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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실성 마립간(實聖 麻立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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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호 |
실주왕(實主王) / 파사매금(波沙寐錦)[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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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
김(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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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실성(實聖) / ○보금(○寶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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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 |
아류부인(阿留夫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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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 |
아로부인(阿老夫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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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김대서지(金大西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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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
이리생부인(伊利生夫人) 석씨[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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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연도 |
음력 |
? ~ 417년 5월 |
재위기간 |
음력 |
402년 ~ 417년 5월 (16년) |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전
2.2. 재위
2.3. 일본서기 신공기 관련 기록
3. 평가
4. 삼국사기 기록
5. 창작물
1. 개요
신라의 제18대 왕. 김알지의 후손(예손)으로, 아버지는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 이사금의 동생 이찬 대서지(大西知)[3], 어머니는 아찬 석등보(昔登保)의 딸인 이리부인(伊利夫人)이다. 같은 김씨 왕족이지만 전왕 내물이나 다음 왕 눌지와는 먼 친척관계. 내물 마립간의 뒤를 이어 3번째 김씨 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칭호는 삼국유사에서는 마립간,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마지막 이사금인데, 광개토왕릉비 등 다른 사료와 종합해 봤을 때 전왕 내물 마립간 때부터 마립간이라고 불렀다고 여겨지므로, 주로 삼국유사를 따라 실성 마립간으로 불린다. 그런데 학자들은 그가 '이사금'이라는 호칭을 쓴 것이 선왕 내물계 김씨 일족과의 의도적인 차별화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마립간에 비해서 '이사금'이라는 왕호는 연륜 있는 연장자의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 실제로 실성이 왕이 될 당시에 내물의 아들들은 아직 너무 어려서 국정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위에 올렸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왕의 연륜을 강조키 위해 마립간보다 이사금 왕호를 더 선호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큰 문제가 있는데, 눌지가 실성의 사위라는 것이다. 실성이 내물왕의 아들들과 왕위경쟁을 통하여서 즉위하였을 경우라면 즉위 이후에 아들들, 특히 가장 위협되는 눌지를 그냥 두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혹자들은 복호와 미사흔이 고려와 왜에 볼모로 갔다는 것으로 해결했다고 하지만, 둘은 눌지보다 동생들이고, 복호가 간 고려는 실성이 즉위 전에 볼모로 갔던 곳이다. 가장 위협되는 자를 사위로 삼으면서 그냥 두었다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기록상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성의 부인이 내물의 부인과 자매<혹은 母女?>관계에 있기에 즉위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9년(서기 392) 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약속하였다. 신라왕이 자기의 조카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내왔다.
九年春 遣使新羅修好 新羅王遣姪實聖爲質
신라본기에서는 나물과 실성과의 관계가 애매하게 나타나지만, 정작 고구려본기에는 명확히 조카라고 표기되어있다.
2. 생애
2.1. 즉위 전
내물 마립간 재위 후반, 신라는 백제 - 가야 - 왜 연합 사이에 끼어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태였고 북방에서 전성기를 맞고 있던 고구려의 힘을 빌리기로 방침을 정한다. 이에 392년 정월 고위 귀족인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400년 백제, 왜, 가야의 삼국 연합군이 대대적으로 신라를 쳤을 때 광개토대왕이 5만의 지원군을 보내 격퇴했고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린 대가로 고구려군이 신라 땅에 주둔하면서 정치적 간섭을 받는 반쯤 복속된 상태로 전락했다. 실성은 401년에 고구려에서 신라로 귀향했고, 402년 내물 마립간이 승하하면서 즉위하게 된다.
그가 왕위에 오른 과정은 석연치가 않다. 내물 마립간이 죽었을 때 그 아들들이 어려서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비록 어리다고는 해도 내물에게 버젓이 아들들이 있었음에도 타지인 고구려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신라 내부에 굳건한 정치 세력을 이루기 힘들었을 실성이 401년 귀국하자마자 402년에 왕에 올랐다는 점은 실성의 등극 뒤에는 고구려의 입김이 작용했을 개연성을 보여준다.[4] 실성도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고구려의 유력자들과 접촉하면서 차기 왕권을 노렸을 것이고 고구려 또한 인질 시절 인맥을 터 놓아 자신들의 말을 잘 들을 듯한 실성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거기다 실성의 어머니는 석씨다. 한마디로 내물의 즉위로 왕위를 잃어버린 석씨가 자신들의 영향력을 다시금 확보하기 위해서 석씨 왕실의 피가 섞인 실성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실성 이후 석씨는 신라 왕계에서 그야말로 사라져버린다. 석씨 이전에 왕위에 올랐던 박씨의 경우 일단 왕위는 잃었어도 중대와 하대까지 쭈욱 주요 귀족 가문으로 계속 왕실에 남아있으며, 거기다 먼 미래에는 왕위에도 잠깐 다시 오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때 당시 석씨가 실성을 밀었기 때문에, 나중에 실성을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한 눌지에 의해 석씨 일족도 같이 신라 왕실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5]
또한 그의 왕비 아류부인(阿留夫人)이 미추 이사금의 딸이라는 것도 수상하기 짝이 없다. 미추 이사금의 시기는 실성의 활동시기에서 약 90여년 전의 일이니, 미추 이사금의 딸은 이 시점에선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정말로 그의 왕비가 미추 이사금의 혈통이라면 딸보다는 손녀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 사실 실성이 아류부인을 미추 이사금의 딸이라고 한 것은 삼국시대 초기 기록이 으레 그렇듯 기년이 잘못 기록되었다는 설도 있고, 혹은 일종의 프로파간다일 가능성이 있는데, 아마도 내물의 아들들이 있음에도 내물과 가까운 친척이 아닌 실성이 왕이 된 것에 대한 세간의 비판을 잠재우고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과거의 왕에서 연줄을 끌어온 것으로 보인다.[6]
2.2. 재위
왕위에 오른 후 미사품을 서불한으로 삼고 그에게 국정을 맡겼으며 즉위년(402년)에 내물 마립간의 3남 미사흔을 왜와 화해하기 위해 인질로 보내고, 412년엔 2남 복호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 외교관계를 개선하려 제스쳐를 취한다.
그가 타국에 볼모로 보낸 미사흔과 복호는 전왕의 친아들들이니 실성의 최대 정적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사실 인질을 보내는 이유는 '너희에게 거슬리는 짓은 하지 않겠다'라는 약속이고, 만약 이걸 어긴다면 보내놓은 인질은 죽을 것이다. 보통 인질은 죽으면 곤란한 중요 인물을 보내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실성 입장에서 복호와 미사흔은 고구려와 일본에서 세상을 떠나더라도 별로 손해가 아니었다. 오히려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니 이득일지도 모른다. 고구려와 일본에 고위 왕족을 보내 신라가 명목상 고개를 숙이며 선심 쓰는 '척'도 하고, 전왕의 아들들을 신라 밖 이곳 저곳으로 퍼트려 보내서 세력을 약화, 즉 사실상 숙청시키려는 목적이었던 듯. 참고로 미사흔과 미사품은 이름이 비슷하지만 다른 인물이다. 복호를 고구려에 보낸 것은 친고구려 노선을 재확인시키는 목적. 그리고 소싯적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온 실성 본인의 후임이기도 하다.
백제(403년)와 왜(405년)의 침략이 있었지만 격퇴시켰다. 왜에 미사흔을 볼모로 보냈음에도 왜가 쳐들어온 건데 기록상 왜 이렇게 되는지 부연 설명은 부족하지만, 왜국 측도 미사흔이 말만 왕족이지 인질로서 제대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던지 해서 뭔가 상황이 꼬인 것으로 보인다.[7] 특히 405년의 싸움은 4월에 왜병이 침범하여 명활성(明活城)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갈 때, 왕이 친히 기병을 이끌고 독산 남쪽에서 왜병과 두 번 싸워 이기고, 왜병 3백여 명을 죽였다고 한다. 405년에는 신라가 승리했지만 407년 3월에 또다시 동쪽 변경을 침입하더니 6월엔 남쪽을 침범해 백성 1백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한편으로 이런 기록도 있다.
7년(서기 408년) 2월에 왕은 왜인들이 대마도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병장기와 군수품을 저축하여 신라를 침범하려고 준비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왕은 우리가 먼저 정예병을 뽑아 왜인들을 쳐부수자자고 하였다. 그러나 예불감 벼슬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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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 이사금 때와 비슷하게 왜국에 대한 선제 공격 이야기가 있었는데, 비록 미사품의 반대로 무산됐지만 이러한 기록들을 볼 때 실성 개인적으로는 직접 전선에서 군대를 통솔할 능력도 제법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전쟁에 있어서도 꽤 호전적인 성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사위이자 전왕 내물의 장남인 눌지가 나이가 차고 점점 정치적으로 부상하자, 417년 실성은 눌지를 제거하려고 마음먹었다. 실성은 고구려에 있던 시절 알고 지내던 사람을 몰래 불러 "눌지를 보거든 그를 죽여라"라고 사주한 뒤에, 그 고구려 사람과 눌지가 밖에서 우연히 만나도록 상황을 유도했다. 그러나 이 고구려 사람이 눌지를 만나보고 외모가 시원하고 군자의 풍모가 있음을 알고 오히려 눌지에게 암살 계획을 실토해 버리고, 눌지가 실성을 원망해 그를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것이 삼국사기의 기록.
삼국유사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는데, 삼국사기와 달리 실성이 암살을 사주한 게 '한 고구려 사람'이 아니라 '고구려군'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는 눌지가 스스로 실성을 죽이고 임금이 됐다고 했지만 삼국유사에서는 고구려군이 눌지를 임금으로 앉혔다고 되어있다. 기록에는 눌지가 덕이 있어서 그렇다는 식으로 나왔지만 대체로 학계에서는 눌지가 사전에 고구려 측과 손을 잡은 뒤 실성을 암살하고 그의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보고 있다.
왕은 전왕의 태자인 눌지(訥祗)가 매우 덕망이 있는 것을 꺼려하여 그를 해치려고 하였다. 그래서 고구려에 군사를 청하고 거짓으로 눌지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군사들은 눌지가 어진 행실이 있는 것을 보고, 곧 창을 거꾸로 돌려 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삼은 뒤 돌아갔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제18대 실성왕
실성은 친고구려파였음에도 정작 고구려에 의해 숙청당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실성보다 눌지의 정치적 가치를 더 높게 쳤기 때문이라는 설이 중론이다. 실성은 겉으로는 복호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지만 이는 정적 제거용으로 실질적인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었다. 그리고 415년 혈성 벌판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했는데 이것이 고구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해석도 있다. 더군다나 눌지는 고구려에 이미 인질로 있는 복호의 친형이다. 눌지를 왕위에 앉히면 복호의 인질로서의 가치가 더 올라가고, 신라의 행동 제약은 더 커지는 것이니 눌지가 왕이 되는 게 고구려한테도 더 이득이었던 셈.
한길사판 이강래 역주 삼국유사 실성왕조에서는 호우총 출토 청동 호우명 그릇을 근거로 들어 이 시기 신라의 정치 격변에 고구려가 깊숙이 관여했음을 고고학적 근거까지 더해 강조하고 있다. 실성 vs 눌지의 대립 구도 또한 집안 싸움에 고구려가 끼어들어 정치 공작을 펼쳤다는 이야기.
2.3. 일본서기 신공기 관련 기록
爰新羅王波沙寐錦 卽以微叱己知波珍干岐爲質
이에 신라왕 파사매금은 미질기지파진간기를 볼모로 하였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할 때 나오는 임금의 이름인 파사 이사금으로 보이지만 파사 이사금은 1세기에 활동하던 인물이라 동일인물로 보기 어렵다. 만약 동일인물로 볼 경우 이 직후 등장하는 박제상이 파사 이사금의 현손이기 때문에 고조할아버지와 현손자가 한 시대에 공존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당연히 현실적일 리가 없다. 미사흔을 볼모로 보냈다는 설명이 실성 마립간의 행적과 일치하기에 그와 동일인으로 본다.
기본적으로 일본서기는 당시 왜인들이 삼국을 실질적으로 복속시켜 지배했다는, 사실이 아닌 이야기가 주가 되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다.
여담으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진구 황후가 신라를 정벌할 때 신라의 왕이 파사왕이다. 정확히는 파사매금(波沙寐錦).[8][9] 이사금도 아니고 마립간이다. 물론 진구 황후의 신라 정벌 기사의 세세한 내용들은 지금에 와서는 매우 신빙성이 떨어지는 내용으로 가득하다고 한일 양국 모두 판단하고 있으나, 일본서기의 신공기 기록 역시 일본서기 특유의 과장을 걷어내고 본다면 100% 허구로 비판할 수만은 없는데,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일본서기 신공기 이상으로 기년조차 믿을 수 없는 게 대다수이기 때문이다.[10] 또 일본서기 한반도 관계 기사는 모두 백제삼서(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에서 비롯되었고, 여기에 일본서기 편찬 당시 일본의 번국사상을 걷어내고 본다면 오히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보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게 일본서기이다.
신공기 기록도 백제와 신라의 대결, 백제의 가야 평정과 마한 지역 평정에 더불어 일본의 신라 정토 사상[11]이 결합된 것이 신공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이때 파사 이사금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신라사 복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신라가 금관가야를 누르고 진한 지역의 패자가 된 것은 신공기의 이주갑인상으로 보정한 연대에 따르면 4세기 중엽으로 볼 수 있는데, 이 때 이후로 낙동강 이동 지역에는 신라 토기라 할 수 있는 '이동양식토기' 양식이 분화되어 낙동강 이서의 가야 토기들인 함안 아라가야식, 김해 금관가야 양식과 구분된다. 이렇듯 파사 이사금과 석우로는 모두 4세기 이전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신공기에서는 동시에 등장하고 있으므로 같은 시대 사람으로 보아야 하며, 이렇게 해석하면 도저히 1세기나 3세기 신라가 할 수 없는 활동 범위에서의 파사 이사금과 석우로의 활동이 모두 이해된다. 이는 아까 말했다시피 신라 토기의 성립과 분포 양상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점에서도 최신 고고학 성과조차 일본서기의 수정기년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일본서기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해석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삼국사기에 기록된 파사 이사금의 활동과 치적은 고고학적으로 볼 때는 빨라도 4세기 중엽에나 실현됐던 것들로, 이는 일본서기의 파사 이사금의 생존연대에 대한 수정기년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의 진구 황후조에 파사 이사금이 등장하고 삼국사기 기록과 시기가 안 맞게 실려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신빙성을 무시할 근거는 없다. 오히려 일본서기의 수정기년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보다 더 믿을만한 것이다. 물론 백제의 시각에서 쓰인 원 사료에 8세기 일본의 지독한 번국 사상을 걷어내고 봐야 하는건 맞다. 사실 이렇게 일본서기가 더 삼국사기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음은 다른 사례도 많다. 예를 들어 무령왕의 생몰연대라던가 관산성 전투의 진행 양상 등이 있다. 일본서기가 삼국사기보다 훨씬 먼저 쓴 책이므로 일본서기 쪽이 좀 더 당시 기록(특히 백제 측 기록)을 많이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이렇게 된 데에는 7세기 경 1계의 왕통이 확립되면서 기존의 이사금과 마립간들의 계통을 1원화 시키면서 빚어진 촌극이라 생각된다. 실제로 포항 냉수리 신라비 등지에서는 6세기 초반까지도 지증왕과 법흥왕이 신라 6부 중 탁부의 대표로 나올 뿐이며 나머지 7명의 왕[12]이 존재한다. 갈수록 김씨 집단이 마립간을 장악하여 더 큰 권력을 행사한 것은 맞지만, 6세기 중엽 이전 신라는 그래도 6부의 여러 왕이 병존하고 동시에 판결을 내리거나, 어느 한 왕이 결정을 하였는데 이것이 1원화되면서 여러 계통의 왕의 순서가 뒤섞이면서 발생한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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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
잇다른 백제와 왜의 공세를 안정적으로 막아내고 기병대를 이끌고 직접 친정하는 모습까지 기록된 것으로 보면 내정은 차치하고서라도 군사적 능력 만큼은 꽤 준수했던 임금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실성왕은 키가 7척 5촌이나 되고, 사람됨이 똑똑하고 빼어나서 미래를 볼 줄 알았다."라고 삼국사기에 긍정적인 평까지 기록되어 있다. 實聖이라는 것도 성왕이라는 상당히 좋은 의미이므로 만약 그가 폐위되었다면 쉽게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아니다.[13] 내물계와의 지나친 갈등이 결국 화가 된 듯 하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실성 이사금 본기
一年春二月 실성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402)
一年春三月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왜에 볼모로 보내다 (AD 402)
二年春一月 미사품을 서불한으로 삼다 (403)
二年秋七月 백제가 변경에 침입하다 (AD 403)
三年春二月 시조묘를 배알하다 (404)
四年夏四月 왜병이 퇴각하는 것을 매복하여 물리치다 (AD 405)
五年秋七月 누리가 곡식을 해치다 (406)
五年冬十月 서울[14]에 지진이 일어나다 (AD 406)
五年冬十一月 얼음이 얼지 않다 (406)
六年春三月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입하다 (AD 407)
年夏六月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입하다 (AD 407)
七年春二月 대마도에 군영을 정벌하려다 그만두다 (AD 408)
408-412 : 4년 공백
十一年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다 (AD 412)
十二年秋八月 낭산에서 구름이 일어나다 (AD 413)
十四年秋七月 혈성의 들판에서 사열하다 (AD 415)
十四年秋八月 왜인과 풍도에서 싸워 이기다 (AD 415)
十五年春三月 동해 바닷가에서 뿔이 있는 큰 고기를 잡다 (AD 416)
十五年夏五月 토함산이 무너지고 샘물이 3장이나 솟아오르다 (AD 416)
十六年夏五月 왕이 죽다 (AD 417)
미사흔을 볼모로 보냈음에도 왜가 쳐들어왔다는 기록이 4개나 보인다. 사실 왜라고는 해도 이 시기는 일본열도에 통일 정권 하나만 있었는지도 불분명해서 서로 다른 세력일 수도 있다.
5. 창작물
마립간 시대의 신라 왕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한국 사극에 등장했다. 광개토태왕과 근초고왕인데, 광개토태왕에서는 조재완이, 근초고왕에서는 김하균이 연기했다.[15] 그러나 두 드라마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신라는 병풍이었기 때문에 큰 비중은 없었다.
[1] 파사 이사금과 이름이 같지만 애초에 실성 마립간(實聖, jit xiEngs)이라는 이름 자체도 일성 이사금(逸聖, yit xiEngs)에서 따온거라 상관없다.
[2] 삼국유사에만 나오는 일성 이사금의 어머니의 이름이 같다.
[3] 그러나 미추 이사금의 승하년도와 실성 마립간의 즉위년도의 차이가 100년이 넘으므로 대서지의 아들보다는 손자나 증손자일 것으로 추측된다. 혹은 대서지가 미추 이사금의 동생이 아닌 동생의 아들이나 손자일 가능성도 더러 있다.
[4] 9대 벌휴 사후 즉위한 내해이사금은 벌휴의 아들인 이매의 아들이지만, 벌휴의 장남이였던 세신갈문왕의 딸아마도 장녀였던 것으로 보인다.을 마누라로 가진 덕분에 즉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로와 이음이라는 아들들이 이었음에도 세분갈문왕의 아들인 조분이사금이 후계를 이어간다는 것으로 알 수 있는데, 비슷한 예로 13대 미추는 조분의 사위미추의 부인인 광명부인이 조분의 장녀였던 것으로 보인다.이고, 14대 유례는 조분의 아들이며, 15대 기림은 조분의 아들인 걸숙의 아들이고, 16대 흘해는 조분의 딸인 명원부인의 소생이다. 이렇게 조분이사금으로 연결되는 왕위계승이 돌고나서 13대 미추의 첫 사위인 내물이 즉위하였다면, 이후에 둘째 사위인 실성이 즉위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5] 이후 석씨는 일본 기록 속일본기에 기록된 723년 8월 8일 일본에 갔다온 사신단 중 부사가 한나마(=대나마) 석양절(昔楊節)인 것을 봐서 석씨가 먼 훗날인 통일신라 시기에도 최소 5두품 이상의 귀족이었던 것은 확인된다. 그러나 한때 왕을 배출했던 것에 비하면 비중이 매우 낮아진 것이다.
[6] 재미있는 사실로는, 미추 이사금의 딸과 혼인했다는 사람은 실성 마립간만이 아닌데 그 다른 사람이 내물 마립간이라는 것. 내물 마립간이든 실성 마립간이든, 둘 다 이건 억지로 끌어온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 추정을 확실히 할 수 있는 기록은 없으므로, 일반적으로 내물 마립간의 왕비 보반부인과 실성 마립간의 왕비 아류부인은 자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7] 사실 왜라고는 해도 이 시기는 일본열도에 통일 정권 하나만 있었는지도 불분명해서 그냥 한반도의 백제와 신라마냥 서로 다른 세력일 수도 있다.
[8] '파사'의 한자가 삼국사기와 다르지만, 어차피 신라 초기 인명 / 지명들은 대부분 고유어 음차라서 그건 별로 상관이 없다.
[9] 매금은 광개토왕릉비나 통일신라 대 최치원이 지은 봉암사 지증대사비에도에도 나오는 실제로 쓰였던 호칭이며 마립간과 같은 말로 추정된다.
[10] 이걸 기록한 김부식 시대 기준으로도 천 년도 더 전 이야기들이므로 참고한 기록들도 부정확한 내용이 매우 많았다. 김부식 본인도 너무 앞뒤 아귀가 안 맞는 내용에는 왜 이런지 모르겠지만 일단 써 둔다는 식으로 쓰기도 했다.
[11] 신라본기에 나오는 수많은 왜병 침입 기사를 상기해보자. 광개토대왕릉비도 왜의 신라 원정은 사실임을 웅변하고 있다.
[12] 다만 갈문왕이나 다른 여러 인명에서 보이듯 초기 신라는 진짜 국왕이 아닌 사람에게도 王이 붙는 사람이 많다.
[13] 다만 휘가 실성이라면 의자왕의 경우처럼 이름만 그렇고 실제로는 폐위되었을 수 있다.
[14] 원문은 京都로 당연히 월성이 위치했던 현재의 경주시를 말한다. 서울을 뜻하는 京은 한강에 있는 서울이 아닌 수도를 뜻하는 우리말 '서울'을 뜻하는 단어다.
[15] 참고로 두 배우는 징비록에서는 각각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명나라 장수 양호 역을 각각 맡아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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