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국·타밀·스리랑카

<펌> 탐라국 - 나무위키

Chung Park 2019. 5. 23.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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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 
耽羅
파일:20120905204030!Tamna.png
위치
성주청 (현 제주시 일대)
정치 체제
국가 원수
군장    성주
주요 군주
1대 고을나왕[3]
43대 경직왕 
44대 고민왕 
45대 자견왕
고(高)[4][5]
탐라어
제주 토착 신앙, 불교
주요 사건
498년 백제 예속
662년 신라 귀속 
938년 성주제 시작
1105년 탐라군으로 개칭
1273년 , 탐라 총관부 설치
1290년 탐라 총관부 폐지
1294년 명칭 '제주' 명명
1402년 성주제 폐지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현재 국가

1. 개요2. 명칭3. 역사4. 역대 군주
4.1. 역대 성주 / 왕자
5. 여담6. 제 2의 탐라국?

1. 개요

파일:external/www.jemin.com/380782_120292_3459.jpg
18세기에 만들어진 <탐라지도병서>

제주도의 옛 명칭, 그리고 그곳에 존재했던 국가의 이름. 제주도가 한국령인만큼 이 나라의 역사도 한국사에 포함되어야 마땅하지만 소외되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약 12세기까지 독립 상태를 유지했으며,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탐라'라는 이름은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탐라국의 주민인 제주 원주민, 즉 탐라인은 탐라가 있던 당시 육지의 한민족계와 유사한 혈통이었다. 물론 현대의 중국인이나 일본인 같이 갭이 큰 이민족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애초부터 한반도에 공존한 고대 국가인 고구려, 백제, 신라 등도 서로 말은 통할지언정 서로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고구려인, 백제인이 있듯이 탐라인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말하자면 본토의 사람들과는 고구려-백제의 관계와 비슷한 수준의 형제뻘인 관계 정도. 그리고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본토와는 차별되는 문화가 발전해 왔고, 언어적으로도 차이가 난다. 그러니까 한국계 혈통이긴 하지만 한국인은 아닌 탐라인이라는 것. 오키나와의 류큐인도 일본인과 형제 뻘인 민족이지만 야마토 민족은 아니며 일본 본토에 그닥 동질성을 느끼지 않는데 이와 비슷하다(게다가 오키나와는 가까운 일본령인 큐슈 섬과 한참 떨어져 있다). 차이점은 복속의 역사가 더 긴 탐라 쪽이 더 본토에 동화되었다는 정도. 오키나와는 현재도 일본 본토랑 이질적이다.

탐라인이 한국과 동화한 건 본토에서의 중앙 집권 통치가 굳건해진 조선 왕조부터로, 한반도 본토와 같은 목, 군, 현 단위 행정구역이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한반도계 국가의 관리를 받는다.

2. 명칭

명칭에 대해 '탐'은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다. 신뢰가 떨어지는[7] 제주 고씨 문중 탐라국 왕세기에 따르면 고을나의 15대손인 고후 형제가 기원전 53년에 조공할 때 혹은문무왕 때 조공하면서 탐진(耽津 : 지금의 전라남도 강진군)의 '탐'을 따와 붙은 것이라는 설이 있다. 혹은 강진이 백제 도무군의 도강과 동음현의 탐진을 따서 강진이 되었고, 이후 다시 신라 때 바뀌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정작 탐진도 원래 강진이었다가 탐라 + 강진으로 759년 경덕왕 때의 지방 명칭 변경 때, 혹은 문무왕 때 고후 형제가 탐라에서 조공할 때, 탐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말 그대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식의 논쟁. 여하간 탐진의 탐은 둥그렇다는 뜻이다. 아예 처음부터 탐라 혹은 탁라(托羅)였다는 기록도 있었다.

탐라의 다른 표기인 섭라, 탐모라, 담모라 등을 유추하여 '섬'의 음차 표기가 아닐까 하는 가설이 있다. "라"는 만주, 한반도 많은 초기 소국들이 그러하듯, 넓은 들이나 지역을 뜻하는 '나라'이다. 즉, 이 가설을 따른다면 '탐라'는 말 그대로 '섬나라'가 되는 셈이다. ㅅ이 어떻게 ㅌ이 되느냐 의아할 수도 있으나, 표음 문자가 없던 시기이고, 문자로 정형화되지 않은 시기라서 구두로만 전해지는 발음은 변형이 쉽게 일어난다. '조선'의 옛 표기가 '됴션'이었던 것을 상기해 보면 이해가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라'는 신라에 입조할 때 당시 왕이 붙여준 것으로 의견이 대충 일치한다.[8]

제주란 건널 제(濟) 자를 쓰는데, 고려 무렵에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탐라와 제주란 이름은 조선 시대까지는 어느 정도 혼용되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제주 목사 등이 편찬한 탐라순력도 등을 보면 제주도 섬 자체는 탐라, 제주목(현 제주시) 지방은 제주라 칭하는 형태를 찾을 수 있다.

고대 일본에서는 度羅(トラ, 토라)라는 명칭도 사용했다. 전통 궁중 음악 가가쿠의 탐라 음악이 토라가쿠(度羅楽)이다.

3. 역사

3.1. 신화 시대

개척 설화로서 '삼을나'가 유명한데, 타 지역과 다른 3성(三姓) 신화의 형태이다. 이에 따르면 태고에 양을나(良乙那)[9],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라고 하는 세 신이 한라산 북쪽 모흥혈(毛興穴, 오늘날 삼성혈)이라는 땅에서 솟아 나와[10][11][12] 사냥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벽랑국(碧浪國)[13]에서 들어온 세 공주를 아내로 맞아 농사를 짓고 소와 말을 기르며 살면서 제주도의 성씨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신화 형태상 고구려, 백제와 동계인 부여계 신화의 영향이 있다고도 한다. 또, 성씨가 양씨, 고씨, 부씨이기 때문에 양씨는 양맥족이, 고씨는 고구려계가, 부씨는 부여계가 남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탐라국 왕세기에 따르면 무려 기원전 2337년으로 단군조선보다 빠른 건국이라지만 신뢰하기는 어렵다. 이때 세 씨족 사회가 뭉쳐 고씨가 왕이 된 건 인간 세상이 생긴 후 900년 뒤라는 기록도 있다.

3.2. 삼국시대

탐라국이 본격적으로 사서에 등장하기 이전에, 위서 오환 선비 동이전에 주호라는 세력이 등장한다. 정황상 이들이 고대에 탐라를 지배한 세력으로 추정된다.

본토의 국가에 복속된 것은 백제 근초고왕 대라는 설이 있었으나 영산강 인근의 독자적인 문화권이 확인되어 나가면서 4세기 ~ 5세기 백제의 남방 진출에 대한 논란이 커졌다. 완전히 복속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동성왕 때인 498년이다. 한편 중국 측 기록인 수서 백제전에는 '탐모라(耽牟羅)'가 등장하는데 백제의 부용국이었다고 한다.[14]
夏四月 耽羅國獻方物 王喜 拜使者爲恩率
여름 4월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왕이 기뻐하여 그 사신을 은솔로 임명하였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문주왕 2년(476년). 한국 사서 중 탐라국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단이다.[15]

2년 (508년) 겨울 12월 : 남해의 탐라인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교통하였다,

《일본서기》 권17 계체기

平陳之歲, 戰船漂至海東耽牟羅國. 其船得還, 經于百濟, 昌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賀平陳. … (중략) … 其南, 海行三月有耽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麞鹿, 附庸於百濟. 
을 평정하던 해에, 군선이 표류하여 바다 동쪽의 탐모라국에 닿았다. 그 배가 돌아올 때 백제를 경유하여 가게 되었는데, 창(위덕왕)이 이 배를 후하게 지원하여 보내고, 사신을 같이 파견하여 진을 평정한 것을 기리는 표를 올렸다. … (중략) … 그(백제) 남쪽에 바다로 3달을 가면 탐모라국이 있는데, 남북으로 1000여 리이고 동서로 수백 리이다. 제주도는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은데... 게다가 1천리면 한반도 남북단 거리의 1/3이나 된다. 대체 어디를 보고 적은 거냐? [16] [17] 이러니까 환빠들이 설치지. 토산물로 노루, 사슴이 많이 나고 백제에 부용해 있다.

《수서》 백제전

신라가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울 때의 아홉 나라(九韓, 구한)에도 탁라(托羅)가 들어간다. 이외의 8국은 (倭), 중화(中華), 오월(吳越), 응유(鷹遊, 백제로 추정), 말갈, 단국(丹國, 거란), 여적(女狄, 여진족)이때 여진은 말갈이 아니였나? 근데 명칭을 해석하면 북방에 사는 여자 오랑캐, 동북아판 아마조네스, (濊貊, 고구려로 보임)이다. 구한(九韓)이라고는 하나 전혀 삼한의 범주 같은 것과는 상관 없고 그냥 주변국 다 싸잡아넣은 것.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18]을 참조했을때 백제가 복속한 이후 백제의 관직을 받은 것으로 확인 되며, 왕자의 존재도 확인된다.

고고학적으로는 한반도에서 송국리형의 문화상이 청동기 중기 이후로 발현한 이래 가장 오래도록 송국리유형의 주거지와 문화를 유지하는 곳이 바로 제주도, 즉 탐라이기도 하다. 5~6세기가 되면서부터 백제나 신라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정제된 기법으로 만들어진 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일종의 해상문화지체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3.3. 남북국시대

백제가 멸망한 직후인 662년 탐라국주 좌평[19] 도동음률(徒冬音律) 또는 탐라국왕 유리도라(儒李都羅)가 신라에 항복하여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20]도동음률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에서, 유리도라라는 이름은 신당서와 책부원귀(冊府元龜)에서 등장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나당전쟁이 끝나고 3년 뒤인 679년에는 다시 한 번 신라가 탐라국을 경략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서 662년의 항복은 형식적인 것이고 한반도의 정리가 끝난 679년에 신라가 여유가 생긴 뒤 본격적으로 속국화했다는 주장도 있다. 662년의 신라는 백제 부흥군 상대하랴, 고구려 상대하랴, 그리고 곧 나당전쟁 준비하랴 바빴기 때문에 탐라에 신경 쓸 여지가 전혀 없었다. 일본 쪽 기록에서는 백제 멸망 직후인 661년을 처음으로 이후 수 차례 탐라가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등 백제가 붕괴한 이후 탐라국도 나름대로 여기저기 활로를 모색한 흔적이 보인다. 탐라와 일본의 교류는 693년을 마지막으로 끝나고 이후로는 탐라와 연락할 일이 생겨도 직접 하지 않고 신라 조정을 통하는 식으로 바뀐다.

이후 탐라국은 892년 육지에서 후삼국시대가 개막할 때까지 통일신라에 정기적으로 조공하였다. 보덕국이나 우산국처럼 일종의 신라의 번국이 된 것인데, 속국이지만 일단 독립국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어서, 당나라에 조천사를 보내거나 일본에서는 견탐라사(遣耽羅使)가 잠깐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측도 탐라가 신라의 속국인 것을 인지하고 있어서, 속일본기 기록에서는 778년 일본의 견당사가 탐라 주민들에게 억류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21] 779년 신라에 견신라사를 보내 탐라에 억류된 우나카미노 미카리(海上眞人三狩) 등을 빼내 일본으로 귀국시킨다. 즉 탐라국은 별도의 국가지만 신라의 제어를 받는 상태였던 것이다.

신문왕 4년(684)에는 고지창(髙支昌)을 신라에 보내 설총 이두문자를 도입했다고 한다. 김헌창의 난 (822)때는 신라 귀족들 일부가 탐라 땅으로 대피하기도 했다.

3.4. 고려시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2년여가 지난 938년 탐라는 고려에 굴복하고 태자 고말로를 보내 입조하였으며 이때부터는 왕이 아니라 성주(星主)라고 불렸다.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 耽羅志≫에 “신라 때 고후(高厚)·고청(高淸) 및 셋째가 바다를 건너와서 조공하니 왕이 기뻐해 작호를 주었는데, 고후에게는 성주, 고청에게는 왕자(王子), 셋째에게는 도내(徒內)라 하고 국호를 주어 탐라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 태조 때 탐라왕 고자견(髙自堅)이 태자 고말로(髙末老)를 고려에 입조시켰고 이에 고려 태조는 고말로를 통해 탐라의 군주에게는 성주, 2등 권력자에게는 왕자(王子)라는 관작을 제수하였다.[22] 신라나 고려가 탐라의 군주에게 성주라는 관작을 제수한 것은 지방 호족 세력이 한반도의 패권을 가진 중앙 정부에 입조하여 탐라 지방의 지배력을 인정받았다(책봉)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유럽이나 일본으로 치면 봉건제 영주와 비슷한 의미.

반복적으로 나오는 성주란 명칭은 별의 나라 외계인 국가 인 탐라의 주인이라는 의미이다. 항해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는 항로 지표로 별자리를 이용하였고 탐라에선 그 가운데 북두칠성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다. 칠성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단을 쌓은 것이 칠성단인데 현재 속칭 칠성통이라 불리는 곳에 칠성단이 있었다.[23] 탐라지 등에 조선조 칠성단에서 제를 지냈는데 칠성은 하늘의 북두칠성이고 제의도 천제란 기록이 있다. 이렇듯 별을 중시하는 풍속이 명칭에 반영된 것이 성주라는 것이다.

고려 초기까지는 '탐라(耽羅)'라는 이름을 가진 사실상의 독립국이었으나 지방 호족을 고려의 지배 체계에 편입시키며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시켜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탐라 역시 차츰 고려의 지방 행정 단위로 편입되었다. 제주라는 명칭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고려 빈공과(貢科 : 외국인을 자국의 관료로 임용하기 위하여 치르던 시험.)에 합격한 탐라 학생 등,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고려와는 별개인 속국 취급을 받는 등 자치는 허용되었다.

1105년 숙종 시기에 탐라국은 탐라군으로 개칭되면서 사실상 속국 지위가 박탈되고, 본토에 있는 중앙 정부의 통제권에 들어왔다. 다만 이후에도 성주는 대를 이어 계속 세습되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은 계속 허용되었다. 몽골 제국과의 여몽전쟁 시기에는 삼별초가 제주도를 점령하여, 최후 항전지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몽골 간섭기에는 말을 키우기 좋은 환경에 주목해 원나라의 직할령인 탐라 총관부가 설치되어 요양행성 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빼앗긴 충렬왕 시기에 일단 반환받았다. 공민왕 때 목호의 난(牧胡)[24]이 일어나 최영 장군이 진압군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25] 

3.5.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선 1402년, 명칭이 제주도가 되었으며 마지막 성주인 고봉례(髙鳳禮)가 삼국 시대 이래로 제주를 지배한 고씨와 양씨가 세습한 성주와 왕자의 명칭이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개정하여 줄 것을 청하며 인부(印符)를 조선 조정에 반납했다. 제주도판 판적봉환. 그래서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었고[26] 이로써 그나마 이름만 유지하다가 조선에 완전히 편입되어 전라도 관할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을 설치, 완전하게 중앙 정부의 지휘를 받는 행정 구역으로 되었다.[27] 

비록 행정구역 상으로는 전라도에 속했으나 제주목은 사실 조선시대에도 특수행정구역에 가까웠다. 실제로 다른 군수, 현감들이 목사와 독립적으로 관찰사의 직속 부하였던 것과 달리 정의현, 대정현의 현감들은 전라도 관찰사의 직속이 아니라 제주목사의 관할하에 있었고 소속 현감에 대한 행정적 명령에 대해 전라도 관찰사에게 사후적으로 보고 하였으며 보통 목사가 정 3품이었던 것과 달리 제주목사는 대부분 수군 절도사직을 겸한 종 2품이라 관찰사와 직급이 같았고 전라도 관찰사는 제주목사에 대해 의전적 서열은 상석이되 서로 존대하였다.[28][29]

탐라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탐라국 연표 참조.

4. 역대 군주

아래에 이 연표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정사가 아닌 제주 고씨 문중 족보에서[30]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학계에선 실제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사에서 확인 되는 왕의 이름이[31] 몇 있지만 워낙 기록이 적어 제대로 된 왕계조차 파악하기 어렵고 도동음률이나 유리도라 같은 고씨가 아닌 왕의 인명도 많이 기록되어 있어 고씨가 쭉 탐라국의 국성이었는지도 의문이 가는 노릇이다... 그리고 애초애 시조 고을나왕[32] 재위 기간부터가 신빙성이 없다...[33] 28대부터 서왕부터 42대 소왕까지는 모두 똑같이 25년씩이다.
순서
왕호
재위 기간
칭호
1대
BC 2337년 ~ BC 2206년
을나
2대
건왕
BC 2206년 ~ BC 1767년
3대
삼계왕
BC 1767년 ~ BC 1123년
삼계
4대
일망왕
BC 1123년~ BC 935년
일망
5대
도제왕
BC 935년 ~ BC 771년
도제
6대
언경왕
BC 771년 ~ BC 619년
언경
7대
보명왕
BC 619년 ~ BC 520년
보명
8대
행천왕
BC 520년 ~ BC 426년
행천
9대
환왕
BC 426년 ~ BC 315년
10대
식왕
BC 315년 ~ BC 247년
11대
욱왕
BC 247년 ~ BC 207년
12대
황왕
BC 207년 ~ BC 157년
13대
위왕
BC 157년 ~ BC 105년
14대
영왕
BC 105년 ~ BC 58년
15대
후왕
BC 58년 ~ BC 7년
16대
두명왕
BC 7년 ~ 43년
두명
17대
선주왕
43년 ~ 93년
선주
18대
지남왕
93년 ~ 144년
지남
19대
성방왕
144년 ~ 195년
성방
20대
문성왕
195년 ~ 243년
문성
21대
익왕
243년 ~ 293년
22대
지효왕
293년 ~ 343년
지효
23대
숙왕
343년 ~ 393년
24대
헌반왕
393년 ~ 423년
헌방
25대
기왕
343년 ~ 393년
26대
423년 ~ 453년
27대
453년 ~ 483년
지운
28대
서왕
508년 ~ 533년
29대
다영왕
533년 ~ 558년
다영
30대
558년 ~ 583년
31대
체삼왕
583년 ~ 608년
체삼
32대
성진왕
633년 ~ 658년
성진
33대
홍왕
633년 ~ 658년
34대
처량왕
658년 ~ 683년
처량
35대
원왕
683년 ~ 708년
을나
36대
표륜왕
708년 ~ 733년
표륜
37대
형왕
733년 ~ 758년
38대
치도왕
758년 ~ 783년
치도
39대
783년 ~ 808년
40대
808년 ~ 833년
천원
41대
833년 ~ 858년
호공
42대
소왕
858년 ~ 883년
43대
883년 ~ 909년
경직
44대
909년 ~ 934년
45대
934년 ~ 938년
자견

4.1. 역대 성주 / 왕자

고려 제후왕
낙랑왕 김부
OO대왕 OO
필영대왕 OO
문원대왕 왕정
정간왕 왕기
* ㅇㅇ대왕, 필영대왕은 징효대사탑비서만 등장한다.
관련 직위: 역대 고려 왕
이하는 고려사 등 사서에서 확인되는 고려의 제후 성주(星主)와 왕자(王子), 조선의 지방관 좌·우도지관의 목록이다.
순서
칭호
[34]
재위 기간
비고
《탐라지(耽羅志)》
1대
성주
고(高)
후(厚)
662년 ~ ?
고려사
1대
성주
말로(末老)
938년 ~ ?
?
추장[35]
주물(周物)
? ~ 1024년
추장, 운휘대장군 상호군
1024년 ~ ?
-
세자
고(孤)
오노(烏弩)
? ~ 1029년
세자, 유격장군
1029년 ~ ?
성주, 유격장군
가(加)
리(利)
? ~ ?
성주
고(高)
일(逸)
? ~ 1063년
성주, 명위장군
두량(豆良)
1063년 ~ ?
성주, 유격장군
가(加)
야잉(也仍)
? ~ ?
-
유격장군
가(加)
어내(於乃)
? ~ ?
성주, 유격장군
가(加)
양잉(良仍)
? ~ 1090년
성주, 배융부위
고(高)
복령(福令)
1090년 ~ ?
성주
의인(懿仁)
? ~ 1092년
성주, 정원장군
1092년 ~ ?
성주, 배융부위
구(具)
대(代)
? ~ 1101년
성주, 유격장군
1101년 ~ ?
성주
고(高)
인조(仁朝)
? ~ ?
성주
고(高)
인단(仁旦)
? ~ ?
성주
고(高)
복수(福壽)
? ~ ?
성주
고(高)
실개(實開)
? ~ ?
성주
고(高)
신걸(臣傑)
? ~ ?
성주
고(高)
봉례(鳳禮)
? ~ 1404년
1대
도주관 좌도지관
1404년 ~ 1411년
-
도주관 좌도지관
고(高)
상온(尙溫)
1411년 ~ 1412년
2대
검교한성윤, 도주관 좌도지관
고(高)
충언(忠彦)
1412년 ~ ?
도주관 좌도지관
? ~ 1445년
순서
칭호
재위 기간
비고
《탐라지(耽羅志)》
1대
왕자
고(高)
청(淸)
662년 ~ ?
고려사
왕자
두라(豆羅)
? ~ 1043년
왕자
호잉(號仍)
1043년 ~ ?
왕자
수운나(殊雲那)
? ~ 1053년
왕자, 중호장군
1053년 ~ ?
왕자
문(文)
창우(昌祐)
? ~ ?
왕자
문(文)
창유(昌裕)
? ~ ?
왕자
문(文)
충세(忠世)
? ~ 1404년
도주관 우도지관
1404년 ~ ?
도주관 우도지관
? ~ 1445년

5. 여담

탐라국의 왕궁이었던 성주청을 다시 짓는다고 한다. # 다만 애초에 탐라 건축 관련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냥 전통 양식의 건물을 새로 짓는 수준이 될것이다. # 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많다. 백제문화단지, 월정교 등이 존재한다.

우산국과 비교해봐도 많은 유적,유물,기록이 나온다.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시조와 말왕의 기록도 우산국보다 더 많다.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에서는 혈망봉 도귀촌이 탐라 지역으로 등장하는데 메인 빌런인 마고에 의해 완전히 오염되어 버린 땅으로 등장한다.

6. 제 2의 탐라국?


6.25 전쟁 당시 제 2의 탐라국이 생겨날 뻔한 적이 있었다. 전쟁 발발 직후 조선인민군이 남침해서 내려올 때, 제주도 지역은 직접적인 전장이 되지 않았다.[53] 제주도를 군사력으로 직접 점령하려면 조선인민군 해군이 남해까지 밀고 내려왔어야 하는데, 이미 전쟁 발발 당일 북한 해군은 대한해협 해전에서 대한민국 해군에게 패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미군과 UN군이 개입하면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해버리는 바람에 조선인민군 측에서는 직접적으로 제주도에 도달하지 못했다. 부산으로 피난한 대한민국 정부를 무너뜨리지 않는 한, 북한 측에서는 제주도를 실효지배 영토로 접수할 수 없었던 것. 현재도 북한 주민들에게 있어서 한라산은 미지의 땅으로 인식된다고 한다. 남한 주민들이 중국쪽으로 우회해서 관광할 수 있는 백두산과는 달리 한라산은 북한 국적을 가지고 우회할만한 루트도 없기 때문. 상기한 이유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부터 현 시점까지 제주도는 타국 군대에 점령당한 적이 없이 온전히 대한민국의 영토로서 존재하고 있다.

1.4 후퇴 이후 북한 측에 서서 개입했던 중공군이 금강-소백산맥 방어선을 붕괴시키면 한국 정부를 제주도로 이전시켜 차후 공세의 전환점으로 삼을 계획이 검토되기도 했다. 국공내전 당시 중국 공산당에게 밀리던 중국 국민당이 감행했던 국부천대 대한민국 버전으로 단행될 뻔 한 것이다. 만일 대한민국이 6.25 전쟁에서 패배하고 한반도가 적화통일 되었다면 제주도만이 대한민국의 실효지배 영토로 남아 탐라국과 똑같은 모양새로 전락해버렸을 것이다. 우리가 대만이 될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지경까지 가면 북한 당국은 한반도 본토를 석권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먼저 일으켰기 때문에 국제사회에 자신들을 한반도의 합법 정부로 인정해 달라고 말할 명분이 없어진다. 도리어 전쟁 이전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았던 쪽은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국가로서의 정통성은 대한민국이 쥐고 있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지지속에 대한민국의 생존은 보장된다. 더불어 북한 측은 대한민국 정부의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고,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계는 제주-조선관계로 불리며 사이가 좋지 않은 이웃관계로 변화했을 것이다.

단, 이렇게 생존한 국가를 어떻게 운영할지가 다시 문제로 나타나게 된다. 6.25 전쟁이 벌어지던 1950년대 당시 제주도는 관광업조차 육성되지 않은 그저 깡촌에 불과한 섬이었기에 외국의 지원이 없으면 국가로서의 존속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금의 대만, 아니 원조 탐라국보다도 더욱 암울한 미래가 그려지는 셈. 더 큰 문제는 반도 출신 사람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시각인데, 4.3 사건 당시 한반도 출신 사람들로부터 대량학살[54]을 당한 제주도민들 입장에서는 한반도 출신 사람들이 같은 국민 내지 민족이라기보다는 '학살자'로 보였을 것이다. 아마 당시에는 제주도민들을 찍어눌러서 4.3사건 관련 소리가 차단되게 할지는 몰라도, 결국 대부분의 주민이 제주도 원주민들인만큼 대만 2.28 사건처럼 언젠가 크게 한 번 터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주도로 이주한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당과 같은 포지션이 될지도.

물론 2018년 현재의 제주도는 관광 산업 및 서비스업의 기반이 확실하게 갖추어져 있고, 도로 및 항구를 비롯한 인프라도 탄탄하게 갖추어져 있다. 따라서 갑자기 한반도가 적화통일이 되어 한국 정부가 제주도로 넘어오든, 아니면 제주도가 독립 선언을 해서 한반도 본토와 별개의 국가가 되든지 간에, 제주도가 탐라국과 같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해도 제주항과 서귀포항 등을 주요 무역항으로 설정하고 관광업과 서비스업을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면 현재 제주특별자치도의 수준으로, 타국으로 따지면 아이슬란드 수준의 국가 구조를 유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제주도 지역만 놓고 본 1인당 GRDP가 $24,000 정도이고, 아이슬란드는 제주도 인구의 절반에 1인당 국민소득이 2배 정도 된다. 따라서 산술적인 예측이 가능한 것. 

[1] 최초에는 삼을나(良乙那, 高乙那, 夫乙那)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공동연맹체적인 체제로 보이며, 신라의 삼국통일기에 이르러 3성 가운데 세력이 강성한 고씨(高氏) 씨족이 군장(君長)으로 군림해 국주(國主)가 된 것으로 보인다.[2] 938년 45대 자견왕 이후로 합병되었으나 자체적인 성주, 왕자직 등의 직위가 유지되었다.[3] 제주 고씨의 시조이다.[4] 한자가 같은 고구려의 고씨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5] 공식적인 기록에서 고씨 성이 최초로 확인되는 사람은 탐라국이 합병되고도 한 세기 뒤인 1024년의 고몰이다. 신라말 고려초의 대다수 호족들에게 성이 없었듯이 탐라국에서도 왕족은 있었지만 국성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지금의 제주 고씨에 해당되는 당시 씨족의 이름이 高와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6] 탐라군. 숙종 시기에 탐라군으로 개칭, 의종 대가 되면 중앙 정부의 지방관까지 파견되므로 국가로서는 사실상 소멸되었다고 봐야 한다. 다만 자치권이 강하게 인정되어서, 전라도에는 속하지 않았다. 후에 조선 초 태종 때 자치권이 회수되고 전라도에 편입돼 제주목, 대정군, 정의현의 세 군현이 설치되고, 중앙에서 내려온 목사, 군수, 현령이 다스리게 된다.[7] 가장 큰 이유는 제주 고씨가 부씨 및 양씨와 함께 정통성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2014년에 삼성혈에 이름 먼저 올리는 문제로 법정 다툼까지 벌일 정도이다.[8] 그러나 신라에서 황룡사를 제작할 당시, 탐라는 백제에 복속되어 있었는데 이때 탁라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었다.[9] 양씨는 후에 良에서 梁으로 바뀜[10] 고조선, 고구려, 가야, 신라의 건국 신화에서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는 반대다. 하지만 백제 같은 경우에는 시조인 온조가 하늘과 연계되는 것이 아니며, 가야 같은 경우에는 신화가 2가지인데 김해의 금관국은 하늘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과는 다르게, 대가야의 신화는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중심이다. 대가야 신화를 생각하면 제주도의 것과 비슷하게 땅의 역할을 크게 보고 있다.[11] 조선왕조 관찬사서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형제의 순서는 차례대로 양, 고, 부이다. 다만 후에 기록된 사료에서는 양고부, 고양부 이렇게 뒤섞인 채로 표기되기도 했다. 만년 3인자 부씨. 자세한 사항은 良·高位次 改換事件(양고위차개환사건)  삼성혈 외부 링크 참조.[12] 조선 영조 때 고한준(高漢俊)의 상소에도 良高夫로 되어 있다. 조선 왕조 실록 濟州儒生高漢俊等上疏言(제주 유생 고한준 등 상소문) 참조. 상소 내용 자체는 탐라의 역사를 고려하여 전조 왕 대접을 해달라는 건데 쿨하게 까였다. 영조 : 귀 씻게 물좀 가져와라[13] 고려사 일본국이라 되어 있다.[14] 남북 1000여 리, 동서 수백 리에 항해에 3달이 걸린다는 기록 때문에 섬의 크기나 생김새, 거리상 제주도가 아니라 지금의 대만 섬이라는 떡밥이 있으나, 군선이 대만으로 표류했다면 굳이 백제를 들러 중국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또한 대만은 수서에 함께 기록된 유구국(流求國)이라는 설이 있다(다만 유구국에 대해서는 류큐설이 조금 더 우세하긴 하다.). 물론 가장 기본적으로 백제가 제주도 또한 완전히 영토로 편입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만까지 원정을 나가는 뻘짓을 왜 했느냐, 그리고 했다면 관련 기록은 왜 없느냐는 비판 또한 들을 수밖에 없다. 아마도 수가 바다 동쪽의 여러 섬들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착오로 보인다.[15] 다만 이 문단에서의 탐라국은 아래 기록의 처음으로라는 말 때문에 마한의 잔존 세력으로 파악하려는 의견도 있다. 또 이때는 막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한 시기였는데 그것을 알아차리고 제주도에서 사신을 파견했다는 것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16] 위에서도 말했지만 출전이 물 건너 중국의 수서기 때문에, 잘 모르고 대충(...) 들은 대로 적은 것으로 보인다.[17]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백제) 남쪽에 바다로 3달, 남북으로 1000여 리 동서로 수백 리 기록은 (써 있는 대로 해석한다면) 거리로 보나 크기로 보나 제주도보다는 대만 섬에 가깝기 때문에 대만설도 실제로 있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제주도로 비정.[18] 탐라가 연마 등을 보내 옴.[19] 백제 관직이다. 탐라국은 상기했듯 백제가 망하고 신라가 들어오기 전에는 백제의 속국이었다.[20] 제주 고씨의 족보에 따르면 처량왕(處良王)이 이때 왕인데, 후대에 지어진 족보보다는 당대 기록 쪽이 당연히 신빙성이 높다.[21] 일본에서 당나라로 견당사를 보내는 바닷길 중간쯤에 탐라국이 있다보니, 견당사를 탐라에서 약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22] 즉, 자견왕을 끝으로 최초의 성주는 고말로이다.[23] 칠성통과 그 주변 지역은 탐라 시대부터 1990년대까지 제주시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곳이며 지가 역시 가장 비싼 곳이었다. 허나 제주 도청과 시청, 법원 등 주요 기관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신제주와 광양 등지로 중심지가 옮겨가면서 점차 쇠락 중이다. 특히 제주 대학 병원이 산골 아라동으로 이전한 것을 두고 호흡기를 떼 버렸다는 평가도 있다.[24] 목호 제주도에서 을 기르던 몽골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치기의 난 여담으로, 제주도 향토사학자인 이영권이라는 사람은 이 사건을 두고 고려시대 버전 4.3 사건라고 했다. 제주도에 살던 몽골인 목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고려군에게 진압되면서 애꿎은 제주인들 일부가 몽골인으로 오인받아 학살당하자, 몽골계 귀화인(제주 초씨 제주 좌씨 등)이나, 제주도 토착민이나 자기들이 몽골인들과 연관되었음을 필사적으로 부정하였는데, 이것이 현대의 4.3 사건 당시에 공산주의자로 오인받아서 제주도민들의 상당수가 학살당한 후에 제주도에서 반공주의가 확산된 것과 절묘하게 똑같아서 그렇다고 한다.[25] 그런데 최영이 요거 진압하러 개경을 비웠다가 공민왕은 갑자기 살해되었다.안습 이후 우왕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최영의 庶女를 궁으로 들이고, 요동정벌때에 자신의 곁에 두다가 위화도 회군으로 쫓겨났다.사실 회군으로 죄인이 된 것은 최영이지만, 얼마 못가서 쫓겨났으니 그게 그거다.[26] 앞서 양씨가 왕자를 세습했다고 적어놨지만 정작 마지막 왕자의 이름은 문충세(文忠世)였다. 오히려 왕자 작위를 세습한 성씨는 문씨가 더 많다. 이렇게 된 사연은 좀 길다. 탐라국은 명목상 고씨 성주가 왕이지만 사실상 서쪽 반만 성주의 영토, 동쪽 반은 양씨 왕자의 영토, 수도는 공동 통치였다. 화산재 때문에 농사가 어려운 동부보단 서부가 항상 더 강했지만 성주들은 이에 만족 못하고 외국인 고려에서 과거를 보고 관직까지 얻을 정도로 조정에 협조해서 지원을 받는다. 조정은 덕분에 고씨와 양씨가 분열한 틈에 탐라를 속국화시켰고 고씨 성주는 탐라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얻은 윈윈 전략이었으나 이들에게 부림당하는 탐라인들과 토호들에겐 의문의 2패가 되었다. 그러다 무신 정변으로 고려가 막장이 되니 성주는 반발하는 토호들을 찍어누를 수 없게 되었고 왕권 유지를 위해서 육지 이주민 가문 문씨와 결혼 동맹을 맺는다. 그러나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가 더더욱 혼돈 파괴 망각이 된 끝자락쯤 고려의 빽이 완전히 증발한 성주 고적을 왕자 양호가 끌어내리고 성주에 올랐다. 다수의 탐라인들과 성주 양호는 탐라의 자주 독립을 목적으로 삼별초 항쟁을 도왔는데 고씨와 문씨는 자신들 권력을 보장해줄 여·몽 연합군을 지원했다. 삼별초가 패배하면서 이때부터 양씨는 몰락했고 고씨가 다시 성주를 차지하면서 동맹인 문씨에게 왕자의 자리와 왕자의 영토인 섬 동부를 주었다. 그 문씨의 왕자 직위가 조선 시대까지 이어진 것이다.[27] 하지만 삼국 시대부터 이어져 온 세습 제도가 한번에 폐지된 건 아니었고 1445년이 되어서야 좌도지관은 상진무(上鎭撫)로, 우도지관은 부진무(副鎭撫)로 명칭이 바뀌면서 비로소 선출 제도가 실시된다. 그 후 1620년경, 상진무는 진무(鎭撫)로, 부진무는 유향(留鄕)으로 개칭된다.[28] 조선시대에 목사는 정3품직이 맞지만, 수군절도사 역시 정3품직이며,(그러나 육군을 지휘하는 병마절도사는 종2품직이다. 이는 해안가 일부 지역에 병력을 담당하는 水師와는 다르게 담당 지역 내에 있는 군현에 병력을 관장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참고할 것이 삼도수군통제사의 직급이 종2품직이다.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임시직이기에 품계가 불명확했지만, 이후 종2품으로 확정) 무엇보다 제주도를 관할하는 전라우수영은 해남(우리가 잘아는 명량 인근지역)에 있었다. 전라우도지역에 수사가 2명일 수는 없기에 어디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전라감사와 전라우수사의 관할 지역임에도 홀로 외진 곳에 있기에 다른 지방관들과는 다르게 섬 내에서의 어느 정도의 결정권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원칙상 관할지역이니 감사와 우수사가 관리차원에서 가야하지만, 가는 길이 험하기에 제주목사에게 권한을 위임했을 것이다. 따라서 제주목사는 제주도 북쪽의 행정권을 가지고, 남쪽 2개현을 관리하고, 제주도 전체 군사 지휘권을 가진 존재였다.)[29] 제주목사는 1466년(세조12)에 병마수군절제사<조선의 법제상 절제사직은 정3품직이였다>를 겸했고, 1638년(인조 16)에는 이를 고쳐 방어사(防禦使)라 했으며, 1642년(인조 20)에는 절제사(節制使), 1713년(숙종 39) 이후에는 다시 방어사란 직책이 겸임되었다. 한편 외관직 중에서 종2품의 관찰사와 동격은 경상도의 경주, 전라도의 전주, 함경도의 영흥(1413년~1416년, 1470년~1509년)/함흥(1416년~1470년, 1509년~), 평안도의 평양과 의주(1592년 의주목에서 승격)에 파견된 府尹과 중요지역의 군대를 관리하게 위하여 따로 파견한 兵馬節度使밖에 없다.(그런데 관찰사들이 기본적으로 兼兵使職을 가지고 있으며, 府尹 역시도 관찰사가 감찰해야 할 대상자이기에 해당 道에서는 가장 높은 사람이다.전시에 宰相들을 파견하며 임명하는 都體察使/體察使/都巡邊使/巡邊使등과 같은 임시직을 제외한다면)[30] 이런 경우에는 숭조 작업에 일환으로 대부분 왜곡되기 때문에 사학계에서는 가치를 두지 않는다.[31] 도동음률. 유리도라. 고여 등.[32] 고을나왕과 아래에 15대 고후왕은 고려사 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등 여러 사서와 제주의 여러 전설에 전하고 있어 근대에 창작된 허구적 인물은 아니지만 전하는 사서들이 탐라국이 망하고 워낙 수백년 후에 쓰여진 거라서 실존했다는 신빙성은 없다.[33] 무려 136년 동안 재위했다.[34] 고(高)를 제외한 성주의 성씨는 문헌상의 이름에서 성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표기한 것이다.[35] 고려사에서 '추장(酋長)'이라는 표현은 말갈, 여진의 군주를 이를 때 쓰인다. 성주(星主)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나, 아들의 이름이 고몰(高沒)인 것으로 미루어 성주 본인이거나 탐라의 하위 토호인 것으로 보인다.[36] 아들 고몰(高沒)도 함께 운휘대장군 상호군에 임명된다.[A] 37.1 37.2 37.3 제주 양씨 족보에서는 양(梁) 또는 양(良)씨.[B] 38.1 38.2 제주 양씨 족보에서는 왕자 두라와 성주 두량을 함께 3세손의 인물로 파악하고 있다.[39] 가양잉과 어머니가 같은 동생, 즉 동모제(同母弟)라고 언급된다.[C] 40.1 40.2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원종 11년(1270년) 경오년에 반적 김통정 삼별초를 거느리고 진도에 머무르다 이듬해 신미년에 탐라를 침략하니, 성주 고인조와 왕자 문창우 등이 (왕에게) 아뢰었다(十一年庚午反賊金通精領三別抄據珍島翌年辛未來據侵掠星主高仁朝王子文昌祐等以聞越)"고 한다.[41] 공민왕 11년(1362년) 목호의 난에 관련된다.[42] 고신걸의 아들.[43] 고봉례는 장남 고상온이 토호인 도주관 좌도지를 이어받기를 태종에게 청했다. 고상온은 좌도지를 이어받았지만, 약 3개월의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44] 정부의 청으로 '고봉례의 뒤를 이어' 도주관 좌도지관이 된다.[D] 45.1 45.2 병조의 청에 따라 도지관직이 혁파되었다. (세종실록 108권, 세종 27년 6월 19일)[49] 제주 양씨 족보에서는 이 인물을 4세손이자 이름(號)이 잉(仍)인 양잉(良仍, 梁仍)으로 본다.[50] 아들은 배융교위 고물(古物)[53] 다만 4.3 사건의 영향으로 이 시기 제주도는 치안이 썩 좋지 않았다.[54] 제주도민 10명 중 1명인 3만여 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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