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은 어디 있었는가? (I)

2021. 7. 14. 13:52한민족 역사/기타

부제 : 낙랑은 압록수인 론강(Rhone river)의 동쪽 요동에 있었다.

 

필자는 그동안 한반도 고대사에 대한 회의를 간간히 언급해 왔다. 

 

우리의 고대사에서 낙랑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낙랑의 위치는 고대 한국사에서 백제, 고구려, 신라까지 그 위치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백제 온조왕 시기 낙랑은 백제와 치열한 전쟁을 하며, 위례성을 불태우기도 했다. 고구려도 낙랑과의 관계는 대무신왕시기부터 미천왕 시기까지 대립을 이어 왔다. 물론 낙랑은 한사군의 일원인 낙랑군이 있고, 또 독립국인 최유의 낙랑국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신라의 진흥왕은 565년 북제로부터 낙랑군공 신라왕이라는 명칭을 받았다. 따라서 이는 신라의 당시 위치를 언급한다고 판단한다. 아메리카 원주민 Cherokian들은 그들의 노래 ('Amazing Grace in Cherokee')에서 '낙랑조선'을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늑대를 표상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 역사에서 이 수수께끼 같은 낙랑에 대해 파헤치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반도가 아닌 낙랑은 어디인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필자는 본 블로그 글, '상나라의 동방행은 어디까지인가?'라는 글에서, 낙랑이 발칸반도 위의 Dacian이 아닌가 추정했다. 그들은 좌식문화를 가지고 있고, 초가집에서 살았으며, 편두를 하였고, 늑대라는 동물과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위키피디아는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자유민(Free Dacian)이 있고, 속민이 있다는 언급도 있다.  그리고 이들 관련 지역은 남부폴란드에서 흑해에 가까운 우크라이나, 발칸반도까지 동유럽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언급된다. 또한 로마사에서 Dacian Wars를 오랫동안 해왔으며, 결국은 Dacian 지역 정복을 포기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으며, 또한 Carpathian Mountains에 사는 Carpi라고 언급되며, Dacian의 일부로서 오랫동안 대결을 한 역사를 보여 준다. 또한 이들 Dacian은 카스피해 동부의 Dahae와도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된다. 

 

따라서 낙랑 관련 연구는 조선의 한나라와 관련 낙랑 역사 연구와 서양사에서 Dacian 역사와 관련 하여 비교 분석하는 것이 필자에게는 핵심으로 여겨진다. 필자는 라인강이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가 되는 패수라 추정했다. (본 블로그 글,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패수는 독일의 라인강인가?' 참조).  위만이 이 라인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와 위만조선을 세운 것으로 필자는 추정했다. 그리고 연나라도 이 근처인 요수인 론강근처의 요동에 있는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본 블로그 글,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연나라는 Gaul지역에 있었다' 참조). 따라서 필자는 현도군, 낙랑군 등이 요수인 론강의 우측 요동에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진번과 임둔은 보다 동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만 조선이 한나라와 진번, 임둔의 교역을 방해 하였기 때문에 한나라의 조선 침략이 개시되었다 하니 말이다. 한나라에서 동쪽으로 가장 멀리 있는 진번과 임둔은 위만 조선의 영역이 아니고 독립된 자치정부일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된다. 

 

 

아래 낙랑군 자료에서도 낙랑군은 옛 고조선의 중심부에 설치되었다 한다. 현도군이 고구려와 부여 관리를 위한 지역이라면, 낙랑군은 동부의 예, 남부의 한(韓), 왜를 관리한 지역이었다 한다. 대방군이 생긴 후에는 한(韓)의 일부와 왜는 대방군 관리로 넘어 갔다 한다. 즉 현도군은 요동에서 동북쪽의 부여와 고구려와 관련된 지역이고, 낙랑군은 보다 동쪽의 예(獩)와 한(韓), 왜를 담당하는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현도군이 북방의 고구려·부여의 내속을 관리한 것에 반해 낙랑군은 군내(郡內)의 원주민 집단을 비롯해 동부의 예(濊)와 남부의 한(韓)·왜(倭)의 내속을 주관하였다. 3세기 초 대방군이 분리된 후에는 삼한(三韓)의 일부와 왜의 내속업무는 대방군으로 이관되었다."

 

(자료 : 낙랑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본 블로그 카테고리, 부여 낙랑 옥저 동예, 펌글 참조) 

 

 

 

낙랑군에 대한 보다 자세한 자료를 나무위키자료에서 보면 아래와 같다. 

 

즉 형식적인 한사군으로 판단되는 가장 동쪽으로 추정되는 임둔, 진번(진한과 번한?)은 일찌기 폐지되고, 현도군은 고구려의 공격으로 요수 가까운 요동에 머무르며 실질적으로 폐지되고, 마지막으로 오래 남은 낙랑군은 4세기까지 존속했다. 낙랑군이 이렇게 장기간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하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료에서 보는 것처럼, 낙랑군의 지리적 여건 (험한 지형때문?)으로 한나라에서 파견되는 태수, 현령의 정상운영이 불가능하여, 현지 토착민위주의 운영이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낙랑군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군에 파견되는 태수·현령(縣令)과도 같은 지방관직의 정상적 운용이 불가능하였다. 반면에 군민(郡民)의 역할은 그만큼 증대되었다. 군민은 낙랑군 설치 이전부터 조선에 망명해 토착화된 한인계(漢人系) 주민과 원주민들로 구성되었다."

(자료 : 낙랑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부여 낙랑 옥저 동예, 펌글 참조) 

 

 

이러한 낙랑군도 전한, 신나라, 후한의 교체기에 서기 25년에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분으로 실패했다 한다. 독립국인 최씨 낙랑국도 32-37 기간 존재했는데, 이러한 독립 움직임의 일부 결과인지도 모른다. 

 

삼국사기에는 후한의 광무제가 44년에 살수 이남 지역을 낙랑군에 포함시켰다 한다. 

 

 

111년 낙랑은 부여의 침입을 받았다.

 

"안제(安帝) 때에 이르러 영초(永初) 5년(111)에 부여왕 시(始)가 2 보병과 기병 7~8천명을 거느리고 낙랑(樂浪)을 노략질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살상하였으나, 후에 다시 귀부(歸附)하였다."

 

(원자료 :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 인용출처 :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 by 원한의 거리,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낙랑 옥저 동예 부여, 공유글 참조)

 

 

 

이후 낙랑군은 2세기 후반까지 쇠퇴의 모습을 보이다가, 2세기 후반 요동의 공손씨 세력이 낙랑을 장악하면서 다시 낙랑이 재건되는 모습을 보였다 한다. 그러나 대방군을 설치하며 남부지역에 치중하는 편이었다. 

 

"한사군의 다른 군현은 임둔[2], 진번 2군이 폐지되고 현도군이 고구려현의 반발로 후퇴하는 등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낙랑은 이 폐지된 군의 관할 구역 중 관리할 여력이 남아 있는 지역을 흡수하면서 한때 인구가 40만이 넘는 성대를 누렸다.....

 

전한 - 신나라 - 후한의 교체기로 중국 대륙이 혼란했던 서기 25년에 토인(土人, 고조선계 토착민 혹은 토착화된 한인) 왕조(王調)를 중심으로 태수를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자칭, 사실상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광무제가 후한을 재건하면서 서기 30년에 이 지역에 왕준을 파견, 왕조가 세운 독립 낙랑은 마침 내분이 일어나 군삼로 왕굉(王閎)이 결조사 양읍 등과 함께 왕조를 살해하고 왕준을 맞이해 5년만에 싱겁게 멸망하였고, 낙랑군은 다시 한의 군현으로 편입되었다.

한편 32년 경 등장하여 37년 경 멸망하는 최씨낙랑국도 낙랑군과 같은 지역 혹은 낙랑군의 일부 지역이 독립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3] 이것이 맞다면 이 추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외에 혼란기에 적미의 난의 진원지였던 산둥 반도의 인구가 낙랑 지역으로 유입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광무제가 44년에 살수(청천강) 이남을 편입했다고 되어 있어 다소의 혼란은 있다. 어쨌건 이 때 도위 제도는 폐지되었는데, 이는 광무제의 일관적인 정책이기도 했지만 동부도위 지역, 즉 영동의 7현이 버려졌다. 아마도 고구려와 같은 이민족의 성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2세기 중반까지 낙랑군에 대한 기록은 매우 미미해진다. 부여의 111년 침공 기록이 있지만, 그것을 딱히 쇠퇴의 징후라고 보기는 어렵다. 2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 다수의 인구가 삼한 지역으로 빠져나갔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고구려의 한 군현 공격이 두드러지는 등 쇠퇴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요동의 공손씨 세력이 낙랑을 장악하면서 삼한과 로부터 다시 인구가 회복되었다고 전하는 등 다시 재건 단계에 들어섰다. 하지만 이미 북방에 대한 견제는 어려워졌는지, 낙랑군은 .. 대방군을 건설(남부도위가 위치하던 지역)하면서 중심축을 남쪽으로 돌린다."

 

(자료 : 낙랑군, 나무위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부여 낙랑 옥저 동예, 펌글 참조)

 

이후 낙랑군은, 238년 위나라 사마의에 의해 공손연의 요동이 멸망한 후, 위의 관할하에 들어 간다. 관구검의 시기에도 마찬가지이다. 관구검에 의해 고구려가 동옥저지역까지 밀린 것을 감안하면, 이 시기의 위가 낙랑을 통제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 이후 낙랑군과 대방군은 삼한, 즉 마한과 백제의 고이왕, 책계왕, 분서왕 등과 협력 또는 대결을 반복해 왔다. 고이왕이 혼인관계를 맺고, 책계왕, 분서왕이 낙랑에 의해 왕이 암살을 당하는 등 낙랑군의 세력이 절정에 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위가 망하고 서진이 등장한 이후(274년)는 낙랑지역이 평주 동부교위로 소속되면서, 낙랑군의 역할은 축소 되었으며, 마한, 진한은 낙랑군을 거치지 않고 직접 중국과 교류하게 되었다. 

 

서진이 망하고 오호십육국시대에 이르러, 고구려 미천왕은 낙랑군과 요동, 현도군을 이어주는 압록강의 서안평을 공격하여 수복(302년)하였다. 따라서 낙랑군과 대방군은 중국과 동떨어진 고립된 지역이 되었다. 결국 313년 낙랑군이 고구려 미천왕에게 멸망 당하고, 314년에는 대방군이 미천왕에게 멸망당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백제와 고구려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한다. 

 

"302년 3만의 병력으로 현도군을 공격해 8천여명을 포로로 사로잡는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311년엔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서안평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여 요동군과 낙랑군 사이 육로를 차단시켜 남쪽의 낙랑군을 중국 본토에서 떨어진 월경지로 고립시켜 버렸다.....

 

미천왕이 서안평을 점령하여 중국과 낙랑군과 대방군을 단절시키고, 이내 낙랑과 대방을 고구려가 멸망시키면서 고구려와 백제는 드디어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자료 : 미천왕, 나무위키,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 펌글 참조)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에게 멸망 직전 연나라의 모용외에게 천여가가 투항했다. 이들은 요서에 낙랑군복원을 시도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낙랑군이 연나라 모용외와 인접했다는 의미이다. 4세기 연나라 모용외는 선비족의 나라로, Suebi족인 Alamannia (Strasbourg 동쪽에 위치)에 해당한다고 필자는 추정했다. (본 블로그 글, 반달족인 Burgundians은 북부여, 동부여인가?' 참조). 낙랑군은 그러므로 연나라가 있던 지역의 우측인, 폴란드 남부지역에서부터 그 우측으로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양사에서 이 지역은 발칸반도까지 이르는 Dacia지역이다. 

 



"요동 공손씨는 조조가 낙랑태수로 보낸 양무를 억류하는 등 낙랑을 자기 세력권에 두고 있었지만, 238년 위나라의 사마의가 공손연의 요동을 공격, 멸망시키고 관할 지역을 수복하였다. 낙랑도 유주자사 관구검의 관할에 들어갔는데, 이 시기 고구려는 244년 위나라와 싸웠다가 비류수 전투에서 대차게 깨져 300년경까지는 더 이상 세력확장을 하지 못하게 된다.

한편 낙랑군과 대방군이 삼한 8국의 영유권을 주장한 데 대해 마한 세력[4]이 반발하여 군현을 공격했으나 역관광 루트를 타고 망했다. 백제도 여기에 얽힌 것 같긴 한데, 포로를 잡았다가 돌려주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어서 마한이 움직이는 통에 숟가락 얹은 정도라는 것이 중론. 대방군과 고이왕 항목 참조. 하여튼 낙랑군은 이 때 주변국에 제대로 힘을 썼고, 주위의 소국들이 줄줄히 항복, 복속하는 상황에서 고이왕도 혼인 관계를 맺고 책계왕 때는 왕을 죽이고 분서왕 때 크게 한방 얻어맞았지만 얼마 안가 분서왕도 죽이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급부상했다.[5]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중국과 교통이 재개된 것도 무색하게, 위(삼국시대)를 뒤엎고 건국된 서진은 274년 낙랑군과 대방군을 평주 동이교위에 소속시키며 적극적으로 동방에 개입하려 했다. 동이교위가 동방 정책의 중심이 되면서 낙랑, 대방, 현도는 점점 세력이 쇠퇴해 가며, 그 사례로 .... 마한과 진한은 더이상 과거처럼 한사군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중국과 교류를 하지 않고 270년대부터는 마한과 진한의 이름으로 중국 본토의 서진에 직접 나아가 통교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진의 삼국통일 이후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오호십육국시대의 개막으로 290~300년대경부터 한사군과 중국 본토 본국과의 연결 고리는 사실상 다시 끊긴 것이나 다름이 없어졌다. 위나라에 패했던 피해를 수습한 고구려는 다시 낙랑군과 요동 · 현도군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였던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을 집요하게 공략하여 끝내 미천왕이 이를 수복하며 낙랑과 대방을 월경지로 고립시켜 버렸다. ... 백제의 분서왕이 낙랑을 공격했다가 암살당하는 등 과거 삼한 지역 또한 압박을 가해왔다.

결국 미천왕 대인 313년 낙랑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으며, 1년뒤인 314년에는 대방군 또한 멸망시켜 ... 한사군 축출을 완료했다.

중국 입장에서 한사군을 상실한 것은 땅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엄청난 타격이 된 듯 하다. 낙랑군 멸망 300여년 후에 수양제가 고구려를 상대로 고구려-수 전쟁 선전포고를 할 때에 "한의 땅을 둘러보니 동쪽이 전부 오랑캐의 땅이 되어있더라"고 적으면서 고구려를 씹었다.(...) 

 

--- 멸망 이후

고구려의 정복 직전에 탈출한 1,000여가의 낙랑인 세력은 모용외에게 투항했다. 이 모용씨 연나라 치하에서 낙랑군의 일부 유민들은 요서 지역으로 건너가 낙랑군 복원을 시도했지만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4세기부터는 고구려나 백제의 책봉호에 낙랑 관련 관직이 나타나니 포기하는 면도 있었던 것 같고... 그러나 북제 시대에 폐지될 때까지 요서 지역에 군현의 형식은 남아 있었고, 수나라 양제의 원정 때도 이름은 남아 있었다.[6]

 

(자료 : 낙랑군, 나무위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부여 낙랑 옥저 동예, 펌글 참조)

 

수양제가 고구려-수 전쟁 선전포고할 때, '한(漢)의 땅을 둘러보니 동쪽이 전부 오랑캐땅이 되었더라'는 언급을 하였다 한다. 즉 한(漢)나라가 현도군 낙랑군 지역은 간접적으로나마 어느 정도 지배했다고 짐작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요동에 위치한 현도군은 더욱 지배권을 행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태조왕 시절 (122년, 차대왕 시절?), 고구려가 예맥과 마한과 함께 현도군을 공격했으나, 부여가 한(후한)나라와 합세하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역사는 말하고 있다. 반면 부여는 111년 낙랑군을 공격했다고 상기 나무위키 자료는 언급하고 있다. 즉 부여는 현도군과 낙랑군에 인접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낙랑은 단단대령 서쪽에 있고 단단대령 동쪽에는 옥저와 예가 있으며, 모두 바다와 접했다고 했다. 필자는 단단대령을 Dalmatia, Illyria지역인 Dinaric Alps라고 추정했다. (본 블로그 글, '고구려 대무신왕이 정벌한 개마국은 어디인가?' 참조). 즉 낙랑군은 이태리 북부와 그 우측, 파노니아 지역에서  위치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압록수의 하류에 있었다는 서안평은 론강의 하류에 있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에 접한 마르세이유 또는 Arles 정도로 추정된다. (본 블로그 글, 'Rhone river(론강)이 요수라는 증거' 참조). 고구려의 미천왕이 이 서안평을 점령하여, 낙랑군과 중국-현도군과의 교류를 지역적으로 차단했다 하였다. 따라서 낙랑군은 이태리 북부지역에서 Dinaric Alps에 이르는 지역, Lombard 지역이 되지 않을까 한다. 

 

이 지역에 있으면, 남쪽에 있는 삼한과 왜의 중국과의 교류를 통제할 수 있는 위치가 된다. (본 블로그 글, '마한은 이태리 반도를 포함하였다'  참조). 왜는 지중해에 있는 섬들과 아프리카 북부에 있는 지역으로 판단된다. 대방군은 발칸반도에 있어 보다 남쪽의 진한, 번한과 왜 지역을 담당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후한 광무제 시기 AD 44년 살수지역을 낙랑군에 포함시켰다 했다. 필자는 패수를 라인강으로 추정했다. (본 블로그 글,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패수는 독일의 라인강인가?' 참조). 따라서 살수는 근처에 있을 것이다. 즉 낙랑이 이태리 북부지역에 있을 수 있다는 논리와 궤를 같이 한다. 

 

위에서 후한시기인 AD 111년 부여가 낙랑을 공격했다고 했다. 현도군 위에 있던 북부여가 동부여로 내려 오면서 알프스산맥 주위에 있었다 필자는 추정했다. (본 블로그 글, '반달족인 Burgundians은 북부여, 동부여인가?' 참조). 따라서 낙랑이 이 남쪽에 있다면 부여의 공격대상이 된다. 즉 이태리 북부지역에 낙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안제(安帝) 때에 이르러 영초(永初) 5년(111)에 부여왕 시(始)가 2 보병과 기병 7~8천명을 거느리고 낙랑(樂浪)을 노략질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살상하였으나, 후에 다시 귀부(歸附)하였다."

 

(원자료 :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 인용출처 :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 by 원한의 거리,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낙랑 옥저 동예 부여, 공유글 참조)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멸망하고, 대방군은 314년 미천왕에 의해 멸망한다. 요수의 하류에 있는 서안평의 점령이 그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한나라, 현도군과의 교류가 지리적으로 막혔기 때문이다. 그런 즉 멸망한 낙랑군의 위에 있던 동부여와 백제가 더 가까와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결국 동부여가 망하고 북부여지역에 두막루가 세워졌다. 이때를 자치통감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한다. 즉 '부여는 백제의 공격과 전연의 공격을 받아 왕이 포로가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자료 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낙랑 옥저 동예 부여, 공유글, '부여가 백제의 공격을 받고 멸망 직전에 갔다는 기사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에 대하여..' by History2 참조).  그래서 결국 동부여는 고구려 문자왕에게 항복한다 (AD 491). 한반도나 중공 동북부지역을 한민족사로 고려하면 해답이 나올 수 없다. 그러나 필자가 추정하듯이 요수를 론강으로 추정하면 너무나 용이하게 이해가 간다. 필자는 두막루가 북유럽에 있다고 추정했다. (본 블로그 글, '북부여계인 두막루는 북유럽에 있었다' 참조) 그리고 동부여는 이태리북부에 있었다 추정했다. (본 블로그 글, '반달족인  Burgundians은 북부여, 동부여인가?', '광개토태왕이 점령한 동부여는 어디인가?' 참조). 따라서 이태리북부의 이남 또는 동남쪽에 백제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아래 지도에서 Burgundians은 동부여이고 Alamanni는 같은 선비족(Suebi족)인 연나라(전연)에 해당한다. 

 

 

Rhine Frontier of Roman Empire in AD 4 C (source : Wikipedia)

 

 

 

한성백제가 망하고 웅진백제이후 시기에,  신라의 진흥왕이 낙랑국공이란 직책을 북제로부터 받은 것은 이 지역을 점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시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 시절, 백제의 동북부 지역을 신라가 점하고 신주(新州)를 설치 하였다 (552년). 그런데 일본 서기에서는 이 신주가 설치된 지역에 평양(平壤),  한성(漢城)이 있었다고 했다. (아래 자료 참조)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興, 以阿湌武力爲軍主.


(진흥왕 14년) 가을 7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가져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삼국사기》진흥왕본기

 

三十一年, 秋七月, 新羅取東北鄙, 置新州.


(성왕) 31년 가을 7월에 신라가 동북 변두리를 가지고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성왕본기

 

是歲 百濟棄漢城與平壤 新羅因此入居漢城 今新羅之牛頭方·尼彌方也


이 해(552년)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 니미방이다.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조" 

 

(자료 : 진흥왕, 나무위키,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신라중, 펌글 참조)

 

이후 554년 신라와 백제-가야-왜의 연합군은 관산성전투를 하게 되며, 백제 왕자 부여창의 선전으로 전세를 이기고 있었으나, 부주의한 성왕의 죽음으로 백제는 대패하게 된다. 즉 관산성 전투가 이곳 신주인 지역, 한성과 평양이 있는 지역에서 벌어졌다는 추측이다. 

필자는 위만이 도읍한 왕검성인 평양(平壤)이 알프스산맥에 있는 라인강 상류와 론강 상류가 만나는 어느 도시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사에서는 항가리의 부다페스트가 근초고왕과 고국원왕 시기의 평양으로 나타난다. 위의 신주 사건에서는 백제의 한성(漢城)이 이 지역에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한데, 아니면 멀리 있지 않은 별개의 지역일 수도 있다. 한성이란 이름을 보건데, 이 지역이 한나라의 지역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따라서 한성이 이태리 북부에 있다면, 근접한 한수(漢水)는 이곳의 Po river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곳을 신주(新州)로 칭한 것도 혹시 왕망이 세운 신(新)나라 지역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중국에서 나라 이름은 세워진 곳의 명칭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 이곳은 론강의 동쪽 요동지역으로, 한(漢)나라지역에 가까우며 (혹은 한사군이 있는 현도군과 낙랑군이 있는 지역이며), 고구려와 접한 지역이므로, 왕망의 신나라 지역이 될 수 있다. 왕망은 고구려에게 흉노를 칠 군사를 보내 달라는 요구를 했는데, 고구려가 거절하자 하구려라고 칭했다 한다. 

그러나 진흥왕 시기의 신라는 한성백제가 망하고 웅진백제시대에 있어서 백제 성왕시기에 해당한다. 이는 기존의 신라 백제의 위치와 다른 면이 많이 있기 때문에 후일 재검토 하고자 한다. 필자는 과거 파르티마제국과 뒤이은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신라라 추정하였다. 이와 관련하여서도 검토가 있어야 하는 바, 진흥왕 시기의 낙랑군공 주제에 대한 분석은 후일 별도 취급하고자 한다. 

 

이상으로 국내 자료와 필자의 본 블로그 글을 바탕으로 한 낙랑의 위치추정은 이것으로 마치고자 한다. 뒤이어 서양사자료 즉 Dacians자료와 비교분석을 통한 낙랑의 위치 추정은 다음 (II)의 글로 미루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