뤘으며, 릉묘를 이전한 시기를 만 24개월 후인 414년 10월로 보았다.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60412/77532701/1

<廣開土太王碑文>

昊天不弔, 卅有九, 宴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광개토태왕은) 하늘이 돌보지 아니하시어 39세(412년/영락永樂 22년)에 세상을 떠나 나라를 버리시었도다. 이후 갑인년(414, 장수왕 3년)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능을 옮겨 모셨다.


<北史 列傳 - 高麗 >

死者,殡在屋内,经三年,择吉日而葬。居父母及夫丧,服皆三年,兄弟三月。初终哭泣,葬则鼓舞作乐以送之.埋讫,取死者生时服玩车马置墓侧,会葬者争取而去.
사람이 죽으면 염하여 집안에 놓는데, 3년 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옷을 3년간 입고 형제는 3개월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며 읍하는데, 장사의 법칙은 북치고, 춤추고, 음악하면서 죽은 자를 보내는 것이다. 묻을 때에는 죽은 자가 태어났을 때의 옷과 익숙한 수레 말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에 모인 자들이 다투어 취한 후 가지고 간다.


<隋書 列傳 - 高麗>

死者, 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之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 悉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於墓側, 會葬者爭取而去.
죽은 자는 집안에서 염을 하고 3년 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지아비의 상에는 복을 3년간 입고 형제는 3개월을 지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슬피 우는데, 장례를 치를 때에 북치고 음악을 하여 춤추며 이를 보낸다. 이에 이르러 시신을 묻는데 모두 죽은 자가 살아있을 때의 옷이나 수레 말 등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지내는 데 모였던 자들이 다투어 취한 후 가지고 간다.

 


국책사업으로 편찬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해석도 이러하다

능비는 광개토왕이 죽은 뒤 만 2년째 되는 414년, 즉 장수왕 3년 9월에 대왕의 능과 함께 건립되었다(종래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년에 따라 414년을 장수왕 2년으로 보았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유월칭원법을 사용하였던 까닭에 광개토왕이 죽은 412년은 곧 장수왕 원년이 된다. 따라서 비가 건립된 414년은 장수왕 3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5058

 


따라서 현재의 중론은 릉비가 더 정확한 기록이고, 삼국사기가 적어도 광개토왕 치세기에 한해서는 오기 되었다는 것이다.

 

4.3. 신묘년 기사(신묘년조) 논쟁

 

비문 1775자 중 이른바 '신묘년 기사' 32자를 두고 지난 1세기 동안 학자들이 집중적으로 달려들었다. 본문은 다음과 같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43]破百殘□[44]□□羅 以爲臣民. (탁본)
백잔[45]과 신라는 과거에 속민이었기에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신묘년(영락 원년)에 왜가 와서 □[46]를 건너 백잔□□□[47][48]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일본은 당대부터 이 구절을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쓰고자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가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해석을 꾸준히 밀었지만, 한국이나 북한 학계는 이를 부정해 왔다. 예컨대 정인보는 이 비석이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찬양·미화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므로 '왕의 훈적을 나열한 비에서 유독 고구려에 불리한 기사를 실을 까닭이 없다.'며 의도적인 생략이 있는 것으로 보고, 오히려 주어를 고구려에 두어 '왜가 신묘년에 와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토벌하였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맥락상 왜가 오자 박살내고 백제와 신라를 좀 더 낮은 예속 단계였던 속민에서 종속국 수준인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한 듯하다.



渡□破를 渡海破[49]라고 해석할 경우, 고구려 주어설의 근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50]로 교차검증된다.

冬十月, 攻䧟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撃二十日, 乃拔.
겨울 10월에 백제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그 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바닷물이 둘러싸고 있어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관미성이 어디로 비정되는가는 차후의 문제이다. 하지만 최소한 관미성은 사면이 바다로 이루어진 요새로, 수군을 이용하여 함락할 수밖에 없는 곳일 것이다. 이 기록 이외에는 삼국사기, 일본서기와 중국 사서를 통틀어 당시 왜국이 4세기 후반 (391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복속시켰음을 증언하는 사료는 없다. 즉, 시기적으로도 문맥상으로도 일치하는 기사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묘년에 실시한 백제 원정밖에 들어맞는 게 없다. 391년은 광개토대왕 즉위 원년이다. 아들 장수왕으로서는 부왕의 즉위 원년에 실행한 군사 원정을 공덕비에서 빼놓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의 백제를 격파한 기록과 신묘년의 도해파 기록은 동일한 사건일 터이니, 왜국이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가 구태여 백제를 수군으로 공격할 이유가 있었을까? 바다를 건너서 백제나 신라를 공격한 주체는 왜군이 아닐까 하는 의문은 해소될 수 있다. 이밖에도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백제를 수군으로 공격한 기록은 또 등장한다. 396년의 기사에 한강(아리수)를 건너서 위례성을 포위한 내용이 나온다. 고구려하면 개마기병만 떠올리지만 수군도 개마기병 만큼 주력부대 였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396년에 대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왕건군이 초씨 부자에게 얻은 초기 필사본이 위조가 아니라면 신묘년의 비석의 기사가 東이 맞고, 渡□破 百殘東□가 되고 신묘년의 기사는 이렇게 재해석할 수 있다. 다만 김진명이 주장하길, 왕건군의 저서에 수록된 광개토대왕릉비 앞에서 탁본 장사를 하던 초균덕 부자가 필사한 문서로,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역사왜곡 소설로 악명 높은 그 김진명 맞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와 도쿄대 교수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 또한 김진명이 주장한 신묘년 기사에서 파손된 문자를 東으로 해석하며, 역사학계에서도 어느 정도 근거가 명확하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51]

그러나 다케다 유키오 또한 다른 일본사학자들과 다르지 않게 대전치문설을 지지하는 학자로, 비문에서 '왜가 백제를 도해파하여, 동쪽에서는 신라를 ○했다.'고 해석한다. 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에 의하면, 초씨 부자가 만든 저본은 원래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광개토대왕릉비에 동물의 분변을 바르고 불지르기 전에 훼손될 경우를 대비하여 자신들이 보이는 대로 필사했다고 밝혔다. 이 저본은 초씨가 죽고 조카 딸에게 맡겨졌으며 왕건군은 저서를 발간할때 부록으로 첨부한 모양이다. 그의 수기에 따르면 김진명이 이를 발견하여 왕건군의 저서를 갖고 도쿄대 동양사학과 학장을 만났다고 하는데, 그 교수는 다케다 유키오인 것 같다. 다케다 유키오는 이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 후로 東이라고 해석한다고 밝혔지만 진위는..(?) 다만 다케다 유키오[52][53]가 東으로 판독하는 것은 맞다. 안동대 임세권 교수[54]가 발간한 논문에서도 초균덕 부자의 필사본[55]을 언급하며 東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참고된 논문 <廣開土王碑의 硏究 -청명본 원석탁본의 검토->는 1997년에 발간되었단 것이다. 김진명이 최초 소설에서 첨부한 사진은 1995년에 출판된 가즈오의 나라라는 책이므로 임세권 교수가 이것을 보고 논문을 집필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김진명이 첨부한 사진의 진위여부를 판단해줄 만한 자료는 아니다. 참조된 논문 273, 274쪽 참고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74_0060&fileName=kn_074_0060.pdf 북한 사학자 손영종도 2001년에 발간한 책에서 임세권 교수와 같은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사실 백잔의 다음 결자를 東으로 파악한 것은 북한학계가 제일 처음 제기했고, 북한학자 손영종이 꽤 오래 전부터 주장한 내용이다. 즉, 초천부 부자의 수초본에서는 백잔의 다음 문자로 東이라고 적혔다는 것이다. 임세권 교수의 논문 274쪽에 첨부된 내용인데 白崎昭一郞는 백잔의 다음 결자는 更로 보았다.

일본 학계에서는 갱토신라(更討新羅)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菅・三宅을 비롯하여[56] 여럿 있는데 내용은 '신라를 같이 치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백제와 연합하여 공격했거나 백제를 치는 김에 신라도 공격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更와 東는 외관상 비슷하다. 이것이 능비가 훼손되기 전의 탁본을 기초로 한 해석이라면 두 글자는 모양이 매우 흡사하기 때문에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단순히 초천주 초균덕 부자의 수초본에 東자가 있다더라에 입각한 결자 예측이 아니라, 실제로 東의 7, 8획에 해당하는 사선과 日자의 형태를 근거로 東나 更로 판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높다. 뒤에 나오는 기사들의 문맥을 파악 했을때, 백잔의 다음 결자가 更라면 신라를 같이 (협공하여) 치다라고 해석하는게, 문맥상 어그러짐이 없다고 본다. [57]

제2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의 토론에서도 일본 측 사학자로 참여한 하마다 고사쿠도 다케다 유키오의 연구에 주목하며 일본사학계의 최근 트렌드는 백제의 다음 결자는 東으로 읽는 것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k.pdf 582쪽 참고.

일본학계에서는 이렇게 해석한다고 하마다 고사쿠가 발언하였다.

왜가 백제를 무찌르고 동쪽으로 가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그러나 왜가 하필 본국에서 먼 백제를 왜 먼저 격파하고 동쪽으로 진군해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는지 동선상으로는 납득이 안 된다.

어쨋든 백잔의 다음 결자를 동쪽으로 파악한다면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東□新羅以爲臣民.
왜국이 신묘년에 건너왔기 (신라를 침략해왔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 (왜국과 동맹관계 혹은 신라를 침략하는데 공동전선인) 백제를 격파하고, (그 후에 백제를 격파한) 군사를 동쪽으로 보내 신라를 신민[58][59]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한다.

실제로 백제의 왜국과의 공동전선을 고구려가 탐탁치 않아 했다는 근거로 광개토대왕릉비의 399년의 기사를 예시로 들 수 있다.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

영락 9년 기해년,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내려가 순시하였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들어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신하, 즉 신라 내물왕)은 (그 신분이 대왕의) 민(民 백성)이니 왕께 귀의해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와서 그 충성심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 고하게 하였다.


이를 미루어봐선 396년에 이미 백제의 아신왕은 비석의 기사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앞에서 스스로 노객이 되겠다고 천명했다. [60] 이때, 다시는 왜와의 공동전선을 구축해 신라와 고구려를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모양이지만, 후에 약조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고 신라를 침략하자 광개토대왕이 분노했으며 신라를 구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신묘년을 전치문으로 상정하고 이 병신년의 기사를 해석한다면, 애초에 고구려의 백제 원정 명분은 왜와 결탁한 백제를 정벌함에 있고, 화통이라는 단어를 보면 백제 왜 양국이 수직적인 관계를 내포하기 보단, 수평적인 관계임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백제가 문제의 신묘년 기사에 주동세력이 되고 왜는 단지 지원세력이라고 해석할수도 있다.

비문의 기사대로라면 391년에 고구려는 신라를 신민으로 여겼다. 삼국사기 392년 1월 신라본기의 기사로 교차검증이 된다.

三十七年, 春正月, 髙句麗遣使. 王以髙句麗強盛, 送伊湌大西知子實聖爲質.
37년(392)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냈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했으므로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 [61]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즉 요약하자면,

옛부터 백제와 신라는 우리 고구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그러나 391년 신묘년에 왜국이 건너왔기 때문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서 (왜국과 혈맹관계인) 백제를 격파하고 그 후에 군사를 (동쪽으로) 보내 신라를 신민으로 (보호했다) 삼았다. 396년에는 대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다시) 토벌하였다 (백제 또한 후에 신민으로 삼았다는 뜻을 내포함.)


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396년에 아신왕이 직접 항복하여 스스로 노객이 되겠다고 선언한 광개토대왕릉비의 기사와도 일맥상통하며 문맥도 어그러짐이 없다. 즉 신묘년 이전에는 조공만 바치는 속민[62][63]의 관계였지만 396년을 기점으로 백제 국왕이 직접 항복하고 노객이라고 선언했으므로, 최소한 고구려 측에서는 예속관계가 강화되었다고 여겼을 수 있다.

그러나 하마다 코사쿠 이래 이성시를 거친 전치문설이 알려지면서 현재는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견해가 통설이다. 앞서 소개한 이진희의 비문조작설은 근거가 부실하고, 위 문단에서처럼 문장의 주체를 고구려로 보는 견해도 한문에서 주어가 지나치게 생략한 것이 되어 과하게 어색한 해석을 이끌어낸다고 하여 신뢰받지도 못한다. 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주어가 생략된 부분은 비문 도처에서 발견된다. 예시를 들자면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백제와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쳐왔다.[64]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영락 10년 경자년, (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에서도 주어가 생략되었다. 더구나 강력한 고구려가 남하하고 있는 시점에서 왜가 신라뿐만 아니라 동맹 관계였던 백제까지 공격해서 신민으로 삼는 것은 삼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짓이므로, 전략적으로 볼 때도 왜가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은 납득되지 않는다. 이해 이후에도 백제와 왜는 멀쩡히 협력관계를 잘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광개토 태왕의 치적을 강조하기 위해 왜의 행적을 과장했다는 전치문설도 다음 기사에서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흐름이 부자연스럽다는 지적이 있다. 따라서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잔을 깨뜨렸다는 기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주된 쟁점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백제 아신왕이 스스로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칭하며 광개토대왕 앞에 무릎을 꿇어 약조하는 기사, 또 그후에 신라 내물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奴客으로 청하며 왜군으로부터 방위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기사가 연달아 나오고 있다. 상술한 고구려 주체설 해석이 맞다면 奴客이라는 단어가 고구려에선 백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실제로 아신왕과 내물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노객을 자처했든 고구려가 과정과 윤색을 덧붙였든간에 奴客이라는 단어를 프로파간다로 사용해 신묘년조의 신민이라는 단어를 의식해 '의도적'으로 선택해 백제 신라가 노객을 자청하고 그들을 굴복 시켰다는 해석이 되고 고구려 주체설이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학계에서 노객을 당대에 사용하던 신하[65]라는 뜻으로 쓰인 단어라고 의역하는데, 백제와 신라를 신민(臣民)이라고 언급한 신묘년조 해석과도 썩 어울리는 분석이다. 고구려에서는 당대에 신하가 왕에게 고할 때 자신을 노객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로, 이 노객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부각시켰다면 왜국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은 모순이다. 광개토대왕릉비 원문에 나온 속민과 신민의 용례를 조사하자면, 속민은 조공을 바치는 상대국의 왕이나 백성들을 뜻하고, 신민은 신하로써 복종하여 상대국 왕 스스로가 직접 대왕께 조공을 바치거나 항복한 주체로 해석할수 있는 것이다. 백제의 아신왕과 신라의 내물왕은 그들 스스로가 대왕을 직접 알현하고 아신왕의 경우에는 노객이 되겠다고 스스로 선언 했고, 내물왕 또한 사신을 보내어 대왕의 노객으로써 왕께 귀의한다고 말하였으며, 후에는 직접 대왕을 알현하고 조공까지 바쳤다. 그러므로 신민은 속민보다 예속성이 더 강하다고 결론 지을수 있다.

실례로 삼국사기에서 제일 신묘년에 제일 근접한 왜국의 신라 침공 기사(393년)를 보면, 왜국이 침공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신라에게 패퇴당하는 모습이 기록되었으므로 왜국이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사는 교차검증되지 않는다. 만약 진짜로 392년이나[66] 393년에 왜국이 침입했다면 어떻게 신민으로 만든지 1~2년 만에 신라에 통제력을 잃고 재차 침공했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금적기주심입(今賊弃舟深入), 즉 배를 버리고 쳐들어왔다고 기록되었는데, 진짜 신민으로 삼았다면 배를 타고 재침공을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들이 누누히 말하던 천황의 직할지 임나와 신라는 육지로 연결되는데 무엇하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침공하겠는가. 그리고 백제와 신라를 스스로 복종시키고[67] 신하로 삼았는데 왜 저항하고 있는가. 게다가 단순 교전을 한 것이 아니라 심지어 패주까지 한다.

三十八年,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 "今賊弃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歩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

38년(393) 여름 5월에 왜인을 포위하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깊숙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 하고 말하고 이내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 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여 합동으로 공격하니 그들을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일본측 신묘년 해석에 대한 한국학계의 대표적인 반론은 대체적으로 이러하다

다만 요즘 학계에서 대체로 인정되는 것은 신묘년 기사가 광개토대왕의 '王躬率', 왕의 親征 이유를 설명하는 前置文이거나, 혹은 영락 6년 백제 토벌의 '전치문'일 뿐만 아니라 이후 모든 원정 기사의 導論(명분)이 되는 '대전치문'이며, 왜가 강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를 수 있으나 고구려는 왜를 트릭스타로 사용하였다는 등의 견해이다. 광개토왕릉비의 왜는 왜구일 뿐이나 과장되게 표현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이 견해들은 비문을 통해 (왜국의) 남한경영론 (임나경영설)을 주장할수 없다는 점에는 동의했다고 보이나, 고구려가 주목할 만한 왜의 실체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기사가 원정의 '전치문'이라면 고구려가 - 자신에게 적대행위를 한 왜가 아니라- 백제를 공격한 이유라고 보기에 합당치 못하다. 이 기사가 모든 남정의 '대전치문'이라고 한다면 그 바로 뒤에 백제를 공격한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변명할 수 있어도, 이 기사가 어째서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왜냐하면 영락 6년조 뒤에 이어 나오는 8년조는 숙신(息愼)에 대한 것으로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문의 구조상으로는 신묘년 기사를 '王躬率' 형태를 띠는 영락 6년 백제 討置文의 '전치문'으로만 보는 것이 가장 논리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문장의 뜻은 백제와 신라가 옛날부터 속민이었으나 신묘년에 왜가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여 백제가 여기서 이탈하고 신라만이 그대로 신민이 되었다는 내용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辛卯年 기사의 原文을 다시 살펴보자.

B.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가장 문제되는 것은 '百殘□□新羅'가 왜의 신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문제이다. 혹은 사실 여부를 떠나 고구려가 그렇게 인정했는가의 문제도 포함된다. 그러나 비문 자체의 용례만 분석해 볼 때, 여기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왜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면 영락 6년조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할 때 왜의 면모가 보여야 하나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백제가 항복하는 장면에서 그 타협을 왜의 총독(總督)이 아닌 백제왕이 주도하고 있으므로, 고구려가 백제를 왜의 신민이라고 인정할 여지가 없다.

둘째로 영락 9년조로 보아 왜는 백잔과 화통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이는 영락 6년에 백제왕이 고구려의 노객이 되기로 맹서한 이후의 상황이기는 하나, 만일 그 전에 왜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거나 또는 고구려가 그렇게 인정하였다면 비문의 이 대목에서도 그 위세의 차이가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화통'이란 대등한 상대 사이의 협약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셋째로 비문에 나오는 民의 개념에는 오로지 고구려의 民만 있을 뿐이고, 다른 나라의 백성을 '民'으로 표기한 사례가 없다는 점이다. 백제왕조차도 노객일 뿐인데 왜국의 民을 奴가 아닌 신민으로 표기하였을 리가 없다. '民'의 용례는 비문에 모두 11회 나오는데, 그 중에 신민 외에 고구려의 民이 아니라는 논란이 있는 것은 영락 9년조의 '以奴客爲民'[68]뿐이나, 그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또한 사실의 문제로서 접근해 볼 때, 백제와 신라가 옛날부터 조공해왔다는 것은 허구이다. (하략)


출처: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2k.pdf 제1차한일역사공동연구회 4세기 한일관계사 19-21쪽 -김태식

그가 제기하는 문제를 이해하려면 광개토왕릉비의 정복전쟁 부문에 대한 구조를 알아야 한다. 정복전쟁 부분의 첫 번째로 등장하는 기사는 395년의 비려(稗麗) 정벌 기사이다. 그 다음에 391년 신묘년으로 돌아와 문제의 기사를 서술하는 구조이다. 즉, 신묘년 391년의 기사는 연대순서에서 열외된 기사임을 알 수 있다.그렇기 때문에 중국인 고구려사 연구자 왕건군은 정확한 의미에서 신묘년 기사는 없고, 후에 등장하는 남정 기사의 명분과 프로파간다를 기록한 이른바 '전치문'으로 봤다. 391년의 기사는 396년의 백제정벌 기사의 일부에 불과 할 뿐이다라는 뜻이다. 한편 하마다 고사쿠를 위시한 일본학계[69]에서는 더 나아가 이후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사들을 수식하는 '대전치문'[70]으로 해석하였다.

(하마다는) 신묘년조가 6년 병신년조 뿐만 아니라, 그 후의 9,10,14,17년에 걸치는 '대전치문'으로의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6년 병신년조 앞에 기록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게다가 신묘년조의 내용은 백제정토, 신라구원, 왜구궤멸, 패전에 이르는 대전제로서 설정된 허구이기 때문에, 광개토왕비에 기초하여 해석된 '일본의 한반도 남부 경영'을 전제로 하여 고대한일관계를 논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출처: https://hflib.kr/ 일본학계에서의 광개토왕비 연구의 성과와 과제 -이노우에 나오키


이 논리가 도입된 이후에 “고구려 왕의 공덕을 찬양하는 릉비에 왜 왜구가 주체가 되어 백제를 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느냐”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된 정인보의 고구려 주체설에 대한 해석은 지지를 잃었다. 즉 신묘년은 그저 전치문이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봤을때, 사건의 종결을 함의하는 문장이 아니며 독립성분이 아닌 “부속성분”이므로 문제의 기사의 주체를 왜로 해석해도 위화감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릉비의 원문은 프로파간다적 성격이 강하므로, 왜의 세력을 과장했으며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서 사용 될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태식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6년조 백제 정벌 직후에 등장하는 8년조 숙신 원정은 일본이 신묘년 대전치문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이용하는 왜에 대한 내용, 혹은 백제와 신라, 가야 등 한반도 남부의 정세와 아무 관련이 없으므로 '대전치문'설에 따라 해석하려고 하면 연속성이 깨진다며, 광개토대왕 원년부터 17년 정미년[71]까지 수식한다는 '대전치문설'에 문제를 제기했다. 오직 6년 백제 원정의 명분만 프로파간다로 활용했다는 것이다.[72] 또, 김태식이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400년 신라 구원의 기사에는 분명히 전쟁 명분은 399년의 기사에 기록하고 있으며, 404년의 기사는 왜구가 법도를 어기고 침공 했다고, 따로 전쟁명분을 명시하고 있으므로, 391년의 전치문의 목적과 중복된다고 할수 있다.

즉, 김태식 교수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영락5년(395) 패려 정벌 → 영락 원년(391) 문제의 기사 : 전치문을 주장하는 주요 논거/병신년 백제 정벌 기사의 일부/연도순 서술구조에서 열외된 기사 →영락6년(396) 백제 정벌/전치문이 수식하는 기사 → 영락8년(398):숙신정벌/ 한반도남부와 왜국과 관련 없는 기사/ 전치문 효력 종결 직후/ 이 기사를 포함한 하술되는 모든 기사들은 신묘년 전치문의 수식 범위 밖 → 영락9년(399):평양순시,신라의 구원요청/ 전치문 효력 범위 밖의 기사→ … → 영락20년(410) 동부여 정벌/ 전치문 효력 범위 밖의 기사

그러므로 '대전치문설'이 아닌 '전치문설'이 합당하고[73], 이 전치문은 6년 병신년의 백제 원정만 수식하고 있으므로, 신묘년의 도해파 주체는 왜와는 아무 관련 없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396년의 기사 직후는 신묘년 전치문의 수식이 종결상태 혹은 완결 상태로, 전치문의 효력이 상실한 상태이다. 즉, 백제 정벌 396년 직후의 문장들은 신묘년 전치문이 종결된 상태이므로 398년 숙신 정벌부터 시작해서 광개토왕릉비의 정벌 마지막 기사까지는 신묘년과 아무 관련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되면 또 신묘년의 주체는 왜국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이 생기고, 그것을 고구려가 실시한 원정 혹은 신라 구원으로 볼수 있는 것이다. [74]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신묘년 기사에서 고구려가 부각하려는 주동세력은 왜가 아닌 백제이고, 왜는 단순히 백제의 지원 세력이다. 신묘년에 왜가 백제나 신라를 (일본 측이 주장하는 대로) 신민으로 삼았거나 백제를 격파하고 군사를 동쪽으로 돌려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면, 직후의 병신년 기사에는 백제가 아니라 왜를 공격해서 고구려 중심 질서에서 백제를 이탈시킨 왜에게 응징하는 내용이 나와야만 의미가 통한다. 설사 고구려가 (왜가 아닌) 백제를 공격했다고 해도 백제를 신민 혹은 복종시킨 왜가 어떻게든 등장해야 하는데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75]

신묘년조에서 파손된 문자가 갱토신라(更討新羅)라고 해석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왜와 백제가 같이 신라를 침략했다고 해석해도, 398년 숙신 정벌의 기사 문제로 396년 이후의 기사들은 신묘년/병신년의 맥락과 닿있지 않는다. 그래서 신묘년은 병신년의 기사만 수식하는 '전치문'이고 병신년에 나오는 정벌의 대상은 '오직' 백제이므로, 이 경우에도 문제의 신묘년 기사에서의 주동세력은 백제이고 391년 문제의 신묘년 문구에서 등장하는 왜의 면모는 단지 백제의 지원세력이라고 해석한다.


상식적으로 전치문을 기록 할 정도로 병신년 기사는 자랑하고 싶은 훈적이며 릉비의 '하이라이트'이다. 그런데 전치문의 주어는 왜로 해석 해놓고선 정작 병신년에는 왜의 세력이 일절 나오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오기나 누락이라고 할 수 없다. 병신년에 백제에 왜의 세력이 가세하고 있었다고 하면, 고구려는 막강한 적들을 상대로 굴복 시키고, 고구려 질서에서 이탈한 백제를 훈도 시킨 존재로 인식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합당한 해석은 앞서 언급된 고구려 주체설이거나, 391년의 주동 세력은 백제이고 왜가 그 백제 세력에 합류하는 식으로 해석 할수 밖에 없다.

또한 그가 언급했듯이 능비에는 민(民)을 포함한 다양한 단어들이 등장한다. 신민(臣民), 속민(屬民), 구민(舊民), 신민(新民) , 민(民) 등 인데, 각각 속민은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치는 국가와 그 국가의 백성,구민은 원래의 고구려 백성들, 신민(新民)[76]은 정복 사업에서 새로 얻은 (약취한) 백성, 민(民)은 내물왕이 자신의 신분을 대왕의 백성이라고 규정했다. 즉, 전부 고구려를 주체로 해석해야 의미가 통한다. 고로 같은 '민(民)'자가 들어가는 신민(臣民)은 그 용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후에 제2차 한일공동역사구회에 참가한 조법종 교수 또한 신묘년 호태왕 방울이 발굴된 이후로 신묘년에서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주체는 고구려가 되어야 하지 않냐고 말하였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63509

우리나라의 일부 재야학자들은 한국 주류 사학계가 일본의 신묘년 대전치문설을 비판 없이 모두 수용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일본의 해석에 문맥이나 내용상을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개찬설을 주장하다가 일부 보기 좋게 논파 당하였으니, 확실한 증거나 연구가 진전될 때까지 신중하게 접근한다는 느낌이다.

 

4.3.1. 왜군이 파백제할 정도로 강했는가?

 자세한 내용은 신라-왜 전쟁 문서참고하십시오.

일본 학계는 당시에 실제로 왜가 강성하여 백제, 신라 등을 깨뜨릴 만했다고 주장한다. 대개 광주광역시에 있는 장고분[77]이나 백강 전투에 동원된 일본 수군의 존재 등이 근거로 제시되며, 송서, 수서의 기록 및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의 조공 기사・볼모 기사 등이 쓰이곤 한다. 칠지도도 백제가 왜국에 '조공'한 공물로 해석한다. 신라가 볼모를 보낸 것은 미사흔 1명이 확인된다.

신라가 미사흔을 일본에 보낸 것을 살펴보면, 당시 신라 임금 입장에서 미사흔은 숙청하는 것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여기서 일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삼국유사의 391년 기록인데, 여기에선 삼국사기의 논조와 달리 "미사흔이 391년에 왜국에 인질로 잡혔다"고 서술되었다. 즉, 신묘년의 신민의 기사가 이를 두고 지칭한 것이라면 일본 측 해석이 맞다. 또 신묘년 ‘도해파 백잔’의 해석을 두고선 일본서기의 392년 “진사왕이 무례하게 굴어서 (왜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그를 꾸짖자, 백제인들이 왕을 죽여 사죄했다”라는 기사를 두고, 이것을 지칭한게 아니냐는 해석 또한 있다. 물론 액면 그대로는 말도 안되는 윤색이지만, 어느정도 사실을 투영하고 있는 기사라면, 재고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신왕이 친왜계 세력들의 지지를 얻어, 왕위를 찬탈 했을수도 있는 노릇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추측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한다고 해도 릉비의 ‘도해파’는 말 그대로 양 세력간의 물리적 ‘충돌’을 함의하는 의미므로, 고구려가 정말로 백제에서 일어난 왕위 찬탈을 군사적 충돌로 인지 했냐는 별개의 문제로 신빙성을 따져봐야 한다.실제로 일본서기에 의하면 원래 아신왕에게 돌아가야 할 왕위가 진사왕이 찬탈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으므로, 후에 아신왕이 숙부인 진사왕의 왕위를 재찬탈 했을 가능성이 있다.

백제는 아신왕 때 태자 전지를 왜에 인질로 보낸 것부터 시작해서 여러 인물이 왜에 갔으나, 그 성격이 실제 인질이 아니고 외교관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견해가 정설이다[78]. 특히 전지왕이 왜로 간 시점에 정작 '백제'와 '왜'라는 양 당사자 간에는 "선왕이 쌓은 우호를 잇기 위해 방문하였다." 하는 백제삼서의 기록과 "내조하였다."라는 일본 쪽 기록만 있을 뿐, 인질을 보냈다는 언급이 없다. 즉, 일본서기에도, 또 일본서기에서 인용했다는 백제의 기록에도 '인질'이라는 표현은 없고 한참 후대에 쓰인 삼국사기에만 나올 뿐이다.[79]

왜와 백제의 관계도 왜가 백제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일본 극우식 망상이나 거꾸로 백제가 왜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식의 극단적 망상과는 달리, 군사·문화적 혈맹 관계로 보는 게 오늘날 학계의 정설이다. 어느 한쪽의 국력이 약해지고 강해지고에 따라서 서로의 발언권이 세지고 약해지고가 있었을 뿐이다. 일본 쪽만 하더라도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먹었다는 식의 학설을 예전처럼 밀어붙이기보다는 한반도 남부에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는 정도로 가는 추세이다.[80]

한편 중국 사서 쪽의 기사들, 특히 송서 왜 5왕 기사 등은 대체로 왜국에서 나온 일방적 주장인 경우가 많아 다른 사료와의 교차검증이 더욱 필요하다. 수서만 해도 신라를 고구려 패잔병이 세웠다는 둥 신라 왕이 백제 출신이라는 둥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 다 사실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즉, 수서나 기타 다른 중국 사료들에 나오는 기록들을 전부 다 사실로서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수서 왜국전과 송서 왜국전에 분명 일본 측에 유리한 내용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송서에는 433년부터 왜국의 왜5왕이라는 자들이 중국을 상대로 교류할 때 '왜·백제·임나·가라·신라·진한·모한을 지배하는 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을 자칭하였다고 나온다.[81]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아니면 착각인지 허세인지는 백제나 신라에 그러한 기록이 없으니 직접적으로 알 수 없으나, 적어도 5세기 초에 왜국 스스로가 한반도를 속국으로 여겼음은 알 수 있다. 하지만 저 관작명은 그냥 왜국의 허세다. 위의 관작에서 중국은 백제를 제외하고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의 통치를 인정하는 관작을 내려주었다. 어째서 백제 혼자 빠졌을까? 게다가 처음에 자칭하였고 계속 거부 당하다가 인가받은 작위다. 자칭하는 작위인데도 정작 자신은 백제왕이 하사 받은 작위인 진동대장군 보다 낮은 관직을 내려 줄것을 요청했다(...)

게다가 일본서기에서 임나의 용례를 살펴보면 일관되게 임나는 가야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당대 일본에서는 한국에서 사용하는 임나의 용례와 다르게 와전되어 받아들여진 것이다. 따라서 임나=가야이다. 가야와 임나를 동기시하면 6국이 아니라 5국이 되어야 한다. 일본사 연구자 김현구 교수는 임나는 일개 가야의 구성국 중 하나라고 못박은 바 있다. 임나와 가야를 별개 국가 취급하자니, 일본에서 임나와 가야를 당대에 다른 개념으로 구분했다는 용례도 없고, 또 그렇게 되도 임나는 가야의 일부분이니 중복되는 개념이다. 고로 일개 국가인 임나를 연맹체의 통치인 가야와 동렬에 배치하는 시점에서..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 중국 황실은 임나 가라를 포함해 6국 제군사라는 지위를 하사했다. 일본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를 들며 한반도 남부를 천황이 직할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천황은 중국 황실에 정정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즉, 자신도 허울뿐인 작위라는 것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는 중국 남조와 지속적인 교류로 선진 문물을 일찍이 받아들이고 강력하게 성장한 상황이었다. 이때 백제가 중국으로부터 수여받은 관작은 왜의 '안동대장군'[82]보다 4단계 높은 '진동대장군'으로[83][84] 이를 통해 당시 백제의 위상이 왜보다 더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이 백제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황당한 주장과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왜가 백제를 자신들의 속국(?)이라며 황당한 주장을 중국에 여러 차례 전하자, 이미 백제와 자주 교류하여 백제의 국력을 알았던 중국 남조는 일본이 달라고 자칭한 관작명에서 백제를 아예 제외했다. 한마디로 일본이 요구한 관작명은 그저 허울뿐인 관작이었으며, 따라서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85]

이뿐만이 아니다. 당시의 관작명을 보면 '진한'과 '모한'이 나온다. 그런데 진한은 당시에 이미 없어지고 신라로 대체되었으며, '모한'은 대개 마한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데 이는 문헌상으로는 온조왕 때, 현실적으로는 적어도 근초고왕 때 백제에 병합되었다.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 국가의 이름이 나온 것을 통해서도 이 관작이 허울뿐임을 다시금 알 수 있다.

추가로 《일본서기》나 《고사기》 등에서는 '삼한정벌', '임나일본부'를 말하고 있지만 대개는 신화적 서술과 '이주갑인상'을 비롯한 '왜곡'으로, 철저한 검증 없이 섣불리 믿기는 힘들다. 정리하자면, 왜국 스스로가 당시 사실과는 다르게 백제 등 한반도의 여러 나라들을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여겼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일본서기》 중 391~396년에 해당하는 기사들에서도 일본이 5만 대군의 고구려군과 싸운 전쟁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일본 학계의 해석은 기본적으로 크나큰 약점이 있다. 한국 사서들에서도 일본이 391년에 한반도를 침공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다시 말해, '왜가 백제를 깨뜨리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하는 신묘년 기사의 일본식 해석이 지니는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주장을 뒷받침할 다른 기록들이 한중일 그 어떤 사서들에서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일본의 자의적인 해석일 뿐이다.

그러나 신묘년조 해석에 큰 문제가 없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신묘년조 이후에도 백제가 맹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했기 때문에 왕이 평양성까지 몸소 나갔다는 언급이 나오는 등 백제와 왜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고 왜도 신라를 공격하거나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기 때문에 기존의 신묘년조 해석이 문맥상 잘 맞는다는 것. 이러한 쪽에서는 신묘년조 앞부분에 백제와 신라가 원래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고 하는 부분에 주목하며 '신민'의 의미가 잘못 해석되었다고 본다. 백제와 신라[86]가 원래부터 고구려에 복속했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중국의 고구려 연구학자 왕건군도 한국의 국내 학회에 참석해, 왜왕이 자칭한 작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요구이며, 백제와 신라, 가야 등을 지배했다고 반복하는 것은 왜가 통치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또 당대에 한반도 남부에는 백제와 신라 임나가라만 존재했는데 가야와 임나를 별개 국가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 지적했고 이는 자신이 자칭해서 다스리는 나라의 실정도 제대로 모르고 요구한 것이라며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87] 조선족 연구자 박진석(朴眞奭) 또한 왜왕 무(武)가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조예(祖禰), 즉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통일을 이룩한 것에 대해 언급하는데, 한반도까지 진출할 여력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광개토왕릉비에서 도출된 왜구의 성격에 대한 왕건군의 학설은 대체로 이러하다. 한반도 남부를 침탈 해 온 세력은 일시적으로 한반도 남부에 상륙해 인력과 식량을 약취 해가는 세력이므로, 한반도 남부를 경영할 만한 능력도 없고 주체도 될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큐슈 북부 일대를 기반으로 둔 '해적'으로 보았다. 간혹 일본인들이 왕건군이 광개토왕릉비는 개찬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 학자이므로, 일본측 학설을 지지 했다는 식의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의 학설은 임나일본부설과 완전히 배치되는 해석이다. 그의 학설이 일견 일리가 있는 점이라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왜구의 한반도 약탈의 행태는 여름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도 유난히 여름에 한반도 남부 국가에 사신을 파견 한다든지 교섭이 활발한 점도 이를 뒷바침하고 있다. 반면에 이들 사신이 왜국으로 돌아오는 절기는 대게 겨울이다. 즉 계절풍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인력과 식량을 약취한 뒤, 겨울에 훈풍을 타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 근거를 들어 왕건군은 병신년 대왕의 백제 친정때, 백제를 침략해 약취를 일삼던 북큐슈 기반의 해적은 고구려군과 마주치지 않았다고 한다. 즉 고구려군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이미 밀고 내려왔을땐, 이미 절기가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고 왜군이 이미 철수 하였기 때문에 병신년 백제 정벌에서 그 면모가 일절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실성 이사금 시절, 왜인들이 대마도를 전진기지 삼아서 봄에 준비하고 있다가 여름에 신라를 약탈하려고 하자, 신라왕이 직접 대마도 원정을 계획 했다는 점이 이를 뒷바침한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릉비의 신묘년 원문이 정말 이러한 사실을 반영 했다고 하면, 왜구가 침몰한 시기는 391년의 여름일 개연성이 매우 크다. 광개토왕은 신묘년 5월에 즉위를 했고, 7월에 백제 원정에 나섰으며 10월까지 한강 하류 일대를 수군으로 공격하여 인천-강화도 등지를 점령 했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의 논리를 적용해 본다면 왜구는 그 해 여름에 약탈을 했고, 이에 고구려가 대응하기 위해 가을부터 백제 원정에 임했다는 가설을 세울수 있다. 물론 신묘년에 왜가 백제와 신라를 쳤다는 것은 단순 뻥카였을 수도 있다. 신묘년은 광개토왕의 즉위 원년으로, 즉위 원년부터 당면한 고구려의 외교적/군사적 어려움을 부각 시키고, 이것을 해결해 나간 영웅을 위한 헌사라는 해석도 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설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자세한 내용은 임나일본부설 문서참고하십시오.

그러나 그의 논리에도 맹점이 많은데 왜와 4세기 후반부터 돈독한 우위를 쌓으며 국교를 다진 백제를 왜가 침략할 하등의 이유도 없으며, 이는 고구려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대에 고구려가 백제와 왜가 긴밀히 결탁하는 모습을 '화통'이라는 단어 등으로 기록 했기 때문이다. 릉비의 원문에는 396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이미 굴복 시키고 대왕이 아신왕에게, 다신 왜구와 화통하지 말라는 약조를 받아냄을 봐서는, 이미 고구려도 원정을 감행하기 이전부터 백제와 왜의 관계가 협력하는 관계이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아님을 인식하고 있었다. 방금전까지 도해파를 내세워서 백제를 굴복 시켰다면서, 이건 또 뭔 모순이야?.. 즉, 이것이 병신년에 고구려가 백제 원정을 하게 되는 명분이거나, 혹은 전쟁 명분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반도 남부를 약탈의 목적으로 침략 했다면 백제가 아닌 대마도와 가까운 신라를 공격 했을 것이며, 선술 했듯이 릉비의 병신년에 왜의 면모가 일절 보이지 않는데도 신묘년 전치문에 굳이 왜를 강조할 필요가 있었냐는데에 있다. 고대에서 전쟁의 명분과 구실은 매우 중요한데, 이런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명분을 릉비에 엉성하게 새겼을리가 있겠느냐에 의문을 제기 할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왜가 신묘년에 백제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했다. 근데 정작 원정에 나선 것은 6년 후인 396년이다. 이 때 까지 고구려가 왜의 세력이 백제를 통치하고 있었다고 착각 할수 있었을까? 혹은 그것을 고구려가 정세에 아둔한 자국의 백성들에게 "우리 고구려는 의로운 나라다. 우리 이웃인 백제를 괴롭히는 왜구를 내몰고 다시 고구려 중심의 질서를 백제에 확립 했다"라며 합리적인 전쟁의 명분이라고 내세웠을까? 만약에 다른 사서에 391~396년까지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교류 하지 않았거나 전쟁을 치루지 않았다면 납득할수 있지만, 릉비에 써져있는 신묘년, 즉 광개토왕의 원년에 고구려는 백제와 한강 하류 일대에서 전투까지 한다.

그래서 결론은 왕건군의 해석도 임나일본부설은 완전히 반박하는 주장이지만, 그의 해석에 대해서 한국 여론이 너무 과민하게 반응 하였고, 이로 인해서 문제가 더 부각된 면도 없지 않아 보인다. 특히 릉비의 문장이 개찬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 학자이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이나 재야학계에서 반발심을 샀다. 물론 100퍼센트 그의 학설이 맞다는 것은 아니다. 선술 되었듯이 신묘년조가 왜를 주체로 해석하고 병신년 백제 정벌의 전치문이라고 본다면, 왜의 면모가 도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긴하지만, 왕건군의 전치문 해석은 신묘년 주체에 대한 문제와는 별개로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대전치문에 비해 많은 한국 학자들에 의해 인용 되었고, 지지를 얻고 있다.

또 역사적 사실여부로 접근 할때는 호태왕비를 세울 당시에는 신라는 고구려에 복속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영락 1년인 신묘년의 시점에서는 신라가 고구려에 복속한 일이 없었다. 이는 단순히 《삼국사기》 등을 통한 해석이 아니고, 『광개토왕릉비』 자체의 영략 10년 경자년조에서도 "지금껏 신라 매금은 스스로 와서[88]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하지 않았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은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라고 서술했다. 조공의 기록은 없지만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 기록상 1년 차이[89][90]이 있는 것을 염두하고 사료를 찾아보면, 신라본기의 기사 [91]로 신라가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92]을 볼모로 보내는 기사가 나온다. 이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의 즉위 이전의 일이다.[93]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를 두고 속민이라고 칭했을 수도 있다. 또 삼국사기에 따르면 245년 고구려가 신라를 침공하여 신라측에서는 석우로를 내세워 방어했으나 패배한 기록도 나온다. 고로 고구려가 신라를 신묘년 이전부터 강하게 몰아세운 건 맞는다. 또한 백제의 근초고왕이 신라에게 말 두 필을 선물하며 우호를 싹트던 신라 백제의 관계도 근초고왕의 사망 전후부터 고국양왕 시절 신라가 인질을 보내기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삼국간의 역학관계에 대변혁이 있었다.

근초고왕 사망직후와 광개토대왕 즉위 직전까지 신라는 백제와 결탁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이제는 고구려와 결속하는 모습이 나타는데, 그 근거는 377년과 382년의 신라사신의 전진 황실 입조가 있다. 이는 고구려 사신과 같이 동행한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덧붙여 흥미로운점은 신라와 백제가 우호를 쌓고(366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말 두 필을 신라에게 선물을 보내며(368년) 친선을 도모하기 전후에는 삼국사기에는 왜국이 침입했다는 기록이 없다. 다시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때는 고구려와 결속이 강해진[94] 광개토대왕 즉위 직후이다.

 

하마다 고사쿠는 이를 두고 백제가 배후에서 왜국을 포섭하여 고구려와 결탁한 신라를 괴롭히라고 사주하지 않았는가 추정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혹자들은 '신민'은 '속민'보다 오히려 예속의 정도가 약하기 때문에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말도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혹은 이런 점 때문에 아예 신묘년조의 서술 전체가 역사적 사실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1974년에 일본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가 제기한 주장). 그러나 광개토대왕비석의 원문을 보면 속민이라는 단어가 한번 더 등장하지만. [95] 용례를 따져보면 단순히 조공을 수취하는 꽤 느슨한 관계로 정의하는 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396년이나 399년의 기사를 보면 백제의 아신왕과 신라의 내물왕이 고구려의 노객을 자칭했다. 아신왕은 스스로 무릎 꿇고 알현하며 자신의 동생을 인질로 보냈고, 내물왕은 후에 직접 대왕을 알현했거나 왕자 복호를 시켜 알현하며 조공을 바쳤다.[96]단순히 조공을 바치는 신묘년에 등장하는 속민의 관계보다는 앞서 언급한 396년이나 399년 기사가 예속성이 더 강하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 즉, 하마다 고사쿠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셈이다.

이를 두고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 교수는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고구려가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만든 왜를 공격하지 않고 왜 396년 병신년조에 애꿎은 백제를 공격하냐고 논문에서 반문한 적이 있다. 고대 전쟁에서 아주 중요하게 구실하는 명분(백제와의 전쟁)이 없다는 것이다.[97][98]

일본서기에서 이런 일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를 두고 이런 학설이 있다. 일본서기는 각 지방 호족이나 혼재하던 국가들의 구승을 일본이 통일을 이룩한 뒤 집대성하고, 이것을 마치 통일된 왕조에서 있었던 일인 양 소급적용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왜군이 실제로는 통일왕조의 정규군이 아닌 이 소규모 국가들에서 파견한 용병 내지는 해적이었기 때문에 기록에서 누락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대에 문자가 없던 일본은 구전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니 중간에 누락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

간혹 일본인들 중에 중국인 학자 왕건군도 일본의 학설에 동조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왕건군은 광개토대왕릉비가 개찬되지 않았고 일본 학계의 판독을 지지할 뿐[99] 일본의 해석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왕건군도 상기한 점에 주목했는지, 당시 한반도 남부에서 전횡을 일삼은 것처럼 묘사되는 왜구의 존재를 북큐슈 일대에 본거지를 둔 해적 수준이라고 말했다. 즉 정규군도 아니고 지방 호족이나 국가의 군대나 해적 수준으로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거나 경영할만한 능력이 있는 주체로 본 사실이 없으므로 임나일본부설과 배치되는 이론이다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 교수는 제1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에서 가야와 백제 왜군의 무기 수준이나 착용 갑옷 수준에 대해 심도있게 서술했다

백제나 가야에 비하여 일본 열도에서는 4세기대에 소급할 수 있는 금촉제마구가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으며, 5세기가 되어서야 가야로부터 개별적으로 수용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일본 고분시대의 마구에 대한 연구로서 小野山節는 일찍이 편년 작업을 하여, "오로지 수입품에 의존한 시기"를 설정하고 발걸이 형태의 차이를 가지고 제1기를 구식과 신식으로 나누어 보았다. 이에 대하여 中村潤子는 5세기 전반의 제1차 도입기 (구식)에 전해진 한반도 낙동강 하류욕 마구는 결국 일본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끝났으며 5세기 후반의 2차 도입기 (신식)에 검릉형 또는 편원검미형 말띠드리개와 f자형 재갈멈추개로 표상되는 川脥 玉田 계통의 마구가 들어와 그것이 비로소 일본에서 계승 발전되었다고 하였다. 즉 일본에 4세기대의 기마문화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략)

또한 왜는 4세기대에 단검,단도, 두께가 얇은 양날창과 쇠화살촉 등의 무기를 주로 사용하고 5세기에 와서야 공격구(攻擊具)의 주류로서 장검을 채택할 정도였다. 두께가 얇은 양날창과 쇠화살촉은 어느 정도의 갑옷과 방패만 있으면 치명상을 입힐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그러므로 왜의 무장은 일부 射兵이 부가되어 있으나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短兵器가 주력이고, 실전적인 무기로서보다는 과시적인 威信財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인다.


출처: 제 1차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1분과, "4세기의 한일관계사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왜군문제를 중심으로 -", 김태식#, 40-41쪽

 

당시에 고구려의 무장체계는 쇠투겁창 중심의 重裝騎兵과 步兵이 조화를 이루는 단계에서 밀집대형 騎兵隊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것이었다. 가야의 무장체계는 살상력이 극대화된 단면 마름모꼴 쇠투겁창과 長頸式 쇠화살촉으로 개량되어 있었고,防護具도 이에 대응하여 철제 종장판 釘結 판갑옷으로 전환되었으며, 목심철판피 발걸이와 하트모양 말띠드리개도 보유하여 중장 기마전술의 구사가 가능한 수준의 것이었다.

반면에 왜의 무장체계는 단검, 단도, 두께가 얇은 양날창[鈹]과 쇠화살촉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양날창과 쇠화살촉은 어느 정도의 갑옷과 방패만 있으면 치명상을 입힐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서, 실전적인 무기로서보다는 과시적인 위세품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또한 4세기 후반에 일부 나타나는 일본열도의 수신판 혁철 판갑옷(竪矧板革綴短甲)과 방형판 혁철 판갑옷(方形板革綴短甲)은 한반도 남부의 종장판 정결 판갑옷(縱長板釘結板甲)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나, 가야의 판갑옷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여 전체 구조나 제작 기법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미숙한 것이었다.

그 결과 가야를 매개로 하여 동원된 왜군들은 위와 같은 무장 수준의 차이로 인하여한반도 내에서 독자적인 행위를 하기 보다는 가야군대의 하급단위로 편제되어 활용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가야의 의도에 따라 對新羅 戰線에 투입되기도 하고 백제와 가야의 교섭에 따라 고구려와의 전쟁에 투입되기도 하였으니, 실상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倭賊’ 또는 ‘倭寇’는, 가야군을 주력으로 삼고 있으면서 왜의 원군이 일부 가세된 가야-왜 연합군이었다.


출처: 제 2차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1분과, 고대왕권의 성장과 한일관계 -임나문제를 포함하여.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왜군의 성격", 김태식 #, 151~152쪽


그의 견해는 왜국의 부대는 단언코 주력부대가 아니고 소규모 부대로 가야군대에 편입되어 용병으로 참가했으나, 복색이 백제 신라 가야와 이질적이고 인종구성도 다른 왜군의 부대를 고구려가 크게 과장했다는 것이다.

4.3.2. 과장 또는 윤색이다[편집]

광개토왕릉비에 쓰인 연도는 삼국사기의 연도보다 1년 빠르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이 392년(임진)에 즉위했다고 서술했는데, 능비에는 영락 원년이 신묘년(391)이라고 설명한다. 이를 두고 삼국사기가 잘못 기록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고구려의 역법이 오늘날과는 달라서 광개토왕이 즉위한 392년을 임진년이 아니라 신묘년이라고 생각했다는 견해도 있다. [100] 1년 오차를 보정해 백제본기의 기록을 보면 진사왕 8년이 392년이므로 이때가 비석의 신묘년 즉, 실제 391년의 사건이다.

八年, 夏五月丁卯朔, 日有食之. 秋七月, 髙句麗王談德帥兵四萬, 來攻北鄙䧟石峴等十餘城. 王聞談徳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多沒焉.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十一月, 薨於狗原行宮.
8년 여름 5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고구려왕 담덕이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통하다는 말을 듣고 대항하기를 회피하였다.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을 빼앗겼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며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1월, 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죽었다.


삼국사기》 제25권 백제본기 제3 진사왕

그런데 그 어디에도 왜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392년에는 광개토왕의 백제 원정과 진사왕의 사망, 아신왕의 즉위밖에 기록되지 않았다.[101]

이에 대하여 1973년 일본 학자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가 새로운 설을 주장했다.#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구절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백제 침공을 위한 명분용으로 고구려가 과장한 바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소위 신묘년 기사의 바로 다음에 고구려가 백제[殘國]를 치는 내용이 이어지고, 그 뒤에도 영락 9년에 신라가 왜의 침략으로부터 구원을 요청해 이듬해 고구려가 왜를 무너뜨리는[潰] 내용, 영락 14년에 왜가 대방(帶方)의 경계를 침범해 물리치는 내용 등이 있다. 일본이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깨뜨렸다는 것은, 고구려가 백제나 왜를 물리치기 전의 상황에 대한 설명, 다시 말해 고구려에 유리한 기사를 싣기 위함이었다는 추측이다. 적대세력의 주체인 백제의 격을 의도적으로 깎을 요량으로 왜를 높인 셈이다. 다만 신묘년조를 그대로 해석하면 왜는 신묘년에 와서 신라는 물론 백제까지 속민으로 삼았다는 것인데, 바로 다음 기사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한다는 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기존의 학설들은 비문의 기록이 모두 액면 그대로의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서 논쟁을 벌였는데, 잘 생각해 보면 비문의 기록이 전부 사실이라는 보장이 없다. 광개토왕릉비는 선왕의 업적을 찬양할 목적으로 세운 석비이므로, 선왕이 한 일을 합리화하거나 찬양하기 위해 과장 또는 날조를 섞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102] 잘 생각해보자,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고 신민으로 삼은 주체가 정말로 왜국이라면, 왜 애꿎은 백제를 공격해 굴복 시키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고구려는 백제가 아니라 왜국을 타겟으로 삼아야 對백제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고 예전처럼 고구려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이것은 기존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면서도 한국 학자들이 주장했던 비문 변조설도 인정치 않는 새로운 시각이다. 종래의 여러 설이 내포하던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으므로 오늘날 이 주장이 크게 설득력을 얻었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 바로 앞 기사를 보면, 백제와 신라는 과거에 고구려에 조공해왔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기전 까지 오히려 백제에게 신나게 털렸으면 털렸지, 고구려가 우위에 입던 입장이 아니었다.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투중 전사한 사실을 상기해보자.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391년 신묘년까지 혹은 백번 양보해서 그 직전까지 고구려가 백제를 지배하고 조공을 받았다고 볼 만한 건덕지가 하나도 없다. 당장 광개토대왕의 부왕인 고국양왕대의 기록을 보면, 백제에게 신나게 털리는(...) 모습이 나온다. 즉 백제를 침공한 이유는 명분 쌓기용 거짓말과 과장이라는 게 중론이다.

신라 또한 고구려에게 조공을 해왔다는 근거는 없지만,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기 직전의 391년에 신라는 인질을 고구려에게 파견했는데 이를 두고 속국이라고 칭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고구려와 신라의 밀착은 377년과 382년에 정황상 드러나는데, 북조의 전진에 고구려의 사신과 함께 신라의 사신이 입조한 것. 그리고 조공 기록이 없다고 문제가 될 만한 소지도 없다. 삼국사기 특성상 조공을 공(貢}[103]이라고만 표현했는데, 368년 신라본기를 보면 당시 최강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의 근초고왕 시절 백제가 오히려 신라에게 貢을 한다고 썼다.[104] 즉 당대에는 貢이라고 해봤자 친선용으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 조공기록이 없다고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의 기록을 온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실제로 신라왕이 스스로 노객이라고 칭하며 고구려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누가봐도 복속관계임을 알 수 있는 영락 10년에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신라가 조공하였다고 말하는데, 정작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친 기록이 전무하다. 따라서 기사가 누락되었다고 해도 이상하다고 느낄 필요가 하등의 이유가 없긴 하다. 또 2019년 중원 고구려비의 레이더 판독 결과 397년에 건립되었다고 추정한다. 당초에 장수왕 때 세워졌다고 파악한 학계의 주류 학설을 전면으로 뒤집는 것이다. 즉, 신라는 능비에서 기록하는 399년 신라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노객을 청하는 이 시점 훨씬 이전부터 고구려의 속국이었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105] 그러나 이는 아직 연구 중인 단계로 397년 건립설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게다가 광개토대왕비에는 경술 20년, 동부여가 고구려의 추모왕의 속민이었고 동부여를 침공했다고 기록했는데, 이 또한 과장이나 거짓을 보태었다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상식적으로 갓 건국하여 나라의 기틀과 토대를 닦는 데 바쁠 고구려가 이미 나라의 기틀을 잡고 운영해가던 동부여를 침공할 힘은 없다. 사료의 양이 부족하므로 추측 할수 밖에 없지만, 학계의 중론은 동부여는 3세기 즈음에 모용족의 침입에 의해 함경도 일대의 북옥저 지역으로 도망간 부여의 일족들이 세운 나라라는게 지지를 얻고 있다. 즉, 후대에 동부여라는 이름을 조작하였다는 것으로 노태돈 교수의 주장이다. 고로 당대에 있지도 않았던 나라의 이름을 가져와 기록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현대의 관념을 통해 당대 혹은 그 시기와 근접한 5세기 광개토왕릉비의 금석문의 내용을 깡그리 무시하는 행태로 비판 받는다. 동부여가 추모왕 시절부터 속국이었다는 기사는 과장이나 거짓말 일수도 있지만, 부족한 사료와 기록을 토대로 동부여는 당대에 존재하지 않는 국가이고, 이것을 후대에 소급적용해서 마치 있었던 나라라고 꾸며낸 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릉비에 나오는 동부여와 현대 고대사 학계에서 수용되는 3세기 즈음에 모용족의 침입으로 부여에서 도망 온 자들이 함경도 일대에 건국한 동부여와는 별개의 국가로 취급하는 학설도 있다. 왜냐하면 삼국유사에서는 추모왕의 부왕인 해부루는 해모수의 아들이며 그가 후에 부여에서,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가 동부여로 도읍을 옮긴 뒤 승하하자, 그의 아들 금와왕이 왕위를 이었고, 추모왕은 금와왕 치세기에 도망 가서 고구려를 건국하는 기사가 등장하고 있다. 후술 하겠지만, 후에 금와왕의 왕위를 잇는 부여의 대소왕때의 부여는 유리왕 시절의 고구려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또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명왕의 친모인 유화부인은 동부여에서 죽었으며, 금와왕이 예로써 장례를 치뤄줬다고 기록 되어 있다. 주류 학계의 동부여 해석과 정반대라서 매우 혼란스럽다. 광개토왕릉 금석문과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추모왕-유리왕-대무신왕 치세기에서의 양국의 국력차이에도.. 그러나 그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대무신왕 재위 시절까지 동부여와 고구려는 대립하고 있어 추모왕 시절부터 복속 해왔다는 릉비의 기사와도 배치된다. 자세한 내용은 해부루 문서를 참조하기 바란다.

본론으로 돌아와, 동부여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추모왕 시절의 고구려는 다른 신생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작은 고을에서 시작 되었다. 그런 당대에 건국된 나라가 추모왕이 권력 다툼에서 밀려 도망와서, 곧바로 자신의 출신지를 속민으로 삼았다고 이해하기 어렵다. 또 몇 십년 후에는 부여의 대소왕이 고구려의 유리왕에게 자신들에게 복속하라며 협박을 하자, 유리왕은 복속 하겠다고 회답을 한적도 있다. 동부여 = 부여로 상정한다면 3세기에 기록된 삼국지 동이전에 기록된 부여의 인구는 15만호 [106] 이며, 고구려의 인구는 3만호[107]로 건국 후 20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국력 차이가 어마하게 났다. 단 한가지 확실한 점은 삼국유사에 의히면 대무신왕 치세기에 이르러, 고구려가 부여와의 전쟁에서 대소왕을 죽이는 등 고구려와 부여의 국력은 대등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소왕이 전사하자 부여는 망하게 되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108] 그러나 삼국사기에 이르면, 부여는 고구려의 대무신왕에게 멸망하지 않았으므로 삼국유사와 충돌하며, 부여와 고구려 양국 다 출혈이 상당한 전쟁을 치뤘고, 동부여는 전쟁 이후에 대소왕이 전사하고 변혁기를 거치게 된다.

다만, 그 시대의 고구려 사람들의 인식을 알 수 있는 것은 동으로는 동부여[109], 북으로는 숙신, 서쪽으로는 패려, 남쪽으로는 백제가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끼워맞추기 칭하며 그들을 교화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이는 고구려 중심의 세계관을 표현해준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고구려의 자의적 해석에 기반한 윤색(동부여를 추모왕 이래로 고구려의 속국이었다)으로 이해할수 있다. 원문에서 도출되는 이들 다섯 나라들의 공통점은 원래 고구려의 속국이었는데, 고구려의 질서에 이탈해서 정벌의 대상이 되거나, 원래는 속국이 아니었으나 속국이 되었다는데 있다. [110]

4.4. 20세기 일본의 접근

제국주의 일본은 이 비문을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써먹었다. 첫째는 신묘년 기사를 자기들 입맛대로 해석해서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는 근거로 써먹은 것이다. 그러나 위의 서술과 같이 그들이 주장하는 해석만을 놓고 봐도 어떻게 그런 주장이 가능한지 의문이 들게 할 정도로 허술하다. 설사 아무런 과장을 섞지 않았다 해도, 왜군은 신묘년(391)에 쳐들어와서 경자년(400)에 박살났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오히려 반박하는 근거가 된다. 설 자체는 1960년대 이후 일본 학계에서조차 주류에서 밀려나서 폐기되다시피 한 논의지만, 어쨌든 한반도 남부에 군사를 진출시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해석은 일본 입장에서는 의미가 크다. 야마토 정권이 체제를 굳히고 (비록 백제 및 가야의 동원에 의한 것이기는 했지만) 외부로 군사력을 투사할 정도로 기반을 마련했다는 주장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즉 야마토 정권의 초기 발전 단계상을 추측해볼 수 있는 기사가 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왜가 패했으니 일본에 불리한 기사가 되는 셈이지만.

둘째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내용 중 고구려의 대립에서 왜가 패한 점을 부각하여, 과거에는 북방 세력에게 패배했으니 이번 러일전쟁에는 북방 세력을 이겨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당시 역사학자들은 이 4-5세기의 고구려 - 왜 관계에 19세기 말 러시아 - 일본의 긴장 상태를 투영하여 '옛날 왜가 고구려에 패해 한반도 경영이 좌절되었듯 지금 전 국민이 합심하여 러시아를 물리치지 못하면 제국의 대륙 진출도 어려워질 것이라는 경각심을 고취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노골적이고 공공연하게 목적의식을 드러냈다. 심지어 공식적으로 비석을 구입해서 일본 내로 반입하려는 기획까지 있었다.

이외에도 몇몇 제국주의 학자들은 일본제국이 만주와 한반도를 동시에 경영한 고구려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작 광개토대왕은 한반도 남부 주민들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했고, 일본을 불쾌하게 여기며 파괴했는데...

5. 여담

  • 야스히코 요시카즈 화백의 작품 하늘의 혈맥이 광개토왕릉비를 침략의 정당화에 이용하려는 일본 군부와 극우 세력들의 시도를 묘사했다.

  • 김진명이 소설 『몽유도원(구판 : 가즈오의 나라)』에서 광개토왕릉비 조작설을 소재로 다루었다.

  • 예술의 전당과 태광그룹이 2014년부터 18년까지 한국서예명적(韓國書藝名蹟) 법첩[111] 15권을 완간했는데, 이중 첫 번째 권이 광개토대왕릉비의 글씨이다. 왕릉비가 비단 역사적 유물로서만이 아니라 서예작품으로서도 주목할 만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고예와 전서체를 섞은 특유의 서체가 인상적이라 한다.

6. 같이보기

 

[1] 1915년에 발간된 조선고적도보 1에서 수정 후 인용[2] 중국에서의 국가중점문물단위의 공식적인 등재는 통구 고분군에 포함되어 '통구고분군'으로 등재됨.[3] 통구 고분군에 포함되어 등재되어 고분군으로 분류됨.[4] 아마도 장군총이나 태왕릉 또는 기타 고구려 능원으로 보인다.[5] 비슷하게 그 정체가 잘못 알려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의 정체를 고증하기도 했다.[6] 즉 자신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확증편향으로 글자 윤곽을 만들 가능성이 있는 쌍구가묵본에 비해 자신의 주관이나 선입견을 배제하기에 더욱 객관적인 방법이다.[7] 탁본이나 그와 비슷한 작업으로 복사된 글자를 보고 학자 각자가 의견을 내놓으며 해석하는 작업.[8] 제2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2009)에도 이러한 인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9] 북부여에서 출생하셨으며..라고 해석할 수 있다. 금와가 유화를 만난 곳이 금와가 왕인 동부여의 영역이라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있으나, 이후 기록에선 북부여로 나오므로 학계에선 북부여가 타당하다 보고있다. [10] 주몽이 북부여의 해모수 아들이므로 원문의 出自北夫餘를 '북부여를 계승했다.'는 뜻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럴 때는 동부여에서 왔다는 삼국사기 이야기는 맞게 된다.[11] 이 설화는 훗날 장수왕 대에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그대로 옮겨간 듯한데, 황룡기린으로 바뀌는 등 과정을 거쳤다. 부벽루 참조.[12] 또는 비려(碑麗).[13] 오늘날 요하의 지류인 내몽골의 시라무렌강.[14] 391년.[15] 396년.[16] 일본 학계에서는 3字 중 마지막 문자를 南으로 파악하고 있다. 남진 하였다라고 풀이한다. 하마다 고사쿠가 제2차 한일 공동역사연구회에서 투고한 논문에 내용이 수록 되어 있다[17] 백잔의 주인. 곧 백제의 왕을 지칭한 것인데, 비문은 백제를 철저히 하대하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이는 고구려가 백제에 의해 왕이 피살되는 치욕을 당했기 때문일 것이다.[18] 398년.[19] 399년.[20] 아마 삼국사기,일본서기 기준으로 397년, 광개토대왕릉비 기년 기준으로 396년에 태자 전지를 파견하여 군사 원조를 받은 것에 대해 서술하는 듯 보인다[21] 화통은 양자가 동등한 관계에서 이루는 관계이므로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이다[22] 간혹 왜가 '(신라왕 자신을) 노객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하는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한일공동역사연구위원회는 노객을 신라왕 자신이 광개토왕에게 자칭하는 명칭으로 결론 내렸다. 이것은 한국 사학자 김태식 교수와 일본 교수 하마다 고사쿠 또한 각자 투고한 논문에서도 같은 의견이었다[23] 간혹 (고구려 혹은 대왕의) 노객을 왜가 민(民)으로 삼으려고 합니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일본학계에서도 주장하지 않는 해석이다. 하마다 고사쿠는 제2차 한일 공동역사연구회에서 투고한 논문에서 '(대왕의 혹은 고구려의) 노객(奴客)이란 (그 신분이란, 대왕의) 민(民)이니 왕께 귀의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별거 아닌 차이 같지만 신묘년 기사에 나온 신민의 성격과 어느 쪽이 주체인지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한 단서이다.[24] 민(民)으로 삼으려고 하니 귀의한다는 문맥상 말이 되지만, 이미 왜가 노객(신라왕)을 민(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는 것은 모순된 말이다. 이미 왜의 민(民)이 되었다면 광개토왕한테 사신을 보낼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이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투고한 내용이다.[25] 400년.[26] 이 부분을 '안라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문맥상 (임나가)라인이 맞는 것 같다.[27] 이에 대해서는 한일 양국 학자들간에 또 의견 차를 보인다. 한국 학계에서는 僕 勾를 동사로 보고 알현 하다로 의역하여 신라 매금이 직접 조공을 하였다라고 보는데, 일본학계에서는 僕勾로 보고 후에 고구려로 볼모로 보내지는 복호를 음차한 것으로 추정한다. 신라의 고구려 종속 수준을 보고 의견차를 보이는 것이다[28] 404년[29] 수군(水軍)을 동원하였다는 뜻인 듯.[30] 407년[31] 410년[32] 정확히 말하면 광개토대왕이 몇 년에 죽었다는 내용은 능비에 없다. 사망했을 적의 나이가 적혔으므로 역산한 것이다.[33] 선왕이 폭정으로 쫒겨나고, 새로운 왕이 정권을 잡으면 정당성 부여 차원에서 유월칭원법을 사용했다[34] 남해 차차웅 기사에 있다.[35] 이 경우 고국양왕의 승하를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392년이 아니라 1년 당겨서 391년으로 본다.[36] 선왕이 살아 생전에 양위를 하면, 유교 예법을 따라서 유년칭원법으로 선위를 한 해당 년도까지를 선왕의 치세기로 본다.[37] 예를 들어 영락5년 병신년(396) / 영락8년 무술(398) 등등[38] 왕의 즉위 원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 해에 만들어졌을 공산이 매우 크다. 즉, 1차 사료로 아주 의미가 크고, 능비가 오기되었을 가능성이 현저히 낮ㅏ.[39] 말만 3년이지 실제로는 24개월이다. 동양에서는 고대에 0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만'으로 세지 않았다.[40] 고구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곧 무덤을 만들고, 집안에 빈소를 만들어 시신을 모시고 삼년상(혹은 24개월)을 지낸 뒤 좋은 날을 잡아 장사를 지내고 그 후에 시신을 무덤에 안치한다고 기록했다.[41] 중국 후한,위촉오 시대에 편찬된 위략(魏略)에서는 고구려인들이 사람이 죽으면 100일 동안(停喪百日) 장례를 치뤘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광개토왕의 치세기인 5세기보다 훨씬 이전 세대의 기록으로, 2-3세기경의 고구려 풍습으로 볼수 있다. 이후에 삼년상이 정착 된 것임을 추정 할수 있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고국천왕항목을 참조.[42] 무령왕과 그의 왕비도 승하한지 27개월 후에 장사를 치룬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43] 대개 海로 판독된다.[44] 이 □는 광개토왕비으로 탁본업을 했던 초균덕이 남긴 수초본과 조선유적유물도감 등에서 이미 東으로 판독했고, 최근에도 국어사학자인 권인한이 중연본에서 東의 7, 8획에 해당하는 사선의 흔적을 근거로 東으로 판독했다.[45] 여기서 잔은 殘(남을 잔) 자로, 먹고 남은 밥을 의미하는 '잔반(殘飯)'의 잔 자와 같다. 즉 '백제 찌끄러기'라는 멸칭이다.[46] '海'일 경우 '바다'.[47] 이 부분은 훼손되었는데, 여기에 '가야신'을 넣어서 '백제 가야 신라'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묵본에는 羅 바로 앞 글자의 오른쪽에 斤부가 확인된다.[48] 한편 앞의 두 칸을 '...와 함께'로 보고 마지막 칸이 '신'이라고 본다면 '신묘년에 왜가 (백제의 요청으로) 와서 바다를 건너 백제와 함께 신라를 깨뜨렸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백제-일본 연합군이 신라를 이긴 것을, 일본 단독으로 신라는 물론 백제까지 이긴 것으로 왜곡한 게 된다.[49] 도해파, 즉 바다를 건너 격파하다[50] 혹은 백제 본기 392년[51] 출처1, 출처2(289쪽 참조), 출처3(230쪽 참고), 출처4(115쪽 참조)[52] 제2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일본 학자가 주목한 학설이다. 아마 다케다 유키오가 東으로 판독한다는 사실을 알고 김진명이 자신의 소설에서 구라를 친듯 각색한 듯하다.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k.pdf[53] 석회가 발라지기 전 원석 탁본 여러 개를 연구하여 내린 결론이다.[54] 그의 부친이 소장한 원석탁본을 기초로 한 논문이다. 원석탁본, 즉 석회가 발라지기 이전의 탁본이다.[55] 보통 자신이 본 문자를 자의적으로 판독하여 해석하는 것을 석문이라고 하지만, 논문에 언급했둣아 초천부 초균덕 부자는 고문서에 일가견이 없는 소시민으로, 그들의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낮다고 판단하여, 필사본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56] https://www.i-repository.net/contents/outemon/ir/301/301811209.pdf[57] 예를 들어 화통이라는 표현은 양자가 상호 동등한 입장에서 맺는 협약이라고 할수 있다. 즉 399년의 화통이라는 표현은 백제의 왕이 대왕 앞에서 다시는 왜의 세력을 끌여들여 신라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맹서한 모양이지만, 이를 깼다고 해석할수 있다. 또 하술 하겠지만, 이런식으로 왜를 백제의 단순 지원 세력으로 보고, 391년 신묘년 기사를 396년 병신년 기사의 전치문으로 본다면, 왜의 면모가 백제 정벌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을 설명 할수 있다.[58] 고구려가 신라를 속민에서 신민으로 예속관계를 강화하여, 왜와 백제로부터 구해주고 보호해줬다는 뜻이다.[59] 광개토대왕릉비 10년 경자년 기사에 고구려가 신라를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신라에는 5세기 중반 나제 동맹 이전까지 고구려군이 주둔했다. 일본서기 464년 2월의 기사를 참조하자. 지금으로 따지면 한미 상호 보호조약에 따른, 주한미군의 주둔과 비교할 수 있다.[60]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61] 402년에 신라왕이 되는 실성마립간이다.[62] 조공을 바치고 받는 관계가 속민의 관계임은 용례로써 알수 있다. 廣開土王陵碑의 다른 기사에 의하면 東夫餘는 '鄒牟王의 屬民이었는데 중간에 조공하지 않으므로' 廣開土王 20년에 고구려에 의해 정벌되었다고 한다. 즉 속민이냐 아니냐의 기준은 조공을 바치냐 안바치냐의 상대적으로 느슨한 개념이었을 수도 있다.[63] 광개토대왕릉비 영락 10년에 신라가 조공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전해지지 않는다.廣開土境好太王 □□□□ 寐錦□□僕 勾□□□□朝貢.[64] 명백히 말하자면 고구려에게는 문장의 주어가 아니지만, 고구려측 기록이므로 누구의 속민인지는 서술할 필요가 없다[65] 같은 용례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광개토대왕비릉 말고도,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서도 등장한다.[66] 392년은 선술한 기년 문제에 입각해 보정한 연도이다.[67] 신민의 뜻[68] 이에 대해서는 김태식 교수가 후술하였는데 신라 내물왕이 광개토왕에게 사신을 보내 (신라왕 자신을 ) 고구려의 노객이라고 칭하며 "(고구려의)노객은 (그 신분이 대왕의)民(백성이니) 귀의하여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해석하였다. 일각이나 일본 측에서는 "(고구려의) 노객을 (내물왕) 왜가 (그들의) 民으로 삼았다." 혹은 "삼으려고 한다."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 경우에는 내물왕 스스로가 사신을 보내어 구원조차 요청하지 못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고 발언하였다. 같은 학회에서 4세기를 당담한 하마다 고사쿠 역시 개인이 투고한 논문에서 같은 근거를 들어, 김태식 교수와 의견을 같이 했다.[69] 그러나 하마다 고사쿠 또한 릉비는 아주 잘짜여진 각본이므로, 신묘년은 그저 프로파간다며, 왜의 세력이 과장 되었다고 하였다. 나머지 일본 학자들은 하마다 고사쿠의 대전치문설을 지지하면서도 왜의 세력 의 강함에 대한 기준이 제각기 다르다.[70] 396년, 399년, 400년, 404년, 407년 기사들은 모두 백제, 왜, 신라, 가야에 관한 기사이다.[71] 이해의 정복 기사는 정확히 무슨 세력을 정복했는지는 문자 파손이 너무 심해서 알 수 없지만 지명으로 보아 백제라고 추정한다. 즉, 일본학자들은 신묘년조가 407년까지 수식한다고 본다. 그중에서도 더욱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이들은 신묘년 기사를 활용하여 407년까지 왜구의 세력이 어떤 방식으로든 주도적으로 개입했다고 주장한다.[72] 일본학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신묘년 기사가 396년, 399년, 400년, 404년, 407년 기사들을 모두 수식한다면, 395년 비려(稗麗)을 정벌한 기사처럼 따로 앞으로 빼내서 서술해야 한다. 그런데 8년조 숙신 기사의 앞뒤는 396년 백제 정벌과 399년 신라의 내물왕이 노객을 자청하며 성지에 가득찬 왜군을 격퇴해 달라고 요청하는 기사다. 391년 기사와 396년 백제 정벌 기사만 그 맥락이 닿고, 후에 등장하는 399년, 400년, 404년은 맥락상 다른 결이라는 것이다.[73] 여기까지는 왕건군의 해석과 동일하다. 왕건군도 신묘년 기사는 오직 396년 백제 원정만 수식하는 전치문으로 봤다. [74] 2019년 연구에 따르면 중원 고구려비는 당초 알려진 것과 다르게 광개토대왕 치세기인 영락 7년 정유(정유년)라는 문자가 쓰였음을, 3D 스케닝으로 동북아역사재단이 밝혀냈다. 고로, 학계의 기존 정설이던 광개토왕의 치세기 이후에 신라가 속민화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신민화되었다는 주장과 전면 대치된다. 신라의 신민화나 종속화가 된 시점은 영락 7년보다 더 전일 수도 있다. 다만 아직 연구 중인 사안이니 더 기다려봐야 한다.[75] 왕건군의 해석은 기본적으로 왜라는 세력은 한반도를 여름에만 나타나서 사람과 식량을 약탈해 돌아가는 해적의 속성을 띈 세력으로 통치을 할수 있는 세력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이미 왜의 세력을 응징하려고 백제에 당도 했을때는 이미 왜의 세력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난 후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대의 사료들을 보면 여름에 계절풍을 이용해 한반도 남부에 상륙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가지 가설은 여름에 상륙하여 노략질하다가, 겨울에 훈풍이 불때 전초기지인 대마도로 도망 갔다고 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임나일본부설 당대 항해력 항목을 참고하자. 이러한 관념에서 삼국사기의 기록과 대조 했을때, 광개토왕은 391년 5월에 즉위 했고, 7월에 백제 원정을 나섰고 10월까지 전선을 밀고 내려와 지금의 인천-강화도 일대까지 백제의 영토를 빼앗은 것으로 되어있다. 만약 진짜 391년에 왜의 세력이 출몰 했다면, 그 해 여름일 개연성이 매우 크고, 이에 고구려가 대응하러 출전한 것이다. 고로 왕건군은 임나일본부설을 완전히 부정하는 학설을 지지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왕건군의 논리는 왜의 면모가 전혀 도출되지도 않았는데, 신묘년 바다를 건너 온 왜의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프로파간다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너무 억어지스러운 면이 있다.[76] 직접적으로 신민이라고 씌여져 있지는 않다[77] 최근에는 장고분이 한반도에서 먼저 만들어졌다는 견해가 나와 잘 쓰이지 않는다.[78] 전근대 시대에 이런 경향은 매우 흔했다. 유럽사에도 이런 식으로 인질외교관으로 간 사람들은 매우 흔했다. 로마 제국 시기에 로마에 칭신하던 여러 게르만 부족들이 귀족의 자제들을 인질 겸 유학생으로 파견하여 로마식 교육을 받게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자란 게르만 귀족들은 자라서 대(對) 로마 외교의 선봉장이 되어 부족에 크게 기여했다. 동고트 왕국의 성군 테오도리크 대왕도 이런 경우이다. 따라서 전근대 시대에 보내어지는 인질들은 전쟁 포로와 같은 진짜배기 인질들과는 달리, 그 나라 정부나 왕실로부터 우대를 받았고, 가끔씩 볼모의 모국과의 외교를 위한 창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런 제도가 오늘날에는 타국에 외교공관을 설치하고 외교관을 상주시키는 제도로 발전한 것이다.[79] 일본서기에 백제의 왕세자나 왕자 중에 인질이라고 서술된 사람은 부여풍뿐이다. 마찬가지로 삼국사기에서 부여풍은 인질로 나온다.[80] 임나일본부설의 현 주소는 백제의 요서경략설과 비슷한 면이 있다. 요서경략설은 사실 뒷받침하는 사서도 의외로 꽤 있고 학계에서도 꽤 진지하게 연구한다. 하지만 사료의 비교검증 등으로 점점 힘을 잃었고, 한국 학계의 정설은 '잘해봐야 백제인 집단 거주지 정도'로 굳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이 백제가 요서를 차지했음을 사실이라고 믿고, 심지어 국정 국사 교과서에서도 '백제요서에 진출했다.'는 애매한 표현으로 소개되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식인 것이다.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 경영설도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뒷받침하는 사서는 있는데 교차검증상 근거가 희박하고 일본 학계에서도 인정 안 하는 분위기인데, 학계가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고 대중들 중에서도 믿는 사람이 아직 많은 것이다.[81] 원래는 '사지절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자칭'하였는데 모두 거부 당하고 안동장군을 하사 받는다. 후에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가야 육국제군사를 하사받았다. 또 그 후에 왜왕 興이 이번에 또 '백제'를 끼어넣어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가야 칠국제군사'를 자칭하자 이번에도 황실에선 백제를 누락하고 육국제군사로 임명했다.[82] 처음에는 안동대장군이 아닌 안동장군이었다. 안동장군과 안동대장군은 1~2단계 차이가 난다[83] 고구려는 이보다 두 단계 더 높은 '정동대장군'이라는 직위를 받기도 했다.[84] 鎭東將軍 中軍將軍 鎭軍將軍 撫軍將軍 安東將軍 순서다.[85] 비슷한 예가 중국의 책봉 사례에서 수도 없이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진덕여왕은 '신라낙랑군왕'으로 책봉되었는데, 낙랑은 정작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에 있었다. 백제위덕왕 또한 '동청주지사'라는 책봉명을 받았는데, 동청주는 중국 산둥지방이다. 이처럼 남의 영토 이름을 책봉명으로 하사받는 일은 당시에 매우 흔했다.[86] 신라는 후술하겠지만 오래 전부터 속민이었을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 누락된 기사가 한두 개가 아니니깐 조공기록이 누락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당장 능비에 나오는 400년의 매금(신라왕)이 직접 알현하여 조공하였다는 기사도 삼국사기에는 없다.[87] 임나일본부설 문서에 첨부된 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 5세기 노중국 교수의 논문 내용이다.[88] 다만 스스로 와서 즉, 입조해서 조공하지 않았다는 거지, 조공을 아예 안 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억측이다. [89] 현재로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가 아니라 삼국사기 쪽이 오류라는 게 중론이다. 단순히 고구려본기에서만의 오류가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교전을 서술한 백제본기와 눌지왕의 기록을 토대로 역산해보면 신라본기에서도 오류가 있다.[90] 백제의 소실된 역사책인 백제삼서를 인용한 일본서기에도 백제삼서를 인용한 아신왕 진사왕 기록에서 1년 오차가 있다. 즉 삼국사기와 백제삼서는 기년이 같다.[91] 392년 1월 기사[92] 401년에 귀국하여 이듬해 402년에 왕위를 이어받은 실성마립간이다. 정치적 입지도 변변치 않았고 직계도 아니었던 그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고구려가 친고구려파의 수장 격인 실성마립간을 후원했으리라는 의견이 대세다.[93] 삼국사기에 따르면 같은 해 5월에 즉위했다.[94] 고국양왕 치세기로 볼수도 있다. 고국양왕의 죽기 직전에 신라는 고구려에 인질을 보냈기 때문이다.[95] 410년 기사 : 영락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96] 이에 대해서는 한국 학계에서는 내물왕이 직접 알현하며 조공을 바쳤다고 해석하지만, 일본학계에서는 후에 고구려로 인질로 파견되는 복호를 시켜 알현하며 조공했다고 주장한다.[97] 중국 집안에서 발견된 청동거울과 신묘년이라고 적힌 기록을 두고, 토론회에 참석한 조법종 교수도 왜국 주체설에 회의감을 드러내었다. 언론보도 고로 한국 주류사학계에서도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 왜국 주체설에 의구심이 있음은 확실하다. 다만 확실히 논박할 만한 근거가 아직 빈약하기에 아직 조사나 연구가 진행되거나 확실한 근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다.[98] 개찬설을 주장했다가 이미 일부 보기 좋게 논파당했으니 신중하게 접근하려는 한국학계의 태도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한국 학계가 광개토대왕릉비에 관심을 둔 지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이전에는 전쟁의 풍파와 급속한 변혁기 등을 거치면서 전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를 조사한 지 100년이 넘었으니, 지금까지는 수세에 몰렸던 게 당연하다. 한국학계가 광개토왕릉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지는 길어봤자 3-40년 정도이다.[99] 물론 근래에 들어와서는 한국의 사학자들도 능비의 글은 개찬되지 않았다고 여기고 일본의 판독과 같이하지만, 해석이 다른 것뿐이다. 한자는 표의문자이기 때문에 함축된 의미가 많으므로 당연히 판독이 같아도 해석은 가지각색이다.[100] 다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뿐만 아니라 백제 본기 신라 본기에서도 이런 오차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기년이 잘못 되었다는게 중론이다.[101] 물론 일본서기에서는 '일본서기'답게 백제를 능욕하듯이 쓰여있는데 왜의 응신천황이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아화왕)을 왕위에 앉히고 직지왕의 누이 등 백제 여자들을 조공한 것으로 쓰여 있으나 이는 사실을 과장·윤색한 것이다.[102] 사실 이는 교차검증이 불가능한 모든 사료들의 함정이기도 하다.[103] 보통 삼국사기에서는 貢과 조공을 혼용하는 편이다 [104] 十三年, 春, 百濟遣使, 進良馬二匹. 백제왕이 좋은 말을 바치다(貢하다).[105] 고구려의 신라 종속화는 따라서 신묘년이나 그 이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106] 대략 가구당 5명의 인구로 상정하면 45~50만명[107] 15만명 정도[108] 삼국사기에서 부여를 정벌하는 기사에는 상당히 괴기스러운 설화가 많이 차용 되었다.[109] 혹은 신라라는 견해도 있다. 중원 고구려비에서 도출된 당대의 고구려인들의 인식에서 신라는 그들의 東夷(동이) 즉 동쪽의 오랑케였다.[110] 다만 패려는 이전에 조공을 바쳐왔다 혹은 이전부터 고구려에 복속해왔다라는 식의 서술은 없다.[111] 法帖. 서예가들이 옛날의 잘 쓴 글씨들을 감상하고 따라 쓰기 위해 글씨들을 수집한 모음집. 원래는 일일이 탁본하여 모으거나, 탁본한 글을 다시 목판으로 찍어 만들었지만, 지금은 당연히 평범하게 인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