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상(BC37-AD 391)/미천왕 - 고국양왕 (300-391)

<펌> 고국양왕 (384-391)-나무위키

Chung Park 2020. 9. 5. 10:36

1. 개요  2. 생애 3. 삼국사기 기록 4. 대중 매체에서

1. 개요

고구려 제18대 군주

2. 생애

등극한 고국원왕의 아들

17대

18대

소수림왕(少獸林王)

고국양왕(故國壤王)

故國壤王 諱伊連 【或云於只支】 小獸林王之弟也 小獸林王在位十四年薨 無嗣 弟伊連卽位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이름은 이련(伊連)【혹은 어지지(於只支)라고도 하였다.】이고 소수림왕의 아우이다. 소수림왕이 재위 14년만에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아우 이련이 즉위하였다.
ㅡ《삼국사기》고국양왕 본기


고국원왕의 아들이자 소수림왕의 동생. 광개토대왕의 부왕이다. 할아버지형님아들손자가 워낙 거물급이라 묻히는 감이 있지만 소수림왕에 이어 광개토대왕의 정복 사업을 위한 기반을 단단히 쌓았다.

전왕 소수림왕 시절에는 중국이 부견전진이라는 거대 국가가 중국을 장악하고 있어서 요동 방향 진출을 할 수 없었지만, 마침 고국양왕이 즉위한 383년 ~ 384년부터 전진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해 순식간에 무너지고 다시 중국 북부는 혼란이 시작되어 여러 나라로 갈라지던 시기였다. 그리고 고구려와 인접한 요동에는 후연이 건국되는데, 바로 고국원왕 시대 고구려 수도까지 털고 왕릉까지 도굴해갔던 철천지 원수였던 모용선비족이다. 고구려로서는 이들이 자리잡기 이전에 이들을 철저히 밟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서기 385년 6월에 후연을 습격하여 요동, 현도군 2군을 빼앗고 남녀 1만명을 포로로 잡고 개선한다. 태조왕이 처음으로 요동군을 공격한 이래 처음으로 요동을 고구려가 차지해본 것이다. 그리고 후연의 옛 북부여 유민 여암(餘巖)이 385년 7월 요서에서 반란을 일으켜 후연의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그러나 후연의 건국자 모용수의 아들 모용농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반격에 나서 385년 11월에 요서의 여암도 토벌하고 고구려가 차지한 요동 땅도 도로 탈취해갔다. 모용수는 386년 황제로 즉위해 자리를 잡아버렸고 고구려는 요동 진출을 다시 미뤄야 했다. 다만 이 때의 요동 경략은 훗날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전초전이 되었다고 보기도 하고, 요동 주민들을 끌고 오는 등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390년 백제 진사왕이 보낸 진가모의 군대에게 도곤성을 빼앗겼다. 392년에는 불교를 권장하고 종묘 사직을 수리했다. 또한, 당시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태였던 신라로부터 실성인질로 받아 광개토대왕 - 장수왕 대로 연결되는 고구려의 신라 복속 외교를 위한 전초전을 마련했다.[1]

광개토대왕의 원년과 고국양왕의 말년이 겹치는 것은 승하한 후 즉위한 게 아니라 생전에 양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와 비슷한 사례들은 종종 볼수 있는데 태조대왕 또한 왕태제인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으며 진성여왕도 죽기 전에 효공왕에게 물려주고 몇 달 뒤에 승하했으며 조선태종세종에게 양위했다.

3.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고국양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고국양왕이 즉위하다 (384)
二年夏六月 요동군과 현도군을 점령하다 (385)
二年冬十一月 요동군과 현도군을 다시 후연에 빼앗기다 (385)
二年冬十二月 지진이 발생하다 (385)
三年春一月 담덕을 태자로 삼다 (386)
三年秋八月 백제를 공격하다 (386)
三年冬十月 겨울에 복숭아와 자두 꽃이 피고, 소가 말을 낳다 (386)
五年夏四月 큰 가뭄이 들다 (388)
五年秋八月 농작물이 풀무치 피해를 입다 (388)
六年 기근이 들어 창고를 열어 구제하다 (389)
六年秋九月 백제가 남쪽 변경 지역을 약탈하다 (389)
七年秋九月 백제가 고구려 도압성을 침략하다 (390)
八年 신라가 실성을 보내 인질로 삼았다 (391)
八年春三月 불교를 숭상하고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다 (391)
八年夏五月 고국양왕이 죽다 (391)

4. 대중 매체에서

이렇듯 대외적으로 공격적인 확장을 개시했으며, 국가 기반을 착실히 다져 광개토대왕이 정복 사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지만 대중 매체 속에서의 취급은 좋지 않다. 말 그대로 아들인 광개토대왕에게 모든 포스를 잡아먹혔다. 시종 유약하거나 선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기본이거니와 심지어 치세 중에 일궈낸 업적이 태자의 업적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때 광개토대왕은 고작 10대라는 사실.

이렇게 된 이유는 사람들에게 인지도가 떨어져서인데 이전 왕은 한국사를 공부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소수림왕이고 이후의 두 왕이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인지라, 앞뒤로 업적이 밀리는 나머지 잊혀지기 일쑤다(...).

태왕북벌기에서는 고구려의 대장군으로 듬직한 마초적 포스를 보여주었지만, 그다지 큰 비중은 없다. 이 만화부터가 소수림왕의 뒤를 이어 고국양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광개토왕의 작품이라고 소설을 쓰고 있으니... 고국양왕이 왕으로서 한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당하고 있는 상황.

태왕사신기에서는 독고영재가 이 역할을 맡았다. 권력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형 소수림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기에 귀족들에게 휘둘리다가 화천회의 음모로 석실에서 자살하며 이때 석실에 같이 있던 기하가 고국양왕을 살해한 것으로 본 호위 무사 각단이 화천회의 포위망을 탈출해 담덕에게 알려주며 담덕과 기하의 관계가 꼬여버리는 단초가 되어버린다.

근초고왕(드라마)에서는 아역이 소수림왕만 등장해서 '설마 부여화의 아들이 고국양왕이 된다는 막장 드라마를 쓰는 건 아니겠지'라는 의혹을 사다가 평양성 전투에서 무사히 장성한 모습으로 등장해 간신히 모든 의혹을 마무리했다.아버지가 평양성 전투에서 왕족들을 데리고 국내성으로 튀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배우김주환.

뒤이어 방영한 광개토태왕에서는 송용태가 이 역할을 맡았는데 대신들의 내란과 반목에 시달리며 아내를 잃은 이후 아들 담덕에게 왕위를 물려 주면서 허망하게 지병으로 사망한 모습을 보였으니 시청자 입장에서는 "나의 고국양왕은 그렇지 않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모습.

재미있는 것은 송용태는 위의 근초고왕(드라마)에서는 적국인 전연의 황제 모용황이었다는 거다.[2] 포스는 괜찮은 편이지만 그런데 여기서도 그 모용황의 아들 모용수에게 밀리는 역할이라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상당히 묘한 느낌이 들게 하는 캐스팅.

[1] 원래 이 대목에는 '이상 391년조의 기록이 동사강목에는 광개토왕 원년의 것으로 되어있다'는 말이 들어가 있었지만, 사실 당연한 것이다. 고국양왕 말년이 바로 광개토왕 원년이기 때문에... 틀린 건 고국양왕이 신라와 수교한 사건이 391년이 아니라 392년에 기록되어있다는 사실. 한국고전종합DB 동사강목 제2하 임진년조 참조.[2] 게다가 대조영(드라마)에서는 당 태종 역할을 맡았었다.역시 선비족과 혼혈 계통인 당 태종과 그의 아들이 고구려를 멸망으로 몰고 갔음을 생각하면 역시 묘한 캐스팅. 덧붙여 티몬과 품바 한국어판의 품바 더빙을 맡은 사람이다.(...)