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고이왕 (234-286 재위) - 나무위키

2019. 7. 6. 06:23백제 초고왕-분서왕(166-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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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爾王
고이왕
별호
구이왕(久爾王) · 고모왕(古慕王)
성씨
부여(扶餘) · 우(優)?
고이(古爾) · 구이(久爾) · 구이(仇爾) · 고모(古慕) · 구태(仇台)(?)
부왕
개루왕(蓋婁王)
생몰연도
음력
? ~ 286년 11월
재위기간
음력
234년 ~ 286년 11월 (53년)
1. 개요2. 생애3. 업적
3.1. 군사3.2. 내정3.3. 대외 팽창3.4. 기리영 전투
4. 기타5. 삼국사기 기록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백제의 제8대 국왕 / 건길지.

2. 생애

백제 초기 왕들이 그렇듯 삼국사기상에 기록된 생몰년은 정확성을 의심받는데, 아버지라는 개루왕이 죽는 해인 166년에 태어났다고 쳐도 고이왕이 사망할 때는 120세가 넘는다. 때문에 합리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몇 가지 학설이 있는데, 출신에 대해선 온조계 출신이 아니라 우태(優台)―비류(沸流)계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고는 하는데 확실한 것은 아무도 정확한 건 모른다.

심지어 구태 = 고이왕이라는 학설도 있다. 목지국에 밀리던 백제가 실질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고이왕 시기로 이 고이왕이 시조화 되었다는 이야기. '고구려'의 '소노부' 권력을 '계루부'의 '태조왕'이 잡으면서 계루부 고씨 중심으로 계통을 정리했다는 이야기가, '마한'의 '목지국' 권력을 '백제'의 '고이왕'이 잡으면서 백제 중심으로 계통을 정리했다는 식이 된다. 한편, 구태의 台 자는 '별 태'뿐만 아니라 '나 이'라는 훈과 음도 있기에 '구태'가 아니라 '구이'로 읽힐 여지가 존재한다. 다만 이 해석의 경우는 비류가 건국 시조가 되어야 하고 중국 측 사서도 존재하는데, 왜 김부식이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온조왕 시조설을 주로 하고 비류 백제를 추가설로 더했는지 알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물론 백제 시조 구태를 부여의 위구태로 해석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웃기는 이야기이겠다. 위구태 건국설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데, 문제는 건국과 엮인 중국 측 인물이 공손도이고, 오기를 고려해도 공손탁인데, 공손도이건 공손탁이건 시기적으로 안 맞다는 것이다. 요동의 공손 일족은 한반도와 많이 접해 있어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데, 문제는 등장 시기가 뭘 어떻게 해도 계산이 안 나온다는 것.

좌우지간 이 고이왕의 후손들로 이어지는 계보를 '고이왕계'라고 부른다. 구체적으로는 고이왕 - 책계왕 - 분서왕 - 계왕으로 이어지는 왕통. 고이왕이 초고왕의 동생의 후손이라고 하나, 연령상 고이왕의 나이가 지나치게 많아져 삐꾸난다. 이 때문에 의제된 것으로 보는 편.

서기 260년,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을 하며 직접 40마리의 사슴을 활로 쏘아 잡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무예가 뛰어나고 호방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3. 업적

 

3.1. 군사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사냥을 갔다는 기록을 보아 사냥을 통해 군사를 훈련시키고 인재를 선발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던 걸로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위엄을 더욱 더 돋보이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던것같다.

3.2. 내정

율령 반포와 내정을 크게 정비하였는데, 고이왕 때 정비된 체계가 백제의 패망 때까지 근 400년간 이어지게 된다.

260년 봄 정월, 기존의 좌우보 체제를 개혁하여 6좌평 제도를 두고, 관등을 16품계로 나눠 정비했으며 관직의 위계에 따라 다른 옷을 입게하고 왕과 귀족에 대한 옷을 정하는 등 공복 제도를 정했으며 이것이 왕권의 강화로 이어졌다. 백제가 부족 연맹체에서 고대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더불어 관리로서 재물을 받은 자와 남의 것을 도둑질한 자에게는 3배를 물게하는 동시에 종신 금고(禁錮)에 처한다는 법령을 내렸다.[1][2] 

3.3. 대외 팽창

고이왕은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고 중국의 서진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더불어 직산(稷山)에 자리잡은 마한의 목지국(目支國) 세력을 압도하여 이전의 관계를 청산하고 한강 유역의 실질적인 영도 세력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하였다. 또한 강원도 북부에 자리잡은 동예가 자주 침범해오자 동예와 우호 관계를 조성하기도 했고 한사군의 후신인 낙랑, 대방과도 혼인을 통한 동맹 관계를 형성하는 등 후덜덜한 대외 정책을 펼쳤다.

246년 위나라[3]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는 틈[4]을 타서 낙랑군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더불어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선제 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도 고이왕이 이끄는 백제의 힘이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5]

그러나 고이왕은 재위 기간 내내 괴곡, 봉산을 중심으로 자주 신라와 충돌했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6] 

3.4. 기리영 전투

고이왕이 목지국의 세력을 압도하게 된 것은 직접적으로 삼국사기에서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정황상 기리영 전투와 관련이 있다고 추정되는 것 뿐이다. 애초에 목지국이 왜 쇠퇴했는지, 왜 고이왕 시기부터 문헌 속에서 사라졌는지 아무도 정확하게 모른다. 국사 교과서에 적힌 고이왕의 목지국 병합은 학자들의 학설에 불과할 뿐이다. 기리영 전투 관련 기록은 3가지가 있다.

 

정시 7년(246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였다. 

여름 5월에 예맥을 토벌하여 모두 격파하였다. 한나해(韓那奚) 등 수십 국이 각기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정사 삼국지 위서 제왕기


경초 연간[7]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해서 바다를 건너가 2군을 평정하도록 하였으며, 여러 한국의 신지(臣智)들에게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하였고, 그 다음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 그 풍속에 옷 입고 책(幘)쓰기를 좋아하여, 하호들도 군에 이르러 조알하면서 옷과 책을 빌려서, 스스로 인수와 옷과 책을 갖춰입은 자가 1천여인었다.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은 본래 낙랑이 한국을 통치해왔다며, 진한의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고 했는데, 통역사가 말을 다르게 전하자, 신지가 격분하고 한인들이 분노하여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에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벌하였는데, 궁준이 전사하였으나 2군은 마침내 한을 멸하였다.


정사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


고이왕 13년(246년) 가을 8월,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貫丘儉)이 낙랑태수 유무(劉茂),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왕은 그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眞忠)으로 하여금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잡아오게 하였다. 유무가 이 말을 듣고 분개하였다. 왕이 침공을 받을까 걱정하여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고이왕

 

위 기록들에서 신지(臣智)는 삼한의 군장을 의미한다. 정사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변한과 진한에서 거수(渠帥)들 중 세력이 큰 자를 신지(臣智)라고 한다고 나온다. 중국의 사서 정사 삼국지와 삼국사기 모두 '낙랑태수 유무'가 언급된다. 또한 '대방태수 궁준'과 '삭방태수 왕준'은 동일인으로 추정되며 삭방태수 왕준 쪽이 오기로 여겨진다. '낙랑태수 유무'의 공통된 등장으로 인하여 세 기록은 크게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위 기록들을 정리하면 전개는 다음과 같다. 중국이 한사군에 미치는 통제력이 약해지자 237~239년 위나라 명제는 태수들을 파견해서 낙랑군과 대방군을 평정하고 주변 한(韓) 세력에 회유책을 펼쳤다. 246년, 위나라의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과 함께 고구려 공격에 나선 사이에 낙랑군의 관리였던 부종사 오림은 진한의 8국을 자기 쪽에 넣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통역에 차질이 생겨서 한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마침 태수들이 고구려 원정으로 자리를 비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 틈을 노려서 어떤 한(韓)의 신지(臣智)는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였고, 백제의 고이왕은 낙랑군을 습격했다. 고구려를 공격하러 갔던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은 다시 돌아와서는 복수하겠다며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했던 그 한(韓)을 정벌하게 되었다. 전투 도중에 궁준이 전사하고 말았지만 결국 낙랑군과 대방군이 승리해서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했던 그 신지(臣智)의 세력을 멸망시켰다. 그 한(韓)의 신지(臣智)의 세력은 망해버린 반면, 백제의 고이왕은 침공을 두려워해서 낙랑군에서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보내 낙랑군과 화친을 했기 때문에 안전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고이왕은 치고 빠져서 무사할 수 있었지만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한 한(韓)의 신지(臣智)의 세력은 안타깝게도 멸망하고 말았다. 참고로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한 그 한(韓)의 신지(臣智)가 한의 소국 중 어느 나라의 신지(臣智)인지 알 수 없다. 목지국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고, 신분활국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4. 기타

이병도가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 시기를 이 때로 잡기도 했다.

그리고 이 고이왕이 즉위할 때 저 멀고 먼 대륙에선 촉한의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죽었다.

고이왕-책계왕-분서왕-계왕에 이르는 고이왕계의 시조격 인물이다. 계왕 이후 고이왕계는 초고왕계에게 밀려 왕위를 차지하지 못하는데, 노중국은 고이만년고이해와 같은 고이(古爾)씨 인물들이 고이왕과 연관짓는 의견을 냈지만 확실하지 않다.[8]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고이왕 본기
一年 고이왕이 즉위하다 (234)
三年冬十月 서해에서 사냥하다 (236)
五年春一月 악기를 사용하여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다 (238)
五年春二月 부산에서 사냥하다[9]
五年夏四月 왕궁의 문기둥에 벼락이 치다 (238)
六年春一月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5월에 이르러 내리다
七年 군사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다 (240)
七年夏四月 진충을 좌장으로 임명하다 (240)
七年秋七月 석천에서 군사를 사열하다 (240)
九年春二月 남쪽의 소택지에 논을 개간하다
九年夏四月 숙부 질을 우보에 임명하다 (242)
九年秋七月 서문 밖에서 활쏘기를 구경하다
十年春一月 큰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지내다 (243)
十三年 여름에 가뭄이 심하여 보리가 죽다
十三年秋八月 낙랑의 변방을 공격하여 주민들을 잡아오다 (246)
十四年春一月 남쪽 제단에서 제사지내다
十四年春二月 진물을 좌장으로 임명하다
十五年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다
十五年 창고를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248)
十六年春一月 태백성이 달을 덮다
二十二年秋九月 신라와 괴곡의 서쪽에서 싸워 승리하다 (255)
二十二年冬十月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다 (255)
二十四年春一月 큰 가뭄이 들다
二十五年 말갈의 추장 나갈이 말을 헌상하다 (258)
二十六年秋九月 상서러운 구름이 왕궁 동쪽 하늘에 떠오르다 (259)
二十七年春一月 육좌평 등을 설치하고 직무를 나누어 보게 하다
二十七年春二月 품계에 따라 관복을 제정하다 (260)
二十七年春三月 왕의 동생 우수를 내신 좌평에 임명하다
二十八年春一月一日 남당에 앉아 정무를 처리하다
二十八年春二月 진가를 내두 좌평에 임명하고 다른 좌평도 함께 임명하다 (261)
二十八年春三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다 (261)
二十九年春一月 뇌물을 받거나 도적질하는 관리를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리다
三十三年秋八月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다 (266)
三十六年秋九月 혜성이 자미궁 성좌에 나타나다 (269)
三十九年冬十一月 신라를 공격하다 (272)
四十五年冬十月 신라의 괴곡성을 포위하다 (278)
五十年秋九月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283)
五十三年春一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다 (286)
五十三年冬十一月 고이왕이 죽다 (286)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삼국전투기에서는 비류 전투 설명에 앞서 한반도 정세를 소개할 때 잠시 등장. 고구려와 더불어 제대로 된 군복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참고로 백제군 군복 색은 적색+흰색 조합. 이후 의외로 타이틀 컷까지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1] 다만 고이왕의 업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왕 대의 것이 고이왕 때로 앞당겨져 기록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6좌평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들은 같은 시대 중국의 제도보다 발전된 것이기 때문. 물론 지나친 확대 해석은 피해야 하지만 백제가 중국에서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발전한 것이 사실인데, 그걸 감안하면 중국의 것보다도 앞선 통치 체제를 운영했을 수는 없는 일이다.[2] 교과서에서도 이 제도를 마련한 왕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그냥 백제에 이런 제도가 있었다는 식으로만 언급한다.[3] 조비의 위나라다.[4] 동천왕이 관구검에게 대패하는 전쟁이다.[5] 이 246년에 일어난 전투를 기리영 전투라고 하는데 아직 한사군에 맞서 싸운 기리영 전투의 주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많다. 현재 가장 신빙성 있는 의견은 3가지로 목지국, 백제의 고이왕, 그리고 신분활국이다.[6] 신라가 본격적으로 백제와 국경을 마주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인 지증왕~법흥왕 시대다. 삼국사기에 신라로 기록된 이 시기 충돌의 대상은, 충돌이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진한 계통의 소국들로 추측된다. 백제는 고이왕 시기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내치의 정비/확장에 힘입어 한강 유역을 벗어나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 속에 마한 세력을 흡수하면서 충청도 북부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해, 이런 진한의 소국들과 마찰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7] 237년 ~ 239년.[8] 노중국, <백제의 성씨와 귀족가문의 출자>, <<대구사학>> 89, 2007.[9] 지금의 부산광역시가 아니라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일대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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