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비류왕-개로왕(304-475)

<펌> 구이신왕 (420-427)-나무위키

Chung Park 2020. 7. 12. 01:05

분류

 

百濟
백제 국왕

[ 펼치기 · 접기 ]

 

久爾辛王
구이신왕

성씨

부여(扶餘)

구이신(久爾辛) / 기(奇)(?)[1]

왕자

부여비유(扶餘毗有)(?)[2]

부왕

전지왕(腆支王)

모후

팔수부인(八須夫人)

생몰연도

음력

? ~ 427년 12월

재위기간

음력

420년 3월 ~ 427년 12월 (8년)

 

1. 개요

2. 생애

3. 치세

4목만치의 전횡?

5. 생몰년도에 대한 의문점

6삼국사기 기록

1. 개요

백제의 제19대 국왕(건길지).

2. 생애

전왕 전지왕의 맏아들로 약 8년간 재위했으나 즉위했다, 죽었다 외에 별다른 기록이 없다. 427년 12월에 사망했는데, 정치적 입지가 굉장히 불안했던 구이신왕이 차기 왕인 비유왕에게 암살됐다는 설도 있다.

구이신왕은 치세 내내 정치적 입지가 굉장히 불안했으며, 결국 정변이 일어나 비유왕에게 암살당한 것으로 보여진다.

3. 치세

이 사람을 단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 왕들 중 개루왕사반왕책계왕분서왕계왕침류왕삼근왕혜왕법왕과 더불어 한중일 삼국의 역사책을 모두 뒤져서 업적을 정리해도, A4 한 페이지도 채울 수 없는 왕들 중 하나다. 그나마 위의 왕들 중 일부는 재위 기간이 1~3년밖에 안 되는 왕들도 있는데 이 사람은 재위 기간이 8년이나 되지만 남은 기록이 너무 적은 데다가 사신, 무역 기록을 빼면 없다. 기록말살형이라도 당한 건가 싶을 정도로 기록이 너무 없어 어떤 왕이었는지 자세히 알기 힘들다.

일단 그나마 중국 측에 남은 기록들이라도 정리해보면, 구이신왕은 중국 대륙의 세력과 연결하여 백제가 장악한 황해 연안의 해상 무역권을 유지하고, 또한 팽창하는 고구려 세력에 대처하려 하였다. 그것은 그전부터 형성된 백제와 남조(南朝)의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일층 강화하는 것으로 전개되었다. 구이신왕은 423년과 425년에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했고, 송나라로부터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의 칭호를 받았다. 425년 이후는 매년 사신의 파견이 있었다. 그러나 원가 7년(430년)에 “여비(余毗, 비유왕)에게 여영(余映, 전지왕)의 작호의 계승을 허락했다.”라고 하여 구이신왕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비유왕이 재위기간이 꽤 긺에도 불구하고 일본서기에서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 것과 대조적. 어쨌든 비유왕으로 승계되는 과정이 정상적이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왕이 우리에게 남긴 것 중 또 다른 하나는 백제의 국왕 재위기간 계산법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구이신왕은 427년 12월에 죽었는데, 비유왕 2년이 이듬해인 428년이므로 백제에서는 왕이 죽으면 바로 그 달부터 다음 왕의 재위 기간을 세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4. 목만치의 전횡?

25년에 백제의 직지왕이 죽었다[薨]. 이에 아들 구이신(久爾辛)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이 어려 야마토(大倭)의 목만치(木滿致)가 국정을 잡았다. 아울러 왕모(王母)와 밀통하여 무례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천황은 이를 듣고 소환하였다【『백제기』에서는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정벌할 때 그 나라 부인을 얻어서 낳은 자식이다. 아버지의 공적으로 임나에서 전횡을 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귀국(貴國)과 왕래하였다. 천조(天朝)의 명령을 받아서 우리나라의 정사를 장악하고 권세를 세상에 떨쳤다. 그러나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서 소환하였다.”라고 한다.】.


일본서기》 오진천황 25년.

구이신왕의 기록 양이 적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문구가 《일본서기》에 있다. 전지왕이 사망한 후 어린 나이에 구이신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쓰여 있다. 이 때문에 목만치라는 인물이 국정을 장악했고, 결국은 왕의 어머니(팔수부인)와 놀아나고 왕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것이 쓰여있다. 물론 일본서기의 기록이기에 무조건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만일 이게 전지왕이 아니라 구이신왕 대의 일이라면 실제로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허수아비 왕이었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록이 유난히 적은 것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5. 생몰년도에 대한 의문점

일본서기》에는 전지왕이 승하하고 그의 어린 아들인 구이신왕이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에, 구이신왕의 어머니와 정을 통한 목만치라는 사람이 정권을 휘두르고 횡포를 부렸다고 기록되어 있다.[3] 한편『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전지왕의 재위기간은 405년부터 420년까지이다. 그런데 『송서』에는 전지왕이 425년(구이신왕 6)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428년(비유왕 2) 이후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사망 연대에 차이를 보인다.

6.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구이신왕 본기
一年春三月 구이신왕이 즉위하다
八年冬十二月 구이신왕이 죽다

이게 끝. 재위 8년간 왕위에 올랐고 사망했다 빼면 《삼국사기》에 남은 기록이 없다. 삼국 특히 백제는 기록이 너무 없는데 구이신왕도 그 예 중 하나이다.

 

[1] 박호균은 저서 『칠지도 명문』에서 구이신을 줄여서 기(奇)라고 적었다고 주장하였다.

[2] 삼국사기에서는 일단 구이신왕의 아들로 기록했으나 일설에 의하면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한다고 적어놨다. "구이신왕이 15세에 비유왕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즉위 당시 비유왕은 9세에 불과함으로 구이신왕이 20세에 비유왕을 낳았다면 비유왕은 4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령관계를 생각한다면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아들이라기보다는 형제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중시된다."(이도학, 1995; 이기백, 1996) 송서에서도 “여비(余毗, 비유왕)에게 여영(余映, 전지왕)의 작호를 계승하도록 허락했다.”고 명확하게 써져 있어 둘이 조손 관계가 아닌 부자 관계임을 암시하고 있다.

[3] 국내나 중국의 기록에는 그런 내용을 찾을 수가 없어 진위성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백제에 관해서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그나마 가장 자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