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의 한 중 일 역사 (1) (2022년)

2022. 12. 31. 14:53한민족 역사/기타

어언 호랑이 해도 다 지나간다. 지난 글, ‘호랑이와 한민족사’에서 이해가 가기 전에 이루고자 했던 목표가 있었지만 다 이루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러나 또한 중요한 몇가지 역사적 기록에 의거해서 현재의 한중일 역사가 의문이라는 단서를 잡은 것은 매우 중요한 진일보라 생각한다. 오늘은 이해를 마무리 하는 의미에서 현재의 한중일 역사가 강력한 의문을 제시한다는 것을 한중일 사학자분들께 말씀드리고자 한다. 필자는 이러한 진실의 현실적 영향을 걱정하기 보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정도(正道)라는 생각에 이러한 연구를 진행하고 글을 쓰고자 한다.

 

 

한중일 역사에서 의문시되는 점은 먼저 현재의 한중일 지리적 위치에 대한 강력한 회의이다. 언제 어떻게 현재의 한중일 지리적 위치가 정해졌는지는 아직 아는 바 없다. 차후 연구를 진행하며 밝힐 수 있으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지금의 한중일 지리적 위치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의문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면 그에 대한 답을 필자는 가지고 있는가? 아직 일부는 알고 일부는 모르는 상황이다. 기존의 역사적 자료에 맞는 위치를 찾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해당 지역의 역사를 살펴 보며, 그 위치를 가늠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해당 지역의 역사가 뭔가를 감추려 사가들에 의해 왜곡되었다면 더욱 어려운 일이 된다. 그래서 필자의 추정은 learning by doing의 형태이다. 따라서 초기의 생각과 다른 글을 후에 쓰기도 한다. 처음에는 모든 서양사 역사를 100% 신뢰하고 접근하였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분별하여 해석하고자 한다. 이는 진실을 찾는데 더욱 어려움을 준다. 그러나 아무리 왜곡된 역사도 그 진실의 흔적은 남는 법이다. 그래서 희망을 가지고 연구를 한다. 필자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주위의 재야사학자들의 연구도 도움이 되며, 또한 많은 고전의 역사가 희망을 준다. 어쩌면 필자의 생애에 이 모든 진실을 파헤치려면, 하늘의 도움도 필요할 것이다. 하느님은 이러한 진실의 파악을 위한 필자의 노력을 지원하리라 믿는다. 이제 한중일 역사의 의문점을 하나 하나 검토해보자.

 

 

I. 동해는 없고 서해가 있는 중국

 

북위의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고구려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북위의 역사이며, 남북조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나라의 역사이기도 하다. 필자는 남북조의 역사가 중국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역사로 인식한다. 이는 한중 역사가들이 모두 동의하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북위의 효문제 시기에 효문제는 이미 항복하고 속국이 된 토욕혼 세력에 대하여 작위를 내린다. 그런데 그 명칭이 “서해 개국공”이라는 글귀가 들어 간다. 즉 토욕혼 세력은 서해에 접해있다는 것이다. 토욕혼은 이후 토번이 되며, 티베트의 전신이라 한다. 이는 기존의 중국사를 완전히 뒤엎는 것이 된다.

 

현재의 중공지역은 서해가 없다. 북해도 없고, 오직 동해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현재의 중공 지역은 북위 시기의 중국지역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중공지역의 지형이 오랜 세월전에 서해 바다가 있었다는 것인가? 그러나 북위의 시기는 그리 오래된 역사가 아니다. 기원후 5세기의 역사이다. 지금부터 1500년전의 일이다. 따라서 기원전의 지각변동을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또한 그러한 지각변동이 있었다면, 선사시대도 아니고 역사적 기록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지각변동이 있었다는 역사적 기록은 듣지 못했다. 즉 5세기의 지형이 지금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중공지역은 북위 시기의 중국사 지역이 아니다. 그럼 지금의 중공지역의 역사는 무엇이냐? 이는 차차 연구를 하면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아직 필자는 거기에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북위 시기의 중국사 지역이 지금의 중공지역이 아니라는 것은 확신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중일 역사는 모두 거짓이 된다. 비록 그것이 식민사학을 고집하는 제도권 사학자와 현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들이 원하지 않는 바라 하더라도 진실은 지금의 역사가 거짓이라는 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

 

필자는 이 서해를 대서양으로 판단한다. 유라시아 대륙에는 대서양과 대동양이 있었다. 그리고 필자는 유사한 시기에 서양사에서 Suebic Kingdom이라는 왕국이 포루투갈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아니면 대서양에 접한 프랑스 서남부의 Aquitaine지역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

 

그러면 현재의 티베트는 무엇인가? 아직 필자도 모른다. 언제 어떻게 이동되었는지 또는 다른 역사가 티베트역사가 되었는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송첸캄포라는 인물의 허잡한 사진은 가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선 고종의 가짜 사진과 같은 프레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송첸캄포라는 말 자체도 Songchen Campo, 즉 송나라 지역의 초원이라는 스페인어를 연상 시킨다. 이는 한자말이 아닌 것이다.

 

 

만약 중국이 서해가 있는 지역이라면, 지금의 황하강이나 양자강이 동으로 흐르는 강들은 중국사의 강들이 될 수 없다. 서쪽이 바다라면, 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최근에 프랑스의 Loire river (르와르강)이 중국 남북조 시대의 장강으로 추정한 바 있다. 남북조 시대의 역사를 보면, 황하강이란 언급은 전혀 없다. 북주, 북제 모두 중국의 서북쪽, 동북쪽 등 북쪽에서 출발한 나라들이지만, 이후 남조와의 전쟁에서 장강만 언급된다. 황하강을 두고 싸웠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진정 남북조가 현재 중공의 전 지역을 두고 다투었다면, 필연적으로 황하강이 언급되어야 한다. 중국을 통일했다는 수나라, 당나라 역사에서 황하강에 대한 언급이 있는가? 전혀 없다.

 

그리고 당태종이 왕자시절 장안을 점령하거나 낙양을 공격할 때, 돌궐의 힘을 많이 빌렸다. 지금의 중공사가들은 돌궐이 중국 북부에서 중앙아시아까지의 초원지대에 길게 뻗어 있었다고 말한다. 이들이 수나라, 당나라 시기에 지금의 장안, 낙양까지 진출하였다고 상상해 보자. 얼마나 큰 세력이기에 그 먼거리를 달려와 합세한단 말인가? 그런 세력이라면 전 중공지역을 통일하고도 남을 세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돌궐세력이 수나라나 당나라의 공물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중국의 전지역을 통일했다는 역사기록은 없다. 즉 지금의 중공지역을 중국사의 지역으로 추정하는 것도 의문이지만, 돌궐세력을 중공 사가들이 추정하는 것과 같은 중공 북부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세력이라는 추정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들이 고구려가 아닌가 추정했다. 유연 세력을 추정하는 것도 맞지 않는다. 즉 거짓이 거짓을 낳는 결과이다. 적어도 돌궐세력이 수나라나 당나라에 괴롭히는 역사가 있었다면, 황하강에서의 전쟁 역사가 기록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Map of France (source : WorldAtlas.com)

 

 

II. 한민족 국가들은 중국의 동쪽에 있다.

 

중국사는 한족 중심의 역사로서 주위의 사방에 위치한 다른 세력들을 서융, 북적, 남만, 동이로 폄하하여 부르고 있다. 아마도 한나라 시대의 중심이었던 한족이 가운데 지역(중국)에 주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한민족 국가들, 소위 동이와의 전쟁 등을 보면, 동이는 요수의 동쪽 즉 요동지역을 포함한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기술된다. 그러나 어느 기술을 보아도 지금의 중공지역처럼, 동지나해를 건너 갔다는 기록이 없다. 필자가 보기에는 중국사는 동해에 관련 기록이 없다. 즉 동쪽에 바다를 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와 싸운 수나라, 당나라는 요수 동쪽의 요동성이 주요 전장이 된다. 즉 중국사의 동쪽지역은 동이의 지역으로 육지로 접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중공지역은 역사적 기술과 매칭되지 않는다. 지금의 동지나해를 접한 중국사라면, 동해 바다를 건너 동이족이 있다 해야 할 것이며, 동이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역대 중국의 왕들이 갈석산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며, 전의를 불태울 일도 없을 것이다. 조조가 갈석산에 올라가 창해를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는 창해가 지금의 동해 바다라면, 바다 허공을 바라보고, 정복의 의지를 불태운 정신착란자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중국사에 강력한 도전이 된 동이 세력인, 부여, 고구려, 읍루, 한, 예 등은 모두 동쪽에 접한 육지 세력인 것이다.

 

단지, 한(韓)은 마한, 진한, 변한의 세력은 동서가 바다에 접해 있고, 남쪽에 왜의 세력이 있는 것이다. 이는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열전에 나와 있는 역사기술을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왜에 대해서는 중국의 남쪽을 포함해 한의 남쪽, 동남쪽의 세력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지금의 일본의 위치도 아니고, 한반도 주변도 아니며, 이에 적합한 지형은 오직 지중해만 있을 뿐이다. 

 

 

III. 북해에 접한 한민족의 역사

 

최근에 쓴 글 ‘두만강은 남북으로 흘러 북해에 이른다’라는 글에서 근대 조선의 조상 익조 이행리의 여진족과의 갈등 국면에서 두만강을 따라 가다가 북해에 이르렀다 했다. 즉 두만강은 남북으로 흐르며, 북해에 이른다는 것이다. 필자는 패수 또한 서북면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 간다는 고구려 사신의 말을 빌어 패수가 라인강이라 추정했다. 요수 즉 압록강을 프랑스의 론강으로 추정하는 필자는 패수를 라인강으로 추정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반도나 중공대륙 어디에 서북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 가는 패수가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중공 대룩 어디에 북해가 있을 수 있는가? 중공 대륙에는 서해도 없고 북해도 없다. 한반도에서도 북해를 찾을 수 없다. 일부 사람들은 현재의 한반도 동북쪽을 북해로 생각하는 것 같으나, 여진족과 관련한 사건에서 전혀 맞지 않는다.

 

요나라와 다툰 고려의 강동 6주는 요동땅이라 주장하며 고려가 요나라로부터 확보한 땅이다. 여진족과 관련되어 있다. 세종때의 조선의 4군 6진도 여진족을 몰아 내고 확보한 땅이라 했다. 따라서 요동땅이며, 여진족과 관련되어야 하며, 압록강, 두만강과 관련된다. 그러면서 북해와 관련된다. 고려가 확보한 강동 6주는 한반도 주위에서 어디가 될 수 있나? 현재의 중공 요하 동쪽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보다 훨씬 동쪽에 치우친 한반도의 두만강에 6진을 세우고 여진족을 몰아 냈다는 것인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그리고 몽골제국이 쌍성총관부를 극동지방인 한반도 북부에 세울 리가 없다. 서양사학자들은 징기스칸이 현재의 천산산맥 동쪽으로 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징기스칸 후예들이 현재의 이란과 우크라이나 등지에 4 칸국을 세웠다 한다. 원나라를 현 중공땅에 세웠다는 주장은 중공사학자와 한반도 식민사학자만 주장한다. 필자는 서양사학자들의 주장을 넘어, 징기스칸의 몽골세력이 대서양까지 진출한 것으로 추정한다.

 

다시 돌아가 북해에 접한 두만강은 독일의 엘베강으로 추정한다. 만약 고대 사서에 압록수인 요수와 두만강이 동일한 수자원 원천을 가졌다 하면, 두만강은 라인강이 될 것이다. 필자는 고려의 강동 6주가 엘베강 동쪽지역이라 추정했다. 즉 북해로 들어가는 패수와 두만강은 현 중공땅이나 한반도에서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강의 흐름과 바다를 고려할 때, 유럽의 북해만이 가능하다.

 

 

 Major European rivers (source : Worldatlas)

 

IV. 천리에 걸쳐 있는 백두산 (=장백산= 태백산)

 

발해고에 의하면, 백두산=장백산=태백산이라 했다. 필자는 백두산, 장백산, 태백산을 유럽의 알프스 산맥 속의 몽블랑산으로 추정한다. 백두산은 천리에 걸쳐 있는 산맥 속에 있다 했다. 과연 한반도의 백두산이 천리에 걸친 산맥 속에 있는가? 알프스산맥은 천리에 걸친 산맥이다. 그리고 중공의 요하 주위에 이러한 천리의 산맥이 있는가?

 

그리고 이 알프스 산맥과 같은 곳에 수원을 두고 있는 압록수, 즉 요수가 있다. 따라서 압록곡이 있는 압록수, 즉 오리 머리처럼 푸른 색갈의 강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지형적 조건을 갖춘 지역이 있는가? 한국의 사가들은 요하가 요수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과연 이들 주위는, 당나라가 고구려 침입시 험한 압록곡을 이용하라는 말을 당나라 장수가 무심코 했다가 전장에서 철수되는, 그런 유형의 지형적 조건을 갖추었나? 그리고 주위가 발해의 압록부가 있을 정도로 압록색갈의 지형인가? 프랑스의 론강과 그 주위 지역은 이러한 지형을 완벽히 갖추었다.

 

Rhone 강 유역 지형 (source : Wikipedia)

 

V. 험한 지형에 둘러 쌓인 왕험성과 평양 (平壤)

 

단군조선의 수도 왕험성은 험한 지형 속에 있었다 했다. 그리고 이 왕험성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平壤)이 되었다 했다. 과연 한반도의 평양은 험한 지형 속에 있는가? 그리고 중공에서 왕험성, 평양을 찾고자 하는 분들은 이런 지형 속의 도시를 찾았는가? 필자가 추정한 왕험성, 평양은 좌측에 요수인 압록수의 압록곡이 있고, 남쪽에는 알프스 산맥의 지형에 닿아 있다. 스위스의 쥬리히 근처지역으로 추정된다. 서북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 패수인 라인강의 상류와 압록곡의 압록수인 요수의 상류와 가까이 있다. 과연 이러한 지형을 만족하는 지형을 한반도나 중공지역에서 찾을 수 있는가? 절대적으로 없다.

 

 

 

VI. 서안평의 특수 지형

 

서안평은 특수한 지형을 가지고 있다. 아래로는 요수 하류의 바다에 닿아 있고, 좌우로 통하는 길은 유일한 길로 이어져 있으며, 우측으로는 낙랑군이 있고, 좌측으로는 중국이 있다. 그래서 고구려 미천왕이 이곳을 점령하자, 낙랑군과 대방군이 곧 무너졌다. 즉 중국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이런 서안평이 요하의 하류에 있다고 가정하자. 중국에서 한반도의 낙랑으로 이동하는 길이 이곳이 유일할까? 바닷길로 가는 것이 오히려 더욱 보편적인 통로일 것이다. 그러면 낙랑군이 대방군이 중공땅에 있다고 주장한다면, 바다에 접한 서안평은 어디가 될 수 있는가? 낙랑군의 서쪽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곳도 상정할 수 없다. 그러나 프랑스 남부의 론강의 하류에는 이러한 지형이 완벽히 구비된다.

 

 

 

VII. 고구려의 서해와 남해

 

고구려는 서해, 남해, 그리고 동해에 접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그렇게 나타난다. 고구려는 중천왕시 시기하는 왕후를 서해 바다에 버렸다 했다. 그리고 문자왕 이후 남해에 제사지냈다 했다. 동부여가 항복한 이후 시기 기록이다. 지금의 한반도 북부와 동북삼성 지역을 고구려로 한다면 서해는 있어도 남해는 없다. 중공의 어느 지역을 고구려로 한다면 더욱더 바다가 없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서해는 대서양, 남해는 지중해, 동해는 흑해가 된다. 동북아시아의 고구려 유적을 고려하면, 고구려가 유라시아 동쪽 끝까지 왔다 추정할 때, 지금의 동지나해 또는 동해 또는 일본해가 동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VIII. 파사이사금의 신라와 임진왜란때의 파사산성은 페르시아에 있었다.

 

신라에 파사 이사금이란 왕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파사는 페르시아를 가리킨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 것 같다. 또한 근대 조선의 임진왜란시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파사산성을 개축하며 전쟁에 대비했다고 했다. 역시 파사산성은 페르시아 산성을 의미한다. 그러면 신라뿐만 아니라 근대조선도 페르시아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현 중공 사학자들이나 한반도 식민사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필자는 신라가 페르시아 지역에 있었다 추정했다. 페르시아 역사에서는 신라 선덕여왕, 진덕여왕 시기에 여왕들이 존재 했으며, 비담이란 이름을 가진 장수가 존재했다. 신라 6부와 같이 6귀족가문이 주축을 이루었다. 필자는 신라는 이태리 반도에서 시작하여 페르시아까지 진출했다가, 500년이후 고구려에 밀려 잠시 페르시아로 물러갔다가 진흥왕시 다시 이태리반도쪽에 진출한 것으로 추정한다. 함경도 평안도 순수비는 원래 유럽 론강 우측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롬바르디지역을 차지한 진흥왕으로 판단한다. 신라는 살수에서 고구려와 싸웠고 니하에서 고구려와 싸웠다. 그리고 태백산에 제를 지냈다.

 

필자는 살수를 독일 서부에 있는 Saar river로 추정했다. 진흙이 있다는 니하는 라인강 또는 다뉴브강으로 추정했다. 그래서 신라가 이태리반도를 중심으로 있었다 추정한다. 그리고 페르시아까지 확장한 나라로 추정된다. 신라가 주장한 삼한일통(三韓一統)은 마한, 진한, 변한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IX. 거란의 별종인 실위 : 황두실위와 몽골실위는 북유럽에 있었다

 

 

거란의 별종인 실위에는 황두실위가 있고, 몽골의 원류가 되는 몽골실위가 있다. 그럼 황두실위와 몽골실위의 위치를 가늠해 보자.

 

 

필자는 노랑머리, 금발을 의미하는 황두실위는 스웨덴지역으로 추정했다. 몽골실위는 핀란드지역이 아닌가 한다. 거란은 자고로 요동성 주위에 거주하는 민족으로, 요서의 중국과 요동의 동이족 사이에 있는 민족으로 역사적 기록에서 나타난다. 요수를 프랑스의 론강으로 추정할 때, 이러한 위치 추정은 완벽하게 역사적 기록과 일치한다.

 

실위의 서쪽에는 돌궐이 있고, 실위의 동쪽에는 흑수말갈이 있다고 했다. 필자는 돌궐이 노르웨이나 영국쪽의 삭슨족으로 추정한다. 흑수말갈은 러시아의 모스크바강(=흑수강) 주위에서 출발하여 흑해위 지역으로 이동한 말갈세력으로 추정한다. 이들은 이후 항가리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래서 마자르족이라 일컫는데, 말갈족이라 판단된다.

 

그런데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실위가 중앙아시아의 위그르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시아에서 금발을 가진 유일한 민족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핀란드 동쪽에도 핀족 위그르족(Finns & Ugrians)이 존재한다 지도에 표시된다. 그러면 어디가 원래 있던 지역인지 알 수 없지만, 중앙아시아에 있는 위그르족이 황두실위라 가정해 보자. 그리고 몽골실위는 현재 몽고지역이라 가정해 보자.

 

실위는 거란의 별종이라 했다. 따라서 이 지역 주위에 거란족이 존재하고 거란의 동에는 동이족, 거란의 서에는 중국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거란지역에 요수 즉 압록수가 있어야 한다.

 

이 경우 요수는 인더스강이 될 가능성이 많고, 요서 중국은 이란지역이 된다. 요동은 인도지역이 된다. 이경우 압록수 주위의 두만강이 어디가 될 지 모르지만, 접하는 북해가 없다. 두만강은 북해로 흐른다 했다. 북극해로 보기에는 너무 멀다.

 

그리고 중국의 서쪽에 서해가 없다. 토욕혼, 티베트는 터어키나 레반트지역이 된다. 이 또한 이 지역 역사와 거리가 멀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인도 북부가 된다. 중국의 남부에는 왜가 있어 왜의 비미호 여왕은 대방군을 통해 중국에 접촉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는 저멀리 마다가스카르를 제외하고는 왜라고 할 수 있는 세력이 없다.

 

고구려의 지역이 되는 북쪽에서 서북으로 흘러 바다로 가는 패수는 아무다리야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경우 패수와 대수를 넘어 백제를 세운 지역이 요서라 해도 애매하게 된다. 인더스강이 요수라면 이 지역에서 고주몽의 졸본 부여가 있어야 하고, 거기서 남하하여 백제를 세웠기 때문이다.

 

또한 졸본부여의 북쪽에 북부여가 있어야 하는데 전혀 가능한 지역이 없다. 높은 산맥과 사막뿐이다.

 

그리고 마한의 서쪽에 있는 섬인 주호국의 가능성도 없고, 백제의 서쪽에 사냥할 곳도 없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중공대륙의 역사가 빈 공간이 된다.

 

실위의 우측에 있다는 흑수말갈의 존재도 없다. 한반도 식민사학자가 말하는 흑수말갈은 훅룡강 주위를 언급하므로 거리가 너무 멀다.

 

그리고 발해가 고구려를 이은 나라라면 해동성국의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다. 카스피해 동쪽이라고 우길 수 있지만, 대조영이 요동의 동쪽으로 가서 동모산에 건국하였기 때문에 이는 맞지 않는다.

 

필자는 한때 이란지역이 중국사의 지역이 아닌가 했으나, 이러한 여러 가지 지형상 맞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지역의 역사가 또한 우리의 역사와 매칭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다. 이상으로 중앙아시아의 위그르족이 황두실위의 가능성이 매우 낮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필자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덴마크의 Schleswig 지역을 실위로 판단한다면, 또는 Swedes를 실위로 본다면, 모든 조합이 맞아 떨어진다. 론강이 압록수가 되며, 패수는 라인강이 된다. 유럽의 북해가 두만강이 이르는 북해로 되며, 대서양이 토욕혼, 티베트가 접한 서해가 된다. 이 지역의 역사도 매우 유사하게 펼쳐진다. 프랑크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가 되고, 요서의 2개현을 가진 백제와 북위의 전쟁 역사도 찾아 볼 수 있다. 롬바르디 역사가 진흥왕의 역사가 되며, 백제 성왕과의 연합으로 진출한 이태리반도가 비잔틴역사에서 나타난다. 즉 동양의 역사기록과 이들 지역의 역사기록이 매우 매칭되는 것이다.

 

심지어 요나라의 역사가 신성로마제국의 역사에 숨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훈족이 대서양까지 진출한 역사를 고구려의 역사로 설명할 수 있다. 즉 한 두가지의 사실만으로 적용되는 역사가 아닌 모든 역사의 흐름과 일치한다면 진정 이를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드는 점이 있다. 몽골의 원조가 되는 몽골실위의 위치 문제이다. 핀란드지역이 아시아 민족처럼 다른 유럽인들과 다른 점은 수긍이 간다. 그래서 몽골실위의 가능성을 본다. 그런데, 징기스칸이 일어난 초기의 지역이 어디이냐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초기 징기스칸은 이웃한 호레즘국을 제일 먼저 정벌했다. 즉 호레즘에 이웃한 지역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한다. 호레즘국은 중앙아시아에 있는 것으로 안다. 즉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한 징기스칸의 몽골족이 대서양끝까지 진출한 것이다.

 

그렇다면, 스웨덴의 동방 바이킹이 러시아를 거쳐 흑해연안, 나아가 중앙아시아, 유럽으로 진출한 것을 고려하면, 이들 중 일부가 중앙아시아에 있던 세력과 합세하여 유럽으로 진출하고, 흑해연안, 이란지역에 그 후손들이 4칸국들을 세울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징기스칸은 발해왕의 후손이란 전원철 박사의 설명이 나온지도 모른다. 필자는 카자르칸국이 발해의 일부라는 글을 썼다.

 

 

그렇다면 핀란드지역에 몽골의 원류가 되는 몽골실위가 있었다는 추정이 힘을 얻게 된다. 지금의 몽고국은 일부 이들이 동부로 이동하여 세운 것인지 모른다. 한민족의 국가가 어떤 연유로 동방으로 진출하여, 또는 동방에서 서방으로 진출하였다가 다시 동방으로 후퇴하는 경로인지 모르나, 그래서 현재의 한반도로 이주되었거나 축소된 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몽골실위가 핀란드지역에 있다고 하는 추정이, 몽골실위가 지금의 몽고지역에 있었다는 것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황두실위도 스웨덴 지역에 있었다는 추정이 합리적이다.

 

 

 

X. 백제가 활동한 한수(漢水)지역은 프랑스의 르와르강 유역에 있었다

 

 

삼국사기에 보면 백제가 한수(漢水) 이북에서 백성을 징발해 쌍현성을 쌓았다는 기록(무령왕, 523)이 있고 근초고왕시 한수 이남에서 병사들을 사열했다(369)고도 한다. 한수 관련 기록은 구수왕(221), 아신왕(397) 시기에도 있다. 한강 관련 기록 (BC 5, AD 116, AD 187, 455)을 한수로 본다면 백제 초기부터의 영역으로 볼 수 있다. 한성(漢城)도 이 근처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백제의 한성, 한수 유역에 대한 지배는 온조왕 시기부터 있어 왔던 것으로 삼국사기 자료는 말한다.

 

그런데 중국 남북조 시대의 마지막 남조의 나라인 진(陳)나라는 그전의 남조 나라가 차지했던 한수(漢水) 유역을 빼앗기고 남조의 나라중 제일 영토가 작았다고 기술된다.

 

“한수(漢水) 유역과 사천성은 서위(西魏)를 이은 북주(北周)에 정복 당하고…”

(자료 : 남조 진(陳), 위키백과)

 

그리고 남조의 진(陳)나라는 북제(北齊)가 장강을 건너 (수도) 건강(建康)을 함락하고, 589년 북주를 이은 수(隋)나라에 의해 멸망 당했다.

 

그렇다면, 백제가 중국의 장강이남 남조지역을 지배했다는 것인가? 이에 대해 한반도 식민사학자들과 중공의 사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지 궁금하다. 그것도 백제 초기부터 무령왕 시기(523)까지 한수가 언급되니, 중국의 장강이남에 백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 역사서 만주원류고에서 백제는 요서에 2개현을 두었다고 기술했다. 그러면 현재의 중공지역과 한반도에 백제가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백제는 한반도에도 있었고, 동북쪽의 요하 서쪽에도 있었고, 양자강 이남에도 있었다는 것이 된다. 북위와의 전쟁 기록도 삼국사기에 있으니, 백제는 북위의 위쪽에도 있었고, 북위의 남쪽에도 있었고 한반도 서쪽에도 있었다는 그야말로 우스개 소리가 된다. 즉 백제와 중국의 역사지가 이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부 담로지역은 동아시아까지 온 것으로 추정되지만, 백제의 본거지는 다른 곳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우스운 상황은 필자가 추정한 프랑스지역을 중국사와 요서의 백제 지역으로 추정하면 모두가 해결되며, 아구가 맞는다. 필자는 론강이 요수라 했다. 즉 요서라면 프랑스의 동쪽, 론강의 서쪽지역이 된다. 이곳에 남조의 진나라가 있을 수 있다. 장강은 르와르강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에 남제가 있었을 것이다. 즉 동성왕이 북위와 전쟁을 할 때, 위치한 곳이다.

 

온조가 남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운 곳은 이 근처와 이태리 북부로 여겨진다. 한산은 이태리 북부 알프스산맥의 어디가 아닐까 한다. 이곳에서 부아악에 올라 보니, 동쪽은 높은 산으로 막혀 있고, 서쪽은 바다로 막혀 있다. 남으로는 평야가 있다. 그래서 하남 위례성이 이 근방일 수 있다. 그러나 점차 세력을 넓혀 프랑스 르와르강 주위 한성을 차지한다. 온조왕 25년 즉 AD 7년, 삼국사기 기록에는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기록을 하고 있다. 이때 한성을 차지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수 주위의 한성은 프랑스 르와르강(=장강) 이남의 Clermont-Ferrand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비류가 남으로 내려와 바닷가에 세운 미추홀은 지중해변의 도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요수 즉 론강의 지류 Jadron river로 추정되는 주몽의 졸본부여의 졸본천이 있고, 이에서 남하하여 온조와 비류가 백제를 세운 것이다.

 

한수와 한성지역은 론강의 서쪽 즉 요서지역이 된다. 또한 남조의 지역이 된다. 남조 진나라는 동쪽으로 있어 남제 등의 지역과 일치한다. 동성왕시 백제는 발칸반도의 백제와 프랑스의 요서지방의 백제 (즉 남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크 역사에서는 이 지역에 부르군디왕국이 있었는데, 동성왕 시기에, 부르군디왕국에서 형제간 싸움이 있어 동생이 이겼다는 기록이 있다. 즉 동성왕이 형이 있는 남제에 보낸 서찰내용 즉 행안국 장군 등의 지위 임명을 허락해 달라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동성왕은 북위와 3차례에 걸친 전쟁을 한다. 한번은 지고 두번은 이겼다. 즉 남제 지역에서 형을 꺾고 차지한 지역에서 북위와 전쟁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한성으로 추정되는 Clermont-Ferrand에서 고구려 문자왕이 507년 말갈과 연합하여 한성을 공격하고자 했으나, 횡악에 머물렀다 했다. 여기서 횡악은 피레네산맥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동고트왕국 (이태리반도와 그 우측)과 서고트왕국(이베리아반도 지역)이 고구려라고 추정했다. 그리고 서고트왕국은 한때 Orleans까지 공격하고 Clermont-Ferrand을 475-507년 기간동안 차지했다고 한다. 즉 한성백제를 멸하고 차지한 지역이다. 그러나 507년 문자왕 시기에 또는 그 전에 한성을 다시 백제 무령왕에 빼앗기지 않았나 한다.

 

백제 비유왕 시기 455년에 삼국사기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검은 용이 한강에 나타나고 비유왕이 죽었다’ (비유왕 29년 9월) 검은 용은 고구려를 의미한다고 본다. 즉 한수유역에서 이미 고구려와 다툼이 있었다는 것이다.

 

Loire river map in France (source : Wikipedia)

 

피레네산맥으로 보이는 횡악에 대해 삼국사기에 백제 다루왕 시기(AD 31)부터 진사왕때(AD 391)까지 언급되는 것을 보면 이미 백제가 이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백제 다루왕 4년 9월 (AD 31)  : 횡악 아래에서 사슴을 사냥하다

백제 기루왕 17년 8월(AD 93) : 횡악의 큰 바위 다섯개가 땅에 떨어지다

백제 진사왕 7년 8월 (AD 391) : 횡악 서쪽지역에서 사냥하다

 

 

이러한 백제의 장강이남의 역사는 남조 진을 제외하고 중국사의 남조 육조(六朝)의 역사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는다. 육조는 손오(동오) (229-280), 동진(317-420), 유송(420-479), 남제(479-502), 양(502-557), 진(557-589)에 해당한다.

 

남조의 진(陳)은 진흥왕 시기의 신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흥왕은 한성을 취했다 했다. 진흥왕이 낙랑군공이란 직책을 북제로부터 받은 것이 565년이다. 낙랑군은 필자는 이태리북부라 추정했다. 즉 롬바르디왕국이 진흥왕이 정복한 지역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프랑스의 동남부지역까지 진출하여 남조의 진나라를 세운 것이 아닌가 한다. 남조의 진나라는 557-589년 기간에 존재하는데, 진흥왕 시기에 시작하여 진평왕 시기에 끝난다. 남조의 진나라는 589년 망하는데, 진평왕 10년에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남조의 진나라가 망하는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 기록 참조)

 

진평왕 8년 3월 : 천둥과 벼락이 치다 (586)

             9년 7월 : 대세와 구칠이 바다로 떠나다 (587)

          10년10월 : 상대등인 노리부가 죽다 (588)

           11년 3월 : 원광법사가 진에 들어 가다 (589)

 

 

남조의 진나라는 진(陳)이 아니라 진(眞)일 수도 있다.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의 진(眞)자이다. 중국의 사가들이 감추기 위해 글자를 바꿀 수도 있다.

 

그리고 진흥왕은 북한산주를 세운다. 즉 한산지역을 점령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산지역은 백제가 고구려와 싸울 때 많이 접하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을 성왕이 과거 백제지역을 회복했는데, 신라 진흥왕에게 다시 빼앗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북한산주는 알프스산맥의 일부로 보인다. 롬바르디왕국의 지역이다. 조선의 남한산성도 이곳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현재의 한반도와 중공지역을 중국과 한민족의 역사로 가정할 때, 코미디 같은 결과를 초래하는데, 이 같은 모든 의혹들이 필자가 추정한 지역에서는 모두 풀린다.

 

필자는 ‘신라하와 조선하’라는 글에서 스위스 쥬리히에 근접한 Sihl river가 Silaha즉 신라하로 불린다는 것을 wikipedia자료를 통해 밝힌 적이 있다. 그들이 무심코 남긴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Silaha란 뜻을 모르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태리 북부지역의 바이올린의 원조는 해족이 남긴 해금이라는 글을 썼다. 그리고 해족은 스위스의 Helvetii족이라 추정했다. 해족은 거란과 한민족 사이에 존재한 지역이었다. 필자는 고구려의 수도 평양,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 왕험성이 스위스 지역에 있다고 추정했다. 즉 이 지역은 우리의 역사가 존재하는 지역이라는 많은 점을 필자는 발견한 것이다.

 

 

이상의 장황한 설명을 마치고자 한다. 즉 한반도와 중공지역이 우리의 역사, 적어도 삼국시대의 한중일의 역사의 주요 지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구려의 역사가 유라시아의 동쪽끝까지 이르렀을 수 있다. 그리고 백제의 담로가 유라시아 동쪽에까지 이르렀을 수 있다. 발해를 언급한 신당서에 의하면, 머나먼 동쪽 바다까지 발해의 영역이었다고 하니 발해의 영토가 고구려와 같이 유라시아 동쪽끝까지 이르렀을 수 있다. 그러면 신라도 현재의 중공지역까지 그리고 한반도까지 이르렀을 수도 있다. 필자는 국뽕주의자가 아니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가 유라시아 전대륙에 걸쳐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광대한 영토를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당시 비행기도 없이 말로 달리고 배로 이동하는 시기에는 주로 배를 이용했을 것이란 추정이다. 그러나 신라는 삼국통일 전에는 고구려, 백제, 왜에 비해 수군이 약했다. 그래서 의문이 든다. 그러나 통일 후 장보고의 해상활동을 보면 통일 신라시대부터 활동 영역이 넓어졌을 수 있다고 본다. 8-9세기에 맥족이 멕시코로 이동했다는 주장, 캘리포니아의 부상국 존재, 아리조나 주의 그랜드캐년 속의 Kincaid cave속의 거대 석조 불상, 중국사의 상나라가 이동해 왔다는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학자의 주장 등을 고려하면 우리의 상상 보다 훨씬 더 찬란한 선조들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한반도 경주의 사적을 보면, 고려시대에 이장을 했거나, 일제가 역사를 조작하기 위해 옮겨 놓았을 수도 있다. 동국조선이라는 자귀를 볼 때 동쪽으로 이동한 뉴앙스를 준다. 고려시대에도 ‘동국이상국집’이란 저서가 있는 것을 보면, 고려시대 몽골의 세력에 눌려 고려가 동쪽으로 더 이동한 지도 모른다. 고려 후기에 썼다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360개 지명이 어디인지 모른다고 했다. 즉 당시 김부식의 고려시대에 선조의 역사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자가 우리 조상 동이족이 만든 것을 모른다고 임어당에게 핀잔을 받은 한국의 엘리뜨가 받은 수모와 유사한 것이다. 선조들의 찬란한 역사를 모르고 우물안 개구리로 살아 가는 우리를, 일제의 역사 조작 세력들은 지하에서도 비웃고 있을 것이다.

 

아직 필자는 더 연구해 보아야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잃어버린 역사를 찾기 위해 열린 마음으로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 요즘의 한중일 지역은 어쩌면 모두 한민족의 역사 현장인지도 모른다. 나아가 러시아 지역도 대부분 우리의 역사 현장일 수도 있다. 필자는 유라시아 대륙 서쪽끝까지 우리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자가 되었으니, 그런 가정을 고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일본이나 중공이 기를 쓰고 역사를 왜곡하려는 초조함을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