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392-1910)

[스크랩] 朝鮮(조선) 과 西土(서토) 와 中原의 땅은 모두 일치한다.

Chung Park 2015. 4. 13.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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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조선) 과 西土(서토) 와 中原의 땅은 모두 일치한다.

 

 

[자료의 근거]

문상옥 지음.        - 朝鮮(조선) 과 西土(서토) 와 中原의 땅 -
   

 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6&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396                                                 

      청사(淸 史) 지리지 “신강(新 疆)”편을 보면 『와랄(瓦 剌)』에 대해 설명하고 그 지리적 영토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합 밀(哈 密)』에 대한 설명과 여기에 덧붙여 『동호(東胡) 즉 동쪽의 흉노(東 匈奴)』땅이었다는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청사(淸 史)는 최 근대의 기록으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청사(淸 史)속에 기록된 내용은 최 근대의 상황이란 것도 인정할 것이다. 본인은 여기서 강조하고픈 말은 서토(西土)라는 용어이다.

 

우리들의 역사관은 서토(西土)라는 말은 고구려 연개소문에 관한 T. V 연속극을 보면서 “서토(西土), 서토(西土)”하는 것으로부터 관심이 증폭되었다고 여겨진다. 반도사관과 식민사관에서 “서토(西土)”란 용어는 최대한 서쪽으로 전진(前進)한다 해도 현 하 북 성을 포함한 그 서쪽의 일부 땅을 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토(西土)”란 말 그대로 “서쪽의 땅”이란 말이다.

 

그 “서토(西土)”라는 말이 가리키는 곳이 서쪽 현 하 북 성과 그 일부지방을 칭한다는 말은 반도 한국에서의 21세기 지금의 일이지 옛 역사서에 기록된 말은 아니다. 서토(西土)란 말은 <서쪽의 땅이요>, 서역(西域)이란 말 역시 <지경 또는 땅, 일정한 곳의 땅을 말한다.>   『본인은 여기서 “서토(西土)란 서역(西域)”을 말함이며, 그것은 현재의 “신 강”지방을 한하여 서토란 명칭으로 한정하여 칭하던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실체도 없는 어느 지방을 지칭하는 것도 없는 “서토(西土)”란 막연한 말이다. 조선과 현 대륙의 땅은 어느 곳이든 서쪽의 땅이지 동쪽의 땅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서쪽의 땅을 강조한 것은 어느 일정한 서쪽의 중요한 지역을 일컫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은 조선(朝鮮)의 선조들이 서쪽의 고향 땅, 잃어버린 땅을 찾고자 “서토(西土)”란 말을 했을 것이며, 그것은 대륙 사에서 서역(西域)이란 단어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이러한 추리는 대륙 사의 옛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이곳이 동호(東胡)들이 발흥했으며, 이곳에서 고려(句 驪 = 高 驪 = 高句驪)인들이 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기록한 옛 사서는 일천 일,이백 년 전에 기록된 것이다. 이러한 옛 기록을 부정하려 한다고 해서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곳 옛 서역의 땅이며 현 “신 강성(新 疆 省)” 의 땅과 조선(朝鮮 : 총칭)의 관계를 알아보기로 하자. 더구나 요즈음 이곳은 세계 뉴스의 초점으로 매일 언급되고 있는 성도(省 都)우루무치 있는 땅이다. 본인의 주장은 이곳 땅은 고대 동호(東胡)의 땅이었으며, 후대에 고구려의 땅으로, 다시 신라 및 고려 땅이었으며, 근대조선 역시 이곳을 영토로 하였으나 일부 땅을  청(淸)에게 뺏기고 그 동쪽지방을 국경으로 하고 있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우선 청사(淸 史) 지리지 “신강”편을 보면서 이야기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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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淸 史 地 理 志 51 新 疆>

   新 疆 :<본문>古雍州域外西戎之地.漢武帝設西域都護,天山以南,城郭三十六國皆屬焉. ➊天山以北,東匈奴右部,西烏孫,未嘗服屬.後漢,山北如故,山南分五十餘國,於闐,龜茲最著.自建武迄延光,三絕三通,設都護及長史治之. ➋三國及晉,北為烏孫及鮮卑西部,南為於闐,龜茲諸國.北魏,柔然,烏孫,悅般,高車盡有山北地.後周,突厥,鐵勒據之.其南以鄯善為強.唐於西州置北庭大都護府,統沙陀,突厥,回鶻,腺厥,北部諸都督府.於龜茲置安西大都護府,統龜茲,於闐,疏勒,碎葉四鎮,濛池,昆陵等都護.中葉後,為吐蕃所有.

   <신강 : 옛 옹주 (雍 州)지경의 밖 서융(西戎 : 서쪽 오랑캐)의 땅이다. 한(前漢) 무제가 서역도호(西域都護)를 설치하였으며, 천산(天山)의 남쪽 성곽과 36개 나라가 속해 있었으며, 서쪽으로 오손(烏孫)은 정복치 못했다. 후한(後漢) 때는 산북(천산 북)은 예전(한나라 때)과 같았으며, 산남(천산 남쪽)지방은 50 여개 나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우전(於 闐)과 구차가 가장 뛰어났다. 광무로부터 연광에 이르기 까지 3絶 3通(셋은 끊어지고 셋은 통하였다) 하였는데, 도호와 장사가 이들을 다스렸다.

 

삼국 및 진(晉)나라 때는 북쪽으로 오손(烏孫)과 선비의 서부가, 남쪽엔 우전(於 闐)과 구차(龜 茲)제국이 있었다. 북위(北魏)때는 유연(柔然=蠕蠕), 오손(烏孫), 열반(悅 般), 고차(高車)등은 다하여 산북(천산의 북쪽)의 땅으로 갔다. 후주(後周)때는 돌궐(突 厥)과 철륵(鐵勒勒勒 거하였으며, 그 남쪽에는 선선(鄯善)이 강하였다.

 

당(唐)나라 때는 이곳에 서주(西 州) 북정도호부를 설치하였으며, 사타(沙陀), 돌궐(突 厥), 회골(回鶻), 서돌궐(西 突 厥)을 통합하여 북부(北部)에 여러 도독부를 두었고, 우전(於 闐)에 안서대도호부를 설치하고 구차(龜 茲), 우전(於 闐), 소 륵(疏 勒), 쇄 엽(碎 葉)에 네 개의 진(鎭)을, 몽 지(濛 池), 곤릉(昆 陵)등에는 도호(都護)를 두었다. 중엽(中葉)이후에는 이곳들을 토번(吐 蕃)이 소유하였다.

   <본문> : 五代並於吐蕃,回鶻.宋時烏孫,回鶻居山北,於闐,龜茲諸國入於遼。元置三行尚書省,蔥嶺印屬巴什伯裡行尚書省.尋增天山南,北宣慰司,北則巴什伯裡,南則哈喇和卓,後為都哩特穆爾地.

   오대 시엔 같이 토번(土蕃), 회골(回鶻)이, 송(宋)나라 때는 오손(烏孫)과 회골(回鶻)이 산북(山北 : 천산의 북쪽인지 곤륜산의 북쪽인지 애매모호?)에 거주하였는데, 우전(於 闐), 구차(龜 茲)등의 여러 나라는 요(遼)나라에 들어(예속)갔다. 원(元)나라 때는 삼행상서성을 두었는데, 총령(蔥 嶺)의 동쪽은 파 십 백리(巴 什 伯 裡) 행 상서성에 속했는데 늘어나니(확대되니) 천산의 남쪽을 북 선위사(北 宣 慰 司)로 하였고, 북측은 파 십 백리, 남측은 합 라 화 탁으로 하였다가, 후에 도 리 특 목 이(都 哩 特 穆 爾) 땅으로 하였다.

   <본문> : 明,四衛拉特居北部,曰綽羅斯,曰杜爾伯特,曰和碩特,曰輝特.其南部則巴什伯裡,葉爾羌,吐魯番諸國,回部派噶木巴爾諸族居之。➌順治四年,哈密內屬,吐魯番亦入貢,惟四衛拉特仍據其地.准噶爾即綽羅斯部。數侵喀爾喀,聖祖三臨朔漠征之,噶爾丹走死。其兄子策妄阿拉布杷伊犁,傳子及孫,從孫達瓦齊奪其位.

   명나라 때는 사 위 랍 특 (四 衛 拉 特)은 북부에 살았는데, 왈 작 라 사(綽 羅 斯). 두이 백 특(杜 爾 伯 特). 화석 특(和 碩 特). 휘 특(輝 特)이다. 그 남부(南部)에는 파 십 백리, 엽 이강, 토 노번 제국이 있었으며, 회부(回 部 : 회골의 일파)의 일파인 갈목파이 제 부족들이 살았다. 순치 4년엔 합 밀(哈 密)이 들어와 예속되었으며, 토 노번 역시 공물을 바쳤다.

 

생각해보면 사 위 랍 특이 거듭 차지하여 살던 그 땅이다. 회 갈이(淮 噶 爾) 곧 정라사부이다. 수차례에 객 이객을 침범하자, 성조(聖祖) 3 년에 임하여 삭막(북쪽의 사막지대)을 정벌하니 “갈 이단(噶 爾 丹)”은 도망하다가 죽었다. 그 형의 아들이 책망(策 妄)하니 아랍포탄(阿 拉 布 坦)은 “이리(伊 犂)”로 피하여 달아났다. 따라간 손(孫) “달 와 제(達 瓦 齊)”가 빼앗아 그 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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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원문의 내용을 번역한 그대로다. 여기서 조선사(朝 鮮 史) 입장에서 해설을 해보자. 위의 ➊➋➌를 풀어보자. 어떤 이들은 역사서를 번역하거나 해설할 때 무슨 퀴즈풀이를 하는 것 마냥 은밀한 비밀문서를 해독하는 냥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방법이요, 태도이다. 이러한 형태는 자신의 머릿속에 든 지식과 원전의 내용이 전혀 다르니 이상한 방향으로 꿰어 맞추는 과정에서 나오는 정도를 벗어난 짓이다.

 

또한 음이 변하여, 차음되어, 전음 되어........... 뭐 해괴한 말들을 하나 이미 한자는 수천 년 전부터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명은 할 필요 없다. 인류가 진화를 거듭했던, 창조주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 냈건 간에 수만 년 살아오는 동안 교류와 전쟁과 이동과 유랑으로 인한 기초적 언어는 어느 정도 닮은꼴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길림(吉 林)이 전음 되어 계림(鷄林)이 되었다는 식의 막말은 하지 말자. 이것은 옛 역사를 왜곡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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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➊ <天 山 以 北, 東 匈 奴 右 部, 西 烏 孫, 未 嘗 服 屬> : 〔천산(天山)이북의 땅은 “동 흉 노(東 匈 奴)의 우부(右部)” 와 서쪽의 오손은 한(漢)나라에 정복당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사기나 한서 후한서 등의 대륙 사에서 동호(東胡)라고하면 <하 북 성으로부터 산 서성 북방>에 있던 흉노들을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청사(淸 史) 신강(新 疆)의 원전엔 “동호(東胡)”가 천산이북 땅에 있었으며 이곳은 東胡 중에서 서쪽(右部)에 살고 있던 호(胡)라고 하였다. 결국 서쪽이던, 동쪽이던 이들 모두는 “동쪽에 살고 있던 호”였으니 “동호(東胡)”가 아니었겠는가.

 

대략적인 기록의 한계는 천산 또는 곤륜산을 기준으로 동방(東方), 서방(西方)을 기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동호(東胡)들을 몇 천리씩 이동시켜 <하 북 성이나 산 서성 북방>으로 만들어 놓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바로 조선(朝鮮)의 영토 때문이다.

   동호(東胡)란 선비(鮮卑)와 맥(貊=貉=狢=濊=穢)과 句 驪(高 驪=高 酈=高 句 驪) 및 숙신(肅愼)등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 모두는 고구려(高 句 驪)에 통합 및 흡수되어 고려(高 驪) 또는 고구려(高 句 驪)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즉 맥(貊)은 호(胡)라 했고, 구려(句麗=高句麗) 역시 호국(胡國)이라 하였다. 한서(漢書)를 보면 한(漢)고조 <유방>이 한(漢)을 건국할 때 북방의 맥(貊)들이 강력한 기마대를 지원했다고 하지 않은가.

   근대조선의 관리였던 『晩 靜 堂 集 第 四 / 詩 / 瀋 陽 城(심양 성)』이란 구절을 보면 【『曾識遼東是我疆.高句北界近龍荒.隋唐遙統提封蹙.丹鞨交爭壁壘長.昭代百年同漢輔.本朝何日復河湟.中宵勑勒奚歌發.俛仰山川淚數行』<近. 一 作 接> ➡<高 句> 뒤에 “麗”가 빠진 듯.】이라고 하였는데 내용인 즉 “고구려의 북쪽 경계에 용 황과 접하였다(가까이 있었다)”고 했을 때 “용 황”지방은 대륙의 삭방(朔方 : 하투지방으로부터 감 숙성 서북방)과 옥문관의 북쪽지방이다. 이는 사기 주해에 나오는 말이다. 이곳은 천산산맥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은 곳의 북쪽지방이다. 즉 산북(山北)지방이다.

   또한 通 典 卷 第 191 . 邊 防 七 (西 戎 三) ※ <車 師 高昌 附>을 보면 ; 【文 字 亦 同 華 夏 ,兼 用 胡 書 。有 毛 詩 、論 語 、孝 經 、歷 代 子 史 ,集 學 官 弟 子 ,以 相 教 授 。雖 習 讀 之 , 而 皆 為 胡 語 。賦 稅 則 計 田 輸 銀 ,無 者 輸 麻 布 。其 刑 法 、風 俗 、婚 姻 、喪 葬 與 華 夏 大 同 。➡➡➡其 人 面 貌 類 高 麗, 辮 髮 施 之 於 背 女 子 頭 髮 辮 而 垂 :

 

통전 서융 3 편의 거사(고창) : <문자(文字)는 또한 화하(華 夏)와 같았으며(同), 오랑캐(胡)의 문자(書)도 함께 사용하였다. 모시(毛詩). 논어(論語). 효경(孝經)등이 있었으며, (중략). 그 형법. 풍속. 혼인. 장례 등 모두 화하(華 夏)와 두루 같다. ➡➡➡그 사람들의 얼굴 생김새는 고려(高麗=고구려)의 무리(一族)이며, 변발이 행해지기 전에 여자들은 두발을 땋아 등허리 아래로 드리웠다.】

   : 반도로부터 일만 리 쯤 떨어져 있는 현 신 강성 알타이 산맥의 서쪽, 준갈이 사막에 있는 거사(車 師)의 백성들의 풍속이나 의복, 혼인이나 장례 등의 모든 생활 습관이 대부분 중화(中華=華 夏)와 같았으며, 이곳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얼굴 생김새(모양)가 모두 고려(高麗)의 무리(종류=닮다=일족)이다. 특히 <부녀자들은 머리 땋아 등 뒤로 드리웠다>는 말은 바로 “댕기머리”를 말하는 것으로 이 땅은 바로 고려(高句麗)의 것이므로 이곳 백성들 역시 고려(高句麗)인 일수밖에 없잖은가!

   또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고려인(高麗 人)이라고 했을 때 이들의 풍습 모두가 중화(中華)와 같다고 했다면 고려(高麗)는 중화(中華)와 같다는 말이 된다. 즉 중화(中華)는 고려(高麗)가 되며, 高麗(고려)는 중화(中華)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대륙 사의 기록으로 보더라도 “조선(朝鮮 : 총칭)의 영토를 하 북 성이나 그 동쪽지방으로 비정, 추정하는 역사해설은 매국노 무리와 무엇이 다른가? 


   위의 조선 사에서 말하는 근대조선 왕조의 문집속의 기록과 대륙 사의 통전(通典) 변방전의 기록을 보고 느낀 점이 없다면 역사를 공부한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전체적인 흐름을 알아야 전체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통전을 편찬한 당나라의 “두 우”라는 분이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닌바, 서역(西域) 땅, 반도로부터 일만 리 넘게 떨어져 있던 서토(西土)의 “거사(고창)” 땅에 고려 (高麗 = 高 句 驪)인들이 무리를 이루고 살았다는 기록을 남겨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다면 이곳은 고려(고구려)의 땅이었다는 말이다. 시세말로 바꿔보면, <두우가 바보냐, 두우가 고구려인이냐?>-------!

   본인의 유년기 농촌생활을 회상해보면 ; 시집을 가기 전 누님들 중 일부는 분명 “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뜨리고 다니셨다.” 위에서 말하는 댕기머리를 말하는 것일 게다. 수천 년 변함없이 내려온 조선(朝鮮)의 풍습이었다는 증거다. 그대들의 어머니나 할머님들은 모두 어릴 적에 이런 댕기머리를 하고 다니셨을 것이다.

   본인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누가 이러한 원전의 기록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반도만이 유일한 조선 땅이라고 말하려면 이해할 수 있는 지리적, 지형적 근거를 기록과 함께 설명해야 되는 일이다. 】동북삼성지방이나 반도나 분명 조선(朝鮮)의 땅이었다. 다만 황도(皇都)를 그곳에 두지 않았으며, 황제(皇帝)가 직접 통치관할 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대륙사인 통전(通典)이나 북사(北史), 조선사인 조선왕조 관리가 기록한 내용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曾識遼東是我疆.高句北界近龍荒.隋唐遙統提封蹙.丹鞨交爭壁壘長.昭代百年同漢輔.本朝何日復河湟.中宵勑勒奚歌發.俛仰山川淚數行.<近. 一 作 接> :

    일찍이 요동 땅은 본시 우리나라지경으로 명확하였고, 고구려의 북쪽 경계에 『용 황 (龍 荒)』과 접하여 있었다(가까이에 있었다). 수와 당나라 때는 아득하게 멀어 제봉(봉강)으로 오그라들었다(蹙). 단 단과 말갈이 번갈아 싸워 울타리 보루(성)가 길게 만들어졌고, 소제(한나라 소제 칭)로부터 백 년 동안은 한나라를 보좌하는 것이 되었다. 본조(통칭 조선을 칭)에서는 언제 하황(河 湟)지방을 수복할 것인가? (中略). (본조의) 산천을 아래로 굽어보고 위를 쳐다봐도 (俛仰), 눈물만이 흐른다.❳

   위의 글을 되새겨 보면 한(漢)이란 나라는 결코 장안(長安)에 도읍했던 국가일 수 없다. 이  전한(前漢)이란 국가는 『신 강성 사막남쪽과 청해 호 서쪽, 티베트일부를 영토로 하였던 국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황 (河 湟)지방과 그 서쪽지방을 한 소제 때 이곳 땅을 잃어버리고 백 년 동안이나 수복치 못했다는 말이다.

 

물론 그 이후에 수복하여 다시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 이곳은 결국 옛 고구려의 <현토 군과 개마 현 및 낙랑군 >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런 연 후에 근대조선 시기 청(淸)나라에 이곳을 빼앗긴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분은 이곳의 산천을 바라보며 눈물만을 흘리고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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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➋<三國及晉,北為烏孫及鮮卑西部,南為於闐,龜茲諸國.北魏,柔然,烏孫,悅般,高車盡有山北地.後周,突厥,鐵勒據之.其南以鄯善為強.> 이렇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선 북사(北史) “연연(蠕蠕)”편을 보자.

   【先登者賜以虜獲,退懦者以石擊首殺之,或臨時垂撻。無文記,將帥以羊屎粗討兵數,後頗知刻木為記。其西北有匈奴余種,國尤富強,部帥日拔也稽舉兵擊社侖。逆戰於頞根河,大破之.後盡為社侖所並.號為強盛,隨水草畜牧.▶其西則焉耆之地,東則朝鮮之地,北則渡沙漠,窮瀚海,南則臨大磧.其常所會庭,敦煌,張掖之北 :

 

 먼저 오른 자에게는 포획한 포로들을 나누어 주고, 공격하지 않고 나약하고 무능한 자는 머리를 돌로 쳐 죽였다. 혹 임시로 잘못을 바로 잡게 하기 위해 매질하는 것으로 베풀기도 하였다. 문자가 없어 기록을 할 수 없었다. 장수들은 토벌하는 병사의 수를 양의 똥(대변)의 크기로 세었으나 후에는 나무위에 새겨 적었다.

 

 그들의 서북(西北)지방에는 흉노(匈奴)의 나머지 종족이 있고, 나라(國)는 더욱 부강해졌다. 부(部)의 장수는 일발야계가 거병하여 “사륜”을 쳤으나 “알 근하”에서 역전을 벌여 대파하였다. 후에 “사륜”이 모두 병합하였다. 이때 가장 강성하여 수초(물과 초목)를 따라 가축을 길렀다.

   ❈ 그 땅은 (즉 당시 연연의 땅) :  【 (1) 西(서)쪽으로는 언 기(焉 耆 : 新강성)의 땅이요,   (2)  東(동)쪽으로는 朝鮮(조선)의 땅이요, (3) 北(북)쪽의 사막을 건너면 , 瀚 海(한해=북해)에 끝나며, (4) 南(남)쪽으로는 대적(大 磧 ; 청해 북방)에 임했다. 그들이 상시 만나서 회합을 갖던 곳은 돈 황(燉 煌)과 장액(張 掖)의 북(北)쪽이었다.】

   ▶▶▶ 이렇게 기록된 연연(蠕蠕 즉 柔然유연)의 지리적 위치는 동쪽 한계(限界)가 감 숙성 장액(張 掖)의 북쪽지방이다. 장액(張 掖)의 북쪽지방이란 바로 약수(弱水)와 거연 택 【居 延 澤 : 이곳 거연호수는 동(東), 서(西)호가 따로 따로 있었다고 함】이 있는 곳으로 바로 거연 성(흑수 성 黑水 城)이 있는 곳이다. 이곳의 동쪽지방에 조선(朝鮮)과 맞닿고 있었다는 것이 북사의 설명이다.

   여러분들이 신봉하고 있는 반도사관이나 식민사관으로 어찌 이러한 지리적 관계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들은 <북사(北史)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나 이것은 일천 여 년 전에 기록된 것이며, 소위 정사(正史)라고 인정하고 있는 기록물이다. 그러면 또 아래의 기록을 보면서 여러분들의 반도사관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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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사 (同 史) <글란> 편을 보면 아주 중요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는데,
  
  【太 和 三 年 , 高 句 麗 竊 與 蠕 蠕 謀 , 欲 取 地 豆 干 以 分 之 : 태화3년에 고구려가 몰래(竊) 연연(蠕蠕=柔然)과 모의하여 “지 두간”의 땅을 취하여 나눠 갖자고 하였다.】

   ▶ 반도사관이나 식민사관 입장에서 볼 때 고구려(高句驪)는 반도(半島) 북방에 있었다. 또 한 연연(유연=윤윤)은 신 강성 천산(天山)산맥 북쪽지방과 알타이산맥 동쪽일부까지를 영역으로 하였던 나라다. 이러한 두 나라가 은밀히 모의하여(몰래 사신을 파견하여 모략을 꾸민 것이다), “지두간국”을 공격, 뺏어 “지두간국” 땅을 나누어 갖자는 “밀약(密約)”을 했다는 설명이다.

   반도와 신 강성지방에 있었던 두 나라사이에서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신(神)의 아들들이다. 왜냐하면 반도(半島)와 연연(蠕蠕) 땅의 그 중간 중원북방지역은 당시 <척 발 씨> 북위(北魏)의 영토였으므로 두 나라가 모의하여 북해(北海 : 천산서북 또는 북방)의 남쪽지방에 있던 “지 두간(地 豆 干)”을 취하여 그 땅을 나누자는 모의는 불가능하다.  

   그러나『고구려와 연연』이 현 내몽고 서쪽의 『약수와 거연호수』 주위와 그 북방 외몽고지방(알타이 산맥 동쪽)에서 양(兩)나라가 접경지대를 이루고 있었으니 그 서북쪽의 천산산맥 북쪽에 있던 “지두간국”의 땅을 뺏어 동(東)쪽의 땅 (알타이 산맥과 항 애 산맥 사이의 땅)은 고구려(高句麗)가 갖고, 서(西)쪽의 땅은 연연(蠕蠕)이 갖는다면 이것은 약육강식의 법칙을 논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런 인류사다.

 

 이러한 기록들이 대륙의 정사라는 기록물에 많이도 등장하는데 언제까지 “조선(朝鮮: 총칭)”이 반도와 그 북방일부를 영토로 하였다는 한정(限定)된 거짓 역사관을 옹호하고 신봉할 것인가. 참고로 지두간국과 오락후국에 대한 원전의 내용을 추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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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地 豆 干 .  在 室 韋 西 千 餘 里 。 多 牛 、 羊 ,出 名 馬 , 皮 為 衣 服 , 無 五 穀 , 唯 食 肉 酪 。 延 興 二 年 八 月, 遣 使 朝 貢 , 至 于 太 和 六 年 , 貢 使 不 絕 。 十 四 年 , 頻 來 犯 塞 , 孝 文 詔 征 西 大 將 軍 陽 平 王 頤 擊 走 之 。 自 後 時 朝 京 師 , 迄 武 定 末 , 貢 使 不 絕 。 及 齊 受 禪 , 亦 來 朝 貢 :

   지두간국은 실위 서쪽 천 여리에 있다. 소와 양이 많으며, 이름난 말이 나오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 오곡(五穀)은 없고, 유일한 식량은 고기와  타락(유즙)이다. 연 흥 2년 8월부터 태화 6년까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으며, 입공사가 끊이지 않았다. 14년에 변방의 성채를 자주 범하자, 효문제가 조서를 내려 대장군 “양평 왕 신(頣)”이 격퇴, 도주하였다. (중략). 】
  
   【 烏 洛 侯 國 : 烏 洛 侯 國 在 地 豆 干 北 , 去 代 都 四 千 五 百 餘 里 。 其 地 下 濕 , 多 霧 氣 而 寒 。 人 冬 則 穿 地 為 室 , 夏 則 隨 原 阜 畜 牧 。 多 豕 , 有 穀 、 麥 。 無 大 君 長 , 部 落 莫 弗 , 皆 世 為 之。(中略). 其 國 西 北 有 完 水 , 東 北 流 合 於 難 水 , 其 小 水 ,皆 注 於 難 , 東 入 海 。 又 西 北 二 十 日 行 , 有 于 巳 尼 大 水 ,所 謂 北 海 也 。太 武 真 君 四 年 來 朝 , 稱 其 國 西 北 有 魏 先 帝 舊 墟 石 室 , 南 北 九 十 步 , 東 西 四 十 步 , 高 七 十 尺 , 室 有 神 靈 , 人 多 祈 請 :

   오락후국>이라는 나라는 <지두간국>의 북쪽에 있었다. 대도(大都)에서 4,500 여리 떨어져 있었다. 그 땅은 습하고, 안개가 많고, 춥다.  사람들은 겨울에 땅을 뚫고 방을 만들어 살고, 여름에는 방목하는 가축을 따라 초원에서 살았다.(중략). 그 나라의 서북에 완수가 있는데, 동북으로 흘러 난수와 합류한다. 이러한 조그만 물들은 모두 “난”에 모여 동쪽의 바다(海?)로 들어간다.

 

또 서북으로 20일을 가면 우사니대수가 있는데 ❈ 소위 “북해(北海)”이다. 말하기를 그 나라의 서북지방에 위(魏)의 선제(先帝)의 옛터인 “석실(石室)”이 있는데, 이 석실에는 신령(神靈)이 있다. 사람들이 이곳에서 소원을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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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내용을 보면 ;
  
   <북해(北海)>라면 최소한 반도(半島)의 번역자(해설자)들도 고비사막의 북쪽지방을 말한다고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북사 원전”을 보면 ; 대도에서 4,500 여리+서북 20일 행 = 북해(北海)라 했다. 위에서 설명하는 곳이 동쪽이나 동북지방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위(魏)의 선제(先帝)의 옛 터인 석실이 “오락후국”의 서북지방에 있었다는 것이다. 위(魏) 역시 선비족으로 대륙의 서북방지역에서 서남지역으로 동천(東遷)한 종족이다.

 

 그러므로 위(魏)의 선제(先帝)의 옛터는 중원을 기준하면 그 서북방에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도에서 4,500 여리 + 서북 20일 행이면 바로 천산의 북쪽쯤 되는 거리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당시 “北魏(북위)”라는 왕조의 정체다. 북사(北史)는 이러한 조정의 역사를 기록한 책임에도 연연(蠕蠕)과 고구려(高句麗)가 모의하여 지두간국을 쳐 땅을 뺏자는 모의를 하려면 “북위(北魏)”의 북쪽 땅을 거쳐 가야함에도 아예 “북위(北魏)”라는 나라 이름자체도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북위(北魏)라는 왕조(王朝)가 고구려(高 句 驪)의 다른 이름(異稱)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이것은 아주 근거 있는 주장이다. 후 다시 논해 보기로 하자.   이러한 지역에 있던 “오락후국”의 남쪽지방에 “지두간국”이 있었고, 신 강성 북쪽지방의 산북지방(천산산맥의 북쪽지방)이나 외몽고 서쪽지방에 있던 “연연(유연=윤윤)”과 접경(接境)하고 있던 고구려(高句麗)가 은밀히 모의를 해서 “지두간국”의 동쪽 땅은 고구려가 취하고, 지두간의 서쪽 땅은 연연(유연=윤윤)이 갖기로 밀약을 했다면 이들의 모의와 밀약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상식적인 역사의 흐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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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➌ <順治四年,哈密內屬,吐魯番亦入貢,惟四衛拉特仍據其地.准噶爾即綽羅斯部。數侵喀爾喀,聖祖三臨朔漠征之,噶爾丹走死 : 순치 4년엔 합 밀(哈 密)이 들어와 예속되었으며, 토 노번 역시 공물을 바쳤다. 생각해보면 사 위 랍 특이 거듭 차지하여 살던 그 땅이다. 회 갈이(淮 噶 爾) 곧 정라사부이다. 수차례에 객 이객을 침범하자, 성조(聖祖) 3 년에 임하여 삭막(북쪽의 사막지대)을 정벌하니 “갈 이단(噶 爾 丹)”은 도망하다가 죽었다. >

   위의 내용을 가지고 또 설명해 보기로 하자. 명사(明史) 열전 삼위(三衛)의 “와랄瓦 剌, 타안朵 顏,(복 여 福 余 태 녕 泰 寧)”편이다.

   <二 十 年, 瓦 剌 侵 掠 哈 密, 土 魯 番 據 哈 密, 嘉 靖 九 年, 復 以 議 婚 相 仇 隙。 土 魯 番 益 強, 瓦 剌 數 困 敗, 又 所 部 輒 自 殘, 多 歸 中 國, 哈 密 復 乘 間 侵 掠. (中略)> : <20년 “와 랄” 이 “합 밀”을 침범하여 노략질했다>에서 “합 밀”과 “와 랄”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던 국가였을까를 알아보자.  

   1) “합 밀”은 “합 밀 현”이며 신강성이다. 이곳은 한 나라 때의 “이 오 노”의 땅이며, 옥문관(玉 門 關)의 북쪽에 있으며, 삼국시절 선비의 땅이며, 북위 때 蠕蠕 (윤윤)의 땅이다. 송나라 때 회골이 들어 왔으며, 명나라 때 이곳에 “합 밀 위”가 설치되었고, “甘 肅 (감 숙)  安 西 道(안서도)”에 속했던 곳이다.  

   2) <와랄>이 “합 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동쪽 또는 북쪽 또는 동북쪽지방에 있을 때만이 “합 밀”을 침략, 약탈할 수 있다. 즉 동쪽으로 돈 황이나 그 북쪽 접경지대에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명 가정 9년, “토 노 번”이 점점 강해져 <와랄>은 수적으로 부족해 패하게 되매, 많은 무리들이 중국(감 숙성 돈 황 또는 한(罕)지방)으로 되돌아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명나라 때의 삼위(三衛)의 땅은 결코 하 북 성이나 동북삼성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한 것이다. 즉 현재의 <신 강성 토 노번> 땅을 침략, 약탈할 수 있으려면 <신 강성주변 또는 돈 황 주변>이 될 수밖에 없는 간단한 이치다. 지리적으로 위치를 파악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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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瓦 剌, 蒙 古 部 落 也, 在 韃 靼 西.

   ▶ 瓦 剌(와랄)은 蒙古(몽고)의 部落(부락)으로써 韃 靼(달단)의 서쪽에 있었다. 韃 靼(달단)은 어디에 있었을까........열전을 보면 韃 靼(달단)은 감 숙성 북쪽 변경 내몽고 및 외몽고지대에 있었다. 이들 韃 靼(달단) 亦是(역시) 元(원)의 後裔(후예)이다. 元(원)의 支 配 層(지배층)들이 漠 北(막북)으로 물러간 뒤 남아있던 種族(종족)이다.

   달단의 東界(동계)는 最大限(최대한)으로 <감 숙성 서북 변>을 벗어날 수 없다. 이 韃 靼(달단)의 서쪽에 瓦 剌(와랄)이 있었다는 것은 이 瓦 剌(와랄)이 외몽고 서쪽 및 내몽고와 新 疆 省(신 강성)접경지역 및 甘숙성 서쪽변경에 있었다는 結論(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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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二十年,瓦剌侵掠哈密,朝廷責之,遣使謝罪。

   ▶ <20년 瓦 剌(와랄)이 哈 密(합 밀)을 侵掠(침략), 약탈했다. 조정에서 책임을 묻자,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列 傳 哈 密(열전 합 밀)편을 보면 “東 去 嘉 峪 關 一 千 六 百 裡, 漢 伊 吾 盧 地.” 즉 <동쪽으로 가 욕 관까지 1,600리 떨어져 있고, 한나라의 이 오 노의 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신강선 동쪽 합 밀(하미)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합 밀>의 위치를 정확하게 기술한 내용을 보면 ; [其 地, 北 瓦 剌, 西 土 魯 番, 東 沙 州、罕 東、赤 斤 諸 衛  그 땅(합 밀)은 북쪽으로 “와 랄”이 있고, 서쪽에는 “토 노번”이 있다. 동쪽으로는 “동 사 주(사주 : 燉황) 및 한 동(罕 東), 赤 斤(적 근)제위”까지이다.] 여기서 한 동(罕 東)은 “돈 황현 동남”에 있는데, 명나라 때 “한 동 좌위”를 설치하였다. 적 근(赤 斤)은 적근산주위이다. 즉 감 숙성 옥문 현(옥문관) 東南(동남)에 있다.

   따라서 <합 밀>은 신 강성 토 노번과 감 숙성 옥문관 사이에 있었고, <와 랄>은 그 북쪽에 있었다.  韃 靼(달단)은 <와 랄>의 동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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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也 先 攻 破 哈 密, 執 王 及 王 母, 既 而 歸 之。♦又 結 婚 沙 州、赤 斤 蒙 古 諸 衛, 破 兀 良 哈, 脅 朝 鮮。: <와랄>의 “야선”은 먼저 <합 밀>을 공격, 파하고, 그 왕과 왕의 어머니 등을 잡았는데 이미 이들을 돌려보냈다. 또 사주(沙 州)와 적 근 몽고의 여러 위(衛)들과 혼사를 맺어 결집시키고 올 량 합을 파하고는  “조선(朝鮮)”을 협박(脅迫)하였다.〕

   ▶▶▶ 《破 兀 良 哈, 脅 朝 鮮 : “올 량 합”을 파하고(깨트리고), “조선(朝鮮)”을 협박(脅迫)하였다.》   이러한 기록이 지금까지 명사열전에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 같은 일이다. 현재의 <신 강성 합 밀. 옥문관. 돈 황>의 북쪽(알타이 산맥의 동서(東西)지역)에 있던 <와랄>종족들이 그 동쪽에 있던 달단 또는 올 량 합을 파(깨트리고)하고, 그 동쪽에 있던 “조선(朝鮮)”을 위협했다는 말은 【“명(明)나라가 조선(朝鮮)”】이라는 말과 같다.

   <돈 황> 북방의 동쪽으로는 감 숙성 일부와 내몽고, 외몽고뿐이다. 천산산맥의 북쪽과 이와 겹쳐지는 알타이산맥과 고비사막사이에 “<와 랄>과 <달단> 및 <올 량 합>이 있었다.” 그 동쪽엔 당연히 명(明)나라가 수십만 대군을 주둔시키고 변방의 수비를 강화하고 있을 때이며, 명(明)나라 조정에서는 이것도 모자라 감 숙성 장랑, 영 하 성, 섬서 서북 변경 지방에 3개의 강력한 진지(三 邊 鎭)를 구축하여 수십만 장병들이 북방과 서방의 오랑캐 침범에 대비, 주둔하고 있었다.

 

 明(명)조정에서는 이것도 못 미더워 이곳 진지(陣地)에 조정(朝廷)의 대신(大臣)을 직접 보내 관리, 감독하였다. 이러한 명(明)나라를 협박했다면 백 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 그러나 명(明)나라를 협박했다는 말은 없고, 조선(朝鮮)을 협박했다고 하니 기막힌 일이 아닌가?   위의 열전 기록대로라면 : <와 랄>은 <달 단>과 <올 량 합>을 깨뜨리고 명(明)나라가 아닌 조선(朝鮮)을 위협 또는 협박했다는 것은 당시 <와랄>의 동쪽인 『감 숙성과 그 북방, 섬 서성과 그 북방, 산 서성과 그 북방지역은 조선(朝鮮)의 영토(領土)였다』는 것이 된다. 이곳지방이 “조선의 영토였다”는 것에 불만을 가질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 2009년 07월 15일  문  무 씀 -

출처 : 지구조선사연구회
글쓴이 : 러브 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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