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전연의 침입 3.2. 반역 모의 3.3. 평양성에서 맞은 비극적인 최후
4. 북한이 보는 고국원왕 5. 삼국사기에서의 기록 6. 창작물에서
6.1. KBS 대하드라마 근초고왕 6.2. 김진명의 고구려
1. 소개
고구려 왕조 제 16대 임금.
아버지 미천왕이 크게 확장한 영토와 강화한 왕권을 대부분 상실한, 여러모로 아쉬운 군주이다. 그러한 아쉬운 업적만큼 본인 역시 재위 기간 내내 수난과 역경으로 보내다 끝내 전장에서 전사하는 안타깝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비운의 군주이기도 하다.
2. 시호
시호가 여러가지가 전해지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 강상왕(岡上王) : 삼국유사
- 국원왕(國原王) : 삼국유사
- 고국원왕(故國原王) : 삼국사기
- 국강상왕(國岡上王) : 삼국사기
- 강상성태왕(岡上聖太王) : 모두루 묘지명[1]
'강상(岡上)'과 '원(原)'이 같은 뜻으로 보인다.[2] 시호 중 일부가 '국강상(국원)'이었으나 장수왕 대에 수도를 바꾸면서 앞에 '고(故)' 자를 붙인 것이라는 설이 있다. 고국천왕이나 고국양왕도 같은 추측.
삼국사기엔 우리에게 익숙한 '태왕(太王)' 호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태왕호에 여러가지 바리에이션이 있고 삼국사기에 그런 바리에이션의 단편적인 태왕호가 등장한다. 아버지 미천왕부터 고국원왕 때부터 드러나기 시작된다.
3. 굴욕으로 점철된 재위 기간
그의 재위기간은 고난과 역경 그 자체였으며 최후조차 너무 비극적이었다.
3.1. 전연의 침입
후한이 멸망하고 삼국을 통일한 서진(西晉)이 불타오르는 대혼란기를 틈타 미천왕은 옛 고조선 고토를 지배하던 중국 군현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며 고구려의 세력을 서서히 키우면서 주변에 대한 통제력을 늘려나가는 한편, 요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선비족을 공격해 중원을 향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 역시 지속적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선비족이 세운 국가, 전연은 팔왕의 난으로 서진이 혼란스러워지자 굉장한 속도로 주변 세력들을 복속시키면서 세력을 불려나갔고, 결국 중원까지 세력을 드리우는 강국으로 자리매김 함에 따라 고구려에 암운이 본격적으로 드리우기 시작한다.
339년, 고국원왕은 전연과 직접 붙기보다는 일단은 강화[3]를 맺고 340년 태자를 전연에 보내 조회하는 방식으로 외교를 택한다. 그러나 342년 결국 전연은 5만 5천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오게 된다. 이 침공의 의도는 입위장군(立威將軍) 모용한이 전연 황제 모용황에게 올린 발언에서 잘 알 수 있는데, 고구려와 우문선비를 먼저 멸망시켜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훗날 후금이 일단 조선부터 정리(병자호란)하고 중원에 집중한 것처럼, 전연 입장에서는 후방의 고구려가 영 거슬렸던 것.
당시 전연에서 고구려로 가는 길은 북쪽의 평탄한 길과 남쪽의 험한 길이 둘 있었는데, 고국원왕은 정예병 5만을 북쪽으로, 약한 병사들을 남쪽으로 보내 대비토록 하였으나 모용황은 허를 제대로 찔러 주력 부대 4만을 남쪽으로, 그 외 1만 5천을 북쪽으로 보내 양동 작전을 펴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만다. 다행히 북쪽 길에서 방어하던 고국원왕의 동생 고무(高武)의 5만 군대는 건재해 모용황이 이걸 걱정하고 함부로 움직이지 않아 고국원왕 본인까지 사로잡히지는 않았으나 죽은 부왕 미천왕의 왕릉이 도굴당하고, 살아있던 태후 주씨와 왕비를 비롯한 5만명의 포로가 전연으로 끌려가는, 동천왕 이후 최대의 치욕을 당했으며, 고구려를 직접 통치하기보단 재기 불능으로 만들어 신하국으로 삼으려는[4] 전연의 정책에 의해 수도는 철저하게 파괴당하고 만다.
아버지의 시신과 어머니를 인질잡힌 고국원왕은 결국 343년 2월 1,000여 가지 보물을 바치면서 스스로를 신하라고 칭하는 등 눈물겨운 노력을 계속하여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겨우 돌려받게 되었으며 345년에는 남소성을 전연이 빼앗아갔지만 조치하지 않았고, 어머니 주씨 또한 10여년이 흐른 모용준 때 공물을 바치면서 고구려로 돌아오게 한다. 당시 태자였던 소수림왕이 대신 인질로 끌려갔다가 전연이 전진에게 망하면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고국원왕의 태자가 잠시 사신으로 전연에 다녀온 적은 있다. 다만 이 태자도 소수림왕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전연은 고구려의 성을 침공하는 등 이후에도 고구려를 끊임없이 괴롭혔으나, 마침내 370년, 전연이 전진에게 멸망당하면서 전연 황족 일부[5][6]가 망명해오자 그대로 묶어 전진으로 내쫓아버리면서 수 십년 묵은 복수를 조금이나마 하게 된다.
3.2. 반역 모의
삼국사기에는 언급되지 않으나, 모두루 묘지명에는 반역사건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정확하게는 14행에 반역이라는 글자가 기록되어 있으며 15행에 염모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염모라는 인물이 반역사건을 제압했다는 기록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건데 외부의 침입과 더불어 내부의 혼란도 가속화 된 듯 보여진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자세한 사료가 없어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봉상왕을 몰아낸 쿠데타의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이 때까지도 고국원왕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이 상당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방증으로 보인다.
3.3. 평양성에서 맞은 비극적인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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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국원왕에게는 애석하게도 고구려의 불운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으니, 바로 한반도 중부 지방에서 세력을 키우던 백제가 백제 왕조 최대의 먼치킨 근초고왕의 지휘 아래 한반도 남부를 평정하고 큰 세력으로 성장한 것이었다. 이미 미천왕 대에 대방군과 낙랑군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고구려는 대방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백제와 마찰을 겪은 바 있었다.
그런 외교적 문제가 아니더라도 고구려는 원래 눈독들이던 요동 지역을 중원을 휘어잡은 전진이 장악하게 되면서 지금 당장은 도저히 넘보기 힘들어보이니 부득이하게 방향을 바꿔 남쪽으로 확장을 꾀해야 했으며, 백제 역시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남쪽의 마한 세력을 어느정도 자신의 세력권으로 만든 상황이었기에 북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더욱이 한사군이라는 두 세력 사이의 완충 지대가 사라진 시점에서 지금의 황해도 ~ 경기도의 넓은 평야 지대를 차지하기 위한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고국원왕은 선수를 쳤지만, 369년 노구를 이끌고 2만의 군대를 긁어모아 백제 북방의 치양성을 공격하다가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제대로 역관광당했다. 결국 근초고왕이 태자 근구수를 선봉장으로 삼아 함께 371년 3만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 남쪽의 평양성을 공격했을 때 고국원왕은 친히 나가서 전투를 벌이다 어디선가 날아온 눈먼 화살에 맞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승하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 사건 이후 고구려는 백제를 동명성왕이라는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거짓말로 느껴질 정도로 증오하여 백제라는 말 대신 잔인할 잔(殘)[7] 자를 써 '백잔(百殘)' 이라는 멸칭을 사용하였으며,[8] 심지어 후대의 기록이 아닌 고구려인이 직접 새긴 광개토왕릉비에도 백잔이라는 표현이 남아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문서에서 일본과 중국을 쪽발이, 짱깨라고 표현한 격.
결국 백제 역시 100여년 뒤 고구려에게 수도를 함락당하고 당시 왕이었던 개로왕까지 처형당하는 그야말로 처절한 수모를 겪게 되는데, 이때 개로왕이 고국원왕을 죽인 일을 "쇠[9]의 머리를 베어서 달아매었다."라고 모욕적으로 묘사했다는 등의 사실은 고구려와 백제 모두 고국원왕의 전사를 갈등의 시발점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四十一年 冬十月。百濟王率 兵三萬 來攻平壤城。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 薨。葬于故國之原。【百濟蓋鹵王表魏曰『梟斬釗首』 過辭也。】
41년 겨울 10월에 백제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은 군대를 내어 막다가 눈먼 화살[10]에 맞아 이 달 23일에 죽었다. 고국(故國)의 들[11]에 장사지냈다.【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위(魏)나라에 표(表)를 보내기를 『쇠(釗)의 머리를 베어서 달아 매었다.』고 하였으나 지나친 말이다.】
《삼국사기》고구려 본기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전사한 업적(?) 때문에 국사에서는 4세기 백제의 전성기를 드러내는 하나의 예로서 많이 등장한다. 국사를 배울 때마다 그의 업적(?)으로 '전사'가 빠지지 않는 등 하필이면. 사망전대 취급이라 안타깝게 여기는 학생도 있다. 물론 한자 뜻은 다르지만 선생 중엔
(1) 근초고왕을 '원'망하면서 죽어서 고국'원'왕이라는
(2) 고구려국의 원통하게 죽은 왕이라는
암기법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다. 한 글자 차이인 고국천왕과 헷갈리기 쉬워서 만들어진 암기법으로 보이지만, 원망할 때 그 '원'자는 怨(원망할 원)자로 고국원왕의 原(근원 원)자와 다르다는 점은 알아두자.
후대의 일이지만, 고려 원종이 백승현(白勝賢)의 주청대로 왕 자신의 휘를 고대 주나라의 성군 강왕(康王)의 이름자랑 같게 바꾸려다 하필 그 이름이 제 명에 못 죽은(不得其死) 고국원왕의 휘와 같다는 걸 알고 기겁해서 그냥 옛날 이름 그대로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 不得其死라는 표현은 고려사절요에 실제로 사용된 표현이다. 참고로 주 강왕과 고국원왕은 모두 이름이 쇠(釗)이다.
안악 3호분이 고국원왕의 왕릉으로 추정되나 다른 주장도 있다.
이러한 원한은 증손자인 475년 장수왕이 즉위 52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무너뜨린 뒤 개로왕을 처형하면서 풀게 된다.[12] 그리고 이후로도 신라가 진흥왕 때 급부상하기 이전까지는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왕을 죽이고 죽인 원수지간으로서 끊임없이 싸우게 되었다.
4. 북한이 보는 고국원왕
북한의 교과서에서는 고국원왕의 재위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342년에 연나라(전연 - 모용 선비가 세운 나라) 침략군이 모용황의 지휘 밑에 고구려의 환도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태후를 잡아갔으며 미천왕의 시체를 가져갔다.
전연이 고구려를 침공해 미천왕의 무덤을 도굴하는 부분이다. 여기까지는 별 차이가 없다.
고구려는 그후 연나라에서 큰 혼란이 조성된 기회를 리용하여 370년 10월 전연에 대한 총 공격을 개시하였다. 10여일만에 만리장성을 넘어 유주 지역까지 진출하여 악질 관료들을 처단하고 그 지역의 13개군을 차지하고 진을 유주 자사로 임명하였다. 고구려는 376년 초까지 유주 지역에 주둔해있으면서 전연 침략 세력의 잔여 분자들을 철저히 진압 소탕하였다.
유주자사 진의 유물을 통해 고국원왕 대에 유주에 일시적으로 진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백제와의 교전을 살펴보면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첫 충돌은 369년에 치양(배천)에서 벌어졌다. 이때 고구려는 2만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의 치양을 공격하였으나 백제군의 반격을 받아 성공하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371년 10월 3만명의 백제군의 평양성(남평양) 공격을 물리치고…
첫 전투에서는 격퇴되었다고 적혔으나 고국원왕이 전사한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백제를 격퇴한듯한 뉘앙스로 적고 있다.
5. 삼국사기에서의 기록
《삼국사기》 고국원왕 본기
一年春二月 고국원왕이 즉위하다 (331)
二年春二月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내다 (332)
二年春三月 왕이 졸본에서 돌아오다 (332)
四年秋八月 평양성을 증축하다 (334)
四年冬十二月 겨울에 눈이 오지 않다 (334)
五年春一月 신성을 쌓다 (335)
五年秋七月 곡식이 서리의 피해를 입다 (335)
六年春三月 동진에 사신을 보내다 (336)
九年 전연의 모용황이 신성까지 침략해오다 (339)
十年 왕세자를 전연에 사신으로 보내다 (340)
十二年春二月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다 (342)
十二年秋八月 왕이 거처를 환도성으로 옮기다 (342)
十二年冬十月 전연의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략할 전략을 논의하다 (342)
十二年冬十一月 전연의 모용황이 남도로 침략하다 (342)
十三年春二月 전연의 모용황이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주다 (343)
十三年秋七月 평양 동황성으로 천도하고[13] 동진에 사신을 보내다 (343)
十三年冬十一月 눈이 많이 내리다 (343)
十五年冬十月 전연이 침략해 와서 남소성을 빼앗다 (345)
4년 공백 : 345-349
十九年 송황을 전연으로 돌려보내다 (349)
(350-354 : 5년 공백)
二十五年春一月 왕자 구부를 왕태자로 삼다 (355)
二十五年冬十二月 전연이 왕모 주씨를 돌려보내다 (355)
(356-368 : 13년 공백)
三十九年秋九月 치양에서 백제와 싸워 패하다 (369)
四十年 전연이 망하다 (370)
四十一年冬十月二十三日 고국원왕이 죽다 (371)
6. 창작물에서
6.1. KBS 대하드라마 근초고왕
전 KBS 대하드라마 근초고왕에서 고구려 왕 사유로 나온다. 연기자는 이종원. 다혈질적인 성격에 툭하면 물건을 집어던지는 게 취미고 술잔도 자주 깨먹는다. 부여구(근초고왕)를 소금 장수 놈이라고 비하하지만 실상은 자신도 소금장수 아들내미.[14] 사실 미천왕이 소금 장수를 했다는 사실을 잘 알만한 사람이, 그것도 아들(!)이 소금 장수를 디스한다는 것 자체가 정황상으로 볼때 큰 오류다.
자신감 넘치고 오만하기 그지 없으나 고구려에게 있어서는 다크히어로스러운 면도 있다. 과도할 정도로 고압적인 면이 다분하다. 여구의 연인(?) 부여화와 정략 결혼할 모양으로 결국 결혼해 강제로 범하는 식의 하룻밤을 보낸다. 허나 그 마음을 얻지 못해 전전긍긍.
야심이 불타다 못해 넘쳐 거의 극중 최종보스 포지션이었으며 최근 전개에서는 백제의 내란을 지켜보면서(한편으론 조장하며) 얼마나 더 뜯어낼 것인가 고심 중이었다.
헌데 참 묘한게 이 때 고구려와 고국원왕은 이미 전연의 모용황에게 한번 털려 제1왕비가 볼모로 잡혀 가 있는 처지였으며[15] 다시 말해 암울하던 시절. 헌데 여기에 고구려는 어째 그런 기색이 없으니 어찌보면 대체 뭘 믿고 저리 나대냐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할 정도... 사실상 근초고왕에서 끝판왕이 가능한 인물이 고국원왕이다. 역사적 비중으로도 고국원왕 말고는 없다. 그래서 고국원왕에게 더욱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방법밖에 없다..[16] 대신 이상하리만치 대방(지금의 황해도) 영토에 집착한다.
결국 평양성 전투에서 훗날 근구수왕이 될 구수(...)가 쏜 화살을 오른쪽 가슴에 맞고 돌아가시는데, 이걸로는 성에 안 찼는지 결국 성벽 아래로 떨어져서 백제군 진영에 누워서 근초고왕의 훈훈한 간호를 받다가 끝까지 위에서 본 것처럼 광개토대왕을 암시하는 떡밥과 주유 기믹을 양껏 남기고 사망한다.
그런데 정사에서 고국원왕이 맞고 죽은 흐르는 화살, 즉 유시(流矢)는 원래 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화살을 말한다. 고로 근구수왕에게 맞아 죽었다는 설정은 이순신 장군이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총탄 맞고 죽었다거나, 당태종이 양만춘에게 화살 맞고 애꾸가 됐다거나, 해럴드 2세가 윌리엄 1세에게 화살 맞고 죽었다는 설정이나 매한가지. 즉 어디까지나 설정이다. 그리고 고국원왕은 화살 맞은 그날 사망한 것도 아니고 하물며 백제군에게 포로가 되지도 않았으므로 저런 묘사는 확실한 왜곡이다.
6.2. 김진명의 고구려
위에 있는 근초고왕 드라마의 고국원왕과는 180도 전혀 다른 성격이다. 미천왕의 큰 아들로 동생으로 무가 있다. 싸움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이 때문에 보통 고구려의 왕족들은 무예를 우선해 배우는데도 불구하고 무예를 배우지 않았다. 미천왕이 양우의 고향마을로 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때 사유와 무와 같이 가 두 사람의 행동을 보는데 무는 건장한 장정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며 무예에 관해 이야기 하는 반면 사유는 팔다리가 없는 병사들을 어루만져주며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위로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걸 본 을불은 사유를 태자로 책봉하게 된다.
[1] 강상성태왕은 고국원왕이라고 추정만 하고 있다.[2] 일본서기에 고구려식 훈독음이 남아 있다. 누타(香岡) 스(上) 오리코케(王) 고구려에서 둑(언덕)을 토(吐)로 읽으므로 강(岡)과 원(原)이 같다고 볼 수 있다.[3] 한국인문고전연구소에서 출간한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에서는 원문의 걸맹(乞盟)을 '동맹을 요청하자'로 오역했는데, 걸맹은 강화(講和)를 뜻하는 말이다.[4] 고구려를 공격한 목적 자체가 훗날의 병자호란처럼 중원으로 가기 전에 후방을 밟아놓으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청태종도 조선을 굴복시켰지만 멸망시키지는 않았다.[5] 그냥 황족도 아니고 섭정 격인 태부(태재) 모용평이었다.[6] 참고로 이 태재 모용평은 정치가로서의 능력이 영 꽝이어서 전연의 막장 가도를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7] 잔인하다, 사납다, 모자라다 등 온갖 나쁜 의미가 다 들어있는 한자다.[8] 여기서 잔은 殘(남을 잔) 자로, 먹고 남은 밥을 의미하는 '잔반(殘飯)'의 잔 자와 같다. 즉 고구려인들이 백제를 비하해 '백제 떨거지 놈들'이라는 의미로 부른 멸칭이다.[9] 고국원왕의 본명.[10] 유시(流矢). 유탄과 똑같은 의미로, 노리고 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우연히 맞은 것이라는 뜻이다.[11] 고국원왕의 "고국원"이 이 뜻이다.[12] 개로왕의 죽음이 고국원왕보다 더 비참한 것은 일국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에 매장되었는지 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죽임당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를 처형한 이들은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라는 이들로 백제에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친 이들이었다.[13] 고국원왕 본기 및 삼국사기 잡지 중 고구려의 지리에 관한 기록엔 고국원왕이 재위 13년 차에 평양동황성(平壤東黃城)에 옮겨 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성은 고려 서경 목멱산에 있었다고 하는데, 저자 김부식은 이 사실이 믿을 만한지 모르겠다고 기록했다.[14] 이 때문에 당초에는 부여구에 대한 동정심도 있었던 듯하다.[15] 왕비 뿐만 아니라 왕대비도 끌려갔고 부왕의 시신도 털렸다.[16] 드라마에서는 어머니와 제1왕비가 볼모로 잡혀간 사실이 언급되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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