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토욕혼과 토번은 현재 티베트가 아닌 서유럽 대서양변에 있었다.

Chung Park 2021. 5. 10. 14:38

필자는 그동안 진(秦), 한(漢), 북위 등의 중국(衆國)이 론강인 요수 서쪽에 있는 나라로 추정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선비족이 세운 수나라, 당나라도 여기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당나라 시절에 토번을 정벌했다 하였다. 토번은 지금의 티베트라 중공 사가들은 주장한다.  그러면서 현 중공의 위치가 제 중국(衆國)의 역사의 중심지라 주장한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필자의 주장과 토욕혼,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토번이 과연 서구유럽의 어디에 있었는지 아니면 중공 사가들이 주장하는 지금의 티베트가 맞는지 검토해 보고자 한다. 

 

우선 토욕혼과 토번의 두산백과 자료를 검토해 보자.

 

"토욕혼[]은 4세기 중엽 이후 7세기까지 ...선비족()이 세운 나라이다. 

주목되는 것은 이 나라가 동서간의 국제무역 중계를 생명으로 하는 상업도시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낸 점인데, ........, 북방의 유목민 국가인 유연()이나 남방 티베트가 세운 여국()과의 교섭도 활발하였으며, ..... 중국의 북조()와 남조()와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635년 당()나라에 항복하여 예속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663년 ...토번()에게 멸망당하였다." 

(자료 : 토욕혼, 두산백과)

 

즉 토욕혼은 4세기중엽부터 7세기까지 존재한 선비족의 나라이며, 국제무역을 중시한 상업도시의 성격을 가진 나라이며, 북방의 유연과, 남방의 여국(女國)과도 교섭이 활발하였으며, 북조와 남조와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663년 토번에게 멸망당하였다. 

 

그럼 토욕혼을 흡수한 토번은 어떤 나라인가? 아래 자료에서 보면, 토번은 7세기초에서 9세기 중엽까지 활동한 나라로서, 토욕혼의 귀속을 놓고 당나라와 싸워 큰 전쟁을 했으며, 8세기 후반이후에는 당나라로부터 서역의 지배력을 빼앗았다. 846년 망했다. 

 

"토번[]은 7세기 초에서 9세기 중엽까지 활동한 티베트왕국 및 티베트인()에 대한 당() ·송()나라 때의 호칭이다. 

 

티베트인들은 스스로를 보에(Bod)라고 불렀으나 중국 사람들은 이들을 토번이라 칭했으며 .....6세기 후반에는 ... 왕조의 기초를 만들고, 손챈감포왕() 말기부터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강대한 나라를 이룩하였다. 동왕이 죽은 후 토욕혼[]의 귀속을 둘러싸고 당나라와 싸워 점차 전쟁의 규모를 확대시켰다.  군사국가조직과 기마부대에 의한 기동력을 활용하여 8세기 후반 이후에는 당나라로부터 서역(西)의 지배권을 빼앗기도 하였으나 ..... 846년 붕괴하였고 토번시대는 막을 내렸다. "

(자료 : 토번, 두산백과)

 

 

즉 토욕혼은 선비족의 나라로서, 유연, 여국, 북위, 남조 등과 교류하였으며, 토번은 토욕혼을 놓고 당나라 크게 전쟁하였으며, 8세기 후반에는 당나라로부터 서역의 지배권을 빼앗았다. 

 

나무위키 자료에서는 토욕혼에 대해 보다 상세한 자료를 제공한다. 즉 선비족인 모용씨의 일파가 세운 나라로서 서역에 위치했던 국가이다. 하남국, 백란국이란 명칭이 있었다. 371년에는 화북을 평정한 전진의 부견에게 조공하였다. 431년에는 북위와 함께 북하를 멸망시켰다. 7세기초에는 동돌궐과 함께 수나라에 종속되었고, 당나라때에 672년 이웃한 토번에 멸망당했다. 마지막 왕인 모용낙갈발은 당나라에 망명했다. (아래 자료 참조 : 토욕혼, 나무위키)

 

 

"토욕혼은 서진(西晉) 시대인 285년부터 7세기 후반까지 서역 지방에 위치했던 국가로서, 국호의 어원은 시조인 모용토욕혼이다. 모용토욕혼은 요서 지방에 위치한 모용선비의 지도자인 모용섭귀의 장남이다. 훗날 모용선비의 군주가 되어 모용부를 대대적으로 일으키는 모용외와 사이가 좋지 않아 멀리 서역으로 이주하여 부사를 수도로 삼아 토욕혼을 일으켰다.


중국에서는 "하남국(河南國)"이라 부르며, 티베트에서는 "아시(阿柴)"라고 불렀다. 나중에 국호를 "백란(白蘭)"으로 바꾸었지만,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통용되는 명칭은 토욕혼이다.

 

오호십육국시대를 거치던 중국 화북 지역과 전쟁과 교류가 잦았다. 371년에는 화북을 평정한 전진의 황제 부견에게 조공을 하기도 하였다. 10대 왕인 모용모괴(慕容慕璝)의 대(426~436)에 이르러서는 전란에 휘말린 진주와 양주의 유랑민들을 받아들이면서 세력이 좀 더 커졌다. 이때에 이르러 남쪽으로는 중국 남조와 교류하였고, 북쪽으로는 북위와 손을 잡고 북하를 공격하였으며 431년에 이르러 북하의 마지막 황제를 사로잡아 북위로 압송함으로써 멸망시켰다.

7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세력이 약해져서 동돌궐과 함께 수나라에 종속되었다7세기 중엽 이후로는 분열된 토번을 통일한 손첸 감포가 등장하였고, 강성해진 토번은 토욕혼을 크게 위협하였다. 토욕혼의 마지막 왕이었던 모용낙갈발(慕容諾曷鉢)은 토번의 침공에 대항하려 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고, 토욕혼은 672년에 사실상 멸망하였다. 이후 모용낙갈발은 당나라에 망명하여 그곳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사망하였다." 

 

(자료 : 토욕혼, 나무위키)

 

 

다시 말하면 토욕혼은 서역의 모용씨 선비족의 하나로서, 화북의 전진, 북위에 가까운 나라로서, 이후 수나라, 당나라와 인접한 국가라는 것이다. 토욕혼과 토번의 위치는 전진, 북위, 수, 당에 있던 지역 근처라는 것이다. 특히 토욕혼은 북위와 함께 북하를 멸망시켰다는 기록이 눈길을 끈다. 

 

그런데 토욕혼과 토번에 관한 아래 위키자료에서는 매우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다. 즉 북위의 계속된 토욕혼 공격에 마침내 473년 토욕혼 왕인 모용섭은 북위에 항복하고, 모용섭인의 뒤를 이은 모용부연수는 492년 7월, 북위 효문제에 의해 "사지절 · 도독 · 서수제군사 · 정서장군 · 영호서융중랑장 · 서해군개국공 · 토욕혼왕"에 책봉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북위 효문제가 책봉한 직위가 그 위치를 말해 주고 있다. 즉 서수제군사, 정서장군, 영호서융중랑장, 서해군개국공 등에서 보듯이 서쪽을 많이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서수제군사, 서해군 개국공 등에서 보듯이 서해에 인접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언급이다. 지금의 티베트가 서쪽에 바다가 있는가? 절대 불가한 언급이다. 따라서 지금의 티베트는 토욕혼, 토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토욕혼의 시조인 모용토욕혼은 본래 모용선비의 수장인 모용섭귀의 서자로, 아버지로부터 부락민 1700가(家)를 물려받았다. 이후 아버지 모용섭귀가 죽고 285년에 적자인 모용외가 그 지위를 계승하였는데, 모용토욕혼은 말을 방목하는 문제로 모용외와 충돌을 빚자 본래 근거지인 요동을 떠나 서쪽의 음산(陰山) 일대로 이주하였다.[1] 이후 영가의 난(307~312) 시기에 다시 서쪽의 감송(甘松) 일대로 이동하였으며, 그 영역이 백란(白蘭) 일대에까지 달하게 되었다. 모용토욕혼은 317년, 72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토욕혼이라는 국호가 바로 그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건국 초기의 토욕혼은 유목생활을 하면서 주변의 강족 · 흉노 등의 세력과 융합하였다.[2]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력충돌도 적지 않아서 329년, 수장인 모용토연이 휘하에 거느렸던 강족인 강총(姜聰)의 배신으로 칼을 맞아 죽기도 하였다.[3]

 

오호십육국시대

 

한편 토욕혼은 오호십육국시대에 이르러서는 화북의 이민족 국가들과 교류를 하였는데, 371년에는 전진의 부견에게 말 1천 필과 금은 5백 근을 바치고 안원장군의 관작을 받았다. 또한 서진의 걸복건귀에게 조공을 하고는 백란왕의 작위를 받았다이후 토욕혼은 걸복건귀가 하사한 작위를 거부하고 충돌을 일으켰다가 걸복건귀의 침공을 받았고모용오흘제 때에 이르러서는 장안을 점령한 걸복건귀의 국경을 약탈하였다가 다시 침공을 받고 크게 패하여 1만여 명에 달하는 인구를 잃었다이후에도 걸복건귀와 그 아들 걸복치반에게 수차례 충돌했으나 패하였는데, 모용수락간은 이로 인해 분을 참지 못하고 병에 걸려 죽었다.

 

남북조시대

 

토욕혼은 모용아시 때(417~424)에 이르러 주변의 저족과 강족의 부락들을 합병함으로써 그 영토가 사방으로 수천 리에 달하여 강국으로 불리게 되었다.[4] 또한 모용모괴 때(424~436)에 이르러 진주 · 양주의 유랑민 및 강족을 비롯한 여러 이민족들을 흡수하여 남쪽으로는 촉한과 통하였고, 북쪽으로는 양주 · 대하와 통하는 등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토욕혼은 중국 남조의 유송에 사자를 수차례 파견하여 교류하였다. 또한 북조의 북위와도 교류를 시작하여, 431년에는 북위와 연합하여 대하를 공격하여 그 마지막 황제인 혁련정을 사로잡고는 북위로 압송하였다.

 

이후 북조의 북위와 남조의 유송은 토욕혼을 서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외교전을 전개하였는데, 토욕혼은 대체로 유송과 더욱 사이가 가까웠다. 이후 439년, 북위는 북량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한 후에 토욕혼을 제압하기 위하여 444년 6월에는 토욕혼 내의 권력투쟁에 개입하였으며, 446년 8월에는 마침내 직접 토욕혼을 침략하여 서쪽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451년에 집권한 모용섭인은 북위와 유송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를 펼쳤고, 북위는 460년 4월에 다시 토욕혼을 공격하였다. 토욕혼은 북위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유목민족의 특성을 살려 먼 거리를 이동하여 이를 피하는 식으로 대응하였고, 북위는 끝내 토욕혼을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470년 이후로도 북위가 수차례 토욕혼을 공격하여 초토화작전을 펼쳤고, 유송의 도움을 받지 못한채 기근에 시달리던 모용섭인은 결국 473년 8월에 북위에 항복하고 해마다 조공하였다. 모용섭인의 뒤를 이은 모용부연수는 492년 7월, 북위 효문제에 의해 "사지절 · 도독 · 서수제군사 · 정서장군 · 영호서융중랑장 · 서해군개국공 · 토욕혼왕"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토욕혼은 북위의 번국을 자처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서》에 따르면 "새표(塞表) 내에서 부강한 나라로 불러지며, 거의 천조(天朝, 북위)에 준하는 관사(官司)를 두고 여러 나라에 칭제(稱制)하여 스스로 대국(大國)임을 자랑하였다."고 할 정도로[5] 주변 지역 내에서는 독자적인 세력과 위상을 구축하였다."

 

(자료 : 토욕혼, 위키백과)

 

 

그럼 토욕혼, 토번의 위치는 어디인가? 필자는 북위가 그리고 북연 등 연나라가 프랑스 Gaul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위키자료에서 말하는, 북위의 효문제가 책봉한 토욕혼에 대한 직위에서 언급한 '서해'는 '대서양'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즉 토욕혼은 대서양에 가까이 있는 서유럽의 프랑스, 스페인, 포루투갈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광개토태왕이 398년에 토욕을 정벌한 것으로 나오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Alaric I 고트족왕이 히스패니아 지역까지 정벌한 것을 광개토태왕의 그것으로 판단했다. 즉 토욕혼은 서해인 대서양 가까이 있는 '서해군'의 나라라는 것이다. 

 

"6대 가한인 모용시비(慕容視羆) 때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공격을 받아 정복되었고 이후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광개토태왕이 청해성과 신강성 방향으로 넘어 들어와 토욕혼을 공격했다는 것은 당시 고구려의 영향력이 실로 지대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광개토태왕비문에 의하면 광개토태왕은 398년에 토욕혼과 숙신으로 군사를 보냈다. 이 때 광개토태왕이 북위의 서쪽에 있는 토욕혼을 정벌한 것은 북위(北魏)가 후연(後燕)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수도를 성락(盛樂)에서 평성(平城)으로 옮기고 후연의 유주(幽州)를 압박하자 북위(北魏)의 배후에 있는 토욕혼을 정벌하여 북위를 포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숙신을 정벌한 것은 동부여의 배후에 있는 숙신을 정벌하여 동부여를 포위하고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永樂八年條 [본문] 八年戊戌敎遣偏師觀帛愼土谷因便抄得莫□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自此以來朝貢□事."

 

(인용출처 : 토욕혼은 선비족 모용선비가 세운 나라이다. 대선우, 필자의 Naver 블로그 카테고리 토욕혼/토번 펌글 참조)

 

 

이러한 토욕혼에 대한 위치 추정에 도움을 주는 자료가 또 하나 있다. 

 

우리는 위의 토욕혼 자료에서 유연, 여국에 대한 언급을 보았다. 따라서 여국에 대한 자료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즉 위키백과에서는 여인국이 토욕혼과 가까운 서해에 있다는 것이다. 

 

"여국(女國) 또는 여인국(女人國)은 여성들만 산다는 국가이다. 중국의 정사에서 서쪽 티베트에 존재했다고 하며, 서해에 또 다른 여성 왕국이 있었기 때문에 동녀국(東女國)이라고도 불린다."

 

(자료 : 여국, 위키백과)

 

아래 성호사설 자료에서는, 직방외기에 보면  여국은 달단의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여전사가 활동하는 아마조네스를 생각나게 한다. 한서지리지에서는 유주에 특히 여자가 많다고 했다. 유주는 요동의 요소이다. 의무려산이 있는 곳이라 한다. 의무려산은 순임금이 봉해진 곳으로 요동에 있었다. 즉 여국이 요동과 요서에서 가까울 수 있으며, 필자는 요수를 프랑스의 론강으로 추정했으니 여국도 서유럽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서쪽에 여국(女國)이 있다고 한다. 《직방외기(職方外紀)》에 보면, 다만 “달단(韃靼)의 서쪽에 옛날의 여국이 있었다. 그 나라 풍속에는 봄철에 남자 한 사람만이 그곳에 오는 것을 허용하였고 아들을 낳으면 죽여 버렸는데 지금은 다른 나라에 병합하고 그 명칭만 남아 있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가장 근사하다.

 

그러나 아들을 낳기만 하면 죽여 버렸다고 하니, 그럼, 봄철에 들어오는 남자는 반드시 다른 나라에서 빌려오는 것일 터인즉 이는 한때의 습속일 것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보면, 중국 12주 가운데서 대체로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 주(州)가 많다. 예주(豫州)ㆍ청주(靑州)ㆍ연주(兗州)ㆍ병주(幷州)의 4주는 남자 2에 여자 3, 양주(揚州)는 남자 2에 여자 5, 형주(荊州)는 남자 1에 여자 2, 유주(幽州)는 남자 1에 여자 3의 비율이나 옹주(雍州)는 남자 3에 여자 2, 기주(冀州)는 남자 5에 여자 3의 비율로서, 대체로 옹주는 남자가 가장 많고 유주는 여자가 가장 많다. 그러나 유주는 요동의 요소이다. 그 산(山)은 의무려(醫巫閭)이고 그 소산물은 고기와 소금이다. 지금 들으면 그 지역에는 여자가 적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몰래 여자들을 그곳에 팔아넘기곤 한다고 하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순(舜)이 기주ㆍ연주ㆍ청주ㆍ서주(徐州)ㆍ형주ㆍ양주ㆍ예주ㆍ양주(梁州)ㆍ옹주ㆍ유주ㆍ병주ㆍ영주(營州)의 12개 주를 설치하였는데, 우공(禹貢)에 와서 유주ㆍ병주ㆍ영주를 폐지하고 9주로 만들었고, 주관(周官)에 이르러는 서주ㆍ양주ㆍ여주를 폐지하고 유주와 병주를 첨가하였다. "

 

(출처 : 성호사설 1권 천지문, 여국, 인용출처 : 여국, 작성자 : 샛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월지국/여인국, 펌글 참조)

 

 

아래 위키자료에서는, 아마조네스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사마르트족의 국경지역에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아마조네스(그리스어Ἀμαζόνες) 또는 단수형으로 아마존(그리스어Ἀμαζών)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설의 여성 부족이다. 이들은 전쟁의 신 아레스와 요정 하르모니아의 자손들이다. 여자 왕, 각료, 전사 등 여자들만으로 역할을 맡아 튼튼한 왕국을 이루었다. 이들은 종족 보존을 위해 이웃 부족을 침입해 남자들을 빼앗아 강간한 뒤 죽이고, 태어난 아기는 여자만 거두었고 남자 아기는 죽이거나 이웃 나라로 보냈다. 여자 아기들도 오른쪽 유방을 도려내고 길렀는데 이는 활과 창을 잘 다루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이들은 전쟁을 가장 즐겼다.

헤로도투스는 아마조네스가 사르마트족의 스키타이 국경 지역(현재의 우크라이나)에 위치한다고 했으며, 다른 역사가는 소아시아리비아, 또는 인도 라고도 했다."

 

(자료 : 아마조네스, 위키백과)

 

 

우리는 아마조네스의 여전사 같은 기록이 켈트족의 문화에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아래 위키자료를 보면, 프랑스의 동북부, Champagne and Bourgone지방에서 La Tene 초기시대에 여성이 전쟁에 참여한 것을 일반적으로 보여준다 했다.  위의 여국에 대한 위키자료에서 동녀국이 이곳이 아닌가 하는 짐작이다. 

 

또한 Insula Celts가 주거하는 브리튼지역에서는 여성의 전쟁 주도와 여전사의 역할이 있었음을 말해 주는 일반적인 자료가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위의 여국에 대한 위키자료에서, 서해에 또 다른 여국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 브리튼지역이 이에서 언급하는 서해의 여국이 아닌가 한다. 

 

 

"Very few reliable sources exist regarding Celtic views on gender divisions and societal status, though some archaeological evidence does suggest that their views of gender roles may differ from contemporary and less egalitarian classical counterparts of the Roman era.[113][114] There are some general indications from Iron Age burial sites in the Champagne and Bourgogne regions of Northeastern France suggesting that women may have had roles in combat during the earlier La Tène period.  

 

However, the evidence is far from conclusive.[115] Examples of individuals buried with both female jewellery and weaponry have been identified, such as the Vix Grave, and there are questions about the gender of some skeletons that were buried with warrior assemblages. However, it has been suggested that "the weapons may indicate rank instead of masculinity".[116]

 

Among the insular Celts, there is a greater amount of historic documentation to suggest warrior roles for women. In addition to commentary by Tacitus about Boudica, there are indications from later period histories that also suggest a more substantial role for "women as warriors", in symbolic if not actual roles. Posidonius and Strabo described an island of women where men could not venture for fear of death, and where the women ripped each other apart.[117] Other writers, such as Ammianus Marcellinus and Tacitus, mentioned Celtic women inciting, participating in, and leading battles.[118] Posidonius' anthropological comments on the Celts had common themes, primarily primitivism, extreme ferocity, cruel sacrificial practices, and the strength and courage of their women.[119]

 

 

.......................

 

 

There are instances recorded where women participated both in warfare and in kingship, although they were in the minority in these areas. Plutarch reports that Celtic women acted as ambassadors to avoid a war among Celts chiefdoms in the Po valley during the 4th century BC."

 

 Diachronic distribution of Celtic peoples, in the traditional view:

 Yellow 부문 : 

Core Hallstatt territory, by the sixth century BC

 Light Green 부문 : 

Maximal Celtic expansion by 275 BC

 Light Blue 부문 :

Lusitanian area of Iberia where Celtic presence is uncertain

 

 Green 부문 : 

Areas where Celtic languages remain widely spoken today

 (SOURCE : Celts, Wikipedia, 본 블로그, 카테고리, Celts 참조)

 

즉 위에서 언급한 여국의 위치가 프랑스 북동부지역 또는 대서양의 브리튼지역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과도 교역하는 토욕혼, 토번은 서유럽의 대서양변에 있을 수 있다는 필자의 추정을 뒷받침하고 있다. 필자는 과거 중국의 세계지도에서 여인국이 제일 서쪽에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이상을 종합하면, 여국, 그리고 북위, 남조 등과 교류한 서해군의 토욕혼, 토번은 대서양가에 있는 나라로 추정된다. 즉 지금의 티베트가 서해군에 있는 토욕혼, 토번의 위치가 아님을 확인 할 수 있다. 그 구체적 위치는 동 시기에 서양사에서 나타나는 역사를 보고서 보다 연구해야 한다. 다음의 과제로 미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