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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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 Park 2019. 2. 19. 12:28

 

 
 
 
 


선비족들의 생활상. 

1. 개요2. 상세3. 한국과의 관계
3.1. 중기 부여-고구려의 주적3.2. 의외로 부여·고구려와 밀접한 사이?
4. 선비족 주요 집단5. 선비족 관련 집단6. 선비족 소속 인물7. 대중매체 선비족 출연

 

1. 개요

鮮卑族(중국어: 鮮卑, 병음: xiānbēi, 상고한어: *S[a]r-pe[1])

선비족은 몽골 고원 먼 동쪽의 남만주 지역에서 살던 민족이다. 동호의 후예로 몽골거란족의 친척뻘쯤 된다. 흉노족보다 강성했으나 한동안 흉노족에 복속되어있다 흉노족이 멸망한 후 다시 독립하였다.

선비족의 어원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는데, 사서에 나타나는 어원에 대한 설 중 하나는 선비족이 선비산에 숨어들어 살고 있어서 선비족이라고 불렸다는 말이다.

2. 상세

고대에는 진나라(Chin)가, 근세에는 거란(Cathay)이 서양에서 중국을 대표했다면, 중세 서양에선 선비가 중국을 대표했다. 타브가치(Tabgach)는 고어로 중국을 말하는 또 다른 단어인데, 그 어원은 선비족의 부족 중 하나인 탁발부(拓跋氏)에서 온 것이다.[2] 참고로 돌궐 또한 당을 타브가치라 불렀다.

선비라는 이름은 동호 흉노에게 멸망당한 뒤에 살아남은 동호의 일파 중 선비산으로 들어간 무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현재 알려진 대선비산의 위치는 대흥안령 북부의 알선동이라고 하는데, 대선비산은 지금의 하얼빈 근처에 있는 산의 명칭으로서 고대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대선비산(大鮮卑山)이라는 명칭이 청, 만주족이 만주원류고가 쓰여질 때 나타난 명칭으로 보아 후대에 붙여진 이름의 산으로 보인다. 참고로 동호의 다른 일파 중 대흥안령 남단의 오환산으로 들어간 무리가 바로 오환족이다.

처음에는 후에 거란족의 근거지가 되는 시라무렌 강 유역에서 흉노의 피지배 민족으로 지내다가 흉노가 남북으로 나뉘어졌을때 북흉노가 후한에게 깨지자 몽골 지역을 중심으로 번영하였다. 

중국 삼국시대를 통일한 서진 막장테크를 타자 땅을 빼앗기 위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오호십육국시대남북조시대의 혼란을 가져온 장본인.

오호십육국시대에 중원에 뛰어들어 많은 왕조를 세웠다. 이 시대의 북방민족 왕조를 침투왕조라고 부르는데, 후에 등장하는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의 정복왕조와는 달리 아직 문화적 기반이 약해서 한족의 문화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며 동화되어갔다. 그리고 이 침투왕조에서 두드러진 민족이 선비족이었다. 특히 유명한 선비족 왕조로는 모용부(慕容部)의 모용황이 세운 정복국가 전연, 모용수가 세운 후연과 탁발부(拓跋部)가 세우고 균전제를 실시했던 효문제가 집권했던 북위가 있다. 북위는 우문씨의 북주와 고씨의 북제로 갈라졌으나 결국 북주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점점 한족에 동화되어 가다가 수나라, 당나라가 세워질 때 중국역사에서 소멸한다. 하지만 황실 문화나 개방적인 국가 성향은 당나라까지 이어진다. 당장 수의 황족 양씨와 당의 황족 이씨부터가 한화된 선비족, 혹은 선비족의 혼혈이었으며[3] 북위의 황족 탁발씨, 연의 모용씨, 독고씨, "우문"씨는 북주의 황가인데, 죄다 선비족의 후예라고 보면 되겠다.

다만 고구려 전쟁의 우문술 등은 원래 노예 출신인데 수문제가 우문씨를 몰살한 후, 귀족인 우문의 성을 훔쳐 사용한 셈으로 혈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선비족 혹은 실위족의 한갈래가 남만주에 정착하면서 생겼다고 추정되는 시버족이 있지만, 시버족은 만주족과 섞이면서 퉁구스화가 진행되었다. 그래서 지금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 남아있는 약 17만 명 가량의 시버족들이 사용하는 시버어는 만주어 계통의 일종이다.

모용부에서 갈라져 나온 유목민족 토욕혼(吐谷渾)의 후예 투족(土族)-몽구오르인-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현존하는 몽골계 민족이다. 여기서 선비족이 몽골계란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투족은 티베트 계열의 강족(羌族. 삼국지에 이민족으로 등장하는 그 강족)과 혼혈이 일어났다.

3. 한국과의 관계

 

3.1. 중기 부여-고구려의 주적

국내 역사에는 고구려와 부여에 관련된 기사에서 자주 찾아볼수 있다. 3세기경 부여를 공격해 많은 피해를 입혔다. 부여 인구가 8만 호, 40만 명이었는데 그중 5만 명을 끌고가기까지 했다. 특히 전연은 당시 고국원왕이 재위 중이던 고구려를 공격해서 수도 환도성을 함락시켰고,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능묘를 파해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후 수세에 몰린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시기에 이르러서야 이들의 후신인 후연을 밀어내고 요동을 정복했다. 또한 후주의 무제와 전쟁을 치러 온달이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후 고구려는 먼 선비족 혼혈 출신인 수당제국이랑 나라의 존망을 건 대전쟁을 치르게 된다.

3.2. 의외로 부여·고구려와 밀접한 사이?

국내에서 선비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 계열의 집단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다소 멸칭으로써 인식되기 마련이다. 역사 기록상으로는 그럴 수 있는데, 다만 문화사적으로는 다소 이야기가 다르다. 초기 부여와 관련된 유적들이 중국 특유의 다소 대국적인 마인드로 보고서가 상세하지 않다는 함정이 있지만 어쨌거나 중국 지린성 유수시 노하심촌의 노하심 고분군의 발굴조사 내용을 보면 선비족과의 관련성이 매우 높다. 동북지역, 내몽골자치구 동북쪽에서 발원한 선비[4]들과 관련된 무덤들의 장법(葬法)상의 특징은 사다리꼴형태의 결구된 목곽묘를 채용한다는 점인데, 유수 노하심 고분군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또한 피장자의 머리쪽에 동물뼈를 놓는 선비계열 무덤의 장례 풍습이 마찬가지로 노하심 고분군에서도 나타나며, 특히 선비족의 아이덴티티를 표상하는 유물─조개로 만든 돈(?), 특유의 그물형태의 청동 방울등의 청동 유물 구성, 동물문양의 장식, 꼬아만든 귀걸이 등이 유수 노하심 고분군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추가적인 해석과 분석을 요하는 부분일 수 있겠지만 어찌되었건 선비족과 초기 부여의 관계를 다각적으로 봐야하지 마냥 적대적이라고 볼 순 없다.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가 그러하듯, 위의 밀접한 관계는 중기에 가서도 비슷하다. 위의 서술된 내용과는 다소 상반될 수도 있지만 한국의 삼국시대 무렵에 건국된 선비계열의 몇몇 국가들은 고구려와 역사적으로 그렇게까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특히 북위 같은 경우에는 효문제의 문소황후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고구려인 출신이기도 하듯이 고구려와 사이가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5] 또 북연을 보더라도 선비족 계열이되 고구려 출신이 황제가 된 혜의제 고운의 케이스도 있는데 북연은 줄곧 고구려와의 관계 속에서 역사가 진행된다.

 

고고학적, 문화사적으로도 3~5세기 고구려의 유물들은 선비 계통 또는 선비와 관련된 것들이 매우 많다. 기와의 끝부분 장식인 와당인 권운문 와당과 연화문 와당의 기원을 북위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삼연계 유적인 랴오닝성 북표현 라마동 고분군의 출토품들에서도 각종 마구(馬具)의 갖춤새들이 비슷하며, 특히 딸랑거리는(...) 계통의 장식류들, 흔히 보요장식(步搖粧飾)이라고 지칭되는 금공품의 장식들 또한 선비와의 관련성이 돋보이는 것들이다.[6] 소위 삼연계 대장식구(허리띠 장식) 또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유물로써 한반도와 동북지방에 널리 확인된다. 이상의 자료들이 간단히 서술되어 있는 블로그를 참고바람.

정리하자면 꼭 민족집단의 피아식별이 세부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양분되어 있지 않고 또한 선비와 한반도와 그 북부의 역사상의 국가들이 무수한 인적, 물적 교류가 있어왔다는 것이다. 특히 선비는 아래 항목에 있듯이 다양한 계열로 나뉘어져 있어서 각각 이해관계가 복잡했을 수 있다.[7] 당장 같은 민족일지라도 서로 치고 박고 싸우며, 다른 민족일지라고 하더라도 섞여 나중에 하나가 되곤 한다는 점에서 "선비= 아 그 나쁜 놈들?" 이라는 수식으로만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4. 선비족 주요 집단

  • 모용부(慕容部) - 요하 유역 - 전연후연, 서연, 남연, 토욕혼

  • 우문부(宇文部) - 시라무렌 유역 (흉노+선비) - 북주

  • 하란부(賀蘭部) - 오호십육국시대 때 대나라에 복속해 탁발씨의 외척이 되었으며, 대나라가 멸망한 후에 탁발규를 추대해 북위를 건국하게 했다.

  • 탁발부(拓跋部) - 음산산맥 동부 일대 (선비+흉노) - 대, 북위(후일 원元씨로 개명.)

  • 독발부(禿髮部) - 하서 인근 (선비+흉노+강·저)

  • 걸복부(乞伏部 혹은 흘복부로 읽음) - 농서 인근 (칙륵+선비+강·저) - 서진(西秦)

 

5. 선비족 관련 집단

  • 독고부(獨孤部) - 흉노족(남흉노)을 기반으로 선비족(탁발부)과 동화

  • 철불부(鐵弗部) - 흉노족(남흉노)을 기반으로 선비족(탁발부)과 동화

  • 유연(柔然) - 선비족 탁발부에 부속되어 있다가 이후 분화

  • 수나라&당나라 - 중국 통일 왕조로 취급되지만 황실가문과 지배층은 한족과 선비족의 혼혈 집단(관롱집단)에서 출발했다.

 

6. 선비족 소속 인물

선비족이 세운 국가 또는 서진 이후의 선비족 소속 부족 계열은 제외.

  • 가비능 - 후한 말 안으로는 선비족을 규합하고, 밖으로는 제갈량의 북벌에 호응해서 위나라에 대항하였다.

  • 구륜(丘倫) - 선비족의 대인. 109년 9월에 무하, 남흉노의 골도후 등과 함께 7천여 기병을 이끌고 오원을 노략질해 고거곡에서 한나라의 군사를 격파했으며, 겨울 11월에 하희, 방웅, 경기 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방웅, 경기의 공격으로 흉노의 욱건일축왕이 격파되자 철수했다.

  • 곡곡제(斛穀提) - 선비족의 인물. 343년에 후조의 석선의 공격을 받아 대파당해 3만 명이 죽는 피해를 입었다.

  • 단석괴 - 선비족을 통일하고 북흉노를 중앙아시아로 쫓아냈으며 서쪽으로는 신장, 동쪽으로는 요동에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선비족의 영웅.

  • 목환진(木丸津), 소희련(素喜連) - 요동의 선비족 인물. 309년에 요동태수 방본의 습격으로 동이교위 이진이 죽자 이진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여러 현을 공격해 함락했으며, 봉석이 화해를 요청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311년에 모용한의 공격을 받아 참수되었고 이들의 무리는 모두 모용외에게 병합되었다.

  • 몰혁간(沒奕干) - 선비족의 인물. 360년 겨울 10월에 독고부와 함게 수만 명의 무리를 인솔해 전진에 항복했다.

  • 연려양(燕荔陽) - 선비족의 대인. 107년에 한나라의 조정에 와서 조현했고 태후로부터 왕의 인수, 붉은 수레, 삼가(세 필의 말이 끄는 수레) 등을 받았고 이어서 오환교위가 거주하는 영성 아래에 사는 것, 호족과의 무역 개통, 남, 북 양부에 귀부한 인질이 머무는 관사를 건축하는 것이 이루게 하고 선비 부족의 읍락 120부가 각기 인질을 보냈다.

  • 연휴(連休) - 요서의 선비족 인물. 117년에 한나라를 공격했다가 오환족의 대인인 어질거의 공격으로 격파되어 1천 3백 명이 죽는 피해를 입었다.

  • 오륜(烏倫) - 선비족의 요서 대인. 120년에 무리들을 이끌고 등준에게 항복했다.

  • 육축연(陸逐延) - 선비족의 인물로 308년에 전한에게 항복했다.

  • 화련

 

7. 대중매체 선비족 출연

 

[1] 백스터-사가르(Baxter-Sagart) 음운체계에 따른 추정음.[2] 선비족의 탁발부가 세운 북위(北魏)는 한때 북중국을 제패했으며, 북위에서 갈라져나온 북주(北周)가 훗날 수나라로 이어져 위진남북조시대의 혼란기를 정리하고 중국을 통일했다.[3] 그래서 돌궐이 당을 타브가치라 불렀다.[4] 예를 들자면 서차구 고분군, 훙륭산 고분군, 완공 고분, 찰뢰락이 고분군(내몽고에 있어서 음차된 표현이다.) 등이 있다.[5] 물론 고구려가 그 시절 강성한 탓도 있을 것이다.[6] 이것이 나중에 또 신라와도 관련이 생긴다.[7] 선비라고 묶어서 치기에는 모용, 탁발, 단 등의 여러 지파로 나뉘어있을 뿐더러 그나마 연맹왕국의 형태라도 부족들이 함께 움직인 부여와는 달리 정말로 남남이거나 아예 남만도 못한 원수지간인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선비 지파 중 일부는 고구려나 부여에 흡수되기도 했지만 강성 독립세력의 경우는 고구려나 부여에게 위협이 되기도 한 것이다.[8] 모용외는 꽤 한성질 하기는 했어도 나름 유학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김진명의 소설에서는 본능에 의존하는 야만인 우두머리 정도로 묘사된다. 제법 비범하고 카리스마적인 마초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실제 모용외와는 매우 다르다. 모용황은 한술 더떠서 모용외가 천민 여자를 범하여 얻은 사생아이자 싸이코패스적인 성격의 폭군으로 그려진다. 실제 모용황은 모용외가 단부의 공주와 혼인하여 얻은 적자 출신으로, 그 때문에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할 수 있었으며 아버지 못잖은 교양을 갖춘 사람이었다.
자료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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