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이 정벌한 동부여는 어디인가?

2021. 4. 19. 01:18한민족 역사/고구려

그동안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동부여의 위치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동부여가 이태리 북부로 추정되는데, 이에 대한 확실한 논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두산 주위 10개국을 추정하면서 동부여의 위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북부여는 북유럽의 덴마크지역으로 추정되고, 졸본부여는 론강의 지류 Jabron강 지역으로 추정되었다.

 

이어 비류국, 해두국, 행안국, 북옥저가 추정되었다. 

 

특히 북옥저는 스위스 북쪽 Augusta Raurica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동부여는 3-4세기 연나라의 공격에 의해  북옥저 지역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서기 285년, 모용외의 침공에 1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 끌려갔으며 급기야 의려왕이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국력은 크게 쇠락한다. 이때 의려왕의 자제들은 두만강 일대의 북옥저로 도피하였는데, 그 중 의려왕의 아들 의라왕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서진의 수호를 받으며 돌아가 나라를 되찾았다[復]. 한편 선비족의 부여 침입은 향후 동북아의 정세에 큰 변화를 일으켰는데, 북옥저에 일부 무리가 남아 동부여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모용외의 침공에 부여는 국가 중심지를 기존의 지린성 일대에서 농안 지역으로 옮기나, 346년 결국 전연 모용황의 대공격에 부여왕 현을 포함해 무려 5만여 명이 끌려가면서 사실상 부여는 붕괴하게 된다. 이때 끌려간 인구가 5만 명이 아니라 5만 호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구당서를 신당서를 옮겨 적을 때 구(口)를 호로 잘못 적은 부분이 많던 것이 대표적인 예.

부여 멸망 이후 잔존 세력들이 고구려의 양해 아래 책성 일대에 모여 부여의 명맥을 이어가지만, 410년에 광개토대왕의 동부여 원정으로 이것마저 맥이 끊겼다. 후기 부여의 중심지였던 농안 지역에 남아 있던 마지막 부여 세력은 494년에 물길의 침입을 받고 완전히 멸망하여 494년 고구려 문자왕에 투항했다. 일부 세력은 북방으로 이주해 두막루를 형성한다."

 

(자료: 부여, 나무위키)

 

 

"그런데「광개토대왕릉비」를 통해서 적어도 5세기 초에 실재하는 동부여가 확인된다. 이때의 동부여는『삼국지(三國志)』동이전(東夷傳)에 보이는 북옥저(北沃沮)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는데 대체로 두만강 유역에 해당된다. 이것은『삼국지』관구검전(毌丘儉傳)에서 동천왕(東川王)이 위(魏)에게 쫓겨 피난했던 매구루(買溝婁)가 동옥저전(東沃沮傳)에서는 치구루(置溝婁)로 표기되었고, 이것이 바로 두만강 유역의 책성(柵城)이며「광개토대왕릉비」에서 전하는 동부여의 미구루(味仇婁)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3세기경 동부여는 두만강 유역에 있었다고 본다."

 

(자료 : 동부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즉 광개토태왕시 정벌한 동부여는 북옥저 지역인 스위스 북쪽 Augusta Raurica로 추정되는 것이다. 고서 원전에 두만강이 언급되었는지 의문이지만, 고서에 두만강이 언급되었다면 Po River의 하류로 생각할 수 있다. 

 

필자는 동부여의 수도 려성이 이태리 북부 Ravena가 아닌가 했다.  서로마제국의 Honorius 황제가 머문 곳이라 했다. 당시 보다 안전을 위해 밀라노에서 성곽이 있는 라벤나로 옮겼다 했다. 

 

 

광개토태왕의 동부여 정벌시 64성을 정벌했다 했다. 따라서 상당히 넓은 지역이라는 느낌이다. 

 

"고구려군이 동부여의 수도에 이르자 동부여가 항복했다. 이때에 동부여를 떠받드는 5압로(5부)가 고구려에 투항했고 64개의 성과 1400개의 마을을 공파했다."

 

(자료 : 광개토태왕/생애, 나무위키)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고트족의 Alaric I은 로마를 3차례 포위했다. 하지만, 실제 서로마의 황제는 밀라노, 라벤나에 거주했다. 이 점이 이해가 잘 안간다. 보통 왕성인 수도를 공격하여 왕이 항복하면 끝난다. 그런데 이상하게 서로마 황제는 라벤나에 거주하는데, 라벤나 공격은 언급이 없고, 로마를 포위하여 시민들이 기아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 하여, 항복했다고 한다. 뭔가 인위적인 거짓 설정의 냄새가 난다. 

 

 The city of Ravenna in the 4th century as shown on the Peutinger Map (source : Wikipedia)

 

 

아니면 라벤나, 밀라노지역의 세력과 로마의 세력은 별개의 것인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 라벤나, 밀라노 세력이 동부여로 추정된다. 로마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이 없다. 동부여를 정벌하고 64성을 취하였다고 하는 것을 고려 하면, 상당히 넓은 지역이라는 것이다. 즉 로마지역 등을 포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서로마가 동부여라는 이야기가 된다. 아니면 동부여는 이태리 북부지역에서 스위스지역 등 보다 북쪽을 포함한 국가였는지도 모른다. 동부여는 전연, 후연 등과도 전쟁을 하였던 만큼 이렇게 추정할 수 있다. 

 

아래 자치통감 자료에서 부여는 녹산에 살았는데, 백제의 침입을 받아 연나라 가까이 살게 되었으며, 연나라로부터 침략을 받아 5만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즉 북옥저 지역으로 이동한 동부여가 연나라와 백제로부터 가깝다는 이야기이다. (한반도 역사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지역설정이다.)

 

필자는 백제를 발칸반도 동로마지역, 연나라를 독일이나 프랑스 지역으로 보고 있다. 광개토태왕의 후연과의 싸움도 이 지역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동부여 밑에 백제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경우 로마시 지역은 백제가 된다. 즉 서로마 일부도 백제라는 가정이다.

 

그러나 인도 라마야나 설화에 로마와 라벤나가 싸우는 설화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라마를 라마-신라로 설정하고 숭배한다고 했다. 즉 라마, 로마가 신라라는 이야기이다. 신라의 옛 명칭인 사로국은 마한에도 있었고, 진한에도 있었다. 마한에는 백제국, 월지국, 사로국이 모두 있었는데, 부여로 판단되는 월지국이 주도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그러나 백제의 온조가 마한을 거의 멸망시켰다고 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시에도 마한이 언급된다. 따라서 마한에 대한 구체적인 위치 추정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이에 대하여 언급하기가 조심스럽다. 후연이 407년 광개토태왕에게 망하고 고구려계인 북연이 이어지는데, 북연이 436년 망하고 그 유민이 신라로 들어 왔다고 한다. 그래서 통일신라 이전의 신라가 이 근처 어디에 있었을 수 있다. 즉 마한과 마한에 있는 신라 위치를 추정하는 일은 향후 추가 연구 과제로 삼는다. 

 

여하튼 이태리 중남부 지역인 로마 주위 지역과 이태리 북부지역인 밀라노 지역과 구분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다. 그래서 동부여는 이태리 북부지역과 과거 북옥저 지역인 스위스 북쪽에 있는 Augusta Raurica지역을 포함한 지역이라는 추정이다. 

 

 

"At first Honorius based his capital in Milan, but when the Visigoths under King Alaric I entered Italy in 401 he moved his capital to the coastal city of Ravenna, which was protected by a ring of marshes and strong fortifications.[10] While the new capital was easier to defend, it was poorly situated to allow Roman forces to protect Central Italy from the increasingly regular threat of barbarian incursions. It was significant that the Emperor's residence remained in Ravenna until the overthrow of the last western Roman Emperor in 476."

(source : Honorius, Wikipedia)

 

 

Basilica at Augusta Maurica (source : Wikipedia)

 

이렇게 동부여를 추정하는 것에 대한 추가 방증 자료를 제시한다.  즉 동부여는 물길국의 침략을 받아 고구려 문자명왕에 494 (삼국사기 493)년 왕과 가족들이 항복했다고 한다. 즉 물길국, Marconni의 침략을 받았다는 것은 이태리 북부 중부유럽에 가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부여가 항복한 그 이듬해, 495년 (삼국사기 494년) 고구려가 남해에 제사를 지냈다고 나온다. 고구려가 남해라는 바다에 닿았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구도이겠지만, 이태리 북부를 보면 가능하다. 즉 라벤나 가까이 있는 아드리안해에 닿으면 남해에 접하게 된다. 고구려의 오랜 숙원일지도 모르니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아래 삼국사기 자료 참조)

 

<삼국사기 문자명왕 자료 >
三年春二月 부여가 항복해오다 (AD 493)
三年秋七月 신라·백제와 전투를 하다 (AD 493)
三年 남제가 문자명왕에게 벼슬을 주다
三年 북위에 조공하다
三年冬十月 겨울에 날씨가 따뜻하여 꽃이 피다
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四年春二月 큰 가뭄이 들다
四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四年秋七月 남쪽 바다에 제사를 지내다 (AD 494)
四年秋八月 백제를 공격하니 신라가 백제를 돕다 (AD 494)
五年 남제가 왕의 벼슬을 올려주다
五年秋七月 신라 우산성을 공격하였으나 니하에서 반격을 당하다 (AD 495)
六年秋八月 신라 우산성을 빼앗다 (AD 496)

(자료 : 문자명왕, 나무위키)


신라의 위치에 대해 추가로 연구하겠지만,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동부여 밑에 신라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위의 삼국사기 문자명왕 기록에서 볼 수 있다. 495년 고구려의 우산성 공격기록에서 신라가 니하에서 반격했다는 기록이다. 니하는 진흙강이라는 뜻으로 범람해서 넘치는 일이 잦은 강이라는 것인데, 라인강과 다뉴브강이 그러했다. 필자는 이들이 또한 패수 니하로 추정했다. (필자의 본 블로그 글,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패수는 라인강인가?' 참조)  또한 신라는 고구려와 실직주와 하슬라에서 싸움을 했다. 니하가 언급되며 신라가 성을 쌓았다 했다.

 

상기 기록에서 신라는 우산성을 496년 고구려에게 점령당했다. 그런데 540년 9월,  고구려 안원왕 (531-545) 시절,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했다고 기록된다. 고구려는 기병 5천명을 보내서 방어했다 한다. 이 당시 백제는 성왕시절 (523-554)이었다. 즉 신라에게 속했던 우산성을 고구려가 점령했는데, 후에 백제가 공격해 왔다는 것이다.

 

백제 성왕으로 추정되는 비잔틴제국의 Justinian I (527-565)는 이태리반도를 공격해, 시실리, 나폴리, 로마, 밀라노, 라벤나까지 공격했다. 같은 연대인 540년 Belisarius 장군에 의해서이다. 결국 나중에는 후퇴하여 시실리만 차지했지만 말이다. 따라서 우산성은 나폴리, 로마, 밀라노, 라벤나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신라의 지역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나폴리나 로마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로마사를 기록한 위키피디아 자료에 의하면, 사가들은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고트족의 Alaric I 왕이 발칸반도 공격후, 왜 이태리를 공격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백제 성왕으로 추정되는 Justinian I이 과거 서로마지역을 공격할 때,  신라 진흥왕으로 추정되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Khosrow I (531-579)가 매우 질투하며, 비잔틴제국을 공격했다고 표현했다. 난 이 표현에 필자들은 뭔가 알고 있으면서도 숨기는 것이 있음을 느꼈다. 

 

그럼 신라는 언제 이태리반도에서 철수하여 페르시아로 옯겨갔나가 문제이다. 필자는 소지마립간 말년에 이동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 기록에서 500년 기록에, 폭풍이 불고 용이 나타나며 황색 안개가 끼었다 했다. 용은 보통 외적의 왕이 나타났을 때, 또는 반란이 생겨 왕권싸움을 할 때 언급된다. 497년 우산성 함락 후, 500년 왜적이 장봉진을 함락하는 등 외침을 겪은 후 바로 사망한다. 그리고 날이군 파로의 딸 벽화를 만났다 한다. 사산왕조 페르시아 역사에서는 이 시기에 동쪽으로 왕이 이동했다 하였다. 필자는 그래서 소지마립간의 날이군으로의 이동이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동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오해했다. 그러나 이태리지역에서 철수하여 동부 사산왕조 페르시아로 간 것이 아닌가 판단한다. 이로써 마한에 있던 사로국이 끝을 맺고 진한의 사로국 즉 동신라만 남은 것이 아닌가 한다. 신라는 500년이후로 왜의 침입이 거의 없는 것도 지역이동으로 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신라에 대한 판단을 근거로 하여, 필자는 이태리 북부의 라벤나에 있던 세력은 동부여인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사기 소지마립간 기록>

十九年秋八月 고구려가 우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AD 497)
二十二年春三月 왜인이 장봉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AD 500)
二十二年夏四月 폭풍이 불고, 용이 나타나며 황색 안개가 끼다 (AD 500)
二十二年秋九月 왕이 파로의 딸 벽화를 만나다 (AD 500)
二十二年冬十一月 왕이 죽다 (AD 500)

(자료 : 소지마립간, 나무위키)

 

 

**** 부여에 대한 참고 자료 (나무위키)

 

"국호 : 夫餘, 扶餘, 夫余, 扶余, Buyeo.


부여의 국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부여라는 이름은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 '푸후(puhu)'와 어원상 관련이 있다는 설과, 평야를 의미하는 한국어 '벌'의 고어형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그 밖에 왕족의 성씨가 해씨였으므로, 태양 숭배, 불 숭배와 관련하여 '불'이 어원일 거라는 설도 있으나 이 모두 명확한 사료가 없어 추측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7] 또한 규원사화 기록을 통해 단군왕검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인 부루(夫婁)는 태자로 책봉됐고 나머지 세 아들인 부소(夫蘇), 부우(夫虞), 부여(夫餘)에게는 서쪽 땅을 줘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 당시 단군왕검의 넷째 아들이 다스리던 땅(나라)의 이름을 부여(夫餘)라하여 국호의 기원을 주장하기도 한다. 

 

역사

 

부여 자체의 일원적인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에 부여의 역사를 파악하려면 어려운 점이 많다. 역사 기록에는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졸본부여갈사부여 등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부여가 여럿 존재한다. 북부여, 동부여에 대해서는 정확한 실체 규명이 힘들고 수많은 학설이 난립하고 있다. 동부여에 대해서는 북부여 왕인 해부루왕이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가 변경되었다는 것과, 고구려가 410년에 침공했다는 것이 있다. 이러한 해부루왕이 천도한 동부여와 고구려가 점령한 동부여를 같은 나라로 보거나 다르게 보는 등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북부여와 해부루왕의 동부여도 완전 별개의 국가로 보는 설과 부여 영토 내에서의 이동으로 보는 설이 있다. 또 남부여는 백제에서 성왕 시기에 일시적으로 사용한 국호이며, 졸본 부여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이고, 갈사 부여는 부여 왕족이 부여에서 떨어져 나와 세운 나라 갈사국이다. 여기저기에서 '부여'를 자처한 것으로 보아, 아래에서도 서술하겠지만 현대의 희미한 인상과는 달리 당대엔 의외로 정통성을 상징하는 국호였던 듯하다.

대개 일반적으로 부여라 하면 북부여를 지칭하며 이 영토는 송화강과 눈강이 만나는 만주 길림성의 송눈평야 일대이다. 이들은 이후 국력이 점차 쇠퇴하고 고구려의 영향력에 들어가면서 동쪽의 연길 지방과 서쪽의 농안(農安) 지방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서쪽으로는 흉노 - 오환 - 선비와 접했고 동쪽으로는 옥저숙신 - 읍루 - 물길과 접했으며 남쪽으로는 고조선 - 고구려와 접했다. 수도가 위치한 중심지는 346년 전에는 길림 일대, 346년 이후에는 농안 일대로 파악되고 있다.

 

부여 역사 자체가 부여가 융성했을 시기의 역사는 개략적인 기록만 남아있고 부여의 쇠락기에 가서야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난다. 부여의 유민들은 3~4세기 선비족에게 침략당했을 때는 그들의 상당수가 요서 지방으로 이주되어 부여의 지배층들은 전연후연에서 벼슬을 했다. 북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 5세기경 북만주로 이동하여 두막루를 세웠다. 또한 부여의 옛 땅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고구려말갈발해의 구성원이 되었다. 두막루 역시 상당히 오랜 기간 잔존해 있었던 듯하다.

 

이렇게 잘 나가던 부여도 3~4세기에 선비족 모용부에게 대대적으로 털리면서 쇠락기를 맞이했다. 서기 285년, 모용외의 침공에 1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 끌려갔으며 급기야 의려왕이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국력은 크게 쇠락한다. 이때 의려왕의 자제들은 두만강 일대의 북옥저로 도피하였는데, 그 중 의려왕의 아들 의라왕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서진의 수호를 받으며 돌아가 나라를 되찾았다[復]. 한편 선비족의 부여 침입은 향후 동북아의 정세에 큰 변화를 일으켰는데, 북옥저에 일부 무리가 남아 동부여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또 다른 유민들이 백제로 흘러들어가 근초고왕이 즉위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처음에 부여가 녹산에 살았는데 백제의 침입을 받아 부락이 쇠산해지매 서쪽으로  가까운 곳으로 도망쳤으나 대비하지 않았다. 연왕 이 세자 을 보내어 모용군(慕容軍), 모용각(慕容恪), 모여근(慕輿根) 세 장군과 1만 7천 기를 이끌고 부여를 습격했다. 俊居中指授,軍事皆以任恪。 마침내 부여를 빼앗아[拔] 그 왕 현(玄)과 부락 5만여 구를 사로잡고서 돌아왔다. 황은 현을 진군장군으로 삼고 딸을 시집보냈다.
(春,正月, …(중략)… 己卯[12], …(중략)…)初,夫餘居於鹿山,為百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燕王皝遣世子俊帥慕容軍、慕容恪、慕輿根三將軍、萬七千騎襲夫餘。俊居中指授,軍事皆以任恪。遂拔夫餘,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皝以玄為鎮軍將軍,妻以女。

 
자치통감 권97 진기 19 효종 목황제 하 영화 2년(병오, 364)


모용외의 침공에 부여는 국가 중심지를 기존의 지린성 일대에서 농안 지역으로 옮기나, 346년 결국 전연 모용황의 대공격에 부여왕 현을 포함해 무려 5만여 명이 끌려가면서 사실상 부여는 붕괴하게 된다. 이때 끌려간 인구가 5만 명이 아니라 5만 호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구당서를 신당서를 옮겨 적을 때 구(口)를 호로 잘못 적은 부분이 많던 것이 대표적인 예.

부여 멸망 이후 잔존 세력들이 고구려의 양해 아래 책성 일대에 모여 부여의 명맥을 이어가지만, 410년에 광개토대왕의 동부여 원정으로 이것마저 맥이 끊겼다. 후기 부여의 중심지였던 농안 지역에 남아 있던 마지막 부여 세력은 494년에 물길의 침입을 받고 완전히 멸망하여 494년 고구려 문자왕에 투항했다. 일부 세력은 북방으로 이주해 두막루를 형성한다.

 

(자료 : 부여, 나무위키)

 

 

*** 동부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료

 

그런데「광개토대왕릉비」를 통해서 적어도 5세기 초에 실재하는 동부여가 확인된다. 이때의 동부여는 『삼국지(三國志)』동이전(東夷傳)에 보이는 북옥저(北沃沮)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는데 대체로 두만강 유역에 해당된다. 이것은『삼국지』관구검전(毌丘儉傳)에서 동천왕(東川王)이 위(魏)에게 쫓겨 피난했던 매구루(買溝婁)가 동옥저전(東沃沮傳)에서는 치구루(置溝婁)로 표기되었고, 이것이 바로 두만강 유역의 책성(柵城)이며「광개토대왕릉비」에서 전하는 동부여의 미구루(味仇婁)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3세기경 동부여는 두만강 유역에 있었다고 본다.

 

또한 3세기 전반까지 부여국은 지금의 길림시(吉林市)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하다가 3세기 말 모용외(慕容廆)의 침공을 받아 지배층을 위시한 주민 다수가 두만강 하류 북옥저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듬해 다시 길림 지역을 회복해 귀환했는데, 일부가 남아 북옥저 지역에 계속 살았다.

 

이에 당시 고구려인들은 수도인 길림지역에 사는 이들을 북부여라고 하고, 북옥저 지역에 살던 이들을 동부여로 불렀을 것이라 한다. 4세기 전반 고구려가 북부여 지역을 장악하자, 본국과 차단된 동부여는 자립했다가 410년에 광개토대왕에 의해 병합되고 이에 동부여라는 명칭도 사라졌다고 본다.

(자료 : 동부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광개토태왕의 동부여 정벌의 해석

 

- 동부여 정벌

 

410년 고구려의 동북방에 위치한 부여(동부여)가 고구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왕이 직접 토벌했다. 고구려군이 동부여의 수도에 이르자 동부여가 항복했다. 이때에 동부여를 떠받드는 5압로(5부)가 고구려에 투항했고 64개의 성과 1400개의 마을을 공파했다. 바로 전에 고구려가 상대한 후연은 서방인데 동부여는 그 정반대인 동북방이다. 광개토대왕은 동서남북 사방을 가로질러가며 정복 전쟁을 벌인 것이다. ....
 

(자료 : 광개토대왕/생애,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