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삼환관경 중 총론과 마한세가의 분석 (아래 링크 글 참조) 이후, 이번글에서는 번한세가의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삼한의 위치 비정에 대한 검토를 하고자 한다.
https://lostcorea.tistory.com/1906
II. 번한 세가 내용의 위치 관련 내용 및 위치 비정 검토
이번 번한세가 내용은 관련 내용 소개와 위치 비정 검토를 동시에 하기로 한다. 지난 번 마한세가에서는 별도로 하였는데, 중복된 감이 없지 않았다.
<番韓世家 上 번한세가 상>
1) 치우 : 서쪽으로 탁예 정벌, 남쪽으로 회대 평정
요순은 단군조선의 제후
요임금이 양위譲位한 배경
蚩尤天王 西征涿芮 南平淮岱 披山通道 地廣萬里
至檀君王儉 與唐堯幷世 堯德益衰 來與爭地不休
天王 乃命虞舜 分土而治 遣兵而屯
約以共伐唐堯 堯乃力屈 依舜而保命以國讓
於是 舜之父子兄弟 復歸同家 盖爲國之道 孝悌爲先
<해설>
치우천왕은 서쪽으로 탁예(涿芮-탁록)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淮岱-태산)를 평정하셨다. 산을 뚫고 길을 내시니 땅 넓이는 만리에 이르더라. 단군왕검은 제요도당(帝堯陶唐)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은 마침내 우순(虞舜)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요를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딸려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 이에 순임금의 부자형제가 돌아와 같은 집에 살게 되었으니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효제(孝悌)가 먼저이다.
치우천왕이 서쪽으로 탁예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를 편정하였다 한다. 해설자는 탁예를 탁록이라 해석한다. 예자는 성씨 예, 종족이름열, 물가예의 뜻을 가진다. (네이버 한자 사전 참고). 헌원을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보면, 탁록과 다른 지역을 의미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지역을 알 수 없으니 애석하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탁록을 가필하여 고칠 수 있다는 판단도 든다. 번한세가에서 굳이 치우천왕을 언급하는 것은 이 지역이 번한에 가깝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생각한다. 번한은 요수 지역에 10개의 성을 쌓았다 한다. 따라서 요수 건너 요서에 있는 중국과 접경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탁예나 탁록은 요수 서쪽의 지역으로 중국지역에서 충돌한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치우천왕은 남쪽으로 회대지방을 평정하였다 했다. 회대(淮岱)지방은 회수(淮水)와 대수(岱水)지역을 말하지 않나 한다. 회수는 중국의 황하와 장강의 사이에 있는 강이다. 회수이남은 초나라지역으로 중국사에서 이민족의 영역으로 취급되었다. 대수는 백제의 온조가 이동하여 나라를 세운 지역이 패대지역을 지나서라 했다. 즉 패수와 대수를 지나 남쪽에 십제를 건국했다 하는데, 그 대수가 아닌가 한다. 아래 요수지역에 12개의 성을 쌓았다는 기록(5)번 기록)이 나오는데, 그중에 '백제'란 성이름이 등장한다. 물론 단군시대에 백제란 명칭이 있겠느냐만, 근대 시기에 편집된 환단고기이니 그 당시에 알려진 지역명을 쓴 것으로 판단된다. 여하튼 회대지역은 회수와 대수 지역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은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추론이다.
이러한 것을 감안하면, 번한을 동북아의 요하지역 근처로 비정하는 것은, 현재 중공의 회수지역까지 너무 멀어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또한 윗글에서 이어서 요와 순에 대해 언급하면서 단군왕검이 순임금과 결탁하여 요임금을 몰아 냈다는 언급을 한다. 요임금이 수도로 삼은 곳은 평양(平陽)이라 한다.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부드러운 흙양자를 쓰는 것이 다르다. 당요의 수도 평양은 볕양자를 쓰지만 같은 평자를 쓴 것을 고려하면, 서로가 그리 멀지 않다는 판단이다. 사사명의 평로 절도사, 평안호태왕(광개토태왕), 안평왕, 평강왕, 진평왕 등 우리 역사에서 평자와 관련된 왕명도 많은 것을 보면, 그렇게 판단된다.
우리 재야사학계에서는 단군이 처음 도읍했던 평양, 이후 고구려의 수도가 된 평양을 어디로 추정하는지 궁금하다. 지금의 한반도 평양으로 추정한다면, 상기 환단고기의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다. 일부는 지금 중공의 서안을 평양으로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요서에서도 한참 서쪽으로 가야 하니 맞지 않는다. 당태종은 평양을 공격하는데, 요수를 건너야 했으며, 압록곡의 험한 형세가 고구려 공격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지금의 중공 요하 주위에 압록곡의 험한 형세가 있는지 묻고 싶다.
그러나 필자가 추정하는 지역에서는 이러한 모든 조건이 들어 맞는다. 필자는 요수를 프랑스의 론강으로 추정하고, 백두산(=태백산= 장백산)을 알프스 산맥의 몽블랑산으로 추정한다. 발해고에서는 백두산이 동서로 천리에 걸쳐 있다고 했다. 천리면 400km에 달한다. 지금의 한반도 백두산이 아님은 당연하다. 요하지역에도 이런 산은 없다.
필자는 단군왕검이 초기에 도읍하고, 위만이 도읍하고, 고구려가 도읍한 평양 즉 왕검성(왕험성)은 스위스지역에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Bern, Zurich, Liechtenstein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 지역은 상기의 여러 조건을 모두 만족시킨다.
또한 여기에 번한의 도읍지 탕지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스위스에는 노천 온천이 많다. 스키와 함께 관광객이 찾는 이유이다. 요수주위에 쌓은 12개 성중에 번한의 도읍지 탕지(湯池)가 있는데 (아래 5)번 자료), 과연 이러한 탕지가 현재 중공의 요하 주위에 있는가?
2) 구년 홍수를 다스리기 위한 도산塗山 회의
及九年洪水 害及萬民 故檀君王儉 遣太子扶婁
約與虞舜 招會于塗山 舜遣司空禹 受我五行治水之法 而功乃成也
<해설>
9년 홍수를 당해 그 피해가 만백성에게 미치니 단군왕검은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순임금과 약속하고 초청하여 도산(塗山)에서 만났다. 순임금은 사공(司空-건설부장관)인 우(禹)를 파견하여 우리의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배우게 하니 마침내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상기 귀절에서 도산이란 지명이 나온다. 도산에서 치수법을 순임금에게 전수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단군시대에 이미 홍수 피해 경험이 많아 이를 다스리는 노하우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특수한 지형적 조건이 동북아시아에 과거 기원전 10,000 - 7,000 사이에 있었는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물론 빙하기가 끝나면서 생길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아니면 기후적으로 폭우가 쏟아지는 지형조건이 있는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오행치수법이 무엇인지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도 살펴 보아야 한다. 단지 기록만 읊는 것은 학자의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왜 도산지역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도산지역은 당시 순임금이 있는 우나라와 단군조선과 가까운지 살펴 보아야 한다. 청동제 수레를 타고 이동하는 시기인 이 시기에 먼 지역을 이동하기는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위와 같은 점에서, 재야사학계가 주장하는 위 지도의 위치비정은 많은 의문점을 제시한다. 우선 단군이 직접 통치하는 지역인 진한에서 너무 멀다. 그리고 번한을 상당히 크게 확장하여 그렸다. 요수 주위에 12개성을 쌓고, 방어한 번한이다. 요수를 요하라 주장한다면, 상기 지도의 영역은 요하와 너무 멀다. 특히 당요와 싸웠다면, 그 접하는 지역에 많은 성을 쌓아야 한다. 따라서 상기 위치 비정은 합리적이지 않다.
3) 우를 낭야성에 두어 구려분정
5년마다 순수하는 낭야는 진국 땅
- 천자 단군왕검을 알현한 제후 순
於是 置監虞於琅耶城 以決九黎分政之議 卽書所云 東巡望秩 肆覲東后者 此也
辰國 天帝子所治 故五歲巡到琅耶者一也 舜諸侯 故朝覲辰韓者四也
<해설>
이에 우(虞 : 舜)를 낭야성(琅耶城)에 두어서 이로써 구려분정(九黎分政)의 뜻을 정하였다. 바로《서경(書經)》에서 말하는 바의 「동순(東巡)하여 망제(望祭-멀리서 산을 보며 제사)를 지내고 마침내 동쪽의 왕<東后>을 찾아 뵙다」라는 기록이 바로 이것이다.
진국(辰國-단군조선)은 천제의 아들이 다스리는 곳이다. 고로 5년마다 순수(巡狩)하는데 낭야에 한 번씩 이르렀다. 순(舜)의 제후는 때문에 진한에 조근(朝覲)하기를 네 번씩이었다.
상기 글을 보면 낭야지역이 위치 관련 중요 지역이 된다. 우나라의 순임금을 낭야성에 두어서 구려분정의 뜻을 정하였다는 것이다. 즉 낭야지역을 단군조선이 제후지역으로 삼아 순임금이 다스리게 했으며, 5년마다 한번씩 순회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낭야지역에 대한 자료를 살펴 보았다. (아래 자료 참조)
<낭야군 - 위키백과>
"춘추 시대 말기에는 월나라의 서울인 낭야가 있었고, 전국 시대에서는 제나라의 영토였다.........
전한에서는 새로 제왕이 된 한신의 봉토였으나, 제나라의 부유함과 지리적 이점을 노린 전한 조정에서는 한신을 초나라로 이봉한 후 직할령으로 삼았다.
문제 15년(기원전 165년) 제후왕을 견제하는 조치의 일환으로 제문왕 유칙이 아들 없이 죽자 제나라를 폐지하면서 낭야군은 한나라에 속했고, 문제 16년(기원전 164년)에 폐지된 제나라에 다시 일곱 제후왕국을 세웠으나 낭야군만은 한나라 아래에 그대로 남았다...
신나라에서는 군의 이름을 진이(塡夷)로 바꾸고,...........
(후한시기) 낙양에서 동으로 1,500리 거리에 있으며........
(위진 시기) 영가의 난이후 석륵에 의해 함락되었다.
동진말엽, 비수 대전에서 승리한 남조가 회수이북의 서주를 수복하면서 낭야군은 남조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명제시기 송나라가 북위의 침공으로 회수이북의 모든 땅을 상실하면서 군 전역이 북위로 편입되었고,.......송말의 낭야군은 ......... 서주의 치소까지 육로로 400리, 건강까지 수로로 1,500리, 육로로 1,100리였다고 한다
북위의 낭야군은 본래 서주의 속군으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529년(북위 효장제 영안 2년) 북서주(北徐州)가 분리되자 북서주로 편입되었다.
(자료 : 낭야군, 위키백과)
상기 기록은 두가지 내용을 말한다. 냥야지역은 제나라지역이었으며, 기름진 지역이므로, 한신의 봉토를 빼앗아 한나라 영역으로 하였으며, 신나라에서는 진이(塡夷)라는 명칭을 썼다. 후한시기에는 낙양에서 동쪽으로 1500리가 떨어진 지역이라 했으며, 남북조시기 비수대전에 패한 북위가 남조에게 빼앗긴 지역으로 회수 이북에 위치하였다 한다.
아래 지도는 제나라 영역을 나무위키 자료에서 제시한 것이다. 이정기의 치청평로절도사의 지역이기도 하며, 황소의 난이 일어난 곳이라고도 한다. 사사명이 난을 일으킨 연나라지역과도 가깝다. 그동안 많이 보아온 제나라지역이기도 하다.
(자료 : 나무위키)
그러나 상기 낭야군의 자료에서 남조가 북위와의 비수대전에서 빼앗은 지역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송말에는 다시 북위가 회수이북의 땅을 다시 회복하면서 낭야군은 다시 북위 소속으로 변했다 한다. 여하튼 낭야군은 신나라가 진이(塡夷) 라는 명칭을 한 것을 보면 동이족의 땅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동이족의 땅은 요수의 동쪽을 가리킨다. 모든 역사서에 나와 있는 객관화된 사실이다. 그러나 상기 지도는 요수라 칭하는 중공의 요하의 동쪽이 아니다.
또한 태산이 있다하는 현재 중공의 산동지방이 낭야지역인지 의문시된다. 우선 태산이 산동지방에 있는가?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하고 시를 읊은 대상이 된 높은 산 태산이다. 지금 중공의 산동지방은 평지의 녹색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산동은 어떤 산의 동쪽인가? 산서와 산동을 가르는 높은 산맥이 있던가? 필자는 중공의 모든 지명이 의심스럽다. 청해성이란 서부지역은 청해에 접하여 있는가? 즉 역사적 지명과 중공의 현 지명은 괴리가 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 중공의 지명을 고려한 위치비정은 당연히 맞을 수가 없다.
상기 낭야군 자료는 필자가 추정하는 중국의 위치에서도 안맞는 부분이 있다. 낙양의 동쪽 1500리에 있다는 낭야군이 후한서 원문에 그렇게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렇다면 낭야군은 요동에 있게 된다. 필자는 낙양은 프랑스의 Orleans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강은 피레네산맥의 남쪽 에브로강으로 추정하고, 황하는 르와르강, 그리고 회수는 가론강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낙양의 동쪽 리에 있는 요동에 가까운 지역 내지 제나라의 지역, 펑로절도사가 있던 곳이 되는데, 회수의 북쪽은 이와는 거리가 멀고 무엇보다 방향이 틀리다. 이러한 결과는 처음 당하는데, 이는 필자의 회수 추정이 틀렸다거나 아니면 상기 낭야군 내용 중 원문내용이 아닌 현재 중공지역을 전제로한 위치설명이 있었거나 둘 중 하나이다. 앞으로 두고 더 살펴볼 일이다.
4) 치우 후손 번한왕 및 험독부의 왕검성
초대 번한 왕은 치우천황의 후손 치두남
於是 檀君王儉 擇蚩尤後孫中有智謀勇力者爲番韓 立府險瀆 今亦稱王儉城也
<해설>
이에 단군왕검은 치우의 후손 가운데 지모가 뛰어나고 세상에 소문난 자를 골라
번한(番韓)이라 하고 부(府)를 험독(險瀆)에 세우게 되었다. 지금도 역시 왕검성이라고 한다.
번한의 험독성 왕검성을 어디에 비정하는지 궁금하다. 이곳에 만번한 위만이 도읍한 왕험성, 왕검성일 것이다. 그리고 번한의 도읍지인 탕지와도 가까울 것이다. 아래 5)번 항목에서 요수일대에 쌓은 12개성 중에 탕지가 있다. 그러면 중공의 요하 부근이 되어야 한다. 이곳이 백두산 가까이 있는 단군조선의 초기 평양이 되는데, 과연 그런가?
5) 요수潦水 일대에 쌓은 십이성 : 험독(險瀆)․영지(令支)․탕지(湯池)․용도․거용․ 한성(汗城)․개평․대방․백제(百濟)․장령․갈산․여성
가한성 = 낭야성 : 번한의 낭야에 세워짐
蚩頭男 蚩尤天王之後也 以勇智著聞於世
檀君乃召見而奇之 卽拜爲番韓 兼帶監虞之政
庚子 築遼中十二城
險瀆令支湯池桶道渠庸汗城蓋平帶方百濟長嶺碣山黎城是也
頭男薨 子琅邪立 是歲庚寅三月 改築可汗城 以備不虞
可汗城一名琅邪城 以番韓琅邪所築 故得名也
<해설>
"치두남(蚩頭男 : 1대)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게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은 곧 불러보시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번한으로 임명하고 겸직하여 우(虞)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년(B.C.2321)에 요중(遼中)에 열두 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險瀆)․영지(令支)․탕지(湯池-번한의 수도)․용도․거용․ 한성․개평․대방․백제(百濟)․장령․갈산․여성이 그것들이다.
치두남이 죽으니, 아들 낭야(琅邪 : 2대)가 즉위하였다. 이해 경인 3월 가한성(可汗城)을 개축함으로써 예상하지 못했던 일(?)에 대비하였다. 가한성은 일명 낭야성이라 하니 번한의 낭야에 세워진 때문이다."
상기 12개 성중에 눈에 띄는 성들이 있다. 험독, 탕지, 대방, 백제, 장령, 갈산, 여성이 그것이다. 이들에 대해 논해보자. 이들은 요수주위에 있는 성들이다.
먼저 탕지에 대해 살펴 보자.
탕지는 명나라의 요동도지휘사사의 영원위가 다스렸다. 동북쪽에 장령산이 있고, 남쪽에 빈해가 있다고 했다. (아래 자료 참조)
"1430년(선덕 5년) 정월 광녕전둔위와 광녕중둔위땅에 설치했다. 탕지(湯池)를 다스렸다. 위 서북쪽에 대단산(大團山)이 있다. 동북쪽에 장령산(長嶺山)이 있다. 남쪽에 빈해(賓海)가 있다. 동쪽에 도화도(桃花島)가 있다. 동남쪽에 각화도성(覺華島城)이 있다. 서쪽에 영원하(寧遠河)가 있다."
(자료 : 요동도지휘사사의 영원위, 위키백과, 인용출처 : 본블로그, 카테고리, 고조선)
즉 탕지는 요동에 있었으며, 탕지를 포함한 영원위가 남쪽에 빈해가 있고, 동북쪽에 장령산이 있다. 즉 탕지는 요수 가까이 있으면서도 요동쪽에 있고, 주위에 바다가 가깝고 장령산이나 대단산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중공의 요하를 요수로 추정한다면, 이런 지형에 주위에 있는가? 더구나 탕지는 노천 온천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과연 요하 주위에 이런 Hot Springs이 있는가? 탕지산이라는 표현도 있는 것을 보면, 산에 있는 탕지도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요하 주위에 이런 탕지가 있는가? 필자는 매우 의문스럽다. 어느 불로거는 중국의 요하에는 없고, 키르키즈스탄에 있으니 탕지가 그곳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단지 탕지와 같은 온천 하나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주위에 요수가 있어야 하고, 주위에 백두산이 있어야 하며, 험한 압록곡이 있어야 하고, 험독의 지형을 가진 왕검성이 있어야 한다. 이 모든 조건을 갖추어야 탕지가 될 수 있다.
필자가 추정하는 지역은 이 모든 조건을 완벽히 갖추었다. 탕지는 스위스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험독의 왕검성이 스위스에 있다고 추정했으며, 고구려의 평양도 이곳으로 추정했다. 요수는 바로 옆에 있는 프랑스의 론강이며, 백두산은 알프스산맥의 몽블랑산으로 추정했다. 론강은 물속에 특수한 광물질이 있어 푸른 색을 띤다 한다. 그리고 론강의 우측에도 이러한 광물성분이 있어 이 주위가 압록부가 될 수 있다. 론강의 험한 계곡은 알프스지형과도 연계되어 있으므로, 압록강의 험지가 좋은 방어수단이 되어, 당나라가 고구려 침략하는데 고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위스에 탕지와 같은 지역이 많다. 필자도 최근에 알게된 것이지만 놀라울 뿐이다. 이중 Leukerbad지역은 주위가 바위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노천온천지역이다.
요수 주위의 12개성 중에서 대방과 백제가 있는 것은 이 지역이 백제의 발원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백제는 대방지역에서 태동했다 중국 사서는 말했다. 번한 시기에는 백제라는 명칭이 없었겠지만, 20세기에 편집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표현이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 성이 요수주위에 있다는 것이다. 과연 재야사학계 중 누가 백제가 요수 주위에서 태동했는가를 말했는가? 몹시 의문스럽다. 필자도 백제의 태동지역에 대해 많은 분석을 하였지만, 그래도 미심적은 부분이 있었는데, 이 요수 주위에 있었다는 기록에 더욱 구체적인 지역 설정이 가능해졌다.
다음에는 갈산이 요수 주위 12개 성중에 있었다. 갈석산을 의미하지 않나 한다. 갈석산의 갈과 같은 한자이다. 갈석산은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갈석산에 올라 창해를 바라보며, 동이에 대한 정복 의지를 태웠다고 한다. 이 갈석산이 요수 주위에 있으니 지금의 중공 요하 주위에 있다 가정하면, 갈석산에 올라가서 본 창해는 어디인가? 지금의 발해만 밖에 없다. 발해만 아래 동이가 있는가? 상황이 맞지 않는다. 즉 지금의 요하가 요수가 아니라는 추정이다. 필자가 추정하는 론강을 요수라 한다면, 그리고 창해를 지중해로 본다면, 동이의 세력은 요수의 동쪽에 있는 세력이 된다. 필자도 갈석산을 론강 주위로 추정했다.
장령은 요수의 하류 부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장령, 장령성, 장령진이 삼국사기에 많이 언급되는데, 고구려의 서쪽, 백제와 신라는 말갈과 장령을 두고 대치했다. 바다에 접한 장령진에는 신라가 왜의 세력에 대처했다. 이러한 장령과 같은 지형이 요하 하류에 있는가? 그러면 백제와 신라가 이곳에 접하고 말갈도 접해야 한다. 재야사학계는 이렇게 추정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자가 추정하는 요수를 프랑스의 론강으로 추정하면 이 모든 것이 들어 맞는다. 고구려는 론강(요수)의 동쪽에 있고, 중국이 론강(요수)의 서쪽에 있다. 이태리반도와 페르시아에는 신라가 있었고, 백제는 일부 요서 즉 론강의 서쪽에 있었고, 이베리아반도에 있었다. 또한 발칸반도에도 있었다. 말갈은 여러 말갈이 있었으나, 백두산 (몽블랑산) 북쪽에 속말말갈이 있었다. 그래서 말갈이 백제, 신라와 국경에서 충돌이 잦았던 것이다. 말갈은 고구려의 일부 세력일 수도 있다.
6) 태산과 회수淮水 사수泗水 지역 삼신신앙의 유래
甲戌 太子扶婁 以命往使塗山 路次琅邪 留居半月
聽聞民情 虞舜亦率四岳 報治水諸事 番韓 以太子命
令境內大興句堂 幷祭三神于泰山 自是三神古俗 大行于淮泗之間也
갑술년(B.C.2267)에 태자 부루는 명을 받들어 도산으로 가는 길에 반달 동안 낭야에 머무르며 민정을 청문했다. 우순도 역시 사악(四岳)을 인솔하고 치수의 여러 일들을 보고하였다. 번한은 태자의 명을 받고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고 아울러 삼신을 태산(泰山)에서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삼신을 받드는 옛 풍속은 회(淮) 사(泗) 지방(회수淮水 와 사수泗水)의 사이에서 크게 행해지게 되었다.
상기 기록은 다음과 같은 위치 관련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 첫째, 삼한에서 도산으로 가는 길에 낭야가 있다는 것. 그리고 냥야에서 민정을 살핀 것은 이 지역이 삼한의 지역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우순도 사악을 인솔하였다 하였다. 즉 우순이 있는 지역이 4개의 큰산이 있다는 의미이다. 셋째, 삼신을 태산에서 지냈으며, 이 풍속은 회수 사수 지방에서도 크게 행해졌다는 것이다. 태산에서 제사 지내도록 하니 이 풍속이 회수 사수 지역에 크게 행해졌다 하니 태산과 회수 사수지역이 매우 근접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태산과 회수, 사수가 근접해 있는지 살펴 보자. 아래 지도에서 회수는 황하와 장강 사이에 있다. 그러나 태산을 산동반도에 있다고 가정하면 회수와 태산은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자료 : 친친님의 블로그에서 복사함
태산을 산동반도에 있다고 가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필자는 이미 위에서 지형상의 의문점을 제기했다. 그리고 위의 기록에서 부루태자는 도산으로 가는 길에 낭야에 들러 민정을 살폈다고 했다. 그리고 반달 후에 도산으로 갔으며, 그후 태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했다. 즉 태산은 낭야가 있다고 추정하는 산동반도에 같이 있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 만약 같은 지역이라면, 낭야에 있을 때, 삼신제사를 지냈어야 한다고 추리한다. 따라서 태산이 산동반도에 있다고 추정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순이 4악을 데리고 왔다는 것은 4개의 산악지역의 대표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훅시 그중에 태산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지역은 동시에 회수와 사수지역에 가까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회수, 사수, 태산지역에 삼신신앙이 퍼진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그럼 이제 사수지역을 찾아 보자. 현재 중공이 주장하는 사수(泗水)의 위치에 대해 아래 까마귀님이 수경주에 비교하여 언급한 내용을 잠시 인용합니다. 필자는 아직 수경주 내용을 공부하지 않아서 아래 글을 인용합니다.
去頭截尾하고 일단 현재의 山東半島를 靑州라고 하는 것 부터가 거짓이며
세부적으로는 산동반도에 존재하는 泰山 부터 가짜 입니다.
泰山은 岱라는 이름을 역사 조작을 위해 고의적으로 고친 이름인 것이며
岱는 齊나라의 남쪽에 존재 하며, 河東 땅에 존재 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 산동반도의 泰山이 고대 역사에 등장하는 것 자체가 거짓 역사 입니다.
[출처] 《水經注》 泗水, 沘水, 沂水, 洙水|작성자 붉은까마귀
상기 인용된 글은 태산이 산동반도에 있다는 주장을 강력히 부정합니다. 따라서 사수도 산동반도에서 내려 오는 것으로 설명했으니 이 주장도 부정되리라 판단합니다. 필자는 사수(泗水)의 사자를 보건데, 네개의 강이 합쳐진 강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위 지도의 사수는 이러한 것과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필자가 추정하는 아래 프랑스지도를 보시면 그 가능성을 볼 수 있읍니다. 여기서 Loire 강은 황하로, Dordogne강을 회수로 보면, 사수의 위치는 Saone 강이 아닐까 합니다. Saone(손)강이 흐르는 리용(Lyon)의 위치는 여러 강이 접합니다. 그리고 중부 산악지형 (Massif Central)에 가깝습니다. 이곳에 태산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곳은 또한 중부 산악지형의 동쪽이므로 산동지역이 됩니다. 즉 회수, 사수, 태산의 지역이 이 지역이 아닐까 합니다.
Rivers in France
7) 오행치수의 묘법 전수
太子 至塗山 主理乃會 因番韓告虞司空 曰予北極水精子也 汝后請予
以欲導治水土 拯救百姓 三神上帝 悅予往助 故來也
遂以王土篆文天符王印 示之 曰
佩之則能歷險不危 逢凶無害 又有神針一枚 能測水深淺 用變無窮
又有皇矩倧寶 凡險要之水 鎭之永寧
以此三寶授汝 無違天帝子之大訓 可成大功也
於是 虞司空 三六九拜而進 曰勤行天帝子之命 佐我虞舜開泰之政
以報三神允悅之至焉 自太子扶婁 受金簡玉牒 盖五行治水之要訣也
太子 會九黎於塗山 命虞舜 卽報虞貢事例 今所謂禹貢 是也
琅邪薨 癸卯 子勿吉立 勿吉薨 甲午 子愛親立 愛親薨 子道茂立
道茂薨 癸亥 子虎甲立 丁丑 天王 巡到松壤 得疾而崩 番韓遣人治喪 分兵戒嚴
虎甲薨 檀君達門己丑 子烏羅立 甲午 夏主少康 遣使賀正
烏羅薨 丙戌 子伊朝立 伊朝薨 檀君阿述丙寅 弟居世立
居世薨 辛巳 子慈烏斯立 慈烏斯薨 乙未 子散新立 散新薨 戊子 子季佺立
庚申 以命設三神壇于湯池山 徙官家 湯池 古安德鄕也
<해설>
태자는 도산(절강성 소흥시 회계사)에 이르러 일들을 주관했다. 곧 회합하여 번한을 통해서 우사공(虞司空)에게 가로되,「나는 북극 수정(水精)의 아들이니라. 그대의 왕이 나에게 청하기를 물과 땅을 다스려서 백성들을 도와 이를 구하려 한다 했는데 삼신상제(三神上帝)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을 기꺼워하시므로 내가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천자의 땅의 글이 새겨진 천부왕인(天符王印)을 보이시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곧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며 흉한 일을 만나도 피해가 없을 것이다. 또 여기 신침(神針) 하나가 있나니 능히 물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또 황구종(皇矩宗)의 보물이 있는데 대저 험요의 물, 이것을 진압시켜 오래도록 평안케 하리라. 이 삼보(三寶)를 그대에게 주노라. 천제의 아들의 대훈에 어긋남이 없으면 마침내 큰 공을 이룰지니라」고 하였다.
이에 우나라 사공은 삼륙구배(三六九拜)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천제 아드님의 명을 게으름 없이 업으로 삼아 우리 우나라 순임금의 정치를 힘써 도와 삼신께 보답함은 크게 기꺼운 일로 반드시 그리하리이다」라고 하였다.
태자 부루로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으니 대저 오행은 치수의 요결이다. 태자는 구려(九黎-이지역에 사는 고구려 사람)를 도산에 모으고 우나라 순임금에게 명하여 곧 우공(虞貢)의 사례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이른바 우공(禹貢)이 그것이다.
낭야가 죽으니 계묘년(B.C.2238)에 아들 물길(勿吉 : 3대)이 즉위하였다. 물길이 죽으니 갑오년(B.C.2187)에 아들 애친(愛親 : 4대)이 즉위하였다. 애친이 죽으니 아들 도무(道茂 : 5대)가 즉위하였고 도무가 죽으니 계해년(B.C.2098)에 아들 호갑(虎甲 : 6대)이 즉위하였다. 정축년(B.C.2084)에 천왕께서 순시하사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번한이 사람을 보내 문상하고 병사를 보내 경계하도록 했다. 호갑이 죽으니 단군 달문(達門)의 기축년(B.C.2072)에 아들 오라(烏羅)가 즉위했다. 갑신년(B.C.2017)에 하나라왕 소강(小康)이 사신을 보내 새해 인사를 올렸다. 오라가 죽으니 병술년(B.C.2015)에 아들 이조(伊朝 : 8대)가 즉위했다. 이조가 죽으니 단군 아술(阿述)의 병인년(B.C.1975)에 동생 거세(居世 : 9대)가 즉위했다. 거세가 죽고 신사년(B.C.1960)에 아들 자오사(慈烏斯 : 10대)가 즉위했다. 자오사가 죽으니 을미년(B.C.1946)에 아들 산신(散新 : 11대)이 즉위했고, 산신이 죽으니 무자년(B.C.1893)에 아들 계전(季佺 : 12대)이 즉위했다. 경인년(B.C.1891) 명을 받아 삼신의 단을 탕지산(湯池山-번한의 수도옆에 있던 산)에 세우고 관리들의 집을 옮기게 하였다. 탕지는 옛날의 안덕향(安德鄕)이다.
상기 글은 다음의 4가지 위치 관련 내용이 있다.
(1) 태자는 구려(九黎-이지역에 사는 고구려 사람)를 도산에 모으고 ...
구려 사람을 고구려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기원전 2000년경에 고구려라는 명칭이 언급되는 것은 좀 그렇다. 그러나 동이족의 사람이라는 표현이 맞을 지 모른다. 그리고 후일 고구려지역일 지 모른다. 여하튼 도산은 상기 재야사학계가 추정한 지도에서 상당히 남쪽에 있어 거의 지금 중공의 양자강 위치에 있는데, 이곳에 구려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일 고구려지역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재야사학계의 추정으로는 이곳까지 고구려의 영역으로 추정하지는 않는 것 같다. 요하의 서쪽에서 한참 내려 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추정한 프랑스지역에서는 바로 동이족이나 고구려의 지역이 된다. 요수인 론강의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야사학계의 위치추정은 의문을 남기며, 필자의 추정이 오히려 합리적이다.
(2) 낭야가 죽으니 계묘년(B.C.2238)에 아들 물길(勿吉 : 3대)이 즉위하였다.
냥야가 죽으니 물길이 번한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물길은 물길족의 지역 출신이란 느낌을 준다. 필자는 이미 여러 번 출생지역 명을 이름으로 하는 사례를 언급했다. 재야사학계가 추정하는 물길지역이 번한 추정지역과 일치하는가? 진조선의 지역이 물길지역으로 추정하지 않았는가? 유럽에서는 Marcomanni라는 Suebi족의 일원에 해당하는 부족이 있다. 중부유럽에 있었던 부족인데, 물길족이 아닌가 한다. 요수(론강)의 동쪽 지역이므로 번한의 지역에 해당한다.
(3) 정축년(B.C.2084)에 천왕께서 순시하사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번한이 사람을 보내 문상하고 병사를 보내 경계하도록 했다.
송양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쓸 예정인데, 주몽이 병합한 그 송양의 비류국지역이다. 송양은 송양출신 지역 사람이라 지역이름으로도 쓰이는 것 같다. 송양은 주몽을 보고, 바다 한쪽에 있는 사람이라 그대를 잘 모른다 하였다. 즉 비류국이 바다 한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송양지역도 그러할 것이다.
재야사학계는 송양지역을 어디로 추정하는지 궁금하다. 홀본과도 관련 있으니 고구려지역 어디일텐데, 현재 중공의 요하지역으로 추정하나? 비류강을 끼고 있으니, 비류강, 풍류강과도 관련 있고, 강동에 있는 단군릉과도 관련 있다. 홀본천도 찾아야 하고, 송양이니 소나무가 많은 곳이어야 한다. 하백과도 관련 있다. 동북아시아 어느 곳을 위치 추정해도 바다 한 쪽에 있다는 조건은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지역을 현재 스웨덴의 남부지역으로 추정한다. 이 모든 것과 관련 있어 필자도 놀라게 된 지역이다. 필자는 이미 약수도 이 지역에 있고, 해모수단군도 이 지역과 관련 있다 추정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상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4) 호갑이 죽으니 단군 달문(達門)의 기축년(B.C.2072)에 아들 오라(烏羅)가 즉위했다. 갑신년(B.C.2017)에 하나라왕 소강(小康)이 사신을 보내 새해 인사를 올렸다.
하나라왕 소강이 사신을 보내 새해인사를 했다는 것은 번한이 하나라와 인접하였다는 것이다. 이미 우순 임금때부터 치수관련하여 접촉이 있었던 만큼, 번한이 하나라와 근접한 위치를 말해 준다. 그러나 번한의 수도인 탕지가 요수 근처에 있던 만큼, 중공 동해안을 따라 길게 위치를 추정한 번한의 영역은 의문의 여지가 많다.
(5) 경인년(B.C.1891) 명을 받아 삼신의 단을 탕지산(湯池山-번한의 수도옆에 있던 산)에 세우고 관리들의 집을 옮기게 하였다. 탕지는 옛날의 안덕향(安德鄕)이다.
번한의 수도 탕지는 옛날의 안덕향이라 하니 관련 자료를 찾아 보았다.
아래 자료를 보면 요나라의 안덕부가 안덕향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이는 왕검성, 평양성, 안시성과 거의 일치하는 지역이라 한다. 동북아시아에서 이러한 조건을 만족 시키는 지역이 있는가? 탕지는 노천 온천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런 지형이 평양성 추정지역에 있는가? 저윽이 의심스럽다. 그런데 필자가 추정하는 스위스지역의 왕검성, 평양성 등은 탕지의 노천온천이 많은 지역이다. 안시성은 평양성보다 서쪽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요나라는 옛 왕검성(평양성)이 있던 지역에 부府를 설치했는데, 그 명칭이 바로 안덕부安德府이다. 요나라의 정사인 [요사遼史] 지리지에도 안덕부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중국의 고지도도 하북성의 난하를 요수遼水라고 한 뒤 그 동쪽에 요나라의 안덕부를 표기하고 있다.
요나라에서 설치한 안덕부安德府는 말할 것도 없이 고대 조선으로부터 내려오던 안덕향安德鄕이란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요나라의 안덕부는 왕검성· 평양성· 안시성이 있던 지역과 거의 일치하는 곳으로,.....
8) 번한番韓 십오세 왕 소전少佺,
은나라 탕湯을 도와 하夏나라 폭군 걸桀을 정벌함
薨 丁巳 子伯佺立 伯佺薨 乙未 仲弟仲佺立 薨 辛卯 子少佺立
甲午 遣將蚩雲出 助湯伐桀 乙未 遣墨胎 賀湯卽位 少佺薨 甲戌 子沙奄立
薨 弟棲韓立 薨 丁丑 子勿駕立 薨 辛巳 子莫眞立
薨 丁卯 子震丹立 是歲 殷主太戊 來獻方物 薨 癸酉 子甘丁立
薨 子蘇密立 癸巳三年 以殷不貢 往討北紬 其主河亶甲 乃謝
蘇密薨 子沙豆莫立 薨 季父甲飛立 薨 庚申 子烏立婁立 薨 子徐市立
薨 戊申 子安市立 薨 己丑 子奚牟羅立
薨 檀君蘇台五年 以雨師小丁 出補番韓 盖高登 每彈其智謀出衆而勸帝出補
時 殷主武丁 方欲興兵 高登聞之 遂與上將西余
共破之 追至索度 縱兵焚掠而還 西余 襲破北亳 仍屯兵于湯池山
遣刺客 殺小丁 幷載兵甲而去
<해설>
계전이 죽었다. 정사년(B.C.1864) 아들 백전(伯佺 : 13대)이 즉위했고, 백전이 죽은 뒤 을미년(B.C.1826)에 중제(仲弟) 중전(仲佺 : 14대)이 즉위했고, 그가 죽자 신묘년(B.C.1770)에 아들 소전(少佺 : 15대)이 즉위했다. 갑오년(B.C.1767)에 장군 치운(蚩雲)을 파견하여 탕(湯)을 도와 걸(桀)을 치게 하였다. 을미년(B.C.1766)에 묵태(墨胎)를 파견하여 탕임금의 즉위를 축하했다.
소전이 죽고 갑자년(B.C.1727)에 아들 사엄(沙奄 : 16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동생 서한(棲韓 : 17대)이 즉위했다. 서한이 죽으니 정축년(B.C.1664)에 아들 물가(勿駕 : 18대)가 즉위했고 그가 죽은 뒤 신사년(B.C.1660)에 아들 막진(莫眞 : 19대)이 즉위했다. 막진이 죽으니 정묘년(B.C.1614)에 아들 진단(震丹 : 20대)이 즉위했다. 이해 은나라 왕 태무(太戊)가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그가 죽으니 계유년(B.C.1608)에 아들 감정(甘丁 : 21대)이 즉위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 소밀(蘇密 : 22대)이 즉위하였다. 계사년(B.C.1588)에 은나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가서 북박(北亳)을 치게 하니 그 왕 하단갑(何亶甲)이 이에 사죄하였다. 소밀이 죽자 아들 사두막(沙豆莫 : 23대)이 즉위하였다. 사두막이 죽으니 계부 갑비(甲飛 : 24대)가 즉위했다. 갑비가 죽고 경신년(B.C.1441)에 아들 오립루(烏立婁 : 25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아들 서시(徐市 : 26대)가 즉위했다. 그도 죽으니 무신년(B.C.1393)에 아들 안시(安市 : 27대)가 즉위하였다. 그가 죽으니 아들 해모라(奚牟羅 : 28대)가 즉위(B.C.1352)했다. 해모라가 죽고 단군 소태(素胎) 5년(B.C.1333) 우사(雨師)의 소정(小丁 : 29대)을 번한에 임명하였다.
대저 고등(高登)이 항상 그 지모를 탄주하고 무리에 뛰어났기 때문에 제(帝)에게 권하여 임명하도록 한 것이라. 때에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막 병사를 일으켜 치려하매 고등이 이를 듣고 상장(上將) 서여(西余)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색도(索度)에 이르매 병사를 보내 불 지르고 약탈한 뒤 돌아왔다.
서여는 북박北亳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병사들을 탕지산에 주둔케 하더니 자객을 보내 소정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들을 아울러 싣고 돌아왔다.
상기 기록에서 위치 관련하여 다음의 3가지 위치가 관련된다.
(1) 낙랑의 위치
신묘년(B.C.1770)에 아들 소전(少佺 : 15대)이 즉위했다. 갑오년(B.C.1767)에 장군 치운(蚩雲)을 파견하여 탕(湯)을 도와 걸(桀)을 치게 하였다. 을미년(B.C.1766)에 묵태(墨胎)를 파견하여 탕임금의 즉위를 축하했다.
위 기록은 단군조선의 홀달단군이 후에 상나라를 세운 탕(湯)을 도와 하나라 걸(桀)왕을 공격할 때, 낙랑과 더불어 번한의 장군 치운이 합류했다고 하는 기록으로 판단된다. 번한이 요수에 가까이 있으므로, 단군조선의 병력이 하나라로 가는 길에 낙랑과 번한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낙랑의 위치 관련 하여서이다. 아래 지도에서 환단고기 진서론을 강의하는 분이 보인 낙랑의 위치를 볼 수 있다. 아래 단군세기의 내용에는 견이의 참여도 언급된다. 낙랑의 위치를 요하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낙랑조선으로 보인다. 기원전 1767년 일이니, 낙랑군, 최씨의 낙랑국과는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사서에서는 낙랑 지역을 대방과 함께 요동지역에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낙랑은 낙랑조선이 있었다고 하는데, 관련 기록은 거의 없다. 중국사서에서도 잠깐 비치는 것을 보면 일부러 숨기는 역사인지도 모른다. 필자는 낙랑조선이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하지 않았나 하는 글을 썼다. 그러나 이는 관련 자료가 거의 없어 참고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단지 상기 낙랑국의 언급은 후일 최씨 낙랑국이 낙랑군과 별도로 존재한 것을 보면, 이에 준하여 위치를 비정할 수 밖에 없다.
이미 지난 글에서 언급한 최승의 낙랑국이 곡식 300섬을 싣고 북부여 단군 고해사에게 해성에 바쳤다는 아래 내용을 감안할 때, 한반도의 낙랑국 위치 비정은 맞지 않는다. 그전에 기원전 195년에는 최승은 바다를 건너 마한의 왕검성에 이르렀다 했다. 이러한 사실은 아래 지도에서는 전혀 맞지 않는다.
"기원전 169년 낙랑왕 최승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북부여 3세 단군 고해사에게)
그보다 먼저, 기원전 195년 최승은 진귀한 보물을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수도 왕검성에 이르니..."
(자료 : 북부여기 상, 3세 단군 고해사)
아래 지도에서는 최승의 낙랑국과 마한의 왕검성이 중첩되고 있다. 얼마나 위치 비정에 무성의하고 논리가 없는지를 보여주는 지도이다.
필자는 고구려 대무신왕 시기 흡수된 낙랑국이 발칸 반도에서 흑해사이에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북부여의 해성은 발트해에 접한 성이 아닌가 한다. 해성에 300섬 곡식을 바친 것은 강을 이용하거나 육로를 거쳤을 가능성이 있다. 마한의 왕검성은 이태리반도 북부에 있으므로 지중해를 거쳐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이 같은 위치 비정에 의하면, 북유럽에 있던 진조선의 홀달단군이 발칸반도위의 낙랑국의 군대와 번한의 군대, 상나라의 탕의 군대, 그리고 견이의 군대와 함께 하나라 걸왕을 친 것으로 판단된다. 견이는 개와 함께 전투에 참여하는 키메리언으로 판단되며, 로마제국도 개와 전투하며 배사법의 활쏘기를 했다 한다. 따라서 흉노 관련한 동이족으로 보이는데, 위치 비정은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낙랑, 번한, 견이, 상의 탕왕 등을 동원한 것을 보면 당시 하나라가 상당한 영역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필자는 하나라가 프랑스지역 뿐 아니라, 그리스, 이집트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지역을 포함하지 않았나 하는 글을 썼다.
(2) 색도(索度) 의 위치
대저 고등(高登)이 항상 그 지모를 탄주하고 무리에 뛰어났기 때문에 제(帝)에게 권하여 임명하도록 한 것이라. 때에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막 병사를 일으켜 치려하매 고등이 이를 듣고 상장(上將) 서여(西余)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색도(索度)에 이르매 병사를 보내 불 지르고 약탈한 뒤 돌아왔다.
이글에서 색도는 색족의 도시를 의미하지 않나 한다. 스키타이와 관련된 색족인데, 귀방이 있던 곳이 아닌가 한다. 도는 고을도 한자가 아닐까 한다. 이 내용은 은나라왕 무정이 그당시 흉노인 귀방을 공격하는 내용인데, 단군조선의 고등과 서여가 간여하여 귀방을 물리쳤다 하는 내용이다. 이후 근처에 있던 일군국과 양운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는 내용이 뒤따른다. (아래 자료 참조)
12환국을 모두 동북아시아에 추정하는 재야 사학계의 위치 비정에 의하면, 색도가 동북아시아 진조선이나 번조선에 위치하는 것이 되어 모순된 결과를 보여 준다.
(자료 : 환단고기 진서론 3, 유튜브자료 screenshot)
지난 글에도 언급했지만, 일군국은 저족, 양운국은 강족이라 중국 사서에는 언급하였고, 이런 은나라 무정의 귀방 언급이 서강전에 있는 것을 보면, 서쪽의 강족지역에 있는 귀방을 의미하지 않나 한다. 필자는 이곳을 이베리아 반도 서쪽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일군국은 이베리아반도 남서쪽에 있는 것으로, 양운국은 이베리아반도 동남쪽에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자료: 환단고기 진서론 3, 유튜브 자료 screenshot)
상기 단군세기 내용에서, 은나라왕 무정이 귀방을 물리치고 다시 대군을 이끌고 삭도 영지 등의 나라를 침공하다가, 소태단군의 군사에 대패하여 화친을 청하고 조공을 바쳤다 했다. 단군조선의 욕살 고등과 서우여의 활약에 의한 것이다. 이들의 활동은 이후 색불루 단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단군이 되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하는 삭도가 위의 기록의 색도가 아닌가 한다. 삭족, 색족 모두 같은 것이다. 그런데, 영지는 요수에 쌓은 12개성 중의 하나였다. 즉 은나라왕 무정이 서남쪽의 귀방을 공격하다 단군조선의 귀방 공격과 겹치는 상황에서 다시 병력을 동쪽으로 돌려 요수근처에서 단군조선과 싸우다 대패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후 27대 은나라왕이 되는 무을시기에 단군조선의 병력이 은나라를 초토화 시켜 은나라 깊숙이 진출하여 회대지방을 차지한다.
(자료: 환단고기 진서론 3, 유튜브 자료, screenshots)
(3) 북박 (北亳) 의 위치
그가 죽으니 계유년(B.C.1608)에 아들 감정(甘丁 : 21대)이 즉위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 소밀(蘇密 : 22대)이 즉위하였다. 계사년(B.C.1588)에 은나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가서 북박(北亳)을 치게 하니 그 왕 하단갑(何亶甲)이 이에 사죄하였다.......
서여는 북박北亳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병사들을 탕지산에 주둔케 하더니 자객을 보내 소정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들을 아울러 싣고 돌아왔다.
북박은 은나라 초기 수도가 있던 박의 북쪽이라 해석된다. 어느 곳인지 추정하기 힘드나, 서여가 북박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병사들을 탕지산에 주둔케 하였다니, 요수의 서쪽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추정에 의하면 은나라가 지금 중공의 땅에 있다는 추정이 맞지 않는다. 요하 근처에 초기 수도가 있다는 추정은 매우 불합리한 추정이 되기 때문이다.
은나라 왕 하단갑이 조공을 바치지 않아 북박을 공격했다 하니 당시 단군조선의 위세가 매우 큼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자료 (위키백과 자료)에 의한 12대 하단갑 은왕은 BC 1385-1377년 기간인데, 상기 환단고기 자료에서는 BC 1588년을 언급하니 약 200년의 시차가 있다.
<番韓世家 下 번한세가 하>
9) 색불루단군이 국가 제도를 개편하고
혁명가 서우여를 번한 왕에 임명함
檀君索弗婁 初幷三韓 大改國制 殷主武丁 遣使來約貢
先是 廢徐于餘爲庶人 徐于餘 潛歸坐原 與獵戶數千 謀起兵
蓋天齡 聞卽往伐 敗沒于陣 帝親率三軍 往討之
乃先遣勸降 約封爲裨王 再諭以聽 至是 命徐于餘爲番韓
<해설>
단군 색불루(索弗婁)는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은나라 왕 무정(武丁)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약속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우여(徐于餘)를 폐하여 서인을 삼았더니 서우여는 몰래 좌원(坐原-요하의 서쪽, 고구려 명림답부 좌원대첩 장소)에 돌아와 사냥꾼 무리 수 천인과 더불어 짜고 군대를 일으키니 개천령(蓋天齡-색불루단군의 수하장군)이 듣고 즉각 토벌하려 했으나 패하여 싸움터에서 죽고 말았다. 단제(색불루단군)께서는 몸소 삼군(12,000명)을 이끌고 토벌하러 갔다. 이에 먼저 사람을 보내 서우여를 비왕(椑王-번조선 부단군)에 봉할 것을 약속하시며 다시 설득하니 (항복을 권유하니) 서우여가 이에 따르므로 단제께서는 서우여(徐于餘 : 30대)를 번한으로 삼으셨다.
여기서는 좌원이란 지명이 나온다. 고구려가 후한과 싸워 이긴 좌원 대첩과 같은 한자의 지명이니 동일한 장소로 여겨진다. 하여 고구려의 좌원대첩 내용을 살펴 보자.
"172년(신대왕 8)과 184년(고국천왕 6)에 국내성(國內城) 인근의 좌원(坐原)에서 고구려 군대가 중국 후한(後漢)의 군대에 승리한 전투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의 신대왕·고국천왕 조와 ‘열전(列傳)’의 명림답부(明臨荅夫) 조에 관련된 기록이 전해진다.
제1차 좌원대첩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165년(차대왕 20) 연나(椽那)의 조의(皂衣) 명림답부(明臨荅夫)는 폭정을 해서 백성들의 원성을 받고 있던 차대왕(次大王)을 살해했다. 그리고 좌보(左輔) 어지류(菸支留) 등과 함께 차대왕의 동생인 백고(佰固)를 신대왕(新大王)으로 옹립했다. 신대왕은 166년(신대왕 2) 명림답부를 국상(國相)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군사권을 맡겼다.
168년 신대왕은 후한의 현도군(玄菟郡) 태수인 경림(耿臨)이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오자 복속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화의를 청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대가(大加)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이 이끄는 군대를 보내 현도 태수 공손도(公孫度)가 이끄는 후한의 군대와 함께 부산(富山)을 토벌하기도 했다.
하지만 후한은 172년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다시 침공해왔다. 그러자 신대왕은 명림답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성 밖의 식량과 사람들을 모두 비우고 국내성을 굳게 지키며 농성전을 벌였다. 후한의 군대는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식량이 떨어지자 퇴각하였다. 그러자 명림답부는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후한의 군대를 추격해 좌원에서 적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신대왕은 명림답부의 공을 치하하며 좌원과 질산(質山)을 그에게 식읍으로 주었다.
한편, 《후한서》와 《삼국지》에는 현도군 태수인 경림이 고구려를 침공해 신대왕의 항복을 받아낸 것이 168년이 아니라,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169년) 일어난 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제1차 좌원대첩에 대한 내용은 전하고 있지 않으며, 《삼국지》에는 오히려 후한 영제 때인 희평(熹平, 172〜178년) 연간에 고구려왕 백고(伯固)가 현도군에 복속을 요청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2차 좌원대첩
179년 신대왕이 죽고, 민심을 잃은 그의 맏아들 발기(拔奇)를 대신해 둘째아들인 고국천왕(故國川王)이 새로운 임금으로 즉위했다. 184년(고국천왕 6) 후한의 요동군(遼東郡) 태수가 공격해오자 고국천왕은 동생인 계수(罽須)를 보내 막게 했으나 패했다. 그러자 고국천왕은 직접 정예 기병을 이끌고 출병하여 좌원에서 후한의 군대를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결과와 의의
고구려는 건국한 뒤 영역을 넓히는 과정에서 한나라가 그 지역에 설치한 한군현(漢郡縣) 세력과 끊임없이 대립해왔다. 그리고 172년과 184년에 좌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두 차례에 걸쳐 잇달아 크게 승리하면서 한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넓힐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헌제(獻帝)가 즉위한 뒤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면서 한나라는 실질적으로 해체된 것이나 마찬가지의 상태에 이르렀다. 요동 지역도 공손도 이후 공손씨(公孫氏)의 독립국가처럼 되었고, 사회 혼란을 피해 한나라에서 고구려로 투항해오는 사람들도 늘었다. 이러한 후한 말기의 사회적 변동은 고구려가 세력을 넓히는 데도 큰 영향을 끼쳤다."
(자료 : 좌원대첩, 두산백과,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
상기 좌원대첩 내용을 보면, 후한의 현도군태수 또는 요동군태수가 고구려를 공격해 왔으며, 좌원은 국내성 부근이라 한다. 즉 좌원은 요동의 땅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요수의 동쪽이다. 해설에서는 요하의 서쪽이라 했으나 요하의 동쪽으로 해설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후한이 지금의 중공지역에 있다면, 굳이 북쪽의 요하에까지 와서 전쟁을 할까 의문스럽다. 그러나 필자가 추정하는 프랑스지역에서는 다르다. 요수인 론강이 지역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가 되기 때문이다.
색불루 단군의 본거지 아사달은 북유럽으로 판단된다. 비서갑지역과도 관련되어 있다. 필자는 환단고기의 비서갑의 비자가 이상하다 했는데, 다른 자료에서는 아닐 비자를 사용한다. (아래 자료 참조) 역시 뜻상으로 맞지 않는다. 필자는 비서갑의 웅녀군이 최초로 왕검이 되었다 하니 비서갑의 비는 왕비비가 아닌가 한다. 환웅의 배우자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자료 : 삼국유사에서 인용된 고기, 유튜브 자료 screenshot)
상기 자료는 부루가 동부여왕이 되는 것으로 혼란이 있는 자료로 보인다. 그러나 비서갑과 하백을 연결시킨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같은 지역에 비서갑과 하백지역이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비서갑 지역이 동북 아시아에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필자가 추정하는 노르웨이 지역의 비서갑 지역에서 하백은 가까이 있는가? 그렇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하백은 맏 백(伯)자 (사람인 변, 흰백자가 합쳐진 것, 백인이 으뜸? 인종차별적 한자인데, 동이족이 만든 것임), 물하(河)자이다. 즉 으뜸되는 강이라는 뜻이다. 이 지역 출신의 사람이름을 지역이름으로 사용한 것 같다. 스웨덴 남쪽에 남북으로 흐르는 Klara 강이 있고 호수에서 다시 남으로 이어지는 Gota강(고트족의 강)이 있다. 이 강은 과거 하나의 강으로 불렸다 한다. 그런데 이 강이 북유럽에서 가장 긴 강이다. 즉 으뜸의 강이라는 것이다. 또한 Klara 강은 clear river, white river의 뜻이라 한다. 물이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백의 백자를 흰백의 강이라는 글자를 쓰면 white river란 뜻이 된다. 실제 모두루 묘지에는 하백의 백자를 물수변에 흰백자를 썼다. (아래 자료 참조)
河伯(하백) : 시조 주몽(朱蒙 : 동명왕)의 외할아버지이다.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에는 ‘하박(河泊)’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강의 동쪽에는 홀본으로 보이는 Horby시가 있고 홀본천으로 해석되는 Horbyan river가 있다. 또한 송양의 강동현에는 단군릉이 있다 하는데, 이지역에 청동기 시대 무덤들이 있다 한다. 그리고 북유럽 지역은 소나무와 박달나무로 덮혀 있다. 이 지역은 바람이 많이 불어 강에도 바람이 많이 분다 한다. 즉 하백의 땅, 홀본천, 홀본, 송양의 강동현, 그리고 풍류강이라는 비류강이 있을 것이다. 송양은 비류국이 바다 한쪽에 있다 했는데, 북해 한 쪽, 발트해에서 가까이 있다. 그리고 필자는 이곳 위에 있는 Dalara강이 홍노의 고향인 약수라 추정했다. 이에 대해서는 나누어 글을 쓰고자 하니, 이 정도로 마치고자 한다.
10) 고조선의 팔조八條 금禁법
四年己亥 眞朝鮮 以天王勅文 傳曰爾三韓 上奉天神 接化群生
自是敎民 以禮義田蠶織作弓矢字書
爲民設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
男沒爲其家奴 女爲婢 毁蘇塗者禁錮 失禮義者服軍
不勤勞者徵公 作邪淫者笞刑 行詐欺者訓放
欲自贖者 雖免爲公民 俗猶羞之 嫁娶無所璥
是以 其民 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 貞信不淫 闢其田野都邑 飮食以 阡豆
有仁讓之化 辛丑 殷主武丁 因番韓上書天王 獻方物
丙申 徐于餘 薨 丁酉 阿洛立 薨 丁丑 率歸立 薨 甲子 任那立
辛未 以天王詔 築天壇于東郊 祭三神 衆環舞擊鼓以唱 曰
精誠乙奴 天壇築爲古 三神主其祝壽爲世
皇運乙 祝壽爲未於 萬萬歲魯多 萬民乙 睹羅保美御 豊年乙 叱居越爲度多
(이두문 글)
任那薨 丙申 弟魯丹立 北漠入寇 遣路日邵 討平之 薨 己酉 子馬密立 薨
丁卯 子牟弗立 乙亥 置監星 牟弗薨 丁亥 子乙那立 甲午 周主瑕 遣使朝貢
<해설>
4년 기해(B.C.1282)에 진조선(색불루단군)은 천왕의 칙문勅文를 전하였는데
가로되「그대들 삼한은 천신을 위로 받들고 백성들도 이에 따르도록 교화하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백성들에게 예의․ 밭갈기, 누에치기․베짜기․활쏘기․글 등을 가르쳤으며, 백성들을 위하여 금팔법(禁八法-팔조금법)을 만들었으니, 남을 죽이면 같이 죽여서 다스리고 (1.상살상살相殺償殺-사람의목숨을 귀히 여김), 남을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케 하고 (2.상상곡상相傷穀償-사유재산이 있었음), 남의 것을 도둑질盜하면 남자는 신분을 무시해 버리고는 그 집의 노비가 되게 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하며 (3.상도자相盜者: 男->노奴 女->비婢-노예제도있었음), 소도를 훼손시키는 자는 가두어 두며 (4.금고禁錮),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하게 하고 (5.복무服軍), 근면하게 노동하지 않는 자는 부역을 시키며 (6.徵公), 음란한 행동을 하는 자는 태형 (7.笞刑)으로 다스리고, 사기 치는 자는 스스로 속죄하게 하고 훈계 방면하나 공표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어, 백성들은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겨서 결혼도 할 수 없었던 듯하다.(8.사기치는 자는 訓放하나 결혼도 못하고 공동체에서 살아가기 힘들었을 듯하다.) 이로써 백성들은 끝내 도둑질 따위는 하지 않았으니 문을 닫거나 잠그는 일도 없었고 부녀자들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밭이나 들, 도읍지를 막론하고 음식을 바쳐 제사 올리니 어질고 겸양하는 풍속이 가득했다.
신축년에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번한(당시 서우여부단군)을 거쳐 천왕(당시 색불루단군)께 글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병신년(B.C.1225)에 서우여가 죽고 정유년(B.C.1224)에 아락(阿洛 : 31대)이 즉위하더니, 그도 죽었다. 정축년(B.C.1184)에 솔귀(率歸 : 32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갑자년(B.C.1137)에 임나(任那 : 33대)가 즉위하였다.
신미년(B.C.1130)에 천왕의 조서로써 천단(天壇)을 동교(東郊)에 설치하고 삼신께 제사 지냈다. 무리들이 둥글게 모여 북치며 노래하기를 다음과 같았다.
정성으로 천단(天壇)을 쌓고 삼신을 축원(축수)하세.
황운(皇運-단군조선의 운수)을 축수함이여
만만세로다.
만인을 돌아봄이여 풍년을 즐거워하도다. (이두문 한자)
임나가 죽으니 병신년(B.C.1105)에 동생 노단(魯丹 : 34대)이 즉위하였다. 북막(北莫)이 쳐들어와 노략질하니 노일소(路日邵)를 보내 토벌하고 이를 평정케 하였다. 그가 죽으니(?) 기유년(B.C.1092)에 아들 마밀(馬密 : 35대)이 즉위했다. 마밀이 죽으니 정묘년(B.C.1074)에 아들 모불(牟弗 : 36대)이 즉위했다. 을해년(B.C.1066)에 감성(監星-별을 관측)을 두었다. 모불이 죽으니 정해년(B.C.1054)에 아들 을나(乙那 : 37대)가 즉위하였다. 갑오년(B.C.1047)에 주나라 왕 하(瑕)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위 기록에서는 다음의 3가지가 눈에 띈다.
(1) 신축년에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번한(당시 서우여부단군)을 거쳐 천왕(당시 색불루단군)께 글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병신년(B.C.1225)에 서우여가 죽고 정유년(B.C.1224)에 아락(阿洛 : 31대)이 즉위하더니, 그도 죽었다. 정축년(B.C.1184)에 솔귀(率歸 : 32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갑자년(B.C.1137)에 임나(任那 : 33대)가 즉위하였다.
은나라왕 무정이 번한을 거쳐 색불루 단군에게 글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는 것은 은나라가 단군조선의 공격에 항복했다는 의미이다. 앞에서 고등과 서우여가 은나라와 전쟁을 해서 대승하였다는 기록을 보았다.
그 다음에 임나(任那)라는 사람이 번한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임나의 한자는 임나일본부의 임나와 같은 한자이며,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왜의 임나와 같은 한자이다. 재야사학계는 임나지역을 어디로 추정하는지 궁금하다. 필자는 임나지역을 이태리반도의 남단 시실리섬에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지난 마한세가의 글에서 진한(진국)의 남해안 살수에서 배를 건조했다는 기록을 보았는데, 그때 필자는 시실리섬의 Salsu river를 언급했다. 이번에도 같은 시실리섬지역이 대두되는데, 이번에는 번한세가의 내용에서이다. 번한은 요수의 동쪽에 있는 것으로 판단하는데, 임나가 언급되는 것은 좀 의외이다. 출신지역이라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그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한세가에서 본 바와 같이 아라사단군, 두막해단군, 독로단군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나 번한왕이 등장하고 이두문 한자의 노래가 등장하는 것도 좀 이상하다. 이두문 향가가 일본에서 있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2) 임나가 죽으니 병신년(B.C.1105)에 동생 노단(魯丹 : 34대)이 즉위하였다. 북막(北莫)이 쳐들어와 노략질하니 노일소(路日邵)를 보내 토벌하고 이를 평정케 하였다.
북막이 쳐들어 왔다는데 막조선의 북쪽이라는 것으로 해석하면 같은 삼한내에서 전쟁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천왕차원에서 개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니, 다른 곳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색불루 단군이 반란을 일으킬 때, 마한이 적극적으로 막았으므로, 그후 막조선과 사이가 나빠져 번한과 다툴 수도 있다고 본다.
(3) 갑오년(B.C.1047)에 주나라 왕 하(瑕)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주나라도 사신을 보내 조공했는데, 천왕에게 했는지 번한에 했는지 언급이 없다. 여하튼 은나라, 주나라 모두 단군조선에 조공했다는 것이다.
11) 소련과 대련 형제를 군자로 섬긴 번한 : 삼년상 풍속의 기원
乙那薨 丁卯 子麻維讀立 薨 己巳 弟登那立
李克會 啓請建少連大連之廟 定行三年喪 從之 薨 戊戌 子奚壽立
壬寅 遣子勿韓 往九月山 助祭三聖廟 廟在常春朱家城子也
奚壽薨 己未 子勿韓立 薨 己卯 子奧門婁立 薨 丁卯 子婁沙立
戊寅 入覲天朝 與太子登面 少子登里 閑居別宮 乃獻歌太子兄弟 曰
兄隱伴多是 弟乙 愛爲古 弟隱味當希 兄乙 恭敬爲乙支尼羅
恒常毫毛之事魯西 骨肉之情乙 傷跛勿爲午
馬度五希閭 同槽奚西 食爲古 雁度 亦一行乙 作爲那尼
內室穢西非綠 歡樂爲那 細言乙良 愼聽勿爲午笑
<해설>
을나가 죽으니 정묘년(B.C.1014)에 아들 마휴(麻庥 : 38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기사년(B.C.1012)에 동생 등나(登那 : 39대)가 즉위했다.
이극회(李克會)가 말씀 올려서 소련․대련의 묘를 세워 삼년상의 제도를 정할 것을 청하니, 이에 따랐다. (삼년상의 기원)
등나가 죽으니 무술년(B.C.983)에 아들 해수(奚壽)가 즉위하였다.
임인년(B.C.979)에 아들 물한(勿韓)을 파견하여 구월산에 가서 삼성묘(三聖墓) 제사를 돕게 하였으니 묘는 상춘(常春)에 있으며 주가(朱家) 성자(城子)(주몽의 성곽자리?)이다.
해수가 죽으니 기묘년(B.C.942)에 아들 오문루(奧門婁 : 41대)가 즉위하였고, 그도 또 죽었다. 정묘년(B.C.894) 아들 누사(婁斯 : 42대)가 즉위하더니 무인년(B.C.883)에 천자를 찾아뵙고는, 태자 등올(登屼)과 작은아들인 등리(登里)가 별궁에서 한적하게 기거하고 있음에, 태자 형제들에게 노래(이두법 노래)를 바쳤다.
兄隱伴多是 弟乙愛爲古(형은반다시제을애하고)
형은 반드시 동생을 사랑하고
弟隱味當希 兄乙 恭敬爲乙支尼羅(제는맛당희형을공경하을지니라)
동생은 마땅히 형를 공경할지라.
恒常毫毛之事魯西 骨肉之情乙 傷跛勿爲午(항상호모지사로서 골육지정을상피물하소)
항상 터럭 같은 작은 일로 골육의 정을 상하지 마오.
馬度五希閭 同槽奚西食爲古 雁度亦一行乙作爲那尼(말도오희려동조해서식하고 안도역일행을작하나니)
말(馬)도 오히려 같은 구유에서 먹고 기러기도 역시 한 줄을 이루나니,
內室穢西非綠 歡樂爲那 細言乙良 愼聽勿爲午笑(내실예서비록환락하나 세언을량신청물하소서)
내실에서 비록 환락하나 자잘한 말일랑 삼가 듣지 마소서.
임인년(B.C.979)에 아들 물한(勿韓)을 파견하여 구월산에 가서 삼성묘(三聖墓) 제사를 돕게 하였으니 묘는 상춘(常春)에 있으며 주가(朱家) 성자(城子)(주몽의 성곽자리?)이다.
마한세가에서도 16)번에 상춘의 구월산으로 언급된 내용이다. 그때 BC 2109년에 한(韓)은 명을 받아 구월산에서 제사를 지냈었다. BC 979년에도 번한왕 아들 물한을 파견하여 구월산에 가서 삼성묘 제사를 지냈으니, 구월산이 아사달에 있다는 기록이 맞을 수 있다고 본다. 필자는 상춘을 사철나무가 많은 지역, 구월산은 가을의 단풍나무가 많은 산을 의미하지 않나 추정했는데, 그럴 가능성이 더 농후해 보인다. 필자가 아사달이 있는 지역으로 추정하는 북유럽에는 단풍나무, 소나무가 많은 지역이다. 이 지역에 고주몽의 성곽이 있을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송양의 비류국이 있는 지역이고, 홀본, 홀본천이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12) 한수인 왕문 (漢水人 王文)
삼한 전역에서 시행된 왕문의 사독법
사독법의 창시자 왕문
婁沙薨 乙未 子伊伐立
丙申 漢水人王文 作吏讀法以獻 天王嘉之 命三韓 如勅施行
<해설>
누사가 죽으니 을미년(B.C.866)에 아들 이벌(伊伐 : 43대)이 즉위하였다. 병신년(B.C.865)에 한수(漢水) 사람 왕문(王文)이 이두법을 지어 바치니 천왕께서 좋다고 하시며 삼한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하였다.
한수 사람 왕문이 이두법을 지어 바치니 삼한에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왜 한수사람이 천왕에게 이두법을 바쳤을까? 삼한의 영역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중공의 장강의 지류 한수를 고려하면, 재야사학계의 추정 지도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필자가 추정하는 한수는 스페인 에브로강의 지류인 아라곤강이다. 이 지역은 마한의 지역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삼한의 한 지역이 된다.
13) 주周 격퇴擊退와 흉노匈奴의 조공
己未 遣上將高力合 與淮軍敗周 伊伐薨 辛酉 子阿勒立
丙寅 周二公 遣使獻方物 阿勒薨 己丑 子麻休立 一云麻沐 薨 丙辰 子多斗立
薨 己丑 子奈伊立 薨 己未 子次音立 薨 己巳 子不理立 薨 乙巳 子餘乙立
薨 甲戌 奄婁立 戊寅 匈奴 遣使番韓 求見天王 稱臣貢物而去
奄婁薨 子甘尉立 薨 戊申 子述理立 薨 戊午 子阿甲立
庚午 天王 遣使高維先 頒桓雄蚩尤檀君王儉三祖之像 以奉官家
<해설>
기미년(B.C.842)에 상장(上將) 고력(高力)을 파견, 회(淮)군과 합쳐 함께 주나라(당시 주나라 10대 여왕)를 무찔렀다. (敗周-폭군 여왕은 산서성으로 도망감) 이벌이 죽으니 신유년(B.C.840)에 아들 아륵(阿勒 : 44대)이 즉위했다. 병인년(B.C.835) 주나라의 이공(二公-주공과 소공 두 재상이 주나라를 다스림)이 사신을 보내와 특산물을 바쳤다.
아륵이 죽으니 을축년(B.C.836)에 아들 마휴(麻休 혹은 麻沐 : 45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은 뒤 병진년(B.C.785)에 아들 다두(多斗 : 46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기축년(B.C.752)에 아들 나이(奈伊 : 47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기미년(B.C.722)에 아들 차음(次音 : 48대)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을사년(B.C.676)에 아들 불리(不理 : 49대)가 즉위했고, 그도 죽고 을사년(B.C.676?)에는 아들 여을(餘乙 : 50대)이 즉위하였다. 그가 죽으니 갑술년(B.C.647)에 엄루(奄婁 : 51대)가 즉위했다.
무인년(B.C.643), 흉노가 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왕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로 봉함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엄루가 죽으니 아들 감위(甘尉 : 52대)가 즉위했고, 그가 죽으니 무신년(B.C.613)에 아들 술리(述理 : 53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무오년(B.C.603)에 아들 아갑(阿甲 : 54대)이 즉위하였다.
경오년(B.C.591)에 천왕은 사신 고유(高維)를 파견하시어 먼저 한웅․치우․단군왕검의 삼조의 상(像)을 나누어주시더니 이를 관가에 모시게 하였다.
여기서는 주나라 10대 려왕과 싸워 무찔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회수지역의 병력과 함께 싸웠다 했다. 앞에서 은나라 무을왕 시기에 단군조선이 회대지역을 점하였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해설자는 주나라 려왕이 패해 산서로 도망갔다 했다. 그러면 산동지역에서 전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회수, 사수, 태산이 있는 이 지역은 프랑스의 동부, Massif Central 동쪽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요서지역이다.
14) 노자는 순수한 동이족(풍이족) 혈통
노자 사상은 내몽고에서 아유타까지 전파됨
阿甲薨 癸酉 固台立 薨 丁亥 子蘇台爾立 薨 乙巳 子馬乾立
薨 丙辰 天韓立 薨 丙寅 子老勿立 薨 辛巳 子道乙立
<해설>
아갑이 죽고 계유년(B.C.618)에 고태(高台 : 55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아들 소태이(蘇台爾 : 56대)가 즉위(B.C.574)했다. 그가 죽으니 을사년(B.C.556)에 아들 마건(馬乾 : 57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고 병진년(B.C.545)에 천한(天韓 : 58대)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병인년(B.C.535)에 아들 노물(老勿 : 59대)이 즉위하였고, 그도 죽으니 신사년(B.C.520)에 아들 도을(道乙 : 60대)이 즉위했다.
癸未 魯人孔丘 適周 問禮於老子李耳 耳父姓韓名乾 其先風人
後 西出關 由內蒙古而轉至阿踰豹 以化其民 道乙薨 丙申 子述休立
薨 庚午 子沙良立 薨 戊子 子地韓立 薨 癸卯 子人韓立 薨 辛巳 子西蔚立
薨 丙午 子哥索立 薨 庚辰 子解仁立 一名山韓 是歲 爲刺客所害
<해설>
계미년(B.C.518)에 노(魯)나라 사람 공구(孔丘)는 주나라에 가서 노자(老子) 이이(李耳)에게 예를 물었다. 이(耳)의 아비의 성은 한(韓)이요, 이름은 건(乾)이니 그의 선조는 풍(風-복희씨 후손)의 사람이라, (후세에 제자 윤희 라는 사람이 노자의 도덕경을 씀) 뒤에 서쪽으로 관문을 지나 내몽고로부터 이리저리 돌아 아유타(阿踰佗, 아유표(豹)?)에 이르러 그 백성을 개화시켰다.
도을(道乙)이 죽고 병신년(B.C.505)에 아들 술휴(述休 : 61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자 경오년(B.C.471)에 아들 사양(沙良 : 62대)이 즉위하였고, 사양이 죽고 무자년(B.C.453)에 지한(地韓 : 63대)이 즉위하였고, 지한이 죽고 계묘년(B.C.438)에 아들 인한(人韓 : 64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신사년(B.C.400)에 아들 서울(西蔚 : 65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병오년(B.C.375)에 아들 가색(哥索 : 66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경진년(B.C.341)에 아들 해인(解仁 : 67대)이 즉위하였다. 일명 산한(山韓)이라 했는데 이해 자객의 시해를 당했다.
노자의 사상이 서쪽 관문을 지나 내몽고로부터 아유타까지 이르러 백성을 개화시켰다는 표현이 주목된다. 내몽고란 지명은 너무 근대적 표현이 아닌가 싶다. 필자는 몽고의 원류인 몽골실위가 핀란드지역이 아닌가 한다. 황두실위는 스웨덴지역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핀란드지역을 몽고지역으로 볼 수 있는데, 내몽고, 외몽고의 구분은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유타로 해석한 해설자의 뜻을 따른다면, 필자는 아유타지역이 중동의 지중해변지역이라 추정한다. 흔히 인도라 추정하지만, 허황옥은 인도에서 한반도로 오는 해로를 탈 가능성은 매우 적다. 필자는 허황옥이 중동 지중해변 지역(Levant지역)에서 북아프카 연안을 거쳐 튀니지의 김수로왕에게 온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 Aytap지역 이름이 이곳 이스라엘 북쪽에 있다.
지난 마한세가에서도 언급된 노자는 풍이사람이라 하며, 동이족의 일원이라 한다. 풍이는 바람풍 자를 쓴다.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에 사는 동이족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북유럽에 바람이 많이 불어 풍류강이라 비류강을 칭하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추론했다. 따라서 풍이도 북유럽에 거주하는 동이족을 말하지 않나 한다. 여기서 몽고의 원류인 핀란드지역은 가깝다. 따라서 내몽고지역이 북유럽 또는 북동유럽 어디를 말할 수 있다고 본다. 아유타는 필자가 추정하는 지중해변의 페니키아인의 고향인 Tyre의 북쪽에 있다.
15) 칠십세 번조선 왕이 된 수유須臾 사람 기대(箕代)
辛巳 子水韓立 壬午 燕倍道入寇 攻安寸忽 又入險瀆
須臾人箕代 以子弟五千人 來助戰事 於是 軍勢稍振
乃與眞番二韓之兵 夾擊大破之 又分遣偏師 將戰於機城之南 燕懼 遣使乃謝 以公子爲質
<해설>
신사년(B.C.340)에 아들 수한(水韓)이 즉위했다.
임오년(B.C.339)에 연나라가 사람의 도를 져버리고 쳐들어 와서 안촌골(安村忽-번한의 수도)을 공격했다. 또 험독(險瀆)에서도 노략질하니 수유(須臾)의 사람 箕代 (기대) (기후(箕詡 ?)가 자식과 제자들 5,000인을 데리고 와서 싸움을 도왔다.
이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더니 곧 진․번 2한(韓)의 병력과 함께 협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機城 (기성) (계성(薊城-연나라의 수도 ?)의 남쪽에서도 싸우려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며 사신을 보내 사과하매 대신과 자제를 인질로 삼았다.
번한왕에 수한(水韓)이 즉위한 것을 보면, 번한도 바다와 접하고 있는 느낌이다. 위에서 산한(山韓), 지한(地韓), 인한(人韓) 등의 이름이 있었는데, 물과 관련된 수한은 처음이다. 임나도 물과 접한 지역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번한도 바다와 접한 지역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연나라가 안촌골, 험독 등에 공격해와 노략질 하니, 수유사람 기대(기후?)가 사람을 데리고와 싸움을 도와서 한(韓)과 연을 맺은 것 같다. 수유지역은 하나라의 걸왕을 공격해서 빈, 기 지역을 차지하고 사람들을 옮겨 살게 한 지역이라 한다. (아래 자료 참조)
"BC 1767년 13대 홀달단군이 하나라 걸왕을 쳐서 하나라의 빈, 기 지역을 점령하고, 사람들을 옮겨 살게 했는데, 이 지역을 수유라 했다고 한다. 후에 태곡(太谷)에 거주하던 수유족의 일파가 은나라에 의해 箕라는 직호를 받아 그 우두머리를 기자라 하였다" (자료 : 요동의 주인, 호진님의 네이버블로그)
수한왕이 후손이 없자 기후가 대를 이어 왕이 되어 기자의 36대 후손부터 번조선의 왕으로 이어진다.
16) 번조선의 왕통 단절과 연의 강성
戊戌 水韓薨 無嗣 於是 箕代以命 代行軍令 燕遣使賀之
是歲 燕稱王 將來侵未果 箕代 亦承命正號 爲番朝鮮王 始居番汗城 以備不虞
<해설>
무술년(B.C.323년)에 수한(水韓)이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매 이에 箕代 (기대) (기후(箕詡 ? : 69대, 수유족)가 명을 받아 군령을 대행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하였다. 이 해 연나라도 왕이라 칭하고 장차 쳐들어오려고 하였으니 기대도 역시 명을 받아 번조선 왕이라 칭하고 처음에는 번한성(番汗城)에 머무르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요수 유역에 쌓은 한성(汗城)이 번한성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백제의 한성(漢城)을 한자를 바꾼 것이 아닌가 한다. 필자가 추정한 백제의 한성은 요서에 있었다. (프랑스의 Clermont-Ferrand) 따라서 약간의 거리가 있지만, 요수 주위라는 점이 그런 생각을 가지게 한다. 또한 요수 주위 12개성 중에 대방, 백제가 있었음을 상기하면 그럴 가능성이 많다.
17) 기비(箕丕)의 도움으로 해모수(북부여시조)가 대권을 잡아 고조선을 계승함
箕詡 薨 丙午 子箕煜立 薨 辛未 子箕釋立 是歲 命州郡 擧賢良 一時被選者 二百七十人 己卯
番韓親耕于郊 乙酉 燕遣使納貢 箕釋薨 庚戌 子箕潤立
薨 己巳 子箕丕立 初 箕丕 與宗室解慕漱 密有易璽之約 勤贊佐命
使解慕漱 能握大權者 惟箕丕其人也 箕丕薨 庚辰 子箕準立
丁未 爲流賊衛滿所誘敗 遂入海而不還
<해설>
기후箕詡(70대)가 죽자 아들 기욱(箕煜 : 71대)이 즉위했다. 기욱이 죽고 신미년(B.C.290)에 아들 기석(箕釋 : 72대)이 즉위했다. 이 해 각 주(州)와 군(郡)에 명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자를 추천하게 하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270인이었다. 기묘년(B.C.282) 번한이 교외에서 몸소 밭을 가꾸었다. 을유년(B.C.276) 연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기석이 죽고 경술년(B.C.251)에 아들 기윤(箕潤 : 73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기사년(B.C.232)에 아들 기비(箕丕 : 74대)가 즉위하였다.
처음 기비(箕丕)는 종실의 해모수(解慕漱-대단군의 후세)와 몰래 약속하여 제위를 찬탈하려 했으니 열심히 명령을 받들어 보좌했다. 해모수가 능히 대권을 쥐게 된 것은 생각컨대 기비(箕丕) 그 사람 때문일 것이다.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箕準 : B.C.221-같은해 진시황이 통일한 해)이 즉위했는데 정미년(B.C.194)에 떠돌이 도적 위만(衛滿)의 꼬임에 빠져 패하고 바다로 들어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기준이 바다로 들어간 후 돌아 오지 않았다는 것은 번한에서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기준이 바다를 건너 왜의 지역에 가서 한왕이 되었다는 역사를 고려하면, 번한의 남쪽 바다 건너 왜가 있었다는 추론이다. 번한의 왕 중에 임나, 수한 등이 있는 것을 고려하면, 바다와 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재야사학계가 추정하는 삼한의 위치에서 이러한 상황이 가능한가? 저윽이 의심스럽다. 번한이 요하주위에 있다 비정하면 발해로 나와 왜지역으로 갔다는 것인가? 불가하다. 그리고 번한이 중공의 동해안에 걸쳐 있다면, 위만이 왜 패수를 건너 오겠는가? 상황이 말이 안된다. 그리고 번한이 긴 동지나해에 접해 있다면, 바다 건너 마한(재야사학계 추정한 한반도 마한)으로 갈 수도 있다. 즉 동북아시아에 설정한 삼한, 삼조선의 위치 비정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추정한 번한, 즉 요수인 론강의 동쪽으로 위치 비정하면, 모든 것이 들어 맞는다. 이태리반도가 번한에 속하는지도 현재로서는 모르겠다. 그러나 지중해를 건너 북아프리카 지역에 가서 한왕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 고구려의 협보도 이베리아 해안을 따라 내려가 북아프리카 왜지역에 도착해 왕이 된 것으로 보인다.
III. 맺음말
이상으로 다소 길어진 분석을 마치고자 한다. 번한세가의 내용을 17개 항목으로 나누어 동북아시아에 추정한 삼조선의 위치 비정에 대해 그 가능성을 분석했다.
번한세가의 내용 중 특히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요수 주위에 쌓은 12개 성이름이다. 여기에 탕지, 험독, 대방, 백제, 갈산, 려성 등이 있었다. 즉 번한의 중심지는 이 근처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하나라, 은나라와 접한 곳으로 판단된다. 지금의 동북아시아에서 상정하는 북동쪽에 가서 중국과 접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정동쪽에 있는 동이족의 땅이 요수의 동쪽이라는 것이다. 중국사에서 동해라는 언급은 없다. 오히려 서해, 북해가 언급된다.
필자는 환단고기가 고대사의 많은 의문스러운 내용을 밝혀 주는 것으로 판단되어 그 내용을 알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그래서 더욱 내용을 파고 들며, 필자의 추정 위치와 재야사학계의 삼조선 위치 비정을 비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분석결과는 환단고기의 내용이 동북아시아에 있는 것이 아닌 유럽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12환국부터 삼조선까지 모두 그렇다. 오히려 필자는 더욱 유럽에서 그 증거를 찾았다. 앞으로는 노자의 사상이 전달된 북유럽의 내몽고와 아유타 지역에서 노자의 사상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환단고기 내용은 위서가 아니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환단고기의 삼조선, 12환국의 위치를 동북아시아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환단고기를 위서화 하는 행동으로 생각된다. 환단고기에 나와 있는 내용 그대로 해석하고, 관련된 위치비정을 선업견 없이 연구할 때, 빛나는 조상들의 역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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