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엽평론

철부지가 되자 (펌)

Chung Park 2014. 5. 10.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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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밥과 법]‘철부지’가 되자
조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프랑스 왕 루이 필리프 밑에서 총리를 지낸 프랑수아 기조는 말했다. “스물에 공화파가 아닌 것은 심장이 없다는 증거이고, 서른에 공화파인 것은 머리가 없다는 증거이다.” 이 말은 프랑스 총리를 역임한 조르주 클레망소 등 여러 사람에 의해 사회주의자를 야유하는 말로 변형된다. “스무 살에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심장이 없다는 증거이고, 서른 살에 사회주의자인 것은 머리가 없다는 증거다.” 이 말은 우리나라 보수인사들도 즐겨 사용하고 있다.

“나 도 스무 살 때는 그래봤다”는 경험론으로 사회 비판, 체제 비판에 대응하면서, 비판자들에 대하여 “아직도 철이 안 들었구나”라고 놀리는 것이다. 민주와 인권을 이야기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철부지 시절의 치기나 만용에 불과할까? 서른 이후부터는 정신 차리고 수구왕당파, 자본주의자, 체제옹호자가 되는 것이 철든 행태일까?

나이가 들어가면 마음도 변한다. 세상의 변화가 아득해 보이거나 변화가 싫어지고, 변화를 위한 외침과 행동도 과격하거나 미숙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최고라 생각하고 타인, 특히 젊은이의 고민과 상황을 외면하며 훈계를 일삼는다. 경청하고 소통하기보다는 비웃거나 호통치거나 잔소리한다. 젊은 시절 세상의 변화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열심히 뛰었더라도 추억담이나 영웅담으로만 간직하고, 역동하는 현실 앞에서는 “나도 다 해봤어. 그래봤자 세상은 안 변해. 세상은 쉬운 게 아냐”라며 주저앉는다. 다른 사람까지 주저앉힌다. 더 많은 돈이나 더 높은 자리를 위하여 생각을 180도 바꾸거나 이름을 팔기도 한다. 철이 든다는 것은 이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일까.

법과대학(원)에 입학하려 하는 학생들, 판사나 검사 혹은 변호사를 꿈꾸는 학생들을 면접장에서 만나보면 거의 다 “세상에 정의를 구현하고 싶다” “사익보다는 공익, 강자보다는 약자를 위해 일하겠다”고 한다. “나와 내 가족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공부하겠다”고 말하는 이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후에는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데 앞장서는 법률가들을 많이 보게 된다.

지난 대선에서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범한 헌정문란 범죄가 발생했을 때, 정파적 이익에 눈이 먼 일부 법률가 또는 법률가 출신 정치인들은 이를 외면·옹호·호도하는 추태를 보였다.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의 하루 5억원짜리 ‘황제노역’ 판결은 판사와 검사의 짬짜미였음이 드러났다. 검찰은 형사사법체제의 근간을 흔든 국정원 대공수사팀의 간첩 증거조작의 ‘몸통’은 건드리지도 않고 ‘깃털’만 뽑았다.

나이가 들면 식견과 경험이 늘게 된다. 사람과 세상의 모순성과 복잡성도 이해하게 된다. 스웨덴 복지국가의 설계자였던 에른스트 비그포르스의 말, “낙원이란 인류 역사의 시작에도 없었고 마지막에도 없을 것이다”의 의미를 온전히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민주주의와 정의의 원칙을 배신하게 하는 쪽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성숙함과 무관한 자발적 굴종이다. 철드는 것이 아니라 썩는 것이다.

다시 한번 두 법률가의 이름을 떠올린다.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 윤석열 전 수원지검 여주지청장이다. 경찰과 검찰 내부의 다수는 청와대의 눈치를 보고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며 알아서 기었지만, 이 두 사람은 헌정문란범죄를 은폐·축소하려는 세력과 끝까지 맞섰다. 그리고 인사상 큰 불이익을 받았다. 이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들인가.

유 신 말기 서울대에서 해직되었던 한완상 선생(전 통일부총리)은 1978년 <민중과 지식인>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다 같이 약삭빠른 기능인간이 되기보다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어 보자. 밝은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 여기서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보자.”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철든 체하지 말자고. 배운 자와 가진 자들의 다수가 잘못 철이 들어 문제가 되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철들기를 거부하자고.

그래, 우리 모두 ‘철부지’가 되자! ‘머리’와 ‘심장’ 모두를 가지고, 비그포르스가 말한 ‘잠정적 유토피아’ 즉, “철두철미 ‘현재’로부터 생겨나고 또 ‘현재’에 발 딛고 있는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바보짓’을 계속하자. 이런 ‘바보짓’이 계속될 때 비로소 헌법정신은 살아 움직이고 정의는 실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