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918-1392)

고려 종이 잠견지의 우수성

Chung Park 2013. 5. 18. 15:20

고려 종이 잠견지의 우수성  조회 : 38
한류의 세계화 > 한국의 종이 | 2010-02-25 (Thu) 14:12 http://blog.dreamwiz.com/skrc/12403875

단독] 세계 최고의 고려 '잠견지' 고대사서와 함께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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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출처 : 플러스코리아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3045§ion=section78§ion2=상고사/고대사

* 글쓴이 : 한문수 역사전문위원  

 

고려지(高麗紙)의 이름 잠견지(蠶繭紙). 송나라 서긍이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고려의 창고마다 서책이 가득하여 도저히 헤아릴 길이 없으며, 기서와 이서 또한 많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고사서들. 황제국의 찬란한 문화와 함께 수 많은 고사서를 장정했을 세계 최고의 종이 잠견지는 고려 멸망과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고려도경을 비롯, 고반여사(考槃餘事), 문방사고(文房肆攷) 등 고려지의 우수성을 예찬하는 고사서의 기록에서 선조들의 가녀린 숨결만을 확인해 볼 뿐 사라진 종이의 한 부분도 찾을 길이 없다.

‘고려의 종이 부채 학같이 나는 듯 / 高麗紙扇鶴翎翔
상당의 솔 그을음에 사향 향기라   / 上黨松煙麝澤香’


고려의 문신이며 재상이었던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고려지를 찬미한 시 구절이 그가 지은 동국이상국전집(제15권)에 남아 고려의 찬란한 문화를 다시 엿보게 한다.

잠견지(蠶繭紙). 세상 어느 민족도 감히 그 제조 기술을 흉내낼 수 없었던 고려의 종이였으며, 또한 최고의 품질로 명성을 떨치며 송, 당이 부러워하여 다투어 썼음을 이규보는 시를 빌어 노래했다.

고려지(高麗紙)라 불리운 잠견지는 ‘금견(錦繭: 누에고치로 만든 비단이다)을 가지고 만드는데, 종이의 색깔이 하얗기가 명주[綾]와 같고, 질기기가 비단[帛]과 같아서, 여기에다 글씨를 쓰면 먹이 진하게 배어 아주 좋다. 이것은 중국에는 없는 것으로, 역시 기이한 물품이다‘ 는 기록이 고반여사(考槃餘事)에 보인다.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은 해동역사(海東繹史) 문방류(文房類)에서 상등ㆍ중등ㆍ하등의 당나라 진적은
고려지로 맨 앞장을 장정한다. 모사한 육조(六朝)의 진적과 명나라의 명화(名?)의 두루마리 또한 고려지로 맨 앞장을 장정한다고 썼으며,

성호 이익(李瀷 1681-1763)도 그가 쓴 성호사설 제4권 견지(繭紙)편에 송 나라 조희곡(趙希鵠)이 지은 동천청록
(洞天淸錄)에 '고려지는 면견(綿繭)으로 만들었는데 빛은 비단처럼 희고 질기기는 명주와 같아서 먹을 잘 받으니 사랑할 만하여 이는 중국에 없는 것이니 역시 기품이다. 면견 또는 잠견(蠶繭)으로 난정첩을 썼다는 것도 이 고려지를 가리킨 듯하다.'라는 기록을 인용해 밝혔다.

이어 이익은 “지금 견지란 것은 일본에서 들어오는데, 내가 사서 글씨를 시험해 보니 참으로 좋은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능히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추측컨대, 조희곡이 봤다는 것도 일본에서 온 것인 듯하다”고 뜻밖의 증언을 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임진왜란을 겪은 지 1세기, 병자호란을 겪은 지 반세기가 경과된 기간으로 “능히 만들 수 없는 것”은 이미 제지기술의 맥이 끊겼음을 밝혔으며, “일본에서 온 것인 듯하다”고 하여 전란 중에 일인들이 잠견지를 훔쳐 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서화사(書?史)에는 “사릉(思陵)의 서화 가운데 상등의 진적(眞跡)과 법서(法書), 양한(兩漢)ㆍ삼국(三國)ㆍ
이왕(二王)ㆍ육조(六朝)ㆍ수(隋)ㆍ당(唐)의 임금과 신하들의 묵적(墨跡)은 고려지로 맨 앞장을 장정한다”고 하여 고려지의 우수성을 재 확인하고 있다.

비록 세상이 달라져서 모든 것 변하겠지만 / 雖世殊事異
마음을 일으키는 까닭은 같을 것이다       / 所以興懷其致一也
후세에 이 글을 읽는 사람들                  / 後之覽者
또한 이 글에 감회가 깊을 것이다            / 亦將有感於斯文


난정집서(蘭亭集序)의 말미 구절이다. 이 글은 서성(書聖)의 칭호를 받은 왕희지(王羲之 321-379)가 지은 것
이다. 353년 난정(蘭亭)이라는 정자가 완성되자 초청한 명사들 앞에서 쓴 글이다. 동진(東晋)사람인 그는 취중(醉中)에 누에고치로 만든 최상의 잠견지(蠶絹紙)에 쥐의 수염으로 만든 서수필(鼠鬚筆)을 들고, 해서체로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썼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왕희지( 王羲之307~365.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중국 최고의 서예가) 는 “내 글이 과거 어떤 문장가의
글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흐뭇해 했다는 기록을 보면 그 자부심 또한 잠견지가 있음으로 해서 그 필체를 더욱 돋보이게 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당 태종은 왕희지가 잠견지에 서수필(鼠鬚筆)로 쓴 난정진적(蘭亭眞跡)을 얻어
내어 그것을 모각(摸刻)하여 황자(皇子)와 근신(近臣)에게 내려 주었는데, 겨우 수본에 그치고 그 석(石)은 부서졌으며, 진본은 순장(殉葬)되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그가 쓴 완당전집(제4권)에서 밝혔다.

이에 앞서 285년 왕인 박사가 일본에 건너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것을 보면, 우리의 종이 역사는 삼국시대
에 크게 발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유기, 백제의 서기(書記), 신라의 국사(國史) 기록들은 우리가 발명한 우리의 종이인 잠견지에 쓰여 졌기 때문일 것이다.

610년 고구려의 담징이 제지술과 조묵법(造墨法)을 일본에 전한 기록과 751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석가탑
탑신에서 발견되므로써 당시의 목판과 제지술이 얼마나 훌륭했었는가를 확인해 주고 있다. 종이(紙) 뿐만 아니라 벼루(硯), 붓(筆), 먹(墨) 등 문방류(文房類)는 신라 때부터최고의 품질로 이름이 나 宋, 唐이 부러워했고 다투어 썼다는 기록도 있다. 

▲ 무구정광대다라니경     ⓒ플러스코리아


         *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751년 국보 126호 6.7cm X 622.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http://www.tourguide.co.kr/local/local_detail.htm?pCode=CULTROPA0006

윗 글에서 보듯 양한(兩漢)시대에 이미 고려지로 장정했다는 기록으로 보면, 잠견지의 발명 기초를 다진 연대
는 그 훨씬 이전 단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 가야한다. 3세 단군 가륵(BC 2182) 때 '가림토' 문자를 만들고 배달유기(培達留記)를 편수하였다. 그 기록이 갑골, 견골에 새겨지고 목간으로 옮겨졌으며, 후일 잠견지에 옮겨 썼다는 뜻이다.

천자와 제후는 공상(公桑. 桑田)과 잠실(蠶室)을 가지고 있어서, 궁실의 부인(婦人)들은 반드시 공상(公桑)에
뽕나무를 심어 잠실(蠶室)에서 누에를 쳐서 옷감을 짜는 일을 의무적으로 하였다. 시경(詩經) 국풍에도 ‘단비 내리고 난 뒤에 말구종에게 명해서 새벽별 보고 일찍 멍에 메워 상전(桑田)에서 머무니(靈雨旣零 命彼?人 星言夙駕 說于桑田)’라 하여 비단과 종이의 역사가 동이족에 의해 발명되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1409년 태종은 주(周) 성왕(成王) 때의 공상(公桑) 제도를 본 떠 궁원에 뽕나무를 심도록 했으나, 제지술은
보급되지 않았다.

세계 4대 문명권에서는 종이 이전에 언어나 그림의 기록 전달 매체로서 다양한 재료들을 이용했다. 원시시대
에는 흙. 돌. 동물의 뼈에서부터 점토판, 동물의 가죽, 나무판 등이었고 황하문명권에서는 죽간(竹簡)과 목간(木簡)이 이용되었다.

▲ 점토판, 갑골, 죽간, 견골     ⓒ플러스코리아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개발되었던 양피지(parchment), 이집트 문명권의 파피루스(papyrus), 그리고 마야, 아즈텍 문명권 등 유럽 각 지역에서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개발하였다. 

특히 양피지나 파피루스 같은 것은 전 세계에 전파되기 전까지 약 3천 년 이상 종이의 역할을 대신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위 종이 이전 기록에서 우리의 것을 찾아보자.

갑골문을 썼던 은나라는 동이 겨레이며,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고『고사변(古史辯)』에서도 "동이족은 은나라
사람들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뿌리가 같다(東夷與殷人同族 其神話亦同源)"라고 했다.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은 한웅시대 태호복희 직후 여와 황제 때 이룩한 것이며, 1천 년 후
이집트 문명권이 형성되었다. 이들 문명권에서 쓰여진 헬라어의 상형문자는 우리의 문자와 유사하고, 희브리라는 말은 ‘강을 건너 온 자’라는 어원으로 보아 동이 겨레의 진출에 따른 결과이며 천손민족의 얼이 깊숙이 배어있음이다.

흔히 종이 역사를 다룰 때마다 105년 후한 때 처음으로 채륜에 의해 제지술이 발명되었다고 하나, 서화사(書?
史)에서 보듯 “양한(兩漢)ㆍ삼국(三國)ㆍ이왕(二王)ㆍ육조(六朝)ㆍ수(隋)ㆍ당(唐)의 임금과 신하들의 묵적(墨跡)은 고려지로 맨 앞장을 장정한다”고 하였으니, 제지기술 또한 왜곡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는 동이족을 의식, 의도적으로 감추었음이 드러난다. [참조: '종이' 어느 민족이 발명했나? 

 

http://pluskorea.net/sub_read.html?uid=11207§ion=section1§ion2=] (운영자 심제의 글 38만 클릭을 기록햇다)

고구려의 섬세하고 다양한 제지기술은 원료·용도·생산지에 따라 크기·지질·색깔·이름 등을 달리해 다양하게
만들어졌을 것이며, 이규보가 시구절로 그 사실을 알린 것처럼 숱한 전쟁사에서도 고려 때까지 그 맥을 면면히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244년과 245년 두 차례에 걸쳐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丘儉)의 침입을 받아 수도인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당하면서 대부분의 서책들이 불에 타버렸다.

600년 되던 해 영양왕(11년)은 태학박사(太大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옛 역사책을 요약하여 신집
(新集) 5권을 만들었음이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편에 보인다. 여기서 옛 역사책은 단제께서 신지 고글에게 명하여 편찬한 배달유기(培達留記)를 말하고, 고구려 유기(留記) 1백 권이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대야발(大野勃)은 단기고사(檀奇古史) 서문에서 고구려 멸망 당시 소정방과 설인귀가 국서고(國書庫)를 부수고, '단기고사와 고구려사, 백제사'를 전부 불태워 버려 13년 동안 자료를 수집, 다시 편집했다고 밝히고 있어 유기 또한 고구려 멸망과 함께 소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서(國書)의 중요성으로 미루어 이 때의 유기는 잠견지로 장정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751년 당나라때 고구려 출신 '고선지' 장군이 당나라와 사라센간의 '달라스 전투에서 패해 포로가 된 사병들에 의해 국가 기밀인 종이 제작기술이 적국에 전해지고, 전 세계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의 종이 제작 기술은 페르시아와 이집트를 거쳐 1150년 유럽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스페인에 전달되었다. 이어 프랑스(1189년), 독일, 이태리, 벨기에, 영국(1490년), 러시아(1566년), 노르웨이(1650년), 미국(1690년), 그리고 캐나다(1803년) 등에 전달되어 천손민족의 종이 기술이 전 세계 인쇄문화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서긍의 찬사로 확인되었던 고려의 수 많은 서책의 행방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말선초 당시의 실세였던 정도전(鄭道傳)은 앞장서서 산간 곳곳까지 뒤져 수거하여 불태웠으며, 태종 12년인 1412년에는 역대 사서로 알려진 신지비사(神誌秘詞) 즉 신비집(神秘集)이 괴탄, 불경하다 하여 불태워 졌다. 또한 이색의 문집 일부도 이 범주에 넣어 수거했다.

이 기록은 북부여기(北扶餘記)를 저술한 복애 범세동(伏崖 范世東)의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에서 확인된다. 이 책 또한 조선 5백 년 동안 금서(禁書)로 묶였다.

조선 건국과 함께 국시가 된 유교의 유입은 통치 강화의 수단이 되어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전반에 걸쳐 눈에 거슬리는 것들은 모두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미명 아래 난도질당했다. 또한 고려를 타파하고, 조선 개국에 앞장 선 유학자 사대부들의 권력 유지책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대표적인 예로 성종조에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삼경(三京)·삼소(三蘇)”라 하여 신지비사(神誌秘詞)의 내용을 거론하며 “지금 그런 글을 얻는다면 오히려 불살라야 마땅할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 글”이란 바로 '고대사서를 지칭한 것' 으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이 분서 기록을 남겨 암시한 내용과 부합된다.

조선조가 개국 초부터 고대사서를 수거한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행방은 어떻게 되었고,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지금까지 수거된 고대사서는 단 한 권도 보이지 않는다.

단제로 부터 이어 온 천손민족의 영혼과 생명이 깃든 고사서와 함께 세계 최고의  제지기술로 만들어진 '잠견지'의 맥은 대륙 동이의 터를 감추기 위해 이 시점에서 처절하게 끊긴 것으로 파악된다.

한 나라의 역사가 폐기되는 것은 반드시 외세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고대사서는 불타고 있는가?> 추적 과정에서 보았다. 이 보다는 내적으로 썩고 병든 정권과 이를 탐하는 권력 유지자들의 부화뇌동과 그들의 역사의식 결여에서 무너짐을 보았다.

'고려사'는 60여 년의 세월을 건너 단종 2년인 1454년 10월 13일 인간(印刊)된다.

한 시대를 오도하기 위해 6대 왕조 60여 년 반복적 개찬, 개수 작업을 한 것으로 보아 끊임없는 갈등과 문제 제기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래 글을 눈여겨 보자.

검상(檢詳) 이극감(李克堪)이 당상(堂上)의 의논을 아뢰기를,
“《고려전사(高麗全史)》는 사람들의 시비(是非)·득실(得失)이 역력(歷歷)히 다 갖추 기재(記載)되었으므로,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가 《고려전사(高麗全史)》가 출간(出刊)되면 사람들이 모두 시비(是非)를 알까 두려워하여 다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만을 인간(印刊)하여 반사(頒賜)하고, 《고려전사》는 조금 인간하여 다만 내부(內府)에만 간직하였습니다.”

실록이 전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모두 시비를 알까 두려워’ 라고 했다. 내부 비치용으로 일부만 간행하여 간직했다고 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대륙을 다스린 황제국 고려, 송나라 소동파가 고려에 먹힐까 두려워 고려 금수론으로 철저히 배격한 이유들을 철저히 감추고 깔아 뭉게 버린
고려의 역대 사서와 잠견지 등 문화적 사실(史實)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음이 자명하다.

고려 멸망 6백여 년, 잠견지의 맥을 잇고자 불철주야 복원작업에 진력하는 종이 연구가들이 있으니, 희미하나
마 이제 그 옛 자취를 찾아 볼 수 있을까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