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 요나라(907-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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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 Park 2019. 2. 1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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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임을 즐기는 거란인들
 
契丹(계단/글단)
Khitan
 

요하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한 유목민족. 동호-선비에서 갈라져 나와 4세기에 등장했으며 중국, 북방, 요동 3자 사이에서 지리멸렬하다가 요나라를 세워 요동과 하북성 일대, 막북을 장악하여 패자로 군림했으며 요 멸망 이후 친척인 몽골에 동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농경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반농반목 정주민인 여진-만주족과는 달리 이들은 유목민이다. 고려와의 오랜 전쟁으로 난폭한 침략자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고 화려한 불교 문화를 꽃피우는 등 고도의 문화를 향유했다. 

4세기경부터 내몽골 일대에 거주했던 몽골계 종족. 역사서로 따져봐도 몽골과 거란은 동족이나 다름없다. 몽골은 실위에서 나왔는데 실위는 동호-선비의 후손이고 거란도 동호-선비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되어 있다. 몽골-만주-화북의 사이에 끼어 있는 위치상 4세기에 데뷔한 이래 몽골의 유연-돌궐과 만주의 고구려 화북의 북위-수, 당에게 지배받았다. 고구려 멸망 이후 위구르와 당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당을 약탈했으며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와는 대립했다.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통일시키고 발해를 멸망시키고 내몽골의 실위, 해를 병합하고 당시 분열되어 있던 몽골 지역의 부족들을 정복하여 초원의 패자가 된다. 그러나 거란의 압제에 저항하여 아골타 아래 일거에 일어난 금나라에게 한 방에 망하고 서역으로 도망가 서요를 세운다. 이후 금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부흥 운동을 몇 번 일으켰으나 모두 망하고 친척인 몽골에 흡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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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성립 이전 거란족의 영역을 대강 나타낸 것(Khitans). 구글에 거란이라고 치면 십중팔구가 요대 영역만 나와서 그 이전의 영역을 나타낸 지도는 찾기 힘들다.

요나라는 지리지를 남겨서 제대로 요나라의 영토를 그리고자 맘 먹으면 못 그릴 것도 없다.

2. 명칭[편집]

고대의 진나라(China), 중세의 선비족(Tabgach)에 이어, 근세 중국의 대명사.

거란족들은 자신들을 거란어로 키탄(Khitan)이라고 불렀다. 키타이(Khitai)[1] 혹은 키단(Kidan)이라고도 한다. 키타이의 경우는 이란식 명칭이다. 그 영향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슬라브계 국가들과 중앙 아시아 국가에서는 중국 혹은 한족을 키타이(Китай)라고 부른다. 위구르어의 히타이(خىتاي)나 포르투갈어의 카타이(Catai), 몽골의 햐타드(Хятад), 카자흐어의 크타이(Қытай) 등이 예이다. 영어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과거 홍콩의 국적 항공사였던 캐세이퍼시픽 항공(國泰航空有限公司, Cathay Pacific Airways Ltd.)의 캐세이(Cathay)는 영어의 고어로 중국을 말하는 또 다른 단어인데, 그 어원은 거란(카라 키탄)에서 온 것이다.

한자로 음차하는 과정에서 契이라는 글자가 사용된다. 契의 현재 발음은 글, 계 등인데, (끽)이라는 형성자(口+契)에서 성부로 쓰인 것으로 미루어 '끽'으로 발음해 '끽단(契丹)'이라는 키탄(Kithan)과 유사한 발음으로 불렸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어에서도 킷탄(契丹きったん)이라는 발음으로 쓰인다. 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한국어 한자 독음은 '계단/글단(契丹)'[2]이라 쓰이고, 세월을 거치면서 계단/글단→글란→그란→거란으로 변화했다. 신채호가 남긴 글만 봐도 거란이 아니라 '글안'으로 적고 있는 게 보인다. 즉, 거란은 한자의 외국식 발음이 아니라 한국 내부에서 변화된 발음이다. 네이버 한자사전 해당 항목에서는 이 단어의 발음을 글안▽이라고 밝히고 있다. 끝의 역삼각형 기호(▽)는 물론 "이 글자(丹;붉을 단)는 원래 이렇게 읽는 글자가 아닌데 이 단어에서만 이렇게 읽는 거임"이라는 뜻이다.

마르코 폴로는 흔히 "동방견문록"으로 번역되는 자신의 책에서, 북중국을 키타이, 남중국을 만지라고 불렀다.

3. 역사[편집]

 

3.1. 기원과 형성[편집]

거란이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소수림왕 8년 (서기 378년) 가을 9월의 기록으로, 이때 거란이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8개의 부락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4세기경 거란은 전연의 영향력 아래 있다가 전연이 중심지를 남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고막해의 영향력하에 있게 되었다. 388년 고막해가 북위에게 토벌당하자, 이후 어정쩡하게 독립하게 되었다. 고막해가 선비족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생각해 족보를 따지면, 거란은 선비족의 별종이라 할 수 있다.
등국 중에 북위의 군대가 크게 깨뜨리자, 마침내 달아나 흩어져 고막해와 나뉘었다. 수십 년이 지나 점차 커져서, 부락이 화룡의 북쪽 수백 리에 있게 되었다.
─ 위서 거란전[3]

그 뒤 나름 세력을 키워 4세기 후반 북위와 대립했으나 압도적인 세력 차로 북위에 복속했고, 이러한 주종 관계는 북제-북주-수-당이 차례로 물려받는다. 일부는 광개토대왕의 거란 토벌 후 고구려에 복속되어 그 번병이 되었다. 고구려가 망하고 세력을 키워 그 후손인 발해와 대립했다. 한편 북방 몽골 방면과의 관계를 살펴보자면, 북방이 유연으로 정리되면서 유연과 대립했고 유연이 쇠퇴할 때는 유연을 공격하여 약화시키기도 하나 돌궐이 등장하며 그에 복속되고 거란과 북방간의 이런 주종 관계는 위구르 시기까지 이어진다. 결론적으로 야율아보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거란은 주변 중원, 막북, 요동 강호들의 샌드위치 신세였다는 것.

7세기경 대하 씨가 거란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대하 씨는 당에 귀부하여 이씨 성을 하사받게 된다. 고구려 멸망 뒤 거란에 대한 당의 지배권은 공고해지는 듯했으나 696년 이진충이 무상가한을 칭하며 독립하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이진충이 죽고 후계자 손만영이 집권한 뒤에야 측천무후는 돌궐의 도움을 받아 거란을 멸망시켰으나, 돌궐과의 동맹에 문제가 생기면서 거란은 돌궐의 지배를 받게 된다. 돌궐이 730년대에 몰락하면서 거란은 다시 당의 영향권에 들어가지만 안록산의 난이 터지면서 거란은 위구르(회흘)에게 복속되게 된다. 이런 상황은 야율아보기 등장 이전까지 계속된다.

3.2. 요나라의 건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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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나라 시절

907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대통합했다.그리고 해와 습, 실위를 정복하고 서하를 복속한 다음에, 발해까지 멸한 뒤 요나라를 건국했다. 요 건국 뒤에도 거란(키타이)이라는 이름은 요와 함께 공식적인 국호로 사용된다.

최종적으로 야율아보기의 요 제국은 영토가 몽골, 만리장성 이남 연운16주, 만주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몽골 고원은 직할 지배가 아닌 간접 지배 중이었고 만주 역시 요동연해주와 부여 지방이 여진족과 발해 유민의 반동으로 지배력이 매우 불안정했다. 그래서 실효적인 지배력이 미친 영토만 따지면 영토가 매우 쪼그라든다(…) 요나라 항목 참조.

몇 번 고려를 침공하기는 했으나 이렇다할 성과는 없었다. 대신 북송을 신나게 뜯어먹긴 했었다. 하지만 거란의 여자, 매 등의 착취로 인해 분개한 여진족이 아골타 아래에 규합하여 요를 멸망시켰다. 결국 1125년 여진의 금나라와 북송의 협공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잔존 세력은 중앙 아시아로 이주해 서요를 세웠다.

재미있는 점은 요하 유역과 하북성 일대에서 웅거하던 요가 망하고 야율대석이 서역으로 이주하여 다시 서요로써 요나라를 이어갔는데도, 천조제 이후 공중 분해된 것처럼 설명되곤 한다는 것. 서요가 망한 뒤에도 일부 유민들은 이란까지 이주해 다시 요를 이어갔다. 얼마안가 또 다시 원한테 쓸리지만. 지못미 이란, 즉 페르시아 남동부 케르만 주에 세웠던 거란족의 국가는 키르만 왕국 혹은 치얼만(중국어로 케르만/키르만을 칭함) 왕조라고 부르며, 후서요(後西遼)라고도 표기한다. 이들은 나중에 몽골 제국에게 흡수되었다. 멸망의 원인은 역시 발해를 완전히 멸망 시키지 못하고, 발해유민들이 세운 정안국 흥료국 그리고 발해유민들을 받은 고려 등 남쪽에 적들이 산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영토는 작지만 북송보다 군사력이 강해 바로 내부사정이 좋아지자 마자 요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흥료국의 경우 왕의 동생인 대연정이 여진의 군사를 이끌고 요를 공격했고 고려 역시 정안국 흥료국 과 연합해 요의 국경을 2차례나 선제공격했다. 이에 빡친 요가 전쟁을 벌였지만 북송의 경우와 달리 군사력이 강했던 정안국 흥료국 고려는 잘버텼다. 이에 장기전과 체계적인 전투계획으로 겨우 정안국과 흥료국을 멸했고 고려를 침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땅만 뜯겼다. 그리고 시시하게 끝났던 북송과의 전투와 달리 이 세 나라와는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다보니 글만 읽을 줄 알면 무관으로 뽑을 정도로 어마무시하게 군사와 무관들이 죽었다. 이 때문에 군사력이 약해진 것. 이에 크리티컬로 발해 출신 장군인 연파가 반란을 일으켜 불에 기름을 부었다.

3.3. 요나라 멸망 이후[편집]

몽골의 발흥과 함께 몽골족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멸망해 사라졌다기보다는 둘 다 동호에서 갈라져나온 민족들인지라 문화적인 차이도 적고, 금나라와 싸울 때부터 뜻을 함께한 몽골에 이들이 딱히 거부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기에 자연스레 동화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특히 금나라가 요나라의 원수이기 때문에 같이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골에 많은 거란인들이 협력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야율초재. 그 외에도 칭기즈 칸의 참모로 활약한 야율아해와 장군으로 활약한 야율독화 형제가 있다.[4] 야율유가라는 거란인도 동요(東遼)라는 국가를 세웠으나 나중에 몽골에 들어가서 몽골의 신하로 활약하기도 했다.

금나라가 멸망한 후 일부 거란인들은 만주에 대요수국을 세우고 할거했다가 칭기즈 칸에게 항복, 복속되었다. 대요수국의 거란 유민들 중 8만 명이 고려로 내려와서 각지에서 고려군과 싸우다가 패배한 끝에 강동성에 웅거했지만 고려-몽골 연합군에 포위되고 항복했다. 어찌 보면 고려와 몽골 제국이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계기를 제공한 셈.

강동성에서 포로로 잡힌 8만의 거란 유민들은 고려에서 도살업을 하거나 갖바치, 고리, 광대 등의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았다. 안 그래도 이런 일들은 천대받은 일들이었고, 거란은 역사적으로도 고려와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유민들이 좋은 대우를 받을 리 만무했다. 이는 조선 시대가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것이 조선 시대의 백정 집단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로 이어진다.

몽골과 중국은 이 종족의 역사적 귀속 여부를 놓고 다투는 중이다. 안습인 점은 거란에 대해 우호적인 여론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한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거란은 그저 오랑캐였다 보니 티베트 문제와 달리 이 문제에는 아무도 관심을 안 가진다. 뭐 어차피 거란과 몽골이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고 몽골도 동계로 여기기 때문에 이 점은 크게 상관없지 싶다.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사는 소수민족인 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후예로 유력하게 추정된다. 2005년 기준으로 중국의 소수 민족(공식적으로 56개로 집계됨.) 중 34번째로 많다. 약 12만 명. 샤머니즘과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 분포 범위도 거란족의 강역과 대강 일치하고 스스로 거란을 계승하는 의식이 있으므로, 이들이 거란족의 후예라고 봐도 무방하다. 만주국 황제이자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선통제의 부인인 완룽이 바로 이 거란족 출신이다. 베이징 등 화북 한족들 역시 거란족과 몽골족의 피가 진하게 섞여 있다. 또한 윈난성(운남성) 보산시에는 거란족 왕실 후예들이 산다고 한다. 서요의 거란 왕족 출신 중 아소루라는 사람이 몽골 제국의 부하가 되어 운남성까지 파병했는데 아소루를 포함한 거란인들이 여기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리국 사람들이 거란인을 학살하기도 했는데 학살을 피하기 위해 야율씨인 사람들은 성씨를 장씨, 뤼씨, 화씨, 양씨 등으로도 바꾸어서 살아남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그곳 마을에는 아소루의 무덤을 포함하여, 거란 왕족들을 기리는 사당과 족보도 있다고 한다. 사당에는 야율(耶律)이라고 쓰인 간판들이 있다고 한다.

4. 고려의 거란인들[편집]

고려 시대 남경, 즉 현재의 서울은 고려-거란 전쟁 때 항복한 거란족 포로를 수용하던 곳이 있었다. 왕이 남경을 방문했을 때 왕을 맞이하는 거란인들이 거란 가무를 추고 거란 악기를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거란 포로들 10명 중 1명은 기술자들이었는데 고려 조정은 이들을 옷과 그릇을 만드는 일에 종사케 하여 고려의 제조기술이 더욱 정교해졌다고 적혀 있다.

요나라가 멸망할 때 일부 거란인들이 고려로 망명해오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려로 동화되었는데 일부는 무관등으로 등용되기도 했다. 병든 아버지에게 자신의 살을 잘라 먹여 명종에게 상을 받은 거란인 무관(산원동정[5]) 위초(尉貂)의 효행이 고려사 열전 효우편에 나온다.

고종 때 몽골에 쫓긴 거란 유민들이 대거 고려로 침공해오기도 했는데 토벌된 뒤 고려의 하층민으로 편입되었다.

5.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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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리를 몽땅 밀어버리고 주변 머리만 남겨놓는 파격적인 헤어스타일 차은택 을 가진 민족이었다. 이것도 일종의 변발이다.

이들이 자신들이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막상 살펴보면 상당히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고려로부터 고구려 계승권을 따내러 왔다고 알려진 서희의 담판도 막상 담판에서 거란이 고구려 계승권을 내세우는 부분을 보면 상당히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인다. 예를 들자면 거란은 그냥 "우리가 고구려 요동 땅을 점령했으니 고구려 땅은 우리 땅이다, 니들은 신라에서 나왔잖냐"[6] 라는 정도로 하고 마는데 고려는 우리가 고구려를 계승해서 국호도 고려로 했고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서경) 니들 논리대로라면 동경(요양)은 우리 땅 아니냐고 하는 식. 요사에서 기자의 팔조금법 운운하며 고조선을 계승하는 듯한 뉘앙스를 품기기도 했는데[7] 그냥 단순한 지역의 내력 소개일 수도 있다. 

성에 은근 개방적이었는지 춘화도 남아있다 거란 춘화. 거란 여성의 헤어스타일을 볼 수 있다. 해당 자료는 삭제되었다.

6. 관련 항목[편집]


[1]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이나, 로버트 E 하워드의 코난 사가에서도 동방의 부족을 가리키는 말로 키타이와 그 칸의 이야기는 가끔씩 나온다.[2] 좀 옛날에 나온 무협물이나 중국 사극을 보면 역자들이 생각없이 계단족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3] 登國中、國軍大破之、遂逃迸與庫莫奚分背。經數十年、稍滋蔓、有部落於和龍之北數百里。[4] 이 두 형제는 칭기즈칸이 초원 통일 전쟁부터 칭기즈칸을 보좌하며 서방정벌까지 나섰다. 그 유명한 발주나의 맹약에도 참가한 인물들이다.[5] 정 8품에 해당하는 무관.[6] 이후에도 요사에서 고려를 진변(진한과 변한)이나 "동한"으로 표기하는 등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계자라고 인식하는 듯한 기록이 등장한다. 그런데 어쩔 때에는 고구려라는 표기가 등장한다(...).[7] 요(遼)는 본래 조선의 옛 땅이다. 기자(箕子) 8조의 가르침이 풍속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