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김수로왕 부인 허황옥과 카르타고의 Dido 여왕
I. 머리말
우리는 김수로왕의 부인이 된 허황옥이 인도에 있는 아유타국의 공주가 와서 금관가야의 부인이 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다. 아유타국이 어디에 있던 간에 일반적으로 인도에서 한반도까지 오는 것은 어려운 경로라는 판단들은 하는 것 같다. 필자는 김해(金海)라는 명칭에서 이미 한반도의 김해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고 판단했다. 바다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김수로왕과 석탈해의 다툼에서 바다 건너에 신라가 있다고 하는 기록을 보면 당연하다고 추정된다. 그러면 이러한 김수로왕의 부인이 된 허황옥 공주는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김수로왕의 금관가야는 어디인가가 궁금해지는데, 본 글에서는 허황옥 공주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 주로 살펴 보고, 다음 글에서는 금관가야의 위치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
II. 허황옥의 보석, 바다 여행과 본국의 정쟁 가능성
허황옥의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은 점을 인지할 수 있다.
1) 허황옥의 긴 뱃길 여행
아래 기록에서 보듯이 우선 긴 장거리 뱃길 여행을 온 듯 하다. 그 당시에 연안을 따라 항해를 했을 것 같은데, 15명의 작지 않은 인원을 태우고, 장거리 여행을 한 것 같다.
"부인은 월지국 혹은 마우리아 왕조 공주로 추측되는 허황옥(許黃玉)이며, 189년까지 무려 158년 동안이나 살았다는 신화적 인물이다.[4] 수로왕은 허황옥을 태우고 온 15명의 아유타국 선원들에게 450필의 비단을 내렸는데 이는 대단히 많은 물량이며 또한 옷감 450필, 쌀 150섬을 싣고 움직일 수 있는 배를 이미 갖고 있었다는 것은 가야가 연안 항해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뱃길도 꿰뚫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료 : 수로왕, 위키백과)
2) 허황옥의 보석
아래 자료를 보면 허황옥은 보배로운 물건들을 싣고 왔다고 했다. 이름부터 황옥(黃玉)이니 그러한 이미지를 풍긴다. 그러나 황옥은 동양인의 황색 피부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먼 길을 보물을 싣고 이동한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당시에 해적들로부터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해적을 피하는 뱃길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다가 본국으로 돌아가게 쌀과 베필을 주었다는 것은 이들이 돌아 가는 항로를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이전부터 알고 있는 무역항로인지 모른다. 즉 이들은 장거리 해상무역을 하고 있어 가는 길을 잘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보배로운 물건은 해상무역을 하는 물품인지도 모른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라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날마다 물건을 풍부하게 주고, 그들이 싣고 온 보배로운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어서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했다."
(자료 : 수로왕, 나무위키)
3) 아유타국 : Cilicia
필자는 허황옥이 출발했다는 아유타국과 이름이 비슷한 곳을 알아냈다. 지중해 동쪽끝 북쪽에 있던 지역이다. Cilicia지역이다. (아래 지도 참조)
Armenian Empire in BC 80 (source : Wikipedia)
아래 내용은 필자가 과거 금관가야가 아르메니아에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쓴 글의 내용이다. Commagene왕국의 왕들이 Aytap의 Iotapa princess와 결혼을 했다는 기록을 보고 판단한 것이다. 즉 김수로왕의 시기와 유사한 시기에 150년 정도 Antiochus가문이 왕으로 재위한 것도 이런 판단을 하게 했다.
"그런데 우연히도 금관가야로 판단되는 Commagene Kingdom에서 Antiochus I세부터 Antiochus IV세까지 142년(BC 70 - AD 72)이 지속된다. 그리고 그들의 왕비는 모두 Iotapa princess라 서술된다. 이것이 김수로왕이 아유타공주와 결혼하여 이 지역을 흡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래 Commagene 왕국의 왕계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Kings of Commagene, 163 BC – 72 AD
- Ptolemaeus of Commagene 163–130 BC
- Sames II Theosebes Dikaios 130–109 BC
- Mithridates I Callinicus 109–70 BC
- Antiochus I Theos of Commagene 70–38 BC
- Mithridates II of Commagene 38–20 BC
- Mithridates III of Commagene 20–12 BC
- Antiochus III of Commagene 12 BC – 17 AD
- Ruled by Rome 17–38
- Antiochus IV of Commagene 38–72 and wife, Julia Iotapa
- (source : Wikipedia)
- Antiochus IV의 Cilicia 지역 지배
아유타공주는 Commagene 왕국 바로 좌측에 있는 Cilicia 지역 (상기 지도 참조)의 공주이다. 여기에 Antiochus IV 는 Aytap (아유타) 도시를 세우는 것으로 기록되며, 이후 이지역을 같이 지배하는 것으로 서술된다. (아래 자료 참조)
"In 38 AD, Caligula reinstated Antiochus III's son Antiochus IV and also gave him the wild areas of Cilicia to govern. Antiochus IV was the only client king of Commagene under the Roman Empire. "
(source : Kingdom of Commagene, Wikipedia)
"Prior to the 1st century, there is no archaeological evidence found that Aytap could have been earlier inhabited by other clans of people. The city was founded by the King Antiochus IV of Commagene, who was of Armenian, Greek and Median descent. Antiochus IV founded this settlement around 52 and named the city in honor of his late sister-wife, Queen of Commagene Iotapa, who was Queen from 38 until her death around 52 of Commagene."
(source : Aytap, Wikipedia)
"Antiochus IV chose this site to establish the city, because there are 2 bays close to each other, giving shape of a natural harbor with a higher plateau for the town to be protected from the sea and any invasions from the sea. The natural port measures 50–100 metres. The peninsula between the 2 bays is on a high hill, which is connected to land and extends to the sea. In the peninsula, ruins remains of an Acropolis. Huge walls were built around the Acropolis to protect the monument. It is known during the reign of Antiochus IV, 38-72, in some cities in Cilicia, including Iotapa, mints were producing coins honoring Antiochus’ sons with Iotapa, princes Gaius Julius Archelaus Antiochus Epiphanes and Callinicus. These mints were producing coins honoring Iotapa, years after her death. "
(source : Aytap, Wikipedia)
그러나 아유타 공주 허황옥은 긴 바다여행을 한 후 김수로왕에게 온 것이다. 이점을 간과한 것이다. 그러나 허황옥의 아유타국은 이곳 Cilicia지역이 맞는 것으로 최근 다시 판단하게 되었다.
4) Levant지역의 허씨 가문의 허황옥
그럼 허황옥이란 이름의 허씨가 이 지역에 있을 수 있는가? 최근까지도 의문을 품어 왔는데, 어느 순간, 'Ben Hur 벤허'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필자가 어릴 때 명작으로 열광하며 보았던 영화 제목 '벤허'는 허씨 집안의 아들이라는 뜻이란다. (나무위키 자료 참조) 그런데 벤허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표현된다. 영화는 픽션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어떤 일화나 설화를 바탕으로 또는 어느 역사를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이는 로마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미국인 작가 루 윌러스(1827-1905)이 쓴 역사소설에 바탕을 두어 만든 영화인데, 허씨 아들이라는 뜻의 벤허를 등장 시킨 것은 자료를 바탕으로 쓴 역사소설이라는 추정이다.
즉 이러한 추정에 의하면, 아유타국의 허황옥은 지중해 동쪽 끝에 있는 Aytap국에서 온 허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도 지중해 동쪽끝에 있어 지역적으로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 같은 페니키아 문화권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내용에서 이곳 레반트지역에서 로마로 배로 이동하는 상황이 나온다. 즉 이 당시에도 연안을 이용했는지는 몰라도 배로 수시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육지로 이동하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이다.
아래 지도에는 지중해에 있는 페니키아인 식민지 도시를 나타낸다. 이중에서 위에서 언급한 허황옥의 고국 Aytap(아유타국)지역인 Cilicia (동쪽 끝 Arvad 북쪽)가 보라색 점으로 나타나 있다. 즉 아유타국도 페니키아인 식민지의 하나라는 것이다.
Map of Phoenician colonies, 11th-8th BC (source : Wikipedia)
(By Vikarna & Kalicine730 - This file was derived from: Phoenician colonisation be.PNG,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88266410)
지금도 김해 허씨는 허황옥의 후손으로 칭하며, 한국에 있다 한다. 역시 김해는 바다를 가리킨다. 김해 김씨도 가야의 후손이라 했으니, '김해'는 가야를 가리키는 '가라해'를 말하는지 모른다.
필자는 가라해가 지중해에 있는 'Tyrrhenian Sea' (이태리 서쪽 바다)라고 추정했다. Tyrrhenian Sea는 페니키아 문명권인 서쪽 지중해 지역이다. 이태리 동쪽 지중해는 페니키아인들의 라이벌인 그리스인들의 해상 무역권이다. 과거 페니키아인들이 지중해를 무대로 해상무역을 지배했으나, 트로이전쟁이후 페니키아인들은 서쪽 지중해로 그 영역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5) 정쟁으로 인한 피난 가능성
허황옥의 뱃길 이동은 부모의 꿈에 상제가 나타나 혼인을 위해 이동하라 했다 한다. 동부여로 이동할 때도 꿈에 나타나 이동하라는 표현과 유사한 형식이다. 즉 국내상황으로 이동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동한 것을 미화 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필자는 허황옥이 공주의 신분이고, 또한 15명이나 되는 선원을 데리고, 보물들을 싣고 장거리 항해를 한 것을 보고, 정쟁에 의한 피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공주의 신분이 왕가에 관련되었을 것이고, 과거 흔하던 왕권다툼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를 나타내는 온갖 보물, 그리고 뱃길을 아는 선원들을 태우고, 과거 다녔던 해상 무역항로를 따라 이동한 것이 아닌가 판단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허황옥에 대한 추측을 하고 있던 필자가, 페니키아 문명의 고향인 Tyre에서 이동한 Carthago의 Dido여왕 스토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필자의 허황옥에 대한 추정과 너무나 비슷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III. Tyre에서 이동한 Carthage 여왕 Dido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들의 지중해 식민지 중 하나로서 가장 부유한 도시국가였다. 그래서 인구도 75만명으로 제일 많았던 것으로 기록된다. 그런데 카르타고는 Tyre(티레)에서 이동해 온 Dido 여왕이 세웠다 한다. Tyre는 레바논지역에 있는 도시로서 페니키아인들의 원래 거주지였다. 이러한 내용이 위의 허왕후의 이동 및 김수로왕과의 결혼과 묘하게 일치한다. 지중해 동쪽 끝에서 튀니지아까지 이동한 것이다.
그리고 김수로왕 뇌질청예의 어머니 '정견모주' 등의 이야기는 여왕이 최초 가야를 설립한 것 같은 뉴앙스를 준다. 즉 필자가 금관가야 지역으로 추정한 카르타고가 김수로왕의 이주민 왕후와 묘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허황옥의 이름에서 보듯이 많은 보물과 귀금속의 동반은 이들이 매우 부유한 나라에서 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허황옥과 함께한 사공들이 돌아 갔다는 이야기는 원래 있던 국가가 계속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나라가 망해서 망명하는 경우가 아닌 것이다. 비록 꿈에 나타나 공주를 멀리 시집보내라는 이야기는 동부여의 이동과 같은 형식을 취하지만, Tyre지역에서 정쟁으로 공주를 같은 문명권의 다른 지역으로 피신 시킨 것일 수 있다. 카르타고는 당시 지중해의 여러 페니키아 식민지 중의 하나였다.
아래 지도를 보면 당시 페니키아인들은 연안항로를 따른 무역로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Map of Phoenician trade networks, 1200 - 800 BC (source : Wikipedia)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허황옥 이야기는 카르타고의 Dido여왕의 이주와 매우 유사한 내용을 보인다. 비록 시기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BC 814년(또는 BC 825) 말고도 BC 146년 (자살에 관련한 내용)이라는 주장도 있으니 신화적 이야기는 그 시기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아래 디도여왕에 대한 자료를 살펴 보자.
1) 카르타고 Dido 여왕의 이동 동기
아래 Dido에 관한 내용을 보면, 카르타고로의 이동 동기는 역시 왕가 내의 다툼으로 기록된다. 즉 Dido는 bother Pygmalion과 같이 남매로 Tyre왕의 자녀였는데, Brother인 Pygmalion이 왕이 된 후 7년차, Dido의 남편인 Acerbas가 보물이 많다는 것을 알고, 그를 죽여 재물을 취하려 한다. 그러나 이 소문을 들은 Dido는 보물을 숨겨 배에 싣고 카르타고 도망친다는 내용이다. 아마도 Dido의 남편 Acerbas는 페티키아의 해상무역에 많은 재물을 모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그의 부에 위협을 느낀 Pygmalion이 그를 죽여 재물을 탈취하려 했을 것이다. 즉 Dido가 일부 장군이 섞인 선원들과 함께 카르타고까지 갈 수 있던 것은 그동안 페니키아의 해상무역에 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중해 북아프리카의 연안을 통해 항해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사이프러스에 잠시 머물렀다는 점, 그리고 중간 기착점에서 보급을 위해 일부 여자들을 싣고 갔다는 점 등이 이를 말해 준다. 한척의 배가 아닌 여러 척의 배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Dido (/ˈdaɪdoʊ/ DY-doh; Ancient Greek: Διδώ Greek pronunciation: [diː.dɔ̌ː], Latin pronunciation: [ˈdiːdoː]), also known as Alyssa or Elissa (/iːˈlɪsə/ ə-LISS-ə, Ἔλισσα),[1] was the legendary foundress and first queen of the Phoenician city-state of Carthage, located in modern Tunisia. Known only through ancient Greek and Roman sources, most of which were written well after Carthage's founding, her historicity remains uncertain. In most accounts, she was the queen of the Phoenician city-state of Tyre, today Ṣūr in Lebanon, who flees tyranny to found her own city in northwest Africa.
Details about Dido's character, life, and role in the founding of Carthage are best known from the account given in Virgil's epic poem, the Aeneid, which tells the legendary story of the Trojan hero Aeneas. Dido is described as a clever and enterprising woman who flees her ruthless and autocratic brother, Pygmalion, after discovering that he was responsible for her husband's death. Through her wisdom and leadership, the city of Carthage is founded and made prosperous.......
Rumor told that Acerbas had much wealth secretly buried and King Pygmalion had Acerbas murdered in hopes of gaining this wealth. Dido, desiring to escape Tyre, expressed a wish to move into Pygmalion's palace, but then ordered the attendants whom Pygmalion sent to aid in the move, to throw all Acerbas' bags of gold into the sea apparently as an offering to his spirit. In fact these bags contained only sand. Dido then persuaded the attendants to join her in flight to another land rather than face Pygmalion's anger when he discovered what had supposedly become of Acerbas' wealth. Some senators also joined her in her flight.
(source : Dido,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arthage)
이러한 내용은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피신하는데 많은 참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2) Dido 여왕의 연대기
아래 Dido여왕의 연대기를 보면 BC 839-BC 759년까지 80년을 산 것으로 기록된다.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장수한 셈이다. BC 825년 Tyre를 떠났으니, 14살에 떠난 셈이다. Cyprus를 거쳐 카르타고 근처에 온 것은 떠난 해에 도착했으나, 주위에서 11년을 지내다가 BC 814년에 카르타고를 설립했다고 한다. 즉 주위에서 세력을 키워 카르타고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This understanding of the chronology related to Dido and her company resulted in the following dates for Dido and her immediate relations, as derived from F. M. Cross[8] and Wm. H. Barnes:[9]
- Baal-Eser II (Ba‘l-mazzer II) 846–841 BC
- Mattan I 840–832 BC
- 839 BC: Dido was born in Tyre[dubious – discuss]
- 831 BC: Pygmalion (in Phoenician pmy(y)tn or p‘mytn, i. e. Pu'mayyaton which is rendered in the Greek tradition as Pygmalion) begins to reign
- 825 BC: Dido flees Tyre in 7th year of Pygmalion, after the death of Acerbas
- 825 BC and possibly some time thereafter: Dido and companions on Cyprus
- Between 825 BC and 814 BC: Tyrians build settlement on island of Cothon
- 814 BC: Dido founds Carthage on mainland
- 785 BC: Death of Pygmalion
- 759 BC: Dido died in Carthage[dubious – discuss] ............
(source : Dido,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arthage)
이러한 내용을 보면, 허황옥이 16살에 떠난 것은 이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보편적인 일로 판단된다. 또한 당시의 페니키아인들의 활발한 해상무역의 항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
3) Dido 여왕의 도피 여정
사이러스에 들러 승려 Jupiter가 동행했다고 한다. 아울러 80명의 여자들을 사이러스에서 구해 동행했다는 것이다. 즉 상당히 큰 선단을 이루어 갔다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북아프리카에 도착해 베베르족 왕 larbas에게 조그만 땅을 구해 정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한 Utica의 많은 베베르족 사람들이 와서 카르타고 건설에 동참했다는 것이다. 현지 세력과의 융합을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Byrsa라는 숨어 있는 기지라는 뜻의 수군기지를 건설한 것으로 말해진다.
"The party arrived at Cyprus where the priest of Jupiter joined the expedition. There the exiles also seized about eighty young women who were prostituting themselves on the shore in order to provide wives for the men in the party.
Eventually Dido and her followers arrived on the coast of North Africa where Dido asked the Berber king Iarbas[12][13] for a small bit of land for a temporary refuge until she could continue her journeying, only as much land as could be encompassed by an oxhide. They agreed. Dido cut the oxhide into fine strips so that she had enough to encircle an entire nearby hill, which was therefore afterwards named Byrsa "hide". (This event is commemorated in modern mathematics: The "isoperimetric problem" of enclosing the maximum area within a fixed boundary is often called the "Dido Problem" in modern calculus of variations.) That would become their new home. Many of the local Berbers joined the settlement and both Berbers and envoys from the nearby Phoenician city of Utica urged the building of a city. In digging the foundations an ox's head was found, indicating a city that would be wealthy but subject to others. Accordingly, another area of the hill was dug instead where a horse's head was found, indicating that the city would be powerful in war"......
(source : Dido,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arthage)
이러한 내용은 허황옥이 김수로왕에게 와서 현지인세력에 융합하는 내용을 보여 준다. 김해 허씨가 김해 김씨와 같이 존재하는 것은 허황옥의 동반한 세력들로 만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들이 김해 허씨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수로왕이 일부 선원들을 돌려 보냈다는 것은 이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것일 수도 있다.
4) Pygmalion의 실존 여부
이러한 내용이 실존인물인가에 대한 논쟁은 샤르데냐섬의 Nora Stone에서 Pygmalion의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것에서 증명이 되었다 한다.
"The Nora Stone, found on Sardinia, has been interpreted by Frank Moore Cross as naming Pygmalion as the king of the general who was using the stone to record his victory over the local populace.[15] On paleographic grounds, the stone is dated to the 9th century BC. (Cross's translation, with a longer discussion of the Nora stone, is found in the Pygmalion article). If Cross's interpretation is correct, this presents inscriptional evidence substantiating the existence of a 9th-century-BC king of Tyre named (in Greek) Pygmalion".......
(source : Dido,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arthage)
5) Dido 여왕의 자살설화 연대에 대한 이견
Dido여왕에 대한 이야기에서, Troy전쟁에서 패한 Dardanian Aeneas 이야기가 전해진다. 즉 트로이편에 섰던 Dardanian인 Aeneas는 트로이전쟁 패배후 트로이를 떠나 카르타고에 잠시 들렀다가 이태리 라티움에 도착하여 정착하여 로마 건국의 아버지인 로물루스 형제의 선조가 되었다 한다. 그런데 이러한 Aeneas가 카르타고에 들렀을 때, Dido와 사랑에 빠졌고, 실제 후손들도 가졌다 한다. Aeneas가 떠났을 때, Dido는 비관하여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Virgil의 서사시인 Aeneid 내용)
그런데 이런 자살내용은 카르타고가 로마와의 Punic War가 끝난 후(BC 146) 자살한 여왕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이설도 있다는 것이다. 즉 BC 9세기의 Dido는 자살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At least two scholars have argued that the inclusion of the pyre as part of Dido's suicide—otherwise unattested in epic and tragedy—alludes to the self-immolation that took the life of Carthage's last queen (or the wife of its general Hasdrubal the Boetharch) in 146 BC."[23]
(source : Dido,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arthage)
이러한 내용은 카르타고가 계속 여왕이 존재했다는 의미를 말한다. 어찌 보면 왜의 여왕 비미호의 이미지를 준다. 따라서 우리가 아는 구야한국은 협보이후 진출했으므로, 고구려 계통의 구야한국은 페니키언과의 융합으로 현지에 강력한 구야한국을 실현했을 것으로 판단되며, 이들이 Tyre의 이주세력인 허황옥일지도 모른다 판단된다. 즉 김수로왕이 이주하여 기존의 Tyre 이주세력인 허황옥과 결합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전에 카르타고에 있던 세력은 여왕을 두고 있는 페니키아 세력일 곳이다. 이들이 왜의 세력과 관련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반면, 아유타국에서 실제 공주중 하나가 허황옥이 되어 지중해를 건너, 과거 Dido여왕처럼 이동하여, 금관가야의 금수로왕에게 왔을 수 있다고도 본다. 이 경우에는, 카르타고에 있던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은, 고구려 유리왕 시기 협보의 남하에 따른 구야한국이 이미 성립한 이후에, 나타나는 경우이다. 김수로왕이 152년을 산 것으로 나오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감추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즉 신라 파사이사금 시기(108년)에, 김수로왕이 실질곡국과 음즙벌국의 영토분쟁에서 음즙벌국으로 영토조정을 해주는 일화가 나오는 것은, 김수로왕이 충분히 협보이후 인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 유리왕이 BC19-AD 18년 기간에 재위했으므로, 협보는 유리왕 초기에 떠났다고 가정할 때, 기원전 시기에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이후 구야한국이 어느 정도 성립한 시기일 수 있고, 코르시카에서 구사한국이 성립한 후, 더 아래 바다로 나아가 카르타고에 구야한국을 확장 건설하는 과정에서, Tyre세력의 토착세력인 허황옥의 도움을 받아 강력한 구야한국, 즉 김수로왕의 가야가 될 수 있었을 수도 있다.
IV. 결 론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의 일화와 카르타고 Dido여왕의 설화 비교는 여러가지 면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이는 허황옥의 일행이 Tyre에서 건너온 또는 그 페니키아 항해무역권인 카르타고에서 김수로왕의 일행과 결합하여, 강력한 가야를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가 아유타국을 지중해 동쪽에서 발견한 것, 그리고 이 Cilicia가 페니키아 식민지였다는 것, 그리고 카르타고의 Dido설화와 매우 유사한 허황옥 설화가 있는 것은, 허황옥과 Dido가 동일한 문화권, 동일한 지역에서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허씨 집안의 이야기인 '벤허'의 이야기는 허황옥의 출신지 및 지중해 가능성을 더욱 높혀 준다. 페니키아 문명의 활동 영역과 그들의 항해 무역항로 등은 더욱 실질적인 허황옥의 이동 경로를 짐작케 한다.
따라서 연대 차이가 큰 카르타고의 Dido가 바로 허황옥이라는 추정보다는 기원전후 시기에 즈음하여, 구야한국이 카르타고에서 성장하면서 토착세력인 페니키아 세력을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를 미화 시키기 위해서 과거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카르타고의 Dido 설화를 임차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더욱 김수로왕의 금관가야가 카르타고가 아닌가 한다. 이에 대해서는 더 구체적으로 별도의 글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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