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법부가 상식과 인권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는 말이 자주
들린다. ‘정치의 사법화’다.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사법부로 향하기 일쑤다. 정부정책의 정당성은 법원이나
헌법재판소에 의해 결정되고, 정리해고나 파업 등 노동문제의 최종 심판자도 사법부다.
이명박 정부 5년, 박근혜 정부 1년 동안 이러한 ‘정치의 사법화’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대화와 타협이 통하지 않고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사이 사법부의 판단 하나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현상이 더욱 심각해진 것이다.
한겨레21 ‘올해의 판결 취재팀’은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이명박 정부 1년차인 2008년부터 한국사회를 진일보시킨 의미
있는 판결들을 선정했다. 그리고 5년 간의 ‘올해의 판결’ 92개를 한 데 묶은 책을 펴냈다. ‘올해의 판결’은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 노동, 형사·사법, 국가 상대 소송, 환경, 경제정의, 과거청산, 생활 속의 권리, 소수자 인권, 행정,
가족·가사, 교육 부문 등 다양하다.
이렇게 다양한 부분에서 좋은 판결이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되면 얼핏 사법부가 인권과 상식의 ‘최후 보루’라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난 2월 쌍용자동차의 정리해고가 부당 하다는 법원 판결에 해고노동자를 지지하던 많은
노동자와 시민들이 사법부가 정의를 실현했다고 환호했다. 하지만 바로 전날 법원은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의 두 축 중 하나로 지목된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진보 시민들은 판사의 신상을 공개하며 ‘유신시대 사법부’라고 개탄했다. 사법부는
이렇게 하루 만에 유신시대에서 ‘정의의 수호자’로 거듭난다.
<올해의 판결>은 ‘올해의 판결’ 외에도 최악의 판결과 걸림돌 판결, 그리고 문제적 판결들을 소개한다. <올해의 판결>이 우리에게 사법부는 정의의 수호자도, 권력의 수호자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사법부는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도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삼성X파일 떡값 검사의 명단을 공개한
노회찬 전 의원의 행위에는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는 2011년 표현의 자유 부문 ‘올해의 판결’로 꼽혔지만, 대법원이 노회찬 전
의원에게 유죄를 확정한 판결은 2013년 표현의 자유 부문 ‘최악의 판결’로 꼽혔다.
▲ 올해의 판결 /한겨레21 ‘올해의 판결 취재팀’ 지음 | ||
사법부는 노동권을 엄격히 제한하기도 하지만, 노동권을 침해하려는 권력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기도 한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의
노조 설립 신고를 반려한 고용노동부의 처분이 정당하다는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은 2010년 노동 부문 ‘최악의 판결’이지만,
고용노동부가 전교조에 내린 법외 노조 처분의 효력을 정지시킨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은 2013년 노동 부문 ‘올해의 판결’이다.
<올해의 판결>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은 또 하나 있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기
형성을 하지 않은 성전환자에게 성별 정정을 허가한 2013년 판결 뒤에는 성소수자 인권법 연구회를 만들어 토론하고 연구한 판사들이
있었다. 부부 사이의 성폭력을 인정받기 위해 여성운동가들과 인권운동가들, 수많은 사람들이 싸워야만 했다.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백혈병이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이전에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죽음이 있었다. 비정규직이라도 함부로 계약을 종료할 수 없다는 판결을 얻기
위해 해고노동자들은 8년 동안 싸워야했다. ‘정의의 수호자’ 법원 뒤에 수많은 이들의 싸움이 존재했던 것이다.
2012년 대법원은 현대차의 사내 하청은 불법파견이라는 확정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2012년 노동부문 ‘올해의
판결’로 꼽혔다. 하지만 현대차는 대법원의 확정 판결에도 꿈적하지 않는다. 사내하청 노동자 8000명 가운데 3000명을
정규직으로 신규 채용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현대차의 이 같은 행동은 불법파견을 인정하지 않고 정규직 전환 입장을 내지
않으려는 ‘꼼수’라는 지적을 받았다. 사법부가 아무리 좋은 판결을 내려도, 이처럼 꼼짝하지 않는 힘 센 자들도 있다.
<올해의 판결>이 보여준,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교훈이 절실한 또 하나의 이유다.
출처 : 미디어 오늘
출처 : 미디어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