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고 자료를 바탕으로 한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 위치 추정

2021. 9. 3. 09:39한민족 역사/고구려

백제의 한성 추정에 앞서, 고구려의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의 위치를 추정하고자 한다.  

백제의 근초고왕, 근구수왕은 평양성을 공격했고, 근초고왕은 평양성 남쪽에 (북)한성을 수도로 했다는 주장도 있고, 백제 성왕은, 일본서기에 의하면,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여 신라 진흥왕이 차지하고 신주를 세웠다 했기 때문이다. 즉 평양성의 위치가 정확하면, 한성의 위치에 대한 실마리가 더 용이하게 풀리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역사에서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의 위치를 추정하기 앞서, 발해고의 지리지 자료를 바탕으로 먼저 추정하고자 한다. 발해고는 1784년 정조 6년에 유득공에 의해 쓰여진 역사 지리지이다. 비록 조선 후기의 역사서라 천년 전의 고구려와 발해 시대의 위치를 정확히 추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 가지만, 발해고에서는 중국의 역사 지리서를 인용하여 살폈기 때문에, 이 인용된 자료는 보다 그 시절의 사실에 가까운 기술이라 믿기 때문이다. 

 

발해는 서경, 동경, 상경, 중경, 남경의 5경을 두었다. 필자는 이들 오경이 발해 영역의 서부, 동부, 북부, 중부, 남부를 대표하는 도시로 판단한다. 따라서 이들 위치 추정은 발해의 영역을 대강 그려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따라서 발해고의 지리고 중 서경압록부, 동경용원부, 상경용천부, 중경현덕부, 남경남해부의 기록을 위주로 살펴 보고자 한다. 발해와 신라의 경계에 대한 자료는 통일 신라의 위치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니 이 또한 살펴 보고자 한다. 필자가 참고한 발해고 지리고의 자료는 시중에 영인본이 판매되고 있으나, 네이버 블로거 '청천'(ID : soungsik)님이 이들을 잘 정리하고 번역을 해 놓았기 때문에 이 자료를 참조했다. 한문은 지리명에 한자로 추가하였고, 한문 원문 글은 생략했다. 필자가 필자의 네이버 볼로그, 카테고리, 발해 편에 청천님의 상기 6개 자료를 공유 글로 올려 놓았기 때문에, 한문 원문을 보고자 하시는 분들은 참조 하시기 바란다.   

 

먼저 서경 압록부 자료를 살펴 보고자 한다.  이 부문은 옛 고구려 지역인 국내성, 환도성의 수도 위치를 말하고 있다. 동시에 이 지역은 발해의 서쪽 경계를 일컫는데, 서경 압록부이므로 압록강 주위를 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 왕 중에 고국천왕, 고국원왕, 고국양왕 등 고국(故國) 이름이 들어 가는 왕의 재위 시기에 거론되는 지역이기도 한다. 

 

필자는 압록강을 남으로 흘러 지중해로 들어 가는 프랑스의 Rhone river (론강)으로 추정했다. (본 블로그 글, '프랑스 론강이 요수라고 주장하는 근거' 등 여러 글 참조) 한반도의 압록강은 서남쪽으로 흐른다. 따라서 남쪽으로 흐른다는 요수가 아니다. 중공 지역의 요하를 흔히 요수로 말하나, 주위 지형(낙랑, 갈석산, 백두산 등)과의 연관 관계상 요수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일부 재야 사학자들은 보다 서쪽의 지형에서 압록수인 요수를 언급하나, 압록수는 바다로 들어 간다 분명히 언급되었다. 이곳에는 바다가 존재하지 않는다. 강과 바다는 분명히 다르다. 강이 바다라고 강변할 수는 없다. 그리고 북위 효문제가 492년 항복한 토욕혼의 왕(모용부연수)에게 '서해군(西海郡) 개국공 토욕혼왕'이란 작위를 수여 했다. (본 블로그 글, '토욕혼과 토번은 현재의 티베트가 아닌 서유럽 대서양변에 있었다', '토욕혼은 포루투갈에 있었던 Suebi왕국이다'  참조). 지금의 티베트 지역 등 중공 땅의 서부에는 서해 바다가 없다. 따라서 이들 주장은 이러한 결정적 흠결 조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한 때, 우랄강이나, 돈강이나 볼가강이 압록수인 요수가 아닌가 했다. 그러나  이들도 요서, 요동과 관련한 지형 조건, 동서로 천리에 걸쳐 있는 백두산의 조건, 갈석산과 창해의 조건, 상기의 토욕혼의 서해 조건 등에 부합하지 않는다. 인도 서북부의 인더스강도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일본학자가 주장한다는 유프라테스강도 마찬가지이다. 론강은 지중해에서 유일하게 남으로 흐르는 강이다. 이 글은 압록수에 대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로 언급하고자 한다. 즉 필자의 론강이 요수라는 주장에 바탕하여, 어떤 의미에서는 필자의 주장을 검증하는 단계가 되기도 하는 분석이기도 하지만, 고구려의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의 위치를 추정하고자 한다.

 

 

1) 서경 압록부 내용

 

서경압록부는 <신당서 발해전>에 "옛고구려 지역"이라고 했다. 

 

<요사 지리지>에 "녹주(淥州) 압록군은 본래 고구려 옛 수도 (국내성)인데, 발해가 서경 압록부로 삼았다. 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豊州), 정주(正州) 등 4주의 행정을 감독하였다." 고 하고, 또 "환주(桓州)는 고구려 도성으로, 고구려 왕이 이곳에 궁궐을 세우니 나라 사람들이 '새 수도'(환도성)라고 일컬었다"고 하였다.  

 

<신당서 지리지>에 "압록강 하구에서 배를 타고 100여리를 가다가, 다시 작은 배로 갈아타고 동북쪽으로 30리를 거슬러 올라가 박작구에 도착하면 발해의 국경에 접한다. 다시 500리를 거슬러 올라 가면 환도현성에 도착하니, 옛 고구려의 수도이다. 다시 동북쪽으로 2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에 도착한다. 다시 육로로 400리를 가면 현주(顯州)에 도착하니, 천보(742-756)연간에 발해왕이 도읍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청일통지>에 "녹주성은 조선 평양 서쪽 경계에 있다"고 하였다. 살펴 보건데, '옛 수도'란 유리왕의 국내성으로, 발해가 서경을 설치하였던 곳이다. '새 수도'란 산상왕의 환도성으로 발해가 환주를 설치 하였던 곳이다. ..

 

박작구란 요나라의 갈소관이며, 금나라의 파속로이며, 원나라의 파사부로이며, 지금 연경으로 갈 때의 의주나루이다. ... <요사 지리지>에 "환주는 녹주의 서남쪽 200리에 있다"고 하였고, <통전>에 "압록강은 말갈지역의 백산에서 나와 국내성 남쪽을 지난다"고 하였다. 또 이적의 상주문에도 "국내성이 압록강 이북에 있다"고 하였다.

 

(자료 : 발해고 제3권 지리고 15부 지리 고증 (원 저자 : 유득공(1784, 정조 8년)))

(인용 출처 : 청천님 (번역자) 블로그,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발해, 공유글 참조)

 

 

상기 서경 압록부 내용 중에, <요사 지리지> 내용이 눈에 띤다. 

 

"녹주(淥州) 압록군은 본래 고구려 옛 수도 (국내성)인데, 발해가 서경 압록부로 삼았다. 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豊州), 정주(正州) 등 4주의 행정을 감독하였다." 고 하고, 또 "환주(桓州)는 고구려 도성으로, 고구려 왕이 이곳에 궁궐을 세우니 나라 사람들이 '새 수도'(환도성)라고 일컬었다" 

 

즉 국내성과 환도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국내성은 녹주 압록군에 있으며,곧 발해 서경압록부가 된다. 녹주가 관할하는 4개주의 중의 하나인 환주에  환도성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요사 지리지에 환주는 녹주의 서남쪽 200리에 있다고 했다. 즉 국내성의 서남쪽 200리에 환도성이 있다는 것이다. 

 

신당 지리지에서는 압록강 하구에서 환도성에 가려면, 북으로 100리, 다시 동북쪽으로 30리 (박작구 = 의주나루터), 그리고 다시 500리를 거슬러 올라가야 환도성에 달한다 했다. 그리고 다시 동북쪽으로 200리를 가야 국내성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통전>에 의하면 "압록강은 말갈지역의 백산을 지나 국내성의 남쪽을 지난다"고 하였다.  필자는 말갈지역의 백산을 몽블랑 산으로 추정했다. (본 볼로그 글, '동서로 천리나 뻗어 있는 백두산은 알프스산맥에 있다' 참조)

 

론강의 하구에서 이러한 계산으로 (10리=4km) 추정하면 환도성은 쥬네브(Geneve, Geneva)정도로 추정된다. 제네바는 기원전 121년 로마에 의해 정복될 때, Helvetii 족에 대한 방어를 위해 요새화 되었다 한다.  제네바는 주위가 3개의 산맥에 의해 둘러 쌓여 있다. 제네바 유적지에 극동아시아 예술박물관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청동기시대의 거주지, 켈트, 로마의 고대도시가 있다. (아래 자료 참조)

 

"Geneva was an Allobrogian border town, fortified against the Helvetii tribe,[24] when the Romans took it in 121 BC... 

Geneva is located at 46°12' North, 6°09' East, at the south-western end of Lake Geneva, where the Rhône flows out. It is surrounded by three mountain chains, each belonging to the Jura: the Jura main range lies north-westward, the Vuache southward, and the Salève south-eastward.... 

 

Archeological sites: Foundation Baur and Museum of the arts d'Extrême-Orient, Parc et campagne de la Grange and Library (neolithic shore settlement/Roman villa), Bronze Age shore settlement of Plonjon, Temple de la Madeleine archeological site, Temple Saint-Gervais archeological site, Old City with CelticRoman and medieval villages..." 

 

(source : Geneva,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Rhone river, 펌글 참조) 

 

국내성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200리를 가면 그리고 론강(압록수)의 위에 있는 도시를 찾으면, Fribourg, Bern 정도의 위치에 달한다. Bern은 곰(Bear)에서 유래된 도시 이름이라 한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부터 요새화 되었다 한다. 캐사르에 의해 언급된 Helvetti족(켈트족, 골족)의 12개 요새도시 중의 하나이다. 라인강의 우측 지류 중 하나인 Aare river가 지난다. 

 

"According to the local legend, based on folk etymologyBerchtold V, Duke of Zähringen, the founder of the city of Bern, vowed to name the city after the first animal he met on the hunt, and this turned out to be a bear. ... 

In antiquity, a Celtic oppidum stood on the Engehalbinsel (peninsula) north of Bern, fortified since the second century BC (late La Tène period), thought to be one of the 12 oppida of the Helvetii mentioned by Caesar. ... 

 

Bern lies on the Swiss plateau in the canton of Bern, slightly west of the centre of Switzerland and 20 km (12 mi) north of the Bernese Alps. The countryside around Bern was formed by glaciers during the most recent ice age. The two mountains closest to Bern are Gurten with a height of 864 m (2,835 ft) and Bantiger with a height of 947 m (3,107 ft)." 

 

(source : Bern,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Rhone river, 펌글 참조)

 

 

 Rhone river지도 (source : Wikipedia)

 

 

상기 지도를 보면 Bern아래 Fribourg 도시가 보인다. Fribourg는 과거 역사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신석기 시대부터의 정착지였던 점, Sarine 계곡의 바위 언덕에 고대 도시가 위치하여 방어하기 쉬운 지형 조건, 그리고 바로 강이 교차하는 지점 등, 수도로서의 국내성이 갖추었을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Perolles 근처의 평원에는 성벽을 쌓은 흔적이 발견된다. 이 도시의 문양이 성곽이다. 

 

"It is located on both sides of the river Saane/Sarine, on the Swiss Plateau, and is a major economic, administrative and educational center on the cultural border between German and French Switzerland (Romandy). Its Old City, one of the best-maintained in Switzerland, sits on a small rocky hill above the valley of the Sarine..... 

 

The region around Fribourg has been settled since the Neolithic period, although few remains have been found. These include some flint tools found near Bourguillon, as well as a stone hatchet and bronze tools. A river crossing was located in the area during the Roman Era. The main activity in the Swiss plateau bypassed the area to the north, however, and was instead centered around the valley of the river Broye and Aventicum. Therefore, only a few remains from the Roman era have been found in Fribourg. These include the traces of a wall foundation on the plains near Pérolles.[3]..... 

 

The town was founded in 1157 by Berthold IV, Duke of Zähringen. Its name is derived from German frei (free) and Burg (fort). Its most ancient part is conveniently located on a former peninsula of the river Sarine, protected on three sides by steep cliffs. The easily defended city helped the Dukes of Zähringen to strengthen and extend their power in the Swiss plateau in the area between the Aare and La Sarine.[3] .....  

 

Topography 

 

Fribourg has an elevation of 581 metres (1,906 ft) (in the Old City), and is situated 28 kilometres (17 mi) southwest of Bern. It is located on the Swiss plateau, and extends on both sides of the Sarine, which, in the vicinity of Fribourg, has cut deeply into the molasse The Old City is located on a hill, only about 100 metres (330 ft) wide, which rises about 40 metres (130 ft) above the valley floor. Most quarters of the city are located on the High Plateau and the surrounding hills, which have an average elevation of 620 metres (2,030 ft). The valley floor is only settled in the area immediately around the Old City." 

 

(source : Fribourg,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Rhone rver, 펌글 참조)

 Coat of Arms of Fribourg (source : Wikipedia)

 

Fribourg Tower of Bouguillon (source : Wikipedia)

 

 Valley of the Sarine in Fribourg (source ; Wikipedia)

 

 

 

<청일통지>에 "녹주성은 조선 평양 서쪽 경계에 있다"고 했다. 즉 국내성 동쪽에 평양성이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국내성은 Bern 또는 Fribourg로 추정했으므로 평양성도 추정해 보자. 상기 론강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른쪽에 스위스의 수도 Zurich가 있다. Zurich에 대한 자료를 보자.

 

"Settlements of the Neolithic and Bronze Age were found around Lake Zürich. Traces of pre-Roman Celtic, La Tène settlements were discovered near the Lindenhof, a morainic hill dominating the SE - NW waterway constituted by Lake Zurich and the river Limmat.[18]
 

In Roman times, during the conquest of the alpine region in 15 BC, the Romans built a castellum on the Lindenhof.[18] Later here was erected Turicum (a toponym of clear Celtic origin), a tax-collecting point for goods trafficked data-on the Limmat, which constituted part of the border between Gallia Belgica (from AD 90 Germania Superior) and Raetia: this customs point developed later into a vicus.[18]

 

After Emperor Constantine's reforms in AD 318, the border between Gaul and Italy (two of the four praetorian prefectures of the Roman Empire) was located east of Turicum, crossing the river Linth between Lake Walen and Lake Zürich, where a castle and garrison looked over Turicum's safety. The earliest written record of the town dates from the 2nd century, with a tombstone referring to it as to the Statio Turicensis Quadragesima Galliarum ("Zürich post for collecting the 2.5% value tax of the Galliae"), discovered at the Lindenhof.[18]......  

 

Permanently settled for over 2,000 years, Zürich was founded by the Romans, who, in 15 BC, called it Turicum. However, early settlements have been found dating back more than 6,400 years (although this data-only indicates human presence in the area and not the presence of a town that early).[8] ..... 

 

Archaeological findings A female who died in about 200 B.C found buried in a carved tree trunk during a construction project at the Kern school complex in March 2017 in Aussersihl. Archaeologists revealed that she was approximately 40 years old when she died and likely carried out little physical labor when she was alive. A sheepskin coat, a belt chain, a fancy wool dress, a scarf and a pendant made of glass and amber beads were also discovered with the woman.[23][24][25][26] " 

 

(source : Zurich,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Rhone river, 펌글 참조) 

 

즉 주리히는 2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6400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기록이다. 쥬리히 호수 근처에서 신석기 청동기시대 (La Tene culture, 켈트족) 정착 흔적이 발견되었다. BC 15년 로마는 이 지역을 정복하고, Lindenhof에 요새를 구축했다. 그리고 그후 계속하여 조세 징수지로서 역할을 했다 한다.

 

 

 Zurich (source : Wikipedia)

 

 

아래 old city인 Lindenhof 자료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기술된다.

 

쥬리히 호수 바닥에서 신석기와 청동기시대 (4500 - 850 BC) 정착 흔적이 발견되었다. Lindenhof는 물(water)로 광범위하게 둘러 쌓였다. 그래서 일찍이 요새화된 정착지로 최적의 위치에 있었다.

 

청동기 중기시대(BC 1500)의 유물이 Limmat river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Limmat river는 라인강의 우측 지류로서 쥬리히에 접하고 있다. (아래 Aare river basin 지도 참조)  기원전 1세기의 켈트족 요새유적이 1989-2007년 기간동안 발견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At the flat shore of Lake Zurich were Neolithic and Bronze Age (4500 to 850 BC) lakeside settlements, such as Kleiner Hafner and Grosser Hafner (both small former islands west of Sechseläutenplatz, near Bauschänzli at the StadthausquaiAlpenquai at the Bürkliplatz square and Lindenhof). Lindenhof was largely surrounded by water: until the early medieval area, neighboring Münsterhof (Fraumünster abbey square) was a swampy hollow flooded by the Sihl. Therefore, Lindenhof was an optimal location for early fortified settlements. 


Middle bronze age (1500 BC) artefacts were found near the Limmat (Schipfe).[1][2] Archaeologists found remains of a Celtic Oppidum from the 1st century BC (La Tène culture), whose remains were found in archaeological campaigns in the years 1989, 1997, 2004 and 2007 on Lindenhof and Rennweg.[3][4]" 

 

(source : Lindenhof,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Rhone river, 펌글 참조)

 

Celtic, Roman and medieval remains at Lindenhofkeller (source : Wikipedia)

 

Turicum이라 불리기도 한 이 지역은, 로마 황제 Valentinian I (364-375)에 의해 언덕 위에 citadel이 건축되었다. 이는 북쪽의 Allemanni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4500 제곱미터에 달하고 2미터 두께의 성벽이었는데, 감시탑이 10개 있었다. (아래 자료 참조). 아래 그림을 보면 Lindenhof가 물로 방어벽을 만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Constantinople 같은 모습이다.

 

"In 15 BC, Augustus's stepsons Drusus and Tiberius integrated the territory on the left side of Lake Zurich into the Roman provinces Raetia and Germania Superior. Several stone buildings from the Roman period were located on and around the hill. It was part of the small vicus Turicum, located on both sides of the Limmat and connected by a Roman bridge located near the present Rathausbrücke. 

 

Turicum, Zürich's Roman name and possibly also its Celtic name, is engraved on a 2nd-century tombstone of a little boy. It was found on May 15, 1747, and it refers to the Roman STA(tio) TUR(i)CEN(sis). The tombstone is located in the Swiss National Museum; a copy is integrated in the Lindenhof wall at Pfalzgasse, leading to St. Peter church. 

 

 

Using the topography, the Roman military built a citadel on top of the hill in the years of the Roman emperor Valentinian I (364–375), to defend migrations from the North by the Alamanni. It was 4500 square meters large, and it was fitted with 10 towers and two meter wide walls.[5]" 

 

(source : Lindenhof,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Rhone river, 펌글 참조)

 

 

1444년  쥬리히 전쟁의 모습을 그린 그림 (1514년 Werner Schodoler) (source : Wikipedia)

 

그런데 이러한 성벽의 유적들은 Lindenhof 주위 개인집과 1218년 파괴된 왕궁에 포함되었다. 로마성곽 유적들은, 중세 Carolingian, 그후 Ottonian Pfalz (왕궁)(1054)이 다시 그위에 건축되기도 했는데, 이 왕궁은 요새화된 언덕 동쪽에 chapel과 함께 지어진 긴 건물이다. 1172년에 마지막으로 언급되었고, 이용되지 않다가, 나중에는 (1218년) Lindenhof city walls 건축에 이용되고, 지역 개인집들에 일부 포함되었다 한다. 1384년 chapel이 언급되었는데, 지금 흔적은 없다. (아래 자료 참조)

 

"Medieval castle and graveyard During the middle ages, the hilltop leveled fort became the retaining wall and gave the Lindenhof terrace a form similar to its current form. The remains of the Roman camp were used as the center of the later fortification of the historical center of Zürich. Significant parts of the lime mortar and ancient castle wall were integrated into the town houses around the Lindenhof and in a Kaiserpfalz (broken in 1218), which served as a place of festivities, including the engagement of the German emperor Henry IV with Bertha von Turin on Christmas in 1055.


The Roman castle's remains existed until the early medieval age: a Carolingian, later Ottonian Pfalz (1054) was built on its remains. This Kaiserpfalz was a long building with a chapel on the eastern side of the fortified hill; it is last mentioned in 1172, and it was derelict by 1218, when its remains were scavenged for construction of the city walls and stone masonry on private houses. In 1937, archaeologists found graves of late medieval children and adults that were oriented from the east to the west.

 

In the year 1384, a chapel on the Lindenhof was mentioned, but no remains have been found.[6] It is believed that the chapel was part of the processional axis WasserkircheGrossmünster and Fraumünster church processions that ended in 1524 or 1525 (Reformation in Zürich). These religious celebrations at Pentecost honored Zürich's Saints Felix and Regula and Exuperantius.[7]" 

 

(source : Lindenhof,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Rhone river, 펌글 참조)

 

 

즉 Lindenhof 고대 도시에는 요새 같은 성벽이 존재 했고, 청동기시대 유물도 나왔다 한다. 그리고 왕궁도 존재했다. chapel도 있었다는데, 고구려 장수왕 당시 지은 안학궁과 함께 지은 절인지도 모른다.

 

로마시대초기(BC 15)에 정복된 이 지역은 Valentinian I시기에 성을 쌓았다 했다. Valentinian I 재위시기(364-375)는 백제의 근초고왕 시기(346-375)와 겹친다. 초기 로마의 정복은 고구려의 그것으로 보이고, Valentinian I의 성곽 건축기록은 백제의 그것으로 판단된다. 즉 평양성의 가능성을 매우 진하게 나타내고 있다. 

 

아래 발해고 신라와 발해의 경계 자료에서 보듯이, <삼국사기>에서 당나라에 고구려가 멸망한 후 평양이 잡초가 무성한 곳으로 된 것을 궁예가 한탄했다 하는데, 그러한 모습을 여기서 보는 것 같다. 즉 쥬리히 Lindenhof 지역은 평양성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 쥬리히 지역은 그 주위에 남쪽은 알프스산맥, 론강계곡으로 싸여 있고, 북쪽은 라인강 계곡으로 싸여 있다. Limmat river (안민강?)가 바로 접하고 있다. 즉 수도의 조건인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chapel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장수왕 시절 지은 9개의 절인지도 모른다. 

 

또 하나 흥미있는 기록을 소개한다. 한 재야사학가가 평양이 윤몰되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발해 윤몰론). 그런데 이 <청일통지> 기록에서 평양이 섬에 있었고 대홍수를 두번 겪었다는 기록이다. 이곳에서 단군시절과 당나라 평양 점령 시절에 대홍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우연인지 아닌지 쥬리히의 고대도시 Lindenhof는 물로 둘러 싸인 섬이라 했다. 쥬리히 호수 바닥에서 고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유물이 나왔다 했다.  그리고 쥬리히에 접한 Limmat river에는 8개의 댐이 현재 있다. 모두 홍수를 막기 위한 조치라 판단된다.

 

 


"또한 평양(平壤)이란 지명중 '壤'字는 뻘을 뜻한 무괴유토(無塊柔土)라는 뜻이다.

 

평양은 뻘밭이 평원을 이루는 섬에 있었다는 말이다.

 

이곳이 결정적으로 물에 잠기게 된 첫번째 기록은 단군조선이 개국한 지 37년(甲辰年)이 되던 해에 일어났던 대홍수였고, 두번째 기록은 당나라가 평양성을 평정하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이후에 일어났다고 하는《대청일통지》의 기록이다.

 

이렇듯 고조선이 바다에 있었다는 중국측의 기록은《산해경》과

 

《고려도경》<대명구변만국인적노정전도>등에서도 볼 수 있다.

 

이곳을 곽박은 주석에서 낙랑군이라고 하였다."

 

[출처] 283. 패수(浿水) 경로의 변천과 발해윤몰론(淪沒論)|작성자 집쟁이

 

(자료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패수, 펌글 참조)

 

 

쥬리히를 지나는 Limmat river지류인 Sihl river에 대한 아래 기록은 Zurich가 홍수에 대한 염려가 매우 컸음을 알려 준다. 그래서 8개의 댐을 Limmat 강에 만든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상기 홍수가 있었다는 <청일통지>의 평양이야기와 매칭된다.

 

"The river flows through the Sihlsee some 50 kilometres (31 mi) upstream of Zürich city centre, and studies have shown that a failure of the dam could lead to an 8-metre (26 ft) high flood wave reaching the city within 2 hours. This threat is exacerbated by the fact that the river passes through Zürich Hauptbahnhof station in a tunnel that limits the river’s flow capacity, raising concerns about the capacity of the tunnel to deal with extreme flood events. This threat has led the City of Zürich to develop, publish and test evacuation plans for the affected areas of the city.[7][8][9] "

(source : Sihl (river),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Switzerland, 폄글 참조)

 

 

즉 쥬리히는 신석기, 청동기의 유물의 발견, 성벽과 왕궁과 chapel의 존재, 그리고 둘레가 물로 싸였다는 섬의 모습, 그리고 대홍수를 겪은 일화와 현재 홍수의 위험, 마지막으로 궁예가 말한 당나라에 멸망한 후 황폐해졌다는 모습을 닮은 잔재의 모습까지 모두 평양성을 말하고 있다.

 

 

Zurich근처의 Limmat river, Sihl river location (source : Wikipedia)

 

 

그런데 필자는 Sihl river의 자료를 보다가 우연히 아래와 같은 기록을 발견했다. Sihl 강의 아원은 Sylaha라 한다. 고대 유럽어 또는 켈트언어 Sil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aha는 고대 독일어로 흐르는 물을 말한다 한다. Sylaha, 발음 그대로 신라하(新羅河)이다. Sila는 발음 그대로 신라이다. 삼백강 선생이 중공 북부지역에서 조선하 지명을 발견해서 기뻤다는 심정과 같다. 일본사기에 백제 성왕이 평양과 한성을 버려 진흥왕이 거져 취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 평양이 진흥왕이 취한 평양인 것이다. 그래서 신라하란 명칭이 (위키에 의하면 1018년부터) Sihl river에 붙은 것이다. 쥬리히가 평양성일 수 있다는 또 하나의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Etymology

The first written reference to the name dates to 1018, in the form Sylaha.[3] The name may be of Old European or Celtic origin: *Sîla ("quiet watercourse", from a root *sîl = "to trickle, wet") > Romance Sila with the addition of the Old High German element aha "flowing water".[4]  "

 

(source : Sihl (river),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Switzerland, 펌글 참조)

 

 

 

왕험성인 평양성의 위치로서 또 하나의 가능성을 보자.

 

주리히에서 가까운 지역에 Liechtenstein이란 곳이 있다. 매우 험한 산속에 있는 곳이다. 이곳이 고대 단군시대의 왕험성이 있는 곳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리고 이 지역은 BC 5300년경 계곡에 농업 주거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BC 450년부터는 이태리 북부 Etruscan 문명과 그리스 문명과 연계가 있다 기술된다. 켈트족도 언급된다.  BC 58년 캐사르가 Bibracte 전투에서  알프스지역 부족을 정복하여 로마공화국지역으로 포함시켰다. BC 15년까지 Tiberius는 아우 Drusus와 함께 알프스 전지역을 정복했다. 이때 리히텐스타인도 로마의 Raetia지방에 포함되었다. 

 

리히텐스타인은 지역의 반이 산으로 되어 있다. 가장 높은 곳은 해발 2599미터이고 가장 낮은 곳도 해발 450미터이다. 2000m 이상의 산이 32개나 있다. 해발 700m의 Eschnerberg지역이 주요 거주지역이다. (아래 자료 참조)

 

 

"The oldest traces of human existence in the area of present-day Liechtenstein date back to the Middle Paleolithic era.[14] Neolithic farming settlements appeared in the valleys around 5300 BC. The Hallstatt and La Tène cultures flourished during the late Iron Age, from around 450 BC—possibly under some influence of both the Greek and Etruscan civilisations. One of the most important tribal groups in the Alpine region were the Helvetii. In 58 BC, at the Battle of BibracteJulius Caesar defeated the Alpine tribes, thereby bringing the region under close control of the Roman Republic. By 15 BC, Tiberius — later the second Roman emperor — with his brother, Drusus, conquered the entirety of the Alpine area. Liechtenstein then became integrated into the Roman province of Raetia.... 

 

About half of Liechtenstein's territory is mountainous.[46] Liechtenstein lies entirely in the Rhaetikon and is thus - depending on the classification of the Alps - assigned to the Eastern Alps (two-part division of the Alps) or the Central Alps (three-part division of the Alps).The highest point of Liechtenstein is the Vordere Grauspitz (Vordergrauspitz) with an altitude of 2599 m above sea level, while the lowest point is the Ruggeller Riet with an altitude of 430 m above sea level. In total, there are 32 mountains in Liechtenstein with an altitude of at least 2000 meters. The Falknishorn, at 2452 meters above sea level, is the fifth highest mountain in Liechtenstein and represents the southernmost point of the country. The Liechtenstein-Graubünden-Vorarlberg border triangle is the Naafkopf (2570 m above sea level).[46] 

 

In addition to the peaks of the Alpine chain,[47] which belong to the Limestone Alps, two inselbergs, Fläscherberg (1135 m a.s.l.) in the south and Eschnerberg (698 m a.s.l.) in the north, rise from the Rhine Valley and belong to the Helvetic cover or flysch zone of the Alps.[48] Eschnerberg represents an important settlement area in the Liechtenstein Unterland." 

 

(source : Liechtenstein,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Rhine river, 펌글 참조)

 

 

주리히나 리히텐스타인 모두 패수인 라인강과 압록수인 론강의 사이에 있다. 라인강의 우측 지류 중에는 Aare river가 있는데, 론강과 같이 푸른색의 강이다. (아래 그림 및 지도 참조) 이 강은 국내성으로 추정되는 Bern를 지난다. 그래서 이 지역이 압록부이고 녹주인가 보다. 그리고 이 강이 론강과 라인강을 거의 연결하는 것 같다. 강 이름도 Aare river로 압록의 앞발음과 일치한다. 또한 이 근처에 라인강의 우측 지류인 Aare river의 지류인 Sarine river가 있다. Fribourg를 지나는 Sarine강 주위에 험한 절벽이 보인다. (위의 그림 및 아래 지도 참조). 살수가 아닌가 한다. 즉 패수와 살수로 추정되는 강이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평양성이 이 근처에 있는 것이 가능하다. 평양성(平壤城)이 험한 지역인 왕험성이라 했으니, 고대시대의 왕험성이 리히텐스타인 지역이 아닐까 한다. 

 

Aare river at Bern (source : Wikipedia)

 

Aare river basin showing Aare river and Sarine (Saane) river (between Rhine and Rhone) (source : Wikipedia)

 

 

그렇다면 리히텐스타인 지역에 성곽의 흔적이 있는가? 방어하기 용이한 지역이므로 당연히 성곽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리히텐스타인 곳곳에 성이 있다. 그 중 특히 눈길을 끄는 Gutenberg castle과  Vaduz castle을 아래 소개한다. Vaduz castle은 이 지역 왕자가 거주했던 곳이라 한다. 성곽 모습이 예전의 고조선이나 고구려 성곽을 연상시킨다. 

 

Vaduz castle (source : Wikipedia)

 

 Vaduz castle (source : Wikipedia)

 

 Gutenberg Castle (source : Wikipedia)

 

 

 

자 이제 동경 용원부 자료로 넘어가 보자.

 

 

2) 동경 용원부(龍原府) 내용

 

<신당서 발해전>에 "옛 예맥지역"이라고 했다. <요사 지리지>에 "개주(開州) 진국군은 본래 예맥지역이다. 고구려가 경주(慶州)로 삼고, 발해가 동경 용원부로 삼았다."고 하였다. 

 

<청일통지>에 "개주성은 조선 함흥부 서북쪽에 있는데, 본래 예맥지역이다. 고구려가 경주를 설치하고 발해가 동경 용원부로 삼았다"라고 하였고, 또 "봉황성은 발해 용원부이며, 요나라 개주 진국군이었다"라고 하였으며, 또 "옛 개주성은 봉황성 동남쪽에 있다. 명나라 성화 (1465-1487) 연간에 조선에 간 사신이 돌아 오다가 봉황산 아래에서 노략질을 당했다. 조선이 옛 길 남쪽에 조공로를 다시 열어 줄 것을 주청하자, 이로 인하여 이 성을 쌓았다. 봉황성은 실제로 조선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

 

<신당서 발해전>에 "용원부는 또 책성부라고 하였다" 책성이라는 이름은 고구려에서 처음 등장하여 발해가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태조왕 46년(98) 3월에 동쪽으로 책성을 순행하였고, 50년(102) 8월에 사신을 보내 책성을 안무하였다. <위서 고구려전>에 "이오가 고구려왕이 거주하는 평양성에 이르러 그 나라의 사정을 살피며, '동쪽으로 책성에 이른다'라고 말했다"고 한 것이 이곳이다. .....

 

<신당서 발해전>에 또 "용원부는 동남쪽으로 바다에 가까우니, 일본으로 가는 길이다"라고 하였다.

 

(자료 : 발해고 제3권 지리고 15부 지리 고증 (원 저자 : 유득공(1784, 정조 8년)))

(인용 출처 : 청천님 (번역자) 블로그,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발해, 공유글 참조)

 

 

위의 자료에서 동경 용원부는 <신당서 발해전>에서 "옛 예맥지역"이라 하고, 또 "용원부는 동남쪽으로 바다와 가까우니 일본으로 가는 길이다"라고 했다.  발칸반도의 동부쪽을 연상케 한다.  

 

<청일통지>에서, 이 지역에 있는 "봉황성이 실제 조선의 동쪽에 있다"라고  했다. 위만조선도 이 지역까지 점하고 있었다. 

 

<신당서 발해전>에서 "용원부는 또 책성부"라 했다. 고구려부터 내려운 책성의 이름이 발해에 그대로 쓰였다 한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태조왕이 책성에 순행하였다 했다. <위서 고구려전>에 의하면 고구려가 동쪽으로 책성에 이른다 했다 한다.  즉 필자의 짐작대로 발칸반도 동쪽 해안이 고구려의 동해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책성은 이 발칸반도에 있는 것이 된다. 또한 발해도 동경 용원부인 이 지역까지 점한 것으로 판단된다. 

 

 

 

3) 상경 용천부(龍泉府) 자료

 

상경 용천부는 <신당서 발해전>에 "옛 숙신지역"이라 했다. Saxons이 있는 발틱해에 접한 북유럽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대명일통지>는 금나라의 수도가 발해의 상경이라 했다. 

 

또한 <청일통지>는 발해 상경은 영고탑 서남쪽 경계에 있다고 했다. 영고탑의 위치를 가늠케 한다.  

 

만주 길림 오라지역은 필자의 그동안 추정과 같이 북유럽에 있다고 추정된다. 

 

"<신당서 발해전>에 "옛 숙신 지역"이라고 하였다. 가탐은 "안동도호부에서 옛 개모성과 신성을 거치고, 다시 발해 장령부를 거쳐 1500리를 가면 발해 왕성에 도착한다. 성은 홀한해에 인접해 있고, 그 서남쪽 30리에 옛 숙신의 성이 있다. 그 북쪽으로 덕리진을 거쳐 남부 흑수말갈에 도착하는데 1000리나 걸린다"고 하였고, 또 "신주에서 육로로 400리 가면 현주에 도착한다. 다시 북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600리 가면 발해 왕성에 도착한다."고 하였다.

 

<대명일통지>에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발해 상경에 도읍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청일통지>에 "<성경통지>에는 '발해 상경이 오라 경내에 있다'고 하였지만, <신당서>를 고찰해보면 마땅히 영고탑 서남쪽 경계에 있다"고 하였다. 살펴 보건데 홀한해(忽汗海)는 지금의 호이합하(虎爾哈河)이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발해 상경에 도읍을 설치하였다'는 것은 회령부를 가리킨다.

 

<호종록>에 "사림 동남쪽 15리에 화용성이 있는데 금나라의 상경 회령부이다. 3개의 궁전터가 다 남아 있는데, 조각난 푸른 기와가 그 위에 바둑돌처럼 흩어져 있다. 성 서쪽에 마름과 수련이 물가에 가득하니 아득하게 뻗혀있어 그 끝을 알 수 없다. 물가 사이로 정자터가 있다. 사림에서 동쪽으로 80리 가면 영고탑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청일통지>에서 말한 '발해 상경은 영고탑 서남쪽 경계에 있다'라는 것이 확실하다. 대저 길림 오라와 영고탑지역은 동북의 오지인데도 산천의 이정과 수도의 연혁을 가탐이 능히 설명하였고, 청나라가 흥성한 이후 그 설이 특히 상세하다고 하겠다."

 

(자료 : 발해고 제3권 지리고 15부 지리 고증 (원 저자 : 유득공(1784, 정조 8년)))

(인용 출처 : 청천님 (번역자) 블로그,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발해, 공유글 참조)

 

 

4) 중경 현덕부 자료

 

<신당서 발해전>에 의하면 중경 현덕부도 옛 숙신지역이라 한다. 

 

고구려의 평양성에 당나라  고종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한다.  서안평이 압록강 하구에 있고, 안시성으로 판단되는 Anncy (프랑스)가 론강 지역에 있는 것을 보면, 안지역이 이 근처지역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평양성이 안동도호부가 되는 것이다. 과거 필자는 안지역이 흑해지역으로 판단했는데, 이는 훈족의 을딘(광개토왕 추정)이 흑해지역에 태어났다는 항가리 일부 민간자료를 신뢰했기 때문인데, 잘못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안지역이 론강 주위지역이 되면, 그동안 상나라, 하나라를 흑해 주위로 판단했는데, 론강 주위로 옮겨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짐작한 바와 같이, 중국의 고대사 역사는 프랑스지역 즉 론강의 서쪽지역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 평양성이 중경 현덕부라 한다. 또한 홀한주라 한다. 

 

필자는 서양사 자료가 흔히 말하는 부다페스트가 훈족의 새로운 수도였다고 하는 기술과 이 근처에서의 동로마의 고트족 전쟁을 고려하여, 항가리의 부다페스트가 평양성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지금은 판단을 달리 한다. 즉 평양성은 왕험성이며, 알프스산맥 북쪽지역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위의 서경압록부 자료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주리히 또는 리히텐스타인지역으로 판단된다. 

 

<청일통지>에서 이곳은 길림 오라성 동남쪽에 있다고 했다. 즉 길림 오라성은 평양성 서북쪽에 있는 것이다. 

 

요사에서 말하는 요양지역 즉 요양성이 또한 평양성이라 했다. 

 

 

"<신당서 발해전>에 "옛 숙신지역"이라고 하였다. 

 

<요사 지리지>에 "동경 요양부는 본래 조선지역이다. 진나라가 고구려를 함락하였다. 원위 태무제가 사신을 보내 고구려왕이 사는 평양성에 도착한 적이 있었다. 당나라 고종이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는데, 나중에 발해 대씨가 차지하였다. 중종은 그가 도읍한 곳에 홀한주(忽汗州)라는 이름을 내렸으니, 바로 옛 평양성이며 중경  현덕부"라고 불렀다.

 

<청일통지>에 "옛 현덕부는 길림 오라성 동남쪽에 있다"고 하였고, 또 "옛 요양성은 지금 요양주의 치소이다. 의심컨데 당나라 중엽에 안동도호부가 폐지된 후 발해가 이곳에 성을 두고 요양이라고 부른 것은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사 본기>를 살펴 보면, 태조 3년(909)에 요동에 행차하였다. 신책 3년(918)에 옛 요양성에 행차하였다. 4년(919)에 동평부(東平府)을 세웠다. 천현 원년(926)에 비로소 발해 부여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에 다시 진격하여 홀한성을 포위하였고 대인선을 항복시켰고 동란국을 설치하였다. 태종 3년(928)에 동란국 주민을 동평부로 옮겼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발해가 아직 평정되기 전에 요양지역이 일찍이 거란에 편입되었던 것을 뜻한다. 처음에는 요동이라 부르고 다시 요양이라 불렀던 것은 아마도 요나라 때 명명한 것이지, 발해로 인한 것은 아니다."

 

(자료 : 발해고 제3권 지리고 15부 지리 고증 (원 저자 : 유득공(1784, 정조 8년)))

(인용 출처: 청천님 (번역자) 블로그,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발해, 공유글 참조)

 

 

5) 남경 남해부 기록 

 

발해의 남경 남해부는 <신당서 발해전>에 의하면 옛 옥저지역이라 했다. 필자는 고주몽이 정복한 행안국이 옥저지역이며 오스트리아의 Augusta Raurica지역이라 추정했다. 여기서 남쪽은 아드리아해에 닿는다.  그리고 필자는 고구려의 개마대산은 항가리의 Carpathian mountains에 있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여기서 동쪽에 있는 동옥저는 동예의 북쪽에 있으며, 발칸반도 동북쪽에 있었다고 추정했다. 

 

한나라때 개마가 당나라의 개모라고 <청일통지>에서 말하고, 청나라의 개평현이라 하니, 당과 청이 모두 이 지역까지 점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삼국지 위지>에 "한무제 BC 109년에 옥저성을 현도군으로 삼았다"고 했으니, 초기 현도성의 위치를 가늠하게 한다. 

 

남해라는 명칭은 고구려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여, <삼국사기>에 태조왕 62년(114년)에 남해를 순수하였다 했으니, 고구려 태조왕 시절 이미 아드리아해에 접했음을 말한다. 고주몽이 행안국을 정벌한 곳이 이 근처라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고구려 문자왕이 동부여를 접수하고 남해에 제사를 지냈다 하는 남해가 이곳 아드리아해라고 추정했다. 즉 동부여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신당서 발해전>에 "옛 옥저지역"이라고 하였다.

 

<요사 지리지>에 "해주 남해군은 본래 옥저국 지역이다. 고구려가 사비성으로 삼았고, 발해가 남경 남해부라 불렀다"고 하였다. 

 

<청일통지>에 "옛 해주성은 지금의 해성현 치소이다. <후한서>에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한나라 때의 개마는 바로 당나라의 개모이니, 지금의 개평현이다. 해성에서 서남쪽으로 개평 경계까지 80리이니, 해성은 바로 개평 경계에 있었다. 이 설명으로부터 한나라 때 옥저이며, 고구려 때 사비성이며, 발해 때 남해부이며, 요나라 때 해주였음을 알 수 있으니, 더 이상 의심할 나위가 없다"라고 하였다.   

 

<대명일통지>도 "개마대산은 조선에 있다"고 하였으니.....

 

또 <삼국지 위지>에 "한나라 무제 원봉 2년 (서기전 109)에 옥저성을 현도군으로 삼았다"고 하였으며.....

 

남해라는 명칭은 또한 고구려에서 처음 등장하니 <삼국사기>에 "태조왕 62년(114) 8월에 남해를 순수하였다"고 하였던 것이다."

 

(자료 : 발해고 제3권 지리고 15부 지리 고증 (원 저자 : 유득공(1784, 정조 8년)))

(인용 출처: 청천님 (번역자) 블로그,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발해, 공유글 참조)

 

 

6) 발해와 신라의 경계

 

<신당서 발해전>에 "발해는 남쪽으로 신라와 접했는데, 니하를 경계로 하였다"고 했다. 발해가 서경압록부에서  동경 용원부까지 즉 론강주이에서 발칸반도까지 있는 것을 고려하면, 니하는 다뉴브강이 된다. 니하는 진흙이 많은 강이라는 뜻이다. 라인강과 다뉴브강이 그러했다. 라인강은 Rin이라는 명칭이 있었다. 즉 니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가 니하에서 싸웠다는 지마이사금 시절 (125)과 자비마립간 시절(468) 기록을 두고 고민했는데, 다뉴브강을 니하로 칭하고 쓴 기록으로 보인다. 즉 신라는 다뉴브강을 두고 고구려 말갈과,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에는 발해와 남북으로 접한 것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말갈 발해조에서는 신라 제6대 지마왕 때 말갈병이 북경(北境)에 쳐들어와 대령책을 엄습하고 니하를 지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이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지마이사금 14년(125)조에도 “가을 7월에 또 (말갈이) 대령책(大嶺柵)을 습격하고 니하(泥河)를 지났으므로 왕이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백제가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도우니 적병이 듣고서 물러갔다.(秋七月 又襲大嶺柵 過於泥河 王移書百濟請救 百濟遣五將軍助之 賊聞而退)”라고 하여 비슷하게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니하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삼국유사 사전/박물지 시범개발), 2007., 한국콘텐츠진흥원)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 11년(468)조의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하였다. 가을 9월에 하슬라(何瑟羅) 사람으로서 15세 이상인 자를 징발하여 니하(泥河)에 성을 쌓았다.[니천(泥川)이라고도 한다](春 高句麗與靺鞨 襲北邊悉直城 秋九月 徵何瑟羅人年十五已上 築城於泥河[一名泥川])”는 기록과 『신당서(新唐書)』 권219 북적열전(北狄列傳)144 발해조의 “(발해의) 땅은 영주(營州)에서 동으로 2천리 밖에 위치하며, 남쪽은 신라와 맞닿아, 니하로 경계를 삼았다.(地直營州東二千里 南比新羅 以泥河爲境)”라는 기사가 중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니하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삼국유사 사전/박물지 시범개발), 2007., 한국콘텐츠진흥원)

 

 

<청일통지>에 "평양부는 한나라 낙랑군이 있던 곳이며, 고구려 장안성이 있던 곳인데 일명 왕험성이다"라고 했다.  즉 필자가 위에서 추정한 평양성이 스위스 쥬리히 근처이니, 이곳에 한나라 낙랑군이 있었고, 당나라 안동도호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낙랑군이 이태리 북부지역이라는 막연한 추정이었는데, 보다 구체적으로 추정된 셈이다. 따라서 고구려 미천왕이 313년 낙랑군을 정복하기 전에는 고구려에게 평양성이 언급될수 없던 것이다. 

 

궁예가 평양성을 정복하고, 압록부 남쪽 경계를 점한 것으로 나타난다. 

 

고려 때 서북쪽으로 안북부를 경계로 하고 동북쪽으로 도련포를 경계로 삼았다 했다. 도련포는 어디인지 아직 추정을 하지 못했으나, 광개토태왕비문에 나오는 도련이 아닌가 한다. 고려 성종때 압록강 이남지역을 차지했다 하니, 고려의 영역이 론강 이남지역에 이른 것을 말한다. 

 

조선의 세종대왕이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삼으며, 발해의 동경 용원부, 남경 남해부, 그리고 솔빈부를 포함했다 하는데, 두만강이 이들을 포함하려면 다뉴브강이 되어야 한다.   두만강과 압록강이 같은 수원이라 하면, 압록강이 론강이 될 때, 두만강은 라인강이나 포강이나 다뉴브강이 된다. 이미 앞에서 청나라의 개평현을 언급할 때, 청나라가 여기까지 영역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중국과 경계를 이룬 라인강은 아니다.  라인강이 두만강이라면 서경압록부, 중경현덕부, 상경용천부도 언급해야 했을 것이다. 포강이 두만강이 되면 동경 용원부 남경 남해부를 포함하지 못한다. 따라서 마지막 남은 다뉴브강이 두만강일 수 있다.  서쪽의 압록강이 론강이라면 동쪽의 두만강은 다뉴브강이 된다. 명나라와 경계는 잘 모르겠으나, 이후 청나라와의 백두산 정계비에 언급한 두만강이 다뉴브강일 수 있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풍흥을 죽인 북풍지역이 발해의 풍주라 한다. 그리고 <요사 지리지>는 정주는 비류왕 송양의 지역이라 한다.  필자는 송양의 비류국이 프랑스 Vienne지역이라 추정했다. 즉 발해는 압록강 서쪽으로 즉 요서지역으로 더 들어가 있었다는 추정이다. 

 

 

"<신당서 발해전>에 "발해는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는데, 이하(泥河)를 경계로 삼았다"고 하였고, <청일통지>에 "평양부는 한나라 낙랑군이 있던 곳이며, 고구려 장안성 (평원왕 (559-590)때 수도로 함(586))이 있던 곳인데, 일명 왕험성이다. 당나라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는데, 나중에 발해에 함락되었다"고 하였다. 

 

또 살펴 보건데, <삼국사기>에 "궁예가 '옛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래서 평양의 옛 수도는 모두 잡초가 무성하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참람되게 성책 원년 (905)으로 개원하고 패서지역을 13진으로 나누어 설치하니 평양성주 검용이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이때 대인선이 한창 거란과 대립하고 있었고, 압록부 남쪽 경계는 이미 궁예에게 빼앗겼다. 

 

발해가 망하자 고려가 흥하여 서북쪽으로 안북부를 경계로 삼고 동북쪽으로 도련포를 경계로 삼으니, 그 밖은 모두 여진의 구역이 되었다. 

 

성종(고려 6대왕)때 비로소 서여진을 내쫓아 압록강 이남지역을 차지하여 주진(州鎭)을 설치하였다. 

 

도련포 이북은 여진이 옛 기반에 의지하며 갈라전이라 칭하였으니, 금나라가 일어난 곳이다. 

 

원나라 초에 합란부를 설치하고 나아가 화주(和州)의 쌍성을 차지하여 고려와 여진의 경계지역이라고 불렀다.

 

말년이 되어 쌍성이 고려에 격파되고, 우리나라의 왕업이 북방에서 일어 났다. 

 

태조 강헌대왕(이성계)은 하늘이 내린 신이한 무력으로 강역을 회복하였다.

 

세종 장헌대왕은 장수에게 명하여 야인을 신속하게 토벌하여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삼았다. 그런 뒤에야 발해의 용원부, 남해부, 솔빈부 등지가 모두 판도내에 들어 오게 되었으니, 원대한 계획과 아름다운 공적이 전대를 훨씬 뛰어 넘었다. 

 

또 살펴 보건데, 압록부가 관할하는 신주, 환주, 풍주, 정주 등 4주 가운데 환주가 지금의 강계부이며, 신주가 지금의 패4군 지역임은 이미 <신당서 지리지>를 인용하여 밝혔는데, 풍주와 정주 2주의 연혁에 대해서도 증명할 만한 것이 있다. 

 

고구려가 풍흥을 북풍에서 죽이고 시호를 소성황제라 하였다. 지금 운산군(雲山郡)에 황제 무덤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풍흥이 묻힌 곳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운산이 바로 고구려의 북풍이며, 발해의 풍주이다. 

 

<요사 지리지>에 "정주는 본래 비류왕의 옛지역"이라고 하였고, 동국여지승람에 "성천부는 본래 비류왕 송양의 옛 수도"라고 하였으니, 성천부가 발해의 정주임은 분명하다. "

 

- 발해고 제3권 지리고 15부 지리 고증 (원 저자 : 유득공(1784, 정조 8년))

(인용 출처: 청천님 (번역자) 블로그,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발해, 공유글 참조)

 

 

이상으로 발해고를 참고로 한 지역 추정을 마치고자 한다. 고구려의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을 추정하는데 막대한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다. 국내성은 Bern 내지 Fribourg로 추정되고, 환도성은 Geneva정도로 추정된다. 평양성은 Zurich, Liechtenstein (왕험성에 보다 가까움)정도로 추정된다. 모두 스위스 지역에 있다. 발해고 지리지에서 언급한 자료는 평양성이 국내성의 동쪽에 있었음을 말한다. 한반도를 역사의 현장으로 주장하는 분들은 이를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압록강 변에 있는 국내성을 집안으로 본다면 평양성은 그 동쪽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위만조선이나, 고구려, 백제, 신라,발해, 고려, 조선 등 모두 남북보다 동서로 긴 영토를 가진 것으로 판단된다.

 

발해의 동경, 중경, 상경, 남경, 신라와 발해의 경계 자료 등을 바탕으로 그동안 미심쩍었던 많은 지역을 추정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동경에 대한 자료는 앞으로 추가 연구에 따라 판단을 달리 할 수 있음을 알려 드린다. 앞으로 통일신라, 당나라, 발해, 고려, 조선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 연구에서 그 지역 추정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