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거란.발해.신라 .하자르 왕국,황룡사9층탑

2018. 12. 12. 05:08발해 (698-926)

거란.발해.신라 .하자르 왕국,황룡사9층탑

 

자료의 출처: 

출처 :최신 영화 예고편 & 스타사주 원문보기   글쓴이 : 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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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ire of the white Huns (350-550) 

화이트 훈족 제국-에프탈족






아틸라 훈제국 (Attila Huns Empire  370~469 )



0370-00-00 훈족의 대이동(북돌귈) →루마니아 근처 드네프르강(Dnepr River)
0374-00-00 훈족-돈강을 넘어 동고트를 정복하고, 이어 드네스트르강을 건너 서고트를 압박하였다
0375-00-00 훈족-흑해 북안의 동고트족을 무찔러 그 대부분을 지배하에

0375-00-00 훈족-두고, 이어서 다뉴브강 하류의 서(西)고트족에 육박
0375-00-00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작▶갈리아.프랑스.튀니지.이탈리아.크림반도.발칸반도까지 가다(소수)
0376-00-00 도니에풀강(DNEPR)-훈족의대이동 (375년 )→ 게르만민족 대이동→로마제국으로
0376-00-00 훈족▶독일일대로 진출하다.
0376-00-00 게르만족▶최초로 이민족과 접촉하다.훈족세력
0376-00-00 훈족 ▶게르만족을 압박하다.
0406-00-00 훈족 아틸라-탄생하다.
0406-00-00 훈족무리는 훈어만 쓰는 집단이 아닌 여러 유목부족들의 연합체인 것 같습니다. 
0406-00-00 아틸라의 모어는 훈어였을 것입니다.


※연표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훈족의 이동 이부분이 조작의 흔적입니다.

※훈족은 사실상 이동한적이 없습니다.  

※항상 거주하던곳에서 주변을 정복한것뿐이었죠.

※서로마는 존재한적이 없으며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으로 들어간것도 아니되는 것이지요.

※오직 비잔틴 왕국(=유럽문명이 아니라 동양의 문명권 ) 만 존재했을뿐이죠..

※모든것이 다 날조된 역사요..조작된 역사지요..

※존재하지도 았았던 그리스&로마의 역사를 인위적으로 가공하여 

※유럽이 아시아보다 우월하다라고  내세우고 싶었던겁니다.

※간다르 지역의 역사를 그리스의 역사로 둔갑시킨것이며

※석가부처 탄생지를 조작하여 전혀 관련없는 인도에다가 밀어넣고

※실제 태어난곳은  대대적으로 파괴하여 흔적을 지워으며 

※알렉산더 대왕이란 거창한 가공 캐릭터를 

※진시황의 삼한일통과정에 집어넣어 진시황의 진나라(秦)의 역사를

※페르시아 제국 정복의 역사로 바꿔치기한거죠.

※그리스의 헬레니즘이란 웃기지도 않는 사상과 철학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내어

※그리스의 문명이 간다라에 전달되어 헬레니즘문화가 만들었졌다라고

※주구장창 떠들어대고 있는 중입니다.

※실상은 반대로 간다라의 찬란한 깊은 불교의 사상과 철학을 그리스로 전달이 되었다라는것입니다,






하자르왕국 성립이전(350~627)



헤프탈(Hephthalite 백(白)훈족) 제국 & 후나(Huna 인도-헤프탈족) 제국

서양지도( A.D 500년 )



헤프탈족
5~6세기 인도와 페르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민족.
사료에 의하면 이들은 원래 만리장성 북쪽 지역에서 살았으며, 
엽달·언달·읍달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백(白)훈족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도시를 건설하지 않았고 글자체계도 없었으며, 펠트 천막에서 살면서
일처다부제의 혼인형태를 이루었다. 5~6세기에 이들은 페르시아와 인도를
자주 침략했다. 6세기 중엽( A.D 550년 ) 투르크의 공격을 받아 독립된 민족으로서의 
존재가 끝나고 주변의 다른 부족들로 흡수된 듯하다.
이들의 언어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0425-00-00 에프탈족-스키타이족을 추방하고 소그드와 호라산을 점령했다.
0425-00-00 에프탈족-그러한 후에, 이들은 시르다르야 강을 넘어 페르시아를 침입했다.
0425-00-00 에프탈족-페르시아에서, 이들은 처음에는 바흐람5세(사산조, 421-438년)에 의해 가로막혔으나,
0425-00-00 에프탈족-나중에 서기 483년~485년경에 이들은  
0483-00-00 에프탈족-페르시아를 속국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483년-485년)

0513-00-00 에프탈족-일련의 전쟁을 겪은 후에, 이들은 페르시아에서 추방되다(503-513)
0528-00-00 힌두 연합에 의해 인도에서 추방되었고,
0528-00-00 현재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정착해야만 했다.
0557-00-00 에프탈족-호스루1세(Khosru I)에 의해 철저히 패배를 당하다.
0557-00-00 에프탈족-그 후에 이들의 정치조직은 곡-돌궐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에프탈의 일처다부제와 신라의 여왕의 관계에서 볼때. 
신라의 선덕, 진덕, 진성여왕, 당나라의 측천무후등이죠...

여자가 중심인 문화라는 것입니다.

이런 요소를 통해서 볼때, 해당 에프탈족(Hephthlite)은

신라, 당나라와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정도 위치면 신라의 첫출발지가 아닐까란 생각도 듭니다.  


신라는 원래 백인이 되는 것인가? 

신라는 Slave, 즉 노예의 민족이 아니었을까? 

노예=다른민족, 이런 논리로 본다면    
바쁜 고구려, 백제로 인해서 서역에서 잡아온 노예들이 
해방이 된 것이 아닐까?


이 엽달족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위 그림에서 그림을 확대해 보시면, 에프탈족(Hepthalite)족이라는 
이름위쪽에 아바르 ( Avar )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즉 이들이 선비족(=백인계열의 유목민족)일 가능성은 있으나  

신강성에도 관련이 있고 그리고 활동 범위가 

흑해에서 바이칼까지라서 파악하기 어려운점이 있습니다.  






File:Khazar0.png

폰틱대초원( Pontic steppe 650년 ) -하자르( Khazara )와 이웃의 나라 초기 영토 

※고구려의 영역이 빠져있습니다.

※아무래도 서양관점에서 조작을 하다보니 그런것 같습니다.





1번 신라  (新羅, 기원전 57년 - 935년 ※신라의 건국시기 축소 되었습니다.)

2번 발해  (渤海 698년 - 926년 )

3번 이슬람 제국 옴미아드 왕조 (661년∼750년)

4번 거란( =요나라 ) 요(遼, 916년 - 1125년 )

5번 하자르 왕국( 700~ 1016년)

6번 비잔틴 제국( 306년~1453년 ※서로마는 존재한적이 없습니다. )





1번 발해(渤海, 존속 기간: 698년 - 926년)

2번 신라(新羅, 기원전 57년 - 935년)

3번 이슬람 제국 옴미아드 왕조 (661년∼750년)


○하늘색-칼한카르( Kharghankath +39.92+64.48) 걸걸중상과 걸걸조영(대중상과 대조영)의 근거지입니다 

○빨강색-케시(KESH = Shahrisabz +39.05, +66.83) 는 걸사비우(말갈)의 근거지입니다 


 







○연두색-칼한카르( Kharghankath +39.92+64.48) 걸걸중상(=대중상)&걸걸조영(=대조영)의 근거지입니다 

○빨강색-케시(KESH = Shahrisabz +39.05, +66.83) 는 걸사비우(말갈)의 근거지입니다 



대당서역기(현장 견문기 629년~645년) P24의 주석에 
서방문헌에서
카르한카트(Kharghankath)>칼한카르>갈갈>걸걸
라고 
표기하는 나라를 말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칼한카르((Kharghankath)or 카람코르)가 훗날 몽골족의

카라코름( Karakoreum =하르호린=하라호름 =Har horin ]) 이 

되는 것은 몽골어의 음운도치의 일반적 현상 입니다.
칭기즈 칸은 1220년 경에 이 지역에 머물렀으며

중국원정을 위한 본거지로 삼았다

 






발해-발흐(Balkh =박트라 Bactrs =박트리아 Bactriana =박달 )에서 건국한다

※고구려 안시성 .훗날 조선의 태조 이성계 태어난곳.화림지방.몽골 쌍성총관부

※안시성(安市城)은 고구려의 토성(土城)이며, 안시성 전투가 일어난 곳으로 유명합니다.

안시성 전투는 645년(고구려 보장황제 04년)에 당나라 군대(=신라군)가 

※대규모로 고구려를 침공하여 3개월가량 안시성을 포위 공격했습니다.

 

 


 




발해-발흐(Balkh= 박트라Bactrs=박트리아Bactriana)에서 건국한다


1번 발흐(Balkh +36.75 +66.88 =박트라Bactrs=박트리아Bactriana=박달=밝달)

2번 베그람(begram +34.96 , +69.29 ) 석가부처 태어난곳

3번 아무다리야강( 2,500Km..Amu Darya 바다or 큰 강을 의미 페르시아어를 투르크어로 읽는 것 )


발해영토-수정본

※하자르 왕국이 존재하지 않았다 관점에서  새로 그려본 수정본


1번 발해 (渤海,  698년 - 926년)

2번 신라 (新羅, 기원전 57년 - 935년)

3번 이슬람 옴미아드(Ommiad)왕조 (661∼750)

4번 비잔틴 왕국 (Byzantine Empire 330년 - 1453년 )




0618년 수나라-멸망한다. 
0630년 당나라(=신라군)-동돌궐을 멸망시킴( ※대당대자은사 삼장법사전-합밀[하미]멸망 시킵니다  ) 
0640년 당나라(=신라군)--후군집이 고창( 투르판 )을 멸망시킴 



640년 고창국(트루판, 카라코쟈) 정복
644년 언기국(카라샤르, 얜치) 정복
  

0645년 당나라(=신라군)-고구려의 요동성 함락시킴 (※파미르 서쪽에 있는 요동지역 ) 
0648년 당나라(=신라군)-구자( =쿠차 )왕 체포  ※조작:고구려 평양( =국내성 )이 쿠차인데, 쿠차왕을 체포할수없습니다.
0655년 당나라(=신라군)--정명진, 소정방을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한다.
0655년 당나라(=신라군)-소정방-고구려를 공격하러 간다. 
0657년 당나라(=신라군)-소정방, 돌궐의 사발라가한을 생포, 서돌궐의 땅을 나누어 2개 도호 설치한다.
0657년 ※대당서역기, 돌궐 멸망시키고, 가필시 간다라에 2개 도호 설치
0657년 ※서돌궐이 있는 인도의 서북부 지방을 점령하고 2개 도호를 설치하는 것은
0657년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인도의 서북부 지방이 고구려의 한 지방이라야 말이 된다.

0658년 당나라-당 안서도호부를 구자(쿠차)로 옮김 -
0658년 ※조작↑ 668년에 당이 쿠차를 점령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0659년 당나라(=신라군)설필하력으로 요동을 경략케 함 
0660년 당나라(=신라군)-백제 멸망시킨다. 
0661년 당나라(=신라군)-임아상으로 고구려 공격, 서역의 여러 나라를 96주 8부로 함 
0666년 당나라(=신라군)-이적에게 고구려를 치게한다.
 
0667년 당나라(=신라군)-이적 고구려 17성 함락
0668년 당나라(=신라군)-쿠차(서경, 고구려 평양성, 장안) 정복한다

0668년 당나라(=신라군)-고구려 멸망시킨다..



0696년 대조영-부친 대중상 (大仲象 =걸걸중상)을 따라 신라의 영주 (營州)로 들어갔다.
0696년 5월 거란의 이진충과 손만영이 신라 왕조에 반란을 일으킨다.
0696년 5월 이때 혼란이 일어난 틈을 타 대중상(=걸걸중상)과
0696년 5월 말갈추장 걸사비우는 봉기준비를 하여 세력을 일으켰다
0696년 5월 신라왕실- 거란족 장수 이해고를 보내 추격하여 천문령 전투가 벌어졌다.
0698년 천문령 전투-발해 고왕 대조영과 신라왕조 거란족 장수 이해고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0696년 5월 당나라(=신라군)-걸사비우와 대중상(=걸걸중상)은 이때 전사하였다. 
0696년 5월 당나라(=신라군)-대조영은 말갈족과 고구려 출신의 인물들로 구성된 걸사비우와 
0696년 5월 당나라(=신라군)-대중상의 세력을 규합하여 당군에 대항하였다. 
0696년 5월 당나라(=신라군)-대조영은 천문령에서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0698년 대조영-동모산 아래에서 진(震)을 세웠다.
0698년 대조영-나라를 세워 국호를 진(震)이라 함

0698년 동모산 근처-도읍지→뒷날 '중경 현덕부'

0698년 동모산( 東牟山 )은 일명 성산자산(城山子山)이라고도 합니다.

0698년 성산자산이라 함은 인근 성산자 마을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0699년 발해-아프가니스탄 박트리아( Bactriana 대하(大夏). 발흐 )에서 일어난 것이 됩니다
0699년 발해-알렉산더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날조사이고, 
0699년 발해-러시아학자 아나톨리 포멘코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 & 로마의 역사는 
0699년 발해- 동방의 것을 베낀 가공된 날조사인 것입니다.

0699년 발해-이탈리아의 로마는 거짓입니다. 

 

0737년 제3대 발해 문왕-상경 용천부→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 793년)
0793년 제5대 발해 성왕-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 ) (~ 794년)



※중경(中京顯德府)-발흐( Balkh +36.75 +66.88 ) [아래쪽]
※상경(上京龍泉府)-칼한카르( Kharghankath +39.92+64.48 ) [왼쪽]
※동경(東京龍原府)-케시( KESH = Shahrisabz +39.05, +66.83) [오른쪽]


  



※중경(中京顯德府)-발흐( Balkh  +36.75 +66.88 )  [아래쪽]
※상경(上京龍泉府)-칼한카르( Kharghankath +39.92+64.48 ) [왼쪽]
※동경(東京龍原府)-케시( KESH = Shahrisabz +39.05, +66.83) [오른쪽]




0699년 발해-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받을만큼 크게 번성했고, 그 국력 또한 강건했습니다. 

0699년 발해-구당서와 신당서 등의 사료들을 보면, 발해는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를 갖추었으며,

0699년 발해-최전성기인 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817년 ~ 830년)의 치세 무렵에는 서쪽의 요하유역까지 진출하여 

0699년 발해-그곳에 목저주(木底州)·현토주(玄菟州)를 설치하였고, 동으로는 연해주에 이르렀으며

0699년 발해-북으로는 지금의 흑룡강(=현재 볼가강 )을 넘어 1000(400km)리에 이르는

0699년 발해-영토를 차지하여, 그 지역의 강력한

0699년 발해-토착 세력인 말갈족(볼가강 중하류 지역과 흑해주변 지역)을 

0699년 발해-복속시키기까지 했습니다. 

 







하자르 왕국(Maps of the Khazar Kingdom 650~850)

 




0610년 하자르 왕국-동쪽의 돌귈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

0650년 하자르 왕국-이슬람 아랍 제국과 전쟁을 계속 치러야 했다

0661년 이슬랍 아랍 제국(옴미아드 왕조)-하자르 왕국에게 데르벤트를 포기할 것을 강요하다

0685년 하자르 왕국-아랍을 역공격하여 카프카스 남부를 지나 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까지 침략하다

0700년 하자르왕국-왕계보Irbis(1) · Busir(2) · Bihar(3) · Parsbit(4) · Zachariah(5) · Bulan(6) · 

0700년 하자르왕국-왕계보Obadiah(7) · Benjamin(8) · Aaron II(8) · Joseph(9) · David(10) · George(11)

0700년 하자르왕국-터키어로 사바르(Sabar)라고 불리는 종족의 하위 분파인 

0700년 하자르왕국-세멘데르(Semender)와 벨렌제르(Belenjer)가 주축이 되어 

0700년 하자르왕국-여러 군소 투르크족들이 섞여 하자르 종족을 구성했다고 합니다.

0700년 하자르왕국-하자르가 고구려귀족의 집사가 된 것을 보면 그들은 고구려건국에

0700년 하자르왕국-도움을 주었다고 추정될 수 있습니다. 

0700년 하자르왕국-하자르족,훈족,불가르족,아바르족은 역사적으로 다른 
0700년 하자르왕국-투르크족에 비해 고대왕국을 건설했다고 나오는데 이들의 언어가 다른
0700년 하자르왕국-투르크어족과 다른 것을 보면 오래전부터 유목민인 투르크족과 귀족의
0700년 하자르왕국-집사가 된 추바시족으로 분화된 것 같습니다.하자르가 모계인 점은

0700년 하자르왕국-유목민의 특징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0700년 하자르왕국-주변의 백인유목민에게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0700년 하자르왕국-하자르가 기원전에 겪은 역사는 구약성서에 나옵니다.

0700년 하자르왕국-구약성서의 내용은 단군조선사의 일부를 중동에 

0700년 하자르왕국-밀어넣고 유대역사로 만든 것입니다 

0713년 대조영-대진국( 大震國 에서 발해로 국호를 고치다.

0720년 하자르왕국-하자르 왕국과 아랍 제국(옴미아드 왕조)은 아르메니아에서 전쟁승패가 엎치락뒤치락 뒤바뀌다

0720년 이슬람 아랍제국(옴미아드왕조)-역공을 펼쳐 결국 카자르를 카프카스 북부에서 영원히 몰아냈다. 

0737년 하자르 왕국-이틸(Itil)에 수도를 세워 카프카스 산맥을 남부 국경선으로 정했다



하자르와 아슈케나지 유대인

Khazar and Ashkenazim Jews

http://www.youtube.com/watch?v=5AIKQHO0esk




1000년전 사라진 비운의 제국 '하자르 왕국' 유적 찾아냈다( 2008.09.23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9/23/2008092300008.html







역사지도 A.D 700년 ※서양지도


빨간색-신라영토.

노란색-아랍영토

파란색-동로마 영토

하늘색-하자르 왕국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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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0년 하자르왕국-하자르 왕국의 불란( Bulan) 왕은 유대교를 국교로 삼기로 결정하고 

0740년 하자르왕국-자신이 다스리던 국민들을 유대교로 집단 개종시켰다. (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142쪽 )

0740년 하자르왕국-카간과 지배층의 대다수가 유대교를 확실하게 공인한다. 

0740년 하자르왕국-개종의 배경은 불분명하며 유대교를 어느 정도 깊이 받아들였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0740년 하자르왕국-유대화한 하자르인들이 동유럽과 러시아의 많은 유대인들의 먼 조상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0740년 하자르왕국-유스티니아누스 2세(704년)와 콘스탄티누스 5세(732년)는 하자르인을 아내로 맞이했다.

0740년 하자르왕국-주요수입은 통상, 특히 극동과 비잔틴을 잇는 동서 무역로와, 

0740년 하자르왕국-아랍 제국과 북부 슬라브 지역을 연결하는 

0740년 하자르왕국-북남 무역로를 장악한 데서 충당되었다. 

0740년 하자르왕국-하자르 영토를 통과하는 상품에 부과하는 

0740년 하자르왕국-관세에서 얻어진 수입과 복속 부족이 바치는 

0740년 하자르왕국-조공이 9세기까지(899년) 제국의 부와 세력을 유지시켰다





0741년 신라-고구려인 고선지(高仙芝)가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가 되다.           

0741년 장주(?州), 천주(泉州), 복주(福州=侯官후관 ?縣민현), 

0741년 온주(溫州), 태주(台州), 명주(明州), 괄주(括州), 

0741년 건주(建州), 정주(汀州),로서

0741년 9주는 왜(倭=日本)가 차지하고 있었다

0741년 일본(왜인 倭)=보르네오섬 입니다.



1번 지팡구=오리지날 일본 해적 아지트

2번 구주(九州)=오리지날 큐슈=오리지날 일본 해적 아지트









 


0747-00-00   신라 고선지 제1차정벌( 파미르 고원 남쪽지역 정복 )-달해부(達奚部)

0747-07-13   신라 고선지 정벌-오식닉국(五識匿國 토번군 1만명주둔중 5000명전사 =현재 Khorugh )→연운보

0747-07-18   신라 고선지 제2차정벌 소발률국(=길기트 Gilgit  +35.91, +74.3)

0750-06-05   신라 고선지 제3차정벌 갈사국(=사마르칸트 Samarkand +39.65, +66.95)

0750-12-00   신라 고선지 제4차정벌 석국(=타슈켄트 Tashkent+41.26 , +69.21 )

0750-12-00   신라-고선지 고비사막을 넘어 이슬람 압바스 왕조와  동맹을 맺으려는 석국(石國)을 쳐서 
0750-12-00   신라-고선지 왕을 잡아 온 공으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0750-12-00   이부분이 조작된것입니다.이슬람 압바스 왕조와는 무관한 지역이며 바로 
0750-12-00   발해국의 영토를 신라가 침략한것입니다.
0750-12-00   신라-포로로 잡힌 석국왕을 참살한다.


고선지 정복루트


고선지 정복루트





고선지의 발해 침공루트(747년~751년)



1번 연두색-신라영토

2번 하늘색-발해영토

 



 




0750년 이슬람-자브 전투( 1월 25일 )-옴미야드 왕조가 멸망하다.  [첫번째 이슬람 칼리프 왕조 ]

0750년 이슬람-압바스왕조(750년~1258년 / 509년 )    [ 두번째 이슬람 칼리프 왕조 ]

0750년 이슬람-압바스왕조-종교 박해가 일어나고 이슬람교 개종이 강요되자, 남아 있던 조로아스터교도들은 

0750년 이슬람-압바스왕조-이란을 떠나 인도로 가서 대부분 봄베이 지역에 정착했다

0750년 이슬람-다마스쿠스의 14명의 우마이야 왕조 칼리프와, 

0750년 이슬람-바그다드의 38명의 압바스 왕조 칼리프에게 승계되었다.





발해국 영토-탈라스 전투(751년)



1번 아프카니스탄 카불

2번 파키스탄 페샤와르 


 


탈라스 전투(Battle of Talas  위치: Talas, Kyrgyzstan )


※신라가 발해를 공격하여 신라군이 패전한게 탈라스전투입니다.

※아랍 연합군과 싸운것이 아니라 발해와의 

※전쟁을 아랍 연합군으로 둔갑시킨것 같아 보입니다.

※이 탈라스 전투로 인하여 제지술(=종이제작)이 아랍으로 넘어가고 그리고 

※유럽으로 넘어간것으로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만 전혀 아닐수도 있습니다.

※유럽의 종이제작기술은 18세~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일수도있습니다.

※워낙에 역사 날조를 많이해놔서...


 
  
 

0751년 7월 신라군( 고선지 7만명 = 5만명 전사하고  2만명 발해국의 포로가 ? )vs발해국  

0751년 7월 현재의 카자흐스탄 영토인 타쉬겐트 부근 탈라스강 

0751년 7월 유역에서 패권을 두고 싸운 전투였다.(7월~8월)

0751년 7월 발해국-탈라스[恒羅斯 항라사 Talas +42.525, +72.23)]의 대평원에서 신라군을 격파한다.

0751년 신라-고선지 제3차 서역원정, 탈라스강에서 사라센군에 패함 ※조작 - 고선지는 발해군과 전투했음 


0751년 ※당나라(=신라군)-사라센군에게 패배한 당군(=신라군)이 0752년에 ( 신라인  안록산이) 거란을 친다고 하니, 
0751년 ※당나라(=신라군)-거란이 사라센군(=이슬람 압바스  왕조)이라는 말인가? 
0751년 ※당나라(=신라군)-
사라센군(=이슬람 압바스 왕조)과 거란군 둘 다 발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0751년 ※당나라(=신라군)-
그렇다면, 고선지의 1차 원정이 파미르 남방은 맞는 말이고,
0751년 ※당나라(=신라군)-2, 3차 원정이 타시켄트, 탈라스라는 말은 조작으로 보인다.


0751년 신라/김대성-석굴암( 石窟庵 )을 짓다.

0751년 신라/김대성-불국사( 佛國寺 )를 창건하다

0751년 중국의 3대 석굴-용문석굴(龍門石窟).돈황(=경주) 막고굴.대동 운강석굴 중에서 하나가 석굴암이겠지요.




 


돈황 막고굴敦惶 莫高窟 440년 건립)                          용문석굴(龍門石窟 하남성 낙양)



돈황 막고굴(敦惶 莫高窟 Mogao Grottoes= Caves of the Thousand Buddhas)

 +40.03 +94.80


돈황막고굴은 세계에서 현존한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완전한

불교예술의 보물고로 1987년 막고굴은 <세계유산명록>에 수록됐다. 
중국 서북부 감숙성의 돈황(敦煌)시 교외에는 <명사산(鸣沙山)>이라는 산이 있다. 
명사산 동쪽마루의 절벽에는 남북거리가 2킬로에 달하는 5층으로 된

무수한 동굴이 있다. 이 동굴들은 높고 낮음과 배열이

엇갈리면서도 질서가 있으며 아주 장관을 이룬다. 
이것이 바로 세계에 유명한 돈황 막고굴이다. 
막고굴은 기원 366년부터 파기 시작했다.

동굴이 증가되어 7세기(600년~700년) 신라에 이르러

막고굴은 불사동굴이 1000여 개에 달해 사람들은

일명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한다. 
역사의 변천을 통해 인위적인 파괴를 받았지만 막고굴은

아직도 500여 개의 동굴을 보존하고 있으며 약 5만 평방미터의

벽화와 2천여기의 조각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용문석굴(龙门石窟)은 중국 하남성 낙양(洛阳)시 남부12.5킬로미터

용문협곡 동서 두 절벽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용문석굴(Longmen Grottoes +34.46, +112.46 )

석굴은 A.D 493년 북위(北魏)가 대동으로부터 낙양으로 천도한 다음부터 석굴을 만들기 시작하여

400년에 거쳐 완성되었습니다.

용문석굴의 남북 길이가 대략 1km 현존 석굴이 1300개, 동굴 감실이 2345개,

시문과 비석조각이 3600점, 불탑이 5개, 불상이 97000 여기 있다.

그 중 빈양(宾阳)의 중동(中洞), 봉선사(奉先寺)와 고양동(古陽洞)이 가장 대표성을 띠고있습니다. 



A.D 493년 당시의 신라.백제.고구려의 왕계보 입니다.


●신라-소지 마립간(炤知麻立干) 15년
고구려-문자명왕(文咨明王) 03년
백제-동성왕(東城王) 15년


※북위(北魏)가 과연 현재 하남성 낙양에 존재했는지 의문시 됩니다. 

※아래는 4세기(300년대)~5세기(400년대) 중국대륙의 고구려.신라.백제 영토 지도입니다.

 



1번 고구려 수도 졸본-트루판( 고창고성 )

2번 현재 난주

3번 현재 낙양



※촉(蜀.위(魏).오(吳)의 위치가 잘못되었습니다.

※촉.위.오.는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촉산(蜀山)은 흰두쿠시 산맥( Hindu Kush +36.24 +71.84 )을 의미합니다.


 

●돈황(마고굴) 대동(용문석굴) 낙양(운강석굴)  





대동의 운강석굴(云冈石窟 Yungang Grottoes, Datong 1039년 건립 +40.10 +113.12 )



운강석굴은 460년(북위가 대동에 정도하고 나서 62년 후) 서역에서

초빙된 사문통(沙門統 : 승려의 우두머리) 담요(曇曜)의 지휘 아래 파이기 시작하고,
그 뒤 도읍이 낙양으로 옮겨진 494년까지 계속 파여졌다.

가장 오래된 부분이 제16∼20굴, 운강석굴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담요오굴(曇曜五窟)입니다.

 

0439년 북위(北魏)의 화북(華北) 통일

0439년 ※바로 고구려를 의미합니다.



※운강석굴이 오리지날 석굴암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반도의 석굴암은 가짜라고 볼수 있습니다.





경주의 석굴암( 가짜 )

 









경주=돈황(Dunhuang +40.1, +94.65 )

금성=난주(Lanzhou +36.05, +103.8 )

동관=퉁관(Tongguan +34.5, +109.5 )


※경주.금성은 율곤학회의 자료를 인용했읍니다.

※대륙조선사 관점에서 경주는 돈황(현재의 돈황이 아니고 오리지날 돈황)=낙양이 됩니다.



 



1번 경주의 금성(金城)=돈황=낙양

2번 강이름이 낙수(洛水) =현재의 명칭은 소륵하(疏勒河)


※중국의 주나라 문왕이 낙수(洛水)라는 큰호수에서 큰거북이를 보게 되는데,

※이거북이 등을 보니 그림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그림이 팔괘의 개념이됩니다.

※여기서 낙수문왕팔괘가 만들어진곳이바로 소륵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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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록산 
아버지:이란계 소그드인 
어머니:돌궐족 



0716년 돌귈제국 카파간 카간( Kapaghan Khaghan 묵철가한)-바이루크족(Bayegu)의 반란을 진압하고

0716년 돌아오는 길에 바이루크족 잔병(殘兵)에게 습격 살해되었다( 716.07.22 ) 
0716년 안록산-그의 부족의 지도자인 카파간 카간이 죽게 되자  일족들은 혼란을 피하여 신라로 망명했다

0742년 안록산-평로절도사가 되었다. 변경 방비를 잘 맡아서 현종의 신임을 얻었다

0744년 안록산-범양절도사 임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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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1년 안록산-하동절도사(河東) 로 겸임함으로써 신라의 국방경비군 병력의 3분의 1에 가까운 병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0752년 당나라(=신라)-안록산 거란을 침( ※발해를 쳤다는 말로 보입니다 ) 


0753년 발해-당나라(=신라)에 사신을 보낸다. 
0755년 안록산은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안사의 난)



0755년 신라-인록산의난(755~763년)-진압군 고선지군대 10만명(11월)

0755년 안록산 군대는 20만에 이를 정도로 대단한 기세였으며 신라의 수도인 

0755년 낙양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하고 있었다.

0755년 고선지 장군은 이들의 진격로를 일단 다른 곳으로 유인시켜야만 되었다. 

0755년 그는 의도적으로 패하는 척 하면서 퉁관(潼關 동관)지역까지 후퇴하였다.   

0755년 그곳에서 안녹산 군대의 제1차 퉁관 공격을 저지하여, 새로운 반격의 기회를 잡고 있었다. 

0755년 그러나 신라 조정은 고선지가 퉁관으로 후퇴한 것은 신라 황제의 명을 거역한 

0755년 것이라는 죄목을 씌워 참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0755년 신라에서 어의없는 죄목을 씌운 것은 그가 고구려인 출신이었고, 

0755년 이대로 안록산의 반란을 그가 평정할 경우 더욱 더 큰 세력으로 성장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0755년 신라-경덕황제(景德, A.D.742 통치중(재위 742∼765))  

 


  

0756년 1월 안록산은 낙양에서 제위에 올라 연( 燕 )이라 칭한다
0756년 5월 양귀비 자살한다.. 
0756년 6월 장안( =쿠차=서경 ) 점령합니다.




0757년 신라(新羅)의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편(改編)  
0757년 1월 안록산-맏아들인 안경서에게 살해당한다. 
0759년 안녹산의 부장이던 사사명에게 안경서가 살해당한다.

0761년 사사명의 맏아들 사조에게 사사명이 살해당한다.

0761년 ※사사명(史思明)-당나라(=신라군)의 무장으로

0761년 ※755년에서 763년까지 당나라를 뒤흔든 

0761년 ※안사의 난에서 안록산의 부장으로 활약을 했다. ... 

0763년 사사명의 맏아들 사조 자살로 난이 평정된다.




0762년 하자르왕국-세력은 절정에 달했다

0762년 하자르왕국-근본적으로는 투르크족(=돌귈족=고구려의 많은 부족중의 하나 )이다

0762년 하자르왕국-중앙 유라시아의 다른 투르크 제국들과 거의 닮은 점이 없다. 

0762년 하자르왕국-카간이라는 반종교적인 성격의 세속 지배자와 베그라는 족장들이 이끌었다

0762년 하자르왕국-정주적인 생활방식, 도시와 성채의 건설, 

0762년 하자르왕국-대지의 경작, 정원과 포도밭을 

0762년 하자르왕국-일구는 일에 더 몰두했던 것 같다. 

0762년 하자르왕국-무역과 거두어들이는 조공이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하자르 왕국




볼가강(The Volga River) 



0765년 신라인 최우보(崔祐甫)와 옛 고구려인 리정기(李正己) 관계       
0765년 이정기-청주 지배시작
0765년 이정기-신라에 맞서기 시작(~779년)
0765년 이정기-청주에서 운주로 이동
0768년 신라-티벳트 왕조( 토번(吐蕃) 태봉 ) -10만 병력이 섬서(陝西)에 침범하다.          
0771년 신라/성덕대왕신종 만들다. 높이 333㎝, 입지름 227㎝.
0781년 이정기-사망(49세/악성종양)→용교운하 점령실패
0782년 이납-용교운하 점령 성공/제나라건국→이사고→이사도





0786년 압바스왕조5대째(786-809)-공용 문서는 그때까지의 양피지에 
0786년 바꾸고 종이를 채용하고,종이의 수요가 급증한 
0786년 이슬람 사라센 제국(=압바스 왕조)으로는 제지 공장이 차례 차례 만들어지다.
0798년 신라/화엄경 40권번역 출간되다.
0800년 이슬람 -황금 시대(9세기(800년  - 13(12999년)/15 세기(1499년))



0800년 오르파드-파노니아 평야에 말갈.마자르인들을 이끌고 건국하다[헝가리건국]
0800년 바이킹족(고구려 유목민 =흑수말갈족=대인족  )▶중앙아시아에서 발칸반도로 진출하다.
0800년 슬라브족▶발칸반도로 진출 남하하다.
0800년 슬라브족▶비잔틴으로부터 킬릴문자를 받고 정교회로 개종하다.
0800년 슬라브족▶농경을 배우다.
0800년 슬라브족▶우크라이나 키예프를 거점으로 최초의 도시를 건설하시작하다.
0800년 슬라브족▶키예프공국이 슬라브문명의 시초이며 나중에 키예프공국이 발전하면서
0800년 슬라브족▶서쪽으로 폴란드왕조가 형성되고 동쪽으로 러시아왕조가 형성되다.
0800년 마자르족▶슬라브족을 따라 AD9세기에진출하다.
0800년 마자르족▶카톨릭의 영향을 받아 카톨릭왕조를 건설하다.
0800년 카톨릭세력▶슬라브족과 마자르(馬구려)의 발칸반도 진출로 인하여 이탈리아로 이동하다.
0800년 라틴족의왕▶비잔틴 황제에게 반기를 들어 교황을 자초하고 그들은 슬라브의 남하와 
0800년 라틴족의왕▶비잔틴의 압박을 피해 서쪽으로 진출하다
0800년 라틴족▶모든부족이 간것이 아니고 라틴족중에서 카톨릭파들만 서쪽으로 가다.
0800년 라틴족▶카톨릭으로 개종하지않은 라틴족은 루마니아에 남아서 지금의 루마니아와 몰도바어를 상용하는 사람들이 되다.
0800년 라틴족▶서부라틴어파(교황파).동부라틴어파(비잔틴황제파).남부라틴어파(언제이동했는지알수없음)




0819년 신라(장보고)-이사도 격퇴 참여/제나라멸망
0819년 장보고(張保皐, 788년~841년 or 846년)
0819년 본명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이다.





0827년 신라-도선국사 탄생 ( 827∼898 ) [풍수/도선비기]
0830년 발해/선왕(13년)-해북의 여러군을 토벌하고 영토를확장하다.5경15부62주
0832년 신라(新羅) 도둑때가 난무(亂無)하다.                              
0834년 신라-양균송/양구빈(楊救貧)(~900년) [풍수/자북 첨가... 청랑오어(靑囊奧語)현공풍수.천옥경(天玉經) ]
0837년 신라-장보고 우징과 함께 반란한다.
0841년 신라-장보고 암살 사망한다 

 






풍수가 양구빈(834년~900년 생몰연대)


0834-03-08 양구빈-戌((19:00~21;00)에 태어난다
0851-00-00 신라-46대 문성황제(839-857)
0851-00-00 양구빈-두주(竇州)를 떠나, 長安으로 가다. 
0851-00-00 양구빈-과거에 참여하여, 연속 3科에 합격하다.
0851-00-00 양구빈-관직이 금자광록대부의 직책에 임명되다.
0851-00-00 양구빈-황실의 도서관 “경림어고(璟林御庫)”를 관장하다.
0851-00-00 양구빈-풍수학술을 연구하는데 몰두하다.
0857-00-00 신라-47대 헌안황제(839-861)
0861-00-00 신라-48대 경문황제(816-875)
0875-00-00 신라-49대 헌강황제(875-886)

0880-00-00 양균송-황소의난으로 (黃巢義軍) 낙양을 점령하다. 
0880-00-00 헌강황제-모든 관리와 근위군(禁軍)을 이끌고, 서쪽 成都로 도망갔다
0880-00-00 양균송-일찍이 산림에 숨어들어가 중화용맥의 목표를 조사하였다. 
0880-00-00 양균송-마침내 구연한(=유명한 풍수가 )을 개인적으로 풀어주고, 
0880-00-00 양균송-황실 어고의 비밀 서적을 (옷 안에) 감추어 나와 직책을 버리고, 
0880-00-00 양균송-곤륜산을 향하여, 산의 용맥을 답방하러 갔다. 
0880-00-00 양균송-양균송이 곤륜산에서 (우연히) 구천현녀를 만나, 
0880-00-00 양균송-천문지리의 술수를 전수받아, 뒤에 산을 내려와(떠나) 떠돌아 다니면서, 
0880-00-00 양균송-산수(山水)에 전념하여, 이른바 학술을 검증하였다라고 전해진다. 
0880-00-00 양균송-중화용맥의 북용, 중용. 남용이 이어져 감주에 도래하였다.

0881-00-00 신라-이극용부자의 죄를 용서해주고 대신 황소의 토벌을 맡기다. 
0882-00-00 신라-이극용은 2차 조칙을 받들어 아문절도사(雁門節度使)에 임명되다.
0882-00-00 신라-이극용은 근왕이 되어 사타군을 다시 이끌고 남하하여 황소군과 대치하다. 
0883-00-00 신라-황소군을 격파했고, 황소는 장안에서 물러나다.
0884-00-00 신라-이극용은 다시 하동을 남하하여 황소군을 격파하여 최종적으로 황소을 자살로 몰아넣다.
0884-00-00 황소의 난(黃巢-亂) 진압된다.(884년~875년) 


0884-00-00 신라-황소의 군사가 패하다.
0884-00-00 신라-헌강황제가 조정에 돌아온 후, 어고에 비밀리에 숨겨놓은 서적을 조사하다.
0884-00-00 신라-양균송이 풍수의 진귀한 물건을 가지고 달아났음을 발견하고, 마침내 체포 명령서(조서)를 내렸다.
0884-00-00 신라-특히 동평후손리(東平侯孫?)를 파견하여 군사를 이끌고 도로를 따라 탐문하여 붙잡게 하였다. 

0884-00-00 양균송-조정내부를 통하여 알은 후에, 감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0884-00-00 양균송-중앙정부의 통치역량이 미치지 않는 감남산 지역에 몸을 숨기다.
0884-00-00 양균송-한 곳(덩어리)의 길지를 찾을려고, 그의 평생을 이른바 학술과 현지 관찰로 깨닭아, 
0884-00-00 양균송-문장으로 이론을 내세워, 이것을 후세에 전하였다.  

0885-00-00 양균송-우도 숭현리 황단사(于都 崇賢里 黃檀寺)에서 첫 번째 제자 증문천과 방장(방장산)  
0886-00-00 양균송-건화(虔化)의 황피(黃陂)(현)에서 두 번째 제자 료우
0887-00-00 양균송-건주(虔州)의 주여왕호광조(舟汝王戶光稠)에서 할거하면서
0887-00-00 양균송-양구빈은 삼료에서 20여년간 은거하다
0900-00-00 양균송-삼료에서 20여년간 은거하다.(887년~880년) 




바이킹족( =대인족=흑수 말갈족 ) 확장(9세기~11세기)

※노르웨이&스웨덴이 시작점이 아니며 흑해&볼가강이 그 중심지입니다.
※흑해주변과 볼가강에서 확장되어 갔던것이며 나중에 영국땅에까지 상륙하게됩니다.
※하자르 왕국의 영향력과 많이 겹치게 됩니다.



0851년 잉글랜드-데인족(Danes=대인족=흑수말갈족)  정착하기시작하다..
0851년 작제건-사망(787년~857년)
0851년 왕융-사망( 827 ~897년 ) 
0851년 신라-청해진(淸海鎭)을 없애고 지방민(地方民)을 벽골군(碧骨郡=금제金提)으로 옮기다.         
0851년 신라-청해진이 폐지되다.장보고 휘하의 1만명 군대는 벽골군(碧骨郡=금제金提)으로 옮기다





하자르 왕국(하자르 왕국( Maps of the Khazar Kingdom 850년)


하자르 왕국( Maps of the Khazar Kingdom 850년~965년)

1번 하자르 왕국-초기의 영토
2번 하자르 왕국-확장영토 
3번 하자르 왕국-확장영토

○ 빨간색&노랑새 혼합 -사르켈(Sarkel  의미:백색탑 or 백색 요새 ) 
○ 빨간색&노랑새 혼합 -이틸( Atil 의미:큰강 ATIL or ITIL (투크크어 "BIG river"), )-하자르 왕국 수도( 京都 )





A 하자르 왕국 -사르켈(Sarkel  의미:백색탑 ) [현재 : 볼고그라드 Volgograd ]
하자르 왕국 -이틸( Atil or ITIL  의미:큰강 ) [현재 : 아스트라한 astrakhan ]

※둘다 볼가강 주변에 있는 도시입니다.



ㅁ하늘색-볼고그라드(Volgograd  북위48.7도 동경 44.51  )

ㅁ분홍색-아스트라한( Astrakhan Oblast  북위:46.32 , 동경:48.03 )



●참고사항
아스트라한-2002년도의 민족별 인구수 
총인구:1,005,276명(2002)

민족별 분포도
Russian 69.69% 
Kazakh 14.21% • 
Tatar 7.02%
Ukrainian 1.25% Chechen 1.00%  
Azeri 0.82% • Kalmyk 0.71% • Armenian 0.63% •
Nogay 0.45% • Roma 0.43% • Avar 0.42% •
Lezgin 0.36% • Dargin 0.35% • Belarusians 0.26% •
Turkmen 0.21% • Korean 0.21% • Astrakhan Tatar 0.20%
German 0.14% • Kumyks 0.14% • Georgian 0.12% 
Chuvash 0.12% • Turkish 0.11% • Uzbek 0.10% 
Jewish 0.10% • Mordvin 0.09% • Tabasaran 0.08% 

 


아스트라한 일년 기온분포도
최고온도
평균온도
최저온도



1717년 러시아 제국의 구베르니야가 세워졌다.
1717년 구베르나야는 남서부에 위치해 있었는데 또다른 이름은 아스트라한 크라이였다.
1917년 사라토프, 사마라와 스타브로폴에 접하기 시작했다.
1919년 수없이 이곳의 이름이 변했다가  
1957년 드디어 현재 아스트라한 이름으로 정착됐다.


File:Sarkel.jpg

사르켈(Sarkel) (의미:백색탑 or 백색 요새:하자르 군사요새 지역  )  
1930년대에 마하일 아트모노브(Mikhail Artamonov)가 실시한 발굴에서 공중 사진.




키예프 루스족 ( Kievan Rus 900년 )




1번-바랑인(varangian=바이킹=대인족) 의 통제하에 있는 슬라브족의 취락지역 

2번-하자르왕국의 영향력 지역( 950년 )





키예프 루스족 초기 형성 당시의  바랑인(varangian =바이킹=데인족=데인족=황인종 ) 무역 경로 보여주기


※서양관점에서 그렸기 때문에 오류가 많습니다.

※바이킹족은 대인족 즉 흑수 말갈족이라는것임을 염두해둬야 합니다. 
※그러니깐 다시 말하면 발틱해의 스칸디나비아 ( 노르웨이&스웨덴 )반도에서 거주한게 아니라 .
※볼가강(=오리지날 흑룡강) 중심으로 거주했기에 흑수말갈족으로 불리어졌지요.
※흑수(黑水)=흑해 
※위의지도는 많은 오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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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의 7부족 입니다.
속말말갈 (한자 : 粟末靺鞨)  
백산말갈 (한자 : 白山靺鞨)  
우루말갈 (한자 : 虞婁靺鞨)  
불열말갈 (한자 : 拂涅靺鞨)  
철리말갈 (한자 : 鐵利靺鞨)  
월희말갈 (한자 : 越喜靺鞨)  
흑수말갈 (한자 : 黑水靺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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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수(=흑해)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이 지역의 기후가 한냉하여 농사가 어렵고 소와 양을 기르지 못했으나, 
돼지를 많이 길러 가죽은 옷감으로 고기는 양식으로 삼았다. 말갈의 
여러 부족 중 흑수말갈이 가장 강건하여 고구려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고 독립을 유지했습니다.
발해 중기 이후(890년)에는 일시적으로 발해의 통제를 받으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던 발해의 문물을 받아들여 성장과 
발전을 꾀했다. 발해가 멸망한 후에는 생여진(生女眞)으로 불리며 
만주일대( 동북3성이 아님 ...흑해와 커스피해 사이)에서 자치적 생활을 누렸다. 
그후 거란과 고려의 영향 아래 점차 정치적·사회적 발전을 보아 
금나라(金)을 세우는 세력의 일부가 되었다 

 



0871년 신라 황룡사(黃龍寺) 9층탑(九層塔)을 개조하다.     
0871년 황룡사는 신라의 용궁(황궁)의 남쪽에 있었으며, 
0871년 황룡사는 진흥왕 때 완성된 것이고 9층탑은 선덕왕 14년에 완공, 
0871년 황룡사가 완성되고, 76년뒤에 완성한 것이 황룡사 9층탑입니다.
               



   




황룡사 9층탑 위치 [ 현재 運城:黃河大鐵牛(蒲津渡遺址 ]

현재:산시성 운성( 運城 Yuncheng  북위:35.01, 동경:110.98)



황룡사 9층탑 위치 [ 현재 運城:黃河大鐵牛(蒲津渡遺址 ]

현재:산시성 운성( 運城 Yuncheng  +35.01, +110.98)

황하 대철우-산서성 영제시 ( 黃河大鐵牛 / 山西 永濟市  +34.86, +110.45  )
※http://big5.china.com/gate/big5/sx.china.com/2010/0410/105.html

 
 
 



황룡사9층탑의 높이는 225척(80.16m)이었다고 찰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높이라면 요새 아파트 약 30층 높이와 맞먹는다.
찰주본기란 황룡사9층탑의 건립내역을 기록한 글로서 탑의 중앙에 있는
주춧돌이라 할 수 있는 심초석 사리 넣는 구멍에 있던 사리내함의
네 개의 면에 적혀 있던 기록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탑의 높이는
“철반 위가 7보이고, 그 아래가 30보 3척(鐵盤己上高七己下高?步三尺)”주1)
이라고 되어 있다. 철반은 탑의 9층 지붕 위에 세운 철제
세움대의 받침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의 1보는 6척, 1척은 약 35.63cm라고 한다. 
  황룡사9층탑은 세계에서 가장 높았던 목조탑(  ?  )으로 봐도 될 것 같다.




0872년 발해국(渤海國)의 강역(彊域)과 행정구역(行政區域)    
0875년 신라-황소(黃巢)의 난 일어남(875년~884년).


도선국사 초상화

0877년 왕건-송악의 호족 왕륭(王隆,세조)+부인 위숙왕후 한씨(韓氏) 사이에서 태어나다. (877 ~943)
0877년 신라-왕건 탄생 ( 877 -  943 )  
0877년 신라-도선국사( 50세 )
0877년 신라-도선국사...청곡사를 창건하다.풍수지리의 영향력
0877년 신라-황소(黃巢)의 난리와 고변(高騈)  
0882년 신라-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를 세우다. 
0882년 신라-궁예(弓裔)가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다


0887년 신라-진성여왕(眞聖女王)이 즉위한다.
0887년 그러니까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던 이유는 신라 여성들이 특별히 자유롭고 
0887년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골품제라는 신분 제도 안에서 적당한
0887년 자격을 갖춘 인물을 찾다 보니 여왕이 즉위하게 된 것입니다.                                    
0887년 신라(新羅) 제50대 왕인 정강왕(定康王)이 병사한다
0887년 그의 누이 만(蔓)이 제51대 왕위를 올랐다. 곧 진성여왕(眞聖女王)이다.
0887년 그녀에게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정을 통해오던 각간 위홍(魏弘)이라는 대신(大臣)이 있었다. 
0887년 그녀는 일단 여왕(王)이 되자, 위홍을 궁내로 불러들여 대구화상(大矩和尙)과 
0887년  더불어 향가(鄕歌)를 수집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그가 죽자 가소롭게도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0887년 위홍이 죽자 음심(淫心)을 이길 수 없었던 여왕(女王)은 남몰래 미남소년 
0887년 두세명을 궁중으로 끌어들여 옆에 두고 갖은 음란한 짓을 다하였다. 
0887년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아예 국정을 그들에게 맡겨버리기까지 하였다. 
0887년 여왕의 짓거리는 온 나라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했다.

0887년 지방의 토호(土豪)들이 나라에 세금(稅金) 내기를 거부하였고, 
0887년 곧 중앙정부의 부고(府庫)는 텅 비게 되었다. 
0887년 또 이미 부패한 신라 왕실에 반(叛)하는 도적떼가 사방에서 창궐하였다



0916년 거란족-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872-926 )가 여러 부족을 통합한다.
0916년 거란을 건국하였다.

0926년 발해-1월 15일 기마대를 이끌고 침략한 거란족 요 태조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0926년 발해-야율배(耶律倍)가 동생 요골(撓骨)과 선봉이 되어 밤에 홀한성(忽汗城)을 

0926년 발해-포위하자 발해황제 대인선 (=애제(哀帝)이성밖에 나가 항복함으로써 대진국(大震國)은 망했다. 

0926년 발해-발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분명히 거란의 공격입니다. 


0926년 발해-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백두산의 폭발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고, 

0926년 발해-그로 인해 거란의 침공에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데 

0926년 발해-그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낭설입니다. 

0926년 발해-이당시의 백두산은 파미르 산맥이  되기때문에

0926년 발해-대대적인 서양(=영국&미국)&일본&중국공산당의 조작역사에 훌라당 넘어가는소리에 불과합니다.
0926년 발해-파슈톤족은 발해유민입니다.

 
※파슈툰족(Pashtun people)이 제일 많이 사는 나라는 파키스탄으로 파키스탄 전 인구의 약 1.7% 정도산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다수민족이며(34.6%) 주로 아프가니스탄 남동쪽에 많이 산다.
 .




    파슈툰족(Pashtun people)





0926년 발해-발해와 하자르왕국이 멸망한시기는 29년정도 차이가 나는데
0926년 발해-발해국이 멸망하고나서 하자르 왕국이 무너진다? 참이상합니다.
0926년 발해-혹시 발해의 역사를 가지고 하자르왕국을 만든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나는군요
0926년 발해-요나라(=거란족)는 끼예프공국으로 둔갑되었고 말입니다.
0935년 신라멸망(12월)→985년까지 신라의 문화는 남아있음(50년)→1035년(100년)




0936년 왕건-고려건국(~1392년 멸망)
0938년 거란족-요(遼)는 지금의 북경(위치 어딜까?)에 두 번째 수도를 건립했다
0938년 거란족-남쪽의 수도라는 뜻인 남경(南京=연경(燕京))으로 불렀다.
0947년 거란족-국호를 요(遼)로 개칭한다

0965년 끼예프 공국 스뱌토슬라프( Святослав)-하자르 왕국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자  하자르 왕국은 무너졌다






1000년 서유럽의역사가 없다고 한것은 AD11세기 이전에는 없다고 한것은 

1000년 카톨릭세력이 서유럽에서 완전히 자리잡은게 

1000년 AD11세기였다(아나톨리 포멘코)

1000년 라틴족▶도나우강 북쪽 루마니아 일대이다.(라틴족의 고향이며 이탤릭어파의 형성지이다)

1000년 카톨릭▶시초가 언제인지 확실하지않다.

1000년 이슬람세력(돌귈유목민포함)▶아나톨리아 반도를 압박하기 시작하다.

1000년 비잔틴 왕국 ▶이탈리아 로마 거점 카톨릭세력에게 군사지원요청하다.(십바군전쟁의 시작)

 


1066년 노르만인=대인족=흑수말갈=브리야트 말갈=생여진=훈누=흉노(1066~1154)
1066년 이 7왕국 잉글랜드는...이후에 데인족(=대인족)에게 통일됩니다. 
1066년 바이킹을 대인족이라 한답니다...딘(단군,탱그리)을 하늘로 모시는 정확한 몽골인들입니다. 
1066년 훈누라 했기에...우린 흉노로...서역에선 훈,or 노르만으로 불리우던 자들입니다.
1066년 이들이 서역을 다 장악했고...영국도 예외는 아니였으며...
1066년 현재의 지배계층들은 모두 이 노르만계라 하겠습니다
1115년 대인족이 전 유럽을 석권한 시기가...생여진(금나라)의 "대인족"아골타가 
1115년 전 말갈7부를 통일하고 금나라를 세운 시기입니다.(金, 1115년~1234년)
 

ファイル:China 12thcentury.jpg
금나라 영토( 영국.미국.프랑스 .러시아 일본에 의해 날조된 역사 .조작된 역사 )


금나라 영토( 영국.미국.프랑스 .러시아 일본에 의해 날조된 역사 .조작된 역사 )






십자군전쟁(1096년~1270년)

※신성로마제국은 존재한적이 없습니다.
※1125년 요나라 영토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영토가 중복으로 겹치게 되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영국을 제외한 1096년에서부터 요나라(거란족)가 망하는 1125년까지  전부다
※유럽은 요나라 영토내에 있다는점을 염두해둬야 합니다,



1125년 거란족 요(遼,) 멸망한다.
1206년 칭키스칸은 어디에서부터 어디로 침공하였을까?  
1206년 타타르(마르코 폴로는 몽골을 일관되게 타타르라고 부른다.)에서 
1206년 카타이로 침공한 것이다. 현 카자흐스탄의 북부지방에 타타르스크와 
1206년 오이랄스크에 있던 타타르(지금도 모스크바 지역을 타타르공화국이라고 부른다.)에서 
1206년 파미르 서쪽지방을 먼저 장악하고 파미르를 넘어서 신강성 지역으로 침공하였던 것이다. 
1206년 그 목표는 카타이의 수도였던 송도( 宋都 )였던 것이다. 
1206년 그 송도( 宋都 )야말로 천하의 황제가 웅거해 있는 수도(京都)였던 것이다. 
1206년 이 송도를 장악한 뒤에야 탕구트정벌이 가능한 것이다 
1206년 모스크바 지역에 있는 타타르공화국에 있던 몽골족( 말갈족, 마자르족 )을 
1206년 그로부터 만리나 동쪽으로 옮겨서 조작하여 현재의 몽골의 울란바토르로 옮겨 조작한것입니다.  
 

칭기스칸의 동방침공루트


1번 모스크바근처 볼가강(=흑룡강)

2번 카잔

3번 타타르스크

4번 파미르고원

5번 고려 개경(開京)


※타타르스크-러시아의 노보시비르스크(Novosibirsk) 서쪽에 있는 도시.
※노보시비르스크Novosibirsk +55.03 +82.92 
※파르르 산맥Pamir Mountains +38.91 +72.01 
※현재도 타타르 공화국이 존재합니다..
※마르코폴로는 몽골족을 타타르라고 불렀습니다.


1206년 테무진이 칭기스칸에 추대되고 몽골제국을 창건한다.
1215년 칭기스칸이 금나라의 수도 중도를 함락한다.
1218년 몽골이 동진과 합세하여 화주.맹주.순주.덕주네 성을 함락한다.
1224년 몽골에 오고타이 칸국 성립한다(1224년-1310년)
1227년 칭기스칸이 사망한다.. 
1227년 몽골군이 탕구트의 수도 영하를 함락시킨다.
1227년 대도성( 大都城 )-현재 카라샤르(Karasahr  얜치[焉耆])입니다..


A번-파미르Pamir Mountains +38.91 +72.01 
B번-개경 (카이샤르 Karasahr =얜치[焉耆] 좌표+42.01, +86.55 )

※개경이 함락당하여 몽골 대도성이 됩니다.

※몽골이 파미르를 뚫어서 길을 낸 것이 아니다. 
※그 길을 이미 800년 600년 500년전에 법현과 현장과
※고선지가 지나갔던 길인 것이다.
※몽골 전에는 마패를 사용하던 것을 몽골은
※해청패, 금패, 은패를 사용했던 것이 그 차이일 뿐이다.

지금 우리는 그 도로들을 실크로드라고 부른다.
1877년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드 폰 리히트호펜이 이 '
실크로드'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지만,
이 개념은 마르코 폴로가 7페이지에 걸쳐서 설명하는
도로의 개념과는 너무도 다르다. 실크로드는 허구다. 
이 실크로드라는 용어는 약탈과 패권의 관점에서 나왔다.
이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면, 실크로드상의 오아시스 도시들은
역사체로서의 현실(HISTORICAL FACTS)이 역사현실(HISTORY)
밖으로 밀려나 버리고, 대신 천일야화같은 환상적인 '
이야기'(FANTASTIC 'STORY')의 무대로, 신비에 싸인
'비역사적인' 몽환적 존재로 변화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전 세계인은 약탈과 탐험, 낭만과 모험과 침략,
모멸과 조작의 대상으로서만 중앙아시아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에 존재하지 않았던' 중국으로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서유럽으로 혹은 그 반대방향으로 비단 금 유리 약품 향료 불교
네스트리우스교 조로아스터교 서역문화 그리이스양식들이
이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으로까지 보이는 '존재했던'
오아시스 도시들을 중계지로 하여 오고 갔다고 한다.


아래쪽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서 중앙아시아 침략의
기지가 되고, 파미르 서쪽은 러시아가 점령해 들어 오면서,
반만년 천하의 중심이었던 중국(조선의, 구려의, 신라의,
고려의, 근세조선의 중앙 황제직할지, 중원, 중주, 신주,
천조, 천축-중앙아시아(=카스피해를 중심으로)의 수도가
19세기 중엽(1850년  ....1840년 영국과조선의 아편전쟁 )에
서안(西安)으로 옮겨 가면서, 
잠시 권력의 공백이 된 이곳을 마치 지난 5000년동안 동서문명이 
거쳐 지나 다녔던 황무지 사막중의 오아시스 도시라는 무역과
문화의 중계지 역할밖에 못한 듯, 낙타 대상들만 다니는
사막과 천산 파미르를 뚫고 지나가는 길만 존재하는 듯,
떠억하니 실크로드라고 이름붙여 놓았다.


사 실 은 19세기 후반까지, 이 도로들은 다름아닌 황제가도
('IMPERIAL HIGHWAY' ; THE BOOK OF SER MARCOPOLO 2권/HENRY YULE, AMS PRESS,1926 P4 주1
['When Marco leaves the capital, he takes the main road, the "Imperial Highway
," from Peking to Si-ngan fu,']에 나온다.)였다. 

6000년 전부터 서역남로의 최대도시
호탄(화전-화도, 강화도, 부도, 남경)에,
쿠차(Kucha +42.85, +89.52 평양)에, 돈황( (敦煌) 신라 경주 )에,
카라샤르(얜치=개경, 송도( 宋都 )-동방견문록의 캄발룩( Cambaluc )에,
트루판(연경(燕京),북경(北京), 한양(漢陽))에 황제의 도읍을 두고
그 제국의 황제는 그 도로들을 장악하고 지키고
역참과 파발과 전령을 두고 천하를 통치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세계무역을 장악하여, 그 돈줄을 거머쥐었던 것이다.
이 중앙아시아의 도로를 장악하는 자가 천자가 되고 황제가 되고
천하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19세기 후반까지 아직 산업혁명의
근대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구세계(천하)의 권력 물류
문화의 중심은 아직까지 이 황제가도였던 것이다.
우리는 실크로드 대신 황제가도(皇帝街道)라고 불러야 한다.
그래야 역사의 실상이 보일 것이다.


※참고로 스벤 헤딘(Sven Hedin, 1865년~ 1952)
※실크로드의 악마들'의 개척자로서 중앙아시아의 도굴과 탐험의 붐을 일으킨 장본인 
이 탐험여행은 8개월 이상은 걸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먼저 고비사막을 횡단한 우리들은 옛날의 "황제가도"라 불리고 있는
실크로드'를 따라 돌아온다는 것이 우리가 택한 루트였다.' 

1933년~1935년의 3년에 걸친 탐험으로 끝이 났다.
여기서 '옛날의 ''황제가도''라 불리고 있는 실크로드'라는 말을 분석해 보자.
1938년 '실크로드' 초판본이 나오는 때에는 실크로드라고
불리었지만, 옛날에는 황제가도라고 불리었다는 말인가? 

1877년에 실크로드라고 명명되기는 했지만, 아직 사용되지 않았고,
20세기(1900년)에 들어 와서 탐험가, 약탈자, 학자들에게
중앙아시아가 알려지고, 유명해지고,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황제가도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지금은(1938년) 실크로드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그럼, 황제가도라고 불리는 명명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황제가도였던
것은 언제까지였던가? '옛날의' 황제가도란 아주 오랜
옛날이 아니라 '19세기 후반까지의' 황제가도이다.

현재의 서안성과 궁궐이 '경복궁 중건'이라는 이름으로
1865년 4월에 대원군으로 봉작된 지 겨우 1년 만에 착공되는
것을 보면, 바로 그 즈음에 파미르의 서쪽으로 러시아가
장악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막 서안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변변한 궁궐도 하나 없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865년 음력 4월 2일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의 지시로 중건이 시작된다.
※1865년 음력 4월 13일 공역이 시작된다.
※1868년 음력 6월 30일 경복궁 공사를 마쳤다., 
※1868년 음력 7월 2일 국왕과 왕실의 경복궁 이어(移御)가 이루어져 정무를 개시하였다.
※경복궁의 재건을 주도한 흥선 대원군은 권력을 장악하였다. 
※1868년 이시기 일본( 복건성을 중심으로... 에도=남경 )이 메이지유신을 단행하는 그 해였었죠.
※역으로 생각해본다면 1865년 이전에는 서안에 경복궁이 없었다란 말이 됩니다. 

놀라와라! 45년간 실크로드를 가지고 놀았다고 하던
스벤 헤딘은 이 실크로드가 황제가도인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 있었던 것만이 아니라, 그때(1938년)까지
황제가도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가도라 불리고 있는' 실크로드였던 것이다.
자기가 실크로드라는 말을 어떤 이유에 의해서 사용하지만,
사람들은 황제가도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스벤 헤딘만이
아니라 세계의 학계 지식계가 1938년까지 실크로드가 아닌 황제가도로
부르고 있었는데, 아마도 1930년대 어느 시점부터 전세계에서
일제히 실크로드로 부르기로 했다는 인상이 짙다.

※기존에 알던 실크로드는 전부 거짓이란 이야기라고 불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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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1240년 출처-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1240년 몽고-그 뒤 아시아로부터 몽고족이 유럽으로 침략해 들어오자 하자르인들은 

1240년 몽고-지금의 독일과 폴란드 등 동유럽 쪽으로 옮겨갔다. … 

1240년 몽고-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에 250만 명의 유대인이 살게 된 것도 

1240년 몽고-그런 사정에서 비롯됐다. 터키계인 카자르족의 후손인 이들은 아쉬케나짐 유대인들이라 불린다. (143쪽)

1240년 몽고-시오니즘의 주창자들이 허구적인 디아스포라 신화를 만들어 토착민들에게 들이댄 셈이다. (144쪽)




1282년 루돌프 4세-알브레히트와 루돌프에게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를 물려주었다.

1282년 이때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오랜 관계가 시작되었다

1290년 몽골족의 한 공주가 바닷길로 페르시아에 가서 아르군 칸의 왕비가 될 예정이었다.

1290년 마르코폴로가족-공주를 수행하여 페르시아로 가겠다고 제의했다

1290년 쿠빌라이 칸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허락을 내렸다.

1290년 몽고 공주와 마르코폴로-14척(600명) 의 배에 나누어 타고 천주[泉州/복건성] 항구를 떠나 남쪽으로 항해했다.

1290년 천주→참파(=베트남)→말레이 반도→ 수마트라 섬(5개월체류) →니코바르 제도→실론(세일란) 섬

1290년 -인도 서해안→페르시아 남쪽→호르무즈→호라산→타브리즈→트레비존드→솔다니아→콘스탄티노플→베네치아

1291년 아슈케나지 상인집단▶스위스(게르만권)-현재의 수도 베른에 모여

1291년 아슈케나지 상인집단▶자치 보존을 위해 영구 동맹을 맺은 게 스위스 연방의 기원이다.



1300년 소빙기(~1499년)

1300년  이미 아시아문명은 13세기에 온난화를 비롯한 사막화가 일어난 이후에 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1300년 그리고 서유럽의 자본주의 경제는 아슈케나지에 의해 주도되어왔습니다. 

1300년  그 당시 서유럽의 가톨릭사회는 자본주의를 반대해왔습니다. 13세기부터 19세기까진 

1300년 가톨릭세력과 아슈케나지 상인집단세력의 싸움의 역사였습니다. 

1300년 그게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분쟁으로 위장되었지만요 


1300년 프톨레마이오스 지리학 서적발견(고서점에서)-플라트래스

1300년 대포개발(돌을 발사하기 위해 흑색화약을 처음 사용)-베쏠드 슈바르쯔(Bethold Schwarz)

1300년 그전에는 주로 화공품류, 소이제 및 파괴용만으로 흑색화약을 사용하여 왔었다

1300년 템플기사단/이 기사단이 비밀입단식 때 비종교적이며 신을 모독하는 행위를 

1300년 한다는 소문까지 유럽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다.

1300년 몽고-바투무리(배신자)+아슈케나지 상인집단▶폴란드 정착하다.

1300년 아슈케나지 상인집단▶폴란드▶독일▶베니스(상업근거지)▶이탈리아(르네상스)

1300년 아슈케나지 상인집단▶스페인(대항해지원)▶포르투갈(대항해지원)▶기독교 창시▶카톨릭의 탄압

1300년 아슈케나지 상인집단▶스위스(도피처)▶금융국가발달하다.

1300년 아슈케나지 상인집단▶북독일에서 종교개혁(기독교의 근거지)▶네덜란드(황무지개척)▶네덜란드공화국건국

1300년 아슈케나지 상인집단▶바투의 자손 영국왕실(북독일지역 기원)▶영국의 무적함대격파(영국해협)▶토사구팽

1300년 아슈케나지 상인집단▶바투의 자손 영국왕실(북독일 해안지배)+네덜란드+아슈케나지 연합

1300년 오스만세력▶니코폴리스의 전투 헝가리군 무찌르고 발칸 정복완료

1300년 아슈케나지 상인집단▶윌리엄 월레스 체포 처형[ ● 브레이브하트 주인공 ]



1400-03-10  제2차왕자의난(박포의난)

1400-03-10  제2차 왕자의 난. 이방간을 토산에 추방하다

1400-03-10  이방원/마침내 세자로 책봉된 후 그해 11월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이 되었다

1400-00-00  유럽-점성술의 황금 시대였다(~1699년/299년)

1400-00-00  유럽-군주나 귀족은 어느 한 명도 전속 점성가를 두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교황도 점성술을 지지했다(~1699년)

1400-11-25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이 되었다.

1400-00-00  소빙기시대(~1599년)소그드Soghd

1400-00-00  아슈케나지 상인집단▶서유럽의 전통문명에 기생하기시작하다.

1453-00-00  오스만세력▶발칸반도에있던 십자군 잔존세력를 모두 서쪽으로 내쫏다. 

1453-00-00  오스만세력▶오스트리아+이탈리아 침략하다.

1453-00-00  동로마(비잔틴/국교 정교회)제국 멸망(고전그리스어)

1453-00-00  정교회▶인도유럽어족의 전통종교+유대교+불교의 영향을 받았다▶인도유럽어족의 여신숭배와 연관성.

1453-00-00  기독교▶정교회.카톨릭.개신교를 억지로 묶어서 만든것입니다.

1453-00-00  기독교▶유럽문명의 종교를 서술하기 위해서 기독교라는 통일된 단어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1480-00-00  모스크바 공국(公國)▶몽골의 지배하에서 벗어나 독립



1526-08-00  오스만세력▶모하치(Mohacs) 전투/오스트리아와전쟁(~1683-07-00 150년)헝가리를 두고 승패를 겨루었다

1526-00-00  오스만세력▶헝가리를 정복하다. 

1571-00-00  오스만세력▶레판토의 해전(아슈케나지 상인집단의지원)▶이탈리아 침략포기하다.



1600-00-00  북유럽의역사 시작되다.

1600-00-00  영국의 동인도회사 설립. 

1600-00-00  네덜란드-영국섬 남부에 정착하다▶영국섬 남부 켈트족 몰아내다▶월리엄 월리스 저항자

1600-00-00  프랑스-점차간섭하다▶아슈케나지 상인집단 북독일에서 잉글랜드로 근거지를 옮기다▶ 

1600-00-00  아슈케나지 상인집단▶부르봉왕조+합스부르크왕조 멸망시키려 노력하다▶

1602-00-00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설립. 



1776-05-01  바이샤우트(Adam Weishaupt ~1830-11-00)+ 로스차일드-정식으로 일루미나티를 창립( Illuminati )

1776-00-00  자유- 신의 권위에 도전하고 도덕을 무너뜨려 혼란을 일으키는 방종에 가까운 자유

1776-00-00  평등- 왕의 권위에 도전해 혁명을 일으켜 일루미나티가 주도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고

1776-00-00  박애- 일루미나티 조직원 사이의 형제애로 같은 것으로 배신은 곧 죽음을 의미합

1776-00-00  유럽 경제를 움켜쥔 이들 가문은 일루미나티(프리메이슨의 한 조직)의 사상을 받아드리고,

1776-00-00  일루미나티의 창시자 바이샤우트의 후원자가 되어, 세계정복의 공작을 꾸미게 됩니다.

1776-00-00  또한 서서히 강대국으로 발전하고 있는 미국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합니다.

1776-00-00  M.A. 로스차일드는 야콥 시프라는 청년을 관리인으로 미국으로 보내 미국 경제도 장악합니다.

1776-09-00  대륙의회-프란시스매리언에게 대좌임명

1776-09-15  영국군이 맨하탄에 상륙해, 뉴욕시를 점령한다.



1777-03-13  제4회 대륙회의-유럽의 사절단에 대해서 미국 독립 지원의 군을 파견하도록 요청하는 것을 명한다.

1777-04-27  정조(1년)-사도 세자의 존호를 장헌, 수은묘의 봉호를 영우원, 사당을 경모궁이라 하다

1777-06-14  미국-13연방의 성조기가 국기로서 제정된다.

1777-10-17  영국군-사라트가의 전투에서 패배한다. [ 영국의 대부대 항복 ]

1777-11-15  미국 대륙회의-아메리카 합중국의 통치를 정한 연합 규약을 채택한다.(Articles of Confederation)

1777-12-17  프랑스루이 16세-미국이 독립국인 것을 승인한다.


1778-00-00  프랑스-미국과 통상 및 동맹조약을 맺었다.

1778-00-00  이어서 에스파니아(1779), 네덜란드(1780)도 미국에 가담하였다.

1778-00-00  다시 1780년에는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2세가 영국 해군의 무역 방해에 대하여 무장중립를 제창하여

1778-00-00  덴마크, 스웨덴,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등의 지지를 얻었다.

1778-00-00  영국군 Philadelphia 철수



1781-12-31  미국-대륙 회의에서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 북아메리카 은행의 설립이 허가된다.

1781-12-31  미국-아메리카(America) 최초의 은행. 

1782-07-16  일루미나티와 프리메이슨 비밀회담- 동맹체결에 성공했습니다 (월 헬 스바트에서)

1782-00-00  인도차이나-차오 프라야 차크리(라마 1세)가 이끄는 차크리 왕조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1783-00-00  (정조 7) 정약용/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었다.

1783-00-00  (정조 7) 이무렵 이벽(李檗)을 통하여 서양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서양서적을 접했다

1783-02-14  영국-미국에의 적대 중지를 선고한다. 

1783-02-20  미국-영국에의 적대 중지를 선고한다

1783-09-03  파리협약-영국은 최종적으로 미국 독립 인정하다.

1783-09-03  그 즈음 영국은 엄청난 빚더미 위에 올라앉았으며, 경제상황은 파산상태였다

1783-09-03  로스챠일드(Meyer Rothschild)는 자신의 대부금을 되찾기 위해, 영국 중앙은행에 간여해

1783-09-03  이를 인수할 목적으로 이 값비싼 전쟁손실을 최대한 이용했다.

1783-00-00  독립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의회는 이상하게도 '북미 은행'이라는 민간소유의 중앙은행 창설을 허가합니다.

1783-00-00  이는 R. 모리스라는 사람이 정치인들을 매수했기 때문이며, 그는 부정한 방법으로

1783-00-00  자기 자본을 부풀려 대출하고, 화폐를 과도하게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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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82년 끼예프 공국① 제 1 기(882년 -- 980년): 국가의 발생시기 

0882년 끼예프 공국① 올레그(Олег): 882년--912년 

0912년 끼예프 공국② 이고리(Игорь): 912년--945년, 올레그의 사위

0945년 끼예프 공국③ 올가(Ольга) 女公: 945년--962년, 이고리의 딸

0962년 끼예프 공국④ 스뱌토슬라프( Святослав): 962년--972년 ⇒ '大모험의 시대' 


0980년 끼예프 공국② 제 2 기(980년 -- 1054년): 국가기틀 확립과 전성기 

0980년 끼예프 공국⑤ 블라지미르(Владимир) 대공: 980년--1015년 

1019년 끼예프 공국⑥ 야로슬라프(Ярослав): 1019년 -- 1054년

 

1026년 끼예프 공국 영토 분할 통치한다

1036년 끼예프 루시의 공후가 되었다. 

1037년 뻬체네그족을 물리침으로써 뽈로베쯔족(Cuman)이 올 때까지 약 25년간 평화를 유지하게 된다. 

  

1054년 끼예프 공국③ 제 3 기(1054년 -- 1240년): 국가 쇠퇴기 및 멸망 

1061년 러시아인과 접촉·갈등이 시작되어 몽골 침입 때까지 지속한다( 1061~1240 [179년동안])

1132년 므스찌슬라프 사망(블라지미르 모노마흐의 아들) 

1169년 안드레이 보골류프스끼 끼예프찬탈(블라지미르-수즈달로 중심지이동) 

1240년 몽골-따따르의 끼예프 점령 

1240년 몽골-따따르 지배시기(1240-1480) 

1240년 몽골-① 제1기: 1240년 -- 1380년(꿀리꼬보 전투) 

1240년 몽골-② 제2기: 1380년 -- 1480년 

1380년 드미뜨리 돈스꼬이=꿀리꼬보(Куликово) 전투의 승리 

1462년 이반 3세( 1462년~1502년 재위)

1462년 ※짜르'의 칭호와 비잔틴제국( 306년~1453년 )의 쌍독수리 문장을 도입하고 

1462년 ※다른 러시아 공국의 병합으로 전제정권의 틀을 마련하였다. 

1480년 ※몽골과의 주종관계를 공식적으로 청산, 주권국가로서 확립한다.

1480년 이반 3세, 몽골 칸(汗)에 대한 충성 거부한다 

1480년 모스크바 러시아(1480-1613) 

1552년 까잔한국 정복, 

1556년 아스뜨라한국, 

1783년 크림반도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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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지구조선사연구회
글쓴이 : 러브 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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