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왕
백제 고이왕 百濟 古尒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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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 |
백제의 8대 국왕 | |
재위 | 234년 ~ 286년 |
전임자 | 사반왕 |
후임자 | 책계왕 |
부왕 | 개루왕 |
이름 | |
휘 | 부여고이(扶餘古尒) |
신상정보 | |
부친 | 개루왕 |
고이왕(古尒王, ? ~ 286년, 재위: 234년 ~ 286년)은 백제의 제8대 국왕이다. 구이왕(久爾王)·고모왕(古慕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부여(扶餘) 일본의 사서 《신찬성씨록》, 《일본서기》등 에는 구이(久爾) 또는 구이(仇爾), 고모(古慕) 등의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이왕은 즉위 후 국가체제의 정비와 왕권 강화에 주력하여 고대국가로서의 백제의 기반을 다져놓은 인물이었다.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자로 보는데, 집권력의 강화를 위하여 좌장(左將)을 설치하여 내외 병마권을 관장하게 함으로써 족장들의 독자적인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초고왕, 구수왕과의 가족관계 여부 연대차이로 이견이 존재한다.
생애
고이왕의 가계는 불확실한데 고이왕은 보통 《삼국사기》의 기록을 취해 개루왕의 아들로 보나,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 및 《삼국유사》에는 초고왕의 모제(외삼촌)이라 되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초고왕 사후 20년 뒤에 즉위하여 그때로부터 다시 50년을 재위하였으므로 초고왕의 동생인가 여부에 이견이 존재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구수왕이 죽은 뒤 구수왕의 장자인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어려서 정사를 감당하지 못하자, 사반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온조왕의 형 비류의 후손이라는 설과, 초고왕의 차남의 아들 혹은 손자라는 설이 있다.
그는 재위 기간 중 괴곡(槐谷)·봉산(烽山)을 중심으로 자주 신라와 충돌했다.
내정면에서는 여러 가지 정치 제도와 복식 제도를 제정했으며, 그것은 고이왕이 죽은 뒤에도 지속되어 그 뒤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4백 년간이나 이어져 백제의 기본 제도로 유지되었다.
재위 27년(260년) 봄 정월, 기존의 좌우보 체제를 개혁하여 여섯 개의 좌평(佐平)을 두고, 그들에게 왕명 출납과 창고 관리, 의례 제정, 형벌 제도, 군사 업무를 각각 분담시켜 맡아보게 했다. (자세한 것은 좌평(佐平) 참조.)
또한 16품의 관등 체계를 정비했으며, 관직의 위계에 따라 자주색[紫色], 다홍색[緋色], 푸른색[靑色] 옷을 입게 하는 등 품계에 따른 왕과 귀족의 공복에 관한 제도도 정했다. 이러한 지배체제의 정비를 통해 왕권의 강화를 이루어냈고, 그 성장한 힘을 바탕으로 대외 팽창을 시도하여,
고이왕은 낙랑과 신라 그리고 말갈과 군사적으로 충돌하며 세력을 키워 갔다.
또한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고, 중국 대륙의 서진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말갈(동예라고 불리는)족이 자주 침범해 왔는데, 고이왕대에는 말갈과도 우호관계가 조성되었다.
한사군의 후신인 낙랑, 대방과도 혼인을 통한 동맹관계를 형성했다.
재위 13년(246년) 위나라가 낙랑군(樂浪軍)과 삭방(朔方)과 합공해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서 낙랑군의 변방을 공격하기도 했다.
또한, 한나라와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선제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도 고이왕이 이끄는 백제의 힘이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관리로서 재물을 받은 자와 남의 것을 도둑질한 자에게는 3배를 징출(徵出)케 하는 동시에 종신 금고(禁錮)에 처한다는 법령을 내려 기강을 바로잡았고, 신라의 국경을 침범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평가
한강 유역의 여러 부족 사회를 보다 큰 연맹체로 결속하는 데 중심 역할을 담당하여 백제를 고대 왕국으로 성장케 하였다.
가계
고이왕의 이름은, 먼저 《주서(周書)》 및 《수서(隋書)》의 백제전에 백제의 시조라 기록된 '구태(仇台)'라는 이름을 ‘구이’로 읽어 이것은 ‘고이’와 음운상으로 통한다고 보아 ‘구이=고이’로 해석함으로써 고이왕을 백제 고대국가의 실질적 건국자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반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고이왕을 “초고왕모제(肖古王母弟)”라고 한 것을 ‘초고왕 어머니의 동생’으로 해석하여[1], 고이왕은 온조왕계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우태(優台) - 비류계(沸流系)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2]
고이왕은 대방군의 왕녀를 부인으로 맞아들여 중국 군현과의 관계를 긴밀히 유지 하였다.
가계
- 조부 또는 선조 : 기루왕(己婁王)(己婁王, ? ~128, 재위:77~128)
- 조모 : 미상
- 조모 : 미상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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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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