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국은 인도양의 스리랑카를 포함한 타밀국이다.

2019. 6. 4. 05:11한민족 역사/기타

탐라국은 어디인가? 지난 번 세계삼한역사학회에서 탐라국이 호주일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을 옮겨 보았다. (본 블로그 글, '탐라국은 어디인가?' 참조) 그러나 탐라국이 황룡사 9층탑에 있는 9국의 하나라는 것을 보고 다시 심층적으로 살펴 보아야 하겠다고 느껴 그동안 이에 대해 자료를 찾아 보았다. 

 

먼저 황룡사에 대해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시절 그 공사를 시작했는데, 계속 사정이 여의치 않아 완공이 연기되었다. 언제 완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장육존상의 재료는 서천축의 아육귝에서 왔다고 하는 점이 눈에 뛴다. 그리고 금과 철인 재료가 바다에 표류하다가 신라에 왔다고 했다. 그리고 목탑을 위해 백제의 아비지란 기술자를 초청했다. 황룡사 9층목탑은 선덕여왕 14년 (645)에 지었다. 

 

"신라 24대 진흥왕 14년(553년), 서라벌 중심에 새로 왕궁을 지으려고 했는데 공사 도중 황룡(黃龍)이 나타나 하늘로 올라가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 삼국사기미추 이사금원년(262) 봄 3월, 왕궁 동쪽 연못에서 용이 나타났다는 기사를 보면 이미 진흥왕대 이전부터 이 인근에는 용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궁전대신 용보다 더 초월적인 존재인 부처님을 모시는 장대한 절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 때부터 진흥왕은 17년간의 공사 끝에 황룡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중건 공사는 진흥왕 이후로도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완공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다.

그후 574년 거대한 불상들인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장육존상을 만드는데 들어간 재료들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서천축의 아육왕이 철 5만 7천 근과 금 3만 분으로 석가의 삼존불상을 만들다가 실패하자 혼자 힘으로는 안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냈다. 이 배가 바다를 떠돌아 다니다가 신라 땅에 닿게 되었으며, 신라인들이 이걸 가지고 삼존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삼존불상 중 장육존상은 금 10,198분·철 35,007근이, 두 협시보살상은 철 12,000근·금 10,136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자료 : 나무위키)

 

"진평왕 6년(584)에 새로운 금당을 짓고, 선덕여왕 14년(645)에 승려 자장이 건의하여 그 유명한 9층 목탑을 지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93년이다. 신라삼보는 9층 목탑과 장육존상,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진평왕의 천사옥대였다고 하는데, 황룡사는 그 2가지를 가지게 된 것.

목탑은 백제에서 불러온 기술자인 아비지(阿非知)와 신라의 김용춘이 소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하였다. 승려 자장이 당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 수십알을 황룡사 목탑의 기둥에 봉안하였다. 황룡사 9층 목탑은 신라를 중심으로 한 주변 9개 국가를 제압한다는 의미에서 9층이다. 이 9층 중 5층의 응유는 신라가 백제를 낮게 지칭하였다고 여겨지는 말이며, 4층 탁라는 제주도, 9층 예맥은 고구려를 뜻한다. " (자료 : 나무위키)

 

황룡사 9층탑은 1층 왜, 2층 중화, 3층 오월 (907-978, 당의 절도사가 세움), 4층 탐라, 5층 응유(백제라 함), 6층 말갈, 7층 단국 (거란, 요나라 (916-1125)), 8층 여적 (여진족), 9층 예맥 (고구려)으로 표시되었다 한다. 

 

탐라국에 대한 자료를 보니 다음과 같은 자료들이 나온다. 

 

1. 탐라국이 언급된 것은 웅진백제 문주왕시절 (476년) 탐라국이 조공을 해 기뻐하고 벼슬을 내렸다 했다. 동성왕 시절(498년)에는 백제의 부용국이 되었다. 

2. 탐라국은 탁국, 탐모라 등의 이름이 있었다 한다. 

3. 탐라국은 백제 남해에 있으며, 백제에서 배로 3달을 가야 도달 할 수 있다고 했다 

4. 탐모라국은 남북이 천여리, 동서가 수백리의 크기를 가진 섬이라 했다. 

5. 탐라국은 신라 문무왕이후 679(662)년 신라의 부용국이 되었다. 

6. 탐라국은 사슴, 노루가 많았다 한다. 

7. 탐라국은 불교를 믿는 나라이다. 

8. 원의 탐라총관부가 1273년 설치되었고 말의 사육장이 있었다. 

 

夏四月 耽羅國獻方物 王喜 拜使者爲恩率
여름 4월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왕이 기뻐하여 그 사신을 은솔로 임명하였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문주왕 2년(476년). 한국 사서 중 탐라국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단이다.[15]

2년 (508년) 겨울 12월 : 남해의 탐라인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교통하였다,

《일본서기》 권17 계체기
平陳之歲, 戰船漂至海東耽牟羅國. 其船得還, 經于百濟, 昌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賀平陳. … (중략) … 其南, 海行三月有耽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鹿, 附庸於百濟. 


을 평정하던 해에, 군선이 표류하여 바다 동쪽의 탐모라국에 닿았다. 그 배가 돌아올 때 백제를 경유하여 가게 되었는데, 창(위덕왕)이 이 배를 후하게 지원하여 보내고, 사신을 같이 파견하여 진을 평정한 것을 기리는 표를 올렸다. … (중략) … 그(백제) 남쪽에 바다로 3달을 가면 탐모라국이 있는데, 남북으로 1000여 리이고 동서로 수백 리이다. 토산물로 노루사슴이 많이 나고 백제에 부용해 있다.


《수서》 백제전

자료: 나무위키

 
탐라국은 백제와 교류하다가, 통일신라이후로는 신라와 활발히 교류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제주도 3성(姓) 시조신의 하나인 고을나(高乙那)의 15세손 고후(高厚)·고청(高淸)과 그 아우 등 3형제가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이르렀는데, 이 때는 신라 성시(盛時)였다. 3형제가 들어와 조공하자 신라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맏아들에게는 성주(星主), 둘째에게는 왕자(王子), 막내에게는 도내(都內)라는 작호를 주고 국호를 탐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서 탐라국이라는 명칭은 유래했으며, 실제로는 ‘섬나라’라는 뜻이다. 성립연대는 신라 성시라는 시기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이므로 문무왕 때로 추측된다. 그 이전의 사회는 3성씨족의 공동연맹체적인 체제로 보이며, 신라의 삼국통일기에 이르러 3성 가운데 세력이 강성한 고씨(高氏) 씨족이 군장(君長)으로 군림해 국주(國主)가 된 것으로 보인다.
설화에 의하면, 처음에는 고을나·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 등 3성의 시조가 모흥혈(毛興穴, 三姓穴)에서 나타나 그 자손들이 나라를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사람은 키가 조금 작고 언어는 한(韓)과 같지 않으며, 개나 돼지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또 노루와 사슴이 많으며, 풍속은 질박하고 비루하며, 여름에는 초옥(草屋)에 살고 겨울에는 굴실(窟室)에 산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한조(韓條)에는 “주호(州胡)"라고 지칭하면서 배를 타고 중국과 한(韓)에 내왕하며 교역을 한다고 하였다. 최근에도 오수전(五銖錢)·화천(貨泉) 등의 중국화폐가 발굴되었다.
대외관계는 제일 먼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백제와 밀접해 476년(문주왕 2) 4월에 사신을 파견해 방물(方物, 토산물)을 바치고 그 사신은 좌평(佐平)의 관등을 받았다. 498년(동성왕 20) 8월에는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다가 백제동성왕이 친히 정벌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고 공부를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고구려와는 가옥(珂玉)을 수출하는 등 교역을 했으나 백제에 복속된 이후로는 교섭이 두절되었다. 한편, 신라와는 662년(문무왕 2) 2월에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함으로써 이때부터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뒤에 일본과 가깝게 지내다가 678년 2월에 신라 사신의 경략을 받았다. 이 뒤로는 신라와 활발하게 교섭하였다.
한편, 중국 당나라와는 661년 8월에 왕 유리도라(儒李都羅)가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또, 일본과는 661년 당나라에서 귀국하던 일본사신의 배가 풍랑을 만나 탐라국에 대피했다가 귀국할 때,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 9명이 이들을 따라 일본에 간 일이 있은 뒤로 매우 교섭이 활발해 많은 왕자와 좌평이 일본을 다녀왔다. 또 680년 9월과 686년 8월에는 일본에서 사신이 왔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 말기에는 점차 복속관계에서 벗어나, 신진세력인 고려에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여 925년(태조 8) 11월 사신을 파견해 방물을 바쳤다. 938년 12월에는 탐라국주 고자견(高自堅)이 태자 말로(末老)를 파견해 입조하고, 고려로부터 신라의 예에 따라 성주·왕자의 작위를 받아 고려의 번국(蕃國)으로서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해 나갔다. 그 후 1105년(숙종 10)고려의 지방행정구획인 1개의 군(郡)으로 개편되면서 반독립적인 체제는 사라졌다."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종업 글)

 

이러한 조건을 갖춘 섬(탐모라국)을 찾아 보니, 인도양의 스리랑카로 나타난다. 

 

스리랑카는 65,000 제곱킬로가 넘는 크기이며, 남북이 길다. 대충 크기가 맞는다. 

그리고 불교 국가이며, 사슴, 노루가 많은 나라이다. 

 

 

 

 

이러한 조건으로 보았을 때, 현재의 제주도, 

세계삼한역사학회에서 주장하는 호주는 아니다. 

현재의 제주도는 동서로 길다. 호주는 사슴의 서식지에서 제외된다. 

 

어느 분은 대만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백제가 지나대륙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제주 고씨가 가지고 있다는 족보의 내용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 

즉 고(고구려계), 부(백제계), 양(양맥족)씨가 지배계층으로 있었으며,

왕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BC 2337년부터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우리말이 있어야 하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대만은 우선 이런 기록을 만족 시키지 못한다. 

 

"개척 설화로서 '삼을나'가 유명한데, 타 지역과 다른 3성(三姓) 신화의 형태이다. 이에 따르면 태고에 양을나(良乙那)[9],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라고 하는 세 신이 모흥혈(毛興穴, 오늘날 삼성혈)이라는 땅에서 솟아 나와 사냥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벽랑국(碧浪國)에서 들어온 세 공주를 아내로 맞아 농사를 짓고 소와 말을 기르며 살면서 제주도의 성씨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신화 형태상 고구려, 백제와 동계인 부여계 신화의 영향이 있다고도 한다. 또, 성씨가 양씨, 고씨, 부씨이기 때문에 양씨는 양맥족이, 고씨는 고구려계가, 부씨는 부여계가 남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탐라국 왕세기에 따르면 무려 기원전 2337년 건국.."

(자료: 나무위키)

 

 

그런데 스리랑카는 이러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킨다. 

 

스리랑카는 현재 타밀어와 싱할라어를 쓰고 있다. 

 

"약 3만년전부터 베다라고 불리는 드라비다인과 혈통적으로 가까운 원시종족이 인도남부에서 건너와 살고 있었지만 기원전 6세기를 전후해 아리아인들이 침공하며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아리아인들과 베다인들이 혼혈되었고 이들이 싱할라족의 기원이 되었다."

(자료 : 나무위키, 스리랑카)


 

스리랑카는 인도대륙의 남쪽지역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타밀문화권에 속한다. 

 

 

Tamilakam in the Sangam period (source : Wikipedia)

 

 

그리고 스리랑카는 1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Pre-historic period

Palaeolithic

 

For most of the Lower Palaeolithic stage, pre-modern humans lived close to river valleys with sparse forest cover or in grassland environments. The population density was very low and so far only two localities of this lower Palaeolithic culture have been found in south India. Pre-modern humans in South India, belonging to the species of Homo erectus, lived in this primitive 'old stone age' (Palaeolithic) for quite a long time, using only crude implements such as hand axes and choppers and subsisting as hunter-gatherers.

 

A discovery of a rare fossilized baby brain in Viluppuram district, by a team of archaeologists was reported in April 2003, It is estimated to be about 187,000 years - 200,000 years or older. The ancestor of modern humans (Homo sapiens) who appeared around 50,000 years ago was more developed and could make thinner flake tools and blade-like tools using a variety of stones. From about 10,000 years ago, humans made still smaller tools called Microlithic tools. The material used by the early humans to make these tools were jasper, agate, flint, quartz, etc. In 1949, researchers found such microliths in Tirunelveli district. Archaeological evidence suggests that the microlithic period lasted between 6000-3000 BCE.

 

Neolithic

 

In Tamil Nadu, the Neolithic period had its advent around 2500 BCE. Humans of the Neolithic period made their stone tools in finer shapes by grinding and polishing. A Neolithic axe head with ancient writing on it has been found in Tamil Nadu. The Neolithic humans lived mostly on small flat hills or on the foothills in small, more or less permanent settlements but for periodical migration for grazing purposes. They gave the dead proper burials within urns or pits. They were also starting to use copper for making certain tools or weapons.

 

Iron Age

 

During the Iron Age humans started using iron for making tools and weapons. The Iron Age culture in peninsular India is marked by Megalithic burial sites, which are found in several hundreds of places. On the bases of both some excavations and the typology of the burial monuments, it has been suggested that there was a gradual spread of the Iron Age sites from the north to the south. Comparative excavations carried out in Adichanallur in Thirunelveli district and in Northern India have provided evidence of a southward migration of the Megalithic culture.

 

The earliest clear evidence of the presence of the megalithic urn burials are those dating from around 1800 BCE, which have been discovered at various places in Tamil Nadu, notably at Adichanallur, 24 km from Tirunelveli, where archaeologists from the 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unearthed 157 urns, including 15 containing human skulls, skeletons and bones, plus husks, grains of rice, charred rice and Neolithic Celts. one urn has writing inside, which, according to archaeologists from the 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resembles early Tamil-Brahmi script, confirming it of the Neolithic period 2800 years ago. Adhichanallur has been announced as an archaeological site for further excavation and studies.

 

Mentions of the political situation of Tamil Nadu before the common era are found in Ashoka's edicts dated c.3rd century BCE and, vaguely, in the Hathigumpha inscription dated c.2nd century BCE. The earliest epigraphical evidence in the Tamil country are that of the Pandya king Kadungon (c. 560-590 CE) who displaced the Kalabhras from the Pandyas country. -Nilakanta Sastri, A history of South India, pp 105, 137 "

 

드라비다족의 타밀어는, 우리말의 뿌리라 하는 산스크리스트어와는 구별되지만, 우리말과 매우 유사한 말이 많다. 타밀과 탐라는 음운상으로도 유사하다. 

 

 

Dravidian Language Spoken Area (source : Wikipedia)

 

Tamil 이란 말의 어원은 Three Kings를 뜻한다 한다. '고을나', '부을나', '양을나' 로 이야기되는 탐라국의 전설과 묘하게 일치한다. 타밀의 3개국왕은 인도 남부, Pandya dynasty, Chola dynasty, Chera dynasty의 왕들을 가라킨다 한다. 

 

"The etymology of the Tamil word for the three kings - Moovendhar (pronounced M?v?ntar) - comes from Tamil ?? (m?) meaning 'three' and ??????? (v?ntar) meaning 'king',[6][not in citation given] so strictly should be translated as 'Lord' (lesser-king) as opposed to 'King' which in Tamil is ???? (K?n).[citation needed] They are mentioned by Megasthenes and the Edicts of Ashoka, and first in Tolkappiyam among Tamil literature who was the first to call them Three Glorified by Heaven (Tamil????????? ?????, V??puka? M?var ?). Ptolemy and the Periplus of the Erythraean Sea mention three kingdoms ruling Tamilakam."

[출처] <펌> Three Crowned Kings - Southern India: Wikipedia|작성자 죽엽

 

"The Three Crowned rulers, or the Three Glorified by Heaven,[1] or World of the Three, primarily known as Moovendhar, refers to the triumvirate of Chola, Chera and Pandya who dominated the politics of the ancient Tamil country, Tamilakam, from their three Nadu (countries) of Chola Nadu, Pandya Nadu (present day Madurai and Tirunelveli) and Chera Nadu (present day Karur in Tamil Nadu and Kerala) in southern India. They signalled a time of integration and political identity for the Tamil people. They would frequently wage war against one another under a period of instability[5] until the Imperial period of Rajaraja I who united Tamilakam under one leadership."

[출처] <펌> Three Crowned Kings - Southern India, Wikipedia |작성자 죽엽

 

 

그럼 남은 지정학적 조건은 백제 남해에 있고, 백제로부터 3달의 항해거리에 있다는 조건이다. 

난 로마 (비잔틴)가 백제라 주장하고,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신라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본 블로그 글,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이다", "로마는 백제이다" 글 참조)

이러한 조건에서 지정학적으로 스리랑카를 포함한 인도남부의 타밀국은 충족된다. 

 

그렇다면, 비잔틴 로마와 페르시아가 스리랑카 포함한 타밀국과 교류가 있었는가? 

그리고 백제의 동성왕, 신라의 문무왕 시절의 탐라국 정벌이 있었는가? 

 

스리랑카를 포함한 타밀국들은 역사적으로 로마, 페르시아, 왜, 중국(현 지나대륙)과 밀접한 무역교류를 하였다고 나온다. 

 

"There was intense Roman trade with the ancient Tamil country (present day Southern India) and Sri Lanka, establishing trading settlements which remained long after the fall of the Western Roman Empire. " (source : History of Sri Lanka, Wikipedia)

"Ancient Sri Lanka was the first country in the world to establish a dedicated hospital, in Mihintale in the 4th century.[62] It was also the leading exporter of cinnamon in the ancient world. It maintained close ties with European civilisations including the Roman Empire. For example, Bhatikabhaya (22 BC - AD 7) sent an envoy to Rome who brought back red coral, which was used to make an elaborate netlike adornment for the Ruwanwelisaya. In addition, Sri Lankan male dancers witnessed the assassination of Caligula. When Queen Cleopatra sent her son Caesarion into hiding, he was headed to Sri Lanka.

The upasampada for bhikkhunis (Buddhist nuns) first arrived in China when Devas?ra and ten other bhikkhunis came from Sri Lanka at the request of Chinese women and established the order there in 429."
(source : Sri Lanka, Wikipedia)

 

따라서 비잔틴 로마인 백제에서 배로 3달을 걸리는 지역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타밀국인 스리랑카 북부와 인도대룩 남부 (Tamil Country)의 역사를 보면 백제의 동성왕, 신라의 문무왕 시절에는 어두운 쇠락기로  표현되며, 별로 역사 기록이 없다. 일부러 언급을 회피한다고 한다. 그때 많은 침략을 받았다 한다.

 

"History of Tamil Nadu : Dark Age (300-700)

After the close of the Sangam era, from about 300 to about 600 CE, there is an almost total lack of information regarding occurrences in the Tamil land. Some time about 300 CE, the whole region was upset by the appearance of the Kalabhras. These people are described in later literature as 'evil rulers' who overthrew the established Tamil kings and got a strangle hold of the country. Information about their origin and details about their reign is scarce. They did not leave many artefacts or monuments. The only source of information on them is the scattered mentions in Buddhist and Jain literature.

 

Historians speculate that these people followed Buddhist or Jain faiths and were antagonistic towards the Hindu religions (viz. the Astika schools) adhered by the majority of inhabitants of the Tamil region during the early centuries CE. As a result, Hindu scholars and authors who followed their decline in the 7th and 8th century may have expunged any mention of them in their texts and generally tended to paint their rule in a negative light. It is perhaps due to this reason, the period of their rule is known as a 'Dark Age'-an interregnum."

 

 

"The Kalabhra dynasty (Tamil: ????????? Kalappirar) ruled over the entire ancient Tamil country between the 3rd and the 7th century in an era of South Indian history called the Kalabhra interregnum. The Kalabhras, possibly Jain, displaced the kingdoms of the early Cholas, early Pandyas and Chera dynasties by a revolt. 

 

Information about the origin and reign of the Kalabhras is scarce. They left neither artefacts nor monuments, and the only sources of information are scattered mentions in Sangam, Buddhist and Jain literature. The Kalabhras were defeated by the joint efforts of the Pallavas, Pandyas and Chalukyas of Badami..... 

 

The origin and identity of the Kalabhras is uncertain. They are generally believed to have been hill tribes that rose out of obscurity to become a power in South India. Their kings were likely followers of Buddhism and Jainism. Some of their coins feature images such as a seated Jain monk, the Buddhist Bodhisattva Manjushri, or the Swastika symbol, with Prakrit inscriptions in Brahmi script on the other side. Later specimens dating towards the 6th century employ both Prakrit and Tamil in their inscriptions and feature images of Hindu gods and goddesses."

 

 

 

 

또 나무위키 자료에서 백제, 왜의 사람들이 탐라국에 표류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런데 해류의 흐름을 보면 탐라국이 스리랑카 주위의 타밀국일 경우 이 해류의 흐름으로 인한 표류 이야기가 들어 맞는다. 

 

 

 

세계 해류 방향도 

 

 

고려시대 항몽전쟁에서 삼별초는 강화도, 진도를 거쳐, 탐라국인 제주도에 들어가 항쟁했다 한다.

그래서 몽골 원이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두고 직접 관리했다고 한다. 그리고 말을 사육했다고 한다. 고려 충령왕이 돌려 달라고 해서 몽골 원이 돌려 주었다 한다. 

 

"1105년 숙종 시기에 탐라국은 탐라군으로 개칭되면서 사실상 속국 지위가 박탈되고, 본토에 있는 중앙 정부의 통제권에 들어왔다. 다만 이후에도 성주는 대를 이어 계속 세습되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은 계속 허용되었다. 몽골 제국과의 여몽전쟁 시기에는 삼별초가 제주도를 점령하여, 최후 항전지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몽골 간섭기에는 말을 키우기 좋은 환경에 주목해 원나라의 직할령인 탐라 총관부가 설치되어 요양행성 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빼앗긴 충렬왕 시기에 일단 반환받았다. 공민왕 때 목호의 난(牧胡)이 일어나 최영 장군이 진압군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자료 : 나무위키) 

 

즉 탐라국이 이때에는 멸망하는 기록이 나와야 한다. 

스리랑카 옆 인도육지에 같은 타밀국으로 있던 Chola dynasty가 있는데 역사가 BC 300 - AD 1279으로 나온다. 전성기에는 인도 동북부 갠지스강까지, 그리고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까지 진출한 왕국이다. 백제 22담로의 하나인 '전라'가 아닌가 생각되는 이 왕국은 1279년 망하고 그 뒤의 역사가 없다. 이러한 역사가 몽고의 점령때와 시기가 거의 맞는다. 

 

고려, 조선의 역사를 보면, 제주도와 제주목사가 있는 제주는 구별되어진 것으로 나온다. 

즉 제주도는 스리랑카 섬(탐모라국)을 의미하며, 

제주는 인도남부지역의 타밀국지역 3개왕국 즉 탐라국으로 사료된다. 

 

"제주란 건널 제(濟) 자를 쓰는데, 고려 무렵에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탐라와 제주란 이름은 조선 시대까지는 어느 정도 혼용되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제주 목사 등이 편찬한 탐라순력도 등을 보면 제주도 섬 자체는 탐라, 제주목(현 제주시) 지방은 제주라 칭하는 형태를 찾을 수 있다." (자료 : 나무위키, 탐라국)

 

신라가 황룡사 9층탑에 언급할 정도의 탐라국은 스리랑카섬 하나의 세력으로 보기에는 약하다. 

그러나 고을나, 부을나, 양을나 3개 성씨의 신화, 

타밀국 3개왕조 Pandya, Chola, Chera의 역사 등을 고려하면  

탐라국은 이들 3개왕조를 포함한 타밀국으로 판단되며,

이들이 연합하여, AD 300-700 기간에 침입한 인도아리안족 (백제, 신라 세력)을, 8세기 이후 몰아낸 것을 감안하면, 황룡사 9층탑에 탐라국이 언급되는 것이 이해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