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비운의 유소년기2.2. 왕위 등극2.3. 영토 확장2.4. 왕권 강화2.5. 최후
1. 개요
“나는 야인이지 왕의 후손이 아닙니다. 부디 다시 살펴보십시오.”
"予野人 非王孫也. 請更審之."
- 창조리 등 신하가 을불을 찾아내자 의심하며 한 말. 삼국사기에 기록된 미천왕의 유일한 말이다.
고구려의 제15대 군주. 몰락한 왕족으로 초년 시절 큰 고생을 겪어야 했지만 복벽에 성공하여 기어이 군주가 되었고, 영토 확장 및 왕권 안정화로 고구려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2. 생애
2.1. 비운의 유소년기
서천왕의 차남 돌고의 아들로서 고위 왕족의 신분이었다. 하지만 백부 봉상왕이 왕권 강화를 빌미로 친족들을 경계하기 시작하면서 숙신 격파의 공을 세운 숙부 안국군 달가는 물론, 자신의 친동생인 돌고까지 반역으로 몰아 처형하기에 이르렀고 때문에 드라마틱한 유년, 청년 시절을 보내게 된다.
아버지 돌고가 처형당하자 을불은 필사적으로 도주하여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겨우 촌구석인 수실촌으로 도망가 신분을 숨기고 음모(陰牟)란 부자의 집에 머슴으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을불은 죽어라 고생만 했고, 특히 여름에는 주인집 연못의 개구리가 시끄러워 주인이 잠을 못 잔다고 들들 볶아, 잠도 제대로 못자고 밤을 새면서 연못에 돌을 던지기도 했다.
결국 고된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1년 만에 음모의 집에서 나와서 소금 장수 재모와 만나 동업하기로 한다. [2] 소금 장수가 되었지만, 안습한 생활은 마찬가지였다. 재모와 함께 소금 장사를 마친 후에 압록강 동쪽의 사수촌(思收村) 노파의 집에 머물렀다. 하룻밤 묵었을 때 그 집의 노파는 한 번 공짜로 소금을 얻어갔다. 그러나 숙박비로 준 소금을 더 달라는 것을 미천왕이 거절하자, 앙심을 품은 노파는 을불이 잠든 사이 소금 가마니에 몰래 신발을 집어넣고 관가에 도둑으로 신고했다. 이때문에 도둑으로 몰렸고 압록강변의 재(宰)[3]는 팔랑귀 마냥 노파의 말을 고대로 믿어버려 현행 절도범 누명을 씌우고는, 미천왕의 소금을 모조리 압수하고, 태형을 내려 매를 친 다음 내쫓아 버렸다. 이런 갖은 고생을 한 미천왕은 골병이 들어 몸이 야위고 옷차림도 남루해져서 완전히 거지꼴이 되었다. 이런 처참한 몰골이었으니 그가 왕족이라는 사실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 생활사가 굉장히 흥미로운데, 고구려 시대에 '임금을 받는 머슴형태', '행상을 포함한 상업'이 묘사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만 떼어놓고 보면 조선시대 후기 생활사라고 해도 믿어줄 정도이다.
2.2. 왕위 등극
하지만 봉상왕이 날이 갈수록 포악해져 폭정이 심화되었고 이에 참다못한 국상 창조리가 포악한 왕을 폐하고 새 왕을 옹립하기 위해 부하들을 비밀리에 파견하여 돌고의 아들인 을불을 찾아오게 했다. 비류강가에서 을불을 만난 이들은 자기를 죽이려는 줄 알고 애써 부인하는 을불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후, 창조리에게 데려 왔다. 서기 300년 창조리가 을불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해 반정을 일으키면서 봉상왕이 폐위되었고, 을불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봉상왕은 얼마 후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감옥에서 자진했다.
다만, 미천왕은 즉위한 뒤에도 순탄치 않았다. 즉위년 하반기에 자연 재해나 괴이한 현상이 연거푸 나타나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는 미천왕 즉위 직후의 불안정한 정국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아무리 봉상왕이 폭군으로써 폐위되었어도 어쨌든 정상적으로 계승한 것은 아니었으니 정국이 혼란하거나 불안정한 상태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특히 미천왕을 즉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국상 창조리나 조불, 소우 등은 이후 삼국사기에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창조리 같은 경우는 국상이었던 데다가 삼국사기에 개인 열전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인데도 미천왕 즉위 이후에는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면 공신으로 대접받다가 머지 않아 사망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정치적 혼란 와중에 제거되었거나 토사구팽 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2.3. 영토 확장
어쨌든 즉위 후에는 그동안 비축되었던 국력을 바탕으로 태조왕 이후로 오랫동안 이뤄지지 않았던 서쪽, 서남쪽 요동 지방으로의 진출을 계속 시도했다. 마침 중국은 삼국시대(중국)을 통일한 진나라가 사마충 같은 암군을 거치면서 팔왕의 난, 영가의 난 같은 일이 터져 중원 본토부터 혼란스러운 상태였기에 고구려가 변방을 공격해도 제대로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미천왕은 이 기회를 잘 살려서 302년 3만의 병력으로 현도군을 공격해 8천여명을 포로로 사로잡는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311년엔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서안평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여 요동군과 낙랑군 사이 육로를 차단시켜 남쪽의 낙랑군을 중국 본토에서 떨어진 월경지로 고립시켜 버렸다. 곧이어 313년에는 낙랑군, 314년에는 대방군을 멸망시켜 고조선의 고토를 탈환했고, 평안도 지역의 비옥한 농토를 얻어 국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업적을 이루게 된다. 이 평안도 땅은 새로 얻은 땅이지만 순식간에 고구려 국력의 기반으로 가장 중요한 땅이 되어, 100여년이 지난 뒤 장수왕이 수도를 이곳의 평양성으로 천도하게 된다.
영토 확장에 있어서 가장 큰 업적을 꼽으라면 바로 낙랑, 대방군 점령이 되겠다. 이는 다소 묻히는 감이 있는데, 한사군 이후 고대 한반도에서 가장 발달된 중심 도시였던 평양의 한족 지배를 고조선 이후 근 400여년 만에 청산한 것이다.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는 그만큼 한족의 세력이 계속 강하게 남아있었고, 고구려는 국내성 인근의 척박한 맨땅에서 시작해 이들과 치열히 싸우며 성장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후 고구려는 힘을 더 길러 광개토대왕 때 요동으로 진출, 중국 왕조와 본격적으로 경쟁한다.
미천왕이 서안평을 점령하여 중국과 낙랑군과 대방군을 단절시키고, 이내 낙랑과 대방을 고구려가 멸망시키면서 고구려와 백제는 드디어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원래 고구려와 백제는 같이 부여에서 갈라져나온 나라로, 동류 의식이 있어서 외교 관계가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책계왕 때 대방군을 침공한 고구려를 백제가 구원하면서 나빠지기 시작한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는, 미천왕이 한사군을 멸망시키면서 국경을 직접 맞대는 사이가 되자, 고-백 외교관계는 파탄에 이르고 양국관계는 완전히 험악하게 변해버린다.
김진명의 픽션 <고구려>에서는 미천왕이 투석기에 전염병으로 죽은 병사를 실어서 성안으로 던졌으며, 낙랑군의 어머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 늙은 여인의 초상화를 실어 날랐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작가의 순수 창작이다.
민족적인 관점 외에도 낙랑군과 대방군은 중국의 수준 높은 문화와 기술을 누리고 있던 선진적인 곳이었기 때문에, 이 세력을 흡수한 고구려와, 세력을 흡수하진 못했지만 많은 수의 유민을 받아들인 백제는 모두 선진 문물들을 받아들여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낙랑과 대방 점령에 가려져서 그렇지 미천왕의 영토 확장의 최대 업적이 있는데, 바로 서안평을 고구려의 영토로 공식적으로 편입시킨 것이다. 서안평은 중국 단둥시(구 안동시) 일대를 가리킨다. 이 서안평은 옛날부터 고구려가 황해 진출을 위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기 때문에 이 땅을 차지하려고 태조왕부터 점령하려 했으나 당시 요동 세력들의 방해로 온전히 고구려 영토로 편입시키질 못 했는데 이것을 미천왕 대에서야 이루게 된 것이다.[4] 이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황해로 진출하게 된다.
이때문에 일부 역사학자들은 고구려 해군의 기반을 닦은 왕으로 평가를 내리기도 하는데 서안평은 중국 동북 지방에서 가장 험한 지형을 자랑하는지라 지상군으로는 도저히 점령할 수 없는 곳이었다. 결국은 수군을 동반한 수륙 양진을 해야 점령이 가능하단 것으로, 미천왕 대에서야 이 땅을 점령했다는 것은 미천왕 대에 수군의 기반을 닦았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제 미천왕은 칼끝을 요동으로 돌리지만, 요동은 지리적 요충지라 요동을 노리는 세력이 고구려뿐은 아니었다. 그 중 모용선비가 가장 강해 보였기에 319년 진나라 평주 자사 최비의 아이디어로 우문선비, 단선비와 짜고 모용선비를 분할 점령하는 작전에 고구려군도 참가하게 된다.
작전은 실행에 옮겨저 고구려군은 모용선비의 수도인 극성을 포위했으나 모용선비의 군주 모용외의 계략에 걸려들어 물말아먹고 끝났다. 모용외는 극성에서 문을 닫고 지킨 채로 사자를 파견해 소고기, 술을 우문부에만 주자 고구려, 단부 등에서는 우문부와 모용외가 모의했다고 의심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결국 우문부만 남아 단독으로 공격했지만 역으로 모용외한테 대패했고, 우문부를 이끌던 우문실독관은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이 작전을 계획한 평주자사 최비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모용외에게 쫓기게되자 결국 가족들과 함께 고구려로 망명했다. 고구려가 요동 진출을 100년 앞서 실현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지만 이 작전이 실패한 덕분에 모용선비는 전연을 건국해 요동은 물론 화북까지 석권하는 강대국이 되어 이후로도 고구려를 괴롭혔다.
이 작전이 실패한 이후로도 모용외와 미천왕은 서로에 대한 미련을 못버리고 일진일퇴의 공방을 이어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미천왕은 꾸준히 요동을 노렸으나, 철저히 선비족에게 격퇴된다. 이미 고구려와 선비족의 대결은 선비족에게 승기가 넘어가기 시작했고, 후에 주변 선비족과 세력을 통합하여 강대국이 된 전연에게 고구려가 시원하게 털린다. 이후로도 모용선비와는 악연이 이어져서 고국원왕때는 아예 전연한테 시원하게 털리고는 전연의 요구대로 태자가 입조하고 조공도 바치는 신세가 되었다. 나중에 전연이 멸망하자 태부였던 모용평이 망명해오자 저족이 세운 전진으로 압송하는 것으로 복수한다.
그런데 전진이 멸망하고 옛 전연이 있던 땅에 모용선비족의 후연이 들어서자 2차전이 시작, 처음에는 고구려의 고국양왕이 요동과 현도를 공격해 승리하나 싶더니 그 해 모용농에게 다시 뺏겨서 도로아미타불, 후대인 광개토대왕 때에도 광개토대왕이 백제, 가야, 왜에 신경쓰는동안 신성과 남소성을 털어버리는 등 악연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광개토대왕이 후연을 공격, 숙신성을 빼앗고 얼마 안가서 후연이 한족의 북연으로 대체되자 끝난다. 고구려는 미천왕 대로부터 약 100여년이 흐른 뒤인 증손자인 광개토대왕 대에 가서야 요동을 완전히 확보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모용선비로 보면 무려 모용외 ~ 모용희까지 4대 9명, 고구려로 보면 미천왕 ~ 광개토대왕까지 4대 5왕에 걸친 악연이었다.
2.4. 왕권 강화
30년 동안 재위했으나, 애석하게도 미천왕의 내정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다만, 왕권이 강해진 시기였다고 추정은 가능하다. 고국천왕 때에 도입된 부자 상속제가 혼란기를 거쳐 이 시기에 제대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추측이 있는데, 실제로 고국천왕, 산상왕, 중천왕, 서천왕대에는 왕족들의 반란이 연달아 터졌고, 봉상왕의 경우 자기가 불안해서 숙부와 동생을 죽이기까지 했으나 미천왕 대부터 이러한 모습은 사라지게 된다.[5]
또한 을파소 이후 지속적으로 언급이 되던 국상직위의 언급이 미천왕 대 창조리 이후로 없는 것을 봐도 역시 왕권이 강화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즉 신라시대 상대등 같이 제가회의를 이끌고 국정을 총괄하는 역할을 해오던 국상을 굳이 따로 두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2.5. 최후
다사다난한 삶을 살던 미천왕은 331년(미천왕 32년) 2월에 아들 사유(고국원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승하했다. 미천(美川) 언덕에 묻혔으며, 시호를 미천왕이라고 지었다.
3. 사후
그의 아들 고국원왕 대에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이 세운 전연의 침공을 받았다. 모용황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와 국내성을 함락시킨다. 이때 고구려는 미천왕의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이 수레에 실려 전연으로 갔으며 미천왕의 왕후였던 태후 주씨를 포함해 왕족, 백성 포로 등 5만명이 잡혀가는 굴욕의 세월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시신은 몇 달 뒤 반환되었으나, 주 태후는 인질로 붙잡혀있다가 13년이 지난 뒤에야 고구려로 귀환하였다. 당시 태자였던 소수림왕이 대신 인질로 끌려갔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고국원왕의 태자가 잠시 사신으로 전연에 다녀온 적은 있다. 다만 이 태자도 소수림왕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4. 미천왕의 무덤?
4.1. 안악 3호분?
1949년 황해도 안악군 용군면 유설리[6]의 재령강 북쪽 구릉 서편에서 농리 정리 중 우연히 발견된 안악 3호분[7]의 주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안악 3호분은 고고학자 도유호가 발견했는데 비록 도굴 당해서 내부에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잘 보존된 벽화들이 있었다. 도유호와 월북 미술사가 김용준 등은 "이 무덤의 주인은, 전연의 장수로 모용황의 아우 모용인의 쿠데타에 참가했다가 모용인이 죽음을 당하자 고구려로 망명한 장수 '동수(冬壽)'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는 진서와 자치통감 등에 동수가 난을 피해 망명 왔다는 것과 무덤 내부에 동수라는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사학계에서도 동수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무덤 내부에 기록된 묵서명[8]에 의하면 서기 357년에 축조된 무덤이다.
그러나 북한 사학계에서는 여러 근거를 들어 왕릉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는 동수라는 글자가 무덤 주인이 아니라 '장하독(帳下督)'[9]의 머리 위에 써 있는 점[10], 주인공의 행렬 벽화에 '성상번(聖上幡)'이라는 임금 깃발이 그려 있는 점, 주인공 초상화에 고구려 왕의 왕관인 백라관(白羅冠)으로 추정되는 흰 비단 모자를 쓰고 있는 점[11] 등이다.
문제는 어느 왕릉인지를 밝히지 못하다가 1963년 주영헌 등의 학자들이 미천왕설을 주장했다.
이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초기에는 국내성 인근에 미천왕의 무덤이 있었는데[12] 모용황이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가져 갔다가 돌려받은 시신을 다시 묻은 곳이 이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수가 기록된 것은 시신 반환 또는 무덤 축조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 박진욱 교수는 고국원왕설을 주장했는데 고국원왕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남쪽 평양'에서 전사했다고 되어 있다. 박진욱 교수는 이를 해석하기 나름이라 그것은 '고구려의 남쪽 평양'이 아니라 '고구려의 남쪽 지방이던 황해도 근처'에 있던 '남평양'이라는 설을 주장했다. 고국원왕은 고국원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고국원이 남평양 근처였던 이 안악의 언덕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안악 3호분 자체가 철저하게 도굴되어 유골은 물론 부장품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고증은 현재로서는 매우 힘든 상태다. 따라서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는 관련 기록이 나오지 않는 이상은 영원히 불분명하며 이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대한민국 측에서 주장하는 동수설은 묘지명의 위치가 왜 장하독 머리 위에 있는지, 북한 측에서 주장하는 미천왕설은 왜 시체 반환에서 무덤 축조까지 13년이나 걸렸는지, 고국원왕설은 왜 무덤이 고국원왕이 사망한 371년 보다 이른 357년에 만들어 졌는지 설명을 못하고 있다.[13]
하지만 북한학계의 추이에 대해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북한학계는 스멀스멀 존엄이 역사에 개입하는 암운이 드리우다가 199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즈그들 최고존엄의 교조화된 연구로 변질되었으며, 민족주의 고취에 초점을 둔 해석이 공식적인 입장으로 표명되기 시작하였다. 안악 3호분을 동수의 무덤이라고 봤던 도유호가 학계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 대표적인 사례. 듣고싶은 것만 봐서 그렇지 사실 동수묘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미천왕, 고국원왕설을 지지하는 북한학계와 자칭 소장파 학자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안악 3호분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①안악 3호분은 당시 중국 요령성 일대에서 유행하던 형태의 무덤으로써 계보는 당연히 요령성 일대에서 찾아지는 외래계 무덤이며,
②벽화의 구성이나 방식 또한 요령성의 가옥형 석실과 거의 동일하다.[14]
심지어 ③요령성에서 확인되는 가옥형 석실[15]들에서도 백라관으로 추정했던 그 관과 똑같은 관을 쓴 묘주들이 그려진 벽화가 수두룩하다. 또, 왜 장하독의 머리 위에 묵서명이 써 있는가에 대한 문제도 사실 간단한데 사실은 유구도면을 왠지 제대로 안 본 탓으로 보이지만... 묘주도가 그려진 전실 서벽의 바로 옆인 북벽의 모서리에 있다.
④묵서명의 위치는 장하독의 머리 위가 아닌 묘주도의 바로 옆인 것이다. 다만 벽의 위치가 다를 뿐. 또한 장하독 한명만 묵서명이 그렇게 소상히 쓰이는 것도 벽화의 구성 전체를 볼 떄 자연스럽지 못하기 떄문에 당연히 묘주도의 설명으로 보는 것이다.[16] ○성상이라고 쓰여진 부분이 지금은 판독이 쉽지 않은데, 딱 그 부분 단 하나만 왕릉설을 주장하는 측에서 타당한 논거일 뿐이지만 이쯤되면 성상 하나만 갖고 왕릉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의 각주에서도 있듯이 이미 고구려 고분은 4세기에 적석총을 위시한 국내 지역, 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 일대에 아주 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왜 통구 고분군에 미천왕이나 고국원왕[17]이 묻히지 아니하고, 이곳에 묻혔는가를 결코 설명하지 못하며, 당연히 전문학계의 견해가 아닌 게 수두룩하기 떄문에 추가적 연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덤을 왜 미천왕의 무덤이라고 북한학계나 국내의 재야학계에서 추정하는 것은 바로 이곳이 낙랑군의 고지가 아니라는 것을 피력하기 위함이 근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낙랑군의 문서에도 있지만 이 일대는 313년 낙랑군의 축출 이후 서서히 고구려의 직접지배 영토로 편입되었고 4세기 당시에는 간접적인 지배의 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으로 보는 논리 자체도 허접할 뿐더러 안악 3호분의 묘주에 대한 문제는 고구려의 자체적 행정방식의 변화나 영역의 관리 등의 내재적 문제와 전혀 결부되지 않고, 오직 낙랑군은 애초에 평양[18] 일대에 있지 않았다는 식으로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4.2. 서대총
다만 한가지 함정이라면 고구려 적석총이 집중적으로 축조되는 통구 고분군에서도 완전히 빼박이라고 할 수준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천왕의 무덤은 견해가 모여 있는 편인데, 바로 서대총이라는 것이다.
통구 고분군은 무기단식 적석총부터 계단식 적석총, 적석총의 완성형인 장군총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축조된 고구려의 고분군이다. 확인된 고구려 적석총 수의 90%가 다 이 고분군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봐도 무방하다.[19] 여기서 왕과 관련되어 주요한 것은 마치 신라의 대릉원 고분군처럼 누가봐도 왕이 아니면 이 무덤의 주인이 될 수 없을 이른바 왕릉급 무덤들이 10여기 정도가 분포하고 있다는 것이다.[20] 적석총의 형태변화에 따른 시간적인 단계별 변화상을 고려하면 10기의 왕릉급 무덤들은 3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형성된 것으로 고구려 왕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장지형 왕호를 사용하던 시점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고고학계에서는 미천왕부터 광개토대왕 또는 장수왕까지가 토론 가능한 근거를 바탕으로 논의되고 있다.
고구려 적석총의 변화과정은 3세기 이전까지는 무기단식 적석총, 무기단에서 발전한 기단식 적석총이 유행하다가 3세기에 접어들어서는 계단식 적석총이라는 형태로 변화한다. 큰 규모의 적석총을 만들기 위해서 적석분구를 넓히면서 나타나는 형태의 무덤으로써 여기에서 발전하여 계단식 적석총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본격적인 계단식 적석총의 등장은 4세기 초반의 일로써 서대총이 계단식 적석총의 초현기에 해당하는 왕릉급 무덤이다. 그 외에도 칠성산 211호분와 우산하 992호분이 4세기 전반 경에 축조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대총에서는 특히나 와당[21]에서 기축년▨▨간리작(己丑年▨▨干利作)이라는 명문이 있기 때문에 329년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적석총 발전 과정상 동일 단계의 적석총인 우산하 992호에서도 와당에서 무술년의 기록이 나오는데, 338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 적석총의 역사고고학적 편년이나 왕릉 비정이 완전히 일치된 견해가 모여져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마침 다행히 서대총을 미천왕의 무덤이라고 보는 것에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편이다.
분명한 것은 원래 왕릉의 비정이라는 것이 최대한 근거를 모아서 추정되는 것일 뿐이며 무령왕릉처럼 빼박으로 지석이 나온다거나 하지 않는다면 확정이 어려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되지도 않는 얕은 근거만 모아서 특정 무덤의 주인을 비정하는 우를 범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 방법이기도 하다.
만약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안악 3호분의 묘주를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이라고 한다면, 한참 고구려와 전쟁을 치뤘던 북연의 영역 내에서 확인되는 중국식 무덤을 채택한 것이 된다. 설명할 필요성을 못느낄 정도로 뒤의 상황과 맞는 것이 하나도 없고, 미천왕은 졸지에 장법마저도 중국식으로 바꿨음[22]에도 북연에게 털려서 도굴까지 당하는 굴욕 중의 굴욕을 당하는 셈이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미천왕 본기
一年秋九月 미천왕이 즉위하다 (300)
一年冬十月 누런 안개가 끼다 (300)
一年冬十一月 강한 서북풍이 불다 (300)
一年冬十二月 혜성이 나타나다 (300)
三年秋九月 현도군을 침략하다 (302)
十二年秋八月 서안평을 점령하다 (311)
十四年冬十月 낙랑군을 축출하다 (313)
十五年春一月 왕자 사유를 태자로 삼다 (314)
十五年秋八月 대방군을 축출하다 (314)
十六年春二月 현도성을 공격하다 (315)
十六年秋八月 혜성이 나타나다 (315)
二十年冬十二月 진의 평주 자사 최비가 고구려로 도망해오다 (319)
二十一年冬十二月 요동을 침략하다 (320)
三十一年 후조에 사신을 보내다 (330)
三十二年春二月 미천왕이 죽다 (331)
링크로 들어가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즉위년 9월의 기록과 중국측의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제외하면 기록이 상당히 간략하다. 이러한 경향은 미천왕본기 이후의 고구려본기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장수왕본기부터는 기록의 대부분을 중국 기록에서 인용해서 채웠다. 재위가 10년을 넘어가는 왕조차 기록이 매우 간략[23]하고, 자연재해 기록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백제본기보다는 그나마 낫지만.
6. 창작물
알고 보면 한국에서 제왕을 영웅화하여 다룬 사극의 전형적인 구조인 왕실에서 쫓겨남 → 바깥을 방황 → 왕위 찬탈 → 정치 싸움과 정복 전쟁의 전형적인 구조를 그대로 살아간 인물이다. 또 한국 사극에서 흔히 나오는 픽션을 위한 무리수들을 모두 고증 가능하게 가지고 있다.[24] 이렇게 미천왕은 고려 현종과 더불어 창작물(사극)에서 써먹을 떡밥을 고루 갖추고 있는 블루 오션(…)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단 한 번도 사극화가 된 적이 없다.[25]
- 역적 : 일단 미천왕이 역적으로 취급되었다는 기록 자체는 없지만, 그 처지는 역적과 같이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미천왕의 아버지 돌고는 자신의 친형인 봉상왕에게 모함을 받아 사형당했다. 웬만한 범죄로는 처벌받지 않는 왕족, 그것도 왕의 친 동생이자 혈통상 직계 왕족을 죽일 수 있는 가장 좋은 구실은 반란. 즉 역모죄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죽이기도 쉽고 그 자손들을 죽이거나 신분을 강등시켜 왕위 계승권 자체를 박탈시키기에도 적합하기 때문. 미천왕의 사례 말고도 동서 고금을 통츨어 자신의 왕권을 위해 자신의 형제 자매들을 역모죄를 구실삼아 숙청을 한 왕은 셀 수도 없이 많다. 다른 죄를 엮기도 하지만, 역모죄가 아닌 경우, 웬만해선 본인 외엔 당사자의 가족, 친족들까지 한꺼번에 숙청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고생담 만들기 : 주인공의 고생을 연출하기 위해서 고증에도 없고 현실성도 없는 억지 고생담 만들기가 남발된다. 대표적으로 선덕여왕 타클라마칸 사막 보내기가 있었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미천왕은 텔레비전 앞에 앉은 시청자들이 '아이고 어떡해' 하며 눈물을 질질 짤 학대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음모한테 몸붙여 머슴일 하며 주인집에서 학대 당하고, 누명을 써서 전재산이나 다름 없는 소금을 압수 당하고,
소금장수-소금=0심지어는 곤장까지 맞는다! - 상단 입단 : 상도의 영향으로 주인공을 한 번쯤 상단에 입단시키는 사례가 많은데, 실제로 소금 장수 일을 했으므로 상단에 넣어도 무방하다. 재모 같은 인물은 '친구'나 '멘토' 쯤으로 재해석 하면 그럴듯 할 듯. 그런데 정작 소금 장수 떡밥은 엉뚱하게도 미천왕 바로 다음 시기의 내용을 그린 근초고왕(드라마)에서, 그것도 근초고왕에게 써 먹었다.
- 메인 빌런 : 봉상왕은 사서에서 명백하게 폭군으로 기록된 만큼, 아치 에너미 내지는 빌런으로 표현해도 무리가 없다. 봉상왕을 퇴위시키고 즉위한 이후에도 대외적으로 모용외 등의 강한 라이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극의 소재는 충분하다 못해 넘쳐 흐르는 수준이다.
- 군주 등극 : 미천왕이 갖은 고생담을 극복하고 창조리의 도움을 받아 봉상왕을 폐하고 군주로 즉위하였다.
- 정복 군주: 낙랑군과 대방군을 완전히 정복해 400년만에 중국의 한반도 서북부 지배를 끝마쳤다.
- 인지도 높은 주변의 역사: 미천왕이 지배할 즈음은 중국의 삼국시대 바로 다음 시대이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인기가 높은 삼국지에 대한 언급과 연관을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초반에 서천왕와 달가, 봉상왕과 돌고의 관계들을 조비&조예 VS 조창&조식, 원담 VS 원희&원상, 유기 VS 유종, 사마염 VS 사마유 등의 관계들에 빗대어 표현하면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는 적합하다. 게다가 미천왕이 즉위할때 중국의 지배자는 바로 그 유명한 사마의의 증손자인 사마충이였다. 사마의 본인도 공손연 정벌 등 고구려랑 관련이 없는 사람도 아니니 엮기 좋은셈.
- 대업을 이어나간 후계자들: 미천왕의 아들인 고국원왕은 결과적으론 아쉬운 지도자였지만, 근초고왕 때문이었지 본인이 막장군주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미천왕의 손자들은 바로 고구려 중흥을 야기한 소수림왕&고국양왕이고, 증손자는 고구려를 팽창시킨 광개토대왕이며, 고손자는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장수왕이다. 미천왕에서 이어지는 명군 후계자들이 넘친다. 이들로 바로 이어지는 후속작들을 찍어도 계속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나올 것이다.
미천왕은 저 모든 것을 집어넣어도 고증에 문제가 없을 만한 충분한 근거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지어낼 거 없이 원래 있는 거 그대로만 재현해도 OK.
사실 딱히 각색 없이 그냥 대충 써도 충분히 한 편의 한국판 RPG 사극 드라마가 될 수 있는 스토리 라인을 갖춘 인물이지만, 아무래도 현대의 창작물은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대중에게 익숙한 조선시대에 지나치게 치중하여 이 시기가 아직까진 딱히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비슷한 처지로는 고려의 척준경이 있다.
미천왕의 인생 역정에 영감을 받고, 이 훌륭한 소재를 이름만으로 주목을 부를 수 있는 군주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에 덧씌웠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 사극계의 기둥이자 주적.
관련 작품으론 그 유명한 화랑세기 필사본의 저자 박창화의 "을불대왕전"이 있다. 독자들에게 호평을 사고 있긴 한데, 박창화 특유의 화랑세기틱한 취향이 여기에도 반영되어 버렸다고 한다. 한마디로 야설(...).
물론 박창화는 화랑세기처럼 나름 과학적 방법론을 동원하는 현대의 역사학자들까지 낚아낼 정도로 정교한 역사물을 창작하던 사람이라 역사적 고증에 상당히 충실한데다, 수십 년 전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는 편이다.
근래 여기에 처음으로 주목한 작가는 하필이면 김진명. 작품명은 '고구려'이다. 미천왕 부분은 이 중 1-3권을 담당한다. 다만 김진명이 쓴 작품이다보니 을불대왕전과 비교하기가 영 민망하다. 을불대왕전은 나름대로 고증에 충실했고 자신의 글이 창작이라고 확실히 명시했음에도 까가 있는 반면에, 고구려는 성공한 대중작가의 작품이며 팬층이 꽤 두꺼운지라(...) 첨언하지만 이 소설은 "공상역사소설"이다. 그냥 재미로 가볍게 읽자.
김진명의 고구려에서는 상부에 의해 아버지 돌고가 죽고 홀로 떠돌아다니게 된다. 일단 음모의 밑에서 머슴살이 한 것과 소금장수로 일했다는 것은 언급만 되고 그 뒤 다루라는 이름으로 낙랑의 양운거 밑에서 무예를 배우다가 양운거 밑을 떠나게 된다. 그 후 다시 고구려로 돌아가 저가라는 사람의 밑에 있다가 비무 대회에 나가 여노와 싸우게 된다. 하지만 상부가 자신을 알아볼까봐 싶에 일부러 여노에게 져주고 도망친다. 여노는 을불을 쫓아와 왜 도망친 건지 연유를 묻자 결국 여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이후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저가와 저가 밑에 있던 무사 양우와 함께 길을 떠나게 된다. 낙랑에서 주아영을 만나고 후에 그와 싸우게 될 모용부의 모용외와 만나게 되고 그 후 숙신으로 가 그 곳의 족장 아달휼을 아군으로 삼는다. 그 후 창조리가 보낸 조불과 소우가 을불의 휘하에 들게 되고 상부가 고노자에게 군사를 줘서 그를 없애려고 하자 스스로 정찰병으로 분장해 직접 상부를 없애려고 한다. 그 후 창조리가 상부를 내치고 자신을 왕위에 올리자 창조리가 자신을 줄곧 돕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후 낙랑을 정벌하게 된다.
[1] 삼국사기 미천왕 본기에 나오는데, 이 시호를 증손자 광개토대왕의 시호 호태왕(好太王)와 연관짓는 경우도 있다.[2] 머슴살이 때 번 돈으로 장사 밑천을 댔을 것으로 여겨진다.[3] 조선 시대의 수령과 비슷한 직책으로 추정된다.[4] 동천왕 때 서안평을 한 차례 공격했지만 위나라가 보낸 관구검에게 무참히 박살나는 것으로도 모자라 수도 국내성이 털리는 치욕을 맛봐야 했다.[5] 장수왕과 문자왕의 사례가 있지만 이건 장수왕의 아들이자 문자왕의 아버지인 고조다가 장수왕 보다 먼저 죽어서 문자왕이 세습한 사례다.[6] 현재는 북한/행정구역 마개조로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다.[7] 안악 1호분과 안악 2호분도 있으나, 이 두 무덤은 도굴로 훼손이 심한데다가 안악 3호분이 비교적 벽화 보존이 잘 되어 유명한 것이다.[8] 먹물로 기록한 문장[9] 이름이 아니라 임금 또는 고위 장군 아래에 있던 군사 지휘관을 의미한다.[10] 즉, 동수가 모신 왕이라는 점이다.[11] 신당서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 왕은 백라관이라는 관을 썼다고 한다.[12] 실제로 중국 집안 근처에 거대한 규모의 무덤이 도굴당한 채로 발견된 적이 있는데 그게 모용외가 도굴한 서천왕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고 미천왕의 원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13] 참고로 무덤 내부 벽화에는 그 유명한 행렬도 외에도 무덤의 주인과 부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따라서 고분 주인의 얼굴은 알 수 있지만 오히려 이름을 모른다.(...) 오히려 벽화와 초상화는 없고 부장품이 온전하게 발견된 무령왕릉과 비교해보면 굉장한 아이러니.[14] 왕이 아니면 이렇게 화려하게 그려질 수 없다고 했던 그런 행렬도도 다 있다. 안악 3호분이 결코 특별한 고구려의 무덤이 아닌 셈이다.[15] 안악 3호분도 그렇고 가옥을 묘사한 무덤이다.[16]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었기 떄문에 묵서들이 잘 남아 있었고, 지워졌다고 추정되는 부분은 없다. 즉 좃밥 관리 한 명의 머리 위에 무수한 직책을 쓸 정도였다면 다른 좃밥 관리들의 머리 위에도 당연히 써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참고로 장하독이라는 직책을 맡은 이의 그림은 안악 3호분에서도 모두 4명이 표현되어 있다.[17] 심지어 이들은 장지형(葬地形) 왕호를 채용했던 시기의 왕들로써 국, 천 등의 지명이 미천왕이나 고국원왕 말고도 더 있다. 광개토대왕 역시 업적을 제외한 명칭으로는 국강상왕에 해당한다.[18] 물론 평양에서 안악군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는 편이다.[19] 물론 범위 자체의 논란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집안시내를 둘러싼 곳 만큼은 통구 고분군으로 부르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20] 물론 왕릉급 무덤을 왕릉급이라고 인식할 수 있게 짬찌 무덤도 넓고 많이 분포하고 있다.[21] 막새기와[22] 무령왕릉의 전축분이 대표적인 중국식 묘제를 채택한 사례다. 남조와의 교류의 결과로써 당시 백제는 남조와의 조공관계를 맺어 삼국 중에서도 외교적으로 유리한 입지를 점하고자 하였다. 무령왕의 무덤에는 이러한 정치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23] 대표적으로 개로왕, 책계왕을 들 수 있다.[24] 이정도 역대급 인생을 산 왕은 미천왕 외에는 고려 현종이 있다. 여담으로 현종은 드라마 출연작은 있으나 극에선 정작 현종이 주인공이 아니라 사실 제대로 안 쓴 것과 다름없다.[25] 물론 사극화 한 번도 된 적이 없는 역대 고구려 임금은 미천왕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임금들도 꽤 있으므로 이게 미천왕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미천왕만한 스토리텔링이 있는 군주는 정말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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