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모본왕 (48-53 재위) -위키백과

2019. 6. 25. 04:35고구려 상(BC37-AD 391)/동명성왕 - 태조왕 (BC27-146)

모본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Picto infobox prétendant à un trône.png
고구려 모본왕
高句麗 慕本王
지위
고구려의 제5대 태왕
재위48년~53년
대관식모본왕(慕本王)
전임자민중왕(閔中王)
후임자태조대왕(太祖大王)
섭정고재사(48년~53년)
부왕대무신왕(大武神王)
이름
고해우(高解憂)
별호해우(解憂) 해애루(解愛婁) 모본원(慕本原)
묘호모본왕(慕本王)
시호모본왕(慕本王)
신상정보
출생일?
사망일53년
왕조고구려(高句麗)
가문횡성(橫城)
부친대무신왕(大武神王)
모친?
배우자?
자녀고익(高翊)
종교불교(佛敎)

모본왕(慕本王, ? ~ 53년, 재위 : 48년 ~ 53년 음력 11월)은 고구려의 제5대 태왕이다. 이름은 해우(解憂) 또는 해애루(解愛婁)이다. 제3대 왕 대무신왕과 그 원비(元妃)의 자식이다. 

이복형제 호동과의 태자 다툼에서 승리했다. 그런데 부왕의 뒤는 민중왕이 대신 이었다. 이에 대해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대무신왕이 죽을 때 그의 나이가 어려 숙부 민중왕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연의 삼국유사에 의하면 모본왕이 민중왕의 형이라 한다. 고구려의 국왕들 중 김부식의《삼국사기》와 일연의《삼국유사》 기록이 서로 다르게 기록된 군주이다.


민중왕 사후 즉위했으나 성격이 포악해서 원망을 많이 샀으며 결국 왕을 곁에서 모시던 두로에게 살해당했다.

출생

대무신왕과 그 원비에게서 태어났다. 차비(次妃)에게도 아들 호동이 있었는데 모본왕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원비는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만들기 위해 호동을 모함해 자살하게 했다. 고구려 초기 왕족의 성씨는 고씨(高)[1]인지 해씨(解)[2]인지 명확하지 않다.충격적인 내용이 나왔는데 광개토대왕비 내용이나 삼국사기 부분에서 모본왕이 대무신왕의 손자라는 기록이 있기때문

이러면 모본왕의 아버지는 호동왕자라는 설이 된다. 여기서의 원비는 호동의 아내가 되고 결국 아내인 원비가 남편이 딴 여자에게 눈이 팔리자 참소했다는 설이 되고 성인이 됀 모본왕이 흑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생애

32년 호동이 자살한지 한 달만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나[3] 44년 대무신왕이 죽었을 때 아직 나이가 어려서 숙부 해색주(민중왕)가 왕위에 올랐다.[4] 48년 민중왕이 죽어서야 비로소 즉위했다. 성격이 포악하고 국사를 살피지 못해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이 해 10월 왕자 익(翊)을 태자로 삼았다.


49년 후한의 요동태수 채융(祭肜)[5]과 화친하였다. 이 해에는 폭풍이 불고 여름에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등 악천후가 있어 음력 8월에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51년 날로 포악해져 늘 사람을 깔고 앉거나 베개로 삼아 누웠으며 혹시 움직이면 용서 없이 죽였다.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을 쏘았다. 53년 결국 모본왕을 곁에서 모시던 모본(慕本) 사람 두로(杜魯)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뒤는 나라 사람들에 의해 태자가 아닌 고추가 재사(再思)의 아들 궁(태조대왕)이 이었다.[6]

후한 습격 기사의 전말

49년에 장수를 보내 후한의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을 습격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이 기사의 원전인 《후한서》에는 그 주체를 요동 밖 변방의 맥인(貊人)이라고만 하였고[7] 그 거리가 매우 먼데다 고구려는 아직 국가의 기틀도 확립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치열한 왕위 쟁탈전으로 내정이 불안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오환 또는 선비를 고구려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8] 이와 달리 고구려의 습격을 긍정하거나[9] 태원만이 오기라는 설도 존재하기는 한다.[10] 혹은 《후한서》 동이열전에서는 구려(句驪)의 행위라고 한 점을[11] 들어 고구려의 지배 밖에 있던 원고구려인이라고도 한다.[12] 다만 소수설의 경우에도 오환 내지 선비의 협조는 기본 전제로 깔고 있다. 한편 습격의 성격이 영토 확장이 아닌 약탈이라는 데에는 대체로 합치하고 있다.


민중왕과의 관계

삼국사기》에는 민중왕이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아우로 나와 있고, 《삼국유사》에는 민중왕이 대무신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이 죽은 뒤 태자 해우(解憂)가 어리므로 대신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모본왕이 민중왕의 형이라 한다.


가계

  • 조부 : 유리명왕(瑠璃明王, 38~18 재위:19~18) 고구려 2대 국왕이다.
  • 조모 : 왕후 송씨(王后 松氏) -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이다.
    • 부왕 : 대무신왕(大武神王, 4년~44년)은 고구려의 제3대 왕(재위 : 18년~44년)
    • 모후 : 성씨 미상
      • 이복형 : 호동(好童, ? ~32년) 낙랑공주와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진다. 원비의 모함으로 자살한다.
      • 이복형수 : 낙랑공주(樂浪公主, ? ~32년)
      • 국왕 : 모본왕(慕本王, ? ~53년, 재위:48년~53년)
      • 왕비 : 성씨 미상
        • 아들 : 고익(高翊) - 태자 책봉 이외의 기록은 없다.

참고

각주

  1.  삼국사기》13권 고구려본기 제1 동명성왕 1년 “始祖 東明聖王 姓高氏”
  2.  초기 왕족의 이름은 보통 해로 시작하며 《삼국유사》1권 왕력에서는 해가 성씨라고 하였다.
  3.  《삼국사기》14권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15년
  4.  《삼국사기》14권 고구려본기 제2 민중왕 1년
  5.  다른 표기는 채동(祭彤, 蔡彤)
  6.  《삼국사기》15권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1년
  7.  《후한서》1권下 광무제 유수 건무 25년
  8.  池內宏(이케우치 히로시), 〈高句麗王家の上世の世系について〉, 《東亜学》3, 1940. 이병도,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9.  박세이, 〈고구려 태조왕대 이전의 선비 관계〉, 《지역과 역사》vol.30, 부경역사연구소, 2012
  10.  이재성, 〈고구려와 읍락연맹시기의 선비〉, 《동국사학》vol.37, 동국사학회, 2002, pp.467-468.
  11.  《후한서》85권 열전 제75 고구려
  12.  윤병모, 〈AD.2세기 이전 고구려의 요서원정〉, 《국학연구》vol.17, 한국국학진흥원, 2010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