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가 호랑이 해라 한다.
우리 나라는 예전부터 호랑이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단군 신화부터 호랑이와 곰이 등장하고 마늘이 언급된다.
고구려에 관한 고구리사 초략을 보면 고국원제가 369년 치양싸움에서 백제 근구수왕(태자시절)에게 패하여 지쳐 있을 때 또한 호랑이 피해를 보았다 했다. (아래 자료 참조)
아래 자료에서 보면 치양은 대암산과 가깝고, 북한산과 가까우며, 수곡성과도 가깝다. 또한 백제는 해로로 군사를 보충하고 치양을 쳤으니, 치양은 바다와도 가깝다는 것이다. 이후 전쟁에서 승리한 근초고왕은 한수 이남에서 군사를 사열(369)하고, 패하에서 고구려군에 승리하고 (371), 평양성 싸움에서 고국원제가 죽게 만들고(371), 그리고 한산으로 수도를 옮겼다(371) 한다. 그러나 375년 수곡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몇 달 뒤 근초고왕은 죽는다 (375년).
"고구리사 초략 고국원왕 기록 (369) :
"369년 기사 정월에 백제는 고구리에게 빼앗겼던 이진성(伊珍城)을 5년 만에 수복했다. 이 때 고구리 군사들이 많이 죽고 상했다. 최체(最彘) 태수 우눌이 상장(上將)으로서 선극을 포용하지 못하고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패하고 만 것이었다. 이에 고국원제가 크게 노해 우눌을 불러들이고 람풍으로 상장을 대신하게 했다.
백제는 승승장구하면서 병사의 수를 늘려 곧 수곡(水谷)성을 탈취할 참이었다. 백제의 장수 막고해는 용병도 잘하고 사졸들의 신임도 얻고 있었는데, 고구리 군은 힘씀에 틈이 있고 싸울 뜻도 없었기에 패배가 예견되었다. 5월에 분기탱천한 백제군이 진격해 수곡성을 깨뜨림에 근구수 태자가 선봉이 되어 진영을 이끄니 병사들 모두 “태자께서 항시 이러하시거늘 우리들은 어찌해야 하겠는가!”라며 죽기로 싸우기를 원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은 고국원제가 직접 친정하기를 결심하니 태보가 극력 말려도 듣지 않았다. 친위군 2만을 추가로 징발해 남쪽으로 내려가 대암산을 거점으로 삼고 치양(雉壤)으로 나아가, 진영을 치고 북한산을 포위하니 백제는 대적하지 못하고 성을 비우고 물러갔다. 이에 고구리군은 승승장구하며 멀리 있는 이진천(伊珍川)에 이르렀다.
그러나 날씨가 무더워 산에 뱀·호랑이·범들이 많았으며 양군 모두에게 역병이 돌았기에 할 수 없이 산 밑에 진을 치고는 민가를 약탈하며 가을이 되기를 기다렸다. 고구리가 약탈했다는 문구로 미루어 보아 치양과 이진성 일대는 원래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의 영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9월, 백제가 해로(海路)로 군사를 보충하고는 치양을 습격했다. 이때 고구리군은 크게 피로해 죽는 자들이 끊이지 않는데다가 호랑이 피해도 많았다. 이에 상은 날래고 건장한 자들을 뽑아 호랑이를 산으로 쫒아냈다. 백제군은 고구리군이 지쳐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새로 온 정예군으로 갑자기 치니 고구리 군이 크게 무너졌다. 상은 단기로 무산(撫山)으로 피해 들어갔다." (필자의 아래 글 참조)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치양, 한산, 북한산, 한수, 대암산, 이진성, 이진천, 가까운 바다, 그리고 호랑이 등이 연결된다. 국내 사학자들은 이들 지역을 모두 한반도의 서울 근처로 추정한다. 그러나 한수, 한성, 한산 등의 명칭에서 한나라 한자가 들어 간다. 즉 한나라와 관련된 지역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내 사학자들의 한반도 추정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들 지역의 전투와 관련하여, 평양성, 한성 등이 언급되고, 패하, 수곡성도 언급된다.
필자는 수곡성이 다뉴브강변의 Brigetio(=Komarom in Hungary)지역으로 추정했다. 동남으로 흐르는 패하는 다뉴브강으로 보인다. (필자의 아래 글 참조)
https://blog.daum.net/lainfos/1567
https://blog.daum.net/lainfos/1569
그리고 상기 글에서 치양은 다뉴브강 하류의 흑해 연안 Castra Noviodunum (New Fort 뜻, in Romania)으로 추정했다.
그럼 이 치양의 위치가 상기 고구리사 초략 내용과 일치하는가 살펴 보자.
우선 다뉴브강 하류 흑해 연안의 Noviodunum (in Romania)은 바다와 가까운 점은 일치한다.
그러나 대암산과 가깝고 호랑이가 근처에 있는가?
필자는 대암산이 스위스에 있는 Matterhorn Mountain이 아닌가 한다.
이 산은 4478m의 높이로 큰 바위로 되어 있는 산이다.
Matterhorn Mountain in Switzerland (source : Wikipedia)
이 산은 보다 정확히 위치를 표현하면, 스위스, 이태리, 독일이 접하는 국경선에 있다.
그런데 이 산의 별칭이 "The Tiger of The Alps"이다.
왜 이런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최근 자료에서 호랑이의 분포 지도를 찾아 보면 유럽은 나타나지 않는다. (아래 지도 참조)
세계 호랑이 분포도 (자료 : Wikipedia)
그런데도 The Tiger of The Alps 란 별칭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과거 호랑이와 관련되어 있거나 현재도 호랑이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지역은 항가리 Komarom의 수곡성과는 가까우나, 흑해와 가까운 Noviodunum (in Romania)의 치양과는 다소 떨어져 있다.
서부 유럽에는 사자가 많은 도시의 문양으로 나타난다.
당나라는 사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신라인들이 사자를 구경하러 가기도 했다 한다.
필자는 중국의 활동지가 프랑스 지역이 아닌가 한다. 론강인 요수의 서쪽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프랑스에서 사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자료에서 찾아본 사자의 분포도에는 프랑스 지역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래 지도 참조)
세계의 사자 분포도 (자료 : Wikipedia)
그런데 프랑스 massif central지역에서 최근에도 Liger가 목격된다고 한다.
Liger는 Lion과 Tiger가 교배해서 나온 동물이다.
즉 Lion과 Tiger가 서유럽에도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The Tiger of The Alps란 별칭을 가진 Matterhorn Mountain이 호랑이와 연관되어 있고,
따라서 호랑이와 관련된 대암산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스위스에는 'Bern'이란 지역이 있다. 누군가 처음 만난 이를 따서 도시 이름을 지으려 했는데, 곰을 만나서 Bern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wikipedia자료는 말하고 있다.
필자는 이런 해석 보다도 곰이 많은 지역이라 Bern이라고 도시 이름을 칭했다고 판단한다.
이 지역은 알프스 산맥의 바로 위 지역으로 산악 지형이다.
단군조선의 수도 왕험성이었던 고구려의 평양이 이 지역 가까이 있는 쥬리히로 필자는 판단한다.
즉 단군 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가 이 지역에서 모두 등장한다.
그럼 마늘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현대 자료에서는 마늘은 이란이 원산지라 한다. 중앙아시아에서 많은 종자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가 프랑스에서 있을 때, 이들이 마늘을 많이 먹는 것을 보고 놀랐다.
스위스의 Matterhorn mountain 지역 주위에 고대로부터 유명한 소금광산이 있다.
즉 오스트리아에 있는 Hallsttat Salt Mines (할슈타트 소금광산)이다.
Hallsttat Culture(BC 700-BC 450)라는 켈트족 문명이 단군조선 문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최근 어느 유럽 학자가 이 소금 광산에서 발견된 고대인의 식성을 분석한 결과 채소와 마늘을 섭취했다고 한다. 즉 마늘도 이 지역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발해고 지리지에서 밝힌 바와 같이, 태백산이며, 장백산이며 동시에 백두산인 한민족의 성산이, 프랑스의 몽블랑산(Mont Blanc, 백산이란 의미)으로 판단한다.
발해고 지리지에 의하면 동서로 천리에 걸쳐 뻗어 있는 백두산이라 했다.
즉 알프스 산맥의 몽블랑산과 일치한다. 반면 한반도의 백두산 지형과는 거리가 있다. (아래 자료 참조)
단군은 태백산에 내려온 환웅의 자손이라 했다.
즉 단군 신화에 나오는 모든 요소가 다 이 지역에서 언급된다.
신라의 기림이사금은 AD 300년 태백산에 망제를 지내고,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왔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태백산이 몽블랑산이라면 신라는 이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스위스의 쥬리히 밑의 Sihl river를 위키피디아 자료에서는 Sillaha라 했다고 적고 있다. Sillaha, 즉 신라하(新羅河), 신라의 강인 것이다. 이 지역에 신라가 있었다는 뜻이다. (아래 글 참조)
필자는 낙랑과 대방이 이태리 북부 지역 좌우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신라 기림이사금의 자료와 일치한다. 고구려 미천왕이 점령한 서안평은 론강의 하류에 있는 것으로 추정했으니, 이 또한 위와 일치한다.
https://blog.daum.net/lainfos/1540
https://blog.daum.net/lainfos/1542
필자는 이베리아 반도에 있었던 서고트왕국을 고구려로 추정했다. 이 서고트왕국이 아랍세력에게 망하는데, 신라가 삼한 일통과정에서 남쪽의 고구려를 병합하는 과정으로 판단한다. 필자는 아랍세력이라 말해지는 우마이야 왕조를 신라로 추정했다. (아래 자료 참조)
필자는 동부여가 망한 후 북부여 원래의 위치로 돌아간 두막루가 덴마크 지역이라 추정했다. (아래 자료 참조) Danes란 부족이 AD 500년경 이 지역으로 침입해 들어 왔다고 위키 자료는 말한다.
또한 위키자료는 서부 프랑스에서도 훈족의 이동시 Dan족의 활동을 언급하고 있고,
발칸반도에서도 기원전 4세기에 Dardani 왕국이 있었다.
서구학자들은 신비의 Dan 왕국이라고 했다. 이들이 단군조선과 관련된 것인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Hammershus, 즉 해모수란 지명이 덴마크 동쪽 섬에 나타난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단군 이름이다.
그리고 이곳에 복원한 성곽이 고구려 성곽 모습이다. 고구려는 단군조선의 성곽을 이어 받은 모습이라 했다. (아래 자료 참조)
즉 단군과 관련된 지역도 가까이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주몽도 프랑스 론강의 지류인 Jabron river (졸본천 추정)에서 고구려를 세운 것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아래 자료 참조)
https://blog.daum.net/lainfos/1516
따라서 단군 신화의 유래지가 이 지역이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도 한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한반도와 관련 되어서는 아직 필자가 연구해 보지 못했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서진한 것인지, 서구학자들 생각처럼 코카서스 산맥지역에서 동서로 퍼진 것인지 아직 판단할 수 없다.
고대 유럽문명의 근간을 이루었던 켈트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서진한 것으로 서구학자들은 분석한다.
필자는 이들이 역사에서 감추어진 낙랑조선이나, 재야사학자 이을형씨가 언급하는 예맥조선이나 숙신조선인지도 모른다 생각한다.
https://blog.daum.net/lainfos/1553
https://blog.daum.net/lainfos/1551
https://blog.daum.net/lainfos/1552
서구학자들은 훈족의 활동 반경이 동아시아에서 동유럽에 걸쳐 있는 것으로 묘사하곤 한다.
필자는 훈족, 고트족이 모두 고구려를 칭하는 것으로 판단한다. (아래 자료 참조)
필자의 생각으로는 광개토태왕 시절 고구려는 스페인의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개토태왕으로 판단되는 고트족의 왕 Alaric I는 스페인까지 진출했다.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티베트의 전신 토욕혼은 포루투갈지역에 있었던 Suebi왕국으로 필자는 판단했다. 북위의 효문제는, 473년 북위에 항복한 토욕혼의 후예인 모용연수부에게, 492년 '서융중랑장 서해개국공 토욕혼왕'으로 책봉했다. 즉 토욕혼은 서해에 접한 것이다. 현재 티베트의 서쪽은 바다가 아니다.
https://blog.daum.net/lainfos/1529
필자는 광개토태왕의 비문에 나오는 여러 정벌 성을 발칸반도, 터어키, 다뉴브강변, 포루투갈에서 찾았다. 비문의 파노성은 발칸반도의 Pannonia지역에 있는 성, 비문의 고립반성은 다뉴브강변의 요새인 Golubac castle, 비문의 루매성은 터어키 보스포러스해협에 있는 Rumeli Castle, 비문의 사조성은 포루투갈 리스본의 Sae Jorge castle로 추정했다. 이들 모두 고구려의 성곽 모습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고구려가 동쪽으로는 어디까지 진출했는지 자료가 부족해 아직 모르겠다.
고구려의 성곽 모습으로 추정하면 동아시아를 넘어 아메리카까지 진출한 것으로 나타난다.
훈족의 을딘(Uldin)은, 평화 협상을 하러 온 로마 사절단에게, 해가 뜨는 동쪽에서 해가 지는 서쪽까지 정벌하겠노라고 말했다 한다.
광개토태왕 비문에서 나오는 동해고가 과연 어디인지 앞으로 풀어야 할 수수께끼이다.
호랑이 해인 올해 이러한 여러 가지 의문을 풀 수 있었으면 한다.
최근 Streaming 사이트에서 독일의 아우디사가 Tiger란 이름의 차 광고를 많이 한다. 호랑이해를 축하하며, 아시아계 소녀, 독일인 남성, 북아프리카계 남성(?)이 축구 볼을 다루며 광고한다.
필자는 월지족으로 판단되는 반달족이 고트족과 함께 중부유럽에서 북아프리카까지 이동하여 반달왕국 (=대월지국(?))을 세운 것으로 추정했다. 반달족(Vandals)은 부여족으로 판단되는 Burgundians과 함께 Suebi족, 즉 선비족의 일원이라 한다. (아래 글 참조)
폭스바겐사 그룹에 아우디, BMW가 있다. 이들이 있는 독일 남부 뮨헨지역은 Bavaria지역이라 한다.
Bavaria는 Barbarian 즉 고대 로마가 북쪽의 이방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켈트족, 슬라브족, 고트족, 반달족, 선비족으로 추정되는 Suebi족 등 게르만족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이 오랑캐 이(夷)에 해당하는 지도 모른다. 구이(九夷)는 색갈 별로 구분된다. 백이, 황이, 적이, 남이, 흑이 등등이다. 유럽에 삼색기가 많은 것도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상상해 본다.
필자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 등의 고조선 한민족 지역이 이태리 북부 좌측 론강지역에서 발칸반도에 걸쳐 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일시적이지만 그리고 자율성을 가진 한사군이 이들 지역에 있었다 한다면, 그리고 한나라가 론강인 요수의 서쪽에 있었다 하면, 한나라 한(漢)자가 들어 가는 한수, 한산, 북한산, 한성 등이 발칸반도에서 프랑스 지역에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온조가 백제를 창건한 위례성과 한산이 발칸반도에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아래 글 참조)
반면, 아직 확신이 없지만, 한수(Loire river)와 한성(Clermont-Ferrand)은 프랑스 지역에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고구려 문자왕 시기의 한성 공격(507년)과 고트족의 이 지역 점령(475-507)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추가 연구로 밝혀질 것이다.
백제 근초고왕 시기에 이 지역까지 진출하지 않았나 한다. 근초고왕은 한수 이남에서 병사 사열을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그 이후 동성왕, 무령왕 시기에 다시 한성(漢城)이 언급된다.
즉 백제가 다시 부활하는 시기인 것이다.
백제 동성왕 시기에는 북위와 전쟁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를 서양사와 연관하여 자료를 찾는 것도 큰 과제의 하나이다.
프랑스의 한 역사학자는 프랑크왕국이 북위라 주장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프랑크 왕국의 일부 역사가 북위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프랑크왕국의 대부분의 역사는 당나라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한다. 역시 앞으로의 연구 과제이다
필자는 혼란기의 남북조시대의 남조(南朝)가 백제와 신라(진) 지역일 수 있다고 판단한다. 남조의 진나라 시기에 한수가 언급된다. 그리고 진나라는 신라의 진흥왕과 매우 많은 교류를 한 것으로 기록된다. 또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 성왕이 포기한 한성과 평양지역 중 한성지역을 취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수가 프랑스 르와르강, 한성이 프랑스의 클레르몽페랑이라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왕은 신라와 협상하여 진흥왕의 평양성 공취를 막았다고 한다. 그래서 평양으로 추정되는 쥬리히의 바로 남쪽에 신라하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진흥왕 순수비가 함경도 평안도에 있었다 하는데, 필자는 함경도 평안도 지역이 프랑스 접경지역으로 판단하고, 경상 전라는 유럽의 동쪽에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터어키에는 지리산으로 추정되는 Girisun이라는 명칭의 산이 있다. Sabiha (사비하) International Airport는 이스탄불 국제공항의 이름이다. 필자는 백제의 의지왕 시기 신라와의 전쟁을 터어키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추정한 바 있다. (아래 자료 참조)
https://blog.daum.net/lainfos/866
북조는 고구려일 수 있는 것이다. 북위를 필자는 고구려로 판단했다.
남북조 시대에 남조국과 북조국들은 서로를 XX이(夷)라고 부르며 싸웠다 하는 중국 사서 기록을 본 적이 있다.
남북조가 모두 한민족의 역사인지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언제 한민족의 역사가 지금 현재의 중공지역이나 한반도로 옮겨 갔는지 밝히는 것도 매우 큰 과제이다. 최근 초조함을 드러낸 중공의 한민족 문화공정을 보면 저들은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중공지역이 한민족의 땅이었다는 것을 실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모든 연구 과제와 의문을 올 호랑이 해에 해결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한민족의 진정한 호랑이 모습을 자랑스럽게 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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