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사와 민란사를 통해 본 신라와 당 유사성 자료 및 메모

2021. 9. 20. 16:39참고 NOTE

 제목 : 반란과 민란을 통해 본 신라와 당의 유사성

 

반란의 경우를 본 신라와 당의 유사성

 

1) 안록산의 난(755)과 탈라스 전투(751) : 규모

 

안록산 : 15만 +, 탈라스전투 : 아랍군 20만, 당 10만 (고선지장군)

 

아버지가 이란계 소그드인, 어머니가 돌궐족이다. 안(安)이라는 성은 소그디아나의 부카라(지금의 우즈베키스탄)를 가리키는 중국식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명(兒名)은 안녹사(安綠絲)이며 녹산(禄山)이라는 이름은 빛을 의미하는 이란어 로우샨(rowshan)을 중국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영주에서 호시아랑을 맡았는데 6개 국어를 능통하였다. 30대에는 장수규를 섬겨서 무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742에는 평로절도사가 되었다. 변경 방비를 잘 맡아서 현종의 신임을 얻었다. 744에는 범양절도사, 751에는 하동절도사로 부임하면서 군사 병력 가운데 3분의 1을 장악했다. 안록산은 나라 이름을 연(燕)으로 정하고 황제를 칭하였다. 안록산이 사망한 이후에도 안경서가 연나라의 황제를 자처하면서 당나라와 대립하였다. 
 

양국충은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조짐을 보이자, 현종에게 안녹산이 모반을 꾀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안녹산은 이에 대한 반기로 15만의 병력을 이끌고 중원으로 쳐들어갔다. 뤄양에 들어가 대연 황제라 칭했다. 이것이 '안사의 난'의 시초로 장안까지 점령했지만, 아들 경서의 손에 죽었다. 이 난은 사사명이 이어받았는데, 9년 후에야 겨우 평정되었다. 이 난으로 당나라는 힘이 점점 약해져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Samarkand)와 부하라(Bukhara) 주위에 있던 소그디안(Sogdian)왕국을 안식국으로 불렀는데, 그 안에는 강국(康國)과 안국(安國)이 나뉘어 있었다. 이 지역에는 위구르족회족페르시아인, 소그드인, 돌궐족, 창족, 기타 서양인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살았는데, 그들이 중국에 이주하여 지역명을 따라 안, 강으로 득성하였다. 이들은 혈연 관계는 모두 다르며 중국 안에서의 득성 시기도 차이가 있다.

 

안록산의 성씨에 관한 자료들은 안(安)과 강(康)으로 서로 헷갈린다. 이유는 강, 또는 안, 어느 쪽이던 안록산이 소그디안이지만 안록산의 친부가 강(康)씨이고 양부는 안연언이기 때문에 생기는 다른 차이에서 기인했다. 중국 문헌의 공식 서술도 안연언은 안씨, 안록산은 친부는 강씨로 되어 있다. 본래 성이 강이므로 여러가지 억측이 있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후에 한나라가 서역과 교역하면서 우즈베키스탄 출신이므로 중국 안에서 안, 강으로 득성하였다고 알려 졌지만, 실제로는 주나라 무렵에도 서역 주변에 사람들이 민족이나 지역 명을 하는 경우가 있어 왔다. 후한 때 안국 출신 안세고는 안연언과 같은 지역 출신이지만 생몰 년도 다르고, 중국 한성 득성 시기도 다르다. 안연언도 안록산의 친부는 아니다. 서역인이 왕조를 세운 후당의 황제 이종후(李從厚), 군의 대권을 잡았던 인물로 안중회(安重誨), 주홍소(朱弘昭)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서역인 출신으로 후당이 건국하기 전에는 돌궐식 성을 사용하였다.

(자료 : 안록산, 위키)

 


 


 

Then, in 715, Alutar, the new king of Fergana, was installed with the help of the Arabs of the Umayyad Caliphate. The deposed king Ikhshid fled to Kucha (seat of Anxi Protectorate), and sought Chinese intervention. The Chinese sent 10,000 troops under Zhang Xiaosong to Ferghana. He defeated the Arab puppet-ruler Alutar at Namangan and reinstalled Ikhshid. The inhabitants of three Sogdian cities were massacred as a result of the battle.


 

The second encounter occurred in 717, when Arabs were guided by the Turgesh and besieged two cities in the area of Aksu at the Battle of Aksu (717). The commander of the Chinese Protectorate General to Pacify the WestTang Jiahui, responded using two armies, one composed of Karluk mercenaries led by Ashina Xin (client qaghan of Onoq) and another composed of Tang regulars led by Jiahui himself.The Tang dynasty Chinese defeated the Umayyad invaders at the battle of Aksu. The Arab Umayyad commander Al-Yashkuri and his army fled to Tashkent after they were defeated.

 

Arab sources claim Qutayba ibn Muslim briefly took Kashgar from China and withdrew after an agreement but modern historians entirely dismiss this claim.


 

In the year 750, Abu al-'Abbas al-Saffah (As-Saffah), the founder of the Abbasid Caliphate, launched a massive rebellion (known as the Abbasid Revolution) against the incumbent Umayyad Caliphate from the province of Khurasan. After his decisive victory at the Battle of the Zab and eliminating those of the Umayyad family who failed to escape to Al-Andalus, As-Saffah sent his forces to consolidate his caliphate, including Central Asia, where his forces confronted many regional powers, including those of China's Tang Dynasty.

 

Battle

The numeric quantities of the combatants involved in the Battle of Talas are not known with certainty; however, various estimates exist. The Abbasid army (200,000 Muslim troops according to Chinese estimates, though these numbers may be greatly exaggerated) which included contingents from their Tibetan ally met the combined army of 10,000 Tang Chinese and 20,000 Karluk mercenaries (Arab records put the Chinese forces at 100,000 which also may be greatly exaggerated).


 

In the month of July 751, the Abbasid forces joined in combat with the Tang Chinese force (the combined army of Tang Chinese and Karluk mercenaries) on the banks of the Talas river.


 

Modern view of Talas River, which starts in the mountains of Kyrgyzstan and winds down into Kazakhstan. On the right side of the river is the city of Taraz.

The Tang army was subjected to a devastating defeat. The Tang dynasty's defeat was due to the defection of Karluk  mercenaries and the retreat of Ferghana allies who originally supported the Chinese. The Karluk mercenaries, two-thirds of the Tang army, defected to the Abbasids during the battle; Karluk troops attacked the Tang army from close quarters while the main Abbasid forces attacked from the front. The Tang troops were unable to hold their positions, and the commander of the Tang forces, Gao Xianzhi, recognized that defeat was imminent and managed to escape with some of his Tang regulars with the help of Li Siye

 

(source : battle of Talas, Wikipedia)

 

 

Shortly after the battle of Talas, the domestic rebellion of An Lushan (755–63) and subsequent warlordism gave the Arabs the opportunity to further expand into Central Asia as Tang influence in the region retreated. The local Tang tributaries then switched to the authority of the Abbasids, Tibetans, or Uighurs and the introduction of Islam was thus facilitated among the Turkic peoples.

 

It was the An Lushan Rebellion and not the defeat at Talas that ended the Tang Chinese presence in Central Asia and forced them to withdraw from Xinjiang—Talas was of no strategic importance, because the Arabs did not advance any further after the battle…….


 

Abu al-'Abbas al-Saffah, whose forces were known to the Chinese as the Black Robed Ta-Shih, spent his wealth on warfare. He died in the year 752 CE. His brother who succeeded him as the second Abbasid Caliph Abu Jafar al-Mansur (r. 754–775 CE) (A-p’uch’a-fo) helped the Chinese Emperor Suzong of Tang after he appealed for help during the An-Shi Rebellion in regaining control of his capital Chang'an from the treacherous commander, An Lushan, or his successors in the abortive Yan Dynasty. Abu Jafar al-Mansur responded by sending 4,000 men who helped the Tang troops in recapturing the city and were well rewarded by the Chinese Emperor. After the rebellion was repressed they were allowed to settle down permanently in China which helped in founding of the earliest Muslim communities in China. Some of them married local Chinese people and their descendants became native-born Muslims who retained their religious tradition and unique way of life


 

In 760, a large scale massacre of wealthy Arab and Persian merchants occurred in China during the Yangzhou massacre, at the hands of Chinese rebels led by Tian Shengong.

 

(source : battle of Talas, Wikipedia)

 

 

 

“수도 서라벌은 9주 5소경 중 양주 땅에 둘러싸여 있지만..”

 

(자료: 서라벌, 나무위키)


 

 

2) 당나라의 황소의 난 (875-884)과 신라의 원종애소의 난(889)

 

황소의 난 때 페르시아인, 등 12만 살상 → 장안 : 페르시아 Ctesiphon (금성)

농민의 반란, 세금문제로 인한 농민 반란,

 

In 879 during the Guangzhou massacre, 120,000 to 200,000 Arab Muslim,[citation needed] Persian Zoroastrian, Jewish, and Christian foreign merchants in Guangzhou were massacred by Chinese rebels under Huang Chao. (source : battle of Talas, Wikipedia)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도 꿋꿋하게 당나라를 지탱해주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소금이었다. 지금이야 마트 가서 사먹는 게 소금이지만 그 당시 소금은 그야말로 금값 그 자체였다. 더군다나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는 소금 전매(소금의 국가적 독점 판매)에 몰두, 소금값의 30배 폭등을 이뤄내며 총재정수입의 절반 이상을 벌어들이는 쏠쏠한 상황. 허나, 소금을 반드시 먹어야 하는 가난한 백성들은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이 상황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해, 일확천금을 위해 소금밀매업자들이 비밀결사의 형식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당나라는 재정수익을 위해 소금밀매업자를 강력히 처벌하기 시작했고, 잡히면 사형이라는 강경처벌이 잇따르자 소금밀매업자들은 사생결단을 내리게 된다.

……….

 

마침 희종 원년에 대기근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자 하남성과 산동성 접경 부근의 소금밀매업 대장이었던 왕선지(王仙之)는 실업자 농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이윽고 이번 사건의 주인공, 황소가 산동성에서 호응하면서 반란군의 기세는 더욱 커진다. 그런데 둘의 군대가 하나로 뭉쳐 산동과 하남 일대를 공격하자 당나라군의 어그로는 최대치로 증가... 결국 둘은 군대를 나눠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진군하기로 하지만 서쪽, 즉 낙양을 향해 나아가던 왕선지는 당나라 중앙군의 강력함에 놀라 벼슬을 주겠다는 당나라에 항복했다가 다시 배반했다가 전사한다. 그리고 목숨을 부지한 채 황소에게로 도망쳐온 패잔병들은 황소부대와 합류하여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황소의 군대가 하나로 합쳐져 다시 하남성 일대를 향해 진군하려 하자, 당나라는 즉시 낙양 일대로 수십만 대군을 소집하여 황소군을 포위섬멸하고자 한다. 황소는 이 정보를 듣자 "그럼 중앙군 없는 곳 치면 되지?"라는 심플한 생각으로 하남진군을 포기, 남하한다.

 

남쪽으로 광주(광저우)까지 이르렀던 황소군은 남부에 전염병이 돌자 이를 계기로 북상하고, 6년 간의 대모험 끝에 880년 충천대장군(沖天大將軍) 황소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동관(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코앞)을 점령한다. 이렇게 되자 수도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관리들은 도망가고 희종마저도 성도로 피신하기로 결정한다.

며칠 뒤, 장안의 서문으로는 당나라 황제가 빠져나가고 동문으로는 백성들의 환호와 함께 황소가 무혈입성하는 기이한 풍경이 벌어진다. 수도 장안이 함락당한 것이다. 군기를 엄중히 하여 장안성의 민심마저 자기 것으로 만든 황소는 국호를 대제(大齊), 연호를 금통(金統)으로 하여 황위에 올라선다. 장장 7년 간의 대장정 끝에 그가 천하를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황소군이 중국 남부를 휘젓고 있을 때, 아주 큰 실수 하나를 했었다. 바로 군사를 주둔시키지 않은 것.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애초에 황소의 군대는 당나라 주력군을 피해서 전국 일주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병력을 나누어 주둔시켰다면, 각개격파 당했을 것이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군편제도 아니었기 때문에, 주둔병력이 흩어지거나 또 다른 왕을 자처했을지도 몰랐던 것이 현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황소군이 떠나면 다시 관군이 찾아왔기 때문에 황소군이 장안에 눌러앉았을 땐 이미 사실상 포위상태. 사실 황소군은 계속 움직여야 유지되는 상황이었으며 수도인 장안을 점령했다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 눌러앉은 것은 전략적 실책이었던 셈이다.

황소는 매우 당황한다. 더군다나 경제적 기반마저 갖지 못한 상황이라 황소의 제국은 너무나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당나라 정부가 각 지역에서 급히 병사들을 징발하자 결국 안 되겠다 싶었던 황소는 그의 심복, 주온(朱溫)을 출병시켜 관군을 격퇴해보고자 한다. 하지만 주온은 당나라에 깔끔히 투항. 정세는 극도로 악화되고 투르크계 출신의 장수 이극용(李克用)을 비롯한 토벌군에 의해 결국 황소군은 3년 간의 항쟁 끝에 장안을 내버리고 탈주한다. 이들은 하남성 일대로 파고 들어가 투쟁을 계속했지만 884년 진주(陳州, 하남 회양)에서 관군에게 대패하고 태산 낭호곡(狼虎谷)에서 결국 황소가 자결하면서 난은 끝을 맺는다.


관군에 큰 힘이 된 주온은 희종으로부터 전충(全忠)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여러 절도사직을 겸하게 되었으며 양왕(梁王)으로 책봉되었다. 또한 장안 탈환의 일등공신인 이극용은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가는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 반란 진압 23년 후인 907년, 주전충은 황제에게 양위받아 후량을 건국하면서 당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자료 : 황소의 난 나무위키)

 

 

- 당희종 (873-888 재위)

 

생애

 

함통 14년(873년)에 12세의 나이로 환관의 책립으로 즉위했다. 재위 기간 중에 희종은 건부(乾符), 광명(廣明), 중화(中和), 광계(光啟), 문덕(文德)이라는 다섯 개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모든 정치는 환관 전령자(田令孜)가 틀어쥐고 있었고, 황제 자신은 무기력하게 놀고 즐기는 데에 몰두해서 투계(鬪鷄)나 기사(騎射), 검삭(劍槊), 내기 바둑, 격구 같은 잡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끼던 광대 석야저(石野豬)를 향해 "만약 보타(步打)를 가지고 진사(進士)를 뽑는 과거가 있어서 짐이 거기에 응시한다면 당연히 장원으로 뽑힐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북몽쇄록(北夢瑣錄)》은 전한다.[1]


 

건부(乾符) 원년(874), 신라에서 온 유학생 최치원이 빈공과에 급제하고, 이듬해에 발해에서 온 오소도 또한 빈공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신라인 이동(李同)을 제치고 오소도가 수석을 차지한 것에 최치원은 격분했다고 한다.


 

건부 원년에 복주(濮州)에서 왕선지(王仙芝)가 반란을 일으키고, 이듬해에는 황소(黃巢)가 면구(冕句, 지금의 산동 성 조현曹縣 서북쪽)에서 봉기했다. 두 사람은 이후 군사를 합쳐 함께 당조에 맞섰고, 이것은 당조 말기 농민반란의 기폭제가 되었다. 왕선지가 실패한 뒤에도 농민군은 황소의 통솔 아래 남쪽으로 내려가 절동(浙東) 지방을 공격했고, 산으로 700리에 달하는 길을 내어 복건(福建)까지 쳐들어가서 광주(廣州)를 함락시키고 다시 북상해 택주(潭州)를 쳐서 강릉(江陵)을 함락시킨 뒤 곧장 중원으로 나아갔다.

 

광명 원년(880) 11월에는 낙양(洛陽)이 황소군의 손에 떨어지고, 12월에는 동관(潼關)을 거쳐 장안이 농민군 손에 함락되었다. 재상 노휴(盧攜)는 자결하고, 전령자는 신책군(神策軍) 5백을 거느린 채 희종을 데리고 장안 서쪽으로 금광문(金光門)을 빠져나와 사천(四川)으로 달아난 채, 돌궐 사타부(沙陀部) 출신의 번장 이극용(李克用)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황소의 군은 전파(田陂)에서 이극용에게 패하고 관중(關中)으로 물러났으며, 중화 2년(882)에 황소의 휘하에 있던 주온(朱溫)이 당에 항복하여 당 조정으로부터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황소 진압에 나서고 2년 뒤인 중화 4년(884), 산동 성 태안(泰安)에 있던 호랑곡(虎狼谷)에서 황소가 자결(부하 임언林言에게 살해되었다는 설도 있다)함으로써 봉기는 진압되고, 희종은 이듬해 3월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봉기가 진압되고 희종이 돌아온 4월에 최치원도 당의 사신 자격으로 신라로 귀국한다.


 

황소의 난은 평정되었지만 이미 당조는 회복할 수 없을 지경으로 쇠약해져 있었고, 지방에서는 중앙 조정의 위세가 아닌 번진의 절도사 출신 군벌(軍閥)의 무력이 지배했다. 대표적인 군벌로 선흡(宣歙)의 진언(秦彦)과 절동의 유한굉(劉漢宏), 판활(汴滑)의 주전충, 태원(太原), 상당(上黨)을 차지한 이극용, 봉상(鳳翔)의 이창부(李昌符),하양(河陽)과 낙양을 장악한 제갈석(諸葛爽), 허채(許蔡)의 진종권(秦宗權), 치청(淄青)의 왕경무(王敬武), 그리고 회남(淮南) 8주(州)를 장악한 고병(高駢)이 있었다. 이들은 각기 병권을 장악한 채 그들이 맡은 지방의 지배자로 군림했고, 당 조정의 정령이 미치는 곳은 하서(河西)와 산남(山南), 검남(劍南), 영남(嶺南) 서도(西道)의 수십 주에 불과했다.


 

중화 5년(885) 3월에 환관 전령자는 하중절도사(河中節度使) 왕중영(王重榮)과 사이가 틀어졌는데, 왕중영이 태원의 이극용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주목(朱玫)과 이창부를 대패시키고 장안을 핍박하자 전령자는 다시 희종을 데리고 광계 원년 12월, 봉상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때 여러 도의 병마가 장안으로 들어와 마구 불을 지르고 죽이며 약탈을 일삼았고, 황궁과 방리(坊裏)의 대부분이 이때 화재로 불타버렸다고 한다. 주목은 양왕(襄王) 온(熅)을 황제로 세우고 연호까지 새로 건정(建貞)이라 선포했지만, 희종은 다시 왕중영과 이극용 등의 군벌들에게 자신의 정통성을 호소했고, 몰래 주목의 부하 왕행유(王行瑜)에게 조서를 보내 주목을 칠 것을 권했다. 왕행유는 주목과 그의 당여 수백 명을 잡아 죽이고 병사를 풀어 다시 약탈을 벌였다(마침 겨울이라 얼어 죽은 백성의 시체가 길에 깔렸다고 전한다). 양왕 온은 왕중영에게 살해되었고,전령자도 쫓겨났지만, 광계 3년(887) 3월 희종이 봉상에서 돌아오려 하자 이번에는 절도사 이창부(李昌符)가 황제의 행차를 막아 억류했다. 이창부는 6월에 희종이 머무르던 행궁으로 쳐들어갔지만 실패하고 농주(隴州)로 달아났으며 호가도장(扈駕都將) 이무정(李茂貞)이 그를 뒤쫓아가 죽였다.

 

광계 4년(888) 2월에 희종은 다시 장안으로 돌아와 천하에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문덕으로 바꾸지만, 그 해 3월 6일에 사망했다.

 

(자료 : 당 희종 (873-888 재위), 위키)


 


 


 

최치원이 토황소격문을 지었다는 것이 바로 이 황소의 난이다. :

 

   신라와 당의 인접성, 동일 언어권, 교류 원활

 

– 원종 애노의 난 (신라)(889)

 

元宗·哀奴의 亂

통일신라 시대 말기 진성여왕 3년에 원종과 애노를 필두로 일어난 농민 반란.

 

통일신라가 성립한 후 백여 년 동안 신라는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신라 말기에 접어들면서 진골 귀족들 간의 끝없는 왕위쟁탈전으로 점차 지방 농민들의 생활은 어려워지기만 했다. 진성여왕 시대에는 지방 통제력 약화로 세금이 걷히지 않아서 서라벌의 창고는 텅 비었고, 관리를 보내서 농민들에게 세금을 독촉했는데, 오히려 이것에 농민들이 격분하여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889년, 사벌주(沙伐州)의 농민 원종과 애노는 사벌주의 농민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 조정은 나마 관등에 있는 장군 영기(令奇)를 토벌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농민 반란군을 토벌하라고 했지만 영기가 원종과 애노의 반란군 본진을 보고서 이를 두려워하여 토벌군이 진군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촌주(村主) 우연(祐連)이 나서서 반란군에 맞서지만 전사했다. 진성여왕은 칙명을 내려서 장군 영기를 참수하였고, 나이가 10여 세에 불과한 우연의 어린 아들을 아버지의 뒤를 잇는 촌주로 임명했다. 이후에 조정의 토벌군과 원종과 애노의 반란군이 어떻게 대치하여 원종과 애노의 난이 어떤 식으로 결판이 났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알기 어렵지만 만약 추정을 한다면 반란군이 신라 조정의 토벌군에 의해서 원종과 애노가 죽었거나, 후삼국시대가 들어서면서 호족들이 활개치면서 아자개와 양길을 비롯한 호족 세력에 의해서 격파당했거나, 세력 흡수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기록상 나중에 아자개가 이들과 같은 상주에서 호족으로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후삼국시대를 여는 대호족시대의 첫 번째 타자라는 점에서, 통일신라가 붕괴하는 기폭제가 된 의미가 있다.초한쟁패기의 진승·오광의 난삼국지의 황건적의 난과 비슷한 사건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자료 : 원종 애노의 난, 나무위키)

 

 

3) 김헌창의 난(822) : 장안국 (신라) 과 당나라의 이사도의 난

 

Genesios and other chroniclers further state that Thomas won the support of

"Hagarenes,IndiansEgyptiansAssyriansMediansAbasgiansZichsIberiansKabirsSlavsHunsVandalsGetae, the sectarians of ManesLazAlaniansChaldiansArmenians and every kind of other peoples"

 

(source : Thomas the Slav, Wikipedia) (Byzantine Empire)
 

 

김헌창의 난(822)으로 판단되는 Thomas the Slav난(822)에서 지지 지역으로 Medians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서부 북부 이란으로 신라의 금성이며 당나라의 장안으로 판단되는 Ctesiphon (바그다드 근처)이 포함된 지역이다. 따라서 장안국으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 당 헌종때 : 이사도의 난(제나라) (816-819) 장안 미양궁 불을 지름

 

헌종은 즉위 후 환관 세력에 맞서고자 두황상(杜黃裳)을 재상으로 등용하였으며, 당 조정의 간섭에서 벗어나 반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지방 절도사 세력의 통제에 나섰다. 번진(藩鎭) 세력에 맞서 그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시책으로서 헌종은 유학자 출신의 번수(藩帥)를 등용하고 감사 임무를 주관하는 감군(監軍)에 환관을 임명하는 등 절도사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제도를 시작했다. 당대 명신(名臣)으로 평가받던 무원형(武元衛)이나 이길보(李吉甫) 등도 등용되어 군비를 확장시킨 금군(禁軍)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 원화 2년(807) 진해절도사(鎭海節度使) 이기(李锜)를 정벌한 것을 시작으로 원화 8년(813)에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전흥정(田興歸)의 귀복을 받아내고, 당조에 저항적이었던 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 왕승종(王承宗)에 대해서도 공세를 가했으며, 원화 10년(815)부터 원화 12년(817)까지, 헌종은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 오원제(吳元濟)를 토벌해 평정하고(오원제 평정 이후 전국의 번진들은 각자 거느리고 있던 땅을 떼어 바치며 당조에 귀복), 원화 13년(818)부터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치청절도사(淄淸節度使) 이사도(李師道)에 대한 공략에도 힘을 기울여 이듬해에 그를 평정하는데 성공한다. 안록산의 난 이래 당 왕조에 반항적이던 번진인 하삭 삼진(河朔三鎭)도 당 왕조에 충성을 맹세하여, 쇠퇴하던 당은 일시적으로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원화중흥(元和中興)이라 부른다. ….820 환관 왕수징(王守澄)과 진홍지(陳弘志)에게 시해당하였다.

 

(자료 : 위키, 당헌종)

 

 

4) 계림에서 일어 난 방훈의 난 (862-869)

 

계림, 서주, 서라벌

 

“신라의 도읍을 적을 때에는 서라벌 이외에도 금성(金城), 서벌(徐伐), 서나벌(徐那伐), 서야(徐耶), 서야벌(徐耶), 서라(徐羅) 등 여러가지 표기..”

 

(자료 : 서라벌, 나무위키)

 

 

방훈의 난(龐勛之亂)은 중국 당나라 말기 의종 때 서주 무녕군(武寧軍) 번진(藩鎭)의 군인인 방훈(龐勛)이 일으킨 대형 반란으로, 868부터 869까지 지속되었다. 구보의 난 다음으로 일어나서 반란이 종료된 지 7년 후에 일어난 황소의 난 이전 사이에서 발생한 대형 반란이었으며, 《신당서》에서조차 '당나라는 황소에 의해 사실상 멸망했지만, 화근은 계림에서 시작되었다.'라고 평할 정도로, 당나라가 본격적인 패망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게 만든 황소의 난의 전주곡을 마련하였다.

 

교만한 병사들

 

안록산의 난 이후, 당나라 말기에 접어들면서 병사들의 반란이 종종 발생하게 되었다. 이것은 지방의 번진(藩鎭)에 파견된 절도사(節度使)가 넉넉한 예산을 벌기 위해 필요 경비의 삭감을 실시한 결과, 군인들의 급여가 대폭 감소하면서 이에 불만을 품은 장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절도사를 축출하고 자신들과 적성이 맞는 절도사를 추대한 데 따른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장병들을 지나칠 정도로까지 우대하여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절도사도 있었다.

서주(徐州, 현 장쑤 성 쉬저우 시)를 본거지로 삼아 서주・사주(泗州, 현 장쑤 성 화이안 시)・숙주(宿州, 현 안후이 성 쑤저우 시)・호주(濠州, 현 안후이 성 추저우 시)의 4를 지배했던 무녕군(武寧軍) 번진도 평판이 좋지 않은 번진으로 유명했다. 이것은 서주 일대가 수륙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 일대의 장병들이 특별한 우대를 받고 있었던 데 따른 것이었다. 당 목종 연간에 무녕군 절도부사(武寧軍節度副使)에 임명된 왕지흥이 서주에 부임하면서 2천 명의 날래고 사나운 정예병들을 모집하여 7개 군단으로 나누어 정예부대를 창설했다. 그들에게는 여러가지 특권이 주어져 있어서, 왕지흥이 다른 번진으로 전임된 이후에도 그 특권은 계속되어 후임 절도사들도 줄곧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하였다.


 

862 7, 서주의 교병(驕兵, 무녕군 번진의 정예병들은 서로 각자의 지위와 특권을 세습하였기 때문에 '교병(驕兵)'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들이 신임 무녕군 절도사인 온장(溫璋)을 축출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온장이 엄격한 관리라는 평판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상사(上司)를 내놓으라는 교병들의 메시지였지만, 이것이 그들의 파멸로 이어져 버리고 말았다. 온장의 후임으로 부임해 온 무녕군 절도사가 구보의 난을 단 일격에 진압한 명신 왕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왕식은 구보의 난을 막 진압한 직후였기 때문에, 구원군으로 출진해 있었던 충무군(忠武軍)과 의성군(義成軍)의 두 번진 병력을 임시로 지휘하고 있었다. 구보의 난이 진압되면서 이들 두 번진 장병들을 위로하여 해산시키는 단계에 이른 다음에 잠시 동안 그들에게 서주의 교병들을 몰살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다. 그 결과 수천 명의 교병들이 일거에 떼죽음을 당하였고, 이처럼 예상치도 못한 왕식의 무력 조치로 무녕군 번진은 괴멸되어 해체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마침내 무녕군 번진은 소멸해 버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녕군 번진 소속의 교병들 전원을 몰살시키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살아남은 교병들은 비적(匪賊)이 되었다. 정부는 1개월 이내에 자수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포고를 발령하게 되었다.

 

계주에 부임하다

 

그 후, 864에 남조가 교지(交趾, 현 베트남 북부 일대)를 점령하면서 당나라 조정에서는 서주・사주의 2주 일대(구 무녕군 번진 관하 지역)의 3천여 명의 장병들을 모집하여, 그들을 남조 방위의 최전방 지역인 옹주(邕州, 현 광시 좡족 자치구 난닝 시)에 주둔시키라는 조칙(詔勅)을 내렸다. 당나라와 토번의 쇠약을 지켜보고 자립하려고 했던 남조에 대처하기 위해 비적화된 서주의 교병들을 활용하려는 일석이조를 노린 명령이었다. 그들은 해당 지역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주둔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그 기한은 일단 3년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정작 모집에 응한 인원은 약 2천 명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 2천 명의 서주의 교병들 중 800명이 계주(桂州, 현 광시 성 구이린 시)에 부임하게 되었다.

 

북쪽으로의 귀환길

 

그런데 먼 지방에서 주둔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교체 명령은 없었고, 드디어 6년째가 되어 버렸다. 이때까지 6년 동안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자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귀향을 탄원했지만, 이를 각하당하고 다시 1년을 더 주둔할 것을 명령받았다. 교병들은 자신들이 고향에 돌아갈 가망이 없어지자 이 사태에 격분하기에 이르렀고, 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마침내 교병들은 도적 출신의 전직 무녕군 장교였던 도우후(都虞侯, 금군(禁軍)이나 번진 절도사의 친위군 내에서 군법의 집행을 담당하는 친위대 상급 장교) 허길(許佶) 등의 주도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행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868 7, 계주의 관찰사가 인근 지방으로 전근을 가면서 후임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기를 노린 교병들은 계주도장(桂州都將) 왕중보(王仲甫)를 살해하고 식량창고를 강도 높게 약탈하였다. 그들은 양료판관(糧料判官, 식량과 사료와 관련된 사무를 감독하는 관리) 방훈을 자신들의 우두머리로 추대하여 서주로의 귀환을 개시한 것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이것이 방훈의 난의 시작으로 되어 있다.


 

그들은 비록 모반을 일으켰지만, 3년 교체를 언급해 두면서 6년으로 주둔 기간을 연장한 조정 측에서도 꺼림칙한 입장을 보였기 때문에 토벌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은 호남도(湖南道, 현 후난 성 일대)를 지나 장강을 따라 악악도(鄂岳道, 현 후베이 성 남동부 일대)・선흡도(宣歙道, 현 안후이 성 남부 일대)・절서도(浙西道, 현 저장 성 북부 일대) 등을 거쳐 동쪽으로 북상하여 회남도(淮南道, 현 안후이 성 중부 일대)에 이르렀다. 그들은 통과 지점의 와 에서 환대를 받으면서 서주로 향했다. 이때 원래 그들의 동료로 그때는 이미 도적이 되어 있었던 교병들이 합류하면서 어느새 1천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당시 서주는 서사도 관찰사(徐泗道觀察使)의 관하에 있었고, 이때의 그 서사도 관찰사는 최언증(崔彦曾)이었다. 교병들과 관찰사 사이에서 사자의 왕래가 있어서 조정으로서는 일단은 허락할 방침이었지만, 일각에서는 제멋대로 난폭한 행위를 일삼아 온 무리들을 받아들여도 좋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의 주장이 제기되었고, 또한 그 주장이 조정 내부에서 주된 기류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교병 측도 조정을 신용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러한 의심의 망상에 의한 공포 속에서 방훈에게는 하나의 야망이 발동하고 있었다. 방훈은 다음과 같이 부하들을 선동하였다.

 

"조정에서는 우리를 능지처참하고 일족들을 모두 주살하려고 한다. 어차피 죽는다면 (관군과) 싸워서 죽는 것이 낫다. 한번 더 부귀영화를 얻어서 옛날처럼 마음 편한 생활을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이로써 서주의 교병들은 마침내 반역을 개시하게 되었다.

 

정부군과의 전투 과정

 

팽성을 함락시키다

 

방훈에게 있어서 다행이었던 것은, 최언증과 그 부하들이 백성으로부터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여 지극히 평판이 나빴던 것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과 호족들이 방훈의 군세에 가담하면서 민란의 성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868 9(《신당서》에서는 10)에는 서주의 본거지인 팽성이 함락되었고, 최언증은 사로잡히고 그의 부하들은 장이 도려내지는 극형을 당하였으며 그들의 일족들은 몰살되었다. (단, 최언증은 방훈군이 서주를 점거한 이후에 이를 토벌하러 나온 정부군이 서주성 앞에 이르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방훈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로써 서주는 교병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어서 방훈군은 회수 어귀를 점거하여 장안의 당나라 황실을 위협하였다. 장강과 회수 일대는 대혼란에 빠졌고, 이후 그 일대의 많은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방훈군의 진격에 호응하면서 방훈군은 기세를 크게 떨쳤다. 그 과정에서 참가한 인원도 이 무렵에는 총병력 20만 대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실적을 거둔 방훈은 조정을 위협하여 스스로 무녕군 절도사의 자리에 오르려고 했다. 그런데, 조정의 방침은 어디까지나 토벌이었다.

 

정부군과 맞서다


 

조정은 우선 방훈군 측에 사자를 파견하여 시간을 버는 한편, 명장 강승훈을 방훈 토벌군의 총대장으로 삼고 왕안권(王晏權)과 대가사(戴可師)를 서주남면행영초토사(徐州南面行營招討使)로 임명하여, 남북 양쪽에서 세 방향으로 일제히 진격하여 방훈군을 서주성 아래에서 섬멸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또한, 이와 동시에 각지의 군대에도 동원령이 하령되면서 총병력 20만 대군의 정부군이 서주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강승훈은 내지에 있던 이민족인 사타족 기마군단을 토벌전에 참가시켜 줄 것을 요청하여 이를 허락받았다. 이로써 교병과 정부군의 사이에서 서주와 사주 일대를 둘러싼 격렬한 공방전이 개시되었다. 869의 일이었다.

 

(자료 : 위키, 방훈의 난)

 


 

** 신라 경문왕 (861-875 )때 :호족의 반란과 진압

 

즉위 중반부터 호족의 반란에 시달렸다. 


 

866 10에는 이찬 윤흥(允興)이 그 남동생 숙흥(叔興), 계흥(季興)과 함께 반역을 꾀했다. 사전에 발각되어 윤흥 일당은 대산군(岱山郡)으로 도주했지만, 포박되어 참형당하고 그 일족은 몰살되었다. 


 

한편 수시로 각 주현에 병력을 보내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호족들을 감시하는 한편 왜구를 토벌하였다.

 

868 1에는 이찬 김예(金鋭), 김현(金鉉)등이 반란을 일으켜 죽였다. 

게다가 874년 5월에도 이찬 근종(近宗)이 반란을 일으키고 궁궐까지 쳐들어왔으나 경문왕은 근위병을 파견해 반란군을 격파하고 근종을 잡아 거열형으로 처벌했다.

 

(자료 : 경문왕, 위키)

 

 

** 효소왕때 반란


700년(재위 9년) 5월, 이찬 경영(慶永)의 모반을 진압했으며, 중시 김순원(金順元)이 이에 연루돼 파직당했다.

 

측천무후 때 이경업의 난 - 684

 

 

 

5) 역병 발생

 

신라 :

 

867 5에는 왕도 금성에서 역병이 유행했고

870에는 왕도가 지진·홍수에 휩쓸려 그 겨울에는 다시 역병이 유행하게 되었다. 

 

873에도 기아와 역병이 일어나, 왕은 백성에게 곡물을 주어 구제했지만, 정황은 안정되지 않았다. 역병 등의 액재와 호응 하는 것도 아니게 왕도로의 귀족층의 반란이 잇따른 것은, 그 현상이라고 보인다. 

(자료 : 경문왕, 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