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당나라/수나라

<펌> 수양제 (r 605-616)- 나무위키

Chung Park 2019. 8. 23.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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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世祖)
수나라 명황제(明皇帝),  양황제(煬皇帝)
대업(大業, 605년 ~ 618년 3월)
양(楊)
광(廣)
생몰 기간
569년 ~ 618년 4월 11일
재위 기간
604년 8월 21일 ~ 618년 4월 11일

1. 개요2. 즉위 전3. 즉위 후4. 양제의 무리수: 고구려 원정
4.1. 1차 공격4.2. 2차 공격과 반란의 시작4.3. 3차 공격
5. 파멸6. 가족7. 평가8.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수나라(隋)의 2대 황제. 본명은 양광(楊廣)으로 수나라를 건국하고 중국을 통일한 성군 수문제의 차남이다. 시호는 수 양제로 널리 알려졌지만 이는 당나라 때 붙여진 것이고 수나라에서 바친 시호는 세조 명황제이다.[1] 하지만 전자가 더 유명할 정도로 그의 치세가 막장이었는데, 시법에서 煬(양)은 '여자를 좋아하고 예를 멀리함(好内遠禮)', '예를 내치고 중신을 멀리함(去禮遠衆)', '여자를 좋아하고 정사를 위태롭게 함(好内怠政)', '예를 내치고 올바름을 멀리함(去禮遠正)', '하늘을 거스르고 백성을 해침(逆天虐民)'이란 뜻을 가진 악시(惡諡)다. 여기서 하늘을 거슬렀다는 것은 황제가 되기 위해 아버지와 형제를 해치는 패륜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의 시호처럼 아버지 수 문제(양견)가 통일하고 엄청나게 번성시켜 놓았던[2] 수(隋)나라를 멸망시키는 데(煬) 일조한 황제(帝)다. 참고자료(호부견자가 따로 없다.)

2. 즉위 전

연기와 쇼맨십에 매우 능한 인물로, 태자인 양용(楊勇)은 태자비가 죽었는데도 방종과 사치에 놀아나서 가정을 돌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어머니 문헌황후의 눈 밖에 났다. 이에 비해 차남이었던 진왕(晉王) 양광은 청렴하게 살고, 의관도 누추하게 입었으며 여자를 탐하지 않아 어머니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수 양제도 방탕하고 사치하는 성격이었지만 부모 앞에서는 자신을 철저히 위장했다. 양제는 야심이 큰 사람이었고, 태자가 되기 위하여 온갖 술수를 부렸다. 수 문제가 양광의 왕부로 행차할 때 양광은 미리 젊고 농염한 미희들을 모두 숨기고 늙고 추한 여자들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했다. 이런 식으로 아버지에게 자신은 여색을 밝히지 않는다는 것을 은연 중에 각인시켰다. 이밖에 줄이 잘리고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거문고를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 놓아두기도 했는데, 수 문제는 그것을 우연히 보고 양광은 자기처럼 즐기는 것을 멀리한다고 생각하여 크게 기뻐하였다. 하루는 양제가 사냥을 나갔을 때 소나기가 내렸는데, 시중이 그에게 비옷을 건네주자 그는 입기를 거절하고 말했다. "병사들이 모두 비를 맞고 있는데, 나 혼자 어찌 비를 피하겠는가?" 이 말을 들은 수 문제 부부는 양광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양제는 이런 방식으로 부모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로 인해 수 문제와 모후에게 차기 왕권 주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계략을 써 태자 양용과 사이가 나쁜 양소와 짜고서 부모 앞에서 태자를 중상 모략하며 나쁜 아들로 각인시킨다. 특히 형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어머니 독고 황후가 태자를 찾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궁녀를 태자궁에 보내 술을 마시게 하는 등의 계획적으로 양용이 사치스럽다는 이미지를 뒤집어 씌웠다.

결국 이를 본 어머니는 "양용이 태자 자리에 있으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라 판단, 양광과 결탁하여 태자의 자리에 쫓아내니, 서기 600년 양광이 대신 태자가 된다. 또, 수 문제가 병들자 양광은 태자가 수 문제가 빨리 죽기를 바란다고 모함하였고, 이 모함이 성공하여 자신이 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태자 자리에서 쫓겨나 방릉왕(房陵王)으로 강등당한 양용은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광에 의해 막히자 궁궐 정원의 나무위로 올라가 대성통곡을 하면서 억울하다고 했으나 안습하게도 이 광경을 본 아버지 수문제는 오히려 "용 저놈이 광 말대로 이젠 완전히 미쳤구나!!"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이처럼 양광은 계략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문제가 중국을 통일할 때 직접 큰 공을 세울 만큼 군사적인 재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598년 2월, 영양왕의 고구려 군사들이 의 영토인 요서 지방을 공격하자, 양광의 대군이 전멸해서 부황 양견에게 크게 질책받았다. 양견은 두 자식들인 양광과 한왕 양량에게 자결을 하라 했으나, 모후인 문헌황후가 말렸다고 한다. 한편, 양제가 태자에 책봉될 때, 지진이 일어나고 광풍이 불어 세간에는 양제가 황제에 오르면 분명 수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라고 유언비어가 나돈다. 

2년 후, 어머니 문헌황후가 죽자 피눈물까지 흘리며 부황과 주변을 감동시켰으나, 처소에 돌아가자마자 어머니의 죽음을 아주 기뻐하면서 술과 고기를 즐겼다. 양제의 이중인격을 대표하는 사례다.[3] 깐깐하고 아버지를 휘어잡던 어머니에게 잘 보이려고 자신이 준비된 황제라는 점을 보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양제는, 이제 그 어머니가 죽자 큰 짐 덜었다는 심정에서 그런 행동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당나라에서 정통성을 위해 악의적으로 기록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 후 양제는 대놓고 제위를 노렸다. 그 당시 부황인 문제는 일생을 공처가로 살아왔지만 막상 아내가 죽자 큰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그런 문제에게 예전에 자신이 멸망시킨 진나라(陳) 선제의 14황녀인 선화부인 진씨(처녀 때 이름은 영양공주 진선화)가 눈에 띄게 되고, 문제는 진씨를 가까이 하다가 기력이 쇠해 쓰러지고 만다. 그런데 문제(問題)는 양제 또한 진씨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604년에 수 문제가 중병에 걸려 장안의 인수궁 대보전에 누워있었는데 월국공 양소, 병부상서 유술 등이 대보전을 지키며 황제의 시중을 들었다. 이때 양광은 자신이 제위에 등극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간파하고, 양소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서 황제 사후의 일을 상의했다. 양소는 양광을 황제로 옹립하고자 했으므로 그에게 대비책이 담긴 서찰을 보냈다. 그런데 뜻 밖에도 양소의 서찰이 궁인의 실수로 수문제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수 문제는 서찰을 읽고 진노했다. 그는 자신이 눈을 감기 전에 양광이 양소와 짜고서 제위에 오를 궁리를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즉시 양광을 소환했다.

이때 마침 수 문제가 총애한 진귀인이 울면서 대보전으로 뛰어들어왔는데, 그녀의 옷매무새는 헝클어져 있었다. 수 문제가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양광이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수 문제는 온몸을 바르르 떨면서 양광에게 욕을 했다. "그 짐승만도 못한 놈이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내가 황후의 말을 들은 것이 큰 실책이었구나!" 그리고 나서 양광이 자신의 후궁을 노리고 있다는 것과 자신이 죽기를 바란다는 것, 양광의 사악함을 눈치챈 문제는 조치를 취했다.

수 문제는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유술에게 양광을 폐출하고 양용을 다시 태자로 삼으라는 조서를 쓰도록 했으나, 양광은 수족들을 통하여 대보전 안의 상황을 손금 보듯이 환하게 꿰뚫고 있었다. 행동이 빠른 양광은 한발 앞서 심복들과 짜고 그날 밤에 즉시 군사들을 동원하여 황궁을 포위했다. 그는 유술 등의 대신들을 죽이고 황궁을 장악했고, 장안 인수궁 대보전에서 아버지를 시해했다. 뒤이어 형인 양용에게 조작된 유언장을 보내어 자결하라 일렀으나 겁을 먹고 자결하지 않자, 자신의 근위장 우문지급을 보내 살해했다. 문제가 세상을 떠난 그날 양광은 금으로 만든 함을 선화 부인에게 갖다 주었다. 선화부인과 궁녀들은 양광이 준 함 속에 독주가 들어 있는 줄 알고 혼비백산하여 울음을 터뜨렸지만, 그 함을 열자 독주가 아니라 사랑을 상징하는 동심결[4]이 있었다. 이때 선화부인은 안도하였다고 하며, 뒤이어 양광은 그토록 사모하던 선화부인 진씨를 강제로 범(蒸)하였다. 태자였던 양광이 제위에 오르자 양제의 총애를 받는 선화부인도 정식으로 진귀비로 책봉된다. 하지만 양제의 후궁이 된 지 1년 만에 병으로 겨우 29세에 요절한다. 양제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였다고 한다. 양광의 아버지가 한때는 남편이었고 아버지의 아들이 그녀의 남편이었으니 참으로 다사다난한 삶이었다.

《수서》에서 부황 시해의 근거로 삼는 사항은 문제가 세상을 떠날 때 자리를 지켰다는 점이다. 그런데 같은 《수서》임에도 본기와 열전의 내용이 서로 달라서, 곳에 따라서는, 수 문제가 죽을 때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마찬가지로 선화 부인 진씨에 대한 음행에서도 서로 다른 기술이 존재한다. 이제는 이중 인격에 패륜아다. 물론 그가 정말로 아버지를 살해했는지는 약간 의문이 있으나 적어도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라기는 했을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이 하루라도 빨리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광은 궁정 반란을 통하여 수나라의 황제가 되었으니 그가 바로 수양제이다.

3. 즉위 후

양견과 양광 부자의 행동은 정말 극명하게 대비된다. 양견은 근검절약하고,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20년 넘게 최선을 다해서 천하를 안정시키고 생산을 장려하여 국가와 백성의 재부를 늘려 놓았다. 그러나 양광은 이렇게 해서 쌓인 부를 자신의 욕심과 사치를 위해서 마구 낭비했다. 게다가 천하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을 마구 동원할 수 있었는데, 이 때문에 국가의 근본이 흔들렸다. 아버지가 천신만고 끝에 다져 놓은 기초가 아이러니하게도 아들 양광의 망나니짓을 위한 밑천이 된 셈이다.

하지만 양광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군사를 이끌고 남진을 멸망시킬 정도로 군사적인 능력은 있었으며, 글재주도 있었고, 예술에도 조예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그는 그 좋은 머리로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다채로운 방법으로 아버지의 재산을 14년에 걸쳐 아주 신나게 낭비하기 시작했다. 양제는 604년에 패륜 행각을 통해 즉위하자마자 만리장성을 보수했고, 남북조시대 등의 분열 시대로 인해 남북간의 교류가 원활하지 않다고 판단, 대운하를 다시 건설하게 된다. 대운하는 사실 부황 문제 때부터 시작되었으나 국고의 손실을 염려해 중단했었다. 결국 대운하의 스케일이 커진 것은 양제 때문이다.

거기다가 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할 때, 운하를 따라 40여 개의 행궁을 지었으며, 운하 옆에는 대로를 건설해서 그 옆에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심었다. 대운하 건설에는 동원된 연인원만 자그마치 1억 5천만 명이었고, 심지어 운하에서 얕은 지대가 발견되자, 양제는 관리 책임자와 인부 5만 명을 강가에 생매장하는 극악무도함을 보였다. 얼마나 백성들을 부려먹었는지 물속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물 밖으로 나와 몸을 말릴 시간이 없었던 터라 살이 썩어 구더기가 들끓었다고 한다.

게다가 수도인 장안을 버려두고 낙양에 제2의 수도를 건설하고 경성 낙양 서쪽에 황가의 대공원인 서원을 조성하였는데, 주위가 무려 200여 리에 이르렀다. 날마다 백성들을 강제 동원하여, 공원 안에는 전국 각지에서 진귀한 화초와 나무, 희귀동물들을 수집하는데 날마다 수만금을 뿌렸고, 주위 넓이가 10리가 넘는 인공호수를 파서는 호수 한가운데에다 높이 10장이 넘는 해상신산을 3개나 쌓았다. 각각의 산 위에는 정자며 누각 따위를 세웠으며, 자신의 제2의 수도가 영원히 봄날 풍경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면 궁녀들을 시켜서 비단으로 울긋블긋한 꽃잎을 오려 나무에 가득 뿌리도록 했는데, 색이 선명하지 않으면 다시 갖다 뿌리게 했다니 흠좀무. 거기에 겨울이 와서 호수가 얼어버리면 호수의 얼음을 모두 깨내고 역시 형형색색의 비단을 오려서 만든 연꽃을 뿌리게 했다.

그리고 달밤이면 화장을 짙게 한 수천 명의 궁녀들을 데리고 말을 탄 채 천천히 거닐다가 말 위에서 청야유곡을 연주하게 했다. 재위 3년차인 606년, 양광은 특별한 놀이를 즐기기 위해서 과거 북제, 북주, 남진 왕조의 궁중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며 서커스 공연을 했던 전문 악대와 광대들 집안의 자제들을 징집하여 악호(오락업에 종사하는 특수한 집안)로 편성하는 한편, 6품 이하 관원과 백성 중 이 방면에 특기를 가진 사람들을 경성으로 불러들여 전무후무한 대규모 공연을 거행했다. 이 공연은 수 양제 또한 관람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참가한 사람들에게 특별히 상을 내리게 했는데, 그 수가 3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거기에 공연에 필요한 복장을 만드느라 동, 서 양경의 옷감이 모조리 바닥나기도 했다. 수 양제의 이러한 행동은 영락없는 진나라 이세황제 호해의 재림이었다. 과연 연호부터 대업(大業).

경성 낙양에서 배를 타고 양주로 놀러 가기 위해 양광은 용선과 대규모 선박 수천 석, 잡선 수만 척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이 작업에 투입된 인원만 20만이 넘었다고 한다. 그는 만들어진 대형 용주(大龍舟)를 타고, 황후와 후궁, 대소신료, 승려도사 등은 그 뒤를 잇는 화려한 배들에 타고다녔다, 제1차 남순 때 수 양제가 탄 용주(龍舟)는 상하 4층이고, 높이가 45척, 너비가 50척, 길이가 200척에 이 그 안에는 금은을 장식하여 인테리어가 호화스럽기 짝이 없었으며 배 안에서는 음주와 가무가 끊이지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 황후, 비빈, 대신들도 각각 배를 가졌으며, 수행선이 1,000척을 넘어서 행렬이 전후로 무려 100리나 이어졌다고 한다.

또한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선대가 지나는 곳에는 대량의 기병을 파견하여 호송하게 했다, 이때의 모습도 장관이라서 적힌 바에 따르면 칼과 창과 깃발이 마치 숲을 이룬 듯 했다고 한다. 또한 지나가는 군, 현은 도로를 닦아야 할 뿐 아니라, 운하 500리 이내의 지역은 배가 도착하는 곳마다 지방관이 나와서 양제에게 온갖 진귀한 물품과 산해진미를 갖다 바쳐야 했는데, 그냥 요리도 아니라 그 지역의 가장 맛있는 요리만을 바쳐야만 했다. 이러다 보니 양제가 지나가는 곳에 위치한 군, 현은 헬게이트가 열렸다. 군, 현의 관료들이 앞다투어 요리를 바쳤고 양제에게 풍성하게 바친 자는 승진하고, 약소하게 바친 자는 벌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지방 관리들은 수 양제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백성들을 수탈하고 쥐어짜서, 많은 민간의 재물들이 엄청나게 수탈당했다. 배가 떠날 때가 되면, 이 음식들 중에서 다 못 먹은 것은 그냥 그 자리에서 구덩이에 묻어버리고 떠났다. 이로 인해서 많은 백성들이 집안 살림이 거덜날 정도로 가산을 탕진하였다. 거기다가 배는 그냥 움직이는 것도 아니라서 백성들이 강 양편 언덕에서 끌고 이동했다. 배를 끄는 사람을 전각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을 모두 더하면 무려 8만여 명이었다고.
 

그외에도 강남 놀이가 싫증이 나면 양광은 생각을 바꿔서 서북쪽으로 행차했다. 양광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아첨꾼과 간신들은 서역 소국들의 국군과 사신들을 후한 선물로 꼬드겨서 양광이 지나는 길에 무릎을 꿇고 영접하도록 했다. 북방에 유람을 떠나다가 길이 막히면 태행산에 굴을 뚫었고, 근처 백성들을 동원하여 굴을 뚫고 대로를 건설하였으며, 100만여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20일 만에 장성을 쌓기도 하였다. 이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 당연히 기일이 늦어지기 마련이고, 그 때문에 커다란 눈보라의 습격을 받아서 양제의 북방 원정을 수행하던 병사들 상당수가 동사했다. 말이나 노새의 사정은 말할 것도 없어, 거의 열에 아홉 정도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에는 양광이 지나는 곳마다 해골이 땅바닥에 널렸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과거에 백성들은 홍수가뭄메뚜기 떼 같은 천재지변을 가장 두려워했지만, 양광이 황제로 있는 동안에는 양광의 놀이에 따른 재난을 더욱 두려워했다. 해마다 거르지 않고 놀러 나가는 양광의 놀이 행렬은 인원이 수십만 명에 이를 정도로 그 규모가 방대했고, 이 행렬은 온갖 명목을 붙여서 백성의 재산을 쥐어짜냈다. 이런 무지막지한, 거의 약탈에 가까운 행렬이 지나가고 나면 지방의 재정은 바닥이 났고, 백성들은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당시 천재지변에 희생당한 사람보다 양광의 무분별한 놀이와 그에 따른 대재앙으로 희생당한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주변 상황이 이렇게 막장으로 치닫게 되자 백성들이 스스로 자기 손이나 팔을 잘라서 노역을 면하고자 하였던 적도 있었다. 여기서 복수복족(福手福足)이라는 말이 나왔다. 팔, 다리가 없는 것이 이라는 뜻. 그리고 마지막에 양광은 남자가 부족하니까 여자들까지 징용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국가 막장·멸망 테크.

나중에, 양제는 건축가에게 '이동식 궁전'을 지으라 명했는데, 이 궁전을 관풍행전(觀風行殿)이라 칭했다. 이 궁전은 언제든지 조립과 해체가 가능했다고 한다.

신하들도 양제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것을 알고 있었으나 간언을 했다가는 양제의 분노를 사서 처형되었던터라 간언을 못했다. 또한 설도형(薛道衡)이라는 수 왕조 초기에 가장 유명한 시인이 쓴 석석염(昔昔鹽)이라는 시가 있었는데, 그 시는 특히 후반부에 있는 ‘어둑한 창문엔 거미줄이 드리우고, 빈 들보에선 제비 집 진흙이 떨어지네[暗牖懸蛛網 空梁落燕泥(암유현주망 공량낙연니)]’라는 대목이 특히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수 양제는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이어서 늘 자기 실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그 자신도 연애시 몇 수를 지었는데, 다른 사람이 시를 써서 이름을 날리면 몹시 기분 나빠했다. 그래서 양광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설도형의 이 시를 보고 질투심을 느껴 결국은 누명을 붙여서 설도형을 살해한다. 그 뒤 양광은 설도형의 시신을 보면서 "그래, 지금도 '빈 들보에선 제비집 진흙이 떨어지네'라고 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인간 말종 인증을 해 버렸다.

4. 양제의 무리수: 고구려 원정

하지만 양제의 실책 중에서도 최악은 바로 고구려 원정이었다. 사실 양제는 대외적으로도 강경한 입장이었다. 이즈음 돌궐 원정에 서역과 토욕혼(土谷渾)을 정벌하여 각국의 왕이 자신에게 입조하게 하는 등 대부분의 원정은 성공했다. 사실 여기에만 그쳤으면 양제는 개인의 학정에도 대업을 이룬 통일 왕조의 군주라는 식으로 포장시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장 한무제만 해도...

그런데 오직 고구려만이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입조 및 조공을 거부했다. 사실 이것은 양제뿐만 아니라 문제에게도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문제에게도 중요한 문제??고구려가 조공을 거부한다면 이것은 다른 속국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고구려와 같은 형태로 나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어떤 수를 쓰더라도 고구려의 제압이 필요했을 것이다. 애초에 양광의 아버지였던 수문제가 고구려에 서한을 보내 조공하라며 압력을 넣었지만 거부했고 오히려 수나라 요서 지역을 선제 공격했을 뿐더러 문제가 수륙군 30만 명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그 여파로 수나라 국력이 상당 부분 손실을 봐 한동안 공격을 멈춘 상태에서 고구려가 기세등등했었던 터라 이러한 요구를 들어줄 리가 없었다.

한편 양광은 돌궐에 방문했을 때 우연히 고구려 사신을 만났고, 그 사신에게 고구려 왕의 입조와 조공도 요구했으며 이를 어길 시 고구려를 정벌하겠다고 위협한다. 당연히 사신에게 보고를 받자 고구려의 영양왕은 이러한 요구가 부당하다 생각하여 거절하였고 양광은 수 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과 입조하라며 압력을 넣었지만 영양왕은 전혀 응하지 않았다. 이에 양광은 아버지 양견이 축적한 모든 부를 탕진해서 고구려를 치고자 했다. 아버지 문제가 고구려를 공격한 598년 이후 14년 만이다. 그것도 1번이 아닌 3차에 걸친 대원정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4.1. 1차 공격

“고구려 작은 무리들이 사리에 어둡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 예맥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비록 (漢)과 (魏)의 거듭된 토벌로 소굴이 잠시 기울었으나, 난리로 많이 막히자 종족이 또다시 모여들어 지난 시대에 냇물과 수풀을 이루고 씨를 뿌린 것이 번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저 중화의 땅을 돌아보니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오래되어 악이 쌓인 것이 가득하다. 

하늘의 도는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리니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도리를 어지럽히고 덕을 그르침이 헤아릴 수 없고, 간사함을 가리고 품는 것이 오히려 날로 부족하다. 조칙으로 내리는 엄명을 아직 직접 받은 적이 없으며, 조정에 알현하는 예절도 몸소 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도망하고 배반한 자들을 유혹하고 거두어들임이 실마리의 끝을 알 수 없고, 변방을 채우고 개척하여 경비초소를 괴롭히니, 관문의 닦다기가 이로써 조용하지 못하고, 살아있는 사람이 이 때문에 폐업하게 되었다. 

옛날에 정벌할 때 천자가 행하는 형벌에서 빠져 이미 앞에 사로잡힌 자는 죽음을 늦추어주고, 뒤에 항복한 자는 아직 죽음을 내리지 않았는데, 일찍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길러, 거란의 무리를 합쳐서 바다를 지키는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일을 익혀 요서를 침범하였다. 또 청구(靑丘)의 거죽이 모두 직공(職貢)을 닦고, 벽해(碧海)의 물가가 같이 정삭을 받드는데, 드디어 다시 보물을 도둑질하고 왕래를 막고, 학대가 죄 없는 사람들에게 이르고 성실한 자가 화를 당한다. 사명을 받던 수레가 해동에 갔을 때 정절(旌節)이 행차가 번방의 경계를 지나야 하는데, 도로를 막고 왕의 사신을 거절하여,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신하의 예절이라고 하겠는가? 

이를 참는다면 누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인가? 또 법령이 가혹하고 부세가 번거롭고 무거우며, 힘센 신하와 호족이 모두 권력을 쥐고 나라를 다스리고, 붕당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풍속을 이루고, 뇌물을 주는 것이 시장과 같고, 억울한 자는 말을 못한다. 게다가 여러 해 재난과 흉년으로 집집마다 기근이 닥치고, 전쟁이 그치지 않고 요역이 기한이 없고 힘은 운반하는 데 다 쓰이고 몸은 도랑과 구덩이에 굴러 백성들이 시름에 잠겨 고통스러우니 이에 누가 가서 따를 것인가? 

경내(境內)가 슬프고 두려워 그 폐해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머리를 돌려 내면을 보면 각기 생명을 보존할 생각을 품고, 노인과 어린이도 모두 혹독함에 탄식을 일으킨다. 풍속을 살피고 유주(幽州), 삭주(朔州)에 이르렀으니 무고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죄를 묻기 위해 다시 올 필요는 없다. 

이에 친히 6사(六師)를 지배하여 9벌(九伐)을 행하고, 저 위태함을 구제하며 하늘의 뜻에 따라 이 달아난 무리를 멸하여 능히 선대의 정책을 잇고자 한다. 지금 마땅히 규율을 시행하여 부대를 나누어서 길에 오르되 발해를 덮어 천둥같이 진동하고, 부여를 지나 번개같이 칠 것이다.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갑옷을 살피고, 군사들에게 경계하게 한 후에 행군하며, 거듭 훈시하여 필승을 기한 후에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좌(左) 12군(軍)은 누방(鏤方)·장잠(長岑)·명해(溟海)·개마·건안(建安)·남소·요동·현도·부여·조선·옥저·낙랑 등의 길, 우(右) 12군은 점제(黏蟬)·함자(含資)·혼미(渾彌)·임둔(臨屯)·후성(候城)·제해(提奚)·답돈(踏頓)·숙신·갈석(碣石)·동이(東▣)·대방·양평(襄平) 등의 길로, 연락을 끊지 않고 길을 이어 가서 평양에 모두 집결하라.

《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수양제가 직접 작성한 선전포고.

과연 일단 하겠다 마음먹은 순간 규모 하나는 크게 벌리는 수 양제 답게 전쟁 준비를 하는 데에도 엄청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고구려 침공을 위해서 준비하던 당시 산동 해안에서는 전쟁에 필요한 배를 만들었는데, 양제가 대운하를 만들 때 그러했듯이 완공 기한이 촉박하였고 기술자들은 밤낮없이 쉬지도 못한 채 물 속에서 일해야만 했다. 그 때문에 하반신이 썩어 문드러져서 죽은 자가 전체 인원의 40%에 육박했다.

또한 백성들을 징집하여 식량을 운반했는데, 운반 기구가 모자라 작은 수레까지 동원했다. 하지만 식량을 많이 싣지 못하는 데다가 길이 너무 멀어서, 가는 도중에 식량을 다 먹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막상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건네줄 식량이 없어서 백성들은 도망가기 일쑤였다. 게다가 천리나 되는 수송로에서 수십만의 백성들이 밤낮으로 군수 물자를 운송하다보니 병사하는 자, 피로에 지쳐 쓰러지는 자가 속출하여 시체가 길을 덮었기 때문에, 코를 막아야 길을 지날 정도였다.

어쨋든 그렇게 백성들을 닦달하며 피를 묻혀 가면서 전쟁 준비를 한 양제는 612년 정월 113만 3,800 대군[5]을 이끌고 대대적인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출발만 해도 40일이 걸렸으며 그 행렬이 자그마치 1천여 리(400km)가 되었다. 좌장군 우문술의 군사 45만 명, 우장군 우중문이 이끄는 군사 45만 명의 대규모 출정이었다. 그리고 양제 자신이 이끄는 군사 수만 해도 26만 명이고 행렬은 200(73km)여 리에 달했다 한다.

참고로 이 수치는 비수대전과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기 전까지 세계 역사에서 가장 많은 군사 수를 동원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게다가 근현대에는 병기의 질이 압도적으로 뛰어나다면 수적 열세는 쉽게 극복할 수 있지만, 고대에는 그런 거 없고 인구가 제일 많은 나라가 최강국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당연히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이었고, 며칠에 걸쳐 그 성을 함락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해 3월 고구려 국경 지역인 요하에 도착하여 강을 건널 부교를 만들고 고구려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부교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제라 그런지 강을 건너기엔 짧았다. 이 장면을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불과 1장(丈:약 3m)이 모자라서 건너지 못하고 대규모 피해를 입는 것으로 묘사했다.

수나라 군사들이 부교를 건너지 못해 우왕좌왕하자 고구려군은 이 틈을 이용해서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결국 강을 건너기에 앞서 많은 수나라 군사가 죽어야 했다. 양광은 부교 건설 책임자인 우문개를 질타했고 군사를 재정비한 다음 부교를 다시 만들어 도하를 시도했다. 이번에는 도하에 성공하여 고구려군은 수많은 수나라 군사 앞에 무너져 1만 군사를 잃고 요동성으로 대피한다.

도하에 성공한 양광은 요동성을 겹겹이 포위했고 100만 군사라면 함락은 시간 문제라고 판단했다. 요동성은 평야성이고 규모가 컸는데, 방어적으로 규모가 큰 평야성은 매우 불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세민은 요동성의 상황을 잘 공략해서 약간의 시간으로 함락시켰다.[6] 그 때문에 요동성은 방어력을 높이고자 성벽이 높았는데,[7] 성벽 높이는 30m인 데다가 주변의 산과 더불어 길이가 3.5km였다. 수나라 군사는 성벽을 올라가려 시도하였지만 사다리가 요동 성벽보다 낮아 올라갈 수 없었고 후퇴한 뒤 다시 재정비하여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이 돌과 화살 세례를 퍼부으며 끈질기게 저항하여 올라가지도 못하고 다시 후퇴한다. 그러자, 성벽과 성문을 파괴하려 했지만 내구도가 중국의 성과 달라서 안 부서졌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성은 중국의 벽돌성과는 전혀 다른, 돌로 만든 석성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 시대 벽돌성은 중국에 있고, 석성은 한반도와 만주에 분포한다. 황하 지대의 황토는 판축법이라고 흙을 틀 안에서 때리고 다져서 벽을 올리는데[8] 웬만한 벽돌보다 튼튼하게 뭉친다. 게다가 이 흙은 벽돌로 구우면 경도도 높고 튼튼해서 중국에서 벽돌 건축이 발전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는 고대 춘추전국시대 때부터 일관되게 사용되어 온 건축 기법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역시 암석의 부족 때문에 벽돌을 이용한 건축 기법이 발달하였다.

반면에 부여와 고구려가 있던 만주백제와 신라가 있던 한반도에서는 화강암을 이용한 석조 건축 기법이 발달해서 에서 만든 석탑만 화강암으로 만든 게 아니라 성벽도 화강암을 통으로 잘라서 만들어 썼다. 본래 요동성은 중국이 요동 일대를 차지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성이었다. 고구려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빼앗은 성이지만, 군사적으로 중요한 땅이라 성벽을 갈아엎은 상태였다. 아무리 벽돌이 판축 기법으로 만들어서 튼튼하다 하더라도, 거대한 화강암을 통으로 사용한 것과 내구가 다르다. 거기다 화강암 항목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성문과 다리도 화강암으로 만들어서 견고하다.

벽돌을 쌓으면 끝인 중국의 성과는 달리, 고구려의 석성은 쌓은 돌을 흙으로 애워 감싸서 더욱 단단하니, 중국의 벽돌성을 기준으로 만든 수나라의 무기로는 당연히 부술 수 없었다. 수나라 군대는 판축 토성과 벽돌성에 익숙하고 청야전술을 겪어보지 못하여 공성전에서 헤멨다. 그렇게 공격을 말아 먹는 상황인데도 설상가상으로 수 양제가 자신의 명령 없이는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는 군령을 내렸다. 때문에 수나라 군대가 물량으로 밀어붙여서 지친 고구려군을 공격할 기회를 노려도 수 양제에게 먼저 보고해야 했다. 따라서 수나라 군대는 군사를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 공격을 해도 고구려군이 이 틈에 재정비를 하거나 수나라의 움직임을 먼저 눈치채 대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요동성에서 투항 의사를 내비친 한 고구려인이 "지금 요동성은 재정비를 못 했으니 지금 공격하면 함락시킬 수 있다"고 했지만 그걸 또 다시 황제에게 보고하러 가서 시간 손실이 났다. 이러니 번번이 요동성 사람들에게 재정비할 시간을 주었고, 뒤늦게 공격해도 이미 요동성은 재정비가 끝났다. 그리고 배반 의사를 내비친 고구려인은 끝내 요동성 영주에게 드러나 죽었다. 이에 우중문은 요동성 함락이 쉽지 않다고 판단하여 양광에게 가까운 육합성을 먼저 공격하자고 제의했다. 양광이 이를 허락하자, 우중문은 요동성을 공격하여 고구려군의 눈을 돌리는 한편 일부 군사를 이끌고 육합성을 공격했지만 이 육합성도 고구려군의 철벽 수비에 밀려 함락시킬 수 없었다.

한편 수나라 수군의 장수 내호아는 수군 10만 명을 평양성 인근에 상륙시키고 나서 부 수도를 직접 공격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이는 양광의 명령을 거부한 거나 다름없었다. 양광은 출정 전의 각 장수들에게 육군과 수군이 협공으로 평양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었는데, 내호아는 전공에 집착한 나머지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하려 들었다. 이러한 집착은 끝내 패배로 이어져 고구려 영양왕의 동생 고건무에게 수나라 수군의 절반 이상이 궤멸당했고 내호아는 급히 물러나야 했다. 수나라 육군의 상황도 비슷했다. 요동성을 포위한 지 벌써 6개월이 지났지만 100만 명의 수나라 군사 중 단 1명의 군사도 이 성벽에 오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수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30만의 별동군을 편성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 별동군은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양제는 이 군사들에게 100일치 식량을 한꺼번에 줘버렸다. 직접 들고 가는 식량은 당연히 소량이어야 하고 목적지에 주둔한 뒤에 지속적으로 보급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수 양제는 군사 개인에게 식량을 휴대하게 하고 만약 식량을 버리는 자는 사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무거운 짐 때문에 수나라 군사들은 갈 때마다 야음을 틈타 천막 속에서 몰래 식량을 땅에 파묻었다. 결과적으로 수나라 군대는 굶주려 싸울 힘이 없었다. 요동성에서 내호아의 패전을 들었을지는 알 수 없고, 처음 계획이 수륙합공이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시일이 지체된 양제가 별동대를 파견했으며, 이들에 대한 보급은 내호아가 담당해야 했을 수 있다. 사실 양제가 바보도 아니고, 요동에서 평양까지 100일 만에 갔다가 올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평양에 도달하기 전에 군량이 거의 소진되었고, 도착한 우중문과 우문술이 내호아의 패전을 알고 나서 을지문덕의 거짓 항복에 서둘러 후퇴한 것과 연계해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를 눈치챈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진영에 가서 거짓 항복을 청하며 동시에 수나라 군사들의 동태를 살핀다. 우중문은 을지문덕이나 고구려 왕이 올 때에는 반드시 잡으라는 양제의 기밀 명령에 따라 을지문덕을 잡으려 했으나, 우문술과 유사룡 등 주변 장수들이 항복한 장수를 잡아들이면 저들은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라며 반대하여 결국 을지문덕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우중문은 나중에 이 작전이 별동대의 진군을 지연시키고 겸사겸사 내부를 염탐하기 위한 거짓 항복인 것을 알아채고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결국 살수(청천강)를 건넌 수나라 별동군이 평양성을 포위했지만 이미 싸울 힘이 없는 수나라 군사들의 포위는 의미가 없어 퇴각을 결정했고, 후퇴 와중에도 이어진 고구려군의 기습 공격에 기진맥진한 수군이 살수를 건널 때 고구려군의 총공격을 받아 수나라 30만 별동군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결국 수나라 30만 5,000명 중 살아 돌아간 군사는 2,700명이었으며, 이것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다. 이 소식을 듣자 양광은 크게 분노하여 우중문과 우문술을 쇠사슬로 묶어 그해 10월 퇴각시킨다. 결과적으로 양제의 1차 침입은 처참한 패배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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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차 공격과 반란의 시작

그러나 양광은 고구려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613년 3월 양제는 35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다시 공격했다. 지난번의 패배를 되새긴 양광은 이번에는 별동군을 모아 공격을 시도하였다. 도하한 수나라 군사는 요동성보다 토성을 높게 쌓아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요동성의 고구려 군사는 이러한 수나라의 화살 세례에 쉽사리 대항을 못했고, 양광은 효력이 있다고 판단해 계속적으로 화살로 공격하게 지시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수나라 측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양제의 폭정을 보다못한 수나라의 예부상서 양현감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올레 백성들이 저항하면서 '죽음의 땅 요동으로 가지 말자'(...)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를 따랐다. 양현감은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나는 황제의 본가로, 억만금의 재산이 있으며 관직 또한 이미 상주국에 이르렀거늘 무슨 부귀를 더 바라겠는가? 지금 구족이 몰살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안고 폭군에 저항하고자 일어섰다. 실로 백성들의 고통이 심하여 백성들을 위하여 기병한 것이다.

그러자 양광과 함께 이 소식을 들은 양현감의 친구 곡사정은 이번 반란에 자신에게 미칠 일을 두려워하여 고구려에 투항한다. 반란에 당황한 양광은 우왕좌왕하다가 곡사정이 고구려에 투항하자 급히 퇴각을 결정한다. 곡사정의 보직은 병부시랑이었는데 이는 군사 행군, 보급, 작전을 총괄하는 군사 부문 최고 직책으로 현대적인 의미로는 국방 장관에 가깝다. 그런 인물이 고구려에 투항해 작전 기밀이나 군대 내 상황 등이 모두 드러났으니 전쟁을 하고 싶어도 못했다. 또한 고구려 군사가 눈치 채지 못하게 식량과 무기를 모두 버리고 퇴각을 시도한다. 물론 완벽하지는 못해 고구려군이 뒤늦게 추격하고 수나라 군사 수천 명이 전사했다. 그나마 1차 때에 비해 피해는 훨씬 적었고, 고구려도 적잖은 손실이 있었다.

4.3. 3차 공격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한 양제는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때는 수나라의 사정이 좋지못한데다 많은 신료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야 했다. 특히 양현감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반란사건이 터지고 있었고 고구려 원정에 국가의 부를 모두 탕진하다보니 우선 반란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집이 센 양광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시하며 "'고구려 공격에 반대하는 자는 모두 죽이겠다!!"'는 엄포를 내려 정벌을 강행했다. 결국 614년 3월 다시 고구려 공격에 나섰으나, 이때의 수나라 군사들은 계속된 전쟁의 패배로 인해 싸울 의지가 전혀 없었으며 고구려 공격을 개시하기도 전에 탈영병이 발생했다. 이렇게 되자 양제도 원정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때 고구려 측에서 사신을 보냈다. 항복을 할 것이니 군사들을 철수시키라는 것이다. 또한 양제의 2차 침입 때 투항했던 곡사정을 묶어 같이 보내 항복할 의사를 밝혔다. 사실 고구려는 수나라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으나, 고구려 역시 전쟁 피해가 커서 이제 한계였고 계속 싸우면 망할 상황이었다. 따라서 양제의 자존심을 추켜세우면서 수나라 군사들을 철수시키고 전쟁을 조용히 마무리하려 했던 것이다. 양광은 대소신료의 주장에 못이기는 척하고 고구려의 제안을 받아들여 군사를 철수시키는데, 기록에 따라서는 사신에 섞여 있던 누군가가 품에 숨겨두었던 쇠뇌를 꺼내 양광을 향해 쏘아 맞췄고, 모두가 난리난 틈을 타 달아났으나, 의외로 정신을 차린 양제는 아무 문제삼지 않았다.

5. 파멸

고구려 원정은 마무리 지었으나 수나라 내부는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혼란해졌고 양제는 이를 제대로 수습해내지 못했다. 양제는 수나라의 수도를 3곳으로 나누었다. 원래 수도는 장안이었는데 서도(西都)라고 칭하고 동도(東都)인 낙양을 다시 건설했으며, 장강 이남의 양주에 강도(江都)를 건설했다. 전국의 거센 반란에도 불구하고 만약 양제가 남아있는 군대를 끌어모으고 반란군의 공격에 맞서 제대로 된 방어와 진압 전략을 펼쳤다면 상황을 반전시켜 수왕조를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양제는 별다른 대응이나 대책도 없이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장강 이남의 강도로 황족들과 피난을 가 거기서 짱박혀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잡기로 소일했다. 수양제는 하루종일 술로 쓸쓸함을 달랬고, 그저 하루하루를 지낸다. 소황후는 무기력하게 지내는 그에게 기운을 내라고 권했지만, 그는 술에 취해서 "통쾌하게 술이나 마시자, 왜 스스로 골치거리를 만드는가."라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할 일이 없을 때 양제는 거울을 끌어당겨 멍하니 계속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황후가 그 이유를 묻자, 양제는 거울을 보면서 말하기를 "좋은 머리로다. 이 머리를 누가 벨 것인가?"라고 말하거나, 가끔은 독을 탄 술을 곁에 놓고서, 자신이 총애하는 비빈과 황후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했다. "만일 적이 오면, 네가 먼저 마셔라. 그 다음에는 내가 마시겠다." 

그러자 황후는 깜짝 놀라면서 양광에게 어찌 그런 불길한 말을 하느냐고 말했다. 이에 양광은 죽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같다며 "세상사 무상하고, 인생은 꿈 같으며, 빈천고락이 따로 정해진 것도 아니니 목이 잘린들 무슨 상관일고!"라며 씁쓸하게 웃었다고 한다. 강도에는 자신과 손자 연왕(燕王) 양담(楊倓), 장안은 손자들인 대왕(代王) 양유(楊侑), 낙양은 월왕(越王) 양통(楊侗)에게 맡겼다. 이 조치는 수도 3곳에 자신과 손자 셋으로 하여금 각각 웅거함으로써 전화가 거세져 수나라가 통일 제국은 유지하지 못하더라도 최소 1곳은 남아 있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양유와 양통 둘 다 어린애라 잘 지킬 리가 없었고 장안에는 양제의 이종사촌형인 이연과 훗날 당태종이 되는 이연의 아들 이세민 부자가 입성하고 낙양에는 관료였던 왕세충이 입성해 버렸다. 이연 부자와 왕세충은 각각 양유와 양통을 옹립했지만 둘 다 허수아비였고 실권은 그들이 쥐게 되었다.

심각한 점은 이렇게 기존 수도인 장안은 그냥 방치 상태가 되었고 양제가 피난간 곳에 정부 요인들이 같이 가지도 않았으므로 사실상 중앙 정부는 활동을 정지했고 덕분에 반란은 진압되지않고 120여 건이나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도 양제는 정신을 못차리다가 평소 양제의 처우에 불만을 품은 근위대장 우문화급우문지급 형제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고 그들은 양제를 교수형에 처했다. 우문화급의 난을 양제가 가장 아끼던 장손 양담은 사전에 탐지해 양제에 상주하려 했으나, 궁궐을 담당하는 자에 가로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반란군들은 수 양제가 무지막지한 폭군이였고 병사들도 그를 증오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만약에라도 그냥 반란을 일으켰을 때 병사들이 지지하지 않아서 실패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하여 병사들에게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유언비어의 내용은 수 양제가 독주를 만들고 있으며, 그 독주를 이용하여 반란을 기도하는 친병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며, 남방의 병사를 중용하여 북으로 돌아갈 희망을 끊어버리겠다는 내용이였다. 그러자 병사들은 양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서로 연락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정변 당일, 병사들이 안팎에서 호응하였기 때문에 수 양제는 저항할 틈조차 없었다, 이때 반란의 소식을 처음 들은 양제는 미워하던 차남 양간이  반란을 일으켰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웃긴 사실은 평소 이런 아버지를 두려워하던 양간 역시 아버지가 자신을 잡도록 군대를 보냈다고 생각했다.

죽기 직전 그래도 황제라고 나름대로 위엄을 선보였는데 반란군이 궁전으로 들어닥치자 인상을 쓰면서 
수 양제: "짐이 무슨 죄가 있길래, 목이 잘리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반장 마문거(馬文擧): "당신은 호화 사치의 극을 달리면서 허구한 날 이곳저곳 놀러다니고 토목 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힘을 함부로 낭비했다, 그리고 허구한 날 전쟁이나 일으키고 주색잡기에 소일했으며 이로 인해 모든 천하의 백성들이 당신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당신의 죄악은 하늘을 채우고도 남으니 백 번 죽어 마땅하다. 어찌 감히 스스로 죄가 없다고 하는가?"

수 양제: (탄식하면서) "그렇다. 짐은 정말 백성들에게 잘못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뭘 했느냐? 하루종일 나를 따라서 잘먹고 잘살며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았느냐? 너희는 모두 내가 먹여살렸던 사람들이다. 어찌 반란군들과 같이 놀 수 있단 말이냐?[9] 그러니 묻겠다. 주동자가 누구냐?"

사마덕감: (코웃음을 치면서) "지금 천하는 도탄에 빠졌고, 하늘과 땅에 모두 원성이 자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당신 같은 우매한 폭군을 뼈에 사무치게 증오하고 있는데, 어찌 주동자가 한 사람 뿐이겠소? 이제 세상의 분노를 풀기 위해서는 오로지 당신의 수급으로 천하에 사죄하는 방법밖에는 없소."

라는 멋들어진 명언을 날리며 양제를 누각에 끌어내린 후, 우문화급의 사자가 달려와 "이런 우매한 군주는 내게 데려올 필요도 없으니 즉시 그를 해치워라."고 명을 내려 죽이려고 칼을 빼든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13살 된 수양제의 어린 아들인 조왕(趙王) 양고(楊杲)가 놀라서 대성통곡을 했다. 반란병들은 양고가 계속 시끄럽게 울자 양고를 한 칼에 죽여버렸고, 피가 수 양제의 몸에까지 뿌려졌다. 이 광경을 보고, 양제는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알고 할 수 없이 반란군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 양제: "천자는 천자로서 죽는 방법이 있다. 천자가 죽을 때에는 칼을 써서는 안된다. 독주를 가져와라, 짐이 스스로 독주를 마시고 자진하겠다!"

반란군: "지금 이 판국에 황제가 어디 있고, 천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독주는 칼로 죽는 것보다 편해서 허용하지 않겠다."

라고 하면서 그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양제는 "어쨌든 짐이 천자였으니 짐의 시신만은 건드리지 말아다오."[10]라고 울면서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서 교살해 달라고 했고, 반란군이 내실로 끌고 들어가 허리띠로 즉석 교수대를 만든 뒤 양제를 처형했다. 이때 수나라 양씨 일족은 우문지급과 친한 양제의 조카 양호를 빼면 모두 살해되었다. 양제의 시신은 대중에게 공개된다음 오공대 인근에 묻혔다가, 훗날 양제의 이종사촌 당고조 이연[11]에 의해 뇌당으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648년 당태종 이세민은 양제의 황후였던 양민황후 소씨가 사망하자 그녀의 유해를 강도로 보내 수 양제와 합장하도록 명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양제묘 동쪽의 또 다른 묘의 묘주는 소 황후일 것으로 추측한다.

6. 가족

  • 양민황후(煬愍皇后) 소씨(蕭氏) - 후량의 효명제(孝明帝) 소규(蕭巋)의 딸로 양제의 아내가 되어 영욕의 세월을 보냈다. 수나라의 황후가 되었으나, 618년 우문화급의 난이 일어나 살해는 면했으나 남편, 아들, 손자들을 잃었다. 오직 차남 양간의 유복자로 손자이자 양제의 유일한 혈손으로 남은 양정도(楊政道)는 살았으나, 우문화급에 감시하에 놓였다. 하지만 619년 두건덕이 우문화급을 격파하자 두건덕에 의해 보호되다가 620년 돌궐의 가한이 사자를 보내자 돌궐로 망명했다. 그러나 망면한지 10년이 되었을때 630년 돌궐이 당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하자 양정도와 당나라로 돌아와서 장안에 거주한다. 장안에서 사는동안 이세민이 소씨에게 황족의 예우를 해주어서 사는데는 불편함이 없었다. 648년 82살의 나이로 사망하여 남편과 합장되었다.
    • 장남 원덕태자(元徳太子) 양소(楊昭)- 훗날 세종(世宗) 효성황제(孝成皇帝)로 추존
    • 제왕(濟王) 양간(楊暕) - 34살의 나이로 우문화급에 의해 처형될 때 우문화급이 난을 일으켰는지도 몰랐다. 두 아들은 살해되었으나, 유복자 양정도는 살아남아 630년 할머니와 함께 당나라에 귀순하여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郎)에 임명되었으며 측천무후가 재위한 영휘(永徽) 초기 사망했다. 아들 양숭례(楊崇礼)는 태부경(太府卿)을 지냈다.
    • 남양공주(南陽公主) - 우문화급의 이복동생 우문사급(宇文士及)의 아내
  • 빈(嬪) 소씨(蕭氏) - 소황후의 친족, 우문화급의 난 때 살해되었다.
    • 조왕(趙王) 양고(楊杲) - 양제가 아끼던 어린 아들로 13살의 나이로 살해되었다.
    • 공주(公主)- 생모 미상, 훗날 당태종의 귀비가 되어 3남 오왕(吳王) 이각(李恪)과 6남 촉왕(蜀王) 이음(李愔)을 낳았다.
 

7. 평가

이견의 여지가 없는 중국사 최악의 폭군 중 하나로 꼽히는 인간 말종이라고 할 수 있다. 끝내 는 3대만에 망해 당에 패권을 물려주었고,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양제가 폭군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폭군하면 연산군이 최우선으로 거론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 역사 속에서 나오는 수 양제는 아주 추악하며, 현재도 중국인들이 중국사의 황제 중에서 최악의 폭군을 꼽으라고 할 때 바로 수 양제를 뽑는다. 

양제가 망국의 황제여서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행적을 보면 전혀 동정의 여지가 없다. 그는 군주가 절대로 가지지 말아야 할 성격들을 모조리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겸손하지 못하고 자신의 장점만을 내세우는 것을 좋아했는데, 일찍이 신하들에게 "사람들은 내가 선제의 유업을 이어 황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나는 지금의 문인들과 겨루어서 그 실력으로도 황제가 될 수 있다!"며 큰 소리를 쳤다고 한다.

게다가 남이 자신에게 충고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고 간언하는 신하는 무조건 죽였다. 그는 일찍이 명사 우세남에게 “나는 평생 남의 충고를 원치 않는다. 높은 관직에까지 오른 자가 입바른 소리로 명성까지 추구하는 꼴을 절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 했다. 수서는 이런 그를 두고 ‘하늘 아래 원수 아닌 자가 없었고, 좌우 모두가 그의 적국이었다.’라고 말한다. 그 결과 나라가 망하고 자신도 망했다. 양광은 천하의 사람들을 해쳤고 자기 자신도 해쳤다. 그리고 양제가 한 행동에는 인간이 저지를 만한 거의 모든 사악한 범죄들이 다 있다. 아버지를 죽이며, 자신의 형제들을 음해하고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며 자신을 따르는 간신들은 총애하고 충언을 하는 충신들을 죽일 만큼 음흉하고 잔혹했으며, 음탕하여 여자를 너무 많이 밝히고, 술을 마시며 노는 것을 좋아했고, 무리한 공사로 나라를 말아먹으며, 나라를 어지럽혀 반란이 일어나게 하여 결국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것 등등의 일들에서 나오듯이 수 양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대부분의 범죄를 저질렀다.

중국 민족이 수 양제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가 실패하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성격과 기질이 정상적인 사람이 보았을 때 너무 지나친 탓이다. 수 양제가 똑같이 국가 멸망의 씨앗을 뿌렸다고까지 평가받는 진 시황보다 더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의 통일과 여러 정치적인 면모만 보면 시황제의 부정적인 면이랑 그 다음인 이세황제를 합친 인물이라고 할만하다.. 양제의 양(煬)은 시법에 따르면 '방탕하고 악랄하며 여색을 좋아하고 예를 무시했으며 하늘의 뜻에 거역하고[12] 백성을 착취했다'란 뜻이다. 뒷날 당의 사람들이 비웃는 뜻으로 올린 시호가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 나중에 양(煬)이란 시호는 금나라 해릉양왕이 또다시 받았다. . 사실 이전에 후주 진숙보가 장성양공이라는 무시무시한 시호를 받은 적 있다. 그러나 양제의 공식 묘호와 시호는 세조 명황제(世祖 明皇帝)이다. 

진숙보를 공격할 때 총사령관이 바로 본인이었다. 잡힌 사람이나, 잡은 사람이나 똑같은 시호를 받았다니 모순이다. 그나마 양제가 진행한 대규모 건설 행위 가운데 대운하만은 이후 당대에도 이어지면서 중국 전역의 영토 연결에 큰 도움을 줬다. 사실 대운하 건설은 언젠가는 반드시 할 일이었지만 양제가 너무 무리하게 다그친데다 이거 말고 수많은 대규모 사업을 병행했기에 문제가 커졌다. 특히 위에 나온 대규모 용선이나 수많은 이궁 등 사치스럽고 규모가 큰  토목 공사들을 대운하 공역과 병행하는 바람에 수 문제 시절에 쌓인 어마어마한 국부가 순식간에 거덜났다.

그러나 여기서 당을 세운 이연이 속했던 호족 세력인 관롱집단(關隴集團)이 웃기다. 이 집단은 북위의 초기 수도였던 평성의 방위를 위해, 그 이북에 세운 군사 기지인 6진의 하나인 무천진 일대에서 세력을 만들어 귀족화한 호족 가문을 가리키는 용어다. 그들 중 양견이 북주 황실의 외척을 하면서 수를 개국하였고, 당을 건국하는 이씨 가문 또한 수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제국의 창시자 수문제는 소규모 자작농을 대규모로 육성하여 황실이 그들을 직접 통치해 국가의 기본 정책을 삼으려 했으나, 주요 권세가들은 소수의 귀족들이 대규모 농장을 소유하며 황실은 이 귀족들을 통해 국가를 간접적으로 통치할 것을 국가에 요구하면서 반발한다. 이에 따라 외척 관계로 밀접한 사이였던 황실과 관롱집단이 중심인 주요 귀족들 사이에 긴장감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이런 긴장감은 상호간의 갈등으로 발전해 문제는 귀족층의 대규모 숙청이라는 극약 처방을 단행했다. 당연히 귀족들이 눈뜨고 앉아서 당할 리는 없었고, 대규모 반란을 도모하나 문제가 직접 나서서 진압했다. 하지만 양견과 그 이후 황제가 지속적으로 족쳐서 와해시키거나 멸족시켰으면 되는데 그러기도 전에 양광이 탈법적으로 제위에 오르면서 문제가 났다.

패륜으로 즉위했으니 명분적인 면에서 결함이 있고, 어찌보면 양제는 좋으나 싫으나 귀족들의 관심을 분산시키러 지속적으로 국가적인 사업을 일으켜야 했을지도 모른다. 고구려 정벌 판도 그래서 벌인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2차부터는 병력 규모도 그리 큰편도 아니었으니. 그러나 이것의 규모가 지나칠 만큼 커졌고 여기에 사치스러운 본인의 성향과 맞물려 시너지를 일으킨 것. 사실 대운하는 문제가 먼저 계획하고 시작했던 사업이었다. 허나 비용도 많이 들고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치자 곧바로 중단시켰는데, 양제가 이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국가 막장 테크 하이웨이를 충실히 탔다.

끝내 수 황실은 내부 황위 다툼으로 관롱집단을 와해시킬 기회를 스스로 버렸고, 양제의 계속된 병크로 나라 꼴이 엉망이 되자 관롱집단에 휘둘려 이연에게 나라를 내줬다. 관롱집단은 당나라 때까지 권세를 휘둘렀으나 당태종시기 이후 서서히 약화되어 당현종 시기에는 그저 명맥만 유지했고 그마저도 안사의 난 이후부터는 와해되었다.

8. 매체에서의 등장



"나는 말이오. 천하의 영웅 호걸들 중에 그래도 진시황을 최고로 칩니다. 그자가 백년만 더 살았어도! 이 중원의 역사는 변했을 겁니다! 나는 말이오! 그 진시황이 못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 넓고 큰 대중원을! 한 길로 통하게 만들겁니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하여! 고구려로 갈겁니다! 고구려 말이에요. 고구려. 고구려! 고구려에 조의 선인들이 있다면 우리도 죽음을 모르는 돌격대들을 만드시오. 지금보다 더 나은 효과들을! 그리고 백만 대군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곡식을 저장하시오! 무역 상단들을 서역으로 보내서 고구려의 과하마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군마들을 모두 사들이시오! 제일 시급한 것이 고구려로 가는 길이오. 고구려! 고구려! 고구려! 그리하여 평양성에! 수 제국에 깃발을 꽂는 것이오. 제국의 깃발을! <연개소문 21화의 마지막 장면>''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는 BGM과 김갑수의 열연으로 무지막지한 카리스마와 집착을 보인 장면. 작중의 수 양제는 고구려를 수없이 언급한다.
오냐.... 하.... 사는 게 참으로 고달팠다. 나는 에게 죽는 게 아니다. 실은... 고구려에게 죽는 것이다. 아니 그러냐? 내 인생... 이 거대한 수 제국도. 결국 고구려에게 진 것이다. 고구려. 고구려. 고구려.... 고구려. <연개소문 53화의 마지막 장면 - 수양제의 최후>

SBS 드라마 연개소문 1부의 진 주인공(배우는 김갑수). 차남에 불과했던 양제가 권모술수를 부려 황제에 오른 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고구려와 일전을 벌였다 패해서 죽는 것이 1부의 주된 내용(...)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수양제의 존재감이 독보적이었다. 배우 김갑수가 열연을 펼쳐 연개소문을 페이크 주인공으로 밀쳤다.[13] 하도 양제의 존재감이 크니까 네티즌들이 이 드라마를 아예 양제소문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건 마치 선덕여왕에서 미실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주인공을 잡아먹으며 대하 사극 50부작 '미실'로 불렸던 것이나 태조 왕건에서 궁예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궁예가 죽자 드라마가 종영된 걸로 착각한 시청자가 속출했던 것과 흡사...[14]

사실상 양제를 연기한 (중국 입장에서) 외국인 배우 중 크게 성공한 듯한 케이스. 그리고 극중에서 묘사한 양제의 최후로 역시 빼도 박도 못하는 연기 생활 사망전대 리스트에 당당히 올라갔다. 사료에 따르면 양제는 음주로 소위 술배가 나온 배불뚝이라서 마른 체형의 김갑수는 미스 캐스팅 같았어도 간간이 터지는 개그와 경박하면서도 섬뜩한 면이 있는 웃음소리, 비열하고 광기에 찬 카리스마로 간지폭풍을 선보였다. 같은 배우가 맡은 태조 왕건의 종간의 얼음장 같이 차가운 면모와 무인시대의 최충헌이 보여준 광기 어린 카리스마가 결합되어 수많은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초반부까지만 해도 후반부에 나오는 자만심과 광기, 개그가 없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피력했다. 이때 양광이 황제에 오르려는 야망을 위해 몸을 낮추고 온갖 권모술수를 부리며 기어코 형을 몰아내고 태자가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고구려에 대한 광기어린 집착과 오만함에 수나라와 함께 그 자신도 망가져 가는 흐름은 상당히 흡입력이 있었고 실제로도 양제 역을 맡은 김갑수의 열연 덕분에 연개소문 본다는 시청자도 많았다.

심지어 양제가  죽자(54화를 제외하면 양제의 사망 장면이 사실상 1부의 끝이었다. 덤으로 유언도 실제와 달리 나름대로 버프를 받은 셈) 그 뒤로 드라마를 안 보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수 양제가 죽고 난 후, 시청률이 폭락했으며 이후 김갑수는 드라마에서 퇴장하면서 자기가 너무 튀었다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수 양제를 연기하면서 2006년 S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10대 스타상과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면서 이 드라마의 진 주인공이 수 양제였음을 증명...

하지만 작중에서 수 양제를 진시황 이후 최악의 폭군이라고 수도 없이 언급하는데, 진시황이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폭군이라 표현하며 수 양제와 동급 취급했기에[15] 중국에서 까였다. 이외에도 최후에 남긴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중에서 지나칠 정도로 미화된 고구려를 위협할만한 적이어야 한답시고 수 양제를 인성에 문제가 있지만 능력이 훌륭한 사람처럼 묘사했다는 점 때문에 수 양제를 미화했다고 까였다. 하지만 적어도 이 드라마 덕에 한국에서 양광(수 양제)이 대강 어떤 인물인지 알게된 것엔 나름 도움이 되었다. 사실 모략으로 황제에 오른 걸 보면 권모술수만큼은 능력자긴 하지만.

1987년 홍콩 TVB의 퓨전 사극 <대운하>에서는 오계화가 해당 역할을 맡아, 전형적인 패륜아에 폭군, 천하의 개쌍놈의 모습을 보여준다. 심지어 어머니 문헌황후, 아버지 양견, 형 양용을 직접 살해까지 한다. 해당 배역을 맡았던 오계화는 이 드라마에 악역의 이미지로 완전히 낙인 찍혔다. 이 드라마 이전에 1984년에 방영하던 유덕화와 조아지 주연의 <마역도원>이라는 무협 드라마에서 이미 악역을 연기한 적이 있다. 오계화는 그 유명한 옥보단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미나미가 더빙판에 김갑수가 연기한 양제의 웃음을 흉내낸 장면이 나왔다. 비교해보면 드러난다.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에서는 가짜 황제가 장안에 감금시켰는데, 쇼토쿠 태자와 오노노 이모코가 활약해 구조한다.

중국 드라마 수당연의에서 푸다롱(富大龙)이라는 배우가 수양제를 연기했는데, 이말년의 도플갱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닮았다. #
[1] 수양제 사망 이후 왕세충에게 추대돼 잠시 형식상 제위에 올랐던 수공제 양동이라는 인물이 있어 이 사람 시기에 시호를 올렸다.(수 공제와 월왕 양동은 다른 인물로 이 중에서 왕세충에게 추대된 인물은 월왕 양동이다.) 한편 우문화급을 제거하고 하나라를 세운 두건덕도 따로 민황제라는 시호를 올렸다. 후대 왕조에서 전 왕조 마지막 임금의 시호를 올리는 것은 전통적인 일이므로 당이나 하에서 올린 시호를 비공식적인 것으로 취급할 필요는 없다.[2] 수 문제 치세 당시의 번성을 따라잡은 게 당현종의 '개원의 치' 시기였다. 얼마나 말아먹었냐면 그 유능한 당태종과 측천무후도 다 수습 못했다(...)[3] 상당히 비밀스러운 행동이기는 했지만 양제 아래서 시중 드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을 것이고 양제 사후나 당나라 시대에 이것들이 모두 까발려져 정사에 들어갔을 것이다.[4] 두 고를 내고 맞죄어 매는 매듭. 납폐(納幣, 혼인할 때 사주단자의 교환이 끝난 후 정혼이 이루어진 증거로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예물을 보내는 일.)에 쓰는 실에 사용한다.[5] 이게 현재 어느 정도냐면, 울산광역시(116만 6942명)보다 조금 적은 정도다.(...)[6] 물론, 양광과 이세민의 군사적 역량은 차원이 다르다.[7] 대포가 개발되기 이전에는 성벽 높이가 높아야 방어력이 높은 성이었다.[8] 이때, 지푸라기 따위를 섞어서 뭉치면 더욱 튼튼하였다고 한다.[9]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껴서 얼굴이 빨개졌다고 한다.[10] 시신이 온존해야 좋다는 동아시아 관념 상 교살을 참수보다 높게 쳤다.[11] 양광의 어머니 독고가라와 이연의 어머니는 친자매 사이.[12] 하늘의 뜻에 거역하였다는 것은 아버지를 죽이고 형을 죽인 행적을 뜻한다.[13] 별개로 극중에서 주인공 연개소문과는 34화에서 잠시 대면했다. 다만 양제는 그냥 환관의 양자로 생각한 듯 하다.[14] 단, 여파는 이쪽이 더 심하다. 적어도 왕건은 궁예와 직접 관련이 있기라도 하지, 양제와 연개소문은 역사적으로는 서로 무관하기 때문.[15] 현대의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는 지금의 중국에서 최초로 통일의 업적을 세운 시황제의 평가와 위치는 꽤 높은 편이다. 게다가 지금 중국의 관광자원 제공 측면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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