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내물 마립간 (356-402)-나무위키

2020. 7. 14. 09:38신라 중 (356-654)

분류

 

신라 국왕

[ 펼치기 · 접기 ]

 

시호

내물 마립간(奈勿 麻立干) / 나밀 마립간(那密 麻立干)

성씨

김(金)

내물(奈勿) / 나밀(那密)

왕후

보반부인(保反夫人)

왕태자

김눌지(金訥祇)[1]

왕자

김복호(金卜好), 김미사흔(金未斯欣)

아버지

김말구(金末仇)

어머니

휴례부인(休禮夫人)

생몰년도

음력

? ~ 402년 2월

재위기간

음력

356년 ~ 402년 2월 (47년)

 

1. 개요

2. 생애

2.1. 계보

2.2. 재위

 

3내물왕릉 4. 호칭  5삼국사기 기록

 

1. 개요

위두(衛頭)를 부(苻)씨 진(秦: 전진)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부견(苻堅)이 위두에게 물었다.
“경(卿)이 말하는 해동(海東)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으니 어찌된 것인가?”
위두가 대답하였다.
“또한 중국과 같은 경우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명칭과 이름도 고쳐졌으니, 지금과 예전이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遣衛頭入苻秦 貢方物 苻堅問衛頭曰 卿言海東之事 與古不同 何耶 答曰 亦猶中國 時代變革 名號改易 今焉得同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 내물이사금 26년조 中[2]


신라의 17대 임금이자 이후 550년이 넘게 이어지는 경주 김씨 왕조의 시작점.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왕의 칭호로 마립간을 처음 사용한 왕이라고 한다. 신라 역사의 분기점에 해당하는 임금으로, 신라는 후삼국시대까지 계속될 김씨 왕위 세습, 특히 성골이 확립되었고 이 때부터 마립간(매금, 대군장이란 뜻)이란 칭호를 사용했다. 다만, 삼국사기에서는 아직 이사금 칭호로 나온다.

그는 내물왕이라고도 불리지만,  이는 후대에 편의상 사용하는 호칭이다. 사실 지증왕 이전의 왕들 모두가 후대에선 비슷한 이유에서 당대에 쓰던 왕호 대신 '왕'을 붙여 부르기도 하나, 선덕왕 이후로 진골귀족들을 '(태종)무열왕계'와 '내물왕계'로 구별하기 때문에, 유독 내물 마립간의 경우 '내물왕'이라는 표기가 꽤 많이 보인다.[3]

 

2. 생애

 

2.1. 계보

아내를 맞이할 때 같은 성씨를 취하지 않는 것은 분별을 두터이 하기 때문이다. ... 신라의 경우에는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이할 뿐만 아니라 형제의 자식과 고종·이종 자매까지도 모두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은 각기 그 습속이 다르다고 하나 중국의 예속(禮俗)으로 따진다면 도리에 크게 어긋났다고 하겠다. 흉노(匈奴)에서 그 어머니와 아들이 상간(相姦)하는 경우는 이보다 더욱 심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 3 내물 이사금

 

김씨 시조 김알지의 8세손. 아버지는 김구도의 아들인 말구(末仇), 어머니는 휴례부인(休禮夫人). 보반부인(保反夫人)과 혼인했는데, 보반부인은 미추 이사금의 딸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후대 사람 김부식의 근친혼에 대한 평가가 있는데 이전부터 신라 왕실은 근친혼이 많았다. 그러므로 특별히 근친혼을 통해 김씨 왕실의 결속을 이끌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미추 이사금은 284년에 승하했고 내물 마립간은 356년에 왕위에 올랐다. 기록을 최대한 신뢰하여 보반부인이 딱 284년에 태어났다 치더라도 내물 마립간이 즉위했을 시점에는 이미 73세의 노령이었을 것이다. 내물 마립간이 40대에 등극했다 해도 최소 30살 연상인 셈인데, 당연히 정상적인 혼인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이 기록이 100%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기록의 기년이 잘못됐거나, 보반부인이 미추왕의 손녀 혹은 증손녀이거나, 내물 마립간이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미추 이사금을 억지로 끌어들였다는 등 여러 이설이 있다. 실성 마립간의 왕비 아류부인도 보반부인과 같은 미추 이사금의 딸이어서 마찬가지의 무리수를 품고 있다. 둘 다 이 추정을 확실히 할 수 있는 기록은 없으므로, 일반적으로 내물 마립간의 왕비 보반부인과 실성 마립간의 왕비 아류부인은 자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2. 재위

내물 2년(357년) 봄, 각 지방에 사자를 파견하여 과부나 홀아비 등에 곡식 3곡(1곡은 10두다)을 하사하고, 행실이 착한 관리에게 1급씩 관직을 올려주었다. 민심 수습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신라 주위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바다 건너 국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앞서 흘해 이사금 때 틀어진 왜국과의 관계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아 내물 9년(364년) 왜군의 국지적인 내침이 있었다. 고대사 기록답지 않게 의외로 왜군이 쳐들어오면 그냥 격퇴했다, 농성하다 적이 물러갔다 식의 간단한 기록이 아닌 제법 상세하게 나온다. 삼국사기 기록을 살펴보면 내물 9년 왜의 대군을 상대하기 위해 수천개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군복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준 다음, 토함산 밑에 세워놓고 날쌘 병사 1천 명을 잠복시켰다. 왜군들이 자신들의 수를 믿고 허수아비를 향해 돌격해오는 동안, 복병을 동원하여 대파한다. 비록 지형을 이용한 기습 공격으로 왜군은 격퇴되었으나, 신라군이 왜군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못하고 농성 또는 전술로서 격퇴하는 모습은 노략질 정도의 수준으로 그치던 일본의 침략이 하나의 정권으로 모이기 시작하면서 점점 대형화되고 있음을 뜻한다.

다만, 위의 기록에서 일본서기에 따르면 왜군이 신라군의 왼쪽이 텅 빈 것을 눈치채고 집중공격하여 신라군을 대파했다고 나온다. 결과는 서로 다르지만, 364년에 왜의 공격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따르면 삼국사기엔 없는 기록이 추가로 있는데, 내물 14년(369년) 왜군이 대대적으로 신라, 가야 정벌을 단행했다고 한다. 이 때 백제 근초고왕과 왜의 연합군은 신라를 정벌하고, 가야 7개 소국을 평정했다고.

왜 이외에 백제의 근초고왕이 백제 중심의 국제 질서를 한반도 남부에 정립하려 하고 왜국과 가야가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자, 신라 또한 별 수 없이 백제의 우위를 인정하고 여기에 참여하였다. 366년 백제의 사신이 신라를 방문하고, 368년 신라가 백제로부터 좋은 말 두 필을 받은 사실은 이러한 일본서기의 기록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내 신라는 백제 우위의 국제 질서에 도전을 시작하여, 즉위 18년(373년) 신라로 귀순한 백제 독산성 성주와 백성 3백여명을 백제로 송환하지 않았다. 이 때 근초고왕이 독산성 성주와 백성들을 돌려주라고 국서를 보내자 내물 마립간은 "원래 백성은 일정한 마음이 없으니 생각나면 오고 싫어지면 가버리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너희 백성이 편치 않음은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나한테 뭐라고 하는 게 말이 되겠는가?"라고 답서를 보내 근초고왕을 버로우시켰다. 이런 소리가 나올 법도 했던 게 이 논쟁이 있던 1년 전에 백제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2년 뒤인 375년에는 흉년까지 들어 수곡성을 탈취해 간 고구려에 반격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해 겨울에 근초고왕이 승하했다. 비록 근초고왕 시대 백제가 전성기로 잘나가고 있었지만 이 사건 직전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 백제는 고구려도 신경써야 하기 때문에 신라를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본 듯 하다. 국력으로 따지면 이 시기 신라가 백제보다 한 수 아래임에도 이런 패기를 보이는 걸 보면 내물도 보통 사람은 아닌 듯. 뒷날의 일이지만 문무왕도 당나라 장군 설인귀와 말다툼을 한 적이 있다. 381년에는 화북의 전진(前秦)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 백제의 공격을 초래하였다.[4] 그래서 일본서기 신공황후 관련 기록의 주인공을 백제로 바꾸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백제의 공격에 맞서 신라는 미인계로 일본 장군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매수하여 백제와 협력하고 있던 일본군이 오히려 가야를 공격하였는 사건이 벌어졌다.[5] 이에 백제는 다시 목라근자를 보내어 가야국을 복원시켰으나, 이로서 한반도 남부에 근초고왕부터 정립되었던 백제의 권위와 위상은 막심한 타격을 입게 되었고 반면 신라는 이로 인해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처지가 되었다.

따라서 신라는 당시 백제를 연파하며 리즈 시절을 시작한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392년 고구려의 사신이 내방하자 내물의 조카이자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이 볼모가 되어 고구려로 떠났다. 393년에도 왜군이 쳐들어와 수도 금성을 5일이나 포위하지만 내물왕은 왜의 예봉을 피한 뒤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여 퇴각하는 왜적들을 공격, 섬멸적인 타격을 입히는 전과까지 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400년에는 백제가 선동하고 왜국이 주도, 가야까지 3국이 참여한 대대적인 신라 침공이 벌어졌다. 그동안 왜군이 신라에 많이 쳐들어왔지만 이번엔 그 규모가 차원이 달라서, 광개토왕릉비에서는 왜인이 나라 안에 가득 찼다고 기록했을 정도. 결국 동맹국인 고구려에 지원군을 요청하자 이듬해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5만 군대가 실성과 함께 내려와 신라를 구원하는 한편 퇴각하는 왜군을 가야 땅 종발성까지 쫓아 그들을 패퇴시켰다. 종발성은 지금의 양산시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신라는 한층 더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되었으며, 사실상 속국 신세로 전락했다. 하긴 안 그랬으면 망했었을 공산이 크다. 그나마 이 사건 이후 고구려 군대의 보호를 몇 십년간 받으면서 과거와 같이 왜-가야-백제 연합에 거의 일방적인 수세적 입장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고, 이후 눌지 마립간이 고구려 세력을 축출할 때까지 큰 전쟁 없이 국력을 비축하고 성장할 시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마냥 부정적으로 볼 수도 없는 편.

내물에게는 눌지복호미사흔 등 적남이 많이 있었음에도 내물 사후 신라의 왕위는 고구려에서 인질로 오랫동안 머물다 401년에 신라로 귀국한, 고구려에 인맥이 있고 고구려의 후원을 받는 실성에게로 넘어갔다. 일설에는 내물이 고구려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미 40여년이나 재위한 걸 생각하면 (삼국유사에서는 57년을 재위하였다) 수명이 다해 자연사한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고구려와의 관계가 보다 긴밀해지면서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아[6] 377년(내물 22년)과 382년 두 번 중국 북부를 지배하던 전진과 국교를 수립하기도 했다. 중국 측 기록에 전진 황제 부견과 신라 사신 위두 사이의 대화가 남아있기도 하다. 참고로 이 것이 '신라'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한 최초의 사례이기도 한데, 더 이전 기록인 삼국지 등에서는 사로국 등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어있었다.[7]

여담으로 재위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백제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근초고왕,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연 광개토대왕과 재위기가 모두 겹치는 왕이다. 어찌 보면 삼한의 패권이 백제 우위에서 고구려의 우세로 넘어가는 시기였던, 삼국시대 역사상 가장 숨가쁜 격동기 중 하나인 4세기 중엽~5세기 초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

 

3. 내물왕릉

 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

[ 펼치기 · 접기 ]

 



전 내물왕릉

내물왕릉. 첨성대 남서쪽에 위치한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내물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이다. 돌무지덧널무덤 양식으로 추정되며, 하단부의 돌무지가 일부 노출되어 있다.


인교동 119호분.[8]

내물왕의 생존 기간을 고려하면 당시의 유행하였던 묘제는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으로써 대릉원 황남대총처럼 여느 고분들과 마찬가지로 연접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바 첨성대의 남쪽에 자리하였다는 기록에 말미암아 적석목곽묘 중에서도 당시 왕릉급을 갖춘 무덤이 인교동 119호분이기 때문에 보다 가능성이 있는 무덤은 바로 인교동 119호분이라고 할 수 있다.

발굴조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인교동 119호분의 상부를 보면 함몰된 양상이 드러나는데 내부 목재들이 썩은 경우에 내려앉아서 무덤 정상부분이 평평해지는 현상이 있다. 반면에 전 내물왕릉은 무덤이 작고 무덤 호석부분에 돌 일부가 노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서악동 고분군에서 보이는 현상이다. 서악동 고분군 정도의 노출에서 점차 내부 호석렬이 신라 후대로 갈수록 무덤 밖으로 노출되어 아예 괘릉처럼 외부 장식용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고려한다면 전 내물왕릉은 실제로 내물 마립간의 무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4. 호칭

 

내물 이사금 혹은 나물 이사금, 나물 마립간 등 이름과 왕호에 여러 가지 논란이 있는 왕이기도 하다.

이름인 奈勿에 대해 살펴보자면, 삼국사기에 따르면 奈勿(혹은 那密)이라고도 한다라고 되어 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3권). 奈에는 당대 발음으로 [naj]라는 음가가 있으며, 반절로는 奴帶切이다. 이는 현대 한자음의 내의 음가에 해당한다. 내의 음가는 운서인 《廣韻(광운)》에 따르면 능금을 나타내는 것으로 능금 내라는 한자가 이 한자의 원래 뜻이다('柰有靑白赤三種 乃帶切 - 廣韻去聲卷第四'. 구체적으로는 蟹攝泰韻一等에 속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내물로 읽는 것이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奈는 당대부터 이미 那와 통했다. 바로 가차. 자세한 건 육서의 가차 부분 참고. 이때는 奴箇切의 [na]로 읽었다. 즉 'ㄴ+ㅏ=나'로 읽었다는 의미다(한국 한자음의 반절 참고). (那也柰那通 奴箇切 - 廣韻去聲卷第四. 구체적으로는 果攝箇韻一等에 속한다). 삼국사기 3권의 奈勿이 那密과 통한다는 것을 보면 애초에 여기서는 奴箇切의 [na]로 읽는 것이 맞다는 것을 당연히 알 수 있다.

勿의 경우는 원음이 믈에 가까운 음가로, 臻攝物韻三等에 속한 한자다. 여기서 攝이란 성조에 상관없는 기본 모음 + 종성을 묶은 것이다. 韻이란 성조가 포함된 모음 + 종성이고 等이란 개합음(w, j)을 가리키는 것으로. 臻攝物韻三等은 전설 고모음으로 '을'에 모음이 가깝다는 의미. 勿 원음은 [mĭuət]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密은 臻攝質韻三等에 속한 한자로 밀에 가까운 음가로 [mĭĕt]에 가까웠을 음으로, 이 둘이 통용되었다면 사실상 오늘날의 밀에 해당하였을 것이다. 입성 t의 l화는 이미 신라 시대부터 그 흔적이 있으므로 당대부터 l로 읽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당대의 음가를 오늘날의 변화된 음에 맞추어 적으면 나밀이 가장 가까우며, 현재 흔히 쓰는 한자 표기인 奈勿도 또한 나물로 읽는 것이 옳다. 여기서 勿는 순우리말/지명에서 ㄹ이 탈락하는 경우가 많아 실제 발음은 나므가 되는데, 아마 나무에 해당하는 발음을 적으려던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왕호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이 시기에 마립간의 칭호가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이 시기까지 이사금의 칭호를 쓰고 마립간의 칭호는 19대 임금인 눌지 마립간 시대에 비로소 시작되므로 이설이 있다. 나물이 눌지왕계의 시작이므로 즉위 후 후대에 마립간으로 변화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에 사신을 보냈던 것이 중국 측 기록에 남아있는데, 거기서는 신라 왕 이름을 누한(樓寒)이라고 쓰고 있다. ‘누’는 '마루'로, 뜻으로 읽으면 ‘마립’이고, ‘한’은 간(干)과 같이 음으로 쓴 글자로 해석되므로 즉 내물의 본명이 아니라 마립간 칭호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마립간 칭호를 처음 사용한 시기가 내물왕 대로 추정되는 근거가 되고 있다.

내물과 동시대의 광개토왕릉비에서도 신라왕을 부를 때 마립간의 다른 표기로 추정되는 매금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높다고 보며 일단 현행 한국사 교과서 등 한국의 국사 교육과정에서는 내물이라고 표기하고 있고, 내물부터 마립간으로 표기하고 있다.[9]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내물 이사금 본기
一年夏四月 내물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356)
二年 환·과·고·독을 위로하고, 효제에 특별한 사람을 포상하다 (357)
三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358)

359-361 : 3년 공백


七年夏四月 나무가 가지를 서로 잇다 (362)
九年夏四月 왜병이 쳐들어오자 이를 물리치다 (AD 364)
十一年春三月 백제 사람이 와서 예방하다 (AD 366)
十一年夏四月 물난리가 나서 산이 무너지다 (366)
十三年 백제 왕이 좋은 말을 바치다 (AD 368)

 

369-371 : 3년 공백


十七年 가물고 흉년이 들자 사자를 보내 진휼하다 (372)
十八年 백제의 독산성주가 신라로 투항하다 (AD 373)
十九年夏五月 서울에 물고기가 비에 섞여 떨어지다 (AD 374)
二十一年秋七月 뿔이 하나 달린 사슴을 바치다 (AD 376)
二十四年夏四月 작은 참새가 큰 새를 낳다 (AD 379)


二十六年 위두를 전진에 사신으로 파견하다 (AD 381)

 

382-387 : 6년 공백


三十三年夏四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AD 388)
三十三年夏六月 또 지진이 일어나다 (388)
三十三年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다 (388)
三十四年春一月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다 (AD 389)
三十四年春二月 흙비가 내리다 (389)
三十四年秋七月 누리의 피해로 곡식이 여물지 않다 (389)
三十七年春一月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보내 볼모로 삼다 (AD 392)
三十八年夏五月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자 독산에서 대승을 거두다[10] (AD 393)
四十年秋八月 말갈이 침입하자 이를 물리치다 (AD 395)
四十二年秋七月 하슬라에 흉년이 들어 죄수를 사면하고 세금을 감면해 주다 (AD 397)
四十四年秋七月 누리가 날아와 들판을 덮다 (AD 399)
四十五年秋八月 살별이 동쪽에 나타나다 (AD 400)
四十五年冬十月 내구마가 슬프게 울다[11] (AD 400)
四十六年 봄과 여름에 가물다 (401)
四十六年秋七月 고구려에 볼모로 갔던 실성이 돌아오다 (AD 401)
四十七年春二月 왕이 죽다 (AD 402)

대체적으로 자연재해 같은 안 좋은 기사가 많다. 내물 이사금(삼국유사에서는 마립간으로 표기)부터 삼국사기 3권이 시작된다.

[1] 삼국사기엔 태자가 됐다는 기록이 없다. 삼국유사 기록.

[2] 태평어람에도 전진의 정사로 추정되는 『진서(秦書)』에서 인용한, 삼국사기와는 연도(382년)와 문장만 다르고 내용은 같은 기록이 실려있다. 링크[3] 선덕왕과 원성왕이 자신을 '내물왕의 후손'으로 내세웠기 때문인데 정작 선덕왕은 모계 쪽으로 엄연히 태종 무열왕의 혈통을 잇고 있는지라 무열왕계에도 해당되기 때문에, 원성왕부터를 내물왕계 왕통이 왕이 되었다고 설명하는 편.

[4] 이것은 신라 역사상 최초로 중국 정권과 외교적 접촉을 한 것이었다. 이 때도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전진과 접촉할 수 있었다.

[5] 일본서기의 가야왕 기본한기를 삼국유사의 금관가야 5대 임금 이시품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6] 신라는 한반도의 동쪽에 있으므로, 나중에 진흥왕 때 서해 바다에 항구를 얻기 전까지는 중국에 단독으로 사신을 보낼 수 없었다.

[7] 후대 지증왕의 업적은 신라라는 표기를 '확정'한 것이다.

[8] 사진을 찍은 지점이 바로 전 내물왕릉이다. 인교동 119호분은 전 내물왕릉의 지근거리에 소재하고 있다.

[9] 단, 공영방송인 kbs 다큐에서 나물 마립간이란 칭호를 쓰거나 경상북도 주도로 편찬된 연구총서인 <신라사대계>에서도 나물 마립간으로 서술하는 등 공적인 매체에서 '나물'이라는 발음을 쓰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10] 광개토대왕비에 언급된 신묘년(391년)의 다음해(392년)와 그 이듬해(393년)에 해당된다.

[11] 광개토왕릉비 영락10년(400년) 광개토대왕이 보기 5만으로 신라를 구원한 해이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했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김부식이 이것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을 가능성은 낮으며, 대신 삼국사기가 저술된 고려 중기 기준으로 1천 년 전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혹은 고구려의 신라 구원으로 인하여 사실상 고구려의 속국이 된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기록이라고 보는 해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