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당나라/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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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高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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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황제(文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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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황(開皇, 581년 2월 ~ 600년)
인수(仁壽, 601년 ~ 60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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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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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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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원제(武元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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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황후(元明皇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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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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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년 7월 21일 ~ 604년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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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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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년 3월 4일 ~ 604년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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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집권 전
3. 중국의 분열기를 종결시키다
4. 통치
4.1. 후대 왕조에 길이 영향을 끼친 정치 능력
이처럼 수 문제는 스스로 조악한 옷을 입고, 검소한 식단을 유지하며, 모든 일을 하층민의 삶에 따라 시도하려 한 보기드문 명군이라 할 수 있었고, 이에 '한이 고조가 통일하고 문경치세를 거쳐 한무제 시절에야 이룩한 번영을 양견은 그가 통일하고 그가 이루어냈다.'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의 뛰어난 정치능력을 선보였다.
물론 수 문제도 결점이 있었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연마하지 않았고 601년에는 군현의 모든 교육 기관들을 폐지하고 중앙에 국자감만을 두어 귀족 자제들만 공부하게 했다. 나이가 들수록 관리들에 대한 의심이 깊어져 법의 함정을 파놓고 관리들이 걸려들면 가차없이 처단했으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에게 툭하면 매질을 가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또한 말년에 감정의 기복이 심해져서 자신의 기분에 따라 신하에게 벌을 주거나 상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들은 있었지만 그가 이룩한 정치 제도들은 후에 당나라 율령제의 기초가 되어 이후 중국 통일 왕조 체제의 뼈대로 군림하게 된다.
정관정요에서 수 문제에 대한 평가를 보면 그가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는지 그리고 그의 능력을 알수 있는 부분이 나온다.
하루는 당태종이 신하들에게 수 문제에 대해 물으니 신하는 혼자서 늦게까지 일을 하는 수문제를 뛰어나고 근면하다고 평가했는데 당 태종은 그 말을 부정하고 그건 그가 근면하다기보다는 의심암귀라서 중요한 일은 남에게 맡기지 못하고 자기 혼자서 다 맡은 것일 뿐이며 그래서 국가 운영이 늦어진다고 깠다. 여기서 알 것은 수 문제가 중요한 국정 운영과 일은 혼자서 다 맡아서 처리했다는 것을 신하들과 당 태종 모두 동의를 했다는 것이다.[7] 전술한 수문제의 위사전찬이라는 고사를 똑같이 실행한 이가 후대의 당문종. 물론 당문종의 시대는 환관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황제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4.2. 관롱집단 문제
결국 수나라를 무너트린 것도 대규모 지주 출신인 관롱집단의 이연이 건립한 당이었다. 애초에 수나라의 왕족 양씨와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의 이씨 가문이 모조리 한 고을에 모여살던 세력이었다.
이는 양견이 관롱집단이라는 장안 주변 귀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성장한 제왕이라는 점에서 발생하는 역학 관계로, 그들 덕에 제왕이 된 탓에 그들의 세력과 의견을 무시하기가 힘들었기에 발생한 문제다. 따라서 문제는 말년에 점차 노골적으로 관롱집단과의 대립하며 숙청과 비리 척결, 외정이라는 초강수를 쓰게 된다.
문제는 이렇게 양견이 계속해서 관롱 세력들에게 지속적인 강경책을 썼으면 결국에는 관롱집단의 소멸로 이어졌겠지만 양견이 아들과의 정쟁에 휘말리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는 점이다. 수 양제가 탈법적인 수단으로 제위에 오르면서 기존 귀족 세력들에게 좋은 명분거리 하나를 안겨주게 된 것.
결국 수 양제는 최소 귀족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대규모 궁전을 증축하고 대운하를 건설하고 대규모 정벌 사업을 벌이는 활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애당초 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제위에 오른지라 귀족 집단의 지지를 받거나 최소 반발을 막기 위해 귀족들의 비위를 어느 정도 맞춰줘야 할 이유가 있었다. 결국에는 수 양제의 자업자득이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골때리는 짓이지만 그 당시에 권문세족들은 이러한 대운하 공사와 정복 사업에 대해 모두 환영하고 찬성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이후 수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귀족 집단은 존속했으며 관롱집단, 특히 6진 중에서도 무천진을 중심으로 하는 무천진 군벌은 당나라까지 영향을 끼쳤다. 물론 당태종 치세기에는 숨을 죽이고 있었으나, 당고종대에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측천무후. 다만 측천무후가 날려버린 것은 아니고, 측천무후를 핑계로 당고종이 손을 봤다는 것이 최근의 평가이다.
숙종이 장희빈을 핑계로 환국정치를 해서 왕권 강화한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고 보면 된다. 자세한 것은 측천무후 항목 참고.
4.3. 고구려와 전쟁
이때 다른 여러 나라들은 수나라의 제후국으로서 조공을 바치고 있는 동안, 오직 고구려만이 이를 부당하다 생각하여 조공을 거부해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문제는 고구려가 배째라고 나올 경우 다른 제후국들도 같은 태도를 취할까 염려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라 압력을 넣고, 만약 고구려가 거절할시 30만의 수륙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선제 공격을 한 건 영양왕의 고구려군이었다. 고구려는 말갈을 동원하여 요서에 수나라 거점인 영주 일대를 타격하는 한편 거란을 동원하여 발해 연안에 위치한 수나라군을 공격한다
예상 밖의 고구려의 선제 공격으로 뒷통수를 맞은 문제는 당혹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하여금 수륙군 30만 명으로 고구려를 공격한다.
1차 전쟁 당시 고구려와 수나라 양국 간에 어떤 전투가 발생했고 전투 양상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자세히는 알 수 없고 장마와 태풍 등으로 30만 중 8~9할이 전멸하고 때마침 영양왕도 수 문제에게 사과 사신을 보내고 표문에 "요동 분토(糞土)[8]에 있는 신(臣) 고원"[9]이라 칭하는 사과문을 바쳐 교전 없이 퇴각했다는 수나라 측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교전에서 대패했다는 정황을 암시하는 듯한 기록들도 존재하기 때문에[10] 수나라 측에서 고의적으로 패전을 축소 은폐했다고 보기도 한다. 신채호는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 현재는 남아있지 않는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 등의 기록을 인용하여 오늘날 진주 강씨의 시조로 전승되는 강이식이 임유관 전투 등에서 승전을 이뤄내어 이 전쟁을 이끈 주역이라는 설을 내놓기도 했다. 자세한 얘기는 강이식 문서 참조.
한편 요동 분토의 신 운운하는 사과문의 신빙성과 의도를 떠나 고구려내에서는 역대급 대군을 물리쳤다는 자부심에 고취됐던 모양이다. 전쟁이 끝난 직후 신집을 편찬하여 역사를 정리하였고 수나라에 대한 고압적인 태도는 그대로였으며[11] 고구려 공격을 부추긴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여 응징하는 한편 돌궐과는 합종을 시도하여 수에 대해 선제적인 대응을 계속한다.
자세한 전황이 어찌되었든 간에 이 전쟁은 고구려와의 대결에 대한 수나라의 공포가 퍼지기 시작한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며 이는 수양제가 전쟁을 준비하면서 이미 발현되기 시작한다.[12]
5. 말년
자치통감에 따르면 604년 7월 수 문제가 중병에 걸려 장안의 인수궁 대보전에 누워있었는데 문제가 중병으로 오늘 내일하는 상황이 되자, 태자 양광과 월국공 양소, 병부상서 유술 등이 대보전을 지켰고, 선화부인과 용화부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 문제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수 문제는 그녀들이 자기를 시중드느라 휴식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얼마간이라도 휴식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때 선화부인이 문제의 침궁을 떠나 거처로 가는 도중에 태자 양광을 만났다. 양광은 남조의 황녀로 수 문제의 후궁이 되었던 진씨의 미모에 반해 대담하게도 그녀를 겁탈하려고 했다(겁탈했다는 말도 있다). 이에 진씨가 울면서 수 문제에게 "태자가 무례하였습니다" 하고 하소연하자, 수 문제는 그제서야 양광의 진모를 알고 "그 짐승만도 못한 놈이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내가 황후의 말을 들은 것이 큰 실책이었구나!"라고 한탄하며 다시 양용을 복위시키기 위해 유술과 원암을 시켜서 양용을 호출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양광이 선수를 쳐서 유술과 원암을 체포하여 대리옥에 가두고 자신의 군사와 우문술, 곽연을 시켜 황궁을 포위한다.
그 후 수 문제의 처소에서 병 시중을 들던 후궁들이 모두 쫒겨났고 대신 태자궁 신하인 장형이 들어왔는데 그 후 얼마 뒤에 사망하면서 604년 음력 7월 13일(정미일)에 향년 64세에 수 문제는 사망했다. 사망 직전의 양광의 의심스러운 행동으로 살해설이 나돌았고 자치통감에서도 "안밖에서는 자못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며 살해설을 암시하고 있다.(출처 : 사마광, 권중달(역), 자치통감, 수기4 604년)
사후 그는 태릉에 안장되었는데 워낙 검소해서 부장품이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도굴꾼들과 중화민국 때 군벌들 그리고 비적들이 도굴하려고 번번히 시도했으나, 현지 주민들이 별거 없으니 그만두라고 말했다. 그래도 꿋꿋하게 할 일을 했지만 정말 별거 없어서 그만뒀다고 한다.
6. 가족 관계
6.1. 문헌황후와 후계자 선정
또한 새벽에 일어나서 직접 황제의 세수할 물과 의복을 챙겨준 후 함께 가마를 타고 조정으로 갔으며, 정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조정으로 들어갈 때면 그녀도 남편과 함께 대전 밖까지 나란히 걸어 들어갔다. 당시의 법도로는 아무리 황후라고 할지라도 황제와 함께 나란히 걷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이 조정에서 국사를 논의할 때에 문헌황후는 대전의 아래에서 조용히 기다렸다고 한다.
그녀는 수시로 환관을 보내 황제의 언행을 살폈고 통치 시에도 수 문제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무슨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시정하도록 했다. 원로들에게는 예를 갖추어서 대했으며, 딸들에게는 몸가짐을 신경쓰도록 하였고, 공과 사를 구분해서 형제들을 비롯한 친척들을 엄격하게 단속하였다. 한 예로 황후와 가까운 친척이 죄를 짓자 황후와 가까운 친척이니 살려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런 일을 사사로운 정으로 처리할 수 없다며 처벌하게 한 적도 있었다.
물론 의욕과 능력은 별개의 문제였던지라 그녀의 개입이 좋은 결과를 부르지 않았지만
사실 수 문제는 공처가이기도 했는데 부인 덕에 황제가 되었고 부인 또한 행실이 바르고 근검 절약했기 때문에 부인에 대한 어떤 트집도 잡을 수가 없었으며, 서로 상대방을 공경하는 부부 관계였다. 황후는 여걸로써 결혼 시 ‘자기 이외에 어떤 여자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라고 당당하게 요구했으며, '자신 이외의 여인에게서 자식을 보지 않는다.'라는 약속을 받아낼 정도였기에 남편의 여자 문제를 철저하게 통제했다. 또한 첩을 총애하는 대신들에게 벌을 내리거나 파직시킬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황제가 절세의 미인을 인수궁에서 우연히 보고 한 눈에 반해 총애했는데, 문헌황후가 문제가 조정으로 들어간 틈을 타서 몰래 그녀를 죽였고, 그녀의 잘린 머리를 상자에 넣어서 보여주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에 문제가 분노했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화가 난 나머지 혼자 말을 타고 산 속으로 미친 듯이 내달렸는데 재상 고경과 양소 등을 비롯한 신하들이 급히 뒤를 쫒아가 진정시켰다. 이때 문제가 깊이 한숨을 쉬며 “짐은 지존의 천자인데도 자유가 없구려!”라며 한탄했다는데 고경이 일개 부인의 일로 천하의 정치를 버려둘 수 있겠냐며 설득하여 하는 수 없이 궁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사실 이 일화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도 있으므로 일종의 야사로 보아야 할 듯하다.
이때 문헌황후가 자신을 일개 부인으로 표현한 고경을 처형했다는 일화도 있다. 물론 이것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대표적으로 여러 명의 아내를 둔 점 등등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수 문제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문헌황후의 소생이었다. 그녀의 투기가 하늘을 찔렀으니 다른 여자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한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양용과 양광을 비롯한 다섯 아들 모두가 정실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겉으로만 봐선 큰 문제가 없었고 문제는 신하들에게 '짐의 아들들은 모두 한 어미의 소생이라 자식들 간에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툴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자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양견의 아들들은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서 치열하게 다투었다. 수 문제는 국법에 따라 큰아들 양용을 태자로 삼아 후계자로 결정했다가 양광으로 태자를 바꾸었는데 이는 황후의 입김 때문이었다.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양용은 첩실을 둔 것을 숨기지 않았지만 간교한 양광은 첩실을 숨겼다.
게다가 양용은 태자비가 죽었는데도 별로 슬퍼하지도 않자 평소에 양용을 싫어했던 문헌황후는 자신이 추천한 태자비 원씨가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양용이 그녀를 독살하였다고 믿었다는 소문이 있다 카더라. 하지만 이 후계자 책봉은 수 제국 자체를 말아먹은 실책이었다. 자세한 수양제의 술수는 수 양제 항목을 참고하시라.
6.2. 그 외의 자식들
넷째 아들 촉왕(蜀王) 양수(楊秀)도 생활이 양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양제처럼 욕심이 많아서 감히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욕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양광의 술수에 걸려들어서 거세되었다.
막내 아들 한왕(漢王) 양량(楊諒)은 외지에서 세력을 키우며 황위를 노렸다. 수 문제가 죽자 그는 장례를 치르러 장안으로 오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양광에게 패배하여 포로가 되어버렸다.
이처럼 수 문제의 다섯 아들은 한결같이 재물과 여색을 탐했고 서로 우애할 줄을 몰랐다. 애초에 자식들이 하나 같이 이 모양이니 비록 가식이였으나 유일하게 근면하고 검소하게 행동하는 양광에게 눈이 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마도 중국 역사상 최악으로 아들 복이 없는 황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양광이 황궁에서 반란을 일으켜 인수궁을 포위했을 때, 수 문제는 “만약 황후가 살아있다면 짐이 이런 처지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6.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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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 문헌황후 독고씨(文獻皇后 獨孤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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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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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폐황태자 방릉왕 양용(廢皇太子 房陵王 楊勇) 폐위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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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 : 진왕 양광(晉王 楊廣) 황제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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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 : 진왕 양준(秦王 楊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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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남 : 촉왕 양수(蜀王 楊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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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남 : 한왕 양량(漢王 楊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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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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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녀 : 낙평공주(북주 선제의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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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녀 : 광평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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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녀 : 의성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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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후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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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 선화부인 진씨(宣華夫人 陳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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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 용화부인 채씨(容華夫人 蔡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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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 자귀빈(姿貴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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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 위지녀(尉支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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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중 매체에서[편집]
한국의 사극 연개소문에 뜬금없이 등장한 바가 있다. 연개소문이 젊은 시절에 중원에서 놀았다는 설정 때문에 수 황실이 등장하면서 나왔으며, 배우 김성겸이 연기했다. 90년대생들에게는 마수리 할아버지로 유명한 이 배우는 태조 왕건에서 아자개역을 맡았던 배우로 작가도 같았던 덕분에 아자개와 겹치는 부분이 많았고, 아내 눈치만 보는 소심한 공처가로 부풀려서 영락없는 개그 캐릭터가 되었다. 여기에서는 문헌황후의 기질도 상당히 과장되었는데, 아무리 그녀가 당대의 여걸이고 성격이 강했다지만 드라마처럼 황제인 남편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찍어누르지 않았고 그럴 힘도 없었다.
그래도 개그 캐릭터로 묘사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개념 있는 모습도 여러 번 보여주었다. 한왕 양양의 삽질로 30만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목숨을 잃자 병사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냐고 갈구며 자결을 할 것을 명했으며, 한왕이 목숨을 구걸하며 '아바마마' 라고 외치자 공석에서 응석을 부리냐면서 또 갈구었다. 양광의 계략에 넘어갔다지만 황태자 양용의 사치에 대해 크게 한 마디 하기도 했고, 양용의 뒤를 이어 황태자가 된 양광의 완벽함에 대해 여러 번 의심하기도 했다[14]. 죽기 직전 병상에서 자신에게 양위를 협박하러 들어 온 양소 앞에서 아들 광의 위선적인 모습을 깨달았지만 자신의 병이 이미 늦었고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음을 알고 "천자에게는 천자에 어울리는 죽음이 있으니 독주를 가져오라. 내가 마시고 죽겠다"[15]고 명하지만 양소는 "그럴 시간 없습니다."라며 거절하고, 양소가 데리고 온 장형에게 칼에 찔려 살해당한다.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죽은 수 문제의 시신 앞에서 벌벌 떠는 궁녀들을 향해 "봐라, 황제께서 병으로 돌아가신 것이 맞지? 편안하게 가셨지?"라며 양소가 으르듯이 말하고 겁에 질린 궁녀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그러하다고 대답하는 장면이 압권. 더불어 양광도 가서 아버지 앞에서 애도를 가장한 고인드립을 하기도.
홍콩 TVB의 무협 드라마 대운하 초반에서 잠깐 등장한다. 배역은 홍콩의 원로 배우 포방, 1987년 3월에 방송을 시작한 이 드라마는 수문제 말기부터 당고조 이연이 왕이 되기까지를 주요 배경으로 하는 무협드라마이자 퓨전사극. 홍콩 배우 양조위가 민담 속의 인물인 '규염객'으로 등장하는데 규염객의 정체로 연개소문이 꼽히는 야사가 존재하고, 이것에 신채호의 갓쉰둥전을 더한 것이 한국 드라마 연개소문의 설정상 배경이어서 위 드라마와 같이 보면 한없이 미묘함을 느낄수 있다.
이 드라마에서의 수 문제는 전형적인 암군, 혼군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양광의 모함과 계략에 넘어가 사사건건 양용을 갈군다. 수해로 인한 피해로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위해 구휼을 하였다는 이유로 양용을 죽이려고까지 했다. 말년에 양광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되고 이를 두려워한 아들에게 끔살당하는 장면으로 나온다.
중국사에 손꼽을 명군이지만 이상하게도 미디어에선 취급이 별로 좋지 않다.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연개소문에서는 개그 캐릭터로 전락했고, 대운하에선 아예 암군, 혼군으로 나오니(...).
서정원의 삼국왕조실록에서는 양제가 문제를 죽이면서 "아버지가 문제이시니 그 아들인 저는 문제아지요."란 패드립을 치기도 했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중국 왕조가 수나라부터 시작하므로 수 문제부터 목록에 있다. 가계도에는 문제와 황후, 수나라 황족들도 구현되었다.
[1] 하트의 말대로 수 이후 중국이 끝까지 통일국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오대십국시대나 요와 송의 대립 시기나 원이 대부분을 차지했을 때 남송이 멸망하지 않은 채버틴 적도 있었으므로. 하트가 이야기 한 것은 중화제국이라는 관념상의 얘기도 포함해 말하는 것[2] 혹은 개황의 치(開皇之治)[3] 태조(太祖) 무원황제(武元皇帝)로 추존.[4] 이름은 여고도(呂苦桃)로 원명황후(元明皇后)로 추존.[5] 진시황제가 하루에 150근의 서류를 저울에 재어놓고 모두 처리하기 전까지는 식사도 하지 않았다는 형석정서(衡石程書)라는 고사성어와 함께 국왕이 모든 국정을 자신이 나서서 도맡아하는 경우를 가리킨다.[6] 수 문제가 재위 중이던 606년 수나라 인구가 890만 7천여 호(약 4,600만 명으로 추정), 당 현종 재위 당시인 754년경의 당나라 인구가 906만 9천여 호(약 5,288만 명으로 추정).그 말은 수양제가 중국 최고의 성군 중 하나라는 이세민이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막장짓을 했다는 거다.[7] 당 태종도 그가 무능하다기보다는 유능해도 국가 일이 얼마나 많은데 혼자 다 맡아서 처리하냐고 디스한거라. 유능한 것도 인정한 셈이다.[8] 요동의 똥(糞) 땅(土), 그러니까 자신을 최대한 낮춰서 "쓰레기 같은 땅에 있는"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9] 고원은 영양왕의 본명.[10] 두건덕은 수문제 때 고구려에 패배해다 발언하고 독고황후와 수양제 역시 전쟁을 복기하며 당시 고경의 지략이 모자라서 고구려에 패배했다고 발언한다. 고당전쟁 때도 마찬가지로 당나라의 피해를 축소한 정황들이 많기 때문에 여러모로 주의가 필요한 부분.[11] 수양제의 조서를 보면 제후국의 예를 따르지 않았으며 조서를 직접 받지도 않는다고까지 표현한다.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이 오면 부복하고 조서를 받고 내부에서 황제를 칭한 고려조차도 송나라 사신과 조서에 대한 예가 깍듯했다 기록된 것을 생각하면 중국 사신에게 절 시키고 오라가라하는 조공국이 있다는 사실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12] 문황제(수문제) 시절 천하가 강성하여 백만대군을 일으켰음에도 오히려 고려(고구려)에 패배하였다.(文皇帝時, 天下盛彊, 發百萬衆伐遼東, 猶爲所敗)-구당서 두건덕전[13] 그의 아들인 양호는 큰아버지 양광이 시해당한 후 그를 시해한 우문화급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곧 살해당했다.[14] 극중에서 양광은 황위에 오르기 전까지 철저히 연기를 하면서 본 모습을 숨기고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인물로 행세했는데, 문제는 인간이란 결코 완벽할 수 없으며 그럼에도 완벽하게 보인다는 것은 분명히 숨기는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후 병이 깊어지면서 '황태자가 다 알아서 하겠지, 뭐~' 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은 변호 불가.[15] 그전에도 실제 역사처럼 황후의 선택이 수나라를 망쳤다, 황후가 다 망쳤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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