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중,하

<펌> 장보고 - 위키백과

Chung Park 2019. 5. 30. 07:08

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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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생애 787~846[1]
시대 통일신라 후기(9세기)
다른 이름 아명: 궁복(또는 궁파)
종교 불교
관직 직책: 청해진대사, 감의군사, 진해장군
주군 흥덕왕신무왕문성왕

장보고(張保皐[2], 787년~846년)는 청해진(현 전라남도 완도) 출생으로 남북국 시대 통일신라의 무장이자 해상 호족이다.

생애[편집]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완도군 장좌리 장도.

장보고는 청해진(전라남도 완도) 출생으로 정확한 출생과 계통은 알 수 없으나 780년대 후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활과 창을 잘 다루는 무인 기질을 타고 났다. 그의 이름 장보고도 활을 잘 쏘는 것과 관련이 있다.[3]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그의 본명을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4]라고 적고 있다.

일찍부터 친구 정년(鄭年)과 함께 당의 서주(徐州)로 건너가 그곳에서 승마와 창술에 특출난 재주를 보이며 군인으로서 출사해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5]의 직책을 받게 되었다. 흥덕왕(興德王) 3년(828년) 초에 신라로 돌아온 그는 왕에게 신라인들이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리고 있는 참상을 전하며, 완도에 군사 거점을 세워 이를 금지시켜 줄 것을 청했다. 마침내 승인을 얻어 1만여 명의 군대를 확보한 그는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세우고 대사(大使)가 되었다. 그의 활약으로 827년~835년 이후로 해상에서 신라 노예를 매매하는 일이 사라졌다고 《신당서》 및 《삼국사기》는 평가하고 있다.

장보고는 해적 토벌에 그치지 않고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과 일본뿐 아니라 남방, 서역 여러 나라와의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취하였으며, 아울러 큰 세력을 이루었다. 신라인들이 많이 이주한 산둥 성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신라인들이 법화원(法華院)을 건립하려 하자 그는 이를 적극 지원하였다. 또한 신라인 출신 노예들을 사들이거나 주인에게서 되돌려받아 석방시켰으며, 이들은 신라 출신 이민자들이 건너간 산동 주변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법화원은 상주하는 승려가 30여 명 이상이 되었으며, 토지를 기부하여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장전(莊田)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 신라인의 정신적인 중심지로 성장했고, 법회를 열 때 200~400명까지 인파가 몰려들었다. 골품제와 같은 기존의 신분제에 구애됨이 없이 유능한 인재들을 널리 받아들였고, 또 자신의 진영에 환대하여 신분을 따지지 않고 실력에 따라 대우하여 그들의 능력을 적극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빈민들을 규합하고, 새로운 활동 무대를 찾아 모여든 인재들을 포용하여, 8세기 이래 왕성하였던 신라인의 해상활동 능력을 적극 활용, 이것들을 묶어 조직화하였다.

838년부터 847년까지 당에 머무르며 구법행을 했던 일본의 승려 엔닌(円仁)은 자신이 당에 체재하는 동안 장보고의 휘하에 있던 현지 신라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구법행을 완수할 수 있었고, 장보고에게 감사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귀국한 뒤 엔닌은 히에이 산 엔랴쿠지에 자신이 체재했던 등주(登州)의 신라인 사찰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을 본떠 적산대명신(赤山大明神, 도교의 신인 태산부군泰山府君)을 모시는 적산선원(赤山禪院)의 건립을 발원하기도 했다.

흥덕왕이 재위 11년만에 죽고, 신라에서 일어난 왕위 다툼에서 김제륭(희강왕)에게 패하고 피살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피신해 오자 장보고는 그를 숨겨주었다. 그러나 김제륭도 재위 3년만인 838년 김명이 일으킨 정변으로 피살되고 김명(민애왕)이 스스로 즉위하자, 예전 김균정의 편에 섰다가 패하고 달아난 김양(金陽)이 군사를 모아 청해진으로 찾아와서 김우징을 만나고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나를 도와준다면 내가 왕위에 오른 뒤 당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에 동의한 장보고는 친구 정년에게 청해진의 군사 5천을 내주어 김양과 함께 왕경으로 진격하게 했다. 장보고와 정년이 이끄는 청해진 군사는 무주와 대구를 거쳐 왕경에 입성, 왕경군을 격퇴한 뒤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신무왕)을 추대한다. 이 공으로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책과 식읍 2,000호를 하사받았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이 즉위한 뒤에는 진해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문성왕 2년(840년) 일본에 무역 사절을 파견하고 당에도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는 등 삼각무역을 실시했다.

846년 장보고는 신라 왕실의 명을 받은 자객 염장에게 살해되었다.[6] 문성왕 13년(851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주민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겼다.[7]

평가[편집]

장보고와 정년이 원래 지기였고, 당에서 무령군중소장이 된 사실을 소개한 《삼국사기》 장보고열전의 저본은 중국 당나라 두목(杜牧)이 지은 장보고전, 즉 《신당서》(新唐書)권220 신라전이다. 장보고가 먼저 신라로 돌아가 높은 관위(청해진대사)를 얻은 뒤, 반대로 관직에서 물러나 한미하게 지내던 정년이 장보고를 믿고 그를 찾아갔을 때에 정년을 예를 갖추어 환대한 것, 환영 연회를 벌이던 도중에 국왕이 살해당하고 수도가 혼란에 빠진 소식이 전해지자 장보고가 기꺼이 정년에게 군사 5천을 내어 주어 “자네가 아니면, 이 화란을 진압할 수 없다.”며 반란을 토벌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게 했으며, 이 공으로 장보고는 재상에 등용되고 정년이 청해진대사를 이어받은 사실 등을 적고 있다. 나아가 두목이 장보고와 정년의 교제를 안녹산의 난 때의 곽분양(郭汾陽, 곽자의) ㆍ 이임회(李臨淮, 이광필)의 교제에 빗대어 인의(仁義)의 사람이라 칭찬한 것을 전하면서, 《신당서》열전을 편찬한 송기(宋祁)의 평으로 국난의 시기에 의(義)를 품고 국가의 우환을 먼저 생각한 사람으로서 (晉)의 기해(祁奚)와 당의 곽분양, 그리고 장보고를 거론하고 "어찌 동쪽에는 뛰어난 인물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칭하고 있다. 이를 다시 《삼국사기》에 기재한 김부식은 신라본기와의 기사와 서로 어긋나는 부분을 지적하는 한편으로 장보고에 대한 두목과 송기의 평가를 지지한다. 또한 김유신전의 말미에서도 김유신의 공적을 뛰어나다고 칭찬하면서도 고구려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무용을 함께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후대 조선조의 안정복에게까지 이어졌다.

적산대명신과 신라대명신[편집]

장보고가 활약했던 9세기 전반, 산동 반도의 항구도시였던 적산(赤山), 지금의 룽청 시(荣成市)에는 장보고와 연계한 당시 많은 신라 상인이 거류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을 세웠는데, 이 무렵 당 조정의 명령으로 서둘러 귀국해야만 했지만, 당에 남아서 천태종을 배우기로 결의한 일본의 입당청익승(入唐請益僧) 엔닌(円仁)을 위해, 그를 적산법화원에 머물도록 배려하고, 현지의 중국 관인들과 교섭해, 공험(公驗, 여행허가증)을 얻어내주기도 하는 등~ 엔닌의 9년 6개월에 걸친 구법행(行)을 물심 양면에 걸쳐서 지원했었다.[8]

신라선신당

오늘날 일본 교토 시 북쪽의 히에이 산(比睿山)에 위치한 적산선원에 모셔져 있는 적산대명신(赤山大明神)은 엔닌의 제자가 엔닌의 뜻을 이어 신라인들이 섬기던 신을 모시기 위해 닌나 4년(888년)에 세운 것이다. 흔히 도교의 최고신인 태산부군으로 알려져 있는 이 신에 대해 일각에서는 이 신이 장보고를 모티브로 한 신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적산대명신과 함께 엔랴쿠사 경내에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을 모신 신사도 존재하고 있는데, 현재 일본 시가 현 오쓰 시의 온죠사(園城寺)에도 마찬가지로 이 신라대명신을 모신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이 남아 있다. 엔닌과 마찬가지로 당에 유학했다가 돌아오던 승려 엔친(圓珍)이 바다 위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붉은 옷을 입고 흰 활을 들고 나타나’ 풍랑을 잠잠하게 가라앉혀 엔친을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가 가지고 돌아오던 경법(經法)을 영원히 수호할 것을 맹세한 신이었다 하여 엔친이 가지고 온 경전과 법구를 이 온죠사에 보관하게 된 것이라 한다. 센고쿠 시대 다케다(武田) 집안의 시조로 추앙되었던 헤이안 시대의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미쓰(源義光)가 이곳에서 관례를 올리고 신라사부로(新羅三郞)를 칭한 이래 다케다 집안에서도 이 신라대명신을 가신(家神)으로 섬기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신라선신당 건물은 조와(貞和) 3년(1347년)에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기부한 것이다.

앞서 엔닌이 당나라에서 오대산의 하나인 북대엽두봉(北台葉頭峰, 해발 3,058미터)에 올랐을 때 얻은 향나무로 만든 문수상을 귀국한 뒤인 죠간 3년(861년) 10월에 엔랴쿠사 경내에 따로 문수루(文殊樓)을 지어 모셨는데, 이 문수루는 훗날 오다 노부나가가 히에이 산을 불태웠을 때 소실되고 현재는 재건된 것이다. 이 문수루 옆에는 현재 장보고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완도 장좌리 당제 및 당굿[편집]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장좌리 장도에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송징장군(송징)을 주신(主神)으로 정년장군(정년)과 혜일대사를 좌우에 모신 사당에서 풍어를 비는 당제를 지내고 있으며, 1982년부터 장보고를 함께 합사하여 당제를 거행한다.[9]

장보고를 소재로 한 작품[편집]

소설
  • 김동인 《아기네》, 1932년 - 동아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로 일환이라는 청자에게 역사 속의 사건을 화자가 이야기해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소설은 신문연재분 129호부터 136화까지 궁파(장보고)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기존의 《삼국사기》의 시각대로 궁파를 왕을 도와 큰 공을 세우고도 자신의 딸이 왕비가 되었다가 쫓겨난 것을 보고 홧김에 반란을 일으키려다 염장에게 살해되고 마는, "용기의 뒤에 있어서 그 용기를 빛나게 할만한 사려라는 것이 없는 인물"로 평가.
  • 정한숙 《바다의 왕자(王者)》 - 1960년 4월 29일부터 1961년 6월 3일까지 《경향신문》에 연재된 장편소설. 결말을 맺지 못한 채 연재 중단됐다가 1975년 《민족문학대계》권5에 작가의 퇴고를 거쳐 전재되었고, 문학평론가인 최영호 해군사관학교 인문학과 교수가 남은 원고를 정리해 2008년에 고려대학교 출판부에서 단행본으로 재출간하였다.
  • 조세호 《해상왕 장보고》, 1999년
  • 김중명(金重明) 《고(皐)의 백성》(원제: 皐の民), 고단샤(講談社), 2000년
  • 최인호 《해신》(海神), 열림원, 2003년
애니메이션
  • 《모험왕 장보고》- 서울무비(2002년) 장보고의 일생을 다룬 교육용 플래시 애니메이션.
  • 바다의 전설 장보고》(Legend of Blue) - 서울무비(2002년) 장보고를 모델로 한 SF애니메이션
드라마

장보고기념관[편집]

완도군 완도읍 장보고기념관

완도군은 장보고 대사의 업적을 기리고 해양개척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기념관을 건립하여 역사 문화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전 국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해양관광 명소로 개발하기 위해서 청해진 옛 터에 장보고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장보고기념관은 대지면적 14,472m², 건축면적 1,739m², 전시면적 730m²의 지상 2층 철근콘크리트 건축물로 1층에는 중앙홀, 영상실, 기획전시실, 수장고, 휴게실이 있고, 2층에는 상설전시실인 1전시실, 바닷길, 2전시실이 있다.

1층 중앙홀에는 청해진선박연구소 마광남 소장이 제작하고 (재)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에서 기증한 '장보고 무역선(Trade ships of ChangPoGo)'이 실물의 1/4크기로 제작 전시되어 있고, 중국공예미술대사(中國工藝美術大師) 육광정(陸光正)씨가 피나무로 제작한 '해상왕장보고(海上王張保皐)'라는 작품명의 대형 목조벽화(가로8m × 세로2.2m)가 전시되어 있다. 2층 상설전시실은 '뿌리', '청해진의 생성', '해상제국', '항해' 등 주제별로 4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각 구역마다 주제에 맞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장보고함[편집]

한국 최초의 잠수함인 장보고함은 독일제 209형 잠수함으로, 모두 아홉 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장보고급으로 불리고 있다.

가족관계[편집]

  • 딸 : 후궁 장씨(後宮 張氏)궁인(宮人)
  • 사위 : 경문왕(景文王)
    • 외손 : 궁예(弓裔) - 경문왕에게 버림받은 아들로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
  • 딸 : 부인 장씨(婦人 張氏)
  • 사위 : 김성해(金成海) - 김유신의 후손이자 신무왕의 외손자로 낭관(郞官)을 지냄
    • 외손 : 김정철(金挺喆) - 대총관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문성왕 8년(서기 846) 봄, 청해(淸海)의 궁복이 그의 딸을 왕비로 받아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청해진에 근거지를 두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그를 토벌한다면 생각하지도 못한 후환이 있을 것이 염려스럽고, 그를 그대로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근심하였다. 무주 사람 염장(閻長)은 용감하고 힘이 세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가 와서 말하였다. “조정에서 다행히 저의 요청을 들어 주신다면, 저는 한 명의 졸개도 없이 그저 빈주먹만 가지고 궁복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 임금이 그의 말을 따랐다. 염장은 거짓으로 나라를 배반한 척하고 청해진에 투항하였다. 궁복은 힘센 장사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면서 함께 술을 마시고 매우 기뻐하였다. 마침내 궁복이 술에 취하자 염장은 궁복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벤 후에 그의 무리를 불러 달래니, 무리들이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八年 春 淸海弓福怨王不納女 據鎭叛 朝廷將討之 則恐有不測之患 將置之 則罪不可赦 憂慮不知所圖 武州人閻長者 以勇壯聞於時 來告曰 朝廷幸聽臣 臣不煩一卒 持空拳 以斬弓福以獻 王從之 閻長佯叛國 投淸海 弓福愛壯士 無所猜疑 引爲上客 與之飮極歡 及其醉 奪弓福劒斬訖 召其衆說之 伏不敢動 -삼국사기
  2. 장보고의 한문 표기에 대해 중국 기록은 張保皐, 일본 기록은 張寶高로 표기하고 있다.
  3. “장보고일대기”. 《장보고기념관》. 
  4.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궁복, 《신당서(新唐書)》 신라전이나 《삼국사기》 장보고 열전에는 장보고(張保皐), 《삼국유사》 기이편 신무대왕 염장 궁파조에는 궁파,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에는 장보고(張寶高)로 나타난다. 장보고의 이름에 대해서는 원래 성이 없고 ‘궁복’이라는 고유 이름만으로 불렸던 것이 당에 건너간 뒤 중국식의 이름을 새로 지으면서, 궁(弓)은 중국에 많은 성씨인 장(張)씨로 치환하고, 복(福, 또는 파巴)은 글자의 중국식 발음을 한자로 음차 표기한 것이라는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의 지적이 있다.
  5. 군중소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대체로 1천 명에서 5천 명 정도의 군사를 휘하에 거느릴 수 있는 지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6.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장보고가 사망한 연대를 문성왕 8년(846년)이라고 기록하였으나 《속일본후기》는 조와(貞和) 7년(841년) 11월 중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회창(會昌) 5년(845년) 7월에 전 청해진 병마사가 국난을 당하여 중국에 망명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7. 《삼국사기》 문성왕 13년(851년) 봄 2월조 "十三年 春二月 罷淸海鎭 徙其人於碧骨郡".
  8. 엔닌이 일본으로 귀국할 무렵에는 이미 장보고 자신은 암살된 뒤였지만, 장보고 휘하에 있던 장수 장영(張永)이 대신 엔닌이 귀국할 수 있도록 힘을 써주었다고 한다.
  9. 장도는 장군도(將軍島) 또는 조음도라고도 불렸는데, 장좌교 서북쪽 100m의 장좌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왼쪽의 동백나무숲 언덕에 여섯 기의 무덤이 있는데 그 중 목 없는 시신이 묻힌 1기가 장보고의 것이고 나머지는 그의 양친과 근친 선대의 것이라는 전설이 있으며, 장보고는 반농반어로 먹고 살던 그의 아버지를 따라 이곳 장도 바깥의 바다에서 고기잡이와 노젓기, 수영을 배우고 활과 창으로 무술을 연마하였다고 한다.

참고 문헌[편집]

  • 완도문화원,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당서, 속일본후기, 입당구법순례행기, 장보고의 신연구》 (완도문화원, 1985)
  • 김상기, 고대교역연구와 나말의 해상발전에 취하여 (震檀學報 1·2, 1935)
  • 이영택, 장보고해상노력에 관한 고찰 (한국해양대학논문집 14,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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