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역사/가야

금관가야는 지중해의 카르타고인가?

Chung Park 2023. 1. 29. 06:50

 

머리말

 

'한단고기 고구려본기 중

 

협보가 마한의 산중에 살았는데 그를 따라서 사는 자가 수백여집이나 되었다. 여러해 동안 흉년이 들어 떠돌아 다니다가 장혁을 알게 되었다. 이에 무리를 꾀어 양식을 배에 싣고 패수를 따라 내려와 바다와 포구를 거쳐 조심조심 배를 저어 곧장 구사한국에 이르렀다. 이곳이 가라해 북쪽해안이다. 여기서 머문지 몇 달만에 아소산에 옮겨 살았다. 이 사람이 다파라국 시조이다.

 

협보는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의 창업공신으로 고주몽외에 실질적인 2인자로 추앙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동부여에서 온 유리가 왕이 되자 미움을 사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여 남마한의 구사한국 혹은 구야한국에 도달했다고 전한다.

 

구야한국은 남가라로, 전성기에는 대가라로 불렸고, (한반도) 남단뿐만 아니라 바다건너 왜 지역의 구주에 또 하나의 분국을 이루었고, 구주에 있던 나라들 가운데 가장 컸다고 한다. 한단고기에 전하길 구주에 있던 구야한국은 변진 구야국인들이 모여 산 곳으로, 구야본국인들이 직접 다스렸다고 한다. '

 

필자는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은 프랑스의 론강의 지류인 Jabron river라 했다. (본 블로그 글, '요수인 압록수는 Rhone river이다', '졸본천은 론강의 지류인 Jabron river이다' 참조) 이곳에서 협보가 내려온 곳은 프랑스 남부 해안이다. 따라서 상기 글에서 협보가 정착한 '구사한국'은 Corsica island로 보인다. 구사 -> 코르시카 (불어로 '코르스(Corse) ->고르스->구사)로 한문 구사한국은 코르스를 음차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 '구사한국'이 '가라해'의 북쪽해안이라 했다. 필자는 필자의 다음 블로그 글, '광개토태왕이 경략한 왜의 임나가라는 지중해에 있었다'라는 글에서, 왜의 임나성은 시실리아섬에, 그리고 왜의 가라성은 샤르데냐섬에 있는 Cagliari (Latin : Caralis) castle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가라는 가야로 판단되며, 카르타고가 가라가 아닌가 한다.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고트족의 Alaric I은 이태리 반도 남부 시실리섬까지 내려갔고, 태자 Athaulf에게 시켜 북아프리카 카르타고까지 가서 식량을 구해올 것을 지시했으나 실패하고 돌아 오고, 이후 로마로 돌아 오는 길에서 서거했다고 위키피디아는 기술하고 있다. 장수왕 시기의 반달족은 북아프리카까지 점령하고 이후 지중해의 왜의 지역으로 보이는 섬들을 모두 정벌하였다. 장수왕의 태자시절 Athaulf로서 왜에 대한 공격이 실패해서 이후 반달족에 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광개토태왕은 장수왕 시기의 반달족 경로를 거치지 않았지만, 시실리아섬, 즉 임나성이 있는 것으로 갔고, 여기서 더 남하한 Athaulf가 카르타고에 있는 가라성을 정벌한 것으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광개토태왕이 경략한 왜의 임나성은 시실리섬, 가야의 가라성은 카르타고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Alaric I이 3번이나 포위했다고 하는 로마성은 신라의 금성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목 : 금관가야는 지중해의 카르타고인가?

 

 

필자는 한때 가야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 지역에 있었나 했다. 백제와 신라의 중간지대에 있으면서 두 세력간의 경쟁에서 이점을 취하는 자세를 보였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백제로 판단되는 Roman Empire와 신라로 판단되는 Sassanian Persia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 지역을 놓고 서로 다투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신라 초기부터 이태리반도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가야의 지역이 지중해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가져왔다. 그러면서 어디가 가야가 될 수 있나를 두고 고심해왔다. 그런데 이제 적어도 금관가야 지역은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게 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I. 석탈해의 출신지역인 다파나국은 지중해의 코르시카 섬이다.

 

 

이미 필자는 ‘마한의 서쪽 주호국은 샤르데냐섬이 아닌가?’라는 글에서 석탈해의 출신국인 다파나국이 지중해의 코르시카섬이라고 추정했다. 이는 고구려의 협보가 남쪽으로 내려와 구사한국(구야한국, 다파나국)을 세웠는데, 이곳이 Corse (Corsica) island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요수인 압록강을 프랑스의 론강으로 추정했다. 주몽은 론강의 지류인 Jadron강에서 즉 졸본천에서 졸본 부여를 세웠고, 유리왕 시기에 유리왕과의 불화로 고구려에서 배로 남하하여 한(韓)에 도착한 협보는, 바로 코르시카섬에서 구사한국을 세운 것으로 판단된다. 구사한국의 구사와 코르스섬의 발음도 비슷하다. 구사한국의 남쪽은 가라해라 했다. 즉 구사한국 이남은 가라국 즉 가야라는 것이다. 코르시카섬의 남쪽에 있는 샤르데냐 섬은 시칠리섬, 카르타고, 등과 함깨 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가야는 이들 지역이 아닌가 한다.

 

 

II. 신라와 김수로왕의 금관가야는 바다로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석탈해가 신라로 오기 전에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에게 가서 왕권에 도전했다가 패하고 신라로 왔다고 한다. 그런데 석탈해가 김수로왕에게 술법에서 패해 떠날 때, 금관가야에서는 석탈해가 혹시나 반란을 일으킬까 하여, 수군 5백척을 동원하여 쫒다가, 계림의 땅에 이르니 되돌아 왔다고 했다. (자료 : 수로왕, 나무위키)

이를 신라와 가야의 군사적 충돌로 보는 견해도 있다. (청하수 글, 신라의 왕은 어디서 왔는가? 1부, 이주민왕 석탈해의 정체 참조)

 

그러나 여기서 김수로왕이 150년이상을 왕으로 재위했건, 나서부터 왕노릇을 했건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어차피 알에서 났다는 신화는 모두 신화로, 6가야의 탄생을 알리는 신화일 뿐이다. 이는 그당시 왕들의 지배를 정당화 하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150년이상 재위한 것은 동일한 가문 dynasty의 지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삼국유사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금관가야는 바다에 접한 지역에 있었고, 석탈해의 신라로부터 바다를 건너 공격해왔다는 것이다. 즉 금관가야와 계림의 신라는 바다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반도 남쪽의 김해지역에 가야가 있었다는 주장이 맞지 않음을 말한다. 한국의 김해지역의 관광산업에는 피해가 갈 수 있는 이러한 언급은 죄송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김해(金海)란 지명 자체가 바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흑해, 지중해, 북해 등과 같은 이름의 바다라고 추정된다.

 

 

III. 수군 5백척을 동원한 금관가야의 김수로왕

 

각설하고, 위의 석탈해 이야기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는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측에서 수군 배를 5백척이나 동원했다는 것이다. 일반 어선이 아니라 수군의 배인 것이다. 과연 이당시 기원전후 시기에 또는 신라 초기에, 어느 나라가 수군 5백척을 동원할 수 있는가?

 

필자는 이에서 지중해의 카르타고가 매우 높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언의 지중해 연안 식민지 중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고, 제일 큰 도시였다. 위키피디아 자료를 통해 카르타고의 유적을 보면, 배를 반드는 큰 시설들이 있었다고 한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arthage, 글 Carthage 참조)

 

 

IV. 김수로왕의 왕후는 이주민 세력 또는 연합세력

 

1) 아유타국의 공주 : 허 황옥(黃玉)

 

필자는 한 때 아유타국을 터어키의 동남쪽 해안에 있는 Cilicia지역으로 판단하고, 이 아유타국에서 공주를 왕후로 삼은 이웃 내륙국가 Kingdom of Commagene를 김수로의 금관가야로 판단했다. 이 Cilicia 지역은 실제 Ayuta국이라 불리었고, 공주가 4대에 걸쳐 이 나라로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지역을 포함한아르메니아가 아유타국의 공주와 결혼 동맹을 맺은 가야국이라 판단 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바다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김수로왕의 가야는 바다에 접한 것을 위의 석탈해 이야기에서 알게 되니, 이전의 판단은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아유타국은 이 Cilicia지역이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라 이들에게 각각 살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날마다 물건을 풍부하게 주고, 그들이 싣고 온 보배로운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어서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했다."

 

(자료 : 수로왕, 나무위키)

 

지난 글 '수로왕의 부인 허황옥과 카르타고의 Dido여왕'에서 밝혔듯이, 영화 '벤허'에서 이스라엘에 허씨 집안이 있다는 것을 참조하여, 이 지역인 페니키아지역에서 허황옥의 허씨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Cilicia는 페니키아의 식민지 도시였다.

 

 

2) 김수로왕은 백인이었다

 

최치원의 석리정전에서, 정견 모주의 아들, 뇌질 청예(수로왕), 뇌질 주일(이진아시, 대가야)이 있는데, 김수로왕인 뇌질청예는 백인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석리정전 언급) (아래 내용 참조)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기록들을 수집하여 쓴 석이정전(釋利貞傳)의 내용에 따르면 가야산의 여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하늘의 신(神)인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한 명은 이름이 뇌질주일(惱室朱日)이었고, 다른 한 명은 뇌질청예(惱窒靑裔)라고 하였다. 금관가야의 시조가 된 뇌질청예(김수로왕)는 여신 정견모주를 닮아 얼굴이 희고 갸름했으며 대가야의 시조가 된 뇌질주일(이진아시왕)은 이비가지를 닮아 얼굴이 해와 같이 둥글고 붉었다고 한다. 이는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맏형이었다고 한 ≪가락국기≫에 전하는 금관가야 중심의 형제설화와는 대비되는 것이다...........

 

 

부인은 월지국 혹은 마우리아 왕조 공주로 추측되는 허황옥(許黃玉)이며, 189년까지 무려 158년 동안이나 살았다는 신화적 인물이다.[4] 수로왕은 허황옥을 태우고 온 15명의 아유타국 선원들에게 450필의 비단을 내렸는데 이는 대단히 많은 물량이며 또한 옷감 450필, 쌀 150섬을 싣고 움직일 수 있는 배를 이미 갖고 있었다는 것은 가야가 연안 항해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뱃길도 꿰뚫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료 : 수로왕, 위키백과)

 

최치원이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모아 집필한 석리정전에서 가야의 이야기를 말하는데, 뇌질 청예라 불리는 김수로왕은 백인의 피부를 가졌고, 뇌질 주일은 황인의 모습을 했다 한다. 이들의 어머니 정견모주는 백인여인으로서 묘사된다. 즉 백인의 지역에 있는 김수로왕의 금관가야가 아닌가 한다. 이는 필자가 지중해의 카르타고를 금관가야로 추정하는 것에 어느 정도 합리적 근거를 준다고 볼 수 있다.

 

 

V. 신라의 석탈해, 일성왕, 아달라왕은 백인이었다.

 

협보, 석탈해, 아달라왕 : 백인 - 신라사초, 삼국사기, 유기추모경

 

 

"그런데 일성왕과 아달라왕의 경우 신체와 용모를 묘사한 기록이 매우 특이하다. 일성왕은 ‘젊었을 때 백옥처럼 희고 아름다웠는데, 사람들이 희롱하지 않았다[少時美如白玉 人以爲不須玩-『신라사초』]’이고, 아달라왕은 ‘키는 7척이며, 코는 오뚝하고 기이한 얼굴이다[身長七尺 豊準有奇相-『삼국사기』]’이다. 큰 키, 오뚝한 코, 하얀 피부, 기이한 얼굴 등은 동양인(황인)과 거리가 멀다. 전형적인 서양인(백인)의 모습이다....

 

그런데 『유기추모경』에 협보의 어머니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이 나온다. ‘그 어미 재찬아는 황두에 하얀 피부이다[其母再贊兒 黃頭而雪膚].’ 협보의 어머니 재찬아(再贊兒)는 노랑머리(黃頭) 백인여성이다."

(자료 : 스카이 데일리, 정재수의 신삼국사 산책, 서역인의 피를 받은 일성왕과 아달라왕, 참조)

 

상기 자료에 의하면 신라의 일성왕, 아달라왕이 백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협보나 석탈해도 백인이었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신라가 이태리 반도에 있었다는 주장, 협보나 석탈해가 있었다는 구사한국이 코르시카 섬이었다는 추정과 궤를 같이 한다.

 

 

VI.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가라는 금관가야인가?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Alaric I 은 시실리아 및 카르타고 원정을 했다. 당시 태자인 Athaulf이 카르타고에 원정했는데, 위키피디아는 식량을 구하기 위한 원정이었으며 실패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광개토태왕비문을 보면 실패하지 않은 원정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시실리아 섬은 왜의 임나로 추정하고 가라는 샤르데냐섬에 있는 성이라고 판단했는데, 임나와 가라는 왜가 아닌 가야로 판단된다. 비문의 해석을 달리 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가라는 카르타고로 판단된다. 

 

 
Invasion of Roman Empire (source : Wikipedia)

 

가라는 가락국의 가야로 추정된다. 즉 왜와 임나와 가야를 정벌한 것으로 해석된다.

금관가야는 AD 400년에 쇠퇴한 것으로 기록되므로 (나무위키 자료) 광개토태왕 시기 정벌로 추정되며, 따라서 카르타고가 금관가야로 추정된다.

 

후일 장수왕 시기 반달족, 알란족의 반달왕국이 카르타고에 세워지는데 이들은 534년까지 존재하고, 비잔틴제국의 Justinian I시기 Belarius장군에 의해 정복되었다. 필자는 비잔틴제국의 Justinian I를 백제의 성왕으로 추정한다.

 

금관가야는 신라 법흥왕 19년 (532년)시기에 항복했다고 한다. 이는 카르타고의 반달왕국 멸망 시기와 유사하다. 그러나 신라와 백제가 뒤바뀌었다. 진흥왕과 성왕의 연합군이 오기 전에, 백제의 압박이 있으니 신라에 항복한 것이 어닌가 한다.

 

 

VII. 금관가야의 위치

 

 

금관가야는 가락국 (삼국 유사 가락국기 인용), 구야, 가야로 불리웠다.

 

"금관가야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김해소경(金海小京)조에 “제10대 구해왕(仇亥王)에 이르러 신라에 항복했으므로 그 땅을 금관군(金官郡)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금관가야는 본래 구야(狗邪)·가락(駕洛)주 02)·가야라고 불렸던 것으로, 뒤에 6가야의 하나로 ‘금관가야’라 이름 지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삼국유사』에는「가락국기(駕洛國記)」가 인용되어 있어서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탄생설화와 왕력(王曆)이 실려 있다. 즉 김해지역의 9간(九干)이 구지봉(龜旨峰)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알을 수습하여 집에 가져오니 모두 사람이 되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수로왕으로 ‘가락국’을 세웠고, 나머지 다섯 사람도 모두 돌아가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이는 금관가야가 초기에 6가야의 맹주국이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자료 : 금관가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또한 가야의 종주국이었기 때문에, 대가야, 또는 본가야라고도 불렸다 (최치원의 석정리전에서는 금관가야의 뇌질 청예, 대가야의 뇌질 주일(이진아시)로 구분함)

 

금관가야는 또한 지리적으로 남쪽에 있어 남가야라고도 하였다.

 

 

3세기 후반에 씌여진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서는 구야국이라하고

왜인조에는 구야한국이라 했다. (구야는 가야에 대한 한자 표기라 함)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에는 위나라의 사신이 대방군을 떠나 왜국에 이르는 경로를 기록했는데, 바다로 남하하여 구야한국에 이르고, 다시 바다를 건너 대마국에 다다른 경로를 설명했다.

 

(이상 자료 : 금관가야, 한국민족대백과)

 

즉 왜국은 대방군의 남쪽 바다 건너 7천리에 구야한국이 있고, 여기서 바다로 1천리 떨어진 곳에 대마국이 있다는 것이다. 대방군이 낙랑군의 남쪽에 있어, 프랑스 남쪽 지중해 해안, 그러나 론강 동쪽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태리북부와 걸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여기서 바다 건너 7천리라 한다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다시 1천리 떨어진 대마국은 대마도로 다시 지중해로 올라가 있는 섬이 아닌가 한다.

 

VIII. 파사이사금 시기 신라와 가야의 김수로왕

 

 

삼국사기 신라본기: 사로국 파사왕 23년 (102년) 김수로왕과의 일화

 

二十三年 秋八月 音汁伐國與悉直谷國爭疆 詣王請決 王難之 謂金官國首露王 年老多智識 召問之 首露立議 以所爭之地 屬音汁伐國 於是 王命六部 會饗首露王 五部皆以伊湌爲主 唯漢祇部 以位卑者主之 首露怒 命奴耽下里 殺漢祇部主保齊而歸

 

23년 가을 8월에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강역을 다투다가, 을 찾아와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이를 어렵게 여겨 말하기를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하고, 그를 불러 물었더니 수로가 의논하여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하여 수로를 위한 연회에 모이게 하였는데, 5부는 모두 이찬으로서 접대 주인을 삼았으나 오직 한기부(漢祇部)만은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 주관하게 하였다. 수로가 노하여 종(奴) 탐하리(耽下里)에게 명하여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保齊)를 죽이게 하고 돌아갔다.

(자료 : 김수로왕, 나무위키)

 

 

음줍벌국과 실직곡국의 영토분쟁 해결을, 신라 파사왕은 김수로왕에게 의뢰하였고, 김수로왕은 음즙벌국, 실직곡국의 강역다툼을 음즙벌국 영역으로 조정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만찬에서, 신라 6부의 하나인 한기부 사신을 김수로왕이 죽이고 떠난 것이다. 즉 당시 김수로왕의 가야 세력이 (적어도 지중해에서는) 신라보다 더 강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IX. Tyre에서 이동한 Carthage 여왕 Dido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들의 지중해 식민지 중 하나로서 가장 부유한 도시국가였다. 그래서 인구도 75만명으로 제일 많았던 것으로 기록된다. 그런데 카르타고는 Tyre(티레)에서 이동해 온 Dido 여왕이 세웠다 한다. Tyre는 레바논지역에 있는 도시로서 페니키아인들의 원래 거주지였다. 이러한 내용이 위의 허왕후의 이동 및 김수로왕과의 결혼과 묘하게 일치한다. 지중해 동쪽 끝에서 튀니지아까지 이동한 것이다.

 

그리고 정견모주 등의 이야기는 여왕이 최초 가야를 설립한 것 같은 뉴앙스를 준다. 즉 필자가 금관가야 지역으로 추정한 카르타고가 김수로왕의 이주민 왕후와 묘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허황옥의 이름에서 보듯이 많은 보물과 귀금속의 동반은 이들이 매우 부유한 나라에서 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 사공들이 돌아 갔다는 이야기는 원래 있던 국가가 계속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나라가 망해서 망명하는 경우가 아닌 것이다. 비록 꿈에 나타나 공주를 멀리 시집보내라는 이야기는 동부여의 이동과 같은 형식을 취하지만, Tyre지역에서 정쟁으로 공주를 같은 문명권의 다른 지역으로 피신 시킨 것일 수 있다. 카르타고는 당시 지중해의 여러 페니키아 식민지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러한 필자의 추정은 지난 글, '수로왕의 부인 허황옥과 카르타고의 Dido여왕'이란 글에서 보듯이, 카르타고의 Dido여왕의 이주와 매우 유사한 내용을 보인다. 비록 시기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BC 814년(또는 BC 825) 말고도 BC 146년 이라는 주장도 있으니 신화적 이야기는 그 시기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Map of Phoenician colonies, 11th-8th BC (source : Wikipedia)

(By Vikarna & Kalicine730 - This file was derived from: Phoenician colonisation be.PNG,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88266410)

 

 

 

Map of Phoenician trade networks, 1200 - 800 BC (source : Wikipedia)

 

 

X. 카르타고의 견고한 성곽과 수군 기지

 

카르타고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의 레반트지역 점령이후에는 페니키아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다. 이후 기원전 3세기-2세기에 걸친 로마와의 Punic Wars로 인해 로마로 지중해의 중심역할이 이동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과거의 지중해 중심지 역할은 다소 약화되었어도, 계속 이어지지 않았을까 판단한다. 김수로왕에게 이때 기원전후 시기에 이주해 온 허황옥은 카르타고를 재건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다. 김수로왕의 구야한국도 이시기 고구려의 협보 세력이 이주해 온 것일 수 있다. 즉 가야의 세력이 김수로왕와 허황옥애 의해 다시 재건되는 상황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후 석탈해가 왕권에 도전했다가 물러 나는 경우에 배 500척을 본 추적했다는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석탈해 세력이 김수로왕의 왕권에 도전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신라로 피신한 것이 아닌가 판단한다. 그럼 이제 배 500척을 동원할 만큼 강력한 카르타고였는지 살펴 보자.

 

 

Modern reconstruction of Punic Carthage. The circular harbor at the front is the Cothon, the military port of Carthage, where all of Carthage's warships (Biremes) were anchored

 

 

카르타고는 수군기지 항구와 무역항구의 둘의 항구를 가지고 있었다. 커르타고는 시실리와 튀니지아 해안의 사이를 지나가야 하는 모든 배들이 지나가야 하는 항구로서, 대단한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도시안에 세워진 수군기지는 220척의 전함이 정박할 수 있다. Walled Tower가 있어 두 항구를 내려볼 수 있었고, Citadel Walls은 37km(23마일)의 길이로 가장 길다. 서쪽의 Isthmus에는 4-4.8km에 달하는 wall이 있는데, 이제까지 뚫린적이 없다. (아래 자료 참조)

 

 

"Carthage was built on a promontory with sea inlets to the north and the south. The city's location made it master of the Mediterranean's maritime trade. All ships crossing the sea had to pass between Sicily and the coast of Tunisia, where Carthage was built, affording it great power and influence. Two large, artificial harbors were built within the city, one for harboring the city's massive navy of 220 warships and the other for mercantile trade. A walled tower overlooked both harbors. The city had massive walls, 37 km (23 mi) long, which was longer than the walls of comparable cities. Most of the walls were on the shore and so could be less impressive, as Carthaginian control of the sea made attack from that direction difficult. The 4.0 to 4.8 km (2.5 to 3 mi) of wall on the isthmus to the west were truly massive and were never penetrated."

 

카르타고는 헬레니즘 시대에 가장 큰 도시의 하나였다. AD 14년까지 로마는 75만명의 주민이 있었고, 이후 1세기동안에는 백만인구에 달하기도 했으며, 당시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옥은 수십만의 인구에 불과 했다. Herodian역사에 의하면, 카르타고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제국의 제2의 도시 자리를 두고 경쟁했다. (아래 자료 참조)

 

 

"Carthage was one of the largest cities of the Hellenistic period and was among the largest cities in preindustrial history. Whereas by AD 14, Rome had at least 750,000 inhabitants and in the following century may have reached 1 million, the cities of Alexandria and Antioch numbered only a few hundred thousand or less.[12] According to the history of Herodian, Carthage rivaled Alexandria for second place in the Roman empire.[13]"

 

Layout (배치도)

 

 


The layout of the Punic city-state Carthage, before its fall in 146 B.C.

 

 

카르타고는 네곳의 비슷한 크기의 주거지역이 있었는데, 종교지역, 시장, 의회지역, Towres, 극장들, 그리고 거대한 Necropolis지역이다. 도시의 중간지역에 Byrsa라 불리는 높은 Citadel이 있다. 카르타고시 주위를 둘러싼 Walls은 높이 13m, 두께가 10m에 달한다. 서쪽으로는, 3개의 나란한 성벽이 세워졌다. 모두 도시를 둘러싼 성벽의 길이는 33km(21마일)에 달한다. Byrsa의 높이는 더 요새화되었다. 이 지역은 BC 146년 로마에 의해 굴복하기 전에는 굴복한 적이 없었다. (아래 자료 참조)

 

 

"The Punic Carthage was divided into four equally sized residential areas with the same layout, had religious areas, market places, council house, towers, a theater, and a huge necropolis; roughly in the middle of the city stood a high citadel called the Byrsa. Surrounding Carthage were walls "of great strength" said in places to rise above 13 m, being nearly 10 m thick, according to ancient authors. To the west, three parallel walls were built. The walls altogether ran for about 33 kilometres (21 miles) to encircle the city.[14][15] The heights of the Byrsa were additionally fortified; this area being the last to succumb to the Romans in 146 BC. Originally the Romans had landed their army on the strip of land extending southward from the city.[16][17]"

 

카르타고의 도시 성벽 밖으로는 농지가 있다. Chora라는 농지는 제한된 지역에 머무르는데, 동쪽해안, Utica내륙지방의 Bagradas 강 계곡, cape Bon, 그리고 동쪽 해안의 sahel 근접지역이다. 페티키아문명은 동쪽 지중해땅에서 발달된 농업과학의 유입과 지역 아프리카 조건에의 적응으로 달성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Outside the city walls of Carthage is the Chora or farm lands of Carthage. Chora encompassed a limited area: the north coastal tell, the lower Bagradas river valley (inland from Utica), Cape Bon, and the adjacent sahel on the east coast. Punic culture here achieved the introduction of agricultural sciences first developed for lands of the eastern Mediterranean, and their adaptation to local African conditions.[18] "

 

(source : Carthage, Wikipedia)

 

이상의 카르타고의 방어 성벽 내용을 보면, 마치 트로이가 연상된다. Tyre에도 이러한 방어 성벽의 조건이 있지 않았다면, 신화속의 트로이는 여기인지도 모른다.

 

김수로왕이 석탈해를 500척의 전함으로 쫓았다면, 이정도의 수군기지가 있었어야 할 것이다. 즉 김수로왕의 가야가 가질 만한 수군기지가 카르타고에 있었다는 것이다. 수군력에 있어서는 파사이사금까지는 가야가 신라를 앞섰을 수 있다. 그러니 김수로왕에게 음즙벌국, 실직곡국의 영토분쟁 조정을 의뢰하지 않았겠나? 그리고 보면, 음즙벌국, 실질곡국의 영역은 서지중해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카르타고의 역사 중에 혹시 김수로왕과 석탈해 시기의 역사가 있나 살펴 보았는데, 카르타고의 역사는 기원전의 역사는 Punic wars이 끝나는 BC 146년까지 자세하게 기술되고, 그러나 이후는 5세기 반달족의 정벌시기의 역사로 건너뛴다. 즉 이 사이의 역사는 로마의 지배라는 말만 할 뿐 구체적 기록이 전무하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로마는 여러 나라의 역사를 짜집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마저도 없는 것은 좀 수상하기도 하다. 대개 감추고 싶은 기간의 역사는 공백으로 남는다. 지중해의 역사에서 흔히 보던 기록이다. 따라서 구체적 서양사 기록에 의한 확인은 불가하게 되었다. 

 

이상으로 카르타고의 입지적 조건을 고려했을 때의 금관가야의 가능성 검토를 마치고자 한다.

 

 

결 론

 

이상으로 김수로왕의 금관가야가 카르타고가 될 수 있는 조건들의 분석을 마치고자 한다. 즉 필자는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김수로왕의 금관가야가 지중해의 카르타고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한단고기의 협보의 이동에 의한 구야한국에 대한 언급, 최근에 알게된 석탈해, 협보, 일성왕, 아달라왕이 백인었다는 기록, 최치원의 석리정전에 의한 뇌질청예, 김수로왕의 백인 가능성 언급, 그리고 필자의 구야한국과 키메리언의 연관성 생각, 광개토태왕비문의 가라 정벌 기록과 Alaric I 고트족왕의 행로의 비교 점검, 그리고 허황옥의 페티키언인 가능성 파악, 금관가야의 위치가 신라와 바다로 떨어져 있다는 기록, 또한 김수로왕이 500척의 배를 이용하여 석탈해를 추적했다는 기록, 그리고 카르타고의 성벽 등으로 볼 때 큰 수군을 가질 수 있던 조건, 등이 이러한 판단을 하는데 근거가 되었다.

 

이 다음에는 구야한국, 즉 고구려계통의 구야한국, 가야가 흉노족으로 보이는 키메리언과 연관이 있는가에 대해 보다 심층적으로 연구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