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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5. 29. 08:55신라-중,하

통일신라

최근 수정 시각:

 
신라[1]
新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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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통치 영역
700년 경의 통치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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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년 경의 통치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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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삼국시대의 지도. 진파랑이 신라이다.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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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년 ~ 900년[3] (234년)
시대 구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통일
676년 음력 11월
한반도 중ㆍ북부와 부속 도서[4]
행정구역
예맥, 삼한, , 말갈[5]
→ 신라인 (통일 이후)[6]
정치 체제
국가원수
(황왕)[8]
주요 군주
(金) · (朴)[9]
 

1. 개요2. 시대 구분과 명칭에 대해3. 정치4. 영토5. 화려한 불교 문화6. 경제와 활발한 대외관계7. 역사

7.1. 초기시대7.2. 중기시대, 혼란기7.3. 말기7.4. 멸망

8. 역대 군주9. 관련 문서

 

1. 개요

統一新羅.

삼국시대의 한 축이었던 신라삼국통일전쟁 끝에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을 이뤄 한반도 중남부를 지배한 시기를 말한다. 문무왕부터[10] 경순왕에 이르기까지의 약 260여 년간 존속했으며, 시대는 크게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했던 중대[11]와 귀족간의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진 하대[12]로 분류된다.[13]

나당전쟁이 끝나는 676년 시점을 기준으로 삼국시대 때의 수백 년간의 끝없던 전쟁이 사라지고 한반도의 정세가 안정화되며 옛 고구려계, 백제계와 말갈계 등 다양한 종족집단이 신라내부에 공존하고, 이를 통합하기 위한 장치를 설치하고, 또한 봉건제에서 중앙집권체제적인 성격을 띠고, 과거시험을 보는 등 이전 삼국시대국가와 그중 하나이던 신라 시절과는 수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1970년대에부터 통일신라로 불리기 시작했다.[14][15] 한국사에서는 흔히 삼국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이전 신라와의 구분을 위해 명칭도 삼국통일했다고 여겨 '통일신라'라고 따로 칭하기도 했고 하지만 단순한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대구분,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통일신라로 불렸다.


남북국시대론이 부상하면서 통일신라론은 비판을 받았고, 21세기에 이르러 대세는 시대는 주로 남북국시대, 왕조명은 주로 통일신라로 두 설이 혼재된 상태이다. 아직까지는 두 설 중 하나가 확실하게 유력한 상황은 아니며 두 의견 모두 일리 있기에 둘 중 하나가 무조건 옳다고 치부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한국사의 최초 단일국가이며, 한국고대국가의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중세국가의 모습을 국가를 보이기도 하였다. 다만 골품제와 같은 한계를 못이기고 후에 군벌들이 난립했고 고려후삼국시대를 끝내며 이를 극복한다.

2. 시대 구분과 명칭에 대해

세계의 신라 국호
신라(新羅)
의미는 '덕업일사방 : 德業日四方’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말 뜻은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四年, 冬十月, 群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群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
(지증왕) 4년 10월에 군신(羣臣)이 말하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創業) 이래로 나라 이름이 일정치 아니하여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라 하였으나, 신(臣)들은 생각건대 '신'(新)은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운 뜻이요, '라'(羅)[16]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그것으로 국호(國號)를 삼는 것이 좋을 듯하오며, 또 생각건대 자고로 국가를 가진 이가 다 제왕(帝王)이라 칭하였는데 우리 시조가 건국한 지 지금 제22대에 이르도록 단지 방언(邦言)으로 칭하여 존호(尊號)를 정하지 아니하였으니 지금 군신(羣臣)은 한뜻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올리옵니다"고 하니, 왕이 거기에 좇았다.

金富軾, 三國史記 卷4 新羅本記 第1 智證麻立干
다만 실제로는 '신라'라는 이름은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고구려와 함께 '신라'가 전진에 377년과 381년에 <자치통감> 등에서 기록되어 있고, 당대 사료인 광개토왕릉비에도 신라가 이미 등장하고 있다. 이 의미 풀이는 원래 존재하던 고유어를 한자로 표기하려는 과정에서 음도 의미도 적절한 한자를 찾아서 유교적인 해석을 끼워 맞춘 것이고 이전부터 사용되던 '신라'라는 이름을 유일한 공식 명칭으로 규정한 것으로 추정되며, 지증왕 대에 국호를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사로, 사라 등 다른 표기를 혼용했다.

신라 이전에 불렸던 이름들은 걸의식국(乞衣食國), 비집기국(飛集基國), 시라(尸羅), 사라(斯羅), 시림(始林), 유계(有鷄), 계괴(鷄怪), 계림(鷄林)[17], 서야벌(徐耶伐), 서라벌(徐羅伐), 유잠국(有蠶國) 등으로 불렸는데, 이들 모두 가운데 일부가 누에치기와 관련된 이름들이라는 특이점이 있다. 일본에서 발견된 민정문서에서도 유달리 뽕나무 재배 수량이 많아 신라가 전통적으로 누에치기와 관련이 컸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에 관한 이름도 많은데 실제로 신라 건국설화에는 계룡이 등장한다. 불교계 일부에서는 신라가 계(戒)를 나타내는 시라(Sila)에서, 서라벌을 부처님 당시 코살라국의 수도였던 슈라바스티(Sravasti)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의 특성상 어느것이 맞다 아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병도나 환빠들이 그렇듯 성운의 유사성을 가지고 하는 주장은 딱히 근거랄게 없으며 억지스러운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근거라고 내미는 것이 도올 김용옥의 뇌피셜이다.
신뤄(Xīnluó)[18]
시라기(しらぎ) 혹은 신라(しんら)

초기부터 일본과 거리가 가깝고 서로 많이 얽혔던 관계라 백제를 쿠다라로 읽는 것과 같이 신라를 읽는 법이 따로 존재한다. 시라기는 일본서기의 훈을 따른 것이다. 때론 しんら, 즉 한국어 독음과 유사한 '신라'로 읽기도 하는데 이건 한자 新羅를 현대 일본어식으로 음독한 것으로 다만 한국어에서 신라를 읽을 때는 자음동화 현상으로 실제로는 저절로 '실라'라고 읽게 되지만 일본어로 しんら를 읽을 때는 실라가 아닌 '신'라 그대로 읽는다. 신라에 대해서는 新羅라 적고, "シラギ(< シラキ)"(시라기/시라키)로 읽는데, 이건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신라의 본래 이름인 斯羅를 그대로 일본식으로 읽은 シラ에 キ(城의 뜻)를 더한 것이다. 마쿠라고토바에서는 "栲衾新羅(タクフスマシラキ)"(타쿠후스마시라키)라고도 하는데, 이는 특산물인 종이의 원료 "닥(タク(타쿠))"과 "シラ"에서 연상되는 백색의 이미지가 이불(フスマ(후스마))과 연상되어 이루어진 명칭이다.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19]
베실라(Beshilla), 바실라(Bashilla)

통일 신라 시기에는 아랍페르시아 사람들이 신라를 찾은 이후 아랍 문헌에선 신라의 국호가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페르시아 문헌에선 '베실라(Beshilla)' 등으로 표기됐다. 2010년 말 한국에 그 정체가 알려진, 신라에 관한 내용이 풍부한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쿠쉬나메( کوش نامه, Kush Nama)에선 신라의 국호가 '신라(Shilla)' 또는 '바실라'라고 나타난다.
SILLA/SHILLA
SELLA[20]
구구탁예설라(矩矩托禮說羅)
샨로(Siyan lo),
 
영어권 국가
Later Silla / Unified Silla[21]
한자권 국가
統一新羅[22]
한반도 국가
통일신라 / 후기신라 / 신라

신라라는 국호는 백제고구려, 신라는 원삼국시대에 부터 존재했었던 국호였었다. 그 외에 음차로 신라는 시나, 시라, 사라, 신라 등을 표기했고 계림이라는 별칭이 있었고, 백제는 일시적이지만 십제, 남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23] 고구려도 고례, 구려, 고려 등 의 국호를 음차로 사용하였다.

더 자세히 보자면 백제는 기록에서도 百濟, 伯濟로 표기됐으며 다른 사료에서도 십제(十濟)가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는 高句麗, 高勾麗, 高駒麗, 高句驪(고구려), 高麗(고려), 句麗/句驢(구려) 등으로 사료에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는 서라벌(徐羅筏),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등으로 불렸으며, 같은 국호를 한자로 음차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탈해 이사금 시기에는 계림(鷄林)을 국호로 정하기도 했다. 504년에 지증왕이 신라를 공식적인 국호로 정한 이후 신라는 국호를 바꾸지 않았다. 고구려도 장수왕이 고려로 국호로 통일한 이후, 멸망될 때까지 바꾸지 않은 것 같다.

'통일신라'라는 명칭은 신라 당시에 사용된 이름은 아니고 근현대 사학자들이 676년 이전의 신라와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낸 명칭이다. 동로마 제국이 존재하던 당시에는 로마 제국이라 불렸지만, 근세 사학자들이 동서분열 이전의 로마 제국과 구분하기 위해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명칭을 만들어 시대 구분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사실 676년 이전의 삼국 중 하나인 신라와 이후의 신라는 그 양상이 여러모로 너무나 다르기에 둘을 구분하지 않고 '신라'라는 용어로 퉁치려면 상당히 불편하다는 점에서 명칭구분 자체는 편의적인 측면도 있다. 미술사 등에서 부연설명 없이 '신라 양식'이라고 한다면 백제, 고구려 양식과 대비되던 시절을 말하는 것인지, 백제, 고구려 양식과 일체화된 676년 이후의 양식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호할 것이다.

다만 통일신라라는 용어 자체는 후대 사람들의 편의적 구분이지만 당시 신라인들이 삼국을 통일했다고 자부했던 것은 사실인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청주시운천동사적비,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 등에서 일통삼한과 같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말하는 당대 기록이 남아있다. 신라 나름의 민족 융합 정책도 추진되었는데, 옛 고구려, 백제 출신 귀족들에게 본국의 지위에 버금가는 신라의 관등을 일률적으로 주었고[24] 옛 3국에 각각 3주씩 행정 구역을 균분한 점이나 역시 수를 균등히 맞춘 중앙군 편제 등 다방면으로 당시 신라의 통합 의식은 파악할 수 있다. 훗날 고구려 계승 의식을 천명한 고려왕조의 역사가 김부식, 일연도 고려의 후삼국 제패 이전에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고 고려가 다시 했)다는 점을 인정했고, 이런 인식은 조선 후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신라의 통일론은 인정을 받았고 부정하는 의견이 21세기에 들어서 생겨들면서 통일신라시대와 남북국시대 두가지 의견이 나뉘어게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신라의 세력권은 대동강 이남 지역에 한정되어[25] 백제는 그렇다 쳐도 고구려와는 완전히 통합했다고 보기 힘들며,[26] 정작 북방은 당나라 또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진 발해가 차지해 옛 고구려 영토를 반분한 형세였기에[27] '통일'신라라는 명칭이 합당한가에 대한 반대론이 조선 후기에도 있긴 했다. 현재는 이 시대를 '발해고'에 나오는 북국이라는 용어에서 비롯된 남북국시대라고도 부르는 편이다.

고구려 북방 영토의 불완전성을 근거로 신라의 삼국통일론이 공격을 받고 있음에도 여전히 '통일신라'나 676년에 있었던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데 이는 현대까지 이어지는 한민족 의식의 시초를 찾아올라가면 이 사건의 의미를 좋든 싫든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당시에는 고구려신라를, 백제마한동이남만, 즉 오랑캐로 지칭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처럼 삼국 서로를 중국이나 말갈,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외세로 여겼다. 오히려 고구려는 말갈과, 백제는 일본과, 신라는 당과 더 친했고 손을 잡았듯이 우리민족끼리 같은 인식은 삼국시대에는 공히 없는 것에 가까웠다. 이들이 비로소 서로 동족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분수령이 676년 소위 신라의 삼국통일이었다. 즉 같은 민족이니까 통일을 한 게 아니고 신라가 소위 통일을 한 뒤에 우리는 서로 같다고 동화되어 차츰 같은 민족의식으로 묶인 것에 가깝다. 물론 후삼국시대라는 형태로 한 번 불완전한 유민의식을 재확인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고려는 신라의 일통 사상을 좀 더 보완해서 계승했던 것이니, 통일된 한민족 의식의 시작점이란 중요성 때문에 마냥 격하하기는 무리인 것이다.

다른 분류명을 더 들어보자면, 1000년이나 지속된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왕조이므로 전 삼국 구도가 무너진 시기를 '후기 신라'라는 용어로 말하기도 한다.[28] 그러나 비슷한 예로 장수왕 때에 고구려가 국호를 고려로 바꾸고 '고려'라는 국호의 사용 빈도가 훨씬 높았음에도 이후 왕건이 건국한 왕씨 고려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편의상 고구려라고 통칭하는 중이며, 고조선도 원래 조선이라고 부르는 게 맞지만 이성계가 세운 훗날의 조선과의 구별을 위해 그냥 고조선이라고 부르듯[29], 그리고 발해도 당초 진(대진국)이라는 명칭으로 건국했으나 역시 '발해'로 뭉뚱그려 부르고 있듯이 여러 가지 편의성 면에서 그냥 '신라'로 용어 통일이 이뤄졌다. 신라 또한 초창기에는 '사로국'이라는 생소한 이름을 가지고 지증왕 때에 들어서야 신라라는 이름과 왕호를 갖추지만 그전 시기까지도 다 신라로 퉁치고 내물왕이니 눌지왕이니 하며 지증왕 이전의 지도자들까지 왕호를 붙여주기도 하는 실정이다. 다만 676년 이전과는 달리 신라한반도의 지배권을 가져갔으니까 이전보다는 품격을 높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일신라로 부르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있다.[30] 발해사 연구자들의 경우 한규철은 신라가 당병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부터 발해가 개국되는 698년까지 30년이라는 좁은 시간에 한정해 통일신라라는 국호를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 시간 동안에 한반도와 요동 일대에 신라 외에 통일된 왕조가 없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라고 한다.(출처: 발해의 대외관계사)]

3. 정치

통일 직후(신라 중대)에는 신문왕의 대대적인 공신 숙청을 거치며 여러 모로 왕권이 강력했으나, 국가의 재정비 및 절대 왕권 확립 과정에서 귀족들의 반발이 일어나 절대 왕권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고, 이후(신라 하대)에는 너도나도 왕위를 노리고 반란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차츰 혼돈 국면으로 변해간다. 그럼에도 신라는 바로 무너지지 않았는데, 오히려 반란을 진압하고 나서 일부 지역에 면세의 혜택을 줄 만큼 지방까지 행정력을 투사할 역량이 충분했고 200여 년 이상 통치를 이어갔다. 신라가 통일 왕조로서 멀쩡히 한반도를 지배한 기간만 떼놓고 따지면 676년~890년 정도인데, 214년이면 중국 역대 왕조와 비교하면 청나라, 당(통일왕조), 명나라 다음으로 꼽힐,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장수 왕조로,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신라 중대~하대의 정치가 보편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 마냥 혼란하고 취약하기만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후대 고려 초 중기보다 더 지방 통제력이 강한 중앙 집권적 국가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31] 그러나 오랜 기간 골품제 등의 고대 국가적 병폐가 쌓인 끝에 9세기 후반에 이르면 일개 지방의 독립 선언도 못 막고 세금도 못 걷는 궁색한 지경에 이르며 그 이후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서기 935년에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가 나라를 바치는 것으로 그 왕조의 문을 닫는다. 이러한 신라 하대의 상황이 제국이 된 이후의 로마와 비슷한 면이 많다.

하지만 국가 체제는 더욱 확고해졌고, 모든 지역의 종교를 국가가 주관하는 등 한민족으로서의 인식이 자리잡혀가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신라 중대의 개혁에 더해 골품제만 없앴더라면 진정으로 한민족으로써의 정체성이 완벽하게 자리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어떤 사회든 신분제가 제대로 개혁되려면 머리 꼭대기부터 한바탕 뒤집어져야 하므로, 골품제는 결국 신화로 기억되는 고대부터 국가를 쭉 유지했던 신라 1000년 역사의 정체성이자 어쩔 수 없는 멍에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32] 무엇보다 당대에는 육두품처럼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계층을 제외한 민중 레벨에선 골품제를 지금처럼 부정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33]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들어서면서 골품제 자체는 사라졌으나, 수세기 후 유교적 질서가 본격적으로 채택되기 전까지는 왕권과 왕실의 권위가 날로 떨어져 신라 시대에 비해 척신 등에게 휘둘리는 부작용이 커진 점도 감수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34]

국가 체제에 대해 더 설명하자면 당시 동아시아 각지에는 나라의 새로운 행정 체계인 율령제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율령제는 신라에도 영향을 주긴 했으나, 견당사를 통해 급격히 중국화한 일본이나 당의 행정 체계를 거의 본뜨다시피 한 북쪽의 발해 등과 비교해볼 때 신라는 당이 성립되기 훨씬 전부터 구축한 통치 체계를 꾸준히 계승하고 있었다. 하대에도 계속된 이 같은 전통의 고수는 신라의 정부 체제가 기존의 갑절 이상 넓어진 영토에서도 충분히 기능할 정도로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끝내 골품제 혁파 등 구습 혁파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골품제가 신라 고대 부터 이어진 것이라 완전히 바꾸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나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다 좋은데 유독 정치판의 막장급 다툼을 오점으로 평가하며 신라를 폄훼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왕위쟁탈전은 어느 나라든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군주제 국가에선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며 고구려, 백제, 신라도 모두 겪었고, 특히 김주원, 김헌창, 김범문의 3대 연속 반란고려 무신정권 이전까지 한국 반란사의 한 획을 그었다. 그나마 한국사에서 왕위쟁탈전이 많이 사그러든 왕조가 조선이었다.[35] 삼국사기에서도 4명의 왕이 반역자라며 정치판을 막장으로 만들었다고 김부식이 혜공왕 시절 때 정치적 상황이나 반란을 평가했다. 해구‧연신의 난[36]이나 간주리의 난도 막판에 고려가 낫다고 했다. 그런데 이건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옆나라 당과 일본(헤이안시대)과 비교해도 딱히 큰 차이는 없다.[37] 오히려 마지막 결정타인 후삼국시대 개막하는 부분을 제외하면 다음 시대인 고려 초 중기에 비해 정치는 안정적이었던 측면도 있는데, 김헌창의 난 등 수도 외부에서 주도해 일어난 반란이 서라벌을 뒤집어버린 경우는 후삼국시대 이전까지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신라 자체의 역사로 한정지으면 통일신라의 최후반 100여 년간은 그 전대와 비교해 집권 귀족 세력 간의 권력 다툼에 다소 심하게 치중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거기서 그대로 망하지 않고 재도약을 꾀할 가능성은 내재하고 있었으나 막판의 반란이 너무 대규모라 이겨내질 못했다.

그리고 갈등의 과정이 오히려 제도의 개혁으로 이어져야 하나 제도의 개혁과는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당장에 문무왕에서 신문왕으로 이어질 때 많은 반란들이 일어났으나 녹읍이 폐지되고 관료전이 지급되어 대토지화를 차단한다거나 독서 삼품과를 넘어 과거제가 자리잡는다던가 하는 것이 800년대 신라 말에는 없었다. 이는 고구려의 5부 귀족과 백제 8성씨 귀족들의 잦은 반란으로 개혁이 안되는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자면 고려말 엄청난 정파 갈등 속에 위화도 회군을 시작으로 고려 말은 온갖 폐단을 다 정리하게 되는데 사전 혁파와 과전의 시행과 부곡민 체제 폐지와 군현 체제 정립과 그리고 무과의 도입 등 온갖 제도를 도입했으나 결국 고려는 문을 닫고 조선이 세워진다. 그야말로 정쟁이 있는 곳에 다툼이 있다는게 마냥 옳으면 위와 같은 개혁도 없이 무의미하게 진행되는 후삼국시대와 무신정권과 임오군란도 옹호받아야 한다. 악습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황에서 혼란의 상황만 반복하면 그야말로 자멸일 뿐이다. 세습과 추천이 남발되어 능력이 높다거나 혹은 전공을 세우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개혁을 하고 의견의 대립을 하면 모를까, 한번 자리를 먹기 시작하면 계속 먹거나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계속 뽑고 기분에 따라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 혹은 말과 행동을 마구 바꾸는 사람들의 대립과 싸움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대립과 싸움일 뿐이고 파괴일 뿐이다.

800년대 신라의 정치적 혼란에 대한 비판은 삼국사기가 부각시켰는데, 이는 고려가 전조인 신라와 차별화를 두기 위한 것으로, 전 왕조의 실정을 부각시키고 그 몰락을 앞당겨야 현 왕조의 정통성을 높일 수 있어서였다. 이후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800년대 정치적 혼란은 문성왕 시기부터 헌강왕 시기를 마지막 치세로 두어 지적을 하지 않다가 오히려 후삼국시대가 시작하고 최치원이 등장하기 시작한 900년대를 정치적 대혼란기와 몰락으로 삼았다. 이는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좀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고 신라를 재평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 왕조도 고려 왕조의 무신정권 시절을 난신적자가 판치는 대혼란기로 여겼다. 그러나 현대에는 무신정권 시절보단 원 간섭기 시절을 몰락의 시점으로 본다.

당시의 왕과 인물에 대해서는 신라/왕사, 신라/인물 참조고 해보는것이 좋다. 여담이지만 통일신라 중기 무열왕 직계 국왕들(무열왕~혜공왕)의 수명들이 하나같이 짧은 편이다. 50대에 사망한 무열왕(59세), 문무왕(56세)를 제외하고 신문왕부터 혜공왕까지의 무열왕 직계 국왕들은 50세를 넘기고 생존한 임금이 없다.[38] 그래서 조선후기대에도 비슷한 이유로 왕손이 적어진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4. 영토


통일 신라 시대의 행정 구역도.

고구려 영토를 상실했다는 이유로 폄하되는 느낌도 있지만 사실 이건 '상실'이라고만 보기 어려운 것이, 애당초 고구려 영토는 발해가 고스란히 계승[39]해 간 데다 농경을 중심으로 했던 신라는 척박한 대동강 이북의 땅은 문무왕 이후 계속 북진을 하였고 패강진을 설치하고 성을 쌓는 등 북진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신라가 척박해서 땅을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이 문서에 있었지만 그건은 거짓이다.[40][41] 즉 백제와는 역사 내내 애증(?)으로 엮인 관계였으나[42] 고구려에 대해서는 좀 심하게 보태 중국(즉 평범한 관계의 다른 나라)이나 마찬가지로 보았다. 물론 과장일 뿐 더 비슷한 예시는 북한 정도로 봐야한다. 민족, 문화, 언어 등은 모두 비슷했지만 국가로만 남남이었기 때문이다.[43]

게다가 고구려는 당, 신라는 백제를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남북간에 대규모 충돌을 벌일 만한 여력도 없었다. 백제와의 전쟁에서는 백성들을 거의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전쟁을 벌였지만 백제 멸망 후의 고구려와의 전쟁에는 매우 소극적으로 나선 것도 한 예다.[44]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킨 직접적인 주체는 당이다. 백제는 당태종 이세민과 신라 태종 김춘추의 연합으로 백제가 망했고, 고구려는 당고종과 문무왕이 연합해 고구려를 무너트렸다. 고구려, 백제 모두 당이 쓰러트린 것이 아니라, 신라가 일방적으로 공격해 승리하며 영토를 점령한 것이 많았다. 당, 신라 모두 백제, 고구려를 동등하게 무너트렸던 것.[45]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와 연합하여 싸우게 된 것은 정치적 이유도 있지만 애시당초 삼국 시대 당시 서로 간의 쌓인 온갖 감정이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백제에 비해서 고구려와의 분쟁이 훨신 적은 편이었고[46] 의외로 김춘추도 고구려를 중국 당나라보다 협력 대상 우선 순위를 높게 생각했을 정도지만[47]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다들 잘 아시다시피 매우 달랐다. 백제는 고구려와도 마찬가지지만 왕이 노비 출신 무사에게 이 잘리고 잘린 머리궁궐 계단 아래 가매장당하는 막장을 보았다.[48] 백제 입장에서는 고구려의 약화를 틈타 왕실의 숙원이던 한성 지역 수복을 이루는 듯 하였으나, 충청도 지역 기반 귀족 세력의 비협조와 역량 부족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한강 유역을 고구려로부터 신라 진흥왕에게 갖다 바친 격이 되니 복장이 터졌을 것이다. 이에 반해 신라 입장에서는 숙원인 소백산맥 이남 지금의 경상도 지역 통합을 위해 가야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이를 방해하기 위해 사사건건 군대를 가야에 파견하는 등 방해 공작을 펴온 백제와 성왕이 눈엣가시였을 수밖에 없다. 또한, 신라에서는 백제군이 서라벌 바로 근처까지 쳐들어 올 정도로 징하게 싸웠을 뿐 아니라 무열왕 김춘추의 딸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49] 이 증오가 얼마나 깊었냐면, 훗날 백제 의자왕이 항복하는 자리에서 나중에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이 왕자 부여융에게 매섭게 채찍질하고 을 뱉는 일이 있었다.[50] 사회 상층부에 쌓인 미움과 증오가 이런 정도니, 실제로 전쟁을 수행하며 서로 약탈, 겁간하고 싸워 죽여야 했던 하층부 평민들끼리도 증오심이 매우 강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새로이 편입한 구 고구려령에 대해서는 9주 5소경 중 고구려 멸망 전의 영토를 삭주(朔州), 명주(溟州)로, 고구려 멸망 후의 영토를 한주(漢州)로 이름하여 복속시켰다.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의 경우 초기에는 당이 안동도호부를 세워 차지하다가 나당전쟁 때 신라가 고구려 유민과 함께 축출시켜 편입하기도 했고, 뒤에는 발해의 관할로 들어간 듯 한데, 그럼에도 이들 남북국에서 평양 일원은 국경으로 밀려난 변방이 되어 중요성이 퇴색되었다. 발해는 평양이 폐허가 될 때까지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고, 신라도 옛 고구려의 수도인 이 지역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자 2정을 설치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수도 경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계가 있어 이 지역의 중요성을 재인식한 고려 때까지는 말갈족 등 이민족들이 기승을 부렸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최근에는 황해도의 재건 및 평안남도 지역으로의 진출 등이 패강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설이 주목받고 있다. 이는 이전까지 발해가 점령한 것으로 이해되었던 평양 지역이 실제로는 고구려 멸망 당시 황폐화되었고, 신라대동강 이남 지역의 개발을 통해 서서히 평양 방향으로 영향을 넓혀나갔다는 주장. 특히 이러한 개발의 중심이 되는 예성강 ~ 대동강 구간은 고려 태조 왕건의 근거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51]

5. 화려한 불교 문화

불교 문화가 크게 번성했다. 뒤를 계승한 고려가 불교 문화에 있어서 규모나 질적인 수준에 있어서 오히려 통일신라에 비해 뒤떨어지는 부분이 있을 정도다.[52] 특히 신라 시대가 다른 한국사의 시대와 비교되는 것이 불상의 완성도인데, 석굴암 본존의 조형미나 크기는 한국 불상의 정점에 있다고 봐도 된다. 불국사석굴암 등 신라와 한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불교 유산들과 명승 고찰이 대부분 통일신라 시기에 완성되었다. 물론 고려도 신라 못지 않은 불교 국가여서 왕자가 승려가 되는 것이 비일비재했을뿐더러 이 시기에도 흥왕사 보제사 같은 거찰이 많이 세워졌고, 기존에 있던 황룡사 같은 신라 거찰들도 후기에 외적이 침입하기 전까지는 관리를 받으며 잘 번성했다. 그러나 신라와 달리 교종선종의 대립 탓에 신라처럼 수도의 왕실이 불교계를 적극적으로 선도하는 입장은 못 되었고, 호족 등 지방 세력의 지분이 커서 파주 용미리 불상, 은진 미륵 등 토속적 형식의 불상이 많이 만들어졌고, 신라의 사실적인 불상과 비교당하는 측면이 있다. 다만 고려가 통일신라보다 역사가 2세기 더 길었던 만큼 남아있는 유물의 양은 고려가 더 많다.

신라는 통일 직후 새로 편입된 땅의 변방에 큰 절을 세우면서 불교 보급과 점령지의 민심 교화를 시도했고 또한 국방상의 기지 확보까지 꾀했다. 그 예가 의상대사의 화엄10찰 창건이다. 덕분에 지금은 북한령인 금강산처럼 신라의 중심지에서 거리가 먼 지역에도 전형적인 통일신라식 3층석탑 유물이 많이 남아있는 등 신라 중심지에 질적으로 떨어지지 않는 문화가 전파되었다.

6. 경제와 활발한 대외관계


▲아랍인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유럽에서 작성한 세계지도. 참고로 이 지도는 남쪽이 위로 가게 만들어서 신라가 좌측 끝에 있다.
중국의 저쪽, 깐수의 맞은 편에 산이 많고 왕이 많은 한 나라가 있는데, 신라라고 불린다. 그곳에는 이 풍부하다. 그곳에 간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료되어 영구 정착한다.
- 페르시아인 이븐 쿠르다드비, <도로와 왕국 총람>
 
중국 해안의 맞은편은 신라와 그 부속 도서들을 제외하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라크인과 기타 외국인들이 정착하여 그곳을 조국으로 삼았다. 그들은 깨끗한 물, 비옥한 토지, 이익과 수입의 증대, 광물질과 보석류의 풍부함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곳을 떠난 자는 극소수다.
- 이라크인 마수디, <황금 초원과 보석 광산>
 
신라는 유쾌한 나라다. 중국의 가장 끝자리에 위치한다. 공기가 맑고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기에 사람들은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하길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이 난다고 한다. 전염병과 다른 병은 물론 드물고 파리와 야생동물 또한 거의 없다. 다른 지역의 어떤 환자도 이곳에 오면 치유된다. 모함마드 자카리야 라지는 "누구나 이 땅에 들어가면 살기 좋으므로 정착해 떠나려 하지 않는데 그건 자원과 금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로지 하나님(알라)만이 그 진실을 안다.
- 자카리야 카즈위니, <나라들이 남긴 발자취>

기타 중근동 문헌들의 신라 관련 기록들[53]

세계와의 무역도 활발했으며[54] 장보고한중일을 연결하는 허브 기지로서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일대에 청해진을 건설하여 해상을 장악한 시기도 이 때. 진정 아시아이탈리아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장보고나 신라삼최, 혜초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유학 등 국제 인적 교류도 상당히 활발했다. 게다가 당시 주변의 국제 정세가 당, 일본, 발해로 정립되어 자리잡고 있던 데다 신라 자체의 군사력도 상당했었기에 200여 년 동안 외적의 침입도 흔치 않았다. 사실 당과 일본 모두 삼국 통일 전후 혼란기에는 한반도로 병력을 보내 집적거리긴 했지만 이내 역관광당했고, 통일 뒤 통일신라가 완전한 안정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국가적인 공격 기도를 멈췄다. 특히 일본의 경우 사이메이 덴노 ~ 덴지 덴노의 시기에 멸망한 백제를 돕겠답시고 대규모 군사를 내어 한반도로 보냈다가 싹 날려먹는 병크로 나라가 뒤집힐 지경이었고 이후 8세기에도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이 추진됐으나 이는 임진왜란과 같이 내부적불만을 외부로 표출하는것이었고, 발해 또한 무리한 것을 알기 때문에 결국, 발해의 도움을 얻는 데 실패하면서 끝내 당시 최강 국력을 자랑하던 통일 직후의 전성기 신라를 건드리지는 못했다. 아마도 실행했다면 사이메이 덴노 시즌 2 확정[55]. 오히려 신라에서 일본을 정벌하러 올까봐 두려워했다는 당대 정황도 나타나고 있다.


내륙에 신라인의 거점인 신라방이 구축된 시기도 바로 이때. 그 외에도 신라관, 신라촌, 신라원, 신라소라 이름 붙은 이 시기의 대당 거점이 꽤 많이 있었다. 이는 당대 신라의 진취성과 개방성을 모두 보여주는 사례. 뿐만 아니라 국수주의로 돌아선 헤이안 시대 일본에조차도 견신라사(遣新羅使)가 오가면서 교류가 꽤 있었기에 통일신라의 영향을 받은 문화재가 꽤 많으며[56] 심지어 적성국으로 출발한 발해와도 후대에 교역을 트면서 <상경 → 동경 → 남경> 루트를 거쳐 금성까지 연결하는 <신라도>라는 무역로가 개척되기도 했다.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당대 가탐의 저서에 따르면 발해의 동경이 있었던 책성부[57]에서 신라 북쪽 천정군[58]까지의 사이에 39개의 역(驛)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융성하여 당시 기록에 따르면 수도 금성(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에서는 비가 오는 날 가가호호의 처마 밑만 따라 걸어도 비 한방울도 맞지 않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고 할 정도. 말기인 헌강왕 때에 이르면 도성의 민가는 모두 기와로 덮고 으로 밥을 지었다고 한다. 하긴 그만 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었으니 문화적 성취가 가능했던 것이겠지만. 다만 모두 수도의 융성함을 드러내는 기록이다 보니 여타 지방의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나말여초 대에의 소설이나 지방에 도로가 이어져있는 것 등을 볼 때 지방 사정도 우리가 생각한 정도로 낙후하거나 방치된 것이 아닌 정돈이 잘 정리 되어있고 서라벌만큼 융성한 것은 맞는 것 같다.

위의 기록에서 보았듯, 세계사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당대 아랍인, 페르시아인들조차도 신라에 와 보고는 고향보다 더 살기 좋아서 영구 정착, 아예 눌러앉으려 했다고 그들의 지리서에 기록했다. 기록들에서 일관적으로 서술된 내용에 따르면 실제로 정착한 무슬림도 적지 않았던 모양. 위에 첨부된 '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에도 신라가 표시돼 있는데, 아랍인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시칠리아 왕국 노르만 왕조의 루지에로 2세의 지원하에 제작했다. 한국이 포함된 최초의 세계지도로, 다만 신라가 섬나라로 묘사된 오류가 있는데, 멀리서 한국에 오는 사람들은 바다를 항해해서 동중국해에서 올라와 한국에 상륙했기 때문에 한국의 북쪽으로 가 볼 일이 없어 섬나라로 오해한 것이다. 수백 년 뒤 조선을 표시한 유럽 세계지도에서도 조선을 섬나라로 잘못 그린 지도가 상당히 많다. 삼국유사에 용왕의 아들로 나오는 처용이 사실은 아랍에서 온 인물이었다는 정수일 선생의 설이 유명하다. 이외에 중세 이란의 서사시 쿠시나메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 후 신라로 망명한 페르시아의 왕자와 그의 혼혈 아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내용으로, 현대에 한국에도 알려져서 공연 등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 외 신라 주변국에서 견신라사로 파견하여 활봘한 교역을 하였고, 반대로 신라가 견탐라사, 견일본사, 견발해사, 견당사 등을 파견하여 활발하게 교역을 하였다.

7. 역사

 

7.1. 초기시대

나당 전쟁에서 승리한 신라는 초기에 도둑질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무왕은 그들을 용서해주고 군 무기를 녹이고 녹인 것으로 농사 용품을 만들어 혼란이었던 나라가 다시 평화로워졌다고 한다. 문무왕이 죽고나서, 다음 왕인 신문왕은 진골 귀족들의 반발로 왕권이 매우 약해지자 신문왕은 진골 귀족들에게 주는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줬다고 한다. 신문왕대에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구서당에 고구려, 백제, 신라, 말갈의 서당을 만들어 신라수도부터 통일신라를 지키는 구서당을 만들기도 했고 신문왕대의 왕권강화는 통일신라의 국가 기반을 만들어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7.2. 중기시대, 혼란기

통일신라 중기로 오자, 나라 형편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심지어 나라가 어지러워져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금방 진압되었다 그만큼 신라가 건재했다는 것, 흥덕왕 때 장보고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자신에게 바다를 맡겨달라고 하자, 김우징이란 귀족의 추천으로 장보고는 청해에 청해진을 세우고 바다를 지키게 된다. 그러면서 아랍, 당나라, 왜나라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장사를 시작하게 되자 통일신라는 못지 않게 떼돈을 벌게 되었다. 이후에도 혼란기가 찾아오든듯했으나 다시 왕권강화를 통한 중흥으로 국가를 이끌어간다.이때까지만 해도 신라는 건재했다.

7.3. 말기

통일신라는 진성여왕이라는 여왕이 즉위하면서부터 더 막장테크를 탔다. 최치원이란 6두품 관료가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시무책 10조를 올렸지만 진골귀족들의 방해로 허사가 되버렸다. 그리고 901년 북쪽에서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고, 전라도 지역에서는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다. 그리고 통일신라의 정권이 붕괴되면서 호족 귀족들이 통일신라에서 자립하기 시작한다. 호족이 난립하기시작한 때지만 대야성전투 등 신라의 국력이 약한건 아니고 아직까지도 건재하였다. 다만 920년 대야성이 뺏기고 난 뒤에는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했으며 경애왕 사후에는 신라의 위기가 찾아왔다.

7.4.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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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9년
899년
901년
903년-914년
916년
920년
924년
925년
927년
원종·애노
신라
궁예
양길
신라
백제
태봉
백제
신라
백제
백제
신라
고려
백제
고려
백제
고려
백제
927년
928년
928년
929년
929년-930년
932년
933년
934년
936년
백제
신라·고려
백제
고려
백제
고려
백제
고려
고려
백제
백제
고려
고려
백제
고려
백제
고려
백제
한편 북쪽에 있는 태봉은 멸망하고[59] 왕건의 고려가 세워진다. 그동안 신라황실을 예우하며 호족들과의 전투를 벌였던 후백제와 고려가 920년대 이후로 신라 영토 안에서 전쟁을 벌였다고 한다. 그리고 후백제의 견훤이 당시 신라의 왕인 경애왕을 자결하게도 했다고 한다. 그 다음왕인 경순왕은 더 이상 백성들이 죽는 것을 보기 싫어서 고려에게 항복하면서 신라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경순왕은 낙랑왕으로 경주에 살았으며 978년 뒤에 사망한다. 그는 죽어서도 남긴 자식들이 고려왕실과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8.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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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지증왕
제23대

법흥왕
제24대

진흥왕
제25대

진지왕
제26대

진평왕
제27대

선덕여왕
제28대

진덕여왕
제30대

문무왕
제31대

신문왕
제32대

효소왕
제33대

성덕왕
제34대

효성왕
제35대

경덕왕
제36대

혜공왕
제37대

선덕왕
제39대

소성왕
제40대

애장왕
제41대

헌덕왕
제42대

흥덕왕
제43대

희강왕
제44대

민애왕
제45대

신무왕
제46대

문성왕
제47대

헌안왕
제48대

경문왕
제49대

헌강왕
제50대

정강왕
제51대

진성여왕
제52대

효공왕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
제55대

경애왕
제56대

경순왕
추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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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성한왕 · 문흥왕 · 흥무왕 · 개성왕 · 현성왕 · 신영왕
흥평왕 · 명덕왕 · 혜충왕 · 익성왕 · 선강왕 · 혜강왕
성덕왕 · 의공왕 · 혜성왕 · 흥렴왕 · 선성왕 · 의흥왕 · 신흥왕
문무왕 ~ 진성여왕까지 통일신라기 군주들이다. 그 외 자세한 내용은 신라/왕사 문서와 신라틀을 참고하면 좋다.

9. 관련 문서

[1] '통일신라'는 삼국시대의 신라와 구별하기 위한 역사용어이며,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은 말이다. 신라의 국호는 503년에 공식 지정된 이래 멸망할 때까지 신라였다. 신라가 한반도 남부를 통합한 이후 북쪽의 발해와 병존한 시기를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남북국시대라고 부르며, 그 이후의 시대를 후삼국시대라고 부른다. 하술 참조.[2] 링크 참조. "신라 사람들의 휘직은 띠를 푸르거나 붉거나 하는 등의 색깔로 구분하였고 모양은 반달의 형상을 취하였다. 계(罽) 또한 옷에 다는 것인데 그 길이의 길고 짦음에 대한 제도는 분명하지 않다."[3]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며 통일신라의 시대가 끝난 해.[4] 대동강 ~ 원산만 이남으로 알려져 있지만 신라의 북진 정책이 통일신라기에도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정확한 영토 범위는 모른다.[5] 대다수가 고구려 멸망 이후에 집중적으로 유입[6] 신라, 고구려, 백제를 아우르는 일통삼한(一統三韓)의 관념이 확산. 하지만 후삼국의 분열에서 보듯이 통일된 종족 정체성을 완성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7] 비록 불교 이외의 다른 신앙을 탄압하지는 않았지만 국교는 불교였다. 애초에 불교 문화재의 양과 질을 비교하면 어떤 시대도, 심지어 현대까지도 한 수 접고 들어간다.[8] '황왕' 신라의 금석문에서 발견되는 칭호,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제왕(帝王)과 비슷하게 황제국에서도 쓰이는,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이다.[9] 신라 왕조 초기에는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돌아가면서 왕을 했지만 통일신라기에는 경주 김씨의 독점 세습이 고착화되었다. 하지만 신라가 후삼국으로 다시 쪼개진 뒤 박씨가 다시 왕에 오르기도 했는데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이 그들이다.[10] 넓게 보면 태종 무열왕부터[11] 무열왕계가 왕위를 이었던 시대. 혜공왕까지 이에 해당된다.[12] 선덕왕부터 경순왕까지.[13] 신라를 상대, 중대, 하대로 나누는건 삼국사기 기준이다. 삼국유사는 상고, 중고, 하고로 나눈다.[14] 그 당시 남북한관계와 박정희 대통령의 신라 알리기에 있어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15] 그 당시에는 북한은 고구려를 알리기를 하고 있었다.[16] 어두에서는 두음 법칙에 따라 '나'이지만 둘째 음절 이하부터는 '라'로 발음.[17] 좁은 의미로는 경주시에 있는 작은 이름이자, 넓게는 신라국 전체를 이르는 이름. 공식적으로 신라라는 국명이 정해진 뒤에도 일종의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별칭으로도 쓰였다. 이순신은 계림 최고의 장수라는 식.[18] 어디까지나 현대 중국어 발음이며, 당나라 시대의 중고한어 발음으로는 '신라'에 가깝다.[19] 아랍어 정관사 ال(al)+سيلى(silla)의 합성일 경우, 아랍어의 음운변화에 따라 앗실라로 읽는게 맞다. 아랍어로 중국을 지칭하는 الصين (앗씬)같이 정관사+단어로 구성된 국명이 많은데, 신라도 이와 같은 가능성이 높다.[20] 라틴어로 의자라는 뜻도 있다.[21] 통일신라, 후기신라를 모두 표기하고있다.[22] 혹은 신라[23] 백제는 신라, 고구려와 달리 음차를 표기한 국호가 없다.[24] 신문왕 6년(서기 686년)에 고구려 사람들에게 중앙의 관위를 주었는데 고구려의 관품에 준하였다. 일길찬은 고구려의 주부(主簿), 사찬은 고구려의 대상(大相), 급찬은 고구려의 위두대형(位頭大兄)과 종대상(從大相), 나마는 고구려의 소상(小相)과 적상(狄相), 대사는 고구려의 소형(小兄), 사지는 고구려의 제형(諸兄), 길차는 고구려의 선인(先人), 오지는 고구려의 자위(自位)에 준하도록 하였다. ... 문무왕 13년(서기 673년)에 백제에서 온 사람들에게 내외의 관직을 주었는데 관등은 백제의 관직에 준하였다. 중앙 관직으로서 대나마는 백제의 달솔(達率), 나마는 백제의 은솔(恩率), 대사는 백제의 덕솔(德率), 사지는 백제의 한솔(扞率), 당은 백제의 나솔(奈率), 대오는 백제의 장덕(將德)에 준하였다. 외관으로서 귀간(貴干)은 백제의 달솔, 선간(選干)은 백제의 은솔, 상간(上干)은 백제의 덕솔, 간(干)은 백제의 한솔, 일벌(一伐)은 백제의 나솔, 일척(一尺)은 백제의 장덕에 준하였다. - 삼국사기 권40, 잡지9, 직관 하 신라 외관[25] 굉장히 작은 영토를 가진 것처럼 표현되곤 하는데, 신라 자체가 원래 영남 쪽의 소국이었음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괄목한 것이다. 게다가 대동강 이남임을 따지고 보면 대동강 근처도 못 가는 대한민국의 '실질적' 영토보다도 컸던 것이다![26] 이 때문에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룬 적이 없고 정신승리만 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후의 고려와 조선 역시 옛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를 온전히 거두지 못했던 건 마찬가지라 현대인 기준의 영토적 관점에서 신라의 통일이 불완전하다고 말하는 경우 고려 역시 같은 이유로 불완전한 통일이 된다. 요동과 한반도를 동시에 아울러야만이 통일이라면 한국사에 완전한 통일 왕조는 예나 지금이나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요동영토와 통일을 불가분한 관계로 정의한다면 당장 지금 남북한이 합쳐도 통일한국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는 말이다(...) 애초에 고구려의 주무대이자 영토가 만주나 요동이었더라도 지금의 우리가 거기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구려 땅은 고구려 땅이었을 뿐이고, 한국 땅은 한국 땅일 뿐이다.[27] 영토 자체는 발해가 차지한 지역이 넓지만 고구려의 대도시 3경 중 가운데 국경에 끼어 몰락한 평양을 제외하고 남북이 각자 하나씩 가져간 형태였고, 옛 고구려의 인구도 중원과 신라로 많이 빠진 상태였다.[28] 이 명칭은 그렇다면 왜 통일 이전의 신라를 '전기 신라'로 부르지 않느냐는 반박이 나올 수 있고 보통 '후'를 붙이는 다른 사례와 달리 왕조의 연속성에 끊김이 없다. 실제로 북한에서 발행된 조선통사, 조선전사, 조선단대사 에서는 '후기 신라와 발해'로 장이 구성되기도 한다.[29] 이성계가 세운 조선을 후조선이라 부르자는 주장도 재야사학 등지에서 나오고 있지만,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 가진 정보량, 현재 대한민국과의 연결성 등이 고대 조선과 비교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사실상 받아들여지는 건 힘든 주장이다.[30] 이러한 주장의 밑바탕에는 발해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고, 신라가 한반도 전체를 통치한게 아니라 반박당할 수 있다. 그런데 '한반도'의 북쪽 경계선(압록강, 두만강)이란 것도 인위적으로 형성된 인문학적 인식이라 후대의 기준으로 논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지리적 의미에서의 '반도'는 가장 반도가 좁아지는 신라-고려시대 국경선 쪽이 압록-두만강선보다 더 일리가 있다.[31] 고려 시대, 특히 고려 초기는 태조 왕건의 역대급 포용책으로 인해 지역별로 정치 분파가 생성 대립하는 성향이 강했고, 지방에서 달려온 세력에 의해 수도의 정치가 뒤집어지는 일이 매우 잦았다.[32] 요컨대 고구려나 백제가 통일했더라 손 쳐도 이런 신분 질서가 완화되길 기대할 순 없다는 이야기. 고려 초에 신분 질서가 완화된 것은 이전 시대까지는 별볼일없는 신분이었던 호족 출신이 새 왕조를 개창했기 때문이다.[33] 그리고 뒤이은 고려 시대만 해도 고려사에서 가장 신분제가 틀에 박힌 문벌귀족 시절이 백성에게는 가장 평화로운 시대였다. 그 이후 개나 소나 권력을 잡는 무신정권부터는 나라가 개막장화된다. 그리고 신라 말기 때의 막장스러운 상황에서는 그런 거 없고 민중 봉기가 일어나는 등 반 신라 세력이 급속도로 증가한다. 그런데 문벌 귀족 시대가 진짜로 백성들에게 가장 나은 시대였는지는 불분명한데, 왜냐하면 단지 시기적으로 가장 유리했던 시기(국초 + 대외적 혼란) 아니냐라는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역사를 기록한 사람들이 그나마 가장 낫게 평가한 시대라서 훨씬 고평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고려사를 기록한 사람들 입장에서 무인들이 활동하던 시대나, 자신들이 비판하고 나선 친원파의 시대를 좋게 평가해줄 이유가 하나도 없다. 즉, 신분제의 고고화가 백성들이 살기 좋았다는 것은 근거가 한참 부족하다. 오히려 역으로 국가의 상황이 좋았기 때문에 기존의 제도인 신분제가 동요되지 않았다는 것이 더 합당한 설명이다.[34] 고려와 달리 신라는 적어도 척신이 권력을 쥐고 흔들진 않았다.[35] 조선에서는 왕실에서 암투는 있었지만, 왕자의 난과 이인좌의 난을 제외하면 왕위 쟁탈을 위한 내전이 일어나지 않았다.[36] 문주왕, 삼근왕 때 백제에서 일어난 반란.[37] 당쟁 등을 언급하면서 한국사를 분쟁의 역사로 몰아세우는 것은 일제 식민사관이 즐겨 써먹던 여론몰이 수법 중 하나이나, 정치가 있는 곳에 다툼은 필연이다. 중국만 해도 60여 개에 달하는 왕조들의 평균 수명은 65년 정도며 진시황 이후의 통일 왕조 중에서 송나라만이 북송과 남송을 합쳐 300년을 간신히 넘겼을 뿐이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 천황제를 천년 이상 존속시켰다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귀족 세력과 다이묘(막부)의 정치적 농단을 그저 지켜만 보다가 가끔씩 쫓겨나거나 죽어나가는 마스코트에 불과하였고, 결정적으로 무슨 무슨 막부 하는 세력들 모두가 천황의 명목상 신하이기는 하되 실상은 서로 항쟁하는 독립된 국가나 다름없다. 즉 따지고 들면 통치 체제가 외침과 내란에 맞서 건재하게 유지됨에 있어서 한반도만큼 안정적인 지역은 오히려 찾기 힘들다. 당장 신라 이후 한반도의 국가들이 건국부터 멸망까지 대항했거나 사대했던 국가들만 따져봐도 이는 간단하다. 신라는 수나라당나라, 고려는 북송원나라, 조선은 명나라청나라.[38] 혜공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해 피살당했고, 나머지 임금들은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오래 왕위를 지키다 세상을 떠나거나 해서 아무튼 50세를 넘기지 못했다.[39] 남북국시대라는 명칭이 최근 학계에서 점차 대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40] 고려는 고토 회복을 노렸지만 주변 상황이 안 따라 줘서 포기하고 조선은 고구려 계승 의식은 있었으나 농사하기 힘든 땅을 무리하게 경영하기보다는 여진족에 대한 간접 지배 방식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신라의 기조를 이어나가갔다.[41] 신라의 기조를 이어나갔다고 표현했으나 간접 지배는 오히려 고구려 당대에도 성행했다. 유목민족에 대해 간접이든 직접이든 통제의 필요성이 높았던 나라는 영토가 맞닿아있었던 고구려, 발해였다. 다만 그때는 여진족의 전신인 말갈족이 충분히 문명화되지 않았던 상태였기 때문에 간접 지배로도 충분히 제어가 가능했으나 발해 멸망 이후, 즉 동양에서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로는 대부분의 유목민족들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날뛰게 된다. 한국사에서는 대표적인 균형 역전 사례 중 하나가 바로 고려의 동북 9성 개척 중 있었던 갈라수 전투이다. 고려는 전대 왕조였던 고구려가 했던 것처럼 옛 부하들이었던 여진족에 대한 종주권을 확보하려 했으나 무려 회전에서 발려버리고 만다. 이 시대 이후로 그나마 유목민족을 제어했던 농경 국가는 거대 제국이었던 명나라였으나 그마저도 실패해서 결국 청나라에 먹혀버렸다.[42] 그냥 원수 사이라고 보면 된다.[43] 당시 시대만 해도 통일 후 골품제에서 신라 >>> 고구려 >>> 백제 순으로 신분 차별하는 나라에 민족적 감정을 대입하여 '우리 민족의 영토를 포기하다니!'라고 비난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신라만 골품제 같은 제도가 있는 것이 아니고, 고대국가 모두 폐쇄적인 신분제도가 있었다. 오히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신분제도 중 신라가 가장 유동적인 신분제도이다[44] 이건 사실 당이 고구려에 집중하는 동안 백제 지역을 확실하게 지배하려는 전략의 일부였다. 백제 멸망 후 당이 정도로 스팀을 받았겠지만, 최대한 전력의 온존을 꾀하며 고구려 멸망 및 구 백제 지역의 확보를 노린 것이다.[45] 백제 부흥 운동의 경우에는 나당 연합군으로 아예 깔아뭉개 버렸지만, 고구려 부흥 운동에 대해서는 일부 지원하고, 실패 이후에는 남부 지방 정착 지원이나 신라 귀족 편입 등 대접의 차원이 달랐다.[46] 사실 고구려와 신라도 그렇게 사이가 좋기까지 하진 않았다. 멀리 동천왕 대에 고구려군의 침공을 받은 적도 있었고, 내물왕 시기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원군을 요청하여 왜군의 침입을 저지한 뒤 이후 신라 영토에 고구려군이 일방적으로 주둔하는 등 고구려의 간섭을 당한 적이 있었다.(이후 눌지왕 시기에 신라에 있던 고구려군을 모두 몰아냈지만) 게다가 광개토대왕 사후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맞서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전쟁을 치르는 한편 진흥왕 때 한강 유역 차지 이후 한강 유역 일대를 놓고 고구려군에게 한강 유역 일대를 공격받으며 고구려 국경 지대에서 고구려군과 신라군 사이에 전쟁이 매번 벌어질 정도였었다.[47] 대야성 함락 직후 김춘추가 당이 아닌 고구려부터 간 이유, 물론 이 기대는 백제와 동맹을 맺은 고구려가 고의적으로 무리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 즉 거절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깨진다. 이 과정에서 김춘추는 옥에 갇힌다. 외교관을 구금하는 것은 당시에도 꽤 과한 처사였다.[48] 일본서기 기록, 성왕관산성 전투 당시 신라 무사 도도(일본서기 기록으로는 고도)에게 참수당했다. 현재 도도의 신분이 정말 종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49] 대야성 전투 당시 성주 김품석의 부인이 김춘추의 장녀 고타소였고, 살아있었다면 당연히 왕녀가 되었을 것이다. 살아서 왕녀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기에, 김춘추의 다른 딸처럼 '공주'나 '부인(신라 시대 왕실 여인에게 붙여진 '부인'이란 호칭은 공주나 왕비와 동일시된다. 가령 진평왕의 왕비는 마야부인으로, 김춘추의 딸이자 김유신의 아내인 지소는 지소부인으로 불린다.)'으로 불리지 않고 '고타소랑'이라 기록된다.[50] 당시 김법민은 "이전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원통히 죽여 옥중에 파묻은 일이 있다. 그것이 나를 20년 동안 마음을 아프게 하고 머리를 앓게 하더니, 오늘날 네 목숨은 내 손에 있구나."라고 말했다. 매우 절제된 언어로 쓰여진 삼국사기 안에서 피냄새와 증오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한 이런 문장도 드물다.[51] 일단 왕건의 전임자인 궁예가 자리잡은 곳이 개성이다. 어느 정도의 경제 & 사회적 기반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일. 실제로 궁예가 철원으로 옮기자마자 나라가 풍비박산나고 왕건 집권 후에 철원을 버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52] 물론 고려의 근본은 지방 세력인 호족의 연합 정권이었기 때문에 지방색이 신라에 비해서 강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53] 여담으로 중근동 쪽 문헌에서는 이미 고려 시대로 접어든 중세 11세기까지도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당시 정보나 교통은 현대 같지 않았다 보니 새로운 왕조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했거나, 혹은 알면서도 과거부터 이미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표기했던 듯 하다. 사실 조선시대에도 외국에서 '고려'라는 명칭을 쓰는 등의 일이 있었고, 멀리 떨어진 아랍도 아니라 가까운 일본이나 여진족에 심지어 19세기 이양선을 타고 오는 서구 열강까지 고려란 표기를 쓰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일은 꽤 흔했던 듯하다.[54] 당나라, 발해, 일본은 물론이고 심지어 멀리 아라비아 상인도 왔다. 이는 당이 다른 중국 통일 왕조보다 더 개방적인 성향이었던 탓도 크다. 반대로 조선이 해외 교류가 거의 없었던 것도 명이 폐쇄적인 성향이었기 때문이 큼.[55] 신라에 대한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이후 당은 주로 서쪽 토번, 일본은 동북방의 아이누족과 대치 국면에 들어갔다. 토번은 송첸캄포 대왕 때 크게 성장하여 안 그래도 한반도 쪽에 신경 쓰느라 바쁜 당을 털어버렸다. 덕분에 신라는 나당전쟁을 승리로 빠르게 당나라 세력을 몰아냈다. 그리고 토번은 당이 막장 테크를 타자 당의 수도인 장안까지 털어버린다.[56] 헤이안 시대의 경총(經塚)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의 금동불입상이 대표적이다. 덴무 덴노 시절에 제정된 팔색성(야쿠사노가바네)이라는 씨성제가 신라의 골품 제도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57] 지금의 중국 길림성 훈춘.[58] 지금의 북한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면.[59] 사실 이때 멸망한 게 아니다. 김순식이라는 사람이 태백 지역에서 후고구려를 잇는 세력을 구축해서 4년을 더 갔다고 한다.[60] 고려 이후 한구라고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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