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은 어디 있었는가? (II)

2021. 7. 22. 11:09한민족 역사/기타

부제 : 낙랑은 BC 18c부터 존재했으며, 압록수 론강의 고죽국에 있었다.

 

낙랑에 대한 국내 역사 자료를 더 살펴 보아야 하겠다. 삼국사기와 환단고기에 있는 자료를 더 검토할 필요가 있어서이다. 서양자료를 통한 분석은 그러므로 (III)이후로 미룬다. 

 

아래 글에서 단군조선이 견이, 낙랑, 상나라와 함께 하나라를 멸망시킬 때 (BC 1767년), 이미 낙랑이 존재함을 알려 준다. 단군조선의 위치는 상나라, 하나라, 낙랑 등과도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BC 1767년 겨울에,  하(夏)나라 걸왕이 폭정을 하자 상(商)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니 하(夏)의 걸왕이 단군조선에 구원을 요청하니, 단제께서 읍차 말량을 시켜 다른 제후국들(구이九夷, 구환九桓)의 군사로 지원하니 상(商)의 탕(湯)이 사죄하고 물러났다. 이에 단군조선이 군사를 물리려 하니 걸왕이 군사를 막고 약속을 어기는지라, 단군조선은 몰래 신지 우량을 보내 견이와 낙랑군을 동원해 상(商)과 함께 하(夏)를 멸망시키고, 관중의 '빈', '기(岐)' 지역에 관청을 세웠다." 

 

(자료 : 환단고기 단군세기, 13세 단군 흘달 (BC 1782-BC1722), 인용출처 : 청천 블로그, 13세 단군 흘달,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조선, 공유 글 참조)

 

 

위의 자료는 낙랑이 한반도에 있지도 않으며, 중국 동북부에 위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라 은나라가 중공대륙에 존재했다 가정하는 역사학자들에게 묻고 싶다. 단군조선이 어디에 있어서 하나라를 멸망 시키고 낙랑을 동원했는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한반도의 낙랑을 동원하여 하나라를 멸망시켰다는 가정이 가능한가? 지리적으로 얼토당토하지 않은 가정이다. 그리고 단군조선이 중공 동북부에 있어 제후국들을 동원하여 중공대륙에 있는 하나라를 멸망시켰을까? 역시 가능성이 희박한 가정이다. 국내 역사학자들은 기존 선입관을 거두고 연구해야 한다. 

 

이래 환단고기의 단군세기 23세 단군 아홀 자료를 보면, 낙랑이란 지역은 BC 1237년에도 낙랑골이란 이름으로 존재했다. 단제의 숙부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골을 다스리게 하였다고 나온다. 그리고 남국군(藍國君), 청구군(靑丘君), 구려군(句麗君)이란 명칭이 나온다. 이미 기원전 13세기부터 존재했던 지역이름이라는 것이다. 구려군, 구려현 등이 이미 오래전부터 언급되는 것을 보면, 고구려의 지역이 이 지역에 있었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의 건국지역이 단군시대부터 언급되어 있던 매우 역사가 깊은 지역이라는 것이다. 평양(平壤)이 고조선의 수도라는 왕검성이라는 것은 그래서 매우 의미 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구려군, 청구군, 남국군, 몽고리(=몽골군?)까지 합쳐 은나라 (은나라 말기) 성책을 쳐부수고, 또 오지 깊숙이 들어가, 회대(淮垈)지방을 평정하고, 엄(淹)지역을 포고씨에게, 서(徐)지역을 영고씨에게, 회(淮)지역을 방고씨에게 분봉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서(徐)지역은 훗날 진(秦)나라가 통일된 나라를 세우기 전에 초창기 있었던 지역이다. BC 1236년, 盈古氏於徐 즉 서지역에 영고씨가 분봉되었다 하는데, BC 900년경 주(周)나라때에도 진(秦)은, (嬴)이란 성을 받고 진(秦)의 영지를 받고, BC 770년에는 주나라의 옛 땅인 기(岐)에 봉해지게 되어 제후의 반열에 오른다 했다. (아래 자료 참조)

 

"기원전 900년즈음에 의 효왕(孝王)을 시중들고 있던 비자(非子)가 말의 생산을 실시해, 공적을 올렸으므로의 영(嬴)이라는 성을 받고 대부가 되어, 진(秦) 땅에 영지를 받았다고 한다....

기원전 770년에 주나라가 견융(犬戎)에 쫓겨 도성을 동쪽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양공(襄公)은 주 평왕(周平王)을 호위한 공으로 주의 구지인 기(岐)에 봉해지게 되었고, 이후 진은 제후의 반열에 오른다."

(자료 : 진나라, 위키백과,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진나라, 펌글 참조)

 

위의 13세 단군 홀달 자료에서, 단군조선은 빈, 기(岐) 지역에 관청을 세웠다 했다. 즉 단군조선이 은나라, 주나라, 진나라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중국사에서 회수(淮水) 등 언급이 있는데, 이 회(淮)지역을 방고씨에게 단제 아홀이 분봉했다(BC 1236)는 것이다. 그리고 은나라의 오지 지역까지 깊숙이 들어가 점령한 지역이다. 향후 추정할 필요가 있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 23세 단군 아홀 (BC 1237-BC 1162): 

 

檀君世記(단군세기)
甲申 元年 命 皇叔 固弗加 治樂浪忽 遣熊乫孫 與藍國君 觀南征之兵 置六邑於殷地. 殷人相爭不決 乃進兵攻破之. 秋七月 誅申督 還都 命 釋囚俘. 乙酉 二年 藍國君今達 與靑丘君 句麗君 會于周愷 合 蒙古里之兵 所到 破殷城柵. 深入奧地 定淮岱之地 分封 蒲古氏於淹 盈古氏於徐 邦古氏於淮 殷人 望風愷 㥘莫敢近之. 戊子 五年 召二韓 及五加議停 寧古塔 移都事. 己亥 七十六年 帝崩 太子 延那立.

갑신 원년(B.C 1237) 단제의 숙부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골을 다스리게 하고 웅갈손을 보내어 남국의 왕과 더불어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6읍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러나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정짓지 못하자 마침내 군대를 진공시켜 그들을 격파하였다. 가을 7월 신독을 주살하고 환도하여 죄수와 포로의 석방을 명하였다. 을유 2년(B.C 1236)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의 임금 및 구려의 임금과 더불어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군대까지 합쳐 이르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쳐부수었다.

또 오지로 깊숙이 들어가 회대지방을 평정하고 엄 지역을 포고씨에게, 서 지역을 영고씨에게, 회 지역을 방고씨에게 분봉하니 은나라 사람들이 위풍당당한 승리를 바라보기만 할뿐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무자 5년(B.C 1233) 이한(二韓) 및 오가(五加)를 불러 영고탑으로 천도하는 일에 관하여 의논을 중지토록 하셨다.

기해 76년(B.C 1162)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태자 연나가 즉위하였다.

 


‣樂浪忽 :  

 

<大明 一統志>


⌜郡名 孤竹 爲古名 北平 爲秦名 盧龍 爲魏名 北燕 平州 及樂浪郡 北魏改 樂浪 爲北平郡⌟ “고죽군은 옛 이름이 되고 북평군은 진나라 때의 이름이 되고 노룡군은 위나라 때의 이름이 되고 북연 때에는 평주와 낙랑으로 되었다가 북위 때에는 낙랑을 바꾸어 북평군이라 하였다.”

 

‣蒲古氏 :  商나라 제후국, 左氏傳에는 “周 成王때 奄을 멸하고 그 임금을 포고에 옮겨 살게 했다”고 돼있다.

‣徐 :  뒷날 徐偃王에 의해 서국이 세워진다. 서언왕의 이름을 따 서국이 되었다.

‣二韓 : 辰韓(신한)인 단군을 뺀 번한과 막한이다. 두 사람의 副王과 五加 즉 대신들을 함께 초청했다.
 

(인용 출처: 23세 단군 아홀 재위 76년…은나라 땅에 6읍을 설치하다 [다시 보는 한단고기(桓檀古記)(87)], 노대홍 한문강사, 글로벌이코노믹, 2015.12.03)

(본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조선, 환단고기 단군세기 23세 단군 아홀, 청천, 공유자료 참조)

 

 

상기 자료 대명일통지에서 낙랑군은 옛이름 고죽군이라 했다. 고죽국은 압록수에 있는 국가로 고구려의 전신이라 한다. 필자는 압록수 즉 요수를 프랑스의 론강으로 추정했다. 즉 낙랑골이 압록곡 즉 Rhone Valley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이 지역은 평주 또는 북평군으로도 불리웠다. 우리 역사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평주 자사 관구검 등이 떠오르며, 평자를 포함한 고구려 왕명이 많다는 것은 이 지역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한다. 평원왕, 평강공주 등에서 또는 평양 이란 지명 자체가 평(平)지역과 연관이 있다는 추정이다. 이 같은 연장선상에서 평양(平壤)이 낙랑과 가까운 곳이라는 추정이다. 필자는 평양(平壤)인 왕험성 (왕검성)이 Rhone Valley에 있는 도시가 아닌가 추정한다. 

 

 

 

지난 '낙랑은 어디 있었는가?(I)'의 글에서, 최리의 낙랑국이 AD 32-37년 존속한 것으로 나무위키 자료는 말하고 있는데, 아래 환단고기 북부여 자료를 보면, BC 195-169년 기간에 낙랑왕 최숭이 언급된다. 즉 낙랑국은 이미 기원전 2세기부터 존재했다는 것이다. 한무제의 낙랑군이 세워진 시대로부터 100년을 더 거슬러 올라 간다.  즉 낙랑국이 낙랑군과는 별도로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그리고 북부여는 창해군의 북쪽에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창해군은 북부여의 남쪽에 있었다는 언급이다. 필자는 창해군이 Rhone Valley에 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본 블로그 글, '동예가 있는 창해는 어디인가?' 참조) 그리고 북부여는 북유럽에 있다고 추정했다. (본 블로그 글, '왜 해모수란 지명이 북유럽에 있나?', '반달족인 Burgundians은 북부여, 동부여인가?' 참조). 즉 마한 위에 창해군, 창해군 위에 북부여가 있었다는 추론이다. 

 

 

 

--- 환단고기 북부여편 자료 --

 

북부여편

 

3대 고해사(高奚斯) 

 

첫해(壬申 기원전 169년) 정월에 낙랑(樂浪)왕 최숭(崔崇)이 곡식 300석을 해성(海城)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이 낙랑으로부터 진기한 보물을 산같이 쌓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馬韓)의 수도 왕검성(王儉城)에 이르렀다.  이것이 단군 해모수(解慕漱)의 병오(기원전 195년) 겨울이었다. 

 

42년(기원전 128년)에 임금이 몸소 보병과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남려성 (南閭城) 에서 위적(衛賊-위만의 무리)을 쳐서 이기고 거기에 관리를 두었다. 한(漢)이 나라의 남쪽의 제후인 남려(南黎)를 회유하여 복속시키고 창해군 (蒼海郡)을 설치하였다. 

【후한서 문구에는 예군 남여가 원삭원년(기원전 128년) 우거왕을 배반하고 요동군에 내속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당시 남녀는 북부여의 남쪽 담당 제후 였으므로, 예군 남여는 우거왕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북부여를 배반한 것이다】 

 

49년(기원전 120년)에 일군국(一郡國)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이해 9월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고우루가 왕위에 올랐다.

(자료 : 북부여, 닷컴삼국지,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낙랑 옥저 동예 부여, 공유글 참조)

 

 

상기 북부여 자료는 또한 다음의 두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 낙랑의 최숭이  기원전 195년 바다를 건너 보물을 가득 싣고 마한의 수도 왕검성에 왔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는 위만이 준왕의 조선을 멸망 시키고 왕검성에 수도를 정한 시기인 기원전 194년의 1년전이다. 즉 위만이 준왕의 조선을 멸망 시키는 즈음에도 낙랑국은 준왕 조선을 도왔다는 판단이다. 그리고 기원전 169년에는 곡식 300석을 북부여 단군에게 바쳤다는 것은 이때에도 계속 최숭의 낙랑국의 존재를 의미하며, 위만과 다른 북부여와 계속 교류를 했다는 것이다. 또한 낙랑군의 위치는 고죽군이 있었던 요수인 압록곡에 있었지만, 낙랑국은 마한과 바다를 통해 교류할 수 있는 위치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낙랑군은 압록곡 가까이 있었지만, 낙랑국은 마한에서 육로보다는 바다를 통해 교류할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낙랑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 사실과 낙랑이란 지명이 기원전 18세기부터 있었다는 것은 낙랑이란 지역이 상당히 넓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필자는 그래서 '낙랑조선'을 언급하는 체로키 아메리카 원주민의 노래를 심상치 않게 생각하며, 그들이 늑대를 표상으로 한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 그런데 늑대를 표상으로 하며, 좌식문화, 초가집 등으로 한민족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곳이 발칸반도에서 발트해, 남부 폴란드에서 흑해 연안 우크라이나까지 활동영역을 가진 Dacians 지역이 낙랑조선이 아닌가 추정한다. 이들 Dacians은 위만의 조선 침입 경로를 보이는 보이(Boii)족과 치열하게 전쟁을 했다는 기록이 더욱 낙랑국의 위치로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두번째 기원전 128년에 북부여의 단군은 남려성에서 위만을 치고 거기에 관리를 두었다는 것이다. 즉 위만이 기원전 108년에 한무제에게 멸망하기 전에, 북부여에게 이미 위협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예의 남려가 한나라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북부여의 남려성 정복에 영향을 받은 것 같은 뉴앙스이다. 아울러 남려의 예(창해군) 위치가 북부여의 남쪽에 있었다는 언급이다.  즉 Rhone Valley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필자의 창해군 위치 추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본 블로그 글, '동예가 있는 창해는 어디인가?' 참조). 이는 또한 위만조선의 위치가 마한 조선의 일부만을 점하고, 보다 동쪽에 있는 임둔이나 진번 등의 조선 세력 (Dacians지역?)을 포함하지 못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임둔과 진번 등의 조선세력은 한나라와 사이에 있는 위만조선이 한나라와 임둔, 진번등과의 교역을 방해하여, 한무제의 정벌을 초래하였다.). 그래서 형식적인 임둔, 진번의 한사군이 2년후 바로 폐지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다. (이들은 한사군이 아닌 조선현이라는 주장도 있다. 본 블로그 카테고리 위만조선, 펌글 참조). 반면 요수 서쪽 또는 라인강 서쪽에 있는 한(漢)나라와 가까이 있는 Rhone Valley에 있는 낙랑군은,  그래서 요수(론강)의 하구에 있는 서안평이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점령되기 전(313년)까지는 낙랑군이 존재할 수 있었지 않았나 판단한다. 

 

 

 

이제 백제 온조왕 시기의 말갈과 낙랑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낙랑의 위치를 검토해 보자. 

 

그러나 이는 백제의 건국지에 대한 검증도 된다. 백제의 건국지에 대한 검증 자료는 다음의 5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자료 : 윤여동설, 백제의 건국지 검증, 다음블로그, 역사천재들의 모임, 참조)

1. 마한동북설 2. 한산부근 건국설  3. 대방고지 건국설  4. 진번지간 건국설  5. 패대지간 건국설

 

백제의 건국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쓰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마한의 동북방에 1백리 땅을 온조에게 마한왕이 주어 살게 하였다는 마한 동북설이다. 

 

한산부근 건국설은 한산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살피니, 오른쪽에 높은 산이 있고 서쪽은 바다에 접했으며, 남쪽은 비옥한 땅이 있어 도읍했다는 설이다. 필자는 아직 한산이 어디인지 분석 중이다. 

 

대방고지 건국설은, 주서, 수서, 북사의 백제전에 공통으로, 백제는 동명의 후손 구태가 대방 옛땅에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에 근거한다. 

 

진번지간 건국설은 '소서노와 두 아들이 BC 42년 3월에 패대(패수와 대수)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가 좋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번지간(辰番之間) 즉 진한과 진번 사이의 땅에 이르러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산지 10년만에)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고 기록한 이맥의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내용에 따른 것이다. 

 

패대지간 건국설은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비류와 온조가 와서 살았다는 기록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5가지 건국설을 만족 시키는 곳은 필자가 판단하기에 발칸반도의 Illyria지역으로 추정된다. 이곳을 짐작하였지만 한산 부근설의 한산이 어디인지 모르므로 보다 더 분석을 하는 중인데, 이것을 제외하고는 진번과 진한의 사이 (이 경우 진번은 동유럽 폴란드 항가리지역, 진한은 발칸반도 남부의 소아시아가 된다), 패수 (동남쪽으로 흐르는 패수는 다뉴브강이라 추정했다)와 대수 (앞으로 찾아 보아야 함)를 지난 지역, 대방고지설 등이 부합한다.  필자는 단단대령 서쪽에 있는 낙랑군이 알프스지역의 Rhone valley에서 판노니아지역까지, 남쪽의 대방군은 이보다 남쪽인 Dalmatia지역으로 판단하는 바, Illyria지역이 Dalmatia지역이므로, 대방고지설에 부합된다. 이곳은 또한 마한인 이태리반도의 동북방에 해당한다. 

 

 

아래 자료에서 백제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까지요, 서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까지로 한다고 온조는 말하였다. 북쪽의 패하는 다뉴브강이고, 서쪽의 대해는 아드리아해, 동쪽의 주양은 후일 신라시대 삭주, 우두주가 되는, 원래 맥의 땅이었다는 동옥저, 동예에 접한 지역이 아닌가 한다. 웅천은 발칸반도 남쪽으로 추정되는데, 보다 연구가 있어야 하겠다.  

 

즉 이러한 추정은 백제의 북쪽에 말갈이 있게 된다. 필자가 백두산, 태백산, 장백산으로 추정하는 알프스의 몽블랑은 과거 말갈 백산으로 불리웠다. 즉 이 근처에 속말말갈, 흑수말갈이 있다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동서로 천리에 걸쳐 뻗어 있는 백두산은 알프스 산맥에 있었다' 참조). 추가 연구가 필요하지만, 이 지역에 위치한 Alemanni, Alans, Sarmatians 등이 백제 초기에서 언급하는 말갈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추정하에 Rhone Valley에서 Pannonia에 이르는 지역에 있는 낙랑태수가 있는 낙랑군은 단단대령인 Dinaric Alps의 서쪽에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백제 초기에 '13년 (BC 6) 여름 5월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강역을 침범하기 때문에 평안한 날이 적다.  더구나 요즈음 요상한 일이 자주 나타나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시어 사태가 불안하니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하였다' 고 삼국사기에 온조가 말했다 한다. 필자의 추정은 낙랑의 동쪽에 Illyria지역인 백제 초기 지역이 있는데,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다고 했다. 이 낙랑은 고구려 대무신왕에 의해 멸망(AD 37)한 낙랑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또는 한산 지역 관련하여 추가적인 연구 후에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아래 삼국사기 자료에서 AD 6년, 온조가 남쪽에 웅천책을 세우니 마한의 왕이 항의했다 기술된다. 현재로서는 웅천이 발칸반도 남쪽으로 추정되는 바, 이 경우 마한의 왕이 항의 했다는 것은 발칸반도도 마한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AD 8년 마한을 기습하여 병합하다라는 기술이 있는데, 이로부터 마한이 백제가 건국한 곳으로부터 가까이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태리 반도의 마한이 아닌가 한다. 

 

AD 15년 동부와 서부를 설치하다는 기술은 백제의 영역이 동부와 서부로 크게 나뉜다는 것이다. 이태리반도와 발칸반도의 두 지역을 동부, 서부로 나눈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AD 19년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즉 백제와 고구려는 인접한 국가라는 의미이다. 고구려는 다뉴브강 위에 있었다. 따라서 낙랑군과 대방군을 제외한 일부 국경에서 바로 인접한 것이다. 

 

AD 25년 남옥저 구파해 일행이 귀순했다 기술된다. 즉 남옥저도 백제와 인접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남옥저 북옥저 지역이 스위스 북쪽 Augusta Raurica지역이라 추정했다. (본 블로그 글, '북옥저는 스위스 북쪽 Augusta Raurica에 있었다' 참조)

 

 

 

그러나 대방이 백제의 책계왕과 혼인관계를 맺고, 낙랑태수와 백제의 대결이 백제의 고이왕, 분서왕까지 지속되는 것을 보면, 낙랑군의 존재는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로마사에서는 낙랑군으로서 추정되는 유사한 시기의 대결 상대로는 Dacians의 일부라 인식되는 Carpi세력을 들 수 있다. Carpathian Mountains세력이라는 Carpi people은 낙랑군이라면 낙랑군의 지역이 보다 넓었다는 뜻이고, 이에 대해서는 더 연구가 필요하다. 이들은 또는 고구려에 통합된 낙랑국의 후손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보다 확실한 것은 추가 연구가 있어야 알 것 같다. 

 

이상으로 낙랑에 대한 고대사의 흔적을 바탕으로 한 추정을 마치고자 한다. 이후 (III)에서 서양사에 나타난 역사를 바탕으로 낙랑의 위치에 대한 검증을 하고자 한다. 

 

 

 

------------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 말갈 낙랑 관련 자료-----------

 

"2년 (BC 17) 봄 정월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말갈리 우리의 북부국경에 인접하여 있으며, 그곳 사람들이 용기가 있고, 거짓이 많으니 우리는 병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저장하여 그들을 방비할 계책을 세워야 한다" 하였다.

 

3년 (BC 16) 가을 9월 말갈이 북부 국경을 침범하므로 왕이 강력한 군사를 거느리고 급격히 쳐서 그를 크게 패하게 하여 저들이 살아 돌아간 자가 열에 한둘에 지나지 않았다.

 

8년 (BC 11) 봄2월 말갈적군 3천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더니 열흘이 지나 적들이 군량이 떨어져 돌아갈 때 왕이 정예한 군사를 뽑아 대부현까지 쫓아가 단번에 싸워 이기고 적병 5백여명을 죽이고 사로 잡았다. 

 

가을 7월 마수성을 구축하고 병산에 목책을 세웠더니 낙랑태수가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난 날 서로 예방을 하고 우호관계를 맺어 한 집안과 같이 생각했는데, 이제 우리의 영역에 접근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는 것은 혹시 우리의 땅을 차츰차츰 침식할 심사가 아닌가? 옛날 우호의 정을 변하지 않으려거든 성을 허물고 목책을 뜯어 버려 즉시 억측과 의심을 없게 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바탕 싸워서 승부를 정할 수밖에 없다." 하였다. 이에 왕이 답하여 말하기를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고금의 떳떳한 일인데, 어찌 이것으로서 화친과 우호에 변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신이 의심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일 당신이 강한 것을 믿고 군사를 발동한다면 우리나라도 또한 그에 대응이 있을 뿐이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사이에 화친이 끊어졌다. 

 

10년 (BC 9) 여름 4월 낙랑이 말갈로 하여금 병산의 목책을 덮쳐 파괴하고 1백여명을 죽이고 납치하여 갔다.

 

가을 7월 독산과 구천 두곳에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부터 오는 길을 차단하였다. 

 

13년 (BC 6) 왕의 어머니가 죽으니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강역을 침범하기 때문에 평안한 날이 적다.  더구나 요즈음 요상한 일이 자주 나타나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시어 사태가 불안하니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하였다. 

 

가을 7월 한산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리고 나라의 영역을 확정하니,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까지요, 서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까지로 하였다. 

 

9월 성을 쌓고 궁궐을 세웠다. 

 

14년 (BC 5)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2월 왕이 부락으로 순회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농사를 적극 장려하였다. 

 

가을 7월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고 그곳에 한성 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15년(BC 4) 봄 정월에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 

 

17년 (BC 2) 봄에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살랐다. 

 

여름 4월 사당을 세우고 왕의 어머니에게 제사를 지냈다. 

 

18년 (BC 1) 겨울 10월 말갈이 습격하여 오므로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에서 그들을 맞받아 싸워 추장 소모를 사로 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전부 산채로 묻어 버렸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인용출처 : 윤여동설-삼국사기 백제본기 속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는 온조왕의 말은 잘못된 기록 - 최초주장, 윤여동, 역사천재들의 모임, 다음블로그)

 

十八年冬十一月 낙랑을 공격하기 위해 구곡까지 행차하다 (BC 1)
二十年春二月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다 (AD 2)
二十二年秋八月 석두와 고목 2성을 쌓다 (AD 4)
二十二年秋九月 말갈을 격파하다 (AD 4)
二十四年秋七月 웅천책을 세우자 마한이 항의하다(AD 6)
二十五年春二月 한성의 민가에서 이 를 낳다 (AD 7)
二十六年秋七月 마한 병합을 계획하다 (AD 8)
二十六年冬十月 마한을 기습하여 합병하다 (AD 8)
二十七年夏四月 마한을 멸망시키다 (AD 9)
二十七年秋七月 대두 산성을 쌓다 (AD 9)
二十八年春二月 다루를 태자에 임명하고 군사에 관한 일을 맡기다 (AD 10)
二十八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AD 10)
三十一年春一月 민가를 남부와 북부로 편성하다 (AD 13)
三十一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AD 13)
三十一年夏五月 지진이 일어나다 (AD 13)
三十一年夏六月 지진이 일어나다 (AD 13)
三十三年 큰 가뭄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려 도둑이 생기다 (AD 15)
三十三年秋八月 동부와 서부를 설치하다 (AD 15)
三十四年冬十月 마한 잔당의 반란을 진압하다 (AD 16)
三十六年秋七月 탕정성을 축조하고 주민을 이주시키다 (AD 18)
三十六年秋八月 원산과 금현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다 (AD 18)
三十七年春三月 달걀만한 우박이 내리다 (AD 19)
三十七年夏四月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사람이 많이 나타나다 (AD 19)
三十八年春二月 지방을 순방하다 (AD 20)
三十八年春三月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백성의 부역을 줄이다 (AD 20)
三十八年冬十月 천지신명에 제사지내다 (AD 20)
四十年秋九月 말갈이 술천성을 공격하다 (AD 22)
四十年冬十一月 말갈이 부현성을 습격하다 (AD 22)
四十一年春一月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임명하다 (AD 23)
四十一年春二月 위례성을 수리하다 (AD 23)
四十三年秋八月 아산벌에서 사냥하다 (AD 25)
四十三年秋九月 기러기가 왕궁에 모여 들다 (AD 25)
四十三年冬十月 남옥저 구파해 일행이 귀순하다 (AD 25)
四十五年 큰 가뭄이 들어 초목이 마르다 (AD 27)
四十五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서 백성의 가옥이 손상되다 (AD 27)
四十六年春二月 온조왕이 죽다 (AD 28)

 

(자료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 인용출처 : 온조왕,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