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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지난연재물] 6∼7세기의 고구려 춤 |
【우리춤을 찾아서】6∼7세기의 고구려 춤 2006년 01월 25일 (수) 20:29:08 동양일보 webmaster@dynews.co.kr ◇필자 박재희 청주대교수(왼쪽) ◇중국 돈황 막고굴(220굴) 벽화중의 무용도 6~7세기의 고구려 춤은 4~5세기의 고구려 춤에서 볼 수 있는 자연 순박한 면모를 떠나서 관객을 의식한 ‘볼만한 것으로서의 춤’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의 무대예술에 접근한 하나의 새로운 경지로 들어갔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은 중국으로부터 그 당시에 풍미했던 서역(西域)의 춤과 음악을 대량으로 받아들이면서 고구려의 독창적이고도 주체적인 역량으로 소화시켜 고구려의 춤과 음악으로 훌륭히 이룩했기 때문이다. 서역(西域)이라 함은 중국의 서쪽에 있는 페르시아·소아시아·시리아·이집트 방면까지를 일컫는 말로 중국의 수(隋)·당(唐)시대에 걸쳐 문화의 교류 등 동서 교통(실크 로드)의 핵심이 되는 곳이었다. 고구려는 서역의 춤과 음악을 대량으로 채용한 6세기 후반부터 고구려 말기인 7세기 후반까지 고구려 무악(舞樂)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이 시기는 중국 남북조(南北朝:440~589)에서 수(隋:589~ 618). 당(唐:618~9 07)에 이르는 시기로 중국에서도 무악(舞樂)이 역사상 가장 발전하고 융성하던 때였다. 즉. 남북조 시대에는 동란(動亂)의 시대이긴 하였으나 동시에 여러 민족의 문화가 융합하던 시대였고 여러 종류의 무악예술(舞樂藝術)이 서로 교류·영향·흡수를 꾀하던 시기였다. 이렇게 다양한 여러 민족의 춤과 음악은 중국의 중원(中原)지역에 전래되어 중국의 무악을 한층 풍요롭게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당나라로 이어지면서 문화의 세계성을 확보하고. 그간에 있어왔던 여러 민족의 수많은 춤과 음악 중에서 우수한 무악 일곱 가지와 열 가지를 선별하여 수(隋)에서는 칠부기(七部伎. 후에 九部伎로 확충). 당(唐)에서는 십부기(十部伎)를 제정하여 궁정의 연회 때에 사용하였다. 칠부기와 십부기에는 중국 본토의 무악인 청상기(淸商伎)등 두 가지와 고구려의 무악인 고려기(高麗伎)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서역의 무악인 것을 감안하면 그 당시에 서역의 무악이 얼마나 풍미하였는가를 가늠케 한다. 하지만 서열로는 고려기(高麗伎)가 칠부기 중에 세 번째로 들어있어 중국의 무악 두 가지 다음에 외래악(外來樂)으로는 그 첫째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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