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족장
이진충과 그의 처남인
손만영이 당나라의 지배에 항거하여 일으킨 반란이다. 영주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이라서 ‘영주의 난’이라고도 한다.
당나라는 요서 지역의 영주(營州)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그 일대의 여러 종족들을 관할 통제했다. 이곳에는 본래 거란족이 살고 있었으나 당나라의 사민정책에 의해 이주한 고구려· 말갈인 등도 상당수 거주하고 있었다. 이때 영주를 관할하던 인물은 영주도독 조문홰(趙文翽)였다. 조문홰(趙文翽)는 전형적인 탐관오리로 이민족들에가 가혹할 정도로 높은 세금을 매겨 착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문홰에 대한 원성이 가득했다.
696년에 접어들면서 수년 째 거듭된 가뭄으로 영주 거주민들은 모두 혹독한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주도독 조문홰의 수탈과 혹형은 지속되고 있었고 백성들의 고통을 보다 못한
이진충 휘하의 젊은 거란 장수 한 사람이 조문홰를 찾아가 백성을 구휼할 것을 요청하다가 오히려 혹형을 받아 반죽음 상태로 내쳐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모두 당나라에 의해 국가가 와해되면서 강제 이주되어 영주까지 흘러오게 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모두 당나라에 대해 불신과 불만을 가슴속 깊이 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696년 5월 12일, 송막 도독이자, 거란족 연맹 수장인 이진충, 귀성주 자사 손만영이 반란을 일으켜 영주성을 함락시켰다. 5월 25일, 측천무후는 진압군을 영주로 파견했다. 그러나 당군은 서협석 황장곡에서 거란족의 매복에 걸려 대패하고
[1] 장군 조인절과 장현우가 포로로 잡혔다. 이에 당은 9월에 범죄자와 노비들 중에 용력 있는 자들을 군에 충원하고 건안왕 무유의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토벌에 나섰다. 당군의 2차 공세를 버틸 수 없었던 손만영은 단주로 가서 그곳을 습격했다.
696년 10월,
이진충이 병으로 사망하고 손만영이 연맹을 이끌게 되자, 이진충의 아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돌궐로 가서 구원을 청했다. 돌궐의 묵철가한은 당과 교섭해 당에 복속된 하서 일대의 돌궐인들을 돌려받는 대가로 거란족을 공격했다. 돌궐은 거란의 후방을 급습해 이진충과 손만영의 가족들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거란족들을 포로로 잡아 손만영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손만영은 잔여 세력을 수습해 기주를 함락하고 영주를 공격했다. 697년 3월, 당은 왕효걸과 소광걸을 보내 3차 공세를 시작했으나,
손만영은 당의 진압군을 동협석곡으로 유인하여 궤멸시키고 뒤이어 유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당이 4차 공세를 벌이고 묵철가한이 영주를 습격해 후방에 있던 거란인들을 모두 사로 잡자, 거란인 군대가 동요하고 해족들이 배신하여 손만영의 군은 와해되고 만다. 결국 하아소가 사로잡히고 이해고와 낙무정은 항복했으며 총수인 손만영은 도주 중에 노수 동쪽 인근에서 호위병에게 피살당하여 난이 종결된다.
이진충의 난은 거란족이 자신들의 힘을 깨닫게 된 사건이었으며
[2] 당의 통제력을 약화시켜 대조영, 걸사비우 등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 · 말갈족들이 당의 영토에서 탈출해 동모산에서 발해를 세우는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