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자료
<펌> 삼국사기 - 나무위키
Chung Park
2019. 9. 2. 02:14
- 관련 문서: 한국사 관련 정보
대한민국의 전근대 역사서 | ||||||||
정사(正史) | ||||||||
실록(實錄) | ||||||||
절요(節要) | ||||||||
통감(通鑑) | ||||||||
강목(綱目) | 실전(失傳) 본조편년강목 | |||||||
사략(史略) | ||||||||
역사시(歷史詩) | ||||||||
기타(其他) | ||||||||
기타 실전(失傳) | ||||||||
고구려(高句麗) | ||||||||
신라(新羅) | ||||||||
백제(百濟) | ||||||||
고려(高麗) | 편년통록 | 왕대종족기 | 성원록 | 금경록 |
321호 | ← | 322-1호, 322-2호 | → | 323호 |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 삼국사기 |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공식명칭 | 한글 | 삼국사기 |
한자 | 三國史記 | |
영어 | Samguk sagi | |
분류번호 | ||
소재지 | ||
분류 | 기록유산/전적류/목판본/역사서 | |
시설 | 옥산서원본: 50권 9책 정덕본: 50권 9책 | |
지정연도 | ||
제작시기 | ||
정보 |
1. 소개
삼국사기 전권의 모습
한국사에서 내용 전체가 전하는 사서 중 가장 오래된 사서. 《화랑세기》 필사본을 위작으로 판단할 경우 현존하는 국내 사료 중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며, 현존하는 삼국 시대 관련 사료 중에서 가장 분량이 많기도 하다.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더불어 삼국시대 연구를 위해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필수 사료다.
고려 인종의 명에 의하여 고려왕조 국가적 지원 하에 1145년에 편찬 책임자 김부식과 그 외 보조 역할을 담당한 참고(參考) 8명과 행정사무를 전담한 관구(管句) 2명 등 총 11명이 편찬한 관찬 역사서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후삼국시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5] 동아시아의 고전적 역사 서술 방식인 기전체 형식을 따르고 있다. 본기 28권(신라 12, 고구려 10, 백제 6), 연표 3권, 지 9권, 열전 10권. 총 50권 9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현대에 남아있는 삼국사기 원서 중 김부식이 편찬한 원본은 없다. 삼국사기 서적 중 가장 오래된 원서는 보물 722호 성암본으로 13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성암본은 성암고서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름은 '삼국'사기이지만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이후부터 고려 초까지, 즉 '3국'이 있지 않았던 약 260여년의 역사도 같이 다루었는데, 아무래도 당시 고려인들의 시각으로 봤을 때에는 다시 나눠진 후삼국시대를 고려가 재통일한 것을 통일의 종결로 여겼던 것에서 기인한 것 같다.[6] 삼국사기는 고대도 고대지만 당시 고려왕조의 현실도 그나마 엿볼 수 있는 역사책이기도 하다.
또한 고려의 칭제건원과 서경 천도 운동을 하였던 묘청 일파를 반대하고 몸서 묘청 일파를 숙청한 김부식이 사직하고 집필한 사서로 자주성이 약한 시각에서의 사관이라는 점에서 식민 사관론과 관련되어 민족주의 사관에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는 역사서이기도 하다. 중국 사서의 내용을 그대로 적은 부분이 다수라는 점에서 이런 비판이 나오는데, 이미 삼국시대로부터 수백년이 지난 시기였으니 김부식 시대에 이미 국내 사료가 많이 부족해진 상태라는 어쩔 수 없는 현실[7]이며 오히려 김부식은 당대 사회상을 감안하면 상당히 한반도 중심적, 민족주의적[8]으로 기록했다.
2. 번역본
《조선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삼국사기》도 인터넷에서 무료로 검색, 열람이 가능하다.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되는 온라인 열람 서비스.
- 네이버-원문으로 보는 삼국사기 :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열람 서비스. 한국인문고전연구소에서 번역한 삼국사기를 제공하며, 접근성이나 편의성에서 일반인들이 사용하기 가장 좋다. 각주도 KRPia만큼은 아니나, 일반인들에게는 꽤 유용한 정보들이 담겨있다.
《삼국유사》와 더불어 한국고대사 연구의 필수 자료답게 여러 학자들의 손을 거쳐 번역된 바 있으며, 번역본의 출판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위의 링크에도 있듯이 이미 네이트 한국학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등 여러 사이트에서 무료로 열람이 가능하므로 이를 참고해도 좋다. 누구든지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최강의 장점.
서적으로 출판된 것 중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1997년에 간행한 5권의 《역주 삼국사기》가 가장 좋은 평을 받고 있는데, 노중국 등을 비롯한 한국 고대사학계의 권위자들이 참여하여 상당한 퀄리티를 자랑한다. 2012년에는 개정판을 내놓았는데 이 역시 좋은 평을 받았다. 단점은 5권[9] 으로 이루어져 있는데다가 한권의 가격이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4~5만원에 육박하는지라 전부 소장하려면 돈이 꽤 많이 깨진다는 것이다(…).[10]
참고로 '상고사학회'[11]라는 단체에서 펴낸 삼국사기는 대륙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봉의고등학교의 이병곤 영어교사가 삼국사기 전체를 영어로 번역했다. 이미 해외에서 본기를 개별적으로 번역한 바가 있지만 전체를 번역한 것은 처음이다. 영문 제목은 'The History of Three Kingdoms'. 관련 기사
3. 가장 오래된 한반도의 정사(正史)
비판받을 부분도 존재하지만, 삼국사기는 한국의 역사를 다룰 때 그 중요도는 엄청나다. 삼국유사의 경우, 전통 역사서보다는 설화나 불교적 이야기를 중점으로 다루고 있으며, 삼국사기 편찬 이후에 기술되어 삼국사기를 적극적으로 반영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삼국시대를 다루는 유일한 사서라고 봐도 무방하다.
당장 삼국사기의 기록들만 보더라도 고구려, 신라, 백제의 충돌했던 기록이나, 율령 반포 같은 중요 기록들은 빠지지 않고 언급되고 있으며 삼국시대의 국왕의 시호[12], 이름, 가계등도 온전히 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신라 금석문에서 보여지는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 무즉지태왕(另卽智太王),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의 경우 우리는 법흥왕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만약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왕의 시호가 정확이 허떤 것인지 몰랐을 것이며, 신라의 율령반포가 법흥왕 대에 일어났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13] 물론 구삼국사나 다른 사서들도 남아있었다면 더 좋았겠으나 전부 실전된 상황이기에...
특징으로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편찬자들도 그 당시 기준으로 교차검증 등을 거치며 만약 한국의 기록과 중국의 기록이 엇갈리면 한국측 기록을 우선시 했다. 일각에서 사대주의 운운하는 경우도 있는데 제왕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본기(本紀)"를 기록한 것이나 최대한 한국의 고기(古紀)들을 우선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그런 주장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삼국사기의 존재로 인해 한국사는 세계적으로 보았을때 고대사 기록이 결코 적은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이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고대 이집트와 같은 기록 덕후들의 나라와 비교했을 때 아쉬운 부분이지 한국은 삼국사기의 존재 덕분에 세계사로 넓히면 고대의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기원전 기록이 확인 되는 삼국사기와는 달리, 다른 나라의 역사들을 보면 영국의 경우 그나마 기록이 많은 잉글랜드조차 기원후 5세기 무렵에 형성된 고대 7왕국 시절까지의 기록은 개인의 연대기에 의존해야 하며, 스웨덴은 기원후 800년대까지는 신화의 영역이며, 독일과 덴마크 등의 조상 격인 게르만족의 역사 또한 그들이 직접 남긴 기록이 없어서 고대 로마인들의 기록을 적극적으로 참고해야 한다. 아시아로 가더라도 인도는 기원후 200년대인 굽타 왕조대나 들어서야 본격적인 기록들이 등장한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기원후 4세기 이후에나 역사시대에 들어서며, 일본 또한 일본서기, 고사기등 초기 기록은 말 그대로 "신화적"인 요소가 강한 데다가 200년경의 왕들인 왜5왕의 기록이 중국 사서들과 삼국사기에서만 확인 되는 등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기원후 1000년경부터 역사가 확인 되는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다[14]. 물론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한 불분명한 부분이 존재하지만 나정의 존재가 발견 되는 등 고대사 기록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연도의 오류에 가깝다.
당장 삼국사기의 기록들만 보더라도 고구려, 신라, 백제의 충돌했던 기록이나, 율령 반포 같은 중요 기록들은 빠지지 않고 언급되고 있으며 삼국시대의 국왕의 시호[12], 이름, 가계등도 온전히 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신라 금석문에서 보여지는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 무즉지태왕(另卽智太王),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의 경우 우리는 법흥왕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만약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왕의 시호가 정확이 허떤 것인지 몰랐을 것이며, 신라의 율령반포가 법흥왕 대에 일어났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13] 물론 구삼국사나 다른 사서들도 남아있었다면 더 좋았겠으나 전부 실전된 상황이기에...
특징으로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편찬자들도 그 당시 기준으로 교차검증 등을 거치며 만약 한국의 기록과 중국의 기록이 엇갈리면 한국측 기록을 우선시 했다. 일각에서 사대주의 운운하는 경우도 있는데 제왕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본기(本紀)"를 기록한 것이나 최대한 한국의 고기(古紀)들을 우선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그런 주장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삼국사기의 존재로 인해 한국사는 세계적으로 보았을때 고대사 기록이 결코 적은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이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고대 이집트와 같은 기록 덕후들의 나라와 비교했을 때 아쉬운 부분이지 한국은 삼국사기의 존재 덕분에 세계사로 넓히면 고대의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기원전 기록이 확인 되는 삼국사기와는 달리, 다른 나라의 역사들을 보면 영국의 경우 그나마 기록이 많은 잉글랜드조차 기원후 5세기 무렵에 형성된 고대 7왕국 시절까지의 기록은 개인의 연대기에 의존해야 하며, 스웨덴은 기원후 800년대까지는 신화의 영역이며, 독일과 덴마크 등의 조상 격인 게르만족의 역사 또한 그들이 직접 남긴 기록이 없어서 고대 로마인들의 기록을 적극적으로 참고해야 한다. 아시아로 가더라도 인도는 기원후 200년대인 굽타 왕조대나 들어서야 본격적인 기록들이 등장한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기원후 4세기 이후에나 역사시대에 들어서며, 일본 또한 일본서기, 고사기등 초기 기록은 말 그대로 "신화적"인 요소가 강한 데다가 200년경의 왕들인 왜5왕의 기록이 중국 사서들과 삼국사기에서만 확인 되는 등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기원후 1000년경부터 역사가 확인 되는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다[14]. 물론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한 불분명한 부분이 존재하지만 나정의 존재가 발견 되는 등 고대사 기록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연도의 오류에 가깝다.
3.1. 이름에 대한 이야기
《삼국사기》의 '사기(史記)'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사마천의 《사기》를 따른 것으로 여겨지며, 《삼국사》라는 이름도 자주 쓰였다. 이를 들어 원래의 이름은 《삼국사》였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삼국사기》라는 이름이 굳어졌다라는 주장이 있다.참조기사[15] 기사에 따르면 ① 고려사나 조선 초기 김종직의 《동문수》에 실린 『진삼국사표』, ② 옥산서원본을 발간한 김거두가 쓴 발문에 있는 삼국사라는 표현, ③ 남아있는 《삼국사기》의 표지에 쓰인 삼국사라는 제목, ④ 《조선왕조실록》에서 삼국사라는 명칭이 더 빈번하게 쓰였기 때문에 원래 제목이 삼국사가 아니였겠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학계에서 전혀 공인받지 못한다. 《삼국사》라는 약칭이 널리 쓰인 것도 맞기는 하지만 학계에서는 가독성과 구분 편의 등을 이유로 《삼국사기》를 쓰는 것이고, 일제가 《삼국사기》라는 명칭을 밀었다는 주장에는 뚜렷한 근거가 없다. 상세히 살펴보면 ① 《삼국사(三國史)》라는 표현은 《삼국사기》라는 표현에 비해 '삼국의 역사'라는 일반명사로 오인될 가능성이 있고, ② '삼국사'라는 명칭은 이전 시기 편찬된 《구삼국사》 혹은 《해동삼국사》와 혼동을 빚을 가능성이 있으며, ③ 사료상 《삼국사기》와 《삼국사》라는 표현이 혼용되고 《동문수》(1488)와 달리 《동문선》(1478)에서는 『진삼국사표』가 아닌 『진삼국사기표』라는 명칭이 있기 때문에 《삼국사》는 그 약칭일 것이다. 외국에서도 이 책의 서명을 《삼국사기》로 아는 사례가 이미 《삼국사기》 편찬 34년 후를 기록한 남송 대 사료에 등장한다.[16] ④ 옥산서원본과 잔존 삼국사기의 표지 등에 《삼국사》라고 쓰여 있다고 하지만, 정작 조선시대 작성되었을 발문과 표지와는 달리 고려시대의 원문을 옮겼을 《삼국사기》 본문에는 스스로 《삼국사기》라고 쓰고 있다. 옥산서원본 정덕본 그러니까 고의적인 사실 왜곡을 하려 한 것이거나, 본문을 다 잊어버리고 표지와 발문만 기억한 것이 아니라면 이 기사를 쓴 사람은 《삼국사기》 표지와 발문[17]만 보고 본문은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맞든 아니든 학계를 비판하기에는 수준 이하이다.
따라서 《삼국사》라는 명칭보다 《삼국사기》라는 명칭이 정식 명칭일 가능성이 오히려 더 확정적이며, 거기에 더해 ①과 ②처럼 구분상의 문제로 《삼국사기》를 쓰는 것이 가독성 면에서 더 편리했기 때문에 《삼국사기》가 선택된 것이다. ③과 같이 공식적인 명칭과 편의상 쓰이는 약칭이 의미 전달에 큰 차이가 없다면 오히려 약칭이 널리 쓰이는 것도 빈번한 일이다. 예를 들어 공식명칭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대신 광개토왕 내지 광개토대왕이 더 널리 쓰이거나, 《선화봉사고려도경》 대신 고려도경이라는 이름이 더 널리 쓰인 것처럼. 게다가 일제강점기에 《삼국사기》라는 이름을 밀었다는 주장의 경우 기사에 제대로된 근거가 없다.[18] 오히려 나쁜 건 모두 일제가 했다고 주장하면 되는 유사역사학계의 사고방식을 매우 몹시 잘 보여주는 기사인 셈.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학계에서 전혀 공인받지 못한다. 《삼국사》라는 약칭이 널리 쓰인 것도 맞기는 하지만 학계에서는 가독성과 구분 편의 등을 이유로 《삼국사기》를 쓰는 것이고, 일제가 《삼국사기》라는 명칭을 밀었다는 주장에는 뚜렷한 근거가 없다. 상세히 살펴보면 ① 《삼국사(三國史)》라는 표현은 《삼국사기》라는 표현에 비해 '삼국의 역사'라는 일반명사로 오인될 가능성이 있고, ② '삼국사'라는 명칭은 이전 시기 편찬된 《구삼국사》 혹은 《해동삼국사》와 혼동을 빚을 가능성이 있으며, ③ 사료상 《삼국사기》와 《삼국사》라는 표현이 혼용되고 《동문수》(1488)와 달리 《동문선》(1478)에서는 『진삼국사표』가 아닌 『진삼국사기표』라는 명칭이 있기 때문에 《삼국사》는 그 약칭일 것이다. 외국에서도 이 책의 서명을 《삼국사기》로 아는 사례가 이미 《삼국사기》 편찬 34년 후를 기록한 남송 대 사료에 등장한다.[16] ④ 옥산서원본과 잔존 삼국사기의 표지 등에 《삼국사》라고 쓰여 있다고 하지만, 정작 조선시대 작성되었을 발문과 표지와는 달리 고려시대의 원문을 옮겼을 《삼국사기》 본문에는 스스로 《삼국사기》라고 쓰고 있다. 옥산서원본 정덕본 그러니까 고의적인 사실 왜곡을 하려 한 것이거나, 본문을 다 잊어버리고 표지와 발문만 기억한 것이 아니라면 이 기사를 쓴 사람은 《삼국사기》 표지와 발문[17]만 보고 본문은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맞든 아니든 학계를 비판하기에는 수준 이하이다.
따라서 《삼국사》라는 명칭보다 《삼국사기》라는 명칭이 정식 명칭일 가능성이 오히려 더 확정적이며, 거기에 더해 ①과 ②처럼 구분상의 문제로 《삼국사기》를 쓰는 것이 가독성 면에서 더 편리했기 때문에 《삼국사기》가 선택된 것이다. ③과 같이 공식적인 명칭과 편의상 쓰이는 약칭이 의미 전달에 큰 차이가 없다면 오히려 약칭이 널리 쓰이는 것도 빈번한 일이다. 예를 들어 공식명칭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대신 광개토왕 내지 광개토대왕이 더 널리 쓰이거나, 《선화봉사고려도경》 대신 고려도경이라는 이름이 더 널리 쓰인 것처럼. 게다가 일제강점기에 《삼국사기》라는 이름을 밀었다는 주장의 경우 기사에 제대로된 근거가 없다.[18] 오히려 나쁜 건 모두 일제가 했다고 주장하면 되는 유사역사학계의 사고방식을 매우 몹시 잘 보여주는 기사인 셈.
4. 인용 문헌
삼국사기에서 전거가 확인되는 인용 문헌은 다음과 같다.
5. 종류
현대에는 김부식이 직접 집필한 삼국사기 원본은 남아있지 않으며, 후대에 새로 인쇄하거나 필사한 판본들이 남아 있다.
5.1. 국보 제322-1호[24]: 옥산서원본
5.2. 국보 제322-2호[25]: 정덕본
5.3. 보물 제722호: 성암본
권 44~50권 분량으로 총 7권 1책. 성암본이라 불린다. 1981년 서울 성암고서박물관에서 발견된 판본인데 고려 후기인 13세기 후기에 찍어낸 것으로 현존하고 있는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단 1책만 존재하고 있다.
권말의 끝부분 장(張)이 떨어져 간기나 발문이 없다. 또한, 복각할 때 사용한 초간본의 상태가 좋지 않다. 초간의 원각에서 탈락된 것을 그대로 판각한 듯한데, 초간본의 후쇄본을 가지고 복각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부분은 기존의 옥산서원본이나 정덕본과는 다른 데 대표적으로 온달이 참전한 장소인 배산(拜山)이, 성덕본에서는 이산(肄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6. 논란
6.1. 신라 우선주의 서술이다.
일제강점기에 신채호가 《삼국사기》와 그 저자인 김부식을 맹렬히 비난한 이후 이 주장에 동의하여 디스하는 학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졌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은 《삼국사기》는 누가 보아도 질과 양에서 신라 위주라는 것.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보다 수백년은 더 후대에 멸망했으므로 더 쓸 이야기 분량도 많겠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심할 정도라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의 주요한 편찬자인 김부식은 이자겸이 금에 사대했을 때 찬동했던 인물인 동시에,[26] 고구려 계승 세력인 서경파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과정에서 제거한 신라 계승주의를 주도한 동경파[27]의 대표자라는 점이 지적받으면서, 이전에는 고려의 입장과 동시에 김부식이 포함된 당시 문벌귀족들의 입장이 강하게 표현되어 고구려 계승 의식이 쇠퇴한다는 지적이 있어왔다.[28][29],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했을 가능성이 있는 《구삼국사》[30][31]가 유실된 점을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32]
또한 《삼국사기》의 주요한 편찬자인 김부식은 이자겸이 금에 사대했을 때 찬동했던 인물인 동시에,[26] 고구려 계승 세력인 서경파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과정에서 제거한 신라 계승주의를 주도한 동경파[27]의 대표자라는 점이 지적받으면서, 이전에는 고려의 입장과 동시에 김부식이 포함된 당시 문벌귀족들의 입장이 강하게 표현되어 고구려 계승 의식이 쇠퇴한다는 지적이 있어왔다.[28][29],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했을 가능성이 있는 《구삼국사》[30][31]가 유실된 점을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32]
6.1.1. 삼국사기의 편찬 목적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본다면 일단 《삼국사기》를 어떤 시점으로 봐도, 고려라는 나라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 신라의 지분이 가장 크며[33] 삼국사기는 당장 《삼국사기》를 쓰는 사람들의 현 소속국가였던 고려의 시점에서 역사를 재정비하는 것이 우선적이라, 고려의 영토 대부분이 위치한 한반도 중부와 남부를 다스리던 국가인 삼한을 한때 아우른 신라가 고려 태조에게 귀부하고 고려는 흉악무도한 후백제를 물리치며 그것을 이어받은 정통성 있는 국가라는 인식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경순왕이 우리 태조께 귀의함과 같은 것은 비록 부득이하여 한 일이지만 역시 가상한 것이며, 오히려 만약 힘써 죽기로 싸워 태조의 군사에 저항하다가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하기에 이르렀다면, 필시 그 종족이 뒤집혀 멸망되고 그 해독이 무고한 백성에까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령을 여쭈어 기다리지 않고 미리 나라의 창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해 바쳐 왔으니, 그의 우리 조정에 대한 공로와 백성들에 대한 은덕이 매우 크다 하겠다. 옛날 전씨가 오월의 땅을 들어 송나라에 바치매 소자첨이 그를 충신이라고 했거니와,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훨씬 더한 것이다.《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 종결부의 사론
신라의 운수가 다하고 도의가 상실되니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은 돌아갈 바를 몰랐다. 이에 뭇 도적들이 틈을 타고 일어나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았거니와, 그 가운데 심한 자는 궁예와 견훤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이면서도 반란하여 주종의 나라를 원수로 삼아 멸망시킬 것을 도모해 선조의 화상을 베기에 이르렀으니, 그 어질지 못함이 심하였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으로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모반의 마음을 품고 나라의 위난을 요행으로 여겨 도읍을 침노하고 임금과 신하 베기를 마치 짐승 죽이듯 풀 베듯 했으니, 실로 천하의 극악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당했고 견훤은 화가 그 아들에게서 일어났으니, 이는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들인지라 다른 누구를 허물할 것인가. 비록 항우나 이밀과 같은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서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흥기를 대적하지 못했거늘, 하물며 궁예나 견훤과 같은 흉악한 이들이야 어찌 우리 태조를 상대해 항거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단지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준 이들이었을 뿐이다.《삼국사기》권50 견훤전. 말미의 사론
김부식은 김부를 오월의 전씨에 비교하여 공덕이 월등히 크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보고 그러한 것인가? 오월은 송나라에 대하여 번병으로서 술직[34] 하니 그 군신의 직분이 정하여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고려에 대하여 이와 같지 않은즉, 태봉은 신라의 반적이요 고려 태조는 태봉의 신하였던 것이다. 비록 태봉이 이미 무너지고 고려의 국운이 날로 창성했다 하나 신라가 고려에 대해 일찍이 무릎꿇고 칭번한 적이 없었거늘 하루아침에 종묘사직을 버리고 토지를 바치며 북면하여 조회하는 것이 옳겠는가. … 뒷날 비록 부귀하고 외손이 번성하였으나 어찌 나라가 망하고 자신을 잃는 큰 수치를 씻을 수 있겠는가! 경순왕과 같은 자는 이미 큰 절의를 잃었으므로 그 나머지는 취할 바가 없는데, 김부식이 전씨에 견주어 경순왕의 우월함을 비교하니 도대체 무엇을 보고 그러한 것인가?《동국통감》 권12 고려 태조 18년 사론
이것만 봐도 《삼국사기》가 어떠한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또한 후대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또 봐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삼국유사》이다. 《삼국유사》에도 《삼국사기》와 어느 정도는 비슷한 시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후백제견훤조는 기이편의 마지막 항목인 가락국기조 바로 앞에 자리한다. 《삼국유사》에서 기이편이란 단군조선에서 출발하여 고려왕조 성립 이전까지를 대상으로 하여, 흥법편 이하 불교 신앙의 홍포와 신이한 이적에서 오는 감동의 공유를 위한 시공간적 배경 설정과도 같은 것이다. 즉 고려 태조에게 귀부한 경순왕의 행적을 마지막으로 하여 시간 순서에 따른 기록은 완결되는 것이고, 아울러 사실상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 계승은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런데 김부대왕조 이후에 남부여전백제조, 무왕조, 후백제견훤조가 배치되었다. 이러한 배치는 일단 시간 순서에 따른 기이편의 서술 체계와는 상반된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후백제 및 견훤 관련 자료의 분석에는 김부대왕조 이후 네 항목에 대한 편찬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때 가락국기조는 자료명 자체가 제목을 이루고 있다는 데서 일연 이후의 추가로 보는 시각이 있음을 환기하게 된다. 이러한 지적은 그에 대한 동의 여하와는 상관없이 본 문제에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즉 후백제견훤조는 기실 ‘삼국사본전’ 곧 《삼국사기》 견훤전에 주요한 바탕을 두고 있되, 《고기》(古記) 등의 정보를 제시하는 데 본의가 있었던 것이므로, 가락국기조의 맥락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또한, 무왕조 자체가 고기에 근거했음은 물론이며, 남부여 전백제조 역시 고기 계통 정보를 담고 있었다. 다시 말해 후백제 견훤조를 위시한 네 조목의 편록은 유사를 자처한 《삼국유사》 저자 일연이 삼국의 ‘본사(本史)’로 간주한 삼국사기에서 배제된 고기류의 정보를 제시하는 데 주안 했던 것이다. 덧붙여 《삼국사기》에 가장 자료량이 풍부한 김유신전 역시 고기로 불린 그의 행록을 크게 절삭한 것인데, 그 절삭된 부분이 바로 《삼국유사》의 김유신조나 가락국기조 등에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견해가 있다. 즉 《삼국유사》의 김유신 설화는 그 서술 목적이 《삼국사기》의 열전과는 다르며 지배이념의 구현보다는 그 인물의 신이한 행각이라든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표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고기에서 무왕은 용의 아들이며 견훤은 지렁이의 아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대비된다. 비록 이들의 출생담은 건국 신화적 요건을 갖춘 야래자신화(夜來者神話)로 파악되고, 이 ‘야래자신화’는 온조 등 백제 건국 주체 집단의 동명 신화가 하늘에서 온 아버지-지상의 어머니였던 것과는 달리 물에서 온 아버지-지상의 어머니로서 마한의 신화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기도 하나, 둘 다 뭔가 비정상적인 일이라고 하는 것은 몰라도 적어도 신성한 이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남부여전백제조 말미에 고기의 전승으로 파악되는 이른바 용바위 전승은 사비하(백마강/백강)가에 한 바위가 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이 위에 앉아 물고기와 용을 낚아 냈기 때문에 바위 위에 용이 꿇어앉은 흔적이 있는지라 그로 인해 용바위라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소정방의 이 행위가 백제의 멸망을 예비하는 조건으로 이해된 것처럼, 역시 부정적 예조(預兆)일 뿐이다. 요컨대 김부대왕조를 끝으로 마무리되어야 할 기이편의 구성에서 경순왕조 뒤에 있는 전-후백제사의 세 조목은 고기의 편린에 자저자의 강조점이 있되, 그것은 백제와 후백제에 대해 우호적이지 못하였다. 또한, 고구려사의 전말도 전혀 배려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로 보아야 할 사안이며 여기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집필되던 시기의 좀 배웠던 사람들의 주류시각과 고려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 생각건대 저 구려는 오늘날 발해로 되었는데, 비로소 근래 와서 계속 과거에서 분에 넘치는 성과를 거두었으니, 이는 곧 외방이 착함을 사모하는 정성을 기록하시고 대국의 공평한 덕화를 드러내심이나 …최치원. 당나라 예부 배상서에게 보내는 편지(與禮部裵尙書瓚狀)
… 구려가 이윽고 미친 회오리바람이 잦아지자 간신히 불탄 나머지를 거두어 따로 고을들을 취합할 것을 도모하더니 문득 나라 이름을 도적질하였으니 곧 예전의 구려임을 알 것이요 이가 오늘의 발해인 것입니다. … 최치원이 요행히도 천박한 재주를 가지고 … 실로 지극한 공정함을 만나 이전의 치욕을 씻었으니 변화됨은 한 번 돌보아주심에 깊이 힘입었고 그 광영은 멀리 삼한에 퍼졌습니다.최치원. 당나라 고대부에게 편지(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
최치원.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못한 것을 보면 고려가 떨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 지방에 거하면서 고구려라 했고, 부여씨가 서남지방에 거하면서 백제라 했으며, 박씨․석씨․김씨가 동남지방에 거하면서 신라라 한 바 이것이 삼국이다. 이 삼국에는 마땅히 삼국에 대한 사서가 있어야 할 텐데, 고려가 이것을 편찬했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한 다음 김씨가 남방을 차지하고 대씨가 북방을 차지하고는 발해라 했으니, 이것을 남북국이라 하는 바,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거늘,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이 사료들까지 본다면 신라가 나라가 망하고 있던 시기에도 통일 전쟁 시기부터 표방해온 삼한일통에 대해 얼마나 집작하고 있는지,[36] 또한, 건국 초에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뚜렷하게 표방하였으나, 북벌정책이 거란과의 전쟁을 거치며 종료되고 통합을 강조하면서 신라말의 삼한일통 의식이 고려의 주류 역사관으로 자리 잡은 것을 알 수가 있다.
6.2. 신라 우선주의가 아니다
- 분량으로 봐도 통일 시점까지를 따지면, 고구려가 10권, 신라가 7권으로 고구려가 더 많다. 특히 4세기까지 기록은 고구려본기가 신라본기의 2배가 넘는다.[37]
- 삼국의 역사를 제후의 용어인 세가(世家)가 아닌 황제의 역사에 해당하는 본기(本紀)로 구성하여 황제의 역사와 동등하게 취급했다. 훗날 조선에서는 고려사를 편찬할 때 고려 역대 국왕에 대해 세가를 사용한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이 사람 사대주의자 맞아?'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 책을 평가할 때에 김부식이 합리적 유교 사관에 입각하여 이상과 현실을 적절히 타협하여 서술했음을 전제로 논해야 한다.
- 제일 늦게 중앙집권국가로 시작하고 전성기도 제일 늦게 맞이한 신라가 3국 중에서 제일 먼저 건국했다는 것도 주요 논쟁거리였지만 최근에는 신라 건국 시기를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사실 먼저 건국했다고 항상 먼저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위략』, 『삼국지』의 진국(辰國)과 진한(辰韓)에 관한 기록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요동지역의 세력이 점점 남하하여 경상도에 최종 정착했다는 주장이다. 진한은 당시에 세력은 후퇴했으나 정치적으로 진국의 충분한 경험이 있었고, 신라는 진한의 6소국이 모여 성립된 나라이므로 삼국 중 먼저 건국되어도 모순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신라가 가장 늦게 발전한 것은 진국 통치의 경험, 지리적 위치로 인한 현상으로 바라본다.[38] 사로국 항목도 참조.
6.2.1. 오해를 받는 이유 : 사료의 부족
앞서 기술된 "감안해도 심한 정도"라는 말은 학술적인 증거가 포함되지 않은 주관적인 생각이며 "어디까지"에 대한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일제강점기 이전 한국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역사서를 편찬하기 위해 원전을 편집하여 역사서를 낸다고 하자. 그러면 양은 어디가 많을까? 당연히 조선이 압도적일 수밖에 없다. 조선왕조실록만으로도 삼국과 고려 관련 기록을 압도한다. 그러면 과연 이런 양적 문제를 근거로 조선 위주로 서술했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한국사 역사서에서 다루는 기간이 조선이 아니라 현재까지라면 조선 대신 대한민국 분량이 가장 많을 것이다. 당연히 역사서를 쓸 때 참고할 원사료는 책을 쓰는 시점과 가까운 시대일수록 더 많기 때문이다. 김부식도 간접적으로 밝혔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직관(職官)이 오래되고 기록이 없어서 고기(古記)와 중국 사서에 나타난 것만 기록한다.'고 서술했다.[39]
고구려와 백제의 제사 제례는 명확하지 않으므로 다만 고기(古記)와 중국 역사에 쓰여 있는 내용을 상고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신라는 연대가 오래 되었으며 문헌과 사서들이 사라져서 그 제도를 자세히 말할 수 없다.
(중략)
고구려와 백제의 의복제도는 고찰할 수 없으므로 여기에 중국의 역대 사서(史書)에 보이는 것만을 기록하기로 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관직은 연대가 오래 되었으며 기록이 모호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게다가 아래 구성에서 보듯, 삼국통일까지의 시점을 따지면 고구려 10권, 신라 6권, 백제 6권으로 고구려본기의 권수가 더 많다.(...) 따라서 양적인 문제를 근거 없이 비판하는 것은 잘못됐다.
이런 논란이 벌어지는 이유는 《삼국사기》 편찬 당시 사료가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통일 신라 이전 파트는 당시에도 자료가 너무 없어서 중간중간 저자인 김부식조차도 "마한은 온조왕때 망했다며? 100년이 지났는데 왜 갑자기 또 나오는거냐?"라고 의아해 하는 주석을 달기도 했으며 사반왕처럼 아예 통으로 날려 먹은 파트도 존재한다. 이 탓에 고조선과 부여들과 발해의 기록이 부실한 것이다.
이런 논란이 벌어지는 이유는 《삼국사기》 편찬 당시 사료가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통일 신라 이전 파트는 당시에도 자료가 너무 없어서 중간중간 저자인 김부식조차도 "마한은 온조왕때 망했다며? 100년이 지났는데 왜 갑자기 또 나오는거냐?"라고 의아해 하는 주석을 달기도 했으며 사반왕처럼 아예 통으로 날려 먹은 파트도 존재한다. 이 탓에 고조선과 부여들과 발해의 기록이 부실한 것이다.
70년(서기 122), 임금이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 부여왕이 병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격파하였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한 것은 아마도 멸망한 후 다시 일어난 것인가?】
고조선과 부여의 기록이 부실한 것은 이와 관련한 사료가 발해에 위치했던 탓에 발해의 멸망과 동시에 기록이 소실되었고, 백제쪽은 신라군의 방화로 백제의 대부분 기록이 불에 타버려 남아있지 못했다. 그나마 당시까지 남아있던 자료들은 그 수가 매우 부족해서 신라 편향적이라고 욕을 먹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박혁거세부터 진평왕까지의 일을 기록한 책은 단 4권이다(…) 이해하기 힘들다면 고려의 승리에서 비롯되는 후백제 관련 자료의 한계는 7세기 이후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가 승리한 신라인의 관점에 충실한 형태로 재편되었던 사정과 다르지 않고, 또한 멸망한 나라의 사서는 업데이트나 보존을 위한 노력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알기 쉽다.
아쉬운 점은 고려시대에는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전대 왕조에 대한 정사를 편찬하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는 것에 있다. 전통적으로 동양 왕조들은 건국 후 바로 전 왕조의 정사(正史)를 편찬하는 전례가 있어 왔단 건데 고려는 그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추측하자면 초기의 왕위쟁탈전과 곧이어 일어난 고려-거란 전쟁, 그리고 천추태후 등의 실정과 그로 인해 벌어진 권력 투쟁인 계속된 전쟁으로 고려 초는 혼란기가 적지 않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사료 자체가 또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요전쟁만 해도 2차 침입 때 개경이 함락되면서 적지 않은 역사 자료가 파괴되었다. 또 전조의 정사 편찬은 본래 중국의 관습인데, 고려 초는 근친혼이 성행하는 등 아직 중국식 문화가 후대에 비하면 덜 유입된 시대이기 때문에 필요성 또한 적게 느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17대 왕인 인종대에 와서야 《삼국사기》를 집필하는데 이를 근거했을 당시의 자료가 시기상 고구려나 백제가 멸망한 지 500여 년이 지났고 이들의 기록을 상당수 가졌을 발해와 통일신라도 멸망한 지 무려 200년은 된 시점이라 당시 동아시아 내에서 직접 구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구할 수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당연히 고구려나 백제가 신라보다 먼저 망했고 신라가 수백 년은 더 오래 갔기 때문에 신라인들의 관점에서 재정리되어 있는 것이 많았고, 혹은 그것을 토대로 고려에서 재정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북방의 대륙에 위치한 국가였던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기록이 중국왕조에 의해 훼손되고 백제와 삼한의 기록이 신라에 의해 훼손되면서 기록이 부실해 짜깁기식으로 기록을 편집한 채로 편찬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김부식도 비슷한 내용의 옛 기록들을 찾아보았으나 기록의 신빙성이 환단고기 수준이라 믿기 어렵고 날짜도 안 맞고 단군의 재위 기간이 의심되는 부분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이 부분의 서술을 포기하게 된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집필하던 1100년대 중기에는 이미 신라, 백제, 고구려 등의 여러 국가가 약 천여 년 동안 기록하여 남긴 역사 사료들을 모두 긁어모아 재정립해도 단 아홉 권에 그칠 정도로 이미 이전대의 역사 사료들이 상당수 사멸한 상태였고[40] 이러다 보니 어느 정도의 비중 문제는 어쩔 수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부식도 나름대로 고구려와 백제 관련 자료를 박박 긁어모아서 찾아보려 한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혹자는 김유신 열전을 언급하며 신라 우선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10권으로 이루어진 '열전'에 수록된 인물 69명 중에 고구려, 백제인은 합쳐서 11명에 불과하고 또 10권 중에 김유신 열전이 3권을 차지하고 있는 점을 들어, 아무리 당시에 기록이 적어졌다 하더라도 두 국가를 합쳐서 11명 밖에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편향적이며 신라의 시각과 신라 편향적인 자세에서 글을 쓴 것은 도저히 피하기 힘들 정도로 비판받을 만한 거리라는 것. 하지만 삼국사기를 좀 더 들여다본다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김유신의 기록마저 부족했기 때문에 김유신의 후손이 쓴 김유신 행장록을 그대로 베꼈기 때문이다.
유신의 현손(玄孫)으로서 신라의 집사랑(執事郞)인 장청(長淸)이 행록(行錄)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만들어서 넣은 말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일부 삭제해 버리고 기록할 만한 것들을 취하여 전(傳)을 만들었다.
그래서 김유신 열전 초반부에는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과 술이부작(述而不作)[41]에 따라서 작성된 삼국사기의 내용과는 전혀 동떨어진 전설들이 등장하며[42], 당시 허구헌날 백제에게 개털렸다는 신라 본기의 기록과는 정반대로, 김유신 열전에는 김유신이 가는 곳마다 승리를 이끌어 낸다고 나와 와있는 등 앞뒤 기록이 안 맞는 경우가 발생했다. 한마디로 김유신과 같이 통일신라 시대의 주역의 자료도 빈약한 상황이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연개소문도 관련된 자료의 부재로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은 《당서》의 연개소문 관련 대목을 그대로 복붙해버렸다. 그 때문에 당고조의 이름인 이연(李淵)을 피휘하느라 천개소문(泉蓋蘇文)이라고 적은 것을 그대로 가져와 버린 웃지 못할 실수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때 교과서 등에 연개소문이 천개소문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본 열전이 기본적으로 적대국이 남긴 기록인 까닭에 연개소문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실상보다 훨씬 과장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된다.[43] 그 외에 본기나 다른 문헌에서 전재하지 않은 독자적인 전기를 가진 사람은 온달과 도미 단 두 명뿐이다.
위에 나왔듯이 삼국 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은 후손들이 쓴 행장을 붙복했고, 고구려의 명장 중 한 명인 안시성주는 김부식이 그렇게 위대한 영웅의 이름을 알지 못해서 한탄스럽다는 평(而史失其姓名 與楊子所云 齊魯大臣 史失其名 無異 甚可惜也)을 삼국사기에 남겼다. 이런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 기록도 사라진 판에 다른 이들의 기록이 남아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열전 중에서는 이름만 언급되어 있고 행적이 없다고만 적힌 인물들도 있다.
연개소문도 관련된 자료의 부재로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은 《당서》의 연개소문 관련 대목을 그대로 복붙해버렸다. 그 때문에 당고조의 이름인 이연(李淵)을 피휘하느라 천개소문(泉蓋蘇文)이라고 적은 것을 그대로 가져와 버린 웃지 못할 실수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때 교과서 등에 연개소문이 천개소문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본 열전이 기본적으로 적대국이 남긴 기록인 까닭에 연개소문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실상보다 훨씬 과장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된다.[43] 그 외에 본기나 다른 문헌에서 전재하지 않은 독자적인 전기를 가진 사람은 온달과 도미 단 두 명뿐이다.
위에 나왔듯이 삼국 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은 후손들이 쓴 행장을 붙복했고, 고구려의 명장 중 한 명인 안시성주는 김부식이 그렇게 위대한 영웅의 이름을 알지 못해서 한탄스럽다는 평(而史失其姓名 與楊子所云 齊魯大臣 史失其名 無異 甚可惜也)을 삼국사기에 남겼다. 이런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 기록도 사라진 판에 다른 이들의 기록이 남아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열전 중에서는 이름만 언급되어 있고 행적이 없다고만 적힌 인물들도 있다.
박인범(朴仁範), 원걸(元傑), 거인(巨仁), 김운경(金雲卿), 김수훈(金垂訓) 등은 글이 전하는 것은 조금 있으나 역사기록에 그들의 행적이 없으므로 전기를 만들 수 없다.
朴仁範元傑巨仁金雲卿金垂訓輩 雖僅有文字傳者 而史失行事 不得立傳
굳이 쓰지 않아도 됐을 이야기를 삼국사기에 남긴 행적만 봐도 김부식이 열전을 편향적으로 쓴 게 아니라, 박박 긁어모아서 쓴 게 현재의 삼국사기였다는 것이다. 개별열전은 구체적인 일생이 담겨있어야 저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예로 거인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진성여왕을 비판하는 글을 쓴 것으로 몰려 옥고를 치뤘다가 전부로 왕(王)이라는 성씨도 삼국유사에만 등장하는 내용이며 그 외의 내용은 삼국사기와 동일하다. 즉 위의 기록에도 나와 있지만 거인에 대한 "글이 전하는 것은 조금 있으나 역사기록에 그들의 행적이 없으므로" 열전을 만들 분량이 나오지 않아 열전을 만들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6.3.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수정하면 식민사관?
자세한 내용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론 식민사관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4. 여타 문제점
- 태조왕을 비롯한 삼국 초기 왕들의 재위 기간이 지나치게 길게 나타나는 문제등이 있어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설'이 비중있게 제기되기도 했다. 고구려, 신라, 백제 할 것 없이 《삼국사기》를 펼쳐보고 왕들의 재위 기간, 출생 연도를 하나하나 따져보면 왕들의 나이가 실로 예술이다. 고이왕처럼 아버지가 죽는 해에 태어났다고 쳐도 120살이 넘게 살기도 하고, 심지어는 석탈해와 같이 아예 태어나기 전부터 활동한 사람도 있고, 대무신왕처럼 어머니가 죽은 뒤 수년 뒤에 태어난 사람도 있다. 편찬자들의 실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김부식이 인용한 원사료들부터 문제가 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예를 들어 백제는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개국 이래 문자로 사실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고흥이 처음으로 『서기(書記)』를 썼다고 되어있다. 즉 그 이전은 글로 쓰지 않고 기억에 의존해 입에서 입으로 전했을테니 근초고왕 이전 시대 백제의 기록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원사료도 또다른 고대 사서인 《일본서기》처럼 백제사를 미화하기 위해 의도적인 윤색까지 가해졌던 책일 가능성도 예상할 수 있다.
- 이러한 불신론에 의거, 《삼국지》 위지 '동이전'[44]에서 70~80개의 소국이 병립된 것으로 묘사되는 2~3세기에 백제와 신라가 각각 한반도 서남부 지역과 동남부 지역을 석권한 집권 국가임을 드러내는 초기 기록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사학계 내부에 팽배했다. 이러한 기류는 풍납토성 발굴을 계기로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이후 신라의 나정/신궁 유적 발굴로 인해 어느 정도 학설이 수정되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해체 국면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45] 이를테면 최근의 발굴 조사 결과는 영산강 유역에 5세기까지 독자적인 정치 세력이 존립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시조인 온조왕대 이미 마한을 아울렀다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와 배치되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삼국의 초기 역사에 대한 기술은 건국자에 대한 미화 등을 목적으로 후대의 윤색이 들어갈 여지가 크기 때문에 신뢰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훨씬 후대의 국가인 조선왕조의 경우에도 용비어천가나 태조실록은 미화와 과장이 많은 것처럼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인데 특히 고대는 문자기록시대 이전의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한 것이므로 더욱 그렇다.
- 정치적인 이유에서 직필하지 않고 어물쩍 넘긴 부분이 있는데 궁예는 901년 고려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혹은 사실상의 국가 상태에서 왕국을 선포하였)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궁예 열전에서는 901년 왕을 칭한 사실만 기록하였다. 김부식 본인이 소속된 국가였던 왕씨 고려의 정통성이 훼손되니까 이 부분에서 객관성을 찾기는 힘든 면이 있다. 왕건의 정통성과 당시 고려인들의 역사관[46]을 생각하면 그렇게 서술한 것이 당연하긴 하지만 삼국사기를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은 곤란하다는 증거이다.편찬 목적이 아예 다른 《삼국유사》에는 연표에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로 901년 건국한 것이 명확히 기재되어 있다.
- 고려사에선 식화지가 있을 정도로 신라의 문란한 토지제도까지 비판했지만 삼국사기에선 토지제도에 큰 이야기가 없었다. 이후 이제현은 고려 경종 평가에서 역분전이 신라의 문란한 토지제를 옛날 관료전처럼 역분전으로 정한 걸 미봉책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전시과를 그나마 높이 평가했는데 전시과마저도 후세에 고칠게 많다고 비판했다.
삼국 시대의 토지 제도에 대해 당시에는 남은 기록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사 식화지의 내용이나 이제현의 사평을 통해서 반대편 측에선 신라의 관료전이 신문왕 시절에 시행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꽤나 뜻이 깊은 논평이라고 보여진다. 나름대로 이제현의 사평과 고려사 식화지 서문은 이를 뒷받침하고 고대의 토지제도에 관련된 교차검증이 한발 더 앞서갔다는 것이다.[47] 이제현 또한 신라가 문란하다고 깠을 뿐이지 신라의 토지제도가 무엇인지는 전혀 말하지 못하고 있다. 직관지나 열전만 보아도 복원하지 못한 과거의 사실이 너무나 많다.
- 열전에 별의별 듣보잡 인물이 다 들어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백제와 싸우다가 죽은 여러 듣보잡 인물들의 열전들이 다 있다. 열전은 한정된 지면에서 중요한 인물들의 사적을 간단히 돌아보는 곳이지 이런 사람들의 공을 찬양하는 곳이 아니다. 실제로 고려사 열전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듣보잡들은 그룹으로 묶어 간단히 논하고 만다. 그러나 기전체의 열전은 원래 주관이 상당히 들어가는 부분이므로 듣보잡 인물이 들어갔다고 비판할 수 없자는 견해 또한 있다. 기전체의 정석인 사기에 실린 열전에는 백이, 손자, 오자서등 우리가 역사책에서 익히 이름을 들은 유명한 이들도 있는 반면 오왕비나 장창처럼 생소한 이들의 단독 열전도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을 두고 듣보잡을 단독으로 열전에 실었다고 비아냥대는 경우는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듣보잡의 기준이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오왕 유비는 종친이며 나중에 오초칠국의 난[48] 을 일으킨 자이니 당연히 기록될 만하며, 장창은 승상도 지냈고 음양가 철학의 대가로서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열전의 수록 기준은 편찬자의 의도에 따라 나뉘는 것이지 "이런 사람만 들어가야 올바른 사서다!"라는 것은 없다. 충, 효등 유교적 사상에 입각해 저술된 삼국사기의 경우에는 당연히 열전에도 그런 의도가 담겨서 편찬될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일부 사람들이 듣보잡으로 취급하는 위인들도 열전에 수록된 것이다.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는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고구려의 영웅 안시성주의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아 삼국사기 사관이 이름을 알지 못해 한탄할 정도였고, 김유신의 경우에도 기록 부족으로 가문의 행록을 줄이고 줄여서 열전에 올릴 판이었다. 한마디로 열전에 이름을 남긴 이들은 교훈과 더불어 기록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김부식이 의도적으로 유명한 재상들을 빼서 수록했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무척이나 부족하다. 연개소문은 아예 중국측 사서를 그대로 옮겨와 성이 강제개명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고 을지문덕과 장보고의 경우에는 중국의 기록을 참고할수 밖에 없었다는 아쉬움을 드러내는 대목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과 장보고(張保臯)의 용맹이 있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모두 사라져 후세에 알려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재상들의 세세한 기록이 남아있을 리는 거의 없다. 또한 고구려의 기록을 인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집이 동명성왕부터 고국원왕 대까지의 일을 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을파소나 명림답부처럼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그 시기에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기록 부족으로 재상들의 이름이 빠졌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하물며 역사서 편찬 기록이 거의 없는[49] 백제는 더욱 그 기록이 부족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史記(사기)'의 총권수는 50권으로, 1권의 분량이라야 몇 장이 되지 못하고 옛날 舊版(구판)의 粧冊(장책)으로는 통히 9책 내지 10책을 넘지 못하고, 근래 新活字版(신활자판)의 책자로는 1책 내지 2책에 지나지 않는 적은 분량의 책이다. 三國(삼국)의 歷年(역년)이 오래고 그간에 발생한 역사적 사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史記(사기)'의 內容(내용)·卷帙(권질)이 이와 같이 빈약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도대체 史料(사료)가 부족했던 까닭이다. 돌아보건대, 三國(삼국)은 일찍이 각자의 역사를 기록 또는 편찬한 일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즉 고구려는 國初(국초)로부터 한문을 사용하여 일찍이 『留記(유기)』 백권의 史書(사서)가 있었던바, 嬰陽王(영양왕) 11년(서기 600년)에 太學博士(태학박사) 李文眞(이문진)으로 하여금 『留記(유기)』를 刪修(산수)하여 新集(신집) 5권을 만들게 하였고, 백제는 近肖古王(근초고왕) 30년(서기 375년)에 博士(박사) 高興(고흥)을 얻어 國史(국사)를 닦게 하여 백제의 書記(서기)가 있게 되었다. 『日本書紀(일본서기)』 중에 인용된 「百濟本記(백제본기)」·「百濟紀(백제기)」·「百濟新撰(백제신찬)」 등도 모두 百濟人(백제인)의 손에 된 史書(사서)일 것이다. 신라는 眞興王(진흥왕) 6년(서기 545년)에 大阿湌(대아찬) 居柒夫(거칠부) 등을 명하여 國史(국사)를 編修(편수)케 한 일이 있거니와, 이후에도 누차의 修史(수사)가 있었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三國(삼국)의 史籍(사적)은 兵亂(병란)에 이미 湮滅(인멸)된 지 오래되어 金富軾(김부식) 당시에는 제2차 내지 제3차적 史料(사료)인 古記類(고기류)가 存傳(존전)하여, 그것과 또 中國史書(중국사서) 중에 실린 記事(기사)를 採取(채취)하여 편찬한 데 불과하였던 것이다.이병도 삼국사기 해제. 서문.
7. 삼국사기의 구성
총 50권 9책으로, '권'은 내용 구성 상의 단락을 나눈 단위이고 '책'은 물리적으로 책 한 권을 묶은 단위를 뜻한다. 즉 현대인의 관점에서 재구성해 말하자면 목차가 50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총 아홉 권의 책인 셈.
7.1.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
7.2. 본기
7.3. 연표
- 연표
7.4. 잡지
- 잡지
- 권32 제사, 음악
- 권33 색복(옷), 거기(車騎: 수레와 마구), 기용(器用: 그릇), 옥사(屋舍: 가옥)
- 권34·35·36 지리 1,2,3 신라
- 권37 지리 고구려, 백제
- 권38·39·40 직관 상,중,하: 관직에 대한 기록이다.
7.5. 열전
- 열전
- 권41·42·43 김유신 상, 중, 하: 김유신 뿐만 아니라 김유신 후손들의 행적도 수록되어 있다.
7.6. 편찬자
- 편수(編修)
- 김부식(金富軾)
- 참고(叅考)
- 김영온(金永溫)
- 최우보(崔祐甫)
- 이황중(李黃中)
- 박동계(朴東桂)
- 서안정(徐安貞)
- 허홍재(許洪材)
- 이온문(李溫文)
- 최산보(崔山甫)
- 그외
- 김충효(金忠孝)
- 정습명(鄭襲明)
- 김거두(金居斗)
- 최득경(崔得冏)
- 민개(閔開)
7.7. 발문
사기와는 다르게, 우리나라는 제후를 봉하지 않았으므로 제후들의 역사를 다루는 세가가 없다.
고대 삼국은 자국만의 작위를 쓰고 왕작, 공작, 후작 등 오등작을 봉하는 등 각국 국왕이 자국 내에서 천자로서 군림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진짜 주나라 마냥 땅을 때준게 아니라 '제후 칭호'를 봉한 것이다. 삼국은 부족 연합체, 소국 연합체에서 조금씩 진화해 군현제 국가로 성장했지 봉건제 국가로 성장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세가는 빠져있다.
비슷하게 고려 왕조는 중국 왕조와 동등하게 왕족 및 신하들에게 공후백자남의 오등작을 내렸다.[53] 이는 고려국왕이 천자로서 제후를 분봉한 것이지만 실제로 영토를 때준 것이 아니라 제후 칭호만을 봉한 것이다. 고려는 아무리 정부가 힘이 약했어도 엄연한 군현제 국가다. 봉건제 국가가 아니다. 그러니 설령 조선왕조가 고려사를 세가가 아닌 본기로 올려 적었어도 고려의 분봉제후 세가 항목은 제외했을 것이다.
고대 삼국은 자국만의 작위를 쓰고 왕작, 공작, 후작 등 오등작을 봉하는 등 각국 국왕이 자국 내에서 천자로서 군림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진짜 주나라 마냥 땅을 때준게 아니라 '제후 칭호'를 봉한 것이다. 삼국은 부족 연합체, 소국 연합체에서 조금씩 진화해 군현제 국가로 성장했지 봉건제 국가로 성장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세가는 빠져있다.
비슷하게 고려 왕조는 중국 왕조와 동등하게 왕족 및 신하들에게 공후백자남의 오등작을 내렸다.[53] 이는 고려국왕이 천자로서 제후를 분봉한 것이지만 실제로 영토를 때준 것이 아니라 제후 칭호만을 봉한 것이다. 고려는 아무리 정부가 힘이 약했어도 엄연한 군현제 국가다. 봉건제 국가가 아니다. 그러니 설령 조선왕조가 고려사를 세가가 아닌 본기로 올려 적었어도 고려의 분봉제후 세가 항목은 제외했을 것이다.
8. 그 외
2013년도 도쿄대학 본고사 국어(일본어)의 고문(古文)파트에서 삼국사기가 지문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중국고전의 출제가 대부분인 해당 파트에서 중국외의 고전이 나온건 이례적.
[1] 옥산서원본[2] 정덕본[3]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옥산리)[4]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1가 60-17[5] 그 외에 동시대에 존재한 가야나 부여, 탐라, 발해 등은 삼국과 연관된 부분에서 타자로서 간접적으로 여러 번 등장하긴 하나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현대인들 중에서는 가야 등의 역사를 같이 쓰지 않은 것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의 편찬 목적이 종합적인 한국사 교과서를 만드는 게 아니라 당장 편찬자 본인들이 소속된 조국인 고려왕조가 정통성을 얻는 배경을 기록하는 데 있는 관찬 사서였으므로 고려왕조의 성립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가장 중요한 3국만을 서술한 것이다.[6] 사서에 따라서는 동국통감처럼 삼국시대와 통일신라를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사서마다 달랐다.[7] 고려나 조선 때조차 무명이었던 영웅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김부식은 중국 서적이 아니었다면 을지문덕과 장보고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물론 중국측 기록도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부분이 있다는 지적은 고대에 중국에서부터도 나왔다. 중국의 그 유명한 사기만 봐도 처음 쓰였을 당시에는 대표 국까 서적 취급이었고 실제로도 사기에서 비난하는 간신들 다수가 한나라 인물일 정도로 국까적 성향이 심하게 나타난다.한나라를 거의 중국 역사상 최악의 왕조인 것처럼 보이게 기록했다. 당연히 그런 부분에 대한 지적은 옛날부터 있었다.[8] 이는 그가 평론식으로 적은 것을 보면 드러나며 隋唐佳話처럼 야사까지 조사해 한국 측에 최대한 유리한 사료를 뽑아 모았다.[9] 번역본 1권+색인 1권+감교 1권+주석 2권[10] 교양서 수준에서 읽는다면 이강래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번역한 삼국사기1,2(한길사), 한국인문고전연구소에서 발간한 삼국사기-신라본기, 고구려&백제본기, 잡지&열전으로 분리해서 번역하였음-도 나쁘지 않다.[11] 한국연구재단에 등록된 학회 가운데 학회명에 '상고사'가 들어가는 학회는 '대한상고사학회'와 '한국상고사학회'가 있으며, '상고사학회'는 없다. 따라서 이 '상고사학회'는 앞의 두 학회와 다른 유사 학회일 가능성이 높다.[12] 물론 고구려의 경우에는 실제 시호를 극단적으로 줄여버리긴 했지만 이건 당대 기록이 그런 것이니 삼국사기 편찬자들만 탓할 건 아니다.[13] 실제로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이 기록을 신뢰할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으나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발굴을 통해 최소한 법흥왕 시기에 성문화된 법률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14] 메소아메리카 국가들은 고대로부터 문자가 쓰여져왔고 자체적으로 종이도 만드렁졌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기록물이 존재했지만 전란과 식민지배 시기를 거치면서 대다수가 소실되어서 남아있는것들이 많지않는 실정이고, 잉카의 경우에는 이미 기원전부터 문명이 존재해왔지만 제대로 된 문자기록물들이 남아있지 않아 말 그대로 구전되오는 설화나 유적들을 통해 추측할수밖에 없는 수준이다.[15] 참고로 이 기사를 쓴 박정학 한배달 대표는 역시나 치우가 한민족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이유립의 제자로 언급되는 등 유사역사학계 인물이다.[16] "淳熙三國史記 : 元年五月二十九日, 明州進士沈忞, 上海東三國史記五十卷, 賜銀幣百付祕閣"(《옥해》 권 16, 지리 이역도서) ; "三國史記 : 【書目】五十卷, 高麗金富軾撰, 首載新羅, 次高句麗, 次百濟, 有紀表. 海東三國通曆十二卷, 高麗高得相撰, 係以中朝歷代正朔"(동일 출처).[17] 현대로 치면 출판사에서 쓰는 추천사 정도?.[18] 기껏해야 참고 도서에 이마니시 류의 저작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인데,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면서 과거의 대표적인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하든 참고 문헌에 인용해야 된다는 것은 학계에서의 기초 중의 기초, 상식 중의 상식이다.[19] 《삼국사기》와 대비시키기 위해 《구삼국사》라 칭한 것이다. 본래 이름은 그냥 《삼국사》였지도 모른다.[20] 최치원이 통일신라대에 쓴 책이며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에 존재하는 책은 위서다.[21] 다만 현대에 발견되어 남당 박창화의 위작설이 유력한 '화랑세기 필사본'은 마지막에 '記'가 아닌 '紀'자를 쓴다. 어차피 별 차이는 없지만.[22] 이상 세 문헌은 김대문이 쓴 것들이다. 편찬자들이 서명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학계에서는 도미 설화 등을 같은 저자의 《한산기(漢山記)》 내용을 일부 인용한 것으로 본다. 더하여, 국내 계통 사료로 고구려의 《신집(新集)》도 인용하지 않았을까 보는 이들도 있다.[23]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쓴 책이라고 하며 법흥왕 본기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24] 보물 제525호에서 2018년 2월 22일 승격되었음[25] 보물 제723호에서 2018년 2월 22일 승격되었음[26] 사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당시 금나라는 성장하는 나라였고, 고려는 당연히 충돌을 막기위해 사대를 해야했을 뿐이다. 먼 훗날 비슷한 상황에서 임진왜란 이후 성장하는 북방민족을 무시한 대가가 어떤것이었는지를 생각해보라.[27] 3경 체제라고는 하지만, 고대 국가에서 수도의 위상은 엄청난 것이었기에 지방 유력자들은 끊임없이 중앙으로 진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5소경을 세웠다느니 해도 결국에는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판치는 신라 말의 상황이나 무신정변 이후 서경, 동경을 비롯한 각지에서 삼국을 계승한다는 분립적인 상황은 수도와 지방의 위상 차이와 별개의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열적인 의식은 대체적으로 몽골 침입기에서 조선으로 들어가는 시기 해소된 것으로 본다.[28] 그러나 김부식은 단순한 사대주의자가 아니고 자주적 역사관이 있는 인물이라는 근거도 여럿 있다. 행적에서 보자면 정통 중화왕조인 송나라가 아니라 오랑캐 여진족인 금나라로 갈아타면서도 송나라와도 관계를 유지하는 등 유연한 외교를 시도한 것이 대표적. 자세한 내용은 김부식 항목 참조.[29] 삼국사기 속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삼국의 역사를 황제의 역사를 뜻하는 본기로 묶었다. 참고로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는 삼국사기와 같은 기전체 형식을 따랐지만 삼국의 역사를 본기가 아닌 세가(世家), 즉 제후의 역사로 기록하였다. 그 외에도 마립간 같은 고유어 왕호는 촌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이걸 모두 중국식 칭호 '왕'으로 바꿔 썼던 최치원을 까는 논평을 넣는 것처럼, 김부식을 맹목적 중화바라기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부식 항목 참조.[30] 현재 이규보의 동명완편을 통해서 일부만 전해지는 구삼국사의 경우 편찬 시기가 고려 초기로 보여지는 만큼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 당장 고려라는 국호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선택된 것이었다.[31] 혹자는 고구려 관련 기록이 더 많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지만 구삼국사 동명왕편에 실린 내용과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를 보면 삼국사기 내용이 더 많다. 구삼국사 항목을 참조.[32] 숙종 때 편찬된 《대각국사문집》에서 《구삼국사》로 추정되는 《해동삼국사》라는 책을 인용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까진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단 해동삼국사가 삼국사기인지 구삼국사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또한 구삼국사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대각국사문집에서 인용된 부분은 삼국사기 보장왕 본기에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는 툭하면 수도가 함락되고 문화재와 사료가 대량분실될 정도로 대전쟁이 잦은 나라였기 때문에 사라졌을 확률이 높다. 고려 왕조의 가장 중요한 사료였던 고려왕조실록의 초기 기록조차도 요나라에게 개경이 함락당했을 때 불타버렸을 정도였다. 이규보의 시대에도 이미 몽골한테 털리는 중이었고 이후로도 왜구, 홍건적이라는 2단 콤보가 들어왔다. 그리고 삼국사기도 사라질뻔한 걸 조선 초기에 발견해서 다시 찍어냈다는 걸 감안하면 구삼국사가 삼국사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사라졌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33] 고려의 영토와 인구는 아무리 잘 봐줘도 옛 신라가 약 90%, 발해가 약 10%다.[34] 중국에서, 제후가 조회에 나아가 천자에게 직무의 상황을 아뢰던 일. -네이버 국어사전-[35] 이 내용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긍정하는 쪽에서는 '표'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당나라 조정에 보낸 공식적인 문서이므로 개인적인 편지보다 신뢰성이 높다고 본다. 반면 부정하는 쪽에서는 발해를 디스하려는 내용일 뿐이니 믿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36] 근데 삼한일통 의식 자체가 신라가 분열해가던 후기에 나타났고 이를 통일 전쟁 시기부터 표방한 걸로 올렸다는 연구도 있다.[37] 4세기 경까지 고구려 본기는 신집5권의 내용을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38] 자세한 내용은 서의식의 『신라의 정치구조와 신분편제』,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1』을 참고[39] 관련 내용은 윤종일의 「김부식의 역사인식 연구」라는 논문을 참고[40] 그 때문에 편찬 시기가 빨라 백제의 기록이 좀 더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일본서기》가 비록 일본발 구라가 잔뜩 섞여 있지만 어쨌든 실제 역사에 과장을 덧입힌 내용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과장 속의 진실을 밝혀보고자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이 반드시 숙지할 고대 사서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41] 군자는 괴상한 것(무속신앙, 전설등)을 기입하지 않으며, 없는 사실을 지어서 작성하지 않는다.[42] 물론 삼국사기 초반부에 김부식이 "중국에도 탄생설화가 기이한데 우리라고 없는 법 없냐!"라며 쓰긴 했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곤 대체로 술이부작 원칙에 충실히 작성되었다.[43] 《삼국사기》와 더불어 양대 사서인 《삼국유사》는 지나치게 불교 중심적이어서 불교 세력을 억압하고 도교를 장려한 연개소문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이래저래 연개소문이나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기록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있다.[44] 《삼국사기》가 12세기 기록인데 반해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는 3세기의 인물. 거의 천 년이 앞선다. 게다가 삼국지는 위진 시대에 한국과 교류한 중국 국가들의 분명한 당대 기록이다.[45] 일반인들의 이러한 흑백론적 사고방식은 역사 이해에 큰 걸림돌이 된다. 역사는 모 아니면 도가 아니다.[46]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송나라에서 나온 책이다.) 고려인들은 고려는 주몽이 세우고 내려오다 중간에 왕씨로 바뀌었다는 역사 인식을 갖고 있었다. 또 몽골 침략에서 쿠빌라이 칸마저 만주벌판을 제압하던 그 고구려가 자기한테 친히 항복했다고 기뻐하고 있다.[47] 이는 현대가 되어 고대 사료를 싹싹 긁어모은 현재에도 큰 차이가 없다. 유일하게 언급되는 것이 신라민정문서이지만 이 또한 1930년대 일본의 사찰 부속 창고(동대사 정창원)에서 그릇 보존을 위해 끼워넣은 종이를 복원한 것이며, 그 이외에는 말 그대로 '제도'를 기술한 것이 아닌 단편적인 사료를 긁어모아 재구성한 것이다. 가령 우리는 신라의 정전제(721)가 국가가 농민의 토지 소유를 인정한 것이라고 교과서에서 배우지만 이에 대해서 명시하고 있는 사료는 전혀 없으며, 대체로 신라민정문서의 '연수유답'을 그것이라고 보지만 이 또한 학자마다 의견이 달라 온전히 합의된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없다.[48] 지금이야 듣보잡 전쟁이지만 당시 전한에서는 나라의 반이 연관된 엄청난 전쟁이었고 이후에도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49] 근초고왕대에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를 편찬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책이 역사책인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50] 더군다나 조선은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는 기록덕후들이 모인 국가였다.[51]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조회해보면 현재 남아있는 것은 조선시대에 필사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부식이 살아있던 시기에는 혜종의 이름인 무(武)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호(虎)라고 썼을 수도 있지만(대표적으로 <삼국유사>)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당장 고려사에 무(武) 자 검색해 보면 1175건 나온다(...). 링크. 물론 원문-번역의 중복을 고려하기는 해야 하지만 만약 일괄적으로 호(虎)로 모두 바꾸었다면 고려사 편찬 당시 환원시킬 방법이 없었을 것이고, 1획을 생략하는 식으로 피휘했을 가능성도 크다.[52] 문무왕과 마찬가지로 당대에는 호왕이라고 기록했다.[53] 적은 경우지만 왕작(王爵)을 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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