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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6. 19. 05:27돌궐 회흘 위구르

돌궐

최근 수정 시각: 2022-06-18 04: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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쾩 튀뤼크 카간국
???? : ???
Kök Türük Kağanlığı[1][2]
 
영토[3]
위치
외튀켄 의쉬[4]
정치체제
유목정
국가원수
존속기간
동돌궐
서돌궐
돌궐 제2제국
성립 이전
멸망 이후
1. 개요2. 명칭3. 역사
3.1. 돌궐 제1제국(동돌궐, 서돌궐)3.2. 동돌궐3.3. 서돌궐3.4. 돌궐 제2제국
4. 동돌궐 역대 가한5. 돌궐 제2 제국 역대 가한6. 돌궐 비문7. 터키는 돌궐의 후예?8. 현대9. 매체10. 관련항목



1. 개요[편집]

6세기와 8세기 사이에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시아 북부 스텝 지대(지금의 몽골카자흐스탄 초원)에서 활동한 튀르크계 민족과 그들이 세운 제국. 강력한 통합 국가를 세워 당대 중국사한국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현대 터키부터 중앙아시아의 여러 스탄국까지 튀르크 계통 민족국가들에서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다.

한 때나마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군림한 탓에 주변 민족들을 깔보았는데, 중국의 사서인 신당서 북적편을 보면 돌궐의 카간이 당나라 사신한테 "티베트는 의 자손이고, 거란족과 해족은 우리의 노예인데 왜 당나라는 그들한테는 공주를 시집보내면서 우리한테는 안 보내는가?"라고 화를 내는 내용이 언급된다.

2. 명칭[편집]

고대 튀르크어
???? : ??? (Kök Türük)
突厥

흔히 널리 알려져 있는 중국인들의 기록인 주서(周書)에 의한 음차 표기로는 突厥. 한국식 한자음으로 돌궐이라고 읽는다. 터키어로는 Göktürk Kağanlığı(괵튀르크 카안르으). 돌궐 문자로 적힌 비문을 직역하자면 쾩 튀뤼크(???? : ???, Kök Türük) 또는 튀르크(????, Türk) 정도가 된다.

즉, 돌궐인들이 쓰던 명칭은 쾩 튀뤼크(Kök Türük)이고 돌궐은 튀르크의 가차이다. 쾩 튀뤼크는 '신성한 튀르크'라는 뜻이다. 참조.

원어민 발음을 '투르크'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터키에서는 '튀르크'가 türk에 훨씬 가깝다. 중앙아시아에서는 투르크라는 발음이다. 좀 더 세세히 따지자면 현대인의 /ㅟ/[wi] 말고 고전적으로 쓰이던 표준어상의 /ㅟ/[y]가 türk와 음성 기호상으로 같은 발음이다. 비문 자료에는 터키쪽 발음으로 튀뤽[türük]으로도 나온다.

본 문서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돌궐이란 말을 사용한다.

3. 역사[편집]

3.1. 돌궐 제1제국(동돌궐, 서돌궐)[편집]

 

돌궐의 기원에 대해서 돌궐인이 지은 오르혼 비석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사서에서 엿볼 수 있는데 주서에서는 과거에 존재했다 이 시점에는 사라진 흉노의 별종(別種)으로 나와있으며[5] 수서에서는 돌궐의 선조가 아사나씨(阿史那氏)로 원래 평양(平凉은 수서에서 고구려(高句麗)를 부르는 호칭이다.)의 잡호(雜胡,호족)였는데 아사나씨의 500호가 유연으로 도망하여 야금업(冶金業, 제철)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또한 색국(塞國, saka로 추정되며 사카는 스키타이이다.)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saka에서 나왔다는 말과 같이 Tranoid 서양계 유목민으로 본다. 한문 사료에 기록된 돌궐의 신화를 보면 대개 이리를 돌궐의 시조로 삼고 있다. <북사> 등에는 북녘 색국의 아방보(阿諸步) 부락의 17[6]명의 아들 중 하나이자 이리의 소생인 이질니사도(伊質泥師都, Igil Nisha čor로 추정)가 아방보가 망한 뒤 여름 신 및 겨울신과 혼인하여 아들 넷을 낳았는데, 그 중 한 명이 흰 기러기로 변했으며, 또 다른 한 명이 검수(劒水)와 아보수(阿輔水) 사이에서 키르기즈를 세웠고, 또 한 명이 처절수(處折水)에서 나라를 세웠다. 큰아들인 눌도육설(納都六設, Nur Türk shad로 추정)은 발사처절시산(跋斯處折施山)에 살며 추위로부터 여러 부락을 구제해냈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 10명의 아내에게서 나온 아들들은 각자 성(姓)을 가지게 되었고, 눌도육설이 죽자 그들 중 아현설(阿賢設, Ashana shad로 추정)이 부족을 이끌었다는 전설이 있다.

동쪽으로 진출하여 몽골어 계통 언어를 쓰던 유연을 멸망시키고, 북아시아의 패자가 된 돌궐의 투멘(土門)은 '나라(il)를 세운 카간'이란 의미의 일릭 카간(Iliq Qaghan, 이리가한[伊利可汗])을 칭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551년에 경쟁관계인 유연과 우호적인 고구려의 신성, 백암성을 직접 공격하기도 했는데 고흘 장군의 맹활약으로 실패했다. 553년에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릭 카간이 이때 사망하고, 제2대 카간인 아이 카간(Ay Qaghan으로 추정, 아일가한[阿逸可汗])이 즉위했으나 같은 해에 역시 사망한다.

돌궐 제국은 제3대 무칸 카간(Mukhan Qaghan, 목간가한[木杆可汗]) 치세에 확고하게 기반이 닦였다. 그는 서쪽으로는 이란의 사산 왕조와 연합해 에프탈을 멸망시키고, 아무다리야 강을 경계로 국경을 설정해 트란스옥시아나에 발을 들였고, 동쪽으로 거란을 꺾고 북쪽 키르기스를 병합해 새외 모든 나라를 복속시켰다고 했다. 이 때 돌궐 제국의 영역은 서쪽으로는 카스피해, 동쪽으로는 고구려 인접지역인 흥안령 산맥까지 이르렀다. 과거의 유목제국 흉노와 유연의 서쪽 영역이 파미르 고원을 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더욱 서쪽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 시기 중국 북부는 북제와 북주가 다투고 있어 신흥제국 돌궐과는 서로 우호관계를 맺으려 했다. 당시 튀르크 또는 몽골계의 선비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북제, 북주를 건국하였는데, 돌궐은 중국을 공격하고 영토를 넓혀 속국으로 만들었고, 북제 북주의 중국의 분열은 돌궐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돌궐의 4대 카간이었던 타스파르 카간(Taspar Qaghan, 타발가한[佗鉢可汗])은 조공을 바치는 북주와 북제를 두고 "내가 남쪽의 두 아이들을 효순하게만 하면 어찌 물자가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7]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겠다.

돌궐제국은 동서로 매우 긴 국토였는데[8] 전성기 동서 돌궐의 영역을 모두 합치면 흑해에서 내몽골에 이르는 실로 광활한 영토였다. 이것은 유목민족 특성으로 항상 이동을 하며 살아서 유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또한 가끔 아마추어들이 활동하는 영문 위키백과나 사이트들에서 돌궐이 멸망했을 때 돌궐 모든 지역이 멸망한 것처럼 카스피 지역 근처까지의 돌궐 영토가 당나라 영토로 표기되는 잘못된 지도들을 만들어 업로드하고 올리는 경우가 있는데, 돌궐이 멸망한 것은 맞으나 돌궐 카간이 전투 중에 사망하여 남은 돌궐인들이 책봉을 받거나 당나라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경우에 중국 문헌에서는 돌궐 멸망으로 기록한 것이며 돌궐 카간이 사망하여도 돌궐 영토가 전부 당나라 영토가 되는 것이 아니였다.왜냐면 해당 돌궐 지역에는 당나라 유적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돌궐의 황제가 사망하여 돌궐국 자체의 위험이 사라졌지만 당나라도 그 먼 지역까지 영토를 둘 수는 없었다. 돌궐을 황제(카간)가 사망하면 일시적으로 멸망하여 돌궐 부족들이 다른 영토로 이동하는 것이지 돌궐 전 지역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였으며 돌궐이 멸망해도 긴 돌궐 영토에 당나라 유적 또한 전혀 발굴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를 쓴 르네 그루세의 말에 의하면 만약 그들이 단결할 수만 있었다면, 돌궐 제국은 천하무적이었을 것이라고 단언했을 정도. 그러나 이런 영토 한 지점에서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어렵다고 판단해 나라의 동서를 가까운 일족에 맡겨 셋으로 분할해 지배하는 체계를 갖췄다. 이전의 흉노에서 좌현왕, 우현왕을 뒀던 것과 비슷하지만 돌궐은 동방과 서방 모두 카간 칭호였다는 차이가 있다. 당연히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권력의 약화로 분권화됐다. 제5대 카간인 으쉬바라 카간(Ïšbara Qağhan, 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이 즉위하면서부터 아사나씨 종실 내부에 권력 다툼이 생긴 것이다. 582년 충돌을 직접적 계기로 돌궐은 동서로 분열된다. 자세한 내용은 사발략가한 문서 참조. 그리고 중국을 수나라가 통일하였지만 수나라 또한 돌궐에 조공하던 상태였다.

3.2. 동돌궐[편집]

북주 시절 우문태 밑에 있던 양견은 돌궐 군사의 협력을 받아 세력을 넓혔다. 그리고 양견은 수나라를 건국한다. 572년 동돌궐은 수나라 수도 장안까지 쳐들어가 백성 6만명을 끌고 간다. 579년 돌궐이 다시 장안에 들어가 나가질 않자 수문제는 공녀를 보내기로 하고 달래어 장안에서 철수한다. 동서돌궐의 싸움은 수문제의 이간책까지 겹쳐 격화됐다. 궁지에 몰린 사발략가한은 수나라에 지원을 요청했고, 587년 그의 동생 막하가한은 동부는 되찾았으나 서돌궐과 싸우다 전사, 이후 야미 카안(Yami Kağan, 계민가한) 치세 때 동돌궐은 서돌궐을 이기기 위해 수나라에 일시적으로 협력했댜.

하지만 수나라가 고구려와의 성과 없는 전쟁으로 인해 국력을 소모하고 내란으로 붕괴되자, 그 틈을 노려 수나라의 복속에서 벗어나 다시 세력을 길러 중원의 쟁패전에 개입하며 군벌들을 후원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9] 수양제의 손자 양정도를 내세워 돌궐의 꼭두각시로서의 수나라의 재건을 시도하기도 했고, 당나라를 세운 당국공 이연도 돌궐의 신하를 칭하는 굴욕을 맛보고 돌궐군의 도움을 받아 장안으로 진격하기도 했다. 이때 돌궐군이 장안 정복하는데 장안이 유린됐고 대부분의 장안 귀족들을 끌고가 꽤 긴 시간 장안에 공백이 생긴다. 또한 당나라는 돌궐에 복속하여 신하로서 돌궐을 섬긴다. 또한 동돌궐은 당나라에 대항하여 동쪽 고구려와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당나라는 돌궐을 상대로 외교적 이간책을 시도했다. 힐리가한에게 불만을 품은 조카 돌리와 욱사설이 당나라로 투항해왔고, 설연타를 비롯한 철륵계 부족들도 당의 사주를 받아 돌궐에 등을 돌렸다. 게다가 수년 동안 큰 눈이 많이 내려 유목하던 가축들이 폐사하는 악재가 겹치자 당나라는 상황을 간파하고 서기 630년에 대대적으로 지금의 내몽골 지역을 기습공격해 힐리가한이 죽어 일시적으로 멸망하였다. 하지만 돌궐의 카간이 죽어 공백기가 생긴 것이지 광활한 영토 전부가 멸망한 것이 아니다.

힐리가한이 사망하고 돌궐인들 대부분 서돌궐로 이동했지만 일부는 내몽골에 그대로 남았고, 634~645년 만리장성 근처 10개 주에 이주했다. 그러나 639년 돌궐 수령 결사솔의 반란을 계기로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재이주시켰다.

3.3. 서돌궐[편집]

위와 같이 동돌궐은 북위부터 이어온 선비족의 왕조들과 대립했고, 서돌궐은 돌궐의 발원지인 중앙아시아에서 이란의 사산 왕조아나톨리아 지역의 동로마 제국 등과 때로는 충돌하고 교역하며 존속했다. 그리고 영역을 넓혀 카스피해와 흑해까지 나아가 바다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다 당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며, 동돌궐(630년), 토욕혼(634~635년), 타림 분지의 도시국가들, 그리고 서돌궐과 연합한 고창 왕국(639년)을 공격하였다. 서돌궐은 마침 카를륵의 반란에 시달리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는데, 당나라는 서돌궐과 652년, 653년, 657년 전쟁하였다. 657년 마지막 군주 사발라가한이 죽어 서돌궐은 일시적으로 멸망하고 돌궐인들은 동쪽과 서쪽으로 이동한다. 카를룩이 서남쪽으로 서돌궐 지역으로 이동한다. 이것은 서돌궐 군주의 사망으로 인한 멸망으로 서쪽으로 긴 돌궐의 모든 영토가 멸망하는 것은 아니라 언제든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상태였다. 잘못된 지도로 인해 돌궐 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사발라가한은 죽었지만 서돌궐의 세력은 아직 건재하였다. 유목민의 지속된 공격에 방어하기 위해 하서 지역(현 감쑤성)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여 현 신장지역까지 방어하려 하였지만 돌궐의 반란과 공격은 지속되었고 20년쯤 지나 돌궐이 강대해졌음을 주위에 알렸다. 강대해진 돌궐은 예전 돌궐에서 지속된 돌궐 부족들이며 국명은 똑같이 돌궐이지만 현대에서 돌궐 제2 제국이라고 부른다.

  자세한 내용은 서돌궐 문서참고하십시오.

3.4. 돌궐 제2제국[편집]

신라와 토번의 성장세가 둔화되자 옛 동돌궐 지역에서는 679년 니숙복, 680년 복념을 카간으로 추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둘은 진압당했지만 683년 무렵에 쿠틀루크 카안(Kutluk Kağan)(혹은 일테리시 카안(İlteriş Kağan))이 중심이 되어 무장 봉기를 일으켜 당나라에서 독립하는데, 이를 후돌궐 제국 또는 돌궐 제2제국이라고 한다.[10]

부활한 돌궐 제국은 686~687년 시기에 몽골 고원에 있던 철륵계 부족들을 격파하고, 돌궐인의 성산 외튀켄으로 돌아왔으며, 쿠틀루크 카안의 동생 카프간 카안(Kapgan Kağan, 묵철가한) 시절에 전성기를 맞아 동쪽으로는 거란을 격파해 흥안령 산맥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북쪽으로는 바이칼호 부근의 바이르쿠를 복속시키며, 서쪽으로는 예니세이 강 유역의 키르기즈 동부 지역의 서돌궐 지역까지 진출했다.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695년 돌궐의 위세를 진정시키기 위해 묵철가한을 책봉하지만 실제론 제어할 힘은 없었고 오히려 돌궐에 도움을 받는 처지였다.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묵철가한의 도움을 받은 것. 대신 묵철가한은 당나라에 돌궐인들의 반환, 물자의 공급, 당나라 공주를 공녀로 보내라는 끈질기게 요구했고 측천무후는 굴욕적으로 이 요구를 다 들어줘야 했다. 이렇게 숙적 당나라를 밟고 다시금 동북아시아 스텝(steppe) 지대를 통일하고 강성해졌다.

그러나 716년 묵철가한은 바이르쿠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다가 기습당해 갑작스럽게 죽었고, 생전에 후계자로 정해뒀던 뵈귀는 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쿠틀루크의 아들인 왕자 퀼 테긴(중국명 궐특근)의 활약으로 내분은 진정되고, 퀼 테긴이 형 빌게 카안(Bilge Kağan, 중국명은 비가가한)을 즉위시켰다.[11] 그러나 이미 돌궐 2제국의 세력은 저물기 시작한 상황. 741년 이낼 카안(이연가한)이 사망한 뒤 6년 동안 지배층의 내분으로 여러 명의 카안이 살해, 폐위당하는 막장 상황에 접어들었고 744년에 복속해있던 위구르바스밀카를룩 세 부족 연합의 반란으로 외튀켄이 함락당해 사실상 멸망한다. 그리고 얼마 안가 위구르 제국이 나타난다.

4. 동돌궐 역대 가한[편집]

대수
왕호
재위기간
1대
토문
552 ~ 553
2대
과라
553
3대
사근
553 ~ 572
4대
지두
572 ~ 581
5대
섭도
581 ~ 587
6대
처라후
587 ~ 588
7대
옹우려
588 ~ 599
8대
염간
599 ~ 614
9대
돌길세
614 ~ 619
10대
사리불설
619 ~ 620
11대
막하돌설
620 ~ 630

5. 돌궐 제2 제국 역대 가한[편집]

대수
왕호
재위기간
1대
토둔철, 골돌록
682 ~ 691
2대
묵철
691 ~ 716
3대
복구, 양아지
716
4대
묵극련, 골출록
716 ~ 734
5대
?
734 ~ 741
6대
비가골돌록
741 ~ 742
7대
?
742
8대
오소미시특근
742 ~ 745
9대
백미특근골롱복
745

6. 돌궐 비문[편집]

몽골의 오르혼 강 유역에는 8세기 돌궐 제2 카간국 시기에 세워진 석비(石碑)들이 있다. 이들 금석문이 19세기에 해독되어 돌궐인들이 고유한 표음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졌다(돌궐문자).

20세기 중후반에는 Talât Tekin 등의 언어학자들이 돌궐어의 문법을 복원하여 돌궐어의 동명사 존재 등을 밝혔으며, 터키 정부의 주도로 비문 내용 전체를 복원하려는 목표의 프로젝트가 2000년부터 현지에서 진행 중이다.

해독된 내용 중 주요한 것들은 다음이 있다.

  • 괵튀르크 제2 제국의 개국공신으로 장군이자 재상인 톤유쿠크(Tonyukuk, 아사덕돈욕곡)의 석비가 있다. 비문의 자세한 내용은 아사덕돈욕곡 참조.
  • 오르혼 비석 서문에는 빌게 카안의 동생 퀼 티긴(Kül Tigin, 궐특근) 장군의 비문에는 고구려를 뵈퀼리(Böküli)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를 참조.

7. 터키는 돌궐의 후예?[편집]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중앙아시아에서부터 만주까지 호령하던 돌궐에서부터 기원한다고 말한다. 터키계 고고학자들의 연구로 돌궐은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한 장두형 인도유럽어족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북아시아 스텝(steppe) 지역(現 몽골초원)으로 진출했고, 돌궐 동서분열 이후 서돌궐이 쇠퇴하자 하자르 카간국(Khazars Kaganate)이 독립하여 볼가 강을 넘어 현재 러시아 남부와 키이우 지역까지 영토를 넓히게 된다. 하자르 카간국의 장군이자 오구즈(투르크멘) 계열의 벡[12]인 셀주크(Seljuqs)는 아랄해 북쪽에서부터 950년경에 중앙아시아의 호라산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부터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셀주크 왕조를 건국, 중앙아시아에서부터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를 거쳐 더 나아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나톨리아(현재 터키공화국)까지 영토를 넓혔다는 것이다.

돌궐을 자국 인공위성의 이름으로 사용 중이고, 터키 연구가로 유명한 이희수 교수 역시 터키사에서 언급하길 터키의 국부격인 아타튀르크는 돌궐이 터키 조상이라고 강조했고, 559년 돌궐이 중국을 정복한 걸 기념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959년 압델 멘데레스 대통령 체제에서도 터키는 돌궐 승전 14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고 서술했다. 지금도 꾸준히 유적 발굴 작업을 진행 중이다. 터키 정부의 돌궐 유적 발굴 관련 기사.#

 

물론 터키 오직 하나만이 돌궐인들의 후예인 것은 아니고 돌궐인 중 가장 서쪽까지 간 한 일파가 현대 터키인인 것이다. 터키가 현재 국력이 그나마 튀르크 계통 중 가장 크고 강해서 마치 터키를 튀르크라는 역사성의 대표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중앙아시아부터 캅카스까지이다. 자치구를 가지고 있는 위구르족이나 시베리아 지역까지 튀르크의 후예들은 유라시아 각지에 분포한다. 즉 터키는 돌궐족의 여러 후예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하지만 투르크 인이 본래 백인종이라는 주장은 세계 역사학과 고고학의 주류가 아닌 단지 현재 터키 고고학계의 주장일 뿐이다. 게다가 터키 고고학계는 투르크인이 장두형 인도유럽어족이 아니라 유로피드 투라니드 계통의 단두형 백인종이라고 한다. 두만선우와 묵특선우 이전부터 흉노제국 이래 기원전부터 북 아시아의 몽골고원과 고비사막을 주요한 터전으로 살아가던 투르크 유목민들이 후돌궐의 멸망과 9세기 위구르 제국의 소멸 이후 오구즈 투르크의 서남 아시아 이주 이래로 투르크 인의 주도하에 수많은 투르크 국가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현대 터키인은 국가 창건 주도 세력이었던 투르크계 외에 이란계, 그리스계 등이 천여년의 혼혈로 형성된 복합 인종이고 유전적으로 백인종 특히 인도유럽어족의 피가 많이 섞였으니 현대 터키 학자들은 셀주크와 오스만의 창건 세력으로 터키 건국의 주도 민족이었던 투르크 인을 지금의 자신들의 정체성과 일치시키려고 투르크 인이 마치 백인종의 한 갈래인 마냥 주장하지만 세계 사학과 고고학의 주류는 원시 투르크인이 분명 몽골로이드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스텝 유목민족의 역사에 대한 최고 권위자인 르네 그루쎄도 이런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고 이러한 주류 고고학, 역사학의 입장은 변한게 없다. 단지 현재 백인종에 더 가까운 외모를 가진 터키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로 인식하는 투르크 인을 단두 백인종으로 견강부회하여 자기 정당화를 하는 것일 뿐이다. 한 눈에 보아도 흉노인, 돌궐인이 백인종 아리안 족이라는 주장은 당치도 않은 궤설일 뿐이다. 한국 외대 출신으로 터키에서 유학하고 그들의 고고학과 역사학계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그들의 이론을 답습하는 이희수 교수가 그런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이상할 게 없지만 객관성이나 학문적 당위성은 불충분하다.

2000년대 이후 고고학과 유전학의 발전으로 터키가 돌궐로부터 이어어져 왔다는 터키인들의 오랜 믿음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최근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과거 몽골 고원과 중앙아시아에 있던 돌궐의 피가 현재 터키인들의 피에 흐르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비율은 미미하다. 터키인들의 유전자의 대부분은 이웃한 남유럽의 지중해 인종 또는 인도이란인 계열이다.

8. 현대[편집]

 
 
남동 튀르크
 
남서 튀르크
 
북동 튀르크
 
북서 튀르크
 
아르구(칼라지)
 
오구르 튀르크(추바시)
돌궐(튀르크)은 언어적 계통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볼드체로 표시된 것은 현재 자신들의 국가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고, † 표시가 있는 것은 현재 사멸한 종족이다.

9. 매체[편집]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캐먼치킨 개파이가 돌궐 출신이라고 언급된다.

10. 관련항목[편집]

[1] 현대 터키에서는 셀주크, 오스만 등과 구분짓기 위해 '뿌리의 튀르크'라는 뜻의 괵튀르크 카간국(Gök Türk Kağanlığı)라고 부른다.

[2] ??, 또는 ???(kök)은 '푸른', 혹은 '신성한'이라는 뜻이다.

[3] 이 영역은 <빌게 카간 비문>에 나오는 "앞(東)으로는 카드르칸 의쉬{Qadɨrqan yɨš, 대흥안령(大興安嶺) 산맥}까지, 뒤(西)로는 테미르 카프그{Temir Qapɨğ, 철문(鐵門)}까지 나아갔다고 한다"라는 기록에 의거한 것이나 카스피해까지 주장하는 영토는 의문점이 있다. 또한 서돌궐이 멸망할 때는 이미 카스피해 영토는 존재하지 않았고 서돌궐이 멸망할 때 남아 있던 영토는 동투르키스탄의 동부 극히 일부였다.

[4] 외튀켄 산지는 아직 그 명확한 소재지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현재의 항가이 산맥 북사면의 어딘가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로 이곳에는 후대 위구르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발가순,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 돌궐 제2제국의 군주 빌게 카간(비가가한)과 그의 동생 퀼 테긴(궐특근)의 제사유적 및 비문이 있는 호쇼 차이담 등이 분포하고 있는 몽골 초원의 가장 비옥한 중심지이다.

[5] 주서에서는 귀방과 철륵이 있던 위치가 언급되는데 돌궐이란 단어는 아니다. 훨씬 옛날에 있던 귀방과 철륵이 과연 돌궐과 같은 뜻인가에는 의문점이 많다. 또한 주서의 철륵이 돌궐과 상관없는 키르키스를 뜻한다고 주장하는데 이유는 철륵이 위치한 곳이 예니세이강 상류의 바이칼 호수 서쪽이며 키르기스가 있던 위치와 일치한다.

[6] 혹은 70명이라고도 하는데, 둘 다 돌궐이 성스럽게 여겼던 숫자 7이 반영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7] 주서 권50 열전42 이역전.

[8] 사실 이 동네 유목제국들이 과거 흉노부터 후대의 몽골 제국까지 대부분 남북보다 동서로 훨씬 긴 편이다. 남북으로 가면 갈수록 환경이 크게 달라지는데 위도대가 비슷한 동서는 비슷한 스텝 자연환경이 이어지므로 유목민들은 대부분 동서로 확장하는 게 더 편했다.

[9] 이때 돌궐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궁수가 무려 40만 명이나 되었을 만큼 그 힘이 강성하였고, 두건덕 같은 중원의 군벌들은 돌궐의 힘을 빌려 황제가 되어 보려는 속셈에서 돌궐에 앞다투어 사신들을 보냈는데, 그들의 수가 하도 많아서 길가에서 돌궐로 가거나 중원으로 돌아오는 사신들의 행렬이 서로 마주칠 정도였다고 한다.

[10] 이 독립 과정에서 고문간이 지휘하는 고구려 유민들이 돌궐에 협력했다는 기록이 있다.

[11] 이 퀼 테긴의 업적을 한문과 고대 튀르크 문자로 기록한 오르콘 비문은 19세기에 러시아인에 의해 발견돼 서양에 소개, 유명해졌다.

[12] bey,بك‎ “Beik는 터키계의 수장을 뜻한다

[13] 중국은 투르키스탄을 돌궐, 동투르키스탄을 동돌궐이라고 한다. 정작 동돌궐은 현 몽골에 있었고 동투르키스탄은 서돌궐의 일부 지역었단 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