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펌> 4-5세기 고구려의 춤

Chung Park 2020. 6. 30. 15:33

제목내용

[동양일보 지난연재물] 2 4∼5세기의 고구려 춤
【우리춤을 찾아서】<2> 4∼5세기의 고구려 춤 2006년 01월 18일 (수) 19:47:50 동양일보 webmaster@dynews.co.kr ◇필자 박재희 교수(왼쪽) 중국 집안시 무용총 벽화중의 무용도. 고구려(BC37∼AD668)는 삼국 중 가장 먼저 건국되어 일찍부터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한민족이 세운 가장 광대하고 강력했던 제국이다. 또한 문화적인 면에서도 삼국시대의 다른 나라들을 앞서서 이끌고 영향을 끼쳤으며. 그 문화는 호방하고 진취적이며 활력에 넘치는 것이었다. 지리적으로 대륙과 가장 인접한 곳에 위치하였으므로 지역적으로는 중국과 서역(西域)의 문화를. 종교와 사상적으로는 불교와 도가사상을 가장 빨리 수용하는 등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외래문화를 수용함에 있어서 고구려만의 고유한 문화 특성을 잃지 않고 주체적인 역량으로 소화시켜 중국이나 서역 등과는 다른 독특한 개성을 지닌 문화를 형성·발달 시켰다. 그리하여 당시의 일본은 물론 중국에 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한대(漢代)이래 중국의 문헌 중에 ‘고구려는 가무(歌舞)를 좋아하는 민족’이라고 소개하지 않은 책이 거의 없을 정도로 고구려인은 춤과 노래를 좋아했다. 고구려의 춤은 부족국가 시대를 거쳐 4∼5세기 그리고 6∼7세기로 오면서 그 모습이 뚜렷하게 변모하며 발전하게 된다. 즉. 부족국가 시대의 고구려 춤은 신을 즐겁게 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신앙적 의식이며 공동체의 단결과 화합을 위한 집단가무(集團歌舞)에 그쳤으나 4∼5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높은 예술적 수준으로 발전했다. 이 때 에는 이미 춤과 음악을 전달하는 각각의 전문인이 있었으며 가무(歌舞)를 연출하는데 있어서도 그 규모가 10인 이상의 상당히 커다란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4∼5세기 고구려 춤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보존돼 있는 곳은 중국(中國) 길림성(吉林城) 집안시(集安市)에 있는 고구려 고분(古墳)의 벽화(壁畵)이다. 고구려는 그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 일대의 통구지방. 즉 현재의 집안지역과 평양 및 그 주변 지역에 수많은 고분들을 남겨 놓았는데 그 중에 일부는 내부에 벽화를 그려 넣었다. 이 고분들의 연대는 4세기부터 7세기에 이르는 것들인데 대체로 초기(4~5세기). 중기(5~6세기). 후기(6~7세기)로 나누어 볼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