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트리아
박트리아(Bactriana, 고대 그리스어: Βακτριανα, 페르시아어: Bākhtar, بـلـخ , 중국어: 大夏 대하[*])는 힌두쿠시 산맥과 아무다리야 강(옥서스) 사이에 있는 나라이다. 그 수도는 박트라(오늘날 발크)였다. 박트리아는 동쪽으로 불교의 발상지인 고대 간다라 지방과 마주하고 있었다.
박트리아 언어는 박트리아어(고대 이란어 계열)로 인도이란어파와 인도유럽어족 계통이다. 박트리아인들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타지키스탄에 거주하고 있는 중앙아시아 선조들의 일파다.
박트리아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의 북쪽으로, 근래에는 중앙아시아의 모든 나라를 지칭하는데 쓰인다. 기후가 적합한 산지로, 물이 많고 땅은 비옥하다.
목차
역사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유적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유적(BMAC)는 옥수스 문명이라고도 알려져있으며 기원전 2200년에서 1700년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청동기 문명의 고고학적인 명칭이다. 현재의 투르크메니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북부, 우즈베키스탄 남부, 타지키스탄 서부를 포함하며 아무다리야 강(옥수스) 상류의 고대 박트리아 영역도 포함된다. 그 지역은 소련의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되었고 명명되었다. 박트리아는 박트라(오늘날 발크)의 그리스어식 이름이며 마르기아나는 페르시아인 총독 마르구에 대한 그리스식 이름이었으며 그 수도는 메르브였는데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에 속한다.
학자들은 박트리아는 서유럽과 중앙아시아로 퍼져나간 아리아인들의 고향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2500-2000년경 그들은 서쪽으로는 유럽으로 들어갔고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이란과 인도로 들어왔으며 후에 중앙 아시아 페르시아 제국의 북부 지역이되었다. 산지 국가의 비옥한 토양이 투란 사막으로 둘러싸인 이 영역에서 조로아스터교(자라투스트라)가 성장하였다. 아베스타어는 조로아스터교의 아베스타의 최고 오래된 부분의 언어로 산스크리트어와 연관된 고대 이란어이다. 오늘날 학자들은 아베스타어는 산스크리트어의 사투리였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두 언어 모두 아리아인의 인도 이란어이기 때문이다.
키루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
박트리아는 기원전 600년 무렵에는 메디아의 일부 지역이었는데 언제부터 메디아에 편입되었는지 불명이며 기원전 6세기 중반 키루스 대왕에 의해 병합되었다. 그 후 페르시아 제국의 총독령이 되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3세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패하자 그를 살해한 박트리아의 총독 베수스는 민족적 저항을 조직하려고 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소그디아나와 이란에 그리스 국가들을 건국한다. 다시 옥수스 강 너머로 향하던 그는 강력한 저항을 만났다. 2년간의 마케도니아 제국에 병합하였지만 백성들을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마케도니아 제국은 결국 분열되었고, 박트리아는 셀레우코스 제국이 되었다.
셀레우코스 제국
마케도니아인들은 (특히 셀레우코스 1세와 그의 왕자 안티오코스 1세)가 셀레우코스 제국을 창건하고 이란 동부에 많은 그리스인 도시를 세웠다. 그리고 그리스어가 주로 쓰였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들이 싸워야 했던 많은 어려움들과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공격은 박트리아 총독 디오도토스이 독립(기원전 255년)을 선언하고 소그디아나에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건국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창건자였다. 디오도토스 1세와 그의 계승자들은 셀레우코스 제국 특히 안티오코스 3세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결국 기원전 190년 로마에 의해 격파되었다.
그리스-박트리아는 매우 강하여 그들의 영토를 인도로 팽창시켰다. 박트리아는 대부분 아리아나의 동쪽과 윗쪽에 위치하지만 부분이 아리아나에 북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기름을 제외한 모든 것을 생산하였다. 박트리아를 반란케 한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주인이 된 아리아나의 비옥함 때문에 매우 강력하게 되어 아리아나뿐만 아니라 인도와 더 많은 종족이 그들에 의해 편입되었다.
그리스-인도 왕국
박트리아의 왕 에우튀데모스와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는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북부 아프가니스탄과 인더스 강 유역 일대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인 제국은 동쪽에서 일어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제국은 내부 불화와 계속된 왕위 찬탈로 분열되었다. 데메트리오스가 인도로 진격할 때, 그의 장군 에우크라티데스는 스스로 박트리아의 왕이라 칭했으며, 이에 많은 지역에서 찬탈자가 나타나 스스로 왕을 칭하고 서로 싸웠다. 이러한 전쟁에 의해 그리스인들의 우위는 점차 줄어들었다.
한편, 그들의 실체는 오직 발굴된 주화로만 알 수 있는데, 주화의 대부분은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인도에서 발견된다. 데메트리오스와 에우크라티데스 1세는 아테나이의 표준 주화를 포기하고 토착 표준을 도입했는데, 이는 소수 민족에게 지원을 얻기 위해서였다.
인도에서 이것은 훨씬 더 진척되었는데, 인도-그리스의 왕 매난드로스 1세(인도에서는 밀린다 왕으로도 불린다.)는 불교에 귀의하기까지 하였다. 인도-그리스 왕국은 기원전 10년경에 스키타이인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월지의 이동으로 인한 박트리아 전복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갑작스럽게 멸망하였는데 이는 월지에 의해서였다. 월지족은 본래 현재의 간쑤 지역에 분포했으나, 흉노의 공격을 받아 서쪽의 박트리아로 쫓겨난 후 그리스-박트리아를 멸망시킨다. 장건이 한나라의 사절로서 기원전 128년 월지를 방문하였을 때 그들이 소그디아나(옥서스의 북쪽)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1] 이후 박트리아에 자리잡은 월지족 세력의 일부가 인도로 들어가서 쿠샨제국을 건설하고, 이로 인해 월지는 쿠샨족으로 불리게 된다.
동아시아에서의 기록
대하(大夏)는 기원전 3세기 중국에서 서역의 신비 왕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기원전 126년 장건이 방문하고 나서 부터 동아시아에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장건의 보고서는 기원전 1세기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보고서에는 약 백만의 사람들이 작은 왕 또는 지사의 통치 아래 성안에서 살고 있는 문명 도시를 서술하고 있다. 대하는 시장이 활기찬 부유한 나라이고, 다양한 물품을 거래하고, 멀리는 대륙 남부까지 거래한다. 장건이 대하를 방문할 때는, 주요한 왕이 없었으며, 박트리아 왕국은 월지족들을 지배하고 있었고, 월지족은 옥수스 강(아무다리야 강)을 넘어 왕국의 북쪽에 거주하고 있었다. 한나라는 박트리아(대하), 페르가나(대원), 파르티아의 문명에 관해 듣고서 그들과의 상업 교류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을 듣고서 이와 같이 생각했다. "페르가나(대원)와 박트리아(대하)와 파르티아(안식)은 큰 나라이고, 희귀한 것이 많으며, 고정된 장소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어느정도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한나라의 풍부한 물산에 관심을 갖는다."— 《한서》
장건 이후에 한나라가 실크로드를 통하여 박트리아와 상업 교류를 한 적은 없지만 실크로드는 박트리아 지역과 동아시아의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각주
- ↑ 르네 그루쎄 저, 김호동 외 역,《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사계절, 1998, p.7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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