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당나라/당나라

<펌>(고구려)유민의 강제적 이주 -문화원형백과

Chung Park 2023. 7. 9. 09:01

고선지 실크로드 개척사

유민의 강제적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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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외교 > 실크로드 개척사 > 고구려의 멸망과 고선지의 안서지역 정착 > 고구려의 멸망

한편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압록강 이북의 안시성(安市城) · 환도성(丸都城)
( 환도산성하 고분군)등 항복하지 않은 성 11개와 도망한 1)  7개의 성 등과 같이 당에게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세력들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강제 사민을 시행하였다. 이와같이 사민된 자들은 중국 내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이와 관련한 기사를 예시하면 아래와 같다.
① 총장(總章) 2년 고구려민 3만을 강회(江淮)와 산남(山南)으로 옮겼다.
( 신당서』 권220 『고려전』)

② 나머지 사람들은 하남(河南), 농우의 여러 州로 분산하여 옮겼는데 그 가운데 빈약한 자는 안동성(安東城) 부근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이로부터 안동에 있는 고구려의 구호(舊戶)가 점차 줄어들어 돌궐(突厥), 말갈(靺鞨) 등으로 흩어졌다. ( 『구당서』권199「고려전」)

더욱이 고구려 유민의 강제 사민에 대해서 『구당서』 권5 『고종본기(高宗本紀)·하』 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즉

(총장 2년) 5월 경자(庚子) 고려의 호(戶) 2만 8천 2백과 거(수레;車) 1천 8십 승(乘), 우(소:牛) 3천 3백 두(마리;頭), 마(馬) 2천9백 필(匹), 타(낙타;駝) 6십 두(頭)를 옮겨 내지로 들게 하였는데 내주(萊州)와 영주(營州)에서 반차(般次) 발견(發遣)하여 강회(江淮) 이남과 산남(山南), 병주(幷州) 양주 이서(以西)의 여러 주의 공한지(空閑地)에 안치케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이루어진 고구려 유민에 대한 중국 내지로의 사민은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좌절시키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초치였다. 이와 동시에 고구려 유민의 중국 내지로의 사민은 중국으로의 고구려 문화를 이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총장 2년(669)에 강제 사민 조치 중, 빈약한 자들은 성에 남아 있게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강제 사민된 3만 호의 고구려인은 대부분 고구려의 상층부에 속하는 호민(豪民)일 개연성이 농후하다. 특히 병양주의 감숙방면으로 이주한 유민가운데에는 당제국의 군사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커다란 공적을 올린 이도 적지 않았을 것이이다.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 고선지(高仙芝)이다.

키워드 : 사민, 고선지

<환도산성 전경>환도산성 전경-환도산성은 집안시 북쪽으로 2.5km 떨어진 환도산에 자리잡고 있다. 이 산성의 동,서,북 3면은 높은 절벽에 막혀있고, 남쪽만이 트여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성벽은 동쪽 성벽의 남쪽 부분과 서쪽 성벽의 북쪽 부분 및 북쪽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높이는 5m 가량 된다. 이 산성의 성벽 길이는 동쪽 1,716m, 서쪽 2,440m, 남쪽 1,009m로서 성벽 총 길이는 6,951m에 이르른다.

<환도산성하 고분군>환도산성하 고분군-환도산성 주변으로 펼쳐져 있는 산성하고분군이다. 1,600여 기의 고분 중 석분류가 529기, 토분류가 1,052기가 발견되었다.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1>고구려(高句麗)『통전(通典)』에 의하면 "주몽(朱蒙)이 한나라 건소(建昭) 2년(B.C.37)에 북부여(北扶餘)에서 동남쪽으로 가서, 보술수(普述水)를 건너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머물렀다. 국호를 구려(句麗)라 하고,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라고 하였고, 『고기(古記)』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난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 고 하였으니, 흘승골성과 졸본은 한 곳인 듯하다. 『한서지(漢書志 ; 한서 지리지를 말함)』에 "요동군(遼東郡)은 낙양(洛陽)에서 3,600리 떨어져 있고, 속현(屬縣)에 무려(無慮)가 있었다." 고 하였으니, 곧 주례(周禮)에서 말한 의 북진(北鎭)인 의무려산(醫巫閭山)이다. 요나라[大遼]가 그 아래에 의주(醫州)를 설치하였다. 현도군(玄菟郡)은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4,000리 떨어져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2>"현도군(玄菟郡)은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4,000리 떨어져 있고, 소속된 현(縣)이 셋이었는데, 고구려(高句麗)가 그 중의 하나"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른바 ‘주몽이 도읍한 흘승골성·졸본’이라는 것은 대개 한나라 현도군의 경계이고, 요(遼)나라 동경(東京)의 서쪽이니, 한지(漢志)의 이른바 ‘현도속현(玄屬縣) 고구려(高句麗)’는 이것이 아닌가 한다. 옛날 요나라[大遼]가 아직 망하지 않았을 때 요나라 황제가 연경(燕京)에 있었으므로, 우리 조빙 일행은 동경을 지나고 요수(遼水)를 건너 하루 이틀 가서 의주(醫州)에 이르고, 거기서 연계(燕)로 향하였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알 수 있다. 주몽이 흘승골성에 도읍해서부터 40년을 지내고, 유류왕(孺留王) 22년(A.D.3)에 서울[都]을 국내성으로 옮겼다. (혹은 위나암성(尉那巖城) 혹은 불이성(不而城)이라고도 하였다.) 한서(漢書)를 살펴보건대 낙랑군(樂浪郡) 속현에 불이(不而)가 있다. 또한 총장 2년(669)에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이 칙명을 받들어 고구려의 여러 성(城)에 도독부(都督府)와 주현(州縣)을 설치하였는데, 그 목록에 이르기를 "압록(鴨) 이북의 이미 항복한 성이 열 하나요, 그 중의 하나가 국내성이다."

<신당서 고려전>총장(總章) 2년 고구려민 3만을 강회(江淮)와 산남(山南)으로 옮겼다

 

<구당서 고려전>나머지 사람들은 하남, 농우의 여러 州로 분산하여 옮겼는데 그 가운데 빈약한 자는 안동성(安東城) 부근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이로부터 안동에 있는 고구려의 구호(舊戶)가 점차 줄어들어 돌궐(突厥), 말갈(靺鞨) 등으로 흩어졌다

<구당서 고종본기하>(총장 2년,668) 5월 경자(庚子) 고려의 호(戶) 2만 8천 2백과 거(수레;車) 1천 8십 승(乘), 우(소:牛) 3천 3백 두(마리;頭), 마(馬) 2천9백 필(匹), 타(낙타;駝) 6십 두(頭)를 옮겨 내지로 들게 하였는데 내주(萊州)와 영주(營州)에서 반차(般次) 발견(發遣)하여 강회(江淮) 이남과 산남(山南), 병주(幷州) 양주 이서(以西)의 여러 주의 공한지(空閑地)에 안치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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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유민의 강제적 이주 (문화원형백과 고선지 실크로드 개척사, 2002.,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